침소에 든 황제는 침상 기둥에서부터 바닥까지 드리워진 가림막을 걷고, 그를 기다렸을 광경을 한동안 지켜보았다. 침상 가장자리에 앉아있던 어린 귀비였다. 앳된 얼굴에 곱게 발린 화장, 틀어 올린 머리에 꽂힌 화려한 장신구, 그리고 붉은 대례복. 여느 후궁과의 혼례와 다르지 않은 치장이었다. 그러나 다른 이들과 다른 점이 있었다.
영귀비는 인기척에도 미동 없이 앉아있었다. 살포시 고개를 들어 눈을 맞춰오지도, 그렇다고 몸 둘 바를 모르고 안절부절못하지도 않은 채였다. 긴 소맷자락에 가려진 두 손은 얌전히 무릎 위에 얹어 모아두고, 살짝 내리깐 시선은 바닥을 향해 있었다. 오로지 몇 초에 한 번씩 깜빡이는 눈꺼풀만이 그녀가 박제된 물건이 아니라 살아있는 생물이라는 사실을 알려주는 행위였다.
그 모습을 보며,
서위재는 답을 찾고 있었다.
그가 기초요를 황궁에 들인 까닭을.
기목협에게 자작의 작위를 하사하며 서위재가 납품받은 것은 기초요 하나가 아니었다. 기목협이 가진 교역로, 이를 통해 창출되는 갖가지 재화와 정보를 언제든 이용할 수 있는 편리성. 황제의 입맛에 맞게 고분고분 이용당해 줄 조건이라면야, 천우의 혈족에게 말단의 작위 정도는 허락하기 까다로운 것이 아니었다. 그러니 여식의 이름자까지 고쳐 쓰며 거래의 신표로 내미는 자작의 행위는 그저 거추장스러우니 거두라 하면 그만이었다. 이 제국에서 황제에 대한 배반은 곧 반역이니, 충정이 의심스러워지면 작위와 함께 목숨까지 거두면 그만이므로.
기초요와 숲에서 우연한 만남을 가진 그날, 서위재는 기랍비를 떠올렸다. 어째서인지 명확하게 짚어서 정의할 수 없다는 점이 그의 마음에 들지 않았다. 천우의 성씨? 그건 기목협의 딸이라고 소리 내어 답하기 전엔 알지 못했던 사실이다. 아리따운 얼굴? 스무 해가 훨씬 넘도록 찾아다닌 그 여자 얼굴과 이제 스물둘 먹은 이 처녀애 얼굴에서 젊은 시절의 공통성 찾아내는 순간이 유별날 일인가.
하나 오래 고심할 필요가 있을까. 액정에 널린 것이 그를 위해 온몸 바치는 진상품들이었다. 그중 하나로 여기면 그만이었다. 서위재는 기초요의 머리에 빼곡하게 꽂힌 머리 장식들을 하나씩 뽑아내며 침상 곁 협탁 위에 올려두었다. 시체에 꽂힌 검을 뽑는 편이 어울릴 법한 손속은 제법 우아해서 일견 다정하게 느껴질 정도였다.
그러나 기초요는 그 이질감 섞인 손길에 속지 않았다. 진정 다정함 담은 손길을, 그런 것을 이미 느껴본 적이 있기 때문이었다.
옷고름을 풀어내는 손길에 그녀의 심장은 곤두박질치고 있었다. 평정을 가장하고 있었으나 실은 황제가 입실한 순간부터였다. 이상하지, 정체 모를 이도 아니고 예상치 못한 습격도 아닐진대 지난해의 그 괴한이 자꾸만 떠오르는 것은. 감히 황제가 하는 일에 어떤 것도 거부해선 안 되며 무엇을 하게 되든 승순承順과 권복勸服을 다하라 당부도 받았는데, 일생 자신을 지켜본 이들에게도 난생처음 맞닥뜨린 이들에게도 언질 받은 내용이 하나같이 동일하였건데…….
그럼에도 이 우아한 손길을 뿌리치고 이 방을 뛰쳐나가 연인에게로 달려가고 싶었다.
살아온 모든 날 동안 여태껏 해본 적도 없고, 인제 와 행할 수도 없는 주제에.
겹겹의 자락들이 제각각으로 흩어지고 마침내 얇고 투명한 라사羅紗로 지은 설의亵衣가 드러났다. 설의는 네모난 천이 마름모꼴로 가슴과 배를 가린 말흉抹胸으로, 등을 훤히 드러냄과 동시에 목덜미와 등허리에 그 매듭이 묶여 있는 형태였다. 황제가 그 매듭을 당겨 푸는 순간, 그와 동시에 귀비의 양손이 반사적으로 제 가슴께로 올라가 설의를 감싸 쥐었다. 피부를 가린 마지막 천이 흘러내리는 것을 막듯이.
아무런 나무람 없이 황제는 검지 끝으로 귀비의 턱을 들어 올렸다. 아래로 숙여만 있던 귀비의 시선이 드디어 위를 향했다. 그러자 미동 없는 듯 보였던 귀비의 얼굴에 눈꺼풀 외에 다른 움직임도 있었음이 드러났다. 귀비의 떨리는 눈빛은 초야의 설렘이나 승은의 기쁨 혹은 유혹의 의도, 그중 무엇에도 해당하지 않아 보였다. 앙다문 입술과 턱 근육의 미세한 움직임은 불경한 말이 샐까 간신히 틀어막고 있는 것처럼 보이기도 했다.
