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구체화의 생동성, 타자성의 견고함
- 최재선론2
권대근
문학박사, 문학평론가
Ⅰ. 들어가며
최재선 시조의 매력은 무엇보다도 생동하는 구체성에 있다. 문학은 구체성과 보편성이라는 두 가지 요소를 충족했을 때 공감을 가져다주는 것이기에, 구체성은 매우 중요한 문학적 성취 요소인 셈이다. 때문에 문학은 언제나 구체적인 것을 재현하고자 한다. ‘시유삼미’, 문학은 장르를 불문하고 세 가지 맛을 내어야 한다. 이름하여 손맛, 눈맛, 그리고 품맛이다. 구체적인 시간과 공간 속에서 구체적인 대상을 포착하여 여기에 구체적인 묘사와 서사를 가미함으로써 손맛을 내고, 거기에 참신한 인식을 더하면 눈맛도 낼 수 있으며, 진솔한 자기 조명을 통하여 내면의 그림자를 인격화하면 인간적 향내가 진동하는 품맛도 낼 수 있는 것이다. 세 가지 맛도 결국 대상의 구체화에서 나온다. 이 구체성이 자갈치 시장판의 활어처럼 생동적으로 빛날 때, 시조는 시조의 온전한 모습으로 독자의 시선을 사로잡으며 독자의 심경 속으로 파고드는 것이 아니겠는가.
한국시조의 전통적 수용을 잇는 한 방법을 확인하는 작업으로써 최재선 시인의 시조를 현미경으로 살펴보고, 현대시조의 한 특성을 밝히는 것은 커다란 의의가 있다고 생각한다. 왜냐하면 문학은 개인적인 사상, 감정의 표현임과 동시에 그것이 자라난 시대와 사회의 산물이기 때문이다. 사실 문학적 성취라는 것도 알고 보면 작품이 지니는 사회적 의의와 무관한 것이 아니며, 문학의 주제니 사상이니 하는 것도 대체로 작품에 나타난 작가의 사회의식에 뿌리를 두고 있는 경우가 많다. 그 문학 내용의 구체적 양상 역시 시대상이나 사회현상의 직접적인 투영이거나 굴절된 반사로 나타나는 것이 보통이다. 그러므로 현 시대를 살아가는 시인의 삶과 그 방향을 현실인식과 역사성에 비추어 반영, 제시, 개발하는 방법으로서 최재선 시조의 연구는 연구 대상으로 충분하다고 보겠다. 이런 측면에서 시조의 문학사적 흐름을 관통하며 시조의 정형성을 계승 발전시키고자 하는 그의 시적 지향과 최재선 시조의 미학성을 살펴보기로 하자.
Ⅱ. 삶의 유형에 따른 최재선 시조의 양상
최재선 교수의 삶 주위를 살펴보면, 세 가지의 세계가 형성된다. 1) 우리들의 오관으로 인식되는 자연계 2) 인간이 편의상 만들어 놓은 사회환경 3) 현재의식과 잠재의식이 혼재한 의식의 세계인 정신계다. 이러한 삶의 체계에 반응하는 인간의 대응 양식에 따른 삶의 유형은 일반적으로 세 가지로 분류할 수 있겠다. 감각적 즐거움의 삶과 속세적인 일에 연루된 삶 즉 정치적 활동의 삶, 그리고 관조적 삶, 즉 이론적 성찰의 삶이다. 최재선 시인의 삶은 자연과 사회 환경 그리고 정신이라는 삼각의 동그란 고리체계의 중심에 위치하고 있다고 해석된다.
가. 유희의 삶, 비움의 미학
인간은 유희적 존재다. 놀이정신을 통해 일상의 행복을 추구한다. 놀이란 현실 속의 인간이 일정한 시간 현실적 이해관계를 떠나 그 행위 자체에 기꺼이 몰두하고 나름의 자율적 규율 속에서 즐기는 행위이다. 따라서 모든 예술 행위가 그렇거니와 순수한 의미에서의 시는 본질적으로 놀이 정신에서 출발한다는 주장이 있을 수 있다고 하겠다. 호이징아는 모든 시는 원래 놀이에서 탄생되며, 이 놀이가 시와 밀접한 상관성이 있다고 하였다. 호이징아는 참된 놀이를 하기 위해서는 어린 아이들처럼 놀아야 하며 놀이의 특성은 비밀스런 분위기에 감싸이는 것이며 그것은 일상 생활의 법칙이나 습관이 일시적으로 소멸하는 세계라 하였다. 최재선 시에서 이런 놀이에의 애착이 언어적 유희로 드러난다. 그는 시작을 통해서 본래적 놀이 정신을 그리워하고 실천하고 옹호한다. 이러한 놀이는 복잡계의 상징계를 사는 한 지성인의 의식세계를 나타내는 상징이요, 생활의 위안처라는 측면에서 시가 하나의 구원 수단으로서 기능한다.
최재선 교수는 마음을 텅 비우고 고요함에 들기를 좋아한다. 사색에 즐겨 빠진다는 것은 그가 삶의 현장에서 유난히도 욕심 없이 비움의 미학으로 살아가고자 하는 증거다. 문인의 삶에 있어서 가장 중요한 것이 ‘비움’이다. 그는 시조라는 양식을 통해 이런 철학을 말하고 있는 구도자적 작가다. 시혜자의 입장이 아니라 늘 실천자의 자세다. 이 시조집의 핵심은 자기 성찰, 바로 무의식의 의식화, 즉 그림자의 인격화다. 최재선 시조의 향기는 외부의 번득임이 아니라 내부의 번득임이다. 이 논리를 전제로 할 때, 최재선 교수는 우리 시대가 잃어버린 비움의 미학을 시조라는 따스한 우물 속에서 두레박으로 길어 올리고 있는 사람이다. 그의 시조가 사물의 허상과 진상, 세계의 이편과 저편 사이를 탐색하는 인식의 세계를 지향하고 있다고 한다면, 그의 시조는 자연의 빛깔과 인정의 향기가 서정이 되어 내면을 촉촉이 적시는 언어놀이의 세계를 향하고 있다고 할 수 있겠다.
