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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충청을 지나며
4월이다.
영국 시인 엘리옷(T, S, Elliot)이 그의 시 "황무지(waste land)"에서 "4월은 가장 잔인한 달"이라 했던가.
개나리, 진달래, 목련, 산수유가 순서도 없이 다투어 만발하는 4월이 왜 잔인하다고 했을까?
4.3사건, 4.19때문일까? 아니면 극도로 양분되어 막말로 싸우는 4.10 총선거 때문일까?
작년 3월 말 충청도로 접어든 서해랑길팀이 만 1년째 충청 서해안 리아스식 해안을 북에서 남으로, 남에서 북으로,
다시 또 남쪽으로 안고 돌아, 그것도 부족해 지선 6개코스로 내륙 깊숙히 속살을 더듬기도 했으나, 그
것으로 끝내고 떠나기는 아무래도 아쉬워 돌아보게된다.
그만큼 충청은 속을 잘 내보이지도 않고 알기도 힘들다는 얘기다.
충청사람들이 느리다는 우스갯 소리에, 충청도인 여객전무(차장)의 *부-사-안 -해-앵 ㅡ 추-우-ㄹ- 바-아-ㄹ--*이
채 끝나기 전에 대전역에 도착한다는 말이 있다. 이 말에 강한 반론도 있다.
충청도 보신탕집에 손님이 미처 앉기도 전에 득달같이 달려온 종업원이 *개 혀 ?*
손님의 대답도 듣기 전에 주방쪽을 향해 *개 하나 추가!* 하면 모든 게 끝이란다.
충청도 하면 예산을 뺄 수가 없다. 지리적인 중심이기도 하지만, 넓은 들판에서 생산되는 농산물, 인근 해안으로부터의
해산물 등 풍부한 물산으로 이곳 사람들은 옛날부터 풍족한 삶을 누려왔다.
근래 충남도청이 옮겨와(내포신도시) 행정 중심이 되면서 이 지방의 중요도가 더욱 높아졌다.
그래선지 이곳 사람들은 자존심과 고집이 세다. (여기서 충청은 충남을 주로 지칭한 것이며, 우스갯소리는 단순한 우스개이지
충청사람에 대한 비하나 다른 뜻이 없음을 양해해 주시기 바람) 보통 예산을 말할 때 첫 머리에 修德寺(수덕사)가 나온다.
수덕사는 불교 조개종 제7교구 본사로 백제 때 창건된 유서깊은 고찰이지만 그보다 開花期의 소위 新女性, 一葉(일엽)스님의
출가 수도처로서 더 유명하다.
*일엽스님(본명 金元周,1896 -1971) ㅡ 시인,작가로 명성을 날리던 소위 開花期 新女性으로 자유 사상,자유 연애, *신정조론을
주장하며 자유분방한 생활을 하다가 동경 유학 중 일본인과의 사이에 낳은 아들을, 낳자마자 버리고 수덕사로 출가하여
만공스님을 은사로 수도승이 되었다. 14살이 된 아들(일본 名, 오다 마사오)이 꿈속에서 그리던 엄마를 찾아 , 도쿄-(기차)-
시모노세끼 -(관부연락선)-부산-(기차) -서울-(기차) -삽교역, 삽교역 - 수덕사(30리길 걸어서)까지 천리가 넘는 길을 2박3일
동안 물어물어 왔는데 , 어린 아들에게 "엄마라 부르지 마라. 다시는 오지 마라"
그때도 꽃이 흐드러지게 핀 4월이었다니 정말 4월은 잔인한 달인가 보다. 그래도 방학 때면 엄마가 보고 싶어 수덕사를 찾아
문밖에서 엄마를 불러보고 때로는 마룻바닥을 치며 "왜 나를 라훌라로 만들려 합니까?" 통곡을 하였건만 종내 돌아보지
않은 냉정하고 독한 母情이었다.
하늘보다 높고 바다보다 넓은 것이 母性인 줄 알았는데 이렇게 모질고 독한 모성도 있나? 이럴 수는 없다.
이 사연을 처음 읽은(대학 1학년) 나는 내가 *라훌라가 된 듯 밤새 눈이 퉁퉁부어 다음 날 강의를 빼먹은 먼 기억도 있다.
*신정조론 ㅡ개화기 新女性의 주장. 마음이 중요하지 몸이 중요한 것이 아니다. 내 몸의 주인은 "나"이고 어느 누구의
예속도 받을 수 없다.결혼은 서로간의 약속이므로 결혼 후에는 서로 신의를 지켜야 한다는 일본여성의 사고에서 영향을 받은 듯 하다.
*라훌라 ㅡ석가모니 부처님이 출가하기전 낳은 아들. 자기도 出家하여 부처님의 제자가 되겠다고 세차례나 찾아왔으나 "
가비라城을 지키고 家界를 이어가라"며 허락하지 않았다함.