서위재는 마치 먹이를 눈앞에 둔 포식자처럼, 입 안에서 혀끝을 굴려 자신의 치열을 훑으며 생각했다. 알 것 같은데. 이 불순한 눈동자. 그의 순정에 응하지도 사랑하는 눈빛으로 바라보지도 않던, 아무리 다정하게 사랑을 속삭여도 더러운 말을 들었다는 양 그를 거절하는 기색으로 그의 심장에 칼을 꽂던 그 눈동자. 그가 아닌 다른 남자를 사랑하고 있다는 사실 때문에—그래서 그 남자를 죽이고도, 거기에 세상 무엇이든 가질 수 있는 권력을 틀어쥐고도 되찾지 못한……가질 수 없었던 단 하나, 그 여자.
“이제 알겠구나. 어디가 닮았는지.”
그 여자의 눈처럼 나를 보는구나. 깨달음과 동시에 황제의 가슴이 열화로 뜨거워졌다. 권력에 굴복하여 복종의 증표로 이 궁궐에 발 들인 주제에, 그리하여 사슴처럼 움츠려 떨고 있는 주제에, 그런 주제에 감히…….
분노란 뜨거울수록 차갑게 표출되는 법이라. 서위재의 손끝에 남아있던 일말의 자비가 자취를 감췄다. 곧장 귀비를 밀어 그녀의 앉은 자세를 무너트린 그는 침상 위로 흐트러진 귀비 위로 올라타, 그녀가 붙잡고 있던 천 조각을 빼앗아 던졌다. 귀비의 신체가 다시금 움츠러들었다. 양팔은 가슴을 가리듯이, 허벅다리는 내밀한 입구를 막듯이, 각각 교차하듯 오므려지는 그 동작들은 맞닿아있던 황제의 촉각을 비껴갈 리 없었다.
“자작이 짐을 기만하였구나.”
아까보다 한층 낮아진 목소리에 앙다물고 있던 귀비의 잇새가 떨렸다. 두려움에 떠는 귀비의 시야에 담긴 것은 황제의 얼굴이었다. 양 눈썹의 높낮이를 달리하며 일그러진. “순종적이고 순결하게 키운 처녀라 하였는데.” 이어 귓가에 들려온 속삭임은 “아니로구나?” 진정 궁금해 묻는 말이 아니라 확신이었다. 귀비는 무어라 반박하려 입술을 조금 벌리다가 멈췄다. 목소리가 나오지 않았다.
무슨 말로 변명해야 하나. 지적할 부분이라고는 자작이 황제를 기만했다는 지점뿐이었다. 세상이 모르는 비밀을 품고 황제를 기만한 사람이 있다면 오직 자신이었다. 순종적으로 키워졌으나 지존에게 바칠 성심 대신 다른 남자를 향한 연심을 품은 채로 이곳에 왔다. 순결하게 키워졌으나 그 순애는 이미 다른 남자에게 주었다. 그러니,
“부, 부친은, 잘못이 없사옵니다….”
떨리는 음성으로 간신히 더듬은 변호는 그녀의 부정함을 스스로 고백하는 꼴이었다. 차라리 하지 않는 편이 나았을지도 모를, 순진하여 그만큼 어수룩한 변명이었다.
“언제부터 천우에 배신자의 피가 흐르던가?”
황제가 뱉은 말은 의미를 알 수 없는 말이었다.¹ 애초에 둘 사이엔 정략의 형태로 맺어진 혼례라 하기에도 민망할, 그저 납녀의 예식 외엔 아무것도 없었다. 복종적인 삶에 묶여 살아온 기초요는 그것을 거부하지 못하여 궁에 들었다. 고결하고 충직한 서녕 기씨 중의 그 누가 또 황제의 심기를 거스르는 짓을 했었단 말인가. 이 남자는 대관절 자신을 내려다보며 누구를 지칭하고 있는 것인가. 아무것도 이해할 수 없는 기초요는 그저 혼란 섞인 눈으로 황제의 얼굴을 올려다보았다.
“감히, 거스르지 마라.”
황제의 손끝은 그렇게 공포에 떨고 있는 귀비의 귓가부터 턱을 지나, 목과 쇄골을 따라 아래로 내려갔다. “네 의무는 다해야지 않느냐. 아니면…….” 가령 황제의 총애를 받는 후궁이라 할지라도 황후가 아닌 이상은 그저 첩. 궁의 첩이란 황제의 욕구를 해결하고 자손을 번식시키는 역할이므로, 지위의 고하를 막론하고 출산의 도구 그 이상이 아니었다. “불손한 것을 내 앞에 들이민 네 아비의 목을 칠까.” 귀비는 눈시울이 뜨거워지는 것을 느끼며 온몸에 잔뜩 들어가 있던 힘을 천천히 풀었다.
그녀의 이완을 달리 부른다면 체념이라 읽으리라.
노기怒氣를 띤 황제는 그 어떤 전희도 없이 폭력적으로 어린 귀비를 안았다. 너는 결국 어느 쪽이 될까. 기랍비처럼 내게서 도망치다 끝내 내 손아귀로 돌아올 쪽일까, 아니면 초홍리처럼 순순히 그 여자의 대용품 역할이나 하다가 평생 이 궁에 갇혀 죽는 쪽일까. 귀비의 하얀 몸피가 울긋불긋하게 물들고 건조한 내벽이 거칠게 쓸리며 붉은 체액 흘리는 동안, 교성 없는 침소에는 성대를 지나는 바람 소리 같은 것만 고통에 찬 신음 되어 간간히 새었다.