시집(屋)에 사는 언어 詩로만 알았는데
ㅅ 字로 꺾이어서 제비꽃 이마쯤인
울 엄니 간당간당한 허리춤도 詩인 걸
오뉴월 가문 날에 뼈 풀린 풀잎같이
ㄱ 字로 돌아 굽어 휘어진 아버지 등
세월로 일필휘지한 표절 불가 詩인 걸
- <몸詩> 전문
최재선 시조의 맛은 선명한 이미지의 구체성에서 나온다. 위의 시에서도 놀이에의 애착이 잘 나타나 있다. 한마디로 문자놀이다. 묘사를 통한 서정의 구축에 힘쓴다기보다는 체험적인 일상의 몸짓을 관조를 통해 나타내고자 한다. 어머니와 아버지의 삶을 ㅅ과 ㄱ으로 형상화하고, ㅅ을 어머니의 허리춤으로, ㄱ을 아버지의 휘어진 등으로 묘사하는 재치는 시조의 새로운 방향성을 던지는 것으로 볼 수 있겠다. ‘허리’와 ‘등’ 앞에 놓여진 ‘제비꽃 이마’와 ‘굽어 휘어진’ 등의 어구는 부모님의 생애적 특성을 단 하나의 자음으로 형상화한 의미에 구체성을 더하는 전략으로써 문학적 전달성이 연상과 상상으로 이어지게 해서 정서적 환기를 배가한다고 하겠다. 기발한 시조다. 제재와의 상관성을 가진, 가장 짧은 언어로 자식 위해 헌신의 삶을 산 부모의 은공에 오마주하는 시인의 시적 작업에 찬탄을 보내지 않을 수 없다. ‘허리’와 ‘등’의 상징을 한글 자음으로 묘사하는 언어놀이는 어쩌면 최재선만의 개성적인 작시 기법이라고 하겠다.
겨우내 내려앉은 눈먼지 닦으시고
햇살을 마디마디 수북이 모으시니
홍매화 낯을 붉히며 시나브로 핍디다
ㅅ 字로 꺾인 허리 고르는 숨비소리
곰삭은 밴댕이젓 항아리 뚜껑 열자
먼바다 파도소리가 이엄이엄 웁디다
눈이 먼 손자에다 입 닫힌 아들까지
해묵은 젓갈같이 아픈 속 염장하고
오늘도 주기도문을 되새김질 합디다
- <어머니의 장독대> 전문
최재선의 시조 <어머니의 장독대>는 그 제목부터가 그렇거니와 본래적 놀이에의 향수가 잘 그려져 있다. 그는 위의 시조에서 볼 수 있듯이 상징성이 큰 묘사문 속에 한 순간이나 체험으로 환기되는 자극적인 정서를 복원하기 위해 은폐되어 있는 어머니의 전체험을 동원하여 개진해간다. 그는 겨우내 내린 먼지가 쌓인 장독대를 닦고 있는 어머니를 보면서 오랫동안 그리워하기만 해왔던 모정을 ‘햇살’로 밝고 맑게, ‘홍매화 붉은 낯’으로 화사하게 따뜻하게 형상화한 이미지로 환치하면서 순수한 여유의 시간을 만난다. 그것은 소설보다 복잡하고 각박한 인생을 독자로 하여금 신기롭게 보게 하며 여유 있는 모정의 세월로 우리를 인도한다. 다시 한 번 더 ㅅ자로 이미지화된 어머니의 허리는 ‘먼바다에서 들려오는 파도소리’와 상관화되면서 깊고 깊은 슬픔을 자아낸다. ‘눈이 먼 손자’와 ‘입이 닫힌 아들’이 등이 주기도문과 오버랩되면서 이 시는 최고조의 긴장을 유발한다. 주의 품안에서 어머니의 생이 부디 편안하시기를 평자 또한 빌어보지 않을 수 없다.
강물이 저렇게도 유유히 흐르는 건
붙잡고 끙끙대며 앓은 일 없기 때문
살면서 흘려보내지 못한 것들 몇이랴
나무는 빈 몸으로 나무 木 필사하고
바람은 얽힌 매듭 풀리어 방목하니
일체를 내려놓아야 가벼운 걸 어쩌랴
강물이 저렇게도 편안히 흐르는 건
쟁이고 쌓아둘 것 맘속에 없기 때문
살면서 더부룩하게 체한 날들 몇이랴
- <강물을 보며> 전문
현대인은 '집착'으로 대변되는 ‘욕심’ 때문에 ‘단절’과 ‘소외’라는 현대성의 공범자들이다. 특히 유희적 인간은, 대다수 도구적 이성에 매몰되어 물질적 욕망의 주체로서 어떻게든 성공을 향해 노를 젓는다. 이런 모습들이 최재선 시인에게 어떤 의미로는 유쾌할 수가 없을지도 모른다. 그것은 모두의 성공이 아닌 너의 성공이기 때문이다. 시인은 비움의 철학을 향유할 때 비로소 강물처럼 유유히 흘러갈 수 있음을 설파한다. 물론 여기서도 언어놀이는 계속된다. ‘나무는 빈 몸으로 나무 木 필사하고’에서 ‘나무 木 필사’는 ‘빈 몸’과 관련을 맺음으로써 경험적으로, 그 필사되는 한자는 신체적으로 선명하게 독자의 시선을 독점한다.
그는 비워냄과 성찰의 소중함을, 모성과 그리움을 청량한 눈과 마음으로 그리고 있다. 작가는 대학 교수로서, 글쓰기지도에 매진하면서 어느덧 중년의 계절을 맞고, 강물 앞에 선 자신의 모습에서 삶의 공허와 우울한 그늘을 보게 되지만, 자주 찾아가는 강가에서 시조를 만나면서 생의 방향성을 확보한다. 채움과 쌓음에 종지부를 찍고 생의 터닝포인트를 마련한 다음, ‘비움’에 대한 찬가를 쓴다. “강물이 저렇게도 편안히 흐르는 건/ 쟁이고 쌓아둘 것 맘속에 없기 때문/ 살면서 더부룩하게 체한 날들 몇이랴”에서 ‘살면서 더부룩하게 체한 날들 몇이랴’는 작가의 말은 행복이 어디에 있는지, 어떻게 존재하는지를 보여준다고 하겠다.
