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22.05.01]
미안합니다. 감사합니다.
이현래 목사님
생각 같으면 교회당에 가서 여러분의 얼굴을 보고 다 끌어안고 울고 싶은 그런 마음이다. 나는 괜찮은데 주변에서 아이들이 보고 좀 이상하다고 해서 병원에 갔다. 병원에 갈 때까지는 알다가 병원에 가면 의식을 잃고 했다. 이번에는 집에서 나간 것을 내가 모른다. 왜냐하면 119를 타고 갔기 때문에 나는 집에서 나온 줄을 모른다.
아주 응급한 상황에서 영대 병원 응급실에 갔다. 거기서 어떤 형제가 병원장 되는 분에게 연락을 했는데 그분이 마침 제주도에서 학회가 있었다고 한다. 그분이 응급실에 급히 연락해서 나는 영대병원에 4개의 중환자실이 있는데 그중에 외과 중환자실에 입원을 했다. 거기는 아무나 갈 수가 없는 데고, 죽느냐 사느냐를 결정하는 그런 사람만 가는 그런 곳이다. 거기 있다가 나왔다. 그래서 죽었다가 살아나온 것 같다.
오늘은 다른 말을 하려고 한 것이 아니고, 우리 교회가 천하에 없는 교회라고 자랑하였다. 사실은 이런 교회가 없다. 이렇게 편안하고 자유롭고 안정되고 서로 사랑하는 이런 교회가 세상 다른 곳에는 없다. 그래서 우리가 자부심을 가졌다. 그런데 이번에 이 일을 지나면서 내가 잘못했다는 생각이 들었다.
나는 오로지 길이 한 길밖에 없는 사람이다. 여러 개의 길이 있어서 그 중에서 하나를 선택한 사람이 아니고, 내게는 딱 주어진 길이 한길밖에 없었다. 아브라함을 소개받았을 때, 왜 내가 거기 심취가 됐는가 하면 어쩌면 나와 똑같아서 그런 것 같다.
100살이 되었는데도 약속의 자녀를 얻지 못했다. 아브라함으로서는 이제는 어찌할 수가 없는 것이다. 또 나이가 들어 또 어떻게 할 방법이 없었다. 그때 하나님의 사자가 와서 내년 이맘때 사라에게 아들이 있을 것이라고 했다. 그래서 주어진 아들이 이삭이라는 아들이다. 어쩌면 꼭 나 같아서 좋아했는지도 모른다. 한길밖에 없는데 다른 길을 주었다. 이것이 내가 노화도에서 출발할 그때와 똑같다. 지금도 또 역시 마찬가지이다.
구약성경을 얘기할 때 이런 맥락에서만 내가 얘기를 했다. 아브라함과 이삭과 야곱 그리고 400년 후에 이스라엘 백성이 오도 가도 못하고 붙잡혀 있을 때, 하나님이 모세를 불러서 그들을 인도해 냈다. 그것도 같은 길이다. 광야에 나왔을 때 물도 없고 양식도 없고 길도 없는 곳이었다. 그때 하나님께서 길이 되시고 양식이 되시고 생수가 되셨다. 이 길이 내 길이다. 다른 길이 내 길이 아니다. 선택의 여지가 없는 길을 살아왔다.
그런데 신약에 와서 예수를 이야기하는데, 아브라함과 다윗의 자손 예수를 얘기하는데 상당히 어려움이 있었다. 내가 전혀 모르는 사람이었다. 그분의 행사를 통해서 내 나름대로 해석 되어진 예수는 얘기했지만 그분 자신은 내가 모르는 사람이다. 그래서 신학자들 중에 유명한 사람들은 이것은 초대교회 당시에 우매한 사람들 속에서 유행해 다니던 신화를 여기저기 모아서 짜깁기 한 것이다. 이렇게 주장하는 사람이 나오게 되었다. 물론 많은 연구를 통해서 그런 말이 나오게 되었다. 신약성경에 나오는 기록들은 사실이 아니고, 신약시대에 그 시대에 전해지던 얘기라는 것이다. 쉽게 말하면 심청전 같은 것이다.