¹배경 스토리 | 죽음으로 구원하사 - 인용 및 변용
2
황궁 밖의 사람들은 찬란한 궁궐과 그곳을 오가는 사람들의 화려한 복색을 보며 저곳이 극락이리라 상상하곤 할테지만, 실상은 달랐다. 후궁들의 일상은 갖가지 규정에 맞춰진 많은 일들로 가득 채워져 있었다. 황제의 부름을 받았건 아니건, 매일 아침 묘시의 시작5시 30분부터 기상하여 손질을 시작해야 했다. 머리 손질이며 화장이나 의복을 갖춰 입는 데까지 많은 품이 들어 적어도 반시진은 소요되었다.
작금의 황궁에는 태후 같은 황실 어른이 없으니, 후궁들이 아침 문안인사를 올릴 대상은 황후에 그쳤다. 본래의 수순은 아침 문후가 끝나면 처소로 돌아와 식사를 하고, 식사를 마치면 모시는 상급 비빈을 모시고 말동무가 되어주는 것이었다. 그러나 기초요의 나이가 다른 후궁들에 비해 어리다고 해도 그녀보다 상위 계급을 가진 비빈이 없는데다, 이 또한 의무는 아니었다.
영귀비가 입궁한 시점은 신원불명의 황귀비가 존재하기 이전이던 10월, 같은 계급의 후궁조차 살아있는 이는 애목 련귀비 석위지 한 사람 뿐이었다. 어찌되었건 한 지붕 아래 함께 살고 있는 사람들과 좋은 관계를 유지하는 것이 필요하다는 부친의 당부가 있었기에, 또한 그것을 챙기는 양양의 재촉이 있었기에, 기초요는 황제와 초야를 치른 바로 다음날 오전에 련귀비의 처소에 궁인을 보냈다. 방문해도 좋겠는지를 묻기 위함이었다.
내심 오지 말라는 답을 기다렸으나 안타깝게도 련귀비의 답은 그러라는 허가였다.
아무도 알지 못하는 혼자만의 비밀이 계속해서 그녀의 가슴을 쿡쿡 찔러왔다. 사가 시절 미색에 대하여 논하는 사람들의 입에 무수히 오르내린 그 이름. 이 제국 내에서 미인을 평할 때면 그보다 더한지 덜한지가 기준이었던 이름. 한때 귀공녀 보타의 미명을 드높이는데 이용되었던 그 이름. 이제는 세상에 없는 다른 후궁들과는 다르게 이례적으로 황제의 총애를 오래도록 받아왔다는 그 사람,
당신의 어머니.
그날 오후, 련귀비의 처소에 들어 인사를 건네고 자리를 안내 받은 초요는 련귀비의 얼굴을 보며, 처음 보는 사람인데 어디선가 본 적이 있는 것 같은 기분을 느꼈다. 그러다 연인의 이목구비와 닮은 구석들이 하나씩 짚이는데 정신이 팔렸다. 설원 같은 피부, 깊은 눈동자, 조각같은 이목구비……. 해야할 말을 잊고 상대의 얼굴을 빤히 바라보고 있자니 틀림없는 결례였다. 그런 그녀를 현실로 깨워온 것은 양양이었다. 교전비가 련귀비를 위해 단림성에서부터 올라온 선물을 내밀었다. 자작 랍명이 입궁하는 여식의 짐보따리에 함께 얹어 보낸 것들 중 하나였다.
“아, 송구합니다. 마마께서 너무도 아름다우셔서 잠시 드릴 말을 잊고 실례하였습니다. 부친께서 련귀비 마마의 아름다움에 어울릴 좋은 비단이라 전하고 싶다셨는데, 받아주셨으면 합니다.”
사람들은 눈에 보이는 것, 가까이 있는 것을 믿는다. 그러니 기초요를 석위지보다 아름답다 과장하던 말들은 다 허울이다. 초요는 그렇게 생각했다. 다른 사람의 눈과 전하는 말이 아니라 자신의 눈으로 직접 똑똑히 보고 있었으니까. 비록 석위지의 얼굴에 어린 여인들의 갓 피어나는 아름다움은 지나간 듯 하였으나, 살아온 세월이 만들어낸 농염함과 우아한 기품은 아무에게서나 찾아볼 수 있는 것이 아니었다.
“정말, 그렇게 생각합니까.”
그러나 호의적인 미소와 언사를 받고 있는 석위지의 얼굴에는 웃음기 한점 없었고, 어투에는 어떤 고양감도 없었다. 초요는 아무래도 그녀의 얼굴을 빤히 쳐다본 것이 유쾌하지는 않으셨으리라 생각하여, 다시금 그녀의 아름다움을 칭송했다. “그럼요, 제가 본 어떤 여인보다 아름다우신걸요. 어디서 누구와 대화하든 이 제국에서 가장 아름다운 여인을 물으면 다들 련귀비 마마의 존함을 입에 올리곤 했답니다. 저 또한 그 명성을 익히 들은 바, 과연 그것이 단지 소문이 아니라 진실이었음을 이렇게 눈으로 확인하게 되어 감명하였습니다.” 몰랐기 때문에. 석위지가 가진 기초요에 대한 감정이 어떠한지 알지 못했기 때문에, 기초요는 잘못된 화제를 이어나간 것이다.
“내가 들은 것과는 사뭇 다르군요.”
한미한 가문 출신으로 어떠한 뒷배도 없이 오로지 미색으로 이 자리에 오르고 머무른 련귀비에게 아름다움이란 것이 어떤 의미인지 알 리가 없었으니까. 자신보다 아름답다는 소문의 귀공녀가, 자신이 꾸몄던 계략에서 빠져나와 멀쩡히 살았던 것은 물론이고, 결국에는 황제의 눈에 들어 한순간에 자신과 같은 직위에 오르더니 기어이 눈앞에 찾아와 그 얼굴을 들이밀고 있는 이 상황이—련귀비에게 어떤 의미인지.