사는 게 낭떠러지 끝자락 같아 뵐 때
담쟁이 무성한 벽 퍼렇게 읽어보라
단 하나 평탄한 곳에 대충 살고 있는지
한숨이 움칫움칫 줄지어 나올 때에
수직을 고삐 쥐고 오르는 집념 보라
단 하나 게으름 피며 절망하고 있는지
- <담쟁이> 전문
현대는 다양한 욕구가 충만해 서로 좌충우돌하지만, 자신 이외에는 어느 누구에게도 눈을 돌리거나 귀를 기울일 수 있을 만큼 여유가 없는 단절과 소외로 특징되는 시대다. 이러한 이유로 해서 오늘을 사는 사람들은 고독과 외로움으로 고통당하고 있는 것이다. 이런 현실 속에서 최 교수는 ‘담쟁이 무성한 벽 퍼렇게 읽어보라’고 한다. ‘무성한’이란 형용사와 ‘퍼렇게’라는 부사가 주는 의미는 무엇인가. 삶 속에는 끝없는 욕망과 좌절과 갈등이 있다. 또 극복과 회피라는 심리 과정을 겪으면서 한 인간의 자아가 형성된다. 형성된 자아의 뒤편에는 무의식의 그림자도 웅크리고 있다. 최 교수는 수직과 수평을 교차시키면서 수직의 벽을 통해 안이함과 대충으로 상징되는 게으름을 질타하고 있다. ‘단 하나’는 절실함을 그려내는 어구다. <담쟁이>는 몰려드는 내면의 물음들을 접하고, 삶의 의의를 깨닫게 한다는 측면에서 유의미한 글이다. ‘한숨이 움칫움칫 줄지어 나올 때’가 절창인 이 작품은 자기발견의 소중함이 어떤 것인가를 엿볼 수 있게 하기에 인식 구조로서의 문학적 역할을 잘 수행하고 있다고 하겠다.
나. 활동의 삶, 사회적 존명
현대는 표현의 시대다. 최재선은 자기 연출의 메시지를 시조에 담아 남을 설득하고 남과 대화하고 행복을 함께 나누고자 하는 사회적 인간 또는 정치적 인간으로서의 시인이다. 누구든지 이 세상에 태어나서 '나' 아닌 다른 사람과의 관계 속에서 살게 마련이다. 대부분 사람들의 생활은 세속적인 삶에 머물러 있다. 자본주의적인 삶의 가치를 추구하기 위하여, 직업을 구해 일을 하고, 좋은 사람을 만나 가정을 꾸려 살고 싶어 한다. 사회적인 명예와 부를 갖기 위해 정치적 활동에 나선다. 욕망의 주체로서 술을 마시고 노래를 부른다. 인생이란 잡지의 표시처럼 통속적이라는 것은 인간의 삶 또한 세속적으로 흐를 수밖에 없다는 사실을 말해 준다. 최재선 교수의 시는 이런 인간의 속성을 관통하며 그 특성을 비교적 잘 묘파하고 있다.
봄 길은 사뿐사뿐 걸어라 숨죽이며
행여나 개미허리 밟을 일 있을 터니
혹시나 앉은뱅이꽃 짓이길지 모르니
봄날은 가만가만 걸어라 숨 고르며
꽃 속살 보지 못해 봄 한철 애틋하고
새들의 짝짓는 모습 지나칠지 모르니
겨우내 아랫목에 묻어둔 설렌 마음
꽃처럼 향기롭게 피워서 편지하라
봄날은 눈 깜짝할 새 바람처럼 떠나니
= <봄날주의보> 전문
봄 길을 사뿐사뿐 걸어가야 하는 이유를 시인은 두 가지로 들고 있는데, 한마디로 놀랍다. 하나는 ‘행여 개미허리를 밟을 수 있다’는 점이고, 다른 하나는 ‘혹시나 앉은뱅이꽃 짓이길지 모르니 조심하라’는 것이다. 사물에 인격과 인정을 놓는 이런 멋진 시조를 최재선 시조집에서 볼 수 있다는 것은 축복이 아닐 수 없다. 이 시는 생태적 상상력에 바탕을 둔 휴머니즘을 담은 작품이다. 그는 에코필리아를 주창하면서 인간중심주의에 비판적인 주제를 즐겨 다룬 시인이다. 또 봄날은 가만가만 걸어란다. 숨 고르며 꽃 속살 보지 못해 봄 한철 애틋하고 새들의 짝짓는 모습 지나칠지 모른다는 시인의 유머가 풍겨나는 현실인식이 ‘꽃 속살’과 ‘새들의 짝짓는 모습’으로 표출되고 있다. 탈인간중심주의를 표방하는 이런 생태지향성은 그가 그리는 그림이 얼마나 큰지, 그가 얼마나 큰 시인이지를 잘 보여준다고 하겠다.
‘행여나’ ‘혹시나’하는 부사, ‘사뿐사뿐’, ‘가만가만’ 등의 구절에 보이는 측은지심은 그의 종교적 소신과 구도자적인 자세와도 일맥상통한다고 하겠다. 미물의 생명마저도 껴안아 받아들이고자 하는 포용의 자세를 우리는 이 시에서도 확인할 수 있다. 이 포용은 시인의 또 다른 미학적 존재 모습이라 할 수 있다. ‘나’ 참모습은 ‘너’와의 관계 속에서 나타난다. ‘나’는 ‘너’를 위하여, ‘너’는 ‘나’를 위하여 존재할 때, 긴장과 갈등이 아닌 따뜻한 인정과 포근한 사랑이 괘를 같이 한다. 아리스토텔레스는 좋은 사람들과 함께 살아가는 것이 보람된 길이라고 했다. 가파르고 험난한 인생행로에 따뜻한 눈길과 손이 있음은 축복인 동시에 행복의 조건이기도 하다. 그러나 현대는 넘쳐나는 물질의 범람으로 위기를 맞고 있으며, 헤퍼진 정신의 범람으로 어지러워졌다. 이 시조는 이런 삭막한 세파에 경종을 울린다.
