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철인왕후(哲仁王后)의 역사적 사료가 부족한 진짜 이유?
드라마 <철인왕후>와는 달리 철종과 철인왕후는 '가까이하기에는 너무 먼 당신'이었다
태, 정, 태, 세, 문, 단, 세, 예, 성, 연, 중, 인, 명, 선, 광, 인, 효, 현, 숙, 경, 영, 정, 순, 헌, 철, 고, 순...조선조 총 27대 왕들 중에 유독히 왕권이 미약하여 솔직히 허수아비에 불과했던 왕들은 단종과 철종이 아니었나 생각한다.
특히 단종은 그의 작은 아버지인 숙부 수양대군(세조)에 의해 몇년간 생명의 위협 속에서 눈치 보며 허수아비 노릇하다가 참혹하게 숙부의 칼에 의해 단명했으며, 철종은 왕좌를 지키며 그럭저럭 14년간 왕으로 삶을 이어갔지만 진정으로 왕으로서 대접을 받은 적인 한번도 없었다.
하여튼 역사적으로나 사료적으로나 봐도 역대 왕들 중 가장 허약하고 미약한 왕으로 대표되는 철종에 관한 이야기를 최근 방송된 역사 퓨전 드라마 <철인왕후>를 계기로 풀어보고자 한다.
지난번 종영된 tvN 인기 역사 퓨전 드라마 <철인왕후>는 드라마의 내용에서의 불거진 역사왜곡문제와 종중의 법적문제 제기 소식 등을 비롯하여 중국 원작가의 혐한 시비 등 여러가지 문제로 인해 드라마 시작부터 매우 시끄러웠었다.
<철인왕후>는 불의의 사고로 대한민국 대표 허세남 청와대 세프 장봉환 영혼이 깃들어 '저 세상 텐션'을 갖게 된 철인왕후 김소용과 두 얼굴의 임금 철종 사이에서 벌어지는 영혼가출 스캔들 드라마이다.
<철인왕후>는 중국판 드라마 <태자비승직기>의 원작 소설가의 혐한 발언과 함께 드라마 등장인물인 철종과 철인왕후 및 그 주변인물들인 안동김씨와 풍양조씨에 대한 사실왜곡도 큰 문제거리였다.
즉, 드라마 <철인왕후>는 중국 웹드라마 ‘태자비승직기’의 리메이크작으로 원작자인 선등이 중국 SNS 및 다른 작품에서 한국인들을 혐오하고 비하하는 행위를 서슴치 않았는데 그는 자신의 다른 소설 ‘화친공주’에서 고려에 대한 멸시나 무시하는 내용이 들어가 있으며, 심지어 해당 내용에서 한국역사에 대한 역사왜곡 행위까지 했다.
사실 우리나라 역사를 왜곡한 것도 상황이 심각한데 여기에 혐한 논란에 대해서 우리 시청자들은 방송 2회 만에 방송 중지시켜달라며 청와대 국민청원까지 등장을 할 정도로 논란은 뜨거웠었다.
드라마 주요 등장인물인 철종(이원범/哲宗, 1831년 7월 25일 ~ 1864년 1월 16일)은 조선 제25대 왕으로 재위 기간은 1849~1864년이며 약 15년간 왕위를 지키다 33세에 젊은 나이에 요절한 왕으로 제대로 자신의 개혁의지를 펼치지 못하고 안동김씨 일파의 세도정치에 밀려 그로 인한 스트레스로 일찍 세상을 하직한 왕중 하나이다.
우리는 흔히 그를 '강화도령'이라 부르며 글도 제대로 읽지 못하는 나약한 왕으로 기억하고 있었다. 그러나 사실 역사와 관련된 사료들을 보게 되면 철종이 그리 어리석은 왕은 아니었던 것 같다.