“천우문의 귀공녀가 나보다 더 아름답다 하는 찬양이 이 궁궐의 담을 넘은지가 한참 되었습니다.”
“아, 아닙니다. 그건 다 련귀비 마마를 뵌 적이 없는 사람들의 허풍일 따름,”
“결국 나와 이렇게 마주 앉아 있지 않습니까? 영귀비께선 미색이 가장 빛을 발하는 시절을 살고 계시니, 어찌 폐하의 안목을 피해갈 수 있었을까.”
연인의 어머니를 만난다는 긴장과 설렘은 현실을 일깨우는 말들에 베여나갔다. 그랬지. 이 여인에게 기초요는 아들의 연인이 아니라 남편이 새로 들인 여자다. 부친은 여식이 어떻게 처신하기를 바라고서 련귀비와 인사를 나누라 했던 걸까. 세상으로부터 그녀를 지켜주던 부친이라면, 그녀보다 세상을 잘 알던 부친이라면, 이런 상황 쯤은 충분히 예상하였을텐데.
“자, 나의 미명은 앗아가셨으니 이제는 무엇을 더 가지시렵니까. 어떻게, 간밤에는 찬란한 앞날을 보았습니까?”
“아…아니, 그런…. 그런 것이 아니라…….”
연인의 어머니 입을 통해 연인의 아버지와 동침한 사실이 언급되는 상황에서는 도대체 무슨 말을 해야하는 것일까. 지난 밤 그녀가 본 앞날은 오로지 고통과 고난이었는데. 아직 지난 밤이 남긴 통증이 채 가시지도 않은 채였다. 움직임이 있을 때마다 안쪽이 쓰려왔고, 괴한의 모습과 황제의 모습이 그 잔상이 몇 번이고 교차되며 정신을 어지럽히던 오전을 보냈다. 저는 그런 것을 원한 적이 없어요. 당신의 것을 탐낸 적도 없었고……털어놓을 수 있는 말은 단 한 마디도 없었다.
그녀는 련귀비를 보던 시선을 떨구고 어디다 두어야할지 모를 눈동자만 이리저리 부산하게 움직였다. 이을 말을 찾지 못한 입이 꾹 다물어지며 눈가가 젖어왔다. 울면 안 돼. 넌 어린 아이가 아니야. 이 분은 잘못이 없어. 기분 상하실 화제를 먼저 꺼낸 것은 나였으니, 가해자가 피해자 행세를 하면 되겠어? 아무리 되뇌어도 신체의 반응은 다짐을 따라주지 않았다.
“이런, 내가 못할 말을 했습니까. 벌써부터 늙고 악독한 내가 어린 새 귀비를 시기하여 울렸다더라, 그리 소문나겠습니다.”
간신히 울렁이는 목울대로 침을 삼키고 두어번 숨을 가다듬은 초요는 사과의 말을 건넸다.
“그, 죄송합니다. 마음 상하시게 하려던 건 정말 아니었, 는데……. 제가 어리석고 무지해서 결례를 범했습니다. 다시는 이렇게 마음 불편하실 언행, 하지 않도록 할게요. 귀한 시간 내어주셔서 감사했습니다.”
련귀비는 더 몰아붙이지 않았고, 영귀비는 그대로 살짝 고개 숙여 인사하곤 그곳을 나왔다. 문가를 나서며 기어이 툭 떨어지는 눈물을 소맷자락으로 찍어냈다. 보는 눈이 많아, 이런 모습을 보여선 안 돼. 석위지의 말대로 악의적인 소문이나 돌고 말 것이다. 몇 번이고 눈을 깜빡이면서 걸었다. 물기가 빨리 마르기를 바라며, 지나는 어느 궁인이 혹여 제 얼굴을 보고 쑥덕일까 고개를 숙이고 걸었다. 괜한 말 보태지 않고 조용히 뒤를 따르던 양양의 “마마!” 하는 외침은 점점 빨라지던 초요의 걸음이 련귀비 처소의 외문外門 너머 계단에 닿던 순간이었다.
앞을 제대로 보고 있지 않았으니, 마주 오는 사람과 부딪힐 밖에. 계단 하나를 헛디뎌 앞으로 기울어진 그녀의 얼굴에 누군가의 가슴이 닿았다. 그녀를 붙잡아 바로 세운 사람은 괜찮냐는 물음도 없이 그녀가 중심을 잡은 것을 확인하자마자 손을 떼고 한걸음 뒤로 물러섰다. 그녀는 그의 신발을 보았고, 익숙한 향기를 맡았고, 고개를 들었다. 한 계단 위에 있어도 올려다 보아야 하는 키 큰 사내가 그녀를 내려다보고 있었다. 이렇게 가까이서 찬란한 태양빛 아래에 있는 그를 마주 보는 것은 처음이었다.
얼마나 오랫동안 이런 빛 아래서 당신을 마주 볼 순간을 기다려왔던가.
아름다운 얼굴을 한점도 가리지 않은 눈부신 그 모습으로 저도 모르게 뻗어 나가려던 손이 멈췄다. 냉담하리만큼 무표정한 얼굴로, 눈시울 붉어진 그녀의 얼굴을 내려다보던 그는 곧 방향을 옆으로 비껴나갔다. 걷던 방향의 계단을 오르며 지나쳤다. 기초요는 뻗었던 손이 부끄러워 얼른 다른 손으로 잡아 거두고는 그의 뒷모습을 돌아보았다. 무엇을 기대했던 걸까. 내 눈가를 쓸어주며 무슨 일 있었냐고 달래주기를 바라기라도 했던 걸까. 그런 건 가당치 않은 일인데.