‘인간은 만물의 영장이다’라는 인간중심주의는 우리 정신의 황폐화가 얼마나 심한가를 암시한다. 그러나 시인은 예기치 않은 순간에 볼 수 없었던 것을 보게 되고 들을 수 없었던 소리를 듣게 된다. 여차하면 인간의 발걸음에 수많은 생명의 신음이 들려올 수 있음을 경고하면서 독자로 하여금 인간도 한갓 동물에 다름 아님을 알게 해주고, 모든 우월적 조건은 버려야 됨을 알게 해준다. 시적 화자는 우월적 인식, 다시 말해 인간중심주의는 축복의 삶을 가져다주지 못했음을 깨닫는다. 끈질기고 숨 막히는 인간중심주의와 이와 대비되는 자연계를 대비함으로써 시인은 우리를 살게 하는 것이 무엇인가를 깨닫게 하고 있다. 생명에 대한 존중감이 없이 세속적인 삶을 사는 사람들에게 시인은 생태적 상상력을 일깨워 준다.
아무나 산이라는 명패를 달 수 없다
형상에 벗어나고 높이가 어긋나도
색다른 나무일망정 아울러야 결국 산
높은 데 솟아올라 우뚝 선 산봉우리
산새들 품이 되고 바람의 안방 되어
침묵의 언어 하나로 경외해야 끝내 산
산이란 이름 속엔 겸손이 동거한다
오르면 오를수록 고개를 숙였다가
비로소 우러르면서 낮아져야 삼가 산
- <산> 전문
색다른 나무일망정 아울러야 결국 산이고, 침묵의 언어 하나로 경외해야 끝내 산이고, 비로소 우러르면서 낮아져야 삼가 산이라는 시인의 산에 대한 해석은 철학적 물음으로 우리에게 되돌아온다. 이 물음에 대한 답은 산이란 이름 속엔 겸손이 동거하는 자만 내릴 수가 있다. 산을 사랑하면서 산을 바라보며 욕심 없이 살려고 하는 시인은 누가 자신에게 산이 무어냐고 묻는다면, 아울러야 하고, 경외해야 하고, 우러르면서 낮아져야 산이 된다고 한다. 성철 스님의 말씀대로 동일률의 원리로 ’산은 산이다‘라고 언명하지 않는다. 속성의 영원성보다는 가변성으로 산을 정의한 것이다. 그것은 어쩌면 산을 망가뜨린 세상에 대한 냉소이며 거부이며 용서일 수도 있다. 혼탁한 세상, 소용돌이치는 시대의 물결을 바라보는 시인은 산에 대한 정의를 통해 인간세상의 향방을 재단한다. 산을 자신만의 시각으로 새롭게 보면서 ’산‘에 인간을 등치시켜 바람직한 인간세계의 길을 제시해주고 있어 큰 감동을 준다. ’산‘ 대신에 ’사람‘을 대체해도 해석상 전혀 문제가 되지 않는다.
사회의 모순에 대항하고, 현실의 부조리에 언어로 참여하는 것도 정치적 인간이 하는 일이다. 시인은 현실 정치의 도피자로서 언어로 말할 수밖에 없다. 시인은 말과 글로써 세상을 바꿀 수 있다고 믿는 지식인이다. 최재선은 <산>이란 시조를 통해 인간의 오만과 모순을 냉소적으로 풍자하고 있다. 인간성이 억압되는 시대는 풍자가 성행한다. 인간이 다른 동물과 다른 이유로 흔히 드는 것이 언어를 쓴다는 것이다. 언론의 자유는 인간에게 주어주는 기본권이다. 오만함은 신체적 억압 못지않게 인간의 영혼을 괴롭힌다. ‘산이란 이름 속엔 겸손이 동거한다’라는 의미는 높이 올라갈수록 겸허한 자세를 가져야 함을 뜻한다. 자신의 주장만 옳다고 하거나 타자나 약자를 무시하는 것이 갑질이라는 사실을 인식하지 못하는 사람은 지도자가 되어서는 안 된다. 정의롭지 못한 무리들이 현실의 정치를 어지럽히고 있는데, 지식인이 침묵하거나 현실 정치 세력과 야합하는 데 시인이 입을 다물어서는 안 된다. 그런 사회는 죽은 시인의 사회다. 산은 산다워야 하고, 사람은 사람다워야 사람이라는 시적 화자의 판단은 속성의 가변성을 전제로 하고 있다.
문설주 돌쩌귀에 검붉게 곰삭은 녹
싸락눈 내리듯이 사뿐히 지우고서
기어이 오시겠지라 끝물 겨울 가기 전
가물어 마른 처마 축축이 적시고서
속울음 목에 넣고 눈물은 숨기고서
가루비 흩뿌리시며 봄날처럼 그립게
주어는 맘속 두고 목적어 감추고서
서술어 하나로 된 고백체 문장으로
그립게 오시겠지라 구구절절 애틋이
- <기다림> 전문
최재선 시인은 섬세한 비유로 탁월한 서정성을 격조있게 조탁하는 시인이다. 시조는 종장의 첫째 마디 3음절과 둘째 마디 5~7음절을 꼭 지켜야 하는 것 외에는 각 마디에 한 음절이 가감될 수도 있다. 이 시조는 종장이 전부 3543의 음수율을 가지고 있고, 이뿐만 아니라 전체 시조 전부 초장은 3434로, 중장도 3434 율격이 반복되고 있는데, 이 율격이 반복되면서 일상적 현실에서 '그리움'의 의미를 독자에게 강하게 보여준다. 이때 '그리움'은 '기어이 오시겠지라'와 ‘가루비 흩뿌리시며’, ‘그립게 오시겠지라’라는 구수한 전라도 방언으로 인해 ‘주어’ ‘목적어’ ‘서술어’가 하나의 고백체 문장으로 읽힌다. 그러나 그리움을 '겨울 가기 전', '봄날처럼'과 연결하면 이 어구에 앞서 나오는 ‘싸락눈’과 ‘가루비’는 때 묻지 않은 순수하고 순결한 의미를 가진다. 시인은 ‘주어는 맘속 두고 목적어 감추고서 서술어 하나로'라는 말을 통해 ‘속울음은 목에 넣고, 눈물은 감추고, 구구절절 애틋하게 기다린다’는 것을 암시한다. 따지고 보면, 이런 정형화된 율격도 언어놀이나 마찬가지다.
