설교본문 : 행 4장 1-11절
설교제목 : 모퉁이 돌
나름의 목적
주님의 은혜와 평화가 우리 모두와 함께 하기를 빕니다. 한 주간 건강하셨습니까? 너무 빨리 더워진 날씨 탓에 몸을 적응하는 것이 어렵기만 합니다. 벌써부터 모기가 활보하고 있습니다. 잠을 자는데 모기 한 마리가 손을 물어서 잠에서 깨었습니다. 잠을 깨고 나니 예전에 큰 아이가 어려서 저에게 했던 말이 불현듯 생각났습니다. “모기는 쓸모없는데 왜 만들어 진거야?” 모기는 사람을 물고, 귀찮게 하고 아프게 하면서, 아무짝에 쓸데없는데, 실용적인 입장에서 모기의 존재 이유에 대한 합리적 의심이었습니다. 그러나 하찮은 미물이라 할지라도 저마다의 존재 목적을 있을 것입니다. 모기는 인간의 정서를 소진시키고 성가시게 하는 사고와 번뇌, 괴로움을 자극하는 자율적인 본능적 요소이지만, 긍정적인 의미에서 본능적 직관과 지혜를 표상할 수도 있습니다.
한국 민담에서 나무도령 이야기에서 대홍수 속에서 개미와 모기를 구해주는 이야기가 나옵니다. 이 모기는 나무도령이 모성신을 대변하는 할머니의 딸이 있는 방을 찾는데 도움을 줍니다. 나무 도령의 이야기에서 “개미와 모기는 각각 땅에 기는 것과 하늘을 나는 곤충으로 인간 내면에 살아 있는 원형적 존재의 상·하적인 대극을 표현합니다. 이러한 민담에서 해로운 모기, 즉 그림자와 악을 배제하지 않고 있다는 의미는 자율적인 본능적 요소를 존중하는 것의 중요성과 신경을 자극하고 해롭다고 생각하는 곳에 도움이 있다는 것을 보여주고 있습니다.”[김진숙(2010) : “한국민담 ‘목(木)도령’의 분석심리학적 해석”, 〈심성연구〉 25권 2호, 한국분석심리학회, 서울, p240-241.] 이런 도움을 주는 모기는 모성상의 계략을 꿰뚫고 문제를 해결할 수 있는 직관 본능과 연결됩니다. 의식이 해결하기 힘든 문제로 궁지에 몰리거나 너머의 진실로 씨름할 때, 가려진 문 너머를 통찰할 수 직관력은 가림막으로 덮인 기로에서 길을 선택하고 가게 하는 본능적 저력입니다.
자연세계의 피조물을 인간의 입장에서 쓸모있음과 쓸모없음, 유용과 무용의 가치를 매기는 것은 어리석은 일일 것입니다. 이 세상 모든 것은 저마다의 존재 이유와 의미를 가지고 살아가고 있음을 마음에 품고 살아갔으면 좋겠습니다. 그러할 때 더불어 살아갈 수 있는 삶이 열리게 될 것입니다.
선전 vs 선포
베드로와 요한이 백성들을 가르친다는 소식에 제사장과 경비대장과 사두개파 사람들이 몰려왔습니다. 사람들을 붙잡고 가두었습니다. 가장 분명한 이유를 2절에서 소개합니다.
“그들은 사도들이 백성을 가르치는 것과, 예수의 부활을 내세워서 죽은 사람들의 부활을 선전하고 있는 것에 격분해서(2)”
유대 지도자들은 사도들의 가르침과 예수의 부활사건에 대하여 선전했다는 죄목을 뒤집어 씌웠습니다. 당대 종교 기득권층에게는 그런 가르침과 부활에 대한 선포가 백성들을 설득하는 선전으로 여겨졌기 때문입니다. 이 선전이라는 번역이 선명하게 읽힙니다. 누군가의 귀에는 선전이었고, 누군가의 귀에는 선포가 되었습니다. 선전propaganda은 사람들을 설득시키기 위한 조직적 노력의 일환으로 오늘날에는 미디어나 SNS 등을 통하여 활발하게 이루어지고 있습니다. 의도적으로 일방적인 주장을 대중들에게 전달하는 행위도 포함하고 있습니다. 체제 유지를 해야 하는 기득권층은 사도들의 선포를 불순한 의도와 목적을 가진 것으로 혐의를 두었습니다. 그러나 사도들은 부당한 이득을 챙기기 위해 선전하지 않았습니다. 시대정신이 저주하고 죽인 예수의 부활을 전할 뿐이었습니다.
오늘날 현대교회의 설교를 고민하고 또 고민하게 됩니다. 설득을 위한 도구가 설교가 된다면 이는 복음의 본질에서 상당히 멀어진 것입니다. 설교는 설교자의 해석학적 렌즈를 통하여 전해진 말씀입니다. 그런데 설교자가 오염되고, 불순한 의도를 가진다면, 설교는 선전을 넘어서 선동이 될 수 밖에 없습니다. ‘선전인가?’ 혹은 ‘선포인가?’를 분별할 수 있는 것은 자아가 오염되지 않은 상태에서만 가능하며, 자기인식의 체험에서만 가능할 것입니다.
그 이름에 힘입어
사도들이 구금당한 이튿날 유대의 지도자들이 예루살렘에 모여서 사도들을 세워 신문하기 시작합니다.
“그대들은 대체 무슨 권세와 누구의 이름으로 이런 일을 하였소?(7)”
베드로는 성령이 충만하여 그들 앞에서 말합니다.