그래도,
아무리 이곳이 지엄한 황궁이고, 당신은 내게 단 한번 얼굴도 이름도 허락하지 않은 지체 높은 황자 마마이시며, 나는 당신 부친의 첩으로 이 자리에 있는 오늘이어도
그렇게까지 매정한 눈으로만 보다가 등돌려야 하는 건 아니잖아.
애써 진정되던 목울대가 다시 뜨거웠다. 다시 누가 보고 있을까 두려워져, 그녀는 아까보다 더 빠른 걸음으로 그곳을 벗어나 자신의 처소로 돌아갔다.
3
황제와의 밤들은 오래 걸리지 않았다. 의무만을 행하는 후궁들이 으레 그렇듯 영귀비의 시침은 한 시진을 넘기지 않았고, 자정 이전이면 처소로 돌려보내지곤 했다. 황제가 새로 들인 귀비를 하루 이틀에 걸쳐 찾아대는 일은 채 열흘을 넘기지 못했다.
그러나 멍자국은 좀처럼 깨끗하게 지워지지 않았다. 목깃으로 가려지지 않게 번진 부위에는 화견을 목에 감아 묶어 가렸다. 가린다고 해서 사라지는 건 아니다. 옷자락 안에 숨겨진 피부 곳곳이 마찬가지였다. 연약한 피부는 상처가 쉽게 나고 빠르게 아물지도 않아서 사가의 사람들은 늘 그녀에게 생채기 하나 나는 일도 경계했었다. 황제의 여자가 될 날을 대비하며 그리 했던 것일까. 흉 하나 지지 않은 깨끗한 몸으로 내어주어야 마땅하다 여겼을테니.
그 모든 것이 사랑이라고만 믿었던 자신이 바보처럼 느껴졌다.
궁인들이 전부 나가고 없는 내실에서 초요는 창가에 의자 하나를 가져다두고, 그 위에 무릎을 세운채 웅크려 앉았다. 무릎을 감싸듯 양팔을 교차해 얹고서 고개를 옆으로 기댔다. 열어둔 창문 밖으로 시선을 고정한 두 눈에 겨울 바람이 맞부딪혔다. 연인의 향기는 이제 거의 지워지고 자신의 체취만 묻어가는 화견 끝을 매만지며, 지나가버린 다정을 돌아보았다.
달이 구름 뒤로 숨어 빛무리 어스름한 밤. 가장 작은 등잔에 불 붙여 그 위에 가장 어두운 색의 종이를 씌운 등롱 하나 놓아두고 그를 기다리던 무수한 밤. 어느 날은 그가 오지 않아 그대로 다 타버린 심지처럼 아쉬운 새벽이 왔고, 그가 방문하여 두 눈을 가려주면 완벽한 어둠이었다. 세상 그 무엇도 볼 필요 없는, 오로지 당신의 목소리와 체온에만 몰두하면 되는 완벽한 어둠.
혼자이던 내실에 인기척이 느껴져 돌아보면 홀연히 걸어오던 당신. 그 시절 그를 마주하는 그녀의 낯은 항상 웃는 얼굴이었다. 기쁨, 수줍음, 그리고 가끔 투정 같은 어리광. 고통이나 깊은 비감 같은 것은 자리할 틈 없었다. 그때 기초요는 이어지는 그의 방문이 사랑이라 순진하게 믿었다.
작은 화로 위에 찻주전자를 올리고, 어떤 차를 좋아하냐고 물었다. ‘새로 들어온 꽃차가 있는데, 당신이 좋아할지…….’ 당신 마음에 들었으면 하는 바람조차 조심스러워 말끝을 흐리며 권했다. 맑았던 날에는 낮에 학관 공녀들과 다과회 가진 이야기를 꺼내며, ‘최근에 수도에 다녀왔다는 학우가 있는데, 요즘 대도에서 그런 게 유행한대요. 당신도 본 적 있어요?’ 유행을 화제 삼아 당신이 본 세상을 물었다. 어느 날은 그의 발소리에 다급히 돌아보며 쉿, 하고 검지를 입술에 대었다가, 구석에 숨겨둔 아기 고양이를 안아들고 와서 속삭였다. ‘오후에 후원에서 발견했어요. 어미를 잃어버린 것 같은데, 찾을 수가 없어서…. 내일은 찾을 수 있을까요? 이미 사람 손을 타서 어미가 알아보지 못하면 어쩌죠?’ 하면서 쓰다듬어 보겠느냐 권하기도 했다.
비가 내리던 날에는 그의 어깨에 내려앉은 물기를 털어주다 젖은 발을 보며 새 신발을 꺼내왔다. ‘새 유혜油鞋를 내어줄게요. 비오는 날이면 혹시 젖어서 오시려나 자꾸만 생각나서 일전에 하나 맞춰두었어요. 치수를 어떻게 알았냐고요? 아, 그건……지난 번에, 침상 아래에 벗어두었을 때 손뼘으로 재어봤거든요. 어서 신어봐요. 원래 신는 것과 치수가 잘 맞나요?’ 화혜장靴鞋匠이 길이를 재 보더니 십일문칠²11文7이라 하더라 덧붙이기도 했다. 평균보다 1문이나 큰 발이라며, 키가 아주 큰 사람인가보다 그러기도 했다고 덧붙였다. 당신을 모르는 사람이 한 말이어도 당신에 대한 대화였으니 나누고 싶었다.