처마에 의지하여
바람을 바다 삼아
짓느니 밀물소리
내느니 썰물소리
한 생애 짭조름하여
갯내음이 푸지다
- <풍경> 전문
이 시조는 인생을 갯내음에 비유하고 있다. 물론 이때의 비유는 바다 같이 넓은 품을 품으라는 투의 교훈이 아니라 짭조름한 소금기처럼 짜고 매운, 세상사의 온갖 영욕을 겪는 인생이라는 의미다. 시인은 어느 날 처마 끝에 기대어 인생을 반추해본다. 시조를 짓고, 책을 내고 하면서 한 생애를 살아가지만 그러나 그러한 세속적인 가치도 흐르는 세월 앞에서는 짭조름할 뿐이다. 밀물소리 썰물소리로 인생의 업앤다운을 표현했지만, 시인의 눈에는 인생의 맛이 달디 달기만 할 수 없을 것이다. 전체적인 문맥으로 봐서 희비의 삶을 짜게 느끼게 하는 것 같다. 세월의 위대성에 대한 감탄의 흔적도 없지 않다. 이처럼 짭조름한 것이 인생이고 또한 삶의 길이지만 내가 입술을 댔던 낡은 사발에 누군가 또 다시 입술을 대는 것처럼 인생은 밀물 썰물처럼 오르막도 내리막도 있는 것이 아닌가. 그럴 수밖에 없는 것이다. 이 시조에는 서민적인 삶의 애잔함이 녹아 있다. 인생이란 무엇인가? 이 작품은 인생의 길을 <풍경>이란 시적 소재로 하여 나타내고, 끝없이 들어오고 나가는 인생의 희로애락을 갯내음으로 토로한 시조다. 인생을 하나의 썰물 밀물로 보고 그 흥망성쇠의 길을 숙명적으로 가야하는 인간들의 슬픈 운명을 그리고 있다.
다. 성찰의 삶, 내면의 깊이
아리스토텔레스는 가장 행복한 삶은 관조적 삶이라 했다. 시인에게 있어 삶은 시조 창작과 결코 분리되어 있지 않다. 그러나 이 말은 시조 창작의 대상이 생활이라는 것을 의미하지는 않는다. 시인은 생활을 대상으로 하여 그 현상의 이면을 들여다보기도 하고 다른 한편으로 생활로부터 벗어나 삶의 민활성을 되찾는다. 이는 시조 창작을 통해서 진정한 삶에 대한 감각을 얻는다는 의미다. 그의 시조 창작은 세상읽기에서 출발한다. 그것이 개념으로 형성되는 것이 아니라 감각으로 꾸며지기 때문이다. 최재선 교수의 시조 창작은 대체로 세상읽기의 소산이다. 따라서 시조는 삶의 한 모습인 것이다. 시인은 사회 현상이나 자연현상, 그리고 개인적 체험 즉 삶의 체계 속에 내재한 여러 기억들을 읽어낸다. 시인은 이러한 삶의 성찰을 통하여 일상적 삶 속으로 매몰되기 쉬운 본성적 감성을 찾아낸다.
겨울잠 깊이 든 비 기지개 활짝 켜며
서로의 손목 잡고 모처럼 나선 길목
적적해 되돌아갈까 노래하는 까치 떼
길마다 매화가지 오지게 등불 켜고
산마다 눈새기꽃 푸지게 불 밝히니
끝끝내 오고야마는 걸판지게 훤한 봄
- <경칩에 오는 비> 전문
최재선 교수는 팬데믹 시대 속에서 주체적 자아와 정서를 모국어로써 견결히 유지하려 한 시인이다. 그의 시에서 집요할 정도로 유지되고 있는 주체적 자아복원의 시정신은 그것이 상실의 시대를 배경으로 이루어지고 있다는 점에서 주목된다. 이 시조는 적적한 생활을 숙명으로 받아들이는 시적 화자 ‘나’의 내면에 대한 깊은 성찰이 전면에 드러난 작품이다. 모처럼 손목잡고 나섰지만 길목에 서서 적적함을 느끼고 되돌아갈까를 고민하는 까치 떼가 봄을 맞아 매화가지, 눈새기꽃 핀 것을 보면서, 끝끝내 봄을 불러온다는 내용이 감동을 준다. 팬데믹이라는 암울한 상황에서 일상을 잃어버린 현대인이지만 무기력함을 이겨내고자 하는 시인들의 내면 목소리가 잘 드러난 작품이라고 할 수 있다.
후드득 내린 꽃비 행여나 그대이랴
어딘가 꽃잎으로 누워서 잠들 세라
나서지 못한 봄 길을 발만 동동 구르니
- <꽃비2> 전문
<꽃비2>란 시는 세상읽기에서 출발한다. 시인의 관심은 봄이 왔지만 봄을 느끼지 못하는 눈 먼 걸객처럼 일상을 잃어버린 현대인은 폐허화되어가는 삶을 살고 있다. 우리 삶의 터전이 훼손되고 있으며, 그래서 이 시조는 많은 사람들이 생동하는 봄을 느끼지 못하고 잠들어버릴 것을 걱정하고 있음을 보여준다. 이러한 상실감은 곧 본성적인 삶에 대한 그리움으로 나타난다. 오늘날 팬데믹 상황에서 현대적 삶은 사람들로 하여금 본성에 호소하도록 만들지 않는다. 오히려 욕망의 속박에서 놓여나지 못하게 한다. 그렇기 때문에 사람들은 자기의 터전을 스스로 가꿀 수가 없다. 특히 방역지침으로 인한 사회적 거리두기는 사회적 인간 파괴의 가장 구체적인 모습이라고 할 수 있다. 종장 ‘나서지 /못한 봄 길을 /발만 동동 /구르니’는 이런 현실을 적나라하게 보여준다.