그 말도 일리가 있다. 그러면 우리는 누구를 보고 있는 것인가? 이것이 암담해진다. 그러면 그 사람이 그것을 다 벗겨내고, 비신화화로 벗겨내고, 실체를 내놓았는가? 그렇지 못하다. 그 사람은 실체를 못 내놓았다. 그러면 우리는 어떻게 하겠는가? 그러니까 이러지도 못하고 저러지도 못한다. 어떤 사람은 그것을 완전히 신화라고 그 사람을 따르는 사람도 있고, 나는 그 말은 일리가 있지만 대책이 없지 않느냐, 이런 사람이다. 완전히 배격한 것도 아니고, 완전히 수용한 것도 아니고 그런 입장이 된 것이다.
결국은 그분이 행하신 일을 통해서 내 나름대로 해석이 됐다. 그 중에서 교회에 필요하다고 생각되는 부분을 골라다가 여러분 앞에 제공을 했던 것이다. 그런데 그것이 내 좋을 대로 다 해석을 했으니까 가장 편리한대로 나도 할 수 있고 남도 할 수 있는 그런 것만 싹 모아놓았다. 그래서 천하에 없는 교회가 되었다.
그래서 이런 속에서 점점 그렇게 될수록 나는 이상한 느낌이 자꾸 들었다. 내가 왜 이렇게 이 사람(예수)을 모를까? 왜 이 사람(예수)을 나는 모를까? 오병이어를 가지고 5천명을 먹이고도 부스러기가 열두 광주리가 남았다는데, 그런 사람을 내가 어떻게 알겠는가? 여기에 대한 해석도 분분하다. 한 어린아이가 도시락을 내놓으니까 여기저기서 도시락을 내놓아서 먹고 남았다고 해석하는 사람도 있고 말이 참 많다. 아주 많다.
하지만 나는 그것저것 상관없이 우리에게 유익이 되는 것이 있으면 그것을 찾아서 내가 먹을 수 있으면 남도 먹을 수 있겠지, 내가 못하는 것은 남도 못 하겠지, 이런 마음으로 교회에 공급했다. 그러니까 나도 편하고, 형제들도 편하고, 새로 온 사람도 편하고, 정말 편한 교회이다. 이보다 편한 교회는 없다.
그런데 내가 한마디 말을 해 놓으니까 뒤숭숭해져버렸다. 그것이 나는 전혀 생각지 않았던 일이다. 내가 이렇게 그 사람을 알려고 갈망하다가 야, 여기서 만나는구나. 이것이 나는 너무나 감격스러웠다. 여기서 이 사람이 있구나. 아무도 없는데 여기 와서 이 사람을 만나는구나.
이적을 행사하던 예수에게서 나를 찾으려니까 못 찾을 것이 아닌가? 당연히 못 찾을 것이 아니겠는가? 그러다가 십자가에 달려서 죽은 것은 당연한데, 내려오지 못한 그 자리가 나한테 보였다. 십자가에 달려 죽었다는 사람은 많다. 다 죽었지 살았다는 사람은 없다. 그런데 내려오지 못했구나. 저 사람이라면 내려올 수 있는데, 저 사람도 내려오지 못하는 데가 있구나. 그것이 나와 만나지게 되었다. 아, 여기구나. 나 같은 사람을 위해서 이 한자리를 남겨놓았구나. 이렇게 생각이 되었다.
그러니까 당연히 이것이 말해지면 모두가 일어나서 ‘아멘’ 할 줄 알았다. 그런데 아니었다. 처음에는 내가 참 이상하게 생각되었다. 이럴 수가 있는가? 이보다 더 쉽고 이보다 더 편하고 이보다 더 완전한 예수 만남이 없는데 아니 왜 이렇게 시끄러운가? 이해가 되지 않았다.
그런데 내가 병원에 있으면서 곰곰이 생각해보았다. 내가 잘못했구나. 내가 잘못했구나. 내가 왜 오던 길을 계속 이야기하지 않고 교회만 이야기했는가? 이게 내가 후회가 되었다.
천하에 없는 교회라도 무너지려면 한방에 무너진다. 아직 그렇다. 원칙상으로 교회는 그리스도의 몸이니까 무너질 수 없는 것이다. 그러나 아직 우리는 교회만 있는 것이 아니고 세상과 함께 있다. 그러니까 바람만 한번 세게 불어버리면 다 날아 가버릴 수 있는 것이다. 그래서 내가 전에도 그런 얘기를 했다. 교회를 보지 말고 그리스도를 봐라. 이런 얘기를 한 때가 있었다. 이런 문제 때문에 그랬던 것이다.
