고 육영수 여사님
충청북도 옥천출신으로서 종관(鍾寬)과 이경령(李慶齡) 사이의 차녀이다. 옥천읍내 죽향국민학교를 마치고 상경하여 배화여고를 졸업한 뒤 옥천여자중학교 교사로 근무하였다. 1950년 전란으로 부산에 피난중일 때 육군 중령 박정희와 혼인하여 슬하에 1남2녀를 두었다. 1961년 박정희장군이 5.16 군사 혁명을 주도하여 성공한 뒤 1963년 10.15총선거에서 6대 대통령에 당선되고 연임됨에 따라 대통령 영부인으로 11년간 내조하였다.
만년의 공직은 양지회(陽地會) 명예회장과 자연보존협회 총재였으나, 평소 재야 여론을 수렴하여 대통령에게 건의하기를 계속하는 가운데 '청와대 안의 야당'이라는 말도 들으며 남산에 어린이회관을 설립하는가 하면, 서울 구의동 일대에 어린이대공원을 조성하고 정수기술직업훈련원 설립을 비롯하여 재해대책기금조성과 정신박약아돕기운동 등 그늘진 곳을 직접 찾아다니며 사회복지사업에 분망한 일과를 보내었다. 어린이 잡지 '어깨동무' 창간과 서울대학교 기숙사 정영사를 건립하였다. 경향 각처의 여성회관 건립은 물론 연말마다 고아원, 양로원을 위문하여 따뜻한 구호의 손길을 미쳤고, 전국 77개소의 음성나환자촌까지 일일이 순방하면서 온정을 베풀었다.
1974년 8.15 광복절 기념식이 열린 서울국립극장 단상에서 문세광(文世光)에 저격당하여 서거하셨다. 박정희대통령 저격사건에 희생양이 된 격이어서 애도 인파가 청와대에 연일 쇄도하였는데, 국민장영결식이 8월19일 오전10시 중앙청(현 국립중앙박물관) 광장에서 각국 조문사절과 내외인사 3,000여명이 참석한 가운데 엄숙하게 거행되고 이날 오후 국립묘지에 안장되었다. 묘비는 백일탈상 하루 전인 1974년 11월21일에 제막되었으며, 이듬해 기념사업회도 발적되어 추모책자를 펴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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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https://img1.daumcdn.net/relay/cafe/original/?fname=http%3A%2F%2Fwww.parkch.com%2Fupload%2FEX01-1.JPG) | 육영수 여사는 1925년 11월 29일(음 10월 14일) 충북 옥천군 옥천읍 교동리 덕유산기슭 육종관씨와 이경령 여사사이의 1남 3녀 중 둘째딸로 태어났다.
육여사의 아버지 육 종관씨는 성실한 독농가로 인근에 이름이 알려진 보수적인 토호였다. 한편으론 미신타파, 근대문명에 대한 깊은 동경과 신지식에의 민감한 반응, 과학적인 사고방식과 기계류에 대해 남달리 관심이 많았다. 또한 육여사의 어머니 이경령 여사도 후덕한 마음씨에 많은 식솔들을 거느리며 큰살림을 해내는데 조금도 빈틈이 없는 분이었다. 이경령 여사의 태몽은 '집마당으로 기어든 거북을 안고 안방으로 들어온' 것이었다. 남달리 우애가 깊었던 형제는 오빠 육인수와 언니 육인순(72년 작고)여사, 동생 육예수 여사였다.
어릴 때부터 '마음 착한 교동집 작은아씨'로 이름이 나 있었던 육여사는 진흙 속에 물들지 않은 군자의 기품을 지니고 있는 연꽃, 철 따라 피어나는 꽃밭의 꽃들, 그리고 뒤뜰의 백년이 넘은 아름드리 은행나무, 감나무 속에 묻혀서 꿈 많은 소녀시절을 보냈다.