그리고 또, 어느 날에는. 바다를 건너 교역 온 외지인의 이야기. 전국을 떠돌다 단림성을 거쳐간 여행자의 이야기. 건넛마을 친인척의 경조사 이야기. 모든 이야기 속에 당신 생각은 어때요? 당신은 어떤 걸 좋아하나요? 당신의 최근은, 당신의 오늘은, 당신의 일상은 어땠는지를 물었다. 당신이 접했다거나 좋아한다는 것들에 관심을 가졌고, 들은 다음날이면 곧장 그것을 접하며 당신을 생각하고, 이내 그것을 즐겨 찾으며 좋아하게 되었다. 주변의 누군가 ‘그런 걸 좋아했었어?’ 하며 의아해하면, 한껏 웃으며 ‘응, 좋아하게 됐어.’ 말하곤 했다.
특별할 것 없는 일상이었다. 그와 함께한 시각이 늘 어둠이었다는 것만 제하면. 그와의 만남이 그녀의 주변인 모두에게 비밀이었다는 것만 제하면. 혼자만의 비밀이 깊어질수록 그가 궁금해졌고, 그 호기심이 점차 의심으로 번져갔다는 것던 것은 아주 단순한 이치였다.
당신과 일상을 살고 싶었다. 대단하지도 영화롭지도 않은 그저 평범한 삶이면 족했다. 숱한 사람들이 그리 살듯이, 단지 당신과 함께이기만 하면 더 원하는 게 없었다. 그것이 그리 큰 욕심이었는지 이해할 수 없다. 당신을 생각하면 미소 대신 눈물이 피어나는 밤들을 지새우고 또 지새워 숱한 날이 지나고 나면, 그때는 메마른 눈으로 태연하게 당신을 볼 수 있을까. 내 안에 가득한 물기를 다 비우고 나면 그땐 남은 일은 흙으로 돌아가는 것밖에 없을텐데.
하여 낯익은 발소리가 들려온 이 밤, 그녀는 내실에 켠 등의 갯수를 생각했다. 켜둔 등불은 하나도 없었다. 돌아본 자리에 익숙한 모습으로 나타난 그는 환각은 아니었다. 술을 마시지도, 수면차나 수면환을 삼키지도 않은 밤이었으니까. 그리고 가까워진 그가 그녀의 어깨에 손을 얹어오는 무게 역시 가짜가 아니었다. 그러나 그녀는 느릿하게 그의 손을 제게서 떼어내곤 가만히 물었다.
“왜…왔어요?”
마음만큼 무거운 목소리였다. 황자인 당신이, 부친의 첩이 된 나를 어떻게 전과 다름없이 보러올 수 있을까. 왜 왔을까. 이제와서, 어째서. 우리는 무엇 때문에 어긋났을까. 더는 그를 사랑하는 것만으로 죄인인 몸이 되어서도 그녀는 마음 속에 가둔 말들을 꺼내지 못했다. 그저 온몸에 남은 지울 수 없는 증거는 어쩐지 들키고 싶지 않아 괜스레 목에 두른 화견을 점검하듯 매만지던 그녀는, 그것조차 그가 준 물건임을 떠올리곤 망연해졌다.
“오면 안 되잖아.”
그는 웅크린 그녀의 얼굴을 마주 본다. 멱리를, 어둠을, 형상을 불분명하게 가리는 것들을 사이에 두고서. 멱리 너머 그의 표정이 어떨지 상상이 잘 가지 않는다. 사랑으로 애틋한 얼굴이기를 바라기에 그리 떠올려보려 했지만 실패하고 만다. 차디찬 낯빛으로 그녀를 내려다보던 그날 낮의 그가 떠올라서, 지금도 그런 얼굴은 아닐까 두려워서.
보이지 않는 서로를 바라보다, 결국 먼저 눈을 감은 것은 그녀였다.
“가려줘요.”
빛 속에서 그는 결코 그녀에게 다정하지 않을 테니까. 그녀의 세상이 암흑이어야만 연인의 모습으로 닿아줄 테니까. 아, 차라리 당신의 얼굴도 이름도 모르던 때로 돌아갈 수 있다면……. 눈을 덮는 천의 감각이 지난 날의 후회를 부른다. 전부를 알고도 아무것도 모르는 척 눈을 감아야만 이어나갈 수 있는 이 관계. 우리의 첫만남은 어떻게 이루어졌던 걸까. 왜 그렇게 시작되었을까. 위기에 빠진 나와 구원으로 온 당신은 전부 우연이긴 했던 걸까. 당신은 어째서 내게 내내 정체를 숨겼던 걸까. 만약 당신에게 사랑을 구걸하며 매달릴까 성가셨던 거라면…….
그렇다면 어째서 이런 지경에 이르고도 당신은 나를 다시 찾아왔을까.
차라리 진작 당신의 얼굴을 보았노라 고백했다면 나았을까. 사랑이 맞다면 온전히 서로의 사람이 되어 살아갈 길을 찾을 수 있도록, 사랑이 아니라면 서둘러 마음을 정리하고 추억으로만 남길 수 있도록, 그렇게 했어야 했을까. 그러나 그녀는 아직도 그에게 그 모든 것을 고백할 용기가 없었다.