그리스도는 이미 자기 자리를 확보했기 때문에 바람이 불던지 비가 오든지 문제가 없다. 그러나 아직 교회는 그러지를 못하다. 그런데 그것만 보고 있었다. 그러니까 아! 내가 큰 잘못을 했구나. 모두 나 때문에 저렇게 큰 고생을 하고 있구나. 나 때문에 저렇구나. 교회가 왜 고생하고 있는가? 나 때문에 저렇구나. 그 생각이 났다. 그냥 하는 말이 아니다. 깊이 그렇게 뉘우쳤다.
오늘은 이 말을 하려고 나왔다.
내게는 한 길밖에 없는 사람이다. 그 벼랑 끝에서 나를 찾으신 하나님, 내게 다가오신 하나님, 그분밖에는 나한테는 없다. 예수를 만나서 더 그래야 될 것인데, 그런 예수를 내가 못 봤다. 잘나가는 예수만 보았다. 만사형통하고, 하는 것마다 잘되고, 말 한마디면 모든 것이 해결되고, 이런 예수를 보고 있었다. 사람들도 다 그랬다. 그래서 예수를 따랐다. 각자 자기 소원을 들고 예수를 따랐던 것이다.
그러다가 자기 소원에 안 맞으니까 버린 것이다. 버림받은 게 당연하다. 누구의 기대에도 맞지 않는 사람, 아무의 기대에도 맞출 수 없는 사람, 그래서 버림받았다. 버림받은 게 당연하다. 그렇게 살면 누구든지 다 버림받는다. 처음으로 내가 예수가 버림받은 것이 당연하다는 생각이 들었다. 저런 사람이 버림 안 받으면 누가 버림받겠는가? 모두 십자가에 달아놓고는 하는 말이 하나님 아들이거든 내려와 봐라. 그러면 우리가 믿겠다고 했다. 다 그런다. 꼭 이스라엘 사람만이 아니라 인간이면 누구나 다 거기서 똑같다. 각자 예수에게 바라던 것이 다 있기 때문에 누구나 다 그렇게 할 수밖에 없다. 이것이 인간이다.
그래서 부활로 넘어왔다. 죽었다가 살아났다 부활로 넘어갔다. 죽었지만 살아났으니까 얼마나 좋은가! 그런데 나는 그것이 안 믿어진다. 부활한 예수를 본 일이 없다. 부활을 모두 믿고 있는 게 기독교이다. 그런데 나는 부활을 본 일이 없다. 그 후로도 부활한 사람을 본 일이 없다. 그러니까 거기서 은혜를 받고 감사한 사람은 얼마나 좋겠는가! 그런데 나는 안 된다.
바울에게도 나 같은 사람이 있었던 것 같다. 어떤 모양으로 부활할 것인가를 물었다는 말은 사실은 나 같은 인간이 물은 것이다. “누가 묻기를 죽은 자들이 어떻게 다시 살아나며 어떠한 몸으로 오느냐 하리니.”(고전15:35) 그런데 바울은 말하기를 “어리석은 자여 네가 뿌리는 씨가 죽지 않으면 살아나지 못하겠고 또 네가 뿌리는 것은 장래의 형체를 뿌리는 것이 아니요 다만 밀이나 다른 것의 알맹이 뿐이로되 하나님이 그 뜻대로 그에게 형체를 주시되 각 종자(씨)에게 그 형체를 주시느니라.”(고전15:36~38) 죽은 자의 부활도 이와 같다고 대답을 했다. 아주 애매모호한 대답이다. 그 말을 듣고 아! 그렇구나. 이렇게 생각하기도 대단히 어렵다.
신약성경에 나오는 모든 약속들은 보혜사가 항상 너희 곁에 있을 것이다. “그가 또 다른 보혜사를 너희에게 주사 영원토록 너희와 함께 있게 하리니.”(요14:16) 요한복음 14장에 염려하지 마라, 내가 또 다른 형태로 너희 가운데 항상 있을 것이다. 너희 곁에 항상 있을 것이다. 너희 변호자로 있을 것이라고 말한다. 자기 곁에 항상 변호자로 있다는 사람도 있다. 자기 마음속에 자기 가슴속에 예수가 있다는 사람도 있다. 왜 거짓말을 하겠는가? 다 진실이다.