초기에는 강화도에 유배되고 부모로부터 정식적인 교육을 받지 못해 어떨결(!)에 왕이 된 후에도 장계나 공서를 이해하는데 많은 어려움을 겼었으나 그 후 왕실에 의한 체계적인 왕실교육을 받으면서 그후에는 과거 시험장에서 직접 구술 문제를 내고 채점하였을 정도로 학문 실력이 출중하게 되었다. 조선 후기 대표적 사상가였던 면암 최익현(1833~1906년)을 장원급제로 직접 뽑았다고 하니 꽤 안목도 있는 왕이었다.
조선 25대 왕 철종 인물화 / 철종 초상화
철종은 1831년(순조 31)에 전계대원군의 서자로 태어났는데 전계대원군은 정조의 이복동생인 은언군의 서자로 엄밀히 말한다면 철종은 사도세자의 증손자이다.
그의 할아버지는 정조의 이복동생인 은언군으로 나중에 홍국영과 역모를 꾸몄다는 이유로 사사되고 나머지 식구는 강화도로 유배된다.
40여 년 후 풀려났으나 1844년 철종의 큰형 이원경을 왕으로 추대하려는 역모가 발각되어 또다시 유배되어 큰 형도 사사되고 할머니 송씨와 어머니 신씨도 천주교에 연루되어 함께 사사 당하는 등 철종(이원범)의 가족들은 끊임없는 역모에 연루되어 갖은 핍박과 참살 등으로 풍지박살이 되었다.
조선 25대 왕 철종 비 철인왕후 초상화 / 철인왕후 인물화
그 후 1849년 6월 6일 헌종이 후사 없이 죽자 안동김씨 주류인 순원왕후(순조 비)는 영조의 유일한 혈손인 전계군의 아들 이원범을 왕위 계승자로 지명하여 25대 왕으로 만든다.
안동 김씨 가문은 강력한 힘을 가진 뒷배경이나 가족도 별로 없이 순수한 농촌총각 이원범을 만만한 인물이라 판단했던 모양이다. 이때 그의 나이 19세였다.
이때 순원왕후는 이와 함께 철종 집안과 관련한 기록을 모조리 파기하라고 명한다. 철종 집안이 역모 사건에 연루됐다는 것은 왕위 계승의 정통성에 타격을 줄 수 있어서다.
이로 인해 철종이 왕이 되기 전 행적과 그의 집안에 대한 기록은 거의 남아 있지 않다.
1851년 철종은 안동 김씨 김문근의 딸을 왕비로 맞이하는데 그녀가 철인왕후(哲仁王后 金氏, 1837년 4월 27일~ 1878년 6월 12일)이다.
철인왕후는 왕비가 된 지 8년 만인 1858년 유일한 적장자 이융준을 낳았으나 생후 6개월 만에 알 수 없는 병으로 죽은 후 그 뒤로는 후사가 없었다. 1863년 고종이 즉위하자 왕대비가 되고 1878년 42세에 폐결핵으로 죽음을 맞이한다.
사실 철종에게는 강화도 시절 미래를 약속한 여인이 있었다. '양순'이라는 천민 출신의 여인이다. 갑자기 왕이 되어 한양으로 온 힘없는 원범은 양순을 무척 보고 싶어 했다. 매일 밤 그리워하며 잠 못 이루는 날이 많아졌다.
물론 궁으로 데려오려고도 했으나 당시 세도가인 안동김씨와 풍양조씨 등의 권력자들은 용납하지 않았다. 시골 출신 왕에다가 왕비까지 천민의 피가 섞이는 것은 그들의 체면에 큰 손상을 입히는 일이라 절대 용납할 수가 없었다. 오히려 근심을 없애고자 나중에 독약으로 그녀를 살해하고 만다.
백성의 고단함을 직접 경험한 철종은 이러한 현실에 더욱 힘들어했다. 자신이 할 수 있는 일이 거의 없었으며 하고자 해도 힘이 부족하여 자신의 의지나 뜻을 관철시키지 못했다.
훈련도감을 통해 궁궐 수비를 강화하려고 했고 삼정(전정, 군정, 환정)의 문란으로 발생한 농민 봉기에는 그 고을 관료들을 처벌하여 기강을 세우려고도 했다.