자기가 저지른 일은 자기에게 책임이 있는 것이지 그 어린 자식이 무슨 죄가 있다고 고아로 만들어 저렇게 가슴을 쥐어짜게
하는가? 자기만 훌쩍 세상과 絶緣(절연)하고 떠난다고 절연이 되고 修德(수덕)이 되는 것인가?
그 후 마사오는 그림에 재능이 있어 이당 김은호 화백 門下에서 공부하여 몇 점 그림을 남겼으나 (한국 이름 김태신) 종내
어머니를 따라 불교에 入門, 승려가 되었다고 한다.
* 개화기 新女性 얘기에 羅蕙錫(나혜석, 1896 - 1948)을 뺄 수가 없다.
•동경여자미술전문학교를 졸업한 우리나라 최초의 서양화가, 작가
•정신여중 고 교사
•조선 미술전람회 1회~5회 입선.
화려한 경력에도 불구하고 자유사상, 자유분방한 생활과 당시 조선사회의 높은 윤리적 벽에 가로막혀, 3번의 결혼과 3번의
이혼 후, 일엽을 따라 불교에 귀의하고자 하였으나 여의치 않자 수덕여관(수덕사 아래) 등 여러 곳을 방랑하다 말년에는
행려병자로 쓸쓸히 客死하였다고 한다.
* 또 한명의 新女性 尹心悳(윤심덕, 1897 - 1926)
• 동경음악대학 성악과 졸업, 우리나라 최초의 소프라노 가수.
• 경성사범부속교 음악교사
그녀 역시 자유연애, 자유분방한 생활과 당시의 윤리적 가치관 사이에서 방황하다 연인 金 某(목포 부호의 장남,유부남)와
함께 현해탄에서 실종. 승선자 명단에 들어 있었으나 하선자 명단에 없으니, 이승도 저승도 아닌 제3의 곳에서 그들만의
유토피아를 즐기고 있는 것인지, 아니면 어디서 새 혼인법이 시행될 날을 기다리고 있는 것인지 ㅡ
윤심덕이 평소에 자주 읊조렸던, 마지막 음반의 타이틀곡이었던 ^死의 찬미^는 본래 이오시프 이바노비치(루마니아)의
"다뉴브강의 잔물결"이라는 경쾌하고 빠른 곡이었는데, 소프라노 가수인 윤심덕이 무겁고 느리게 편곡하였고,
가사도 본인이 개사하여 비극적이고 처연한 느낌을 갖게 하였다.
"광막한 광야를 달리는 인생아
너는 무엇을 찾으려 왔느냐
이래도 한평생 저래도 한평생
돈도 명예도 사랑도 다 싫다"
*새 혼인법 개정 안 ㅡ 1980년대 뉴져지주의 한 변호사가 제안한 혼인법 개정안 "모든 결혼은 시효가 5년이다.
5년이 지나면 모든 결혼은 그 효력을 상실한다"
두 사람의 의문의 실종(투신 자살) 사건은 당시 신문에 빅 뉴스로 대서특필 ㅡ이루지 못한 사랑의 종말ㅡ 결국 레코드 회사만
대박을 쳤다고 한다.
당시 동경 유학할 정도면 집안의 경제적 사회적 신분이 상당한 수준이었을 텐데 그렇게 세상 물정에 어두웠던가?
혼자 남은 젊은 미망인은 어쩌라고? 모든 게 여자탓인 듯 쳐다보는 시댁의 눈초리는 고사하고, 누구와 더불어 家統을
이을 자식을 만들며 구만리 긴긴 고독의 밤을 혼자 어떻게 씹으란 말인가? 참으로 어리석고 멍청한 남자가 아닐 수 없다.
人生이란 어차피 긴 지루함과 기다림, 순간의 기쁨과 슬픔, 내게만 주어진 것 처럼 느껴진 고통, 선물인지도 모르고
흘려보낸 많은 날들의 연속 아니던가? 그걸 참지 못하고 불나방처럼 뛰어들었다가 자신과 가까운 사람들을 함께
불행하게 만든 그 어리석음을 어떻게 용서받을 것인가?
* 여기서 같은 개화기 시대 중국의 新女性, 우이팡(吳胎芳 1893 -1985)의 얘기를 안할 수가 없다.
•17세에 고아가 되어 이모부에 의탁, 장학금을 따라 학교를 옮기면서도, 조상으로부터 내려온 전통을 깰 수 없다며
*전족을 풀지않고 불편한 발로 모임,학회 등에서 적극적인 활동을 하면서 金陵女大(진링여대 -南京)를 졸업.
(당시 진링여대 학장의 말; "저 아이는 중국의 新 舊가 적절히 융합된 학생이다")
*纒足(전족) ㅡ여성의 발을 어릴 때부터 인위적으로 묶어 성장하지 못하게 하는 풍속. 중국 미인의 조건. 10세기 초~
20세기, 약 1000년간 지속.