그런데 나는 안 되는데 어찌하겠는가? 그런 사람들끼리는 되겠지만 나는 안 된다. 여러분도 그것이 되면 여기에 오지 않았을 것이다. 안 되는 사람들만 여기 왔을 것이고, 그 된 사람 중에 여기 온 사람은 그것은 기적이다. 부분적으로 보면 그런 일들이 이루어졌다. 안 이루어진 것이 아니다. 그런데 전체가 될 수 없다. 모든 사람이 그럴 수가 없다.
놀라운 은혜를 입은 사람도 있다. 그런데 그 사람은 그렇지만 그것이 다른 사람과 함께는 안 된다. 나도 한때는 그런 사람들처럼 되어보고 싶어서 애를 썼다. 방언이라도 한번 해보고 싶었다. 그런데 그것도 안 되었다. 그래서 나는 거기서 완전히 떨어진 사람이 된 것이다. 여기서 해결될 데가 없다. 하나님을 만날 데가 없다.
바울도 다메섹에서 예수의 음성을 들었다는 것처럼 가다가 음성을 들었다는 그런 사람도 있다. 그런데 바울은 들었지만 다른 사람은 못 들었다. 그러니까 그것이 복음이 될 수가 없다. 바울이 들었다고 해서 그것이 복음이 될 수가 없다. 사실일 수 있지만 바울 혼자의 것이지 내 것은 안 된다.
깊이 생각해라. 만민이 함께 할 수 있는 복음은 무엇인가? 딱 한자리밖에 없다. 이것이 예수가 어떤 사람이었든 간에 상관없이 내게 그분 자신의 정체를 풀어줄 수 있는 유일한 자리인 것이다.
예수는 누구인가? 예수는 누구인가? 십자가에 못 박혀서 이러저러한 일을 행하신 분이다. 이것은 다 안다. 모르는 게 아니다. 다 아는데 이것이 다 개별적인 것이다. 그런데 내가 예수를 만났을 때, 이 사람은 개별적인 것이 아니다. 이 은혜는 개별적인 것이 아니다. 나만의 것이 아니다. 사람이면 누구나 다 그렇게 정해진, 이미 그렇게 되어진 일이다. 늦게 본 것뿐이다.
새로 만들어진 것도 아니다. 예수님이 일부러 만든 것도 아니다. 예수님께서도 “하나님, 하나님, 어찌하여 나를 버리셨나이까.”(마27:46)라고 했다. 그러면 예수님도 마찬가지로 그렇게 되기 싫었다는 얘기이다. 그런데 하나님 아들이라는 사람이 내려오지 못하고 있다. 어쩌면 예수님의 부끄러운 부분이었다. 하지만 그것이 진실한 예수의 자리이다. 거기서 예수는 누구인가가 확실하게 발견되었다. 확실하게 발견되고 보니까 내가 살겠다. 왜? 나도 사람으로 발견되니까. 그 이상 나는 예수를 만날 자리가 없다고 생각한다. 그래서 감히 마지막 복음이라고 하게 된 것이다.
오늘 내가 여러분에게 깊이 사과하고 싶은 것은 그동안 나도 교회에 취해서, 그냥 교회가 좋으니까 내 기본 노선을, 잠시 동안, 그렇게 생각하지 않았는데 잠시 동안 더 중요한 것이 있었던 것 같다. 잠시 동안 나도 모르는 사이에. 그래서 예수 없어도 되겠다는 이런 사람도 많다. 심지어는 목사님만 있으면 됐지 예수가 왜 필요합니까? 이런 사람까지 생겼다. 그러면 내가 너무 기뻐야 하는데 나는 근심이 되었다. 그게 아닌데... 그거 아닌데... 그래서 나는 더욱더 예수님과 나 사이에 거리가 있다는 것을 발견하게 되었다. 그래서 더욱더 예수를 알고 싶었다.
불트만처럼 그것은 신화라고 하고 버릴 자격이 내게는 없다. 또 버렸다고 해도 대책이 없다. 불트만은 아무 대책도 내 놓은 것이 없다. 그러면 어쩌란 말이냐? 결국 예수를 다시 만들어야 한다. 그 시대의 예수는 그렇게 만들어졌으니까 오늘 18세기 이후의 예수는 또 다르게 만들어져야 한다. 만들어진 것은 매한가지이다.