후에 자신의 강력한 의지로 삼정이정청을 설치하여 조세 개혁을 통해 백성의 안정을 꾀하려 하지만 지배층들인 안동김씨와 풍양조씨 문중의 저항으로 결국 실패하고 만다.
이처럼 무너져 가고 있는 왕권을 강화하여 온갖 비리로 문란해진 당시 정치상황을 강력하게 개혁하고자 하는 자신의 의지를 지속적으로 무너뜨리는 안동김씨 문중의 세도정치에 의한 정치 상황에 대한 압박과 그가 진정으로 사랑했던 양순에 대한 슬픔이 복합적인 우울증을 발병케 했고, 후사를 얻기 위한 과도한 약재 음용은 육체를 망가트려 결국 그는 34살의 젊은 나이에 눈을 감게 된다.
철종의 비인 철인왕후(哲仁王后, 1837년 4월 27일 ~ 1878년 6월 12일)에 대한 역사기록은 매우 우호적이다. 야심 많은 캐릭터로 그려진 드라마와 달리 실제로는 조용하고 정치에 관여하지 않았으며, 효심이 깊은 현모양처였다고 한다.
돈녕부영사 영은부원군 김문근(金汶根)과 흥양부부인 여흥민씨 사이에 1남 1녀 중 장녀(남동생 김병필)로 태어난 철인왕후 김씨는 본래 그녀가 왕비가 된 것은 안동 김씨 집안이 권력을 독점하기 위해 비가 없던 철종에게 자기 집안의 사람을 왕비로 맞아들이도록 해, 당시 조정을 장악하고 자신들의 비리를 고착화시키고 부를 축적시키기 위한 의도였다.
철종이 승하한 후 고종 때에 대비(大妃)가 되었고, 1878년 창경궁 양화당 에서 42세로 죽었다. 철인왕후는 평소 친정을 두둔하지 않았고 정치에 관여하지 않았으며 말이 적고 자신의 감정을 내면에 쉽게 드러내지 않았다.
15세 어린 나이에 왕비가 된 철인왕후는 당시 조선 최고의 금수저였지만 비운의 삶을 살다 간 여인이었다. 양순을 잊지 못하는 철종을 바라보며 안타까워했고 집안과 남편 사이에선 늘 긴장해야만 하는 처지였다. 다행히 그녀는 정치에는 일절 관여하지 않았고 말수가 적은 조신한 여인이었다.
그러나 다른 기록에서의 철인왕후는 그녀의 친정인 안동김씨의 세도정치를 지속적으로 옹호하다가 끝내 철종에게 신임을 잃고 이로 인해 철종은 죽을 때까지 철인왕후를 다시 찾지 않았다는 얘기도 있다.
한편으로는 그녀는 남편(철종)이 요절해 27세에 미망인이 됐고, 둘 사이에 낳은 하나뿐인 아들도 생후 6개월 만에 잃는 등 불행한 개인사를 보냈다.
결론적으로 철종과 철인왕후, 둘 모두 왕과 왕비라는 명예는 얻었으나 그에 반하여 짧은 생존기간동안 불행한 생애를 보냈다.
만일 철종이 왕이 아닌 강화도령 이원범으로 강화에 계속 살면서 연인 양순과 소소한 행복을 누리며 평범하게 살았더라면 나름대로 자신만의 삶의 가치를 찾으며 행복하게 살았으리라 생각하고 그의 비 철인왕후 또한 권력가의 집안이 아닌 일반 양가의 규수로 태어났다면 왕비로서 스트레스 안 받고 나름 시대에 맞는 행복한 여인이 되어 모범적이고 가장 안정된 삶을 이어갔을 것이다.