목끝까지 차오르는 질문들을 그의 숨과 함께 삼켰다. 사랑하는 사람의 얼굴도 이름도 모르던 때보다 더 깊은 슬픔의 심연에서, 그녀는 비극의 종장을 유예했다. 어떻게 비극이 아닐 수 있겠는가. 아무리 비틀어도 희극으로 맺을 수는 없을 것만 같은 이 이야기를.
끝을 맺을 용기를 지니지 못하였으니, 결말을 유예한 채 그저 눈 감을 수밖에.
첫 번째 재회는 그러했다. 이어진 다음 재회들도 마찬가지였다.
²11.7문, 약 280mm (1문 = 24mm)
4
황제가 영귀비의 패를 뒤집지 않은지 몇날 몇주가 흘렀다. 입궁한지 두달만에 황제가 어린 귀비를 완전히 잊었다는 말이 액정궁을 돌았다. 그러던 차에 간택 소식도 승은 소식도 없이 누군가 황귀비의 첩지를 받았다는 소식이 퍼졌다. 아무도 황귀비가 누구인지 그 얼굴을 본 사람이 없었으나, 황후궁에 버금가게 지어졌음에도 주인은 없이 살뜰히 관리만 되고 있던 이향궁에 삼엄하게 경비가 채워졌다 하니 사람들은 어렴풋이 그곳에 황귀비가 머물고 있지 않을까 추측했다.
누구인지는 헤아릴 수 없었지만 초요는 불경한 안도감을 품었다. 부디 그러기를, 만약 그렇다면 진정으로 다시는 황제가 자신을 찾을 일이 없을테니까. 진짜를 가졌다면 대용품에 무슨 쓸모가 있겠는가.
그러나 완전한 평안은 아니었다. 변함없이 그녀의 위치는 황제의 여자였다. 평범하게 사랑하는 한 사람의 연인이거나 한 남자의 아내가 아니었다. 여전히 그녀는 종장에 닿지 못한 채로 하루 하루 말라갔다. 나는 언제쯤 나를 사랑하는 눈으로 보는 당신을 마주할 수 있을까. 그런 날이 오기는 할까. 당신이 속삭이던 밀어가 전부 진심이기는 했는지 비화祕話를 숨김 없이 읽을 낮은 몇 번의 밤이 더 지나야 오는 걸까.
그녀가 입궁한 후로 하루가 다르게 풀이 죽고 생기를 잃어가는 까닭은 그뿐만이 아니었다.
액정은 지엄한 황궁에 속하는 곳이라 머리에서 발끝까지, 먹는 것에서 입는 것까지도 모두 규정이 있었다. 사용하는 물품이며 방의 크기에 이르기까지 전부가 그랬다. 그녀는 공작가에 버금가는 부귀 속에 자랐으니 값지고 귀한 것을 함부로 대할 만큼 무지하지 않았고, 윗사람을 알아보지 못하고 실례를 범하거나 아랫사람을 가당치 않게 부릴 만큼 어리석지 않았지만, 궁 밖의 생활과 궁 안의 생활은 분명 달랐다.
처소를 나서거나 타인을 마주하는 모든 순간이 기초요에게는 긴장과 피로의 연속이었다. 궁에는 벽에도 귀가 있고, 낮의 말은 새가 밤의 말은 쥐가 옮긴다 하였다. 상냥하게 웃고 밝게 말을 걸어오던 사람들과의 일상에 익숙했던 그녀는 엄숙하게 굳어있는 사람들의 표정과 딱딱한 어투에 기가 죽었다. 조금만 규율에서 흐트러진 것이 있으면 곧장 그것을 바로잡으려 드는 궁인들은 아랫사람이라기보다는 감시자처럼 느껴졌다.
“마마, 이 궁 안에 예쁜 연못이 있는 정원이 있대요.”
“정원?”
귀비에게 배정된 여덟 명의 궁녀 중 그나마 그녀가 긴장하지 않고 편히 대할 수 있는 이는 천우 기씨문에서부터 그녀를 모신 유양양이었다. 교전비로 궁궐에 들어온 유양양은 아무리 세가의 종이었다고 한들 일반 가정의 천비 출신으로, 나인 이상의 계급으로는 올라갈 수 없는 신분이었다. 엄격한 궁궐의 기준에서는 궁녀로 선발되는 것조차 만만치 않은 일이므로, 유양양은 본래 궁중에 있던 궁인들보다 격이 떨어진다 여겨졌으며 종종 무시 당하기도 했다. 그런 상황이라도 유양양의 적응력은 차라리 기초요보다 나았다. 양양은 눈치 빠르게 영귀비에게 필요한 것들을 챙기고, 주변인들의 비위를 맞출 줄 알았다. 초요가 관심가질 만한 소식을 가장 먼저 가져오는 사람도 그녀였다.
“연못 위에 지어진 누각도 있고, 예쁘고 귀하다는 꽃이며 나무도 잔뜩 심어져 있다나봐요. 계절이 계절이니만큼 꽃은 피지 않았을지 모르지만요.”
귀공녀 시절이었다면 양양이 초요에게 건넬 화제는 무투회가 열린다는 소식이었을 것이다. 한 번도 본 적 없는 것이니, 호기심 어린 눈으로 거기에 나도 가볼 수 있느냐고 물었을테니까. 그러나 지난달 승전연에도 가지 않은 영귀비는 ‘궁궐이기에 접할 수 있는’ 것들에 관심이 없는 눈치였다. 그렇다면 ‘궁궐이기에 갈 수 없는’ 곳들 중 그녀가 좋아했던 것과 비슷한 곳을 찾자 생각한 양양은 단림성의 붉은 숲을 대신할 만한 곳을 찾았다.