달빛은 구름 뒤에 수줍게 낯 감추고
개구리 울음소리 꽃으로 함박 피니
하매도 논배미 나락 관절마다 앓을 터
- <조짐> 전문
이 시의 화자는 ‘달빛’과 ‘나락’의 관계에 초점을 맞추고 있다. 논배기 나락이 달님을 보고 싶어 하나 구름 뒤에 숨어 그 모습을 감추고 있는데, 실없는 개구리 소리만이 들려오니, 나락의 관절은 마디마디 쑤시고 에릴 조짐이라는 시인의 상상력은 타의 추종을 불허한다. 엇박자 속에 살아가는 인생살이의 모순을 묘파한 작품이라고나 할까. 마음먹은 대로 된다면 인생사 무슨 걱정이 있으랴만, 삶은 복잡계적 질서 속에서 좌충우돌하기 십상이다. 그럼에도 사람들은 이러한 도시의 주인으로 스스로 위대한 시민이라는 자부심을 갖고 있다. 그러나 도시적 삶은 그 화려한 겉과 달리 그 속 관절은 앓고 있는 것이다. 어떤 점에서 현대의 삶은 온전하지 않다고 할 수 있다. 우리가 온전한 삶을 기다리며 살고 있는지도 모른다. 이러한 현실은 곧 인간세계나 생태계나 마찬가지다. 시인은 이러한 현실을 ‘조짐’으로 감지한다. 그리고 본성적 삶의 회복을 생각한다. 다음의 <봄 오고 꽃 피는 방식>은 삶에 대한 깊은 통찰을 통한 삶의 진정성, 경건성을 추구하고 있다.
온다는 엽서 없고 오리란 소문 없이
간밤에 뜬금없이 문 앞에 왔습디다
봄날은 풍문으로도 헤아릴 수 없어라
입덧을 단 한 차례 제대로 하지 않고
어느 날 양지쪽에 탯줄을 자릅디다
봄꽃이 몸 푸는 날을 예정할 수 있으랴
- <봄 오고 꽃 피는 방식> 전문
시인은 식물이 꽃을 피워내는 과정을 여인의 출산에 비유해서 잘 풀어내고 있다. 봄은 소리 소문 없이 다가오고, 꽃 또한 자연의 순환 이치를 그대로 보여 준다는 측면을 ‘몸을 푼다’는 말로 표현하고 있지만, 종장의 마지막 43 음수율을 따르다 보니, ‘예정할 수 있으랴’ 앞에 놓일 ‘어찌’라는 부사가 생략되었다. 독자들은 협조의 원리에 따라 생략된 말을 복원해서 읽고 이해해야 할 것이다. 시적 화자는 의인화된 봄이 뜬금없이 문 앞에 온 것을 알고, 꽃은 임산부가 되어 입덧 한 번도 하지 않고 출산을 한다. 자연 만물의 이치를 인간관계와 융합해서 표현하려는 서정적 자아의 시정신이 잘 드러나 있다. 시인은 이런 깨달음을 기반으로 해서 익숙한 길, 관습화된 삶을 버리고, ‘입덧’, ‘탯줄’, ‘몸 풀다’ 등의 어구를 써서 출산의 의미로 풀어낸다. 임산부로 환치된 봄꽃의 변신을 통해 시인은 비유된 새로운 감각세계를 생성해낸다.
4. 계승과 변주, 최재선 시조의 현대성
스피어즈는 현대의 특성을 ‘단절’이라는 말로 요약한 바 있다. '단절'이란 어떤 대상과도 관계를 끊는 것을 의미한다. 다시 말하면 그것은 이 시대에 오면서 모든 사물들이 내적이든 외적이든 서로 맺고 있던 관계를 상실하고 하나의 원자적 개체가 되어 존재함을 말한다. 일종의 불연속의 관계를 나타낸다고 할 수 있다. 인간과 인간의 관계, 인간과 자연의 관계, 인간과 사회의 관계, 나아가 인간과 신의 관계마저 그렇다고 할 수 있다. 이러한 현상을 소외라고 불러왔다. 현대인들이 서 있는 자리가 단절의 공간이라면, 그 공간을 최재선 교수는 어떻게 인식하고 형상화하는가로부터 최재선 시조의 현대적 의미를 밝힐 수 있지 않을까.
흰 낮달 겨울나무 잔등에 업히어서
엄마 젖 먹고 난 아가처럼 웃고 있다
봄날이 따로겠는가 웃음꽃 피었으니
겨울 산 맨몸으로 나란히 잇닿아서
깡마른 나뭇가지 가리며 덮고 있다
봄날이 따로겠는가 저토록 살갑나니
- <봄날이 따로이겠는가> 전문
흰 낮달과 겨울 산을 통해 봄날의 의미를 새롭게 해석하는 시다. ‘업히어서’와 ‘젖 먹고 난’ ‘아기처럼 웃고 있다’ 등의 표현은 내용적인 측면에서 표방하는 순진성과 자연성에 대한 긍정이다. 봄날의 개념을 생태학적인 의미로 풀어내기보다는 의미론적으로 해석해서 웃음꽃이 피면 계절에 관계없이 봄날이라고 한다. ‘맨몸으로’ ‘나란히 잇닿아서’ ‘깡마른 나뭇가지’ ‘가리며 덮고 있다’ 등의 어구는 서로 의지하고 돕는 상보적 관계를 나타내면서 따뜻한 관계의 필요성을 보여준다. 어쩌면 시적 화자는 자연 속 사물은 저렇게 서로 업어주고 덮어주고 하는데, 인간사회는 그렇지 못하다는 것을 넌지시 비판하는지도 모르겠다. 시인은 봄날을 ‘웃음꽃 피었으니’와 ‘저토록 살갑나니’로 각각 표현했다. 이러한 각 종장의 마지막 어구는 시적 자아와 거리감이 없이 표현되어, 이 거리감 없음 그 자체가 주체적인 존재상을 충분히 말해주고 있다.