우매한 민중을 위해 만들어진 신화나 영리하고 반질반질한 이성을 가진 오늘 이 시대에 사람들을 위해서 만들어진 예수나 만들어진 것은 매한가지 아니겠는가? 실체가 없으니까. 나는 차라리 그때 만들어진 예수가 낫지 요즘 사람들이 만들어 온 예수는 진짜 못 믿겠다. 그것은 진짜 못 믿겠다. 사람은 하나님이 보이지 않으면 우상을 만든다. 사람은 안 보이면 보이는 것을 만드는 법이다. 그것이 인간의 본성이다. 불트만 식으로 모두 해체하고 나면 반드시 무엇을 만들어야 되는 것이다. 안 만들 수가 없다.
나는 만들든 안 만들던지 내 길은 아브라함이 100세까지 아들을 얻지 못한 그 길이다. 이스라엘 백성이 애굽에서 이러지도 저러지도 못하고 갇혀 있는 그 시대가 그 사람이 나다. 그 길이 내 길이다. 나를 위해서 열어 놓은 길이다. 다른 사람에게는 또 다른 길이 있는지 모르겠는데 나에게는 이길 밖에는 길이 없다. 선택의 여지가 없다.
또 다른 길이 있어도 내 길이 아니다. 말 타고 활 들고 천지를 움직인다 하더라도 그것은 내 길이 아니다. 또 많은 길이 있어서 이 길도 저 길도 생각해봐야 한다는 여유가 내게는 없다. 그런 길이 있다면 뭐하려고 아브라함을 내 길이라고 하겠는가? 그럴 길이 없다. 길이 많은 사람은 길이 하나도 없는 사람이다.
내가 길이 많을 때는 나는 참 여유가 많았다. 하나님이 있는가, 없는가를 찾느라고 몇 년을 헤맸다. 그런데 내일 일을 모르게 되니까 하나님 찾던 생각이 싹 지워졌다. 내일 일도 모르면서 하나님은 무슨 하나님이야. 싹 지워졌다. 단순해졌다. 하나님이 나를 그런 길로 이끌어 왔다.
그래서 내가 잠시, 잠시, 천하에 없는 교회에 안주했던 것 같다. 여러분도 거기에 아주 좋은 방석을 깔아 놓고 잘 지내고 있다. 물론 그것은 내가 최선을 다한 것이다. 장난으로 한 것이 아니다. 내 일생이 거기에 다 들어가 있다.
나는 오늘 내가 그렇게 교회를 만들고, 여러분을 그런 사람이 되게 한 것에 대해서 정말 깊이 사과한다. 내가 8년간 목회하던 교회에서 그 사람들에게 아무것도 제시한 것이 없었다. 왜? 내가 아직 갈 곳이 없으니까. 나는 갈 곳이 없다는 생각마저 없었다. 그 사람들을 대하면 나는 지금 너무나 미안하다. 나를 믿고 내 설교를 들었던 그 사람들인데 내가 뭐 했나? 내가 뭐 했나? 충주에 가서 마지막까지 또 그럴 뻔했다. 그러다가 내가 이 사람을 만나게 되었다. 그래서 충주 형제들은 그때 잠시 한두 마디 들었을 뿐이다.
정말로 하나님 앞에 내가 잘못하고 여러분에게 잘못하고 잘못했다. 교회는 그 목사 된 대로 되는 것이다. 아무리 안 하려고 해도 할 수 없다. 그렇게 되는 것이다. 그 교회의 모습이 그 목사의 모습이다. 별 수 없다. 그러므로 오늘 대구교회의 모습은 내 얼굴이다. 내 모습이다. 어떤 사람은 金목사에 대해서 이러쿵저러쿵 하는데 金목사도 내가 그랬으니까 나를 따라왔다. 그것이 좋아서 따라온 사람이다. 金목사에게 잘못이 있다면 그건 내 잘못이다. 내가 그렇게 했기 때문이다. 정말 미안하다. 잠시 동안이지만 미안하다. 너무 미안하다. 내가 최선을 다한 결과였다.
길은 한곳밖에 없다. 내 길은 한길밖에 없다. 다른 사람들에는 다른 길이 있으면 가면 된다. 그러나 나는 길이 없다. 한길밖에 나는 없다. 왜 갑자기 저런 말을 하는가? 갑자기가 아니다. 아브라함의 100세에 이삭을 받았다. 그것이 예수가 내려오지 못한 것과 뭐가 다른가? 똑같다. 이스라엘이 400년 동안 애급의 종 된 것, 그것이 내려오지 못한 것 아닌가? 내려오지 못한 예수다. 내가 갑자기 한 말이 아니다. 갑자기 한 말이 아니다.