육여사는 소녀 때부터 바느질 솜씨가 뛰어났다. 동생의 옷을 지어 주기도 했다. 얌전하고 예의바른 육여사는 다락에 가득 쌓인 현금 관리를 맡았기도 했던 살림꾼 아버지의 총애를 받기도 했다.육여사는 8세에 죽향 국민학교에 입학했다. 급우들은 모두 육여사보다 한 두 살, 많으면 5, 6세 위였다. 제일 나이가 어렸고 키가 작은 육여사는 항상 앞자리에 앉았다. 비교적 말수가 적고, 온순했으며 언제나 웃음이 떠나지 않는 얌전한 학생이었다.
육여사는 다른 학생들에 비하여 부유한 가정이었으므로 학용품도 넉넉했다. 육여사는 가난한 집의 아이들이 연필이 없으면 거의 새 것이나 다름이 없는 연필을 주는 것이 예사였다. 그래서 친구들 사이에서도 인기를 독차지했다.
공부가 끝나고 청소를 하게 되면 누구보다도 열심히 청소를 했다. 책상을 반듯하게 정돈하거나 유리창에 손자국 하나 없이 꼼꼼하게 닦아 놓고서야 집에 가는 것이었다. 육여사의 학교 성적은 45명중 언제나 5등 이내였다. 특별히 어느 한 과목에 치우치지도 않고 전과목에 걸쳐 고루 성적이 좋았다.
죽향 국민학교를 졸업할 무렵 육여사는 친구들에게 장차 '교사가 되겠다' 는 꿈을 말하기도 하여 그 착하고 아름다운 인품을 소녀시절부터 보여주었던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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육 영수 여사는 1938년 죽향 국민학교를 졸업하고 서울 배화고등여학교에 6대 1이라는 높은 경쟁을 거쳐 입학했다. 충청도에서 온 학생으로는 유일한 입학생이었다. 육여사는 시골 국민학교를 졸업하고도 치열한 경쟁을 거쳐 입학했다 해서 1학년 때부터 공부 잘하는 학생으로 선생님들의 귀여움을 받았다. 육여사는 몸가짐이 늘 단정했다. 당시 여학생들은 주름치마를 입었는데 주름이 한번도 펴진 것을 볼 수 없었다. 특히 육여사는 머리숱이 많았지만 항상 곱고 단정하게 빗은 모습이었다.
성격이 차분한 육여사는 늘 조용한 미소를 짓는 얌전한 학생이었다. 친구들과 다툰 적도 없었다. 너무나 순진하여 소풍을 가 노래를 시키면 숨어 버리고 마는 성품이었다. 또한 자신을 내세우는 법이 없었다. 언행이 겸손하고 검소해서 육여사가 옥천의 부잣집 딸이란 사실을 졸업할 때까지 모를 정도였다.
이렇게 얌전한 모범생이었던 육여사는 웃어른의 말을 거역하는 일도 없었다. 졸업기념 수학여행을 일본으로 떠나게 되었을 때 어른들이 허락을 해주지 않아 가지 못했다. 그러나 육여사는 어른들을 원망하거나 불평을 하지 않았다.
육여사는 재봉과 수예에 뛰어나 전학년에서도 으뜸이었다. 그래서 선생님과 친구들로부터 곧잘「시집가서 잘 살겠다」는 칭찬을 듣기도 했다.