눈발이 흩날린다 논산천안 고속도로
백제의 고도 부여 매섭게 바람 불고
백마강 꽃물 들였을 그 순장의 꽃잎들
스스로 숨 끊으며 마지막 남겼을 말
누구는 행복했고 누구는 슬펐으랴
풀리지 않는 물음표 눈발같이 날린다
- <부여를 지나며> 전문
이 시 역시 종장의 율격은 3543으로 시조의 정체성을 잘 유지하는 입장에서 기술되고 있다. 이 시조는 백제의 슬픈 역사 속 삼천 궁녀들을 ‘순장의 꽃잎들’로 표현하고 있는 데서 문학적 성취가 빛난다. ‘스스로 숨 끊으며 마지막 남겼을 말’에 누가 행복했고 누가 슬펐을까 하고 묻는 시적 화자는 풀리지 않는 삼천궁녀들의 수수께끼를 안고 고속도로를 달리는데, 눈발이 흩날린다. 시인의 물음도 눈발에 함께 흩어져 버렸을 것이다. 시적 화자는 역사적 사실 여부와 관계없이 순장소녀처럼 목숨을 던진 그녀들의 사연을 어루만지며 그 절명의 시간을 잊지 못하고 아파해주고 있다. 즉 이 시조의 주제는 아픈 역사를 잊어서는 안 된다는 것이다. 이를 시인은 역사시간에 배운 백제의 멸망에 관한 지식을 바탕으로 ‘순장의 꽃잎’을 통해서 낙화암에 얽힌 삼천궁녀의 애달픈 사연을 잘 형상화하고 있다. 편리한 삶은 이루어지고 있지만 인간적인 따뜻한 사랑이 결여된 오늘의 현실에서 잊혀져가고 사라져갔지만, 그 여인들의 마지막 남긴 말을 상기하지 않을 수가 없다.
돌아서 올라가라 /쉬면서 더디 가라/ 산새도 단걸음에 허공을 걷지 않네
하물며 인생행로는 /멈추듯이 가소서
산길도 고비마다 /고갯길 다 있거늘 /낮은 듯 모자란 듯 겸손히 넘으소서
어느새 예순 고갯길 /길목마다 꿈같소
바람도 친구이고 /나무도 벗이라오/ 멀리서 매화향기 층층이 날아드네
산중에 벗 지천이니/ 산 밖 세상 그리리
- <산중> 일부
시인이란 일상적 삶을 영위하면서도 또 하나의 세계를 추구하는 사람이라고 할 수 있다. 작가는 늘상 자신의 새로운 삶을 찾아 존재하고자 한다. 작가와 일상인은 표면적으로는 별 차이가 없다. 그러나 작가는 생활이 바쁘고 주어지는 시간의 공백 속에서 느끼는 무료함을 자신의 지각을 갱신하기 위해 활동하는 사람이다. 그의 시조는 바쁜 생활 속에서 걸러낸 무한한 초월 의지를 접목시켜 놓은 것이기에 독자의 공감을 받는다고 볼 수 있다. 이 시에서 나타나는 의식상의 특징 중의 또 다른 하나는 자기만의 창조적 공간을 확보하려는 남다른 애착이 보인다는 점이다. 예순 넘긴 삶이란 이 시에서 말하고 있는 것처럼 과연 ‘길목마다 꿈같을까’. 멈추듯이 가야할 이유다.
이 작품은 불확정성의 우주적 원리를 삶의 원리로 적용하여, 기다림의 미학으로 건져낸다. 이름-자리 체계 속에서 자기의 자리를 지켜내며, 슬로우 라이프 상태에서 기다림의 미학을 싹틔우는 것이다. 이는 작가로서의 존재의식에 눈을 뜨면서 작가의 시야가 내면으로 확대되어 가고 있다는 증거다. 삭막한 콘크리트 문화 속에서 살고 있는 도시인의 마음속에는 산중으로 떠나고자 하는 심리와 함께 자기만의 고독한 시간에 대한 동경이 싹트게 마련이다. 정보가 홍수를 이루면서 많은 도시인들은 창조적 공간 갖기를 소원한다. 자연과 멀어져 있는 도심의 생활공간은 자연스럽게 작가를 산속으로 밀어 넣고 있는 것이다. 산으로 오르는 사람에게 자연 속 생명을 가지는 무수한 소품들, ‘바람’도 ‘나무’도 모두 친구이고 벗이다. 스피드로 대변되는 현대사회의 허기를 메워주는 매개로써 산 오르기는 안성맞춤이기에 시적 화자는 산중의 결과로 얻은 창조적 자기 공간에 고독한 사색을 불러들인다고 할 수 있다. 이 시조의 압권은 역시 산중 고갯길을 인생 고개로 환치시켜 이중적으로 의미를 해석하게 장치한 데 있다고 하겠다.
내 자리 /너의 자리/ 자리쌈 / 하지 않고
윗자리 /아랫자리 /한마디/ 불평 없어
허물어 /내릴 일 없는/ 화기애애/ 묶인 힘
- <담> 전문
대부분의 갈등은 경계의 불확실성에서 나온다. ‘너의 자리’와 ‘내 자리’가 분명하다면 싸울 일도 없다. 현대로 오면서 ‘담’은 경계를 지어주면서 우리 사회에 단절이 란 달갑지 않은 선물을 안겨주었다. 경계가 우리들 삶의 특성으로 드러났다는 것은 삶의 본질에 대한 새로운 자각을 요구한다는 것이다. 그것은 19세기적 인간관을 벗어나 소위 20세기적 인간관을 형성한다. 19세기 인간관이란 다윈의 이론에서 읽을 수 있었던, 인간은 자연과 연속된 존재라는 명제를 중심으로 한다. 그렇기 때문에 인간의 삶과 동물의 삶 사이에는 어떤 단절도 존재하지 않는다. 동물적 삶의 투쟁 원리가 그대로 인간적 삶의 원리가 되는 것이다. 그러나 이러한 인간관은 전복된다. 이제까지 한결같이 수용되던 소위 자연과 연속된 존재로서의 인간, 자연 법칙의 지배를 받는 인간, 무엇보다도 합리적이고 결정적인 세계관에 종속되어 온 인간이라는 개념을 벗어난다. 우리의 삶 속에는 어떤 정확성도 존재하지 않는다는 의식, 모든 사물의 본질 속에는 근본적으로 불연속성, 곧 단절이 존재한다는 의식이 팽배하기 시작한 것이다. 그래서 시적 화자는 경계를 분명하게 해서 갈등을 불식시켜 주는 것으로써 ‘담’을 설정했지만, 종국에는 ‘묶인 힘’으로 표현된다. 완전무결체로 기능하지 않는다는 말이다.