•미시간大 졸업 후 모교,진링여대 교수로 취임. 재능과 미모를 탐한 權門勢家(권문세가)들의 압력과 유혹을 뿌리치고,
장개석의 교육부 장관 제안도 두차례나 거절, 독신으로 지내면서 35세에 진링여대 학장에 취임. (당시 중국의 권문세가들은
여러 명의 부인들을 둘 수 있었고, 유창한 영어와 미모로 국제적 명사였던 쑹메이링宋美齡은 장개석의 세번째 부인이었고,
문화혁명 때 4인방의 중심으로 중국을 100년 후퇴시켰다는 江靑은 모택동의 4번째 부인이다)
•진링여대는 선교사들이 설립, 모든 강의는 영어로 해 왔는데, 우이팡은 1928년(35세) 학장에 취임하면서 취임사를
중국어로 해서 신선한 충격을 주었다. 취임사는 간결하고 짧았다.
"진링여대는 중국인의 대학이다. 본교의 설립 목적은 신해혁명 후 우리 사회에 필요한 여성지도자 양성이다. 여성교육의
목적은 책임감과 고결한 인품의 지도자 배양이다. 우리는 모두 난세의 여자들이다. 포기하지 말고 조국과 후세의 영광을
위해 노력하자."
••젊은 여성들을 향한 指針 발표
1,걷는 자세는 바르고 당당하게
2,음악에 대한 素養(소양)
3,조직활동의 중요성
4,아름다움을 즐길줄 아는 능력
5,주변인들에 대한 관심과 봉사
6,체육활동
지금 우리의 생활지침으로 삼아도 부족함이 없는 훌륭한 교훈이다.
* 이보다 한참 후의 얘기 하나 더 추가하고져 한다.
1953년, 6.25 전쟁(7월 27일 휴전 조인)이 막바지로 치닫고 있었던 4월 어느 날(새학기 초), 당시 뜨오르던 30대 후반의 有名
詩人, 朴木月선생(본명 박영종,1916 -1978)이 홀연히 사라진다.
단란한 가정과 서울대 교수직(국문과)을 버리고 女弟子와 함께 ㅡ 혼란 시기라 행적을 찾을 엄두도 못내고 잊혀져 가던
그 해 11월 말 쯤 , 제주도 바닷가 한 오두막집으로 목월선생의 부인(양춘자 여사)이 찾아든다.
곧 닥아올 추위를 걱정해, 두 사람의 겨울 내복과 생활비 봉투를 놓고 말없이 돌아선 부인의 심정이 어떠했으랴?
아마도 가정을 팽개치고 사랑행각에 나선 남편에 대한 배신감과 두 사람의 초라한 방을 들여다 보고 느낀 측은함이 교차했지
않았겠는가?
양심의 가책을 느낀 목월선생이 그날밤 S 라고만 알려진 그 여인 앞으로 이별의 시를 남긴다.
후에 이 詩에 작곡가 김성태 선생이 곡을 붙여 유명한 *이별의 노래*가 탄생한다.
우리나라 중고교 교과서에 실려, 청소년들의 정서함양에 크게 기여한 名詩이기에 다음에 적어본다.
ㅡ기러기 울어예는 하늘 구만리
바람이 싸~늘불어 가을은 깊었네.
아~아 아~아 너도 가고 나도 가야지
한낮이 지나면 밤이 오듯이
우리의 사랑도 저물었네
아~아 아~아 너도 가고 나도 가야지 -
"悲哀(비애)가 가장 순수한 감정이다"라는 어느시인의 말이 가슴에 와 닿는다.
목월선생 부인의 큰 마음이 家長을 집으로 돌아오게 했을 뿐만 아니라, 우리나라 문학과 음악사에 길이 남을 不朽(불후)의
명작을 남기게 했다.
• 1970년대 어느 날, 목월선생이 주례를 하는 어떤 결혼식에 참석한 적이 있었는데 맨 앞줄에 앉은, 귀티가 풍기는 고상한
중년 부인이 목월선생의 부인임을 직감할 수 있었다. 나와는 수인사도 없었지만 사연을 알고 있었던 나는 결혼식 후 일어서
나오는 부인에게 존경을 담은 목례를 보낸 기억이 있다.
수덕사 얘기에서 생각에 생각이 이어져 기억을 더듬다가 여기까지 왔다. 도대체 아름다움이란 무엇인가? 예쁜 얼굴?
늘씬한 체격? 시대, 인종, 지역, 개인에 따라 그 기준에 차이가 있겠지만, 아름다운 마음이 가득한 사람은 그 모습이
아름답지 않을까? 적지않은 시간을 살아오면서, '그럴 수도 있겠지', '아니 그럴 수가 있을까?' 를 되뇌이면서 왔지만
아직도 "아름다움에 대하여, 여자에 대하여, 잘 모르겠다 "는 것이 솔직한 내 심정이다.
2024년 4월 11일 최민규(慈剛ㅡ오늘의 斷想)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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