그리고 철인왕후는 당시 세도가문이었던 안동 김씨가 배출한 마지막 왕후였다. 안동 김씨는 19세기에 순원왕후(순조)-효현왕후(헌종)-철인왕후(철종) 등 연달아 세 차례 왕후를 배출하며 세도정치의 중심이 됐다. 철인왕후의 부친 김문근도 왕의 장인이 되면서 호위대장·훈련대장 등의 군사 요직을 맡아 권세를 휘둘렀다.
1863년 철종이 죽고 이하응의 아들이 고종으로 즉위하자 드디어 왕대비가 되었다. 그 후 42세가 되던 해인 1878년 창경궁 양화당에서 폐결핵으로 사망했다. 존호는 명순휘성정원수녕, 휘호는 경헌장목, 전호는 효휘이다. 능은 고양의 헌릉이다.
철인왕후는 조선 왕실의 마지막 '대비'로 철인왕후 다음의 왕비들인 명성왕후나 순명왕후 등은 왕인 남편보다 먼저 세상을 떠났으며, 그 다음인 순정효황후는 조선의 마지막 왕비이자 대한 제국 최후의 황후다.
그동안 역사적인 인물을 다룰 때 철종은 중요한 인물에서 비켜져 있을 정도로 병약하고 무능(!)한 인물로 취급당했으며, 그와 함께 왕비인 철인왕후도 마찬가지였다. 그래서 그런지 다른 왕후에 비해 자료가 그리 많지 않은 편이다.
특히 남편인 철종부터 드라마나 사극에 잘 등장하지도 않는다. 설령 철종이 등장하더라도 조연 또는 단역 수준으로, 안동 김씨나 풍양 조씨 가문의 세도정치 시기 고통받는 민초들에 초점이 맞춰졌을 때 잠깐 얼굴만 비춰지거나 고종의 즉위 직전에 골골거리다가 사망하는 역할로 나온다.
그러한 입지로 인해 철인왕후도 사극에서 관심의 대상이 아니며 자주 등장하지도 않았다. 그에 반해 작년인 2020년부터 2021년까지 4개월 간 tvN에서 방영한 토일 드라마 <철인왕후>에서 남편인 철종과 함께 주인공으로서 재조명된 것은 매우 이례적이라고 볼 수 있다.
참고로 남편 철종처럼 젊은 나이에 요절한 철인왕후와는 달리 신정왕후 조대비는 무려 83세까지 생존하여 그 당시 왕족이나 왕대비로는 가장 오래 생존해 고종 비였던 명성왕후보다 불과 5년 전에 사망한 조선 역사상 제일 장수한 왕비로 알려져 있다.
참으로 역사라는 게 힘의 논리에 의해 이뤄지다 보니...드라마 내용과는 달리 실제로는 조선 25대 왕이었던 철종과 철인왕후 모두 기구한 생을 살았던 것 같다.
그리고 아이러니하게 당시 철종의 시대적 정치상황을 보고 있노라면 200년 후인 요즘시대 현재의 대한민국 정치의 중심점이라 할 수 있는 현 정치상황과 매우 흡사한 것을 느낄 수 있다.
이에 대한 역사적 판단은 후세의 몫이라고 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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첫댓글 철종과 철인왕후 등 당시의 역사를 이해하는데 좋은 정보 되시길 기대합니다. 감사합니다.
귀중한 정보 덕분에 잘 보고 갑니다. 대단히 감사드립니다/
오늘도 힘내시고 파이팅하십시요~^^
대단히 감사합니다.
많은 정보가 되었답니다.
감사합니다.
철인왕후에 대한 자세한 정보 많은 도움이 되었다고 봅니다.
정말 감사드리며, 앞으로도 좋은 정보 잘 부탁드립니다.
좋은 의견 대단히 감사드립니다. 항상 중국산 코로나19 바이러스 감염병에 감염되지 않도록 유의하시길 바라며 그럼 좋은 하루 되세요.~^^
대단히 감사합니다.
항상 건강하시고 파이팅하십시요
감사합니다~^^
너무 유용한 정보 랑상 감사드립니다. 많은 도움이 되었다고 생각합니다. 수고하세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