졸업을 하자 육여사는 옥천으로 내려갔다. 그리고 집에서 가사를 돌보고 있었다. 그런데 옥천여학교에서 선생으로 나와 달라는 부탁이 왔다. 육여사는 청을 받았을 때「자신이 없는데 어떻게 가르칠 수 있을까」하고 망설였다. 매사에 조심하는 여사로서는 당연한 걱정이었다. 그러나 학교에 나간 지 얼마 안되어 학생들은 육여사를 무척이나 따르고 좋아했다. 학생들은 다정하고 친절한 그리고 상냥스런 육여사를 존경하지 않을 수 없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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고 육영수 여사님의 유작
1969.10. 5 대통령부인배쟁탈 부산시대학 종합체육대회 |
이 휘호는 충남 당진읍 소재 호서중고등학교에 내린것으로 '남을위해살자' 특히 여사의 봉사와 자애정신의 상징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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마지막 남기신 휘호. 부산어린이회관 어린이 예찬비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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피난시절을 회상하며 쓴 육영수 여사의 수필 |
영도다리 아래로 잔잔한 파도를 내려다보며 얼마동안은 넋빠진 인형모양 혼자서 깊은 생각에 잠겨있던 17년전 7월 하순 그 어느 날. 동족끼리의 처참함. 6.25동란으로 나도 나의 고향산천을 뒤돌아보며 4식구의 책임을 지고 부모님은 옥천에 남아 계신 채 헤어져 남하하지 않으면 안되었다.
부산이란 곳은 난생 처음이요, 어느 누구에게 의지할 곳 없는 곳이었다. 혼자서 이곳저곳을 헤매다니다, 방이라고 얻어보니 또한 말로만 듣던 영도섬이란다.
뒤늦게 남하하시겠다던 부모님을 맞이하기 위해 매일같이 영도에서 초량 부산진역 등을 막연히 찾아 헤매며 애타는 초조감과 긴박감 속에서 오로지 국군의 승리만을 기원하며 불안에 싸였던 그때, 다리난간 아래로 푸른 바다를 내려다 보고만 있던 나에게 인내라는 두 글자가 새로워졌다. 참고 견디며 노력하면 광명은 다시 찾아 줄 것만 같아 지쳤던 나에게 순간적으로 미약하나마 새로운 용기가 되살아남을 느꼈다. 인내는 무위(無爲)가 아니며 또한 무능(無能)도 아닐 것이다. 인내는 달성을 위한 노력이요 성취를 위한 진통이 아닐까. 때가 성숙될 때까지 피나는 노력을 계속하며 가진 고난을 극복해 나가는 인간의 존엄성.
노력이란 후일에 그 성과의 비중도 중요하겠으나 노력한다는 그 자체가 더욱 귀중하게 생각된다. 이것은 마치 머리가 우수하여 노력하지 않고서도 성적이 좋은 어린이보다는 보다 좋아지려고 꾸준한 노력을 아끼지 않는 어린이의 모습이 보다 슬기롭고 소중하게 여겨지는 것과 같다. 이 정다운 파도도 그 어느 때에는 노도로 변하여 생명과 재산을 잔인하게 삼켜버려 사람들의 가슴마다 뼈저린 상처를 남겨주었겠지만 그 자연의 위력도 지금은 저 바다 속 깊은 곳에서 선량해지고저 인내로서 노력을 하고 있는 것이 아닐까 하는 부질없는 생각도 해보았다. 그때의 걷잡을 수 없던 불안과 빈곤을 그 영도 다리 난간에서 무아(無我)의 심정으로 생각 아닌 생각에 잠기어 찾은 인내로써 극복했음은 오늘에 이르기까지 항상 내 머리속에서 사라지지 않는다.
용기있는 사람은 인내할 줄 알며 지혜로운 사람도 인내할 줄 알고 선량한 사람 또한 인내할 줄 알 것이다. 대한민국의 국권회복도 민주국가의 수립도 동란으로부터의 승리도, 후진국에서 선진국으로, 빈곤에서 풍요한 사회로 진보하는 것도 이 모두가 우리 겨레의 인내와 노력에서 이루어졌고 또 이루어져 가고 있지 않은가.
특별히 참고 견디어 크게 내 뜻을 이루어 본 일도 없고 그로 말미암아 자기가 지닌 괴로움을 잊을 수 있다고 확신할 수 있는 기적도 없기는 하나 역시 참고 견디어 후회해 본 일 없고 앞으로도 결코 없을 것이다. 현재도 또 후일에도 인내와 노력 그리고 성실만은 나의 신조요 가장 가까운 벗이고 단 하나의 위안이며 나의 축소된 과거 기록이기도 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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