“숲이며 물가를 산책하길 좋아하셨잖아요. 거기 가보시는 건 어때요?”
“양양, 설마 어화원御花園을 말하는 거니? 거긴 황제 폐하와 황후 폐하의 허락 없이는 출입해선 안 되는 곳이야.”
“에이, 당연히 아니죠! 전 이 액정궁 안에 있는 정원을 말한 거예요. 거길 자주 드나들거나 신경 쓰시는 분은 련귀비 마마 뿐이래요. 제가 미리 련귀비 마마 처소 나인에게 오늘 일과가 어떻게 되시는지도 다 확인해두었어요. 련귀비 마마께선 겨울 산책을 좋아하지 않으신대요. 찬바람 부는 날씨가 피부를 건조하게 하고 주름을 악화 시킨다나? 이런 날씨엔 보통 내실에서 시간을 보내신다 들었어요. 그러니 절대 마주칠 일 없을 거예요.”
석위지가 기초요를 못마땅해 한다는 사실은 액정에 기거하는 궁인들 대부분이 인지하고 있는 사실이었다.
련귀비는 오랜 시간 궁에서 황제의 애첩으로 살아온 만큼 그 처세가 남달랐다. 하여 대놓고 음해하는 일은 없었으나, 영귀비와 관련하여 궁의 규율에 어긋나는 일이 있으면 가장 먼저 이를 꼬집었다. 영귀비의 입궁 초반에는 보약이나 향낭을 종종 보냈는데 그것에는 사향이 섞인 경우가 다수였다. 황제가 영귀비를 찾지 않기 시작하고서는 옷이나 장신구를 보내기도 했는데, 옻의 수액이 묻어 있거나 바늘이 꽂혀 있기도 했다.
기초요는 그것에 대해 항의하지 않고 조용히 덮었으나, 궁인들 사이에 알음알음 그 일이 오르내리는가 싶으면 석위지는 그런 실수가 있었는지 몰랐다 사과하며 시치미를 떼곤 했다. 양양이 이에 대해 분하다는 반응을 보이면, 초요는 조용히 ‘그런 건 상관없어.’ 하고 말았다. 암투에 휘말렸다는 억울함보다는 연인의 모친에게 미움의 대상이 되었다는 안타까움이 컸다. 그저 눈에 띄면 그분 마음이 불편하신 듯하니, 꼭 참석해야 할 자리가 아니라면 최대한 자리를 피하는 것만이 그녀가 할 수 있는 최선이었다.
“정말…거기 오늘 아무도 없을까?”
영귀비가 어디를 나서든 그곳에서 련귀비와 마주칠 일이 있을지 미리 알아보는 것은 양양의 업무 중 하나로 자리매김해 있었다. 양양은 자신있게 답하며 외투를 꺼내왔다.
“그렇다니까요!”
5
완연한 겨울이구나.
사람 하나 보이지 않는 정원에 들어선 초요는 솜을 누빈 외투에 모피로 만든 조끼를 입고, 목에는 목도리를 둘렀으며, 머리에는 털 안감을 댄 조바위를 쓰고 있었다. 그렇게 단단히 대비를 했건만 가려지지 않는 얼굴에는 차가운 바람이 매섭게 와 닿아, 코끝과 양 뺨을 발그름히 물들였다.
혼자 걷고 싶다는 초요의 말에, 양양은 날이 많이 추우니 오래 계시지는 말라며 일각一刻 후에 모시러 오겠다고 자리를 비켜주었다. 초요는 고요한 주위를 천천히 둘러보며, 반반한 돌이 깔린 산책로를 나아갔다. 헐벗어 앙상한 나무가 많았지만, 사계절 푸른 상록수들도 보였다. 초겨울까지 피어있던 가을꽃들은 이제 남아있지 않았으나 간혹 겨울 열매를 익히는 종種은 빨갛고 까만 열매를 달고 있기도 했다.
느리지만 끊기지 않고 이어지던 걸음이 멈춘 곳은 타는 듯 피어오르는 화려한 꽃 앞이었다. 엄동설한에 핀 꽃으로 손을 뻗어보았지만 그녀보다 훨씬 큰 꽃나무의 키 탓에 꽃가지에 손이 닿지 않았다. 까치발을 몇 번 들어보았지만 역시 닿지 않았다. 아쉬운 마음으로 손을 거두는데, 멀지 않는 곳에서 나뭇가지 밟는 소리가 났다. 소리가 난 곳으로 돌아보니, 아무도 없던 정원에 언제 들어온 것인지 그녀 외에 다른 사람이 있었다. 그것도 몇 걸음 떨어지지 않은 곳에.
그녀는 동백꽃 잡으려 내밀다 새빨갛게 언 손을 내려 모아쥐고 만지작거리며 그를 보았다. 자신은 낮에도 밤에도 같은 사람인데, 낮의 그와 밤의 그는 너무도 다른 사람이라 어떻게 대해야 할지 판단하기 어려웠다. 또 아무것도 하지 않자니, 그대로 등돌려 가버릴 것만 같았다.
“저, 마마.”
놓치기 전에 붙잡고 싶어서, 그녀는 그가 있는 방향으로 몇 걸음 걸으며 그를 불렀다.
“혹시 저와…산책, 하시겠어요?”
우리는 다른 연인들처럼 평범하고 평화롭게 대낮의 야외에서 시간을 보낸 적이 없으니까. 그러니까, 선심쓰듯 한 번에 그쳐도 좋으니. 대답을 기다리는 동안, 그들의 머리와 어깨 위로 차갑고 하얀 꽃잎이 하나둘 내려앉았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