늦가을 소쇄원 앞마당 대나무 숲
장대비 우둑우둑 쏟아져 내리느니
직립한 대나무 사이 이물없이 살갑나니
그사이 가늠하며 그대를 그리느니
차가운 빗물에도 그 거리 젖지 않아
지그시 가늠하나니 통통하게 곁 되니
가을 끝 겨울 와도 색다른 체온으로
언제나 떨지 않게 눈앞에 손 내밀며
대나무 사이로 서서 말랑말랑 품나니
- <사이> 일부
내가 진정한 나로 재탄생하기 위해서는 나를 둘러싸고 있는 껍데기를 벗어던져버리고 ‘참나’로 거듭나야 한다. 이 시조는 ‘경계’를 제재로 한 시다. 그래서 날마다 시인은 사이와 사이를 오간다. 경계에 서면 분절이 없어져서 타성에 젖어 사는 게 아니라 탄성으로 살아갈 수 있다. ‘이물없이 살갑다’는 관점이 우선 남다르다. 남다르다는 것은 현실반발성이 강하다는 말이다. 그에게 사이는 ‘일상이라는 터를 박차고 오르는 힘’이다. 일상은 비상의 보고이자 비상할 수 있는 상상력의 텃밭이다. ‘젖지 않거나 곁 되는 것’은 전부 사이에서 가능하다는 주장이다. ‘그것은 자조의 울림, 의식적 자아가 주체적 자아를 지키고 발전시키며 완성하기 위한 치열한 몸부림일지도 모른다. 나와 다름을 조화롭게 끌어안고 거기서 새로운 창조의 꽃을 피우는 매개가 사이 미학이다. 영국의 낭만파 시인 셀리는 ‘사랑의 철학’이라는 시를 통해 경계와 경계 사이에 존재하는 이질적 사물과 사람이 섞여서 하나가 되는 과정을 노래하고 있다. 경계는 넘을 수 없는 벽이 아니라 다리를 놓을 수 있는 아름다운 사이다. 그 사이에 의식을 놓는 시적 화자는 그 경계에 서서 아름다운 차이를 발견하고 이를 신명나게 즐긴다.
아흔을 사시고서 게다가 얹힌 두 해
살 만큼 사셨으니 남들은 호상이라
고인이 돌아가신 길 다시 올 수 없는 길
마흔둘 둘째 아들 홀연히 보내놓고
산목숨 산 게 아냐 가슴에 묻은 새끼
그날로 이미 치른 상 정신 줄 내려놨네
어차피 살다 보니 모질게 붙은 목숨
마지막 순간까지 새끼들 챙기시곤
먼저 간 아들일랑은 시르죽게 잊었네
동진강 마른 억새 바람에 깔묻히고
하늘엔 달 한 조각 노루잠 덧드는데
어머니 저녁 잡숫고 초저녁잠 드실까
- <문상> 일부
최재선 교수는 '문상'을 통해 사모곡을 읊는다. ‘마흔둘 둘째 아들 홀연히 보내놓고/ 산목숨 산 게 아냐 가슴에 묻은 새끼/ 그날로 이미 치른 상 정신 줄 내려놨네’는 우울한 어조로 어머니의 정신적 충격을 드러내고 있다. ‘하늘엔 달 한 조각 노루잠 덧드는데/ 어머니 저녁 잡숫고 초저녁잠 드실까’ 조마조마하는 시적 화자의 시적 수사는 독특하다. 그 독특함은 세계 안에 놓인 대상을 비틀어 보는 시인의 시각에서 비롯한다. ‘동진강 마른 억새 바람에 깔묻히고’라는 표현이 결코 긍정적이고 밝은 세계 인식의 소산이라고 하기는 어렵다. 시인은 어머니의 부재를 애타하고 부정하고 절망하는 것 같다. ‘호상’이라는 죽음에 대한 일반인의 생각은 시적 화자에게 그대로 반사되지 않는다. 시를 읽고 느끼는 쾌감의 정도가 크고 높다. 최재선 시조중 가장 가슴 아픈 작품이다.
Ⅲ. 나오며
지금까지 포용을 근간으로 하는 최재선 시인의 시적 지향이 타자들의 아픔을 다둑이는 치유성에 힘입어 감동적인 울림을 주고 있음을 우리는 경험했다. 서정적 상상력에 기댄 타자성에 대한 고뇌와 아픔에 대한 탐구를 포커스로 하는 최재선의 시조는 시적 사유의 심오함이 빚어낸 형상미학의 결정체라고 하겠다. 사물 해석에 대한 새로움, 즉 현대성을 유지하면서 종장의 정형성을 그대로 살리는 최재선 교수의 시조짓기는 열린 시조를 표방하면서 시조의 정체성에서 일탈하는 모습을 보여준 일부 시조와는 근본적으로 다르다. 한마디로 시조다움을 잘 지켜나가면서 자신만의 개성을 확보하는 전략을 구사한다는 점이다. 최 시인은 다른 사람보다 상처나 아픔에 정서적으로 민감하다. 소시민적 삶에 대한 관심을 통해 깊은 울림을 주는 몇 안 되는 시인 중의 한 사람이라 하겠다.
한편으로 최 교수의 시조는 아리스토텔레스가 말하는 이성적 삶의 실천이 형상화된 것이라 하겠다. 시인은 이러한 자세가 가장 행복한 생활로 인도한다고 믿고 있기 때문이다. 욕망을 절제하는 데서 얻는 갖가지 고통을 통하여 인간의 모든 품위는 닦여지고 길러진다. 그러한 고통에 길들여진 사람만이 남의 아픔을, 슬픔을, 분노를 확실히 알 수 있다. 상처받은 자들의 옆에서 같이 호흡한다는 측면에서 그의 시적 대상은 언제나 타자성을 갖는다. 이런 문학적 지향은 전체 시조를 관통하고 있다. 최 교수의 시조는 삶의 본질을 바라보는 시인의 날카로운 눈과 따뜻한 가슴 덕분에, 시인의 정서가 예술이라는 프리즘에 여과되어 잔잔하면서 차분한 목소리로 독자에게 들려진다. 크나큰 감동은 바로 소시민의 아픈 심경을 투영하는 묘사의 생생한 구체성 때문이 아니겠는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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