내가 이제 자리를 잡았구나. 내가 이제 자리를 찾았구나. 그것이다. 그래서 나는 아무 생각 없이 너무 좋아서 이렇게 될 줄 알았으면 조심조심 할 것을 나는 그냥 조심도 없이 얘기를 한 것이다. 내가 걸어온 길, 다말이 왜 그랬는가? 죽기 아니면 살기다. 라합이 왜 그랬는가? 죽기 아니면 살기다. 룻이 왜 그랬는가? 죽기 아니면 살기였다. 이 사람들은 생명의 길을 위해서 죽기 아니면 살기를 택한 것이다. 다 똑같다. 다른 사람들이 아니다.
나는 거기서 예수를 만나서 조금 헤맨 것이다. 너무나 모르는 사람이어서 헤맨 것이다. 그러니까 교회만 좋았다. 예수는 몰라도 교회는 좋았다. 좋은 것만 빌려다 썼다. 예수 없는 교회, 그것이 지금 유럽에서 유행하는 교회이다. 예수 없는 교회, 미국도 지금 그렇게 되어간다. 예수 없는 교회, 교회만 있으면 된다. 그런데 그 교회는 결국은 없어진다. 유럽에 교회가 없어진다고 한다. 그러니까 교회 없는 그리스도는 있어도, 그리스도 없는 교회는 없어진다. 저절로 없어진다.
나는 순교자도 못 된다. 순교는 대단히 귀한 것이다. 보통 일이 아니다. 모두 자기의 살 길을 갈지라도 아니다, 나는 주님을 위해서 내 목숨을 내놓는 일이보통 일인가? 아무나 할 수 있는 일이 아니다. 하지만 모든 사람이 그럴 수 없다. 그게 문제이지 그것 자체는 너무 귀한 것이다. 나는 그럴 자격이 없다. 그것은 자격이 있어야 하고, 그만한 뭐가 있어야 한다.
아틀란타의 조*경 자매가 저번 밤에 전화가 왔다. 너무나 답답하고 안타까워서 죽고 싶었다고 한다. 그런데 그때 갑자기 십자가의 빛이 자기에게 오면서 모든 문제가 사라졌다는 그 얘기를 전화로 한다. 그런데 이번에 목사님 말씀을 들으니 더욱 좋다고 한다. 그래서 조*경 자매에게 넌 정말 놀라운 은혜를 경험했다고 했다. 조*경 같은 사람이 한두 사람이 아니다. 십자가에서 빛을 보고 돌아선 사람이 한두 사람이 아니다.
그런데 너는 정말 좋은 은혜를 받았다. 그렇지만 그것은 너만의 것이다. 그렇지 않느냐고 하니까 그렇다고 했다. 그것은 너만의 것이라고 했다. 조*경 너만의 것이지 남에게 나누어줄 수 없다고 했더니 그렇다고 했다. 네가 받은 은혜는 너만의 것이다. 하지만 내가 말하는 이 예수는 나만의 예수도 아니고 너만의 예수도 아니다. 만민을 위한 예수다. 그래서 이것이 복음이다. 그랬더니 아! 그렇다고 했다. 그러고 전화를 끊었다. 조*경 자매는 아틀란타 교회에서 굉장히 중요한 자매이다.
우리 가운데 은혜를 받은 사람이 많다. 말씀 한마디를 듣고 모든 것을 다 버리고 온 사람들이다. 그런데 내가 그 사람들을 이 아브라함의 길로 인도하지 못했다. 거기서 끝났다. 그러니 그것이 내 책임이다. 모두 내 책임이다.
앞으로 나는 이 빚을 갚으려고 한다. 내가 여러분에게 진 빚을 갚아야 한다. 그래서 내가 오늘 머리에 수건을 두르고 쓰고 사과하러 나오려 했다. 결사반대 이것이 아니고, 나는 사과하려고 두르려고 했다. 그런데 하필이면 내 옆머리를 너무 쳐서 내가 봐도 나인지 아닌지 모르겠다. 여러분이 못 알아볼까 하는 생각을 했다. 그것도 어울리지 않아서 에라 모르겠다하고 그냥 나왔다.
진심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