“우리가 오늘 신문을 받는 것이, 병자에게 행한 착한 일과 또 그가 누구의 힘으로 낫게 되었느냐 하는 문제 때문이라면, ... 여러분... 이것을 알아야 합니다. 이 사람이 성한 몸으로 여러분 앞에 서게 된 것은, 여러분이 십자가에 못박아 죽였으나 하나님이 죽은 사람들 가운데서 살리신 나사렛 예수 그리스도의 이름을 힘입어서 된 것입니다(9-10).”
유대 지도자들이 문제 삼고 있는 것이 무엇인가요? 태어나면서부터 앉아 있었던 병자를 고친 착한 일이 문제인가라고 질문하고 있습니다. 유대 기득권자들의 어둠을 폭로하고 있습니다. 한 존재를 병으로부터 회복시킨 착한 일 따위는 안중에도 없습니다. 그들에게 유일한 관심사는 권세와 이름입니다. 권력과 명예, 체제 유지를 위해서 착한 일 따위도 그들의 통제하에 있어야 합니다.
베드로는 주눅 들지 않았습니다. 성령에 충만하여 당당하게 말합니다. 심문의 자리를 증언의 자리로 바꾸었습니다. 베드로는 나사렛 예수 그리스도의 이름을 힘입어서 된 것임을 진술합니다. 예수 그리스도의 이름을 힘입어 병을 고친 것임을 증언합니다. 예수 그리스도의 이름을 힘입는 자는 자신을 죽이려 위협하는 죽음의 골짜기에서도 당당하게 길을 갈 수 있습니다. 내 힘과 이름을 의지하고서는 고통과 두려움의 길을 능히 걸어갈 수는 없습니다.
경영학에서 안나 카레니나의 법칙이란 용어가 있습니다. 톨스토이가 쓴 안나 카레니나의 소설에서 차용해왔습니다. 1860년경 러시아 귀족사회의 결혼 생활의 단면을 보여주면서 연인을 사랑하면서도 버림받을까 불안해하는 여주인공, 안나 카레니나 이야기입니다. 소설의 첫 문장에는 “행복한 가정은 모두 비슷하고, 불행한 가정은 모두 나름대로 불행하다”는 내용이 있습니다. 가족의 행복에 기여하는 특정 핵심요소가 있으며, 이러한 요소가 없으면 불행으로 이어질 수 있음을 시사합니다. 원활한 의사소통, 상호존중, 공유된 가치관, 목적의식 등이 있습니다. 이런 요소가 있을 때 가족은 행복하고 만족하는 경향이 있지만, 이런 요소가 결여되면 가족은 불행하고 역기능적인 경향이 발생할 수 있습니다. 행복과 성공에 기여하는 핵심요소를 인식하고 불행과 실패로 이어질 수 있는 부정적인 요소를 피함으로써 만족스럽고 의미있는 삶을 살 수 있다는 것이 이 이론의 내용이라 할 수 있습니다.
인생에 있어서, 가족에게 있어서 행복의 핵심요소는 무엇일까요? 어떤 요소가 인생을 행복의 길로 안내하는 것일까요? 저는 예수의 이름이라고 말씀드리고 싶습니다. 어린 두 아이를 키우는 엄마가 분석을 받으러 와서 워킹맘으로 고통을 호소하였습니다. 모래놀이치료에서 그는 바다의 여신의 이미지를 세우며 만족해 했습니다. 자연세계를 관장하는 여성 신상이 내면 안에서 든든히 보호하며 바라보고 있으니, 지치고 힘들 때 나 혼자가 아님을 알아야 한다고 이야기 나누었습니다. 자신의 배경에서 인생을 돌보는 위대한 신격이 있음을 안다면 우리는 외롭고 지친 인생길을 묵묵히 걸어갈 수 있습니다. 예수의 이름을 힘입는 자는 교만하거나 열등감에 빠지지 않을 것입니다. 예수의 이름을 힘입는 자는 겸손하면서도 당당하게 생명과 희망의 빛을 드리우며 살게 될 것입니다.
모퉁이의 머릿돌
베드로는 시편 118편의 내용을 인용하여 예수가 어떤 분이신지를 선언합니다.
“이 예수는 너희들 집 집짓는 사람들에게는 버림받은 돌이지만, 집 모퉁이의 머릿돌이 되신 분입니다(11).”
버림받은 돌이 집의 기초석인 머릿돌이 되었음을 선언합니다. 버림받은 것들이 머릿돌이 될 수 있다는 것은 기독교의 역설적 신비이며, 정신의 신비입니다. 당대 유대 지도자들은 자신들의 원칙과 율법의 잣대로 예수를 가차없이 버렸습니다. 보다 근본적인 이유는 자신들의 기득권체제나 기존 문법에 어긋나고 위협적이었던 예수를 죽음으로 내몰아 버렸습니다. 자신의 일방적 시선과 욕망으로 눈이 멀면 인간이 된 하나님을 알아차리지 못하고 죽이고 내다버릴 수 밖에 없습니다. 이것은 우리에게도 동일하게 적용될 수 있습니다. 인생의 낯선 손님이 찾아오고, 불현 듯 기대하지 않은 사건을 만나면 그것을 버리려고 합니다. 가치없고, 열등하고, 보기 싫은 것들을 평가절하하며 내버립니다. 여러분, 지금 내가 버리고 싶은 것은 어쩌면 내 인생의 기초를 세우는 가장 고귀한 것일 수 있음을 기억했으면 좋겠습니다. 지금 피하고 싶고 견디기 힘든 것이 어쩌면 가장 든든한 머릿돌일 수 있음을 마음에 품었으면 좋겠습니다. 버린 돌을 다시 주워 머릿돌 삼아 아름다운 집을 지어가는 우리 모두가 되기를 간절히 소망합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