돌림자
이형국
사물마다 이름이 있다. 추상적인 그 무엇에도 이름이 있다. 그중에 사람에게는 한두 개의 이름은 보통이다. 이름에는 외자 내지(나) 두 자에서 (가 일반이며) A4용지로 두 행 정도의 긴 것도 있다.
↖(이름의 종류도 다양하다.)
본명을 비롯하여 아명, 자, 호, 필명이 있다. 추사 김정희는 필명이라 할 수 있는 호가 백 개가 넘는다고 한다. 동북아 문화권의 특징이다.
우리 형제에겐 (집안엔) 이름에 관련된 얘기가 하나 (가족사가) 있다. 사소하나 심각한 일이랄 수도 있는 얘기다.
집안의 족보를 소개하면, 신라 6촌 중 하나인 알천 양산촌의 알평공을 시조로 한다. 중간에 실전된 세보世譜가 이십 칠팔 세世에 이른다고 한다. 그 후 신라조 소판공 거명을 중시조로 하여 고려말 익제 이제현을 거치면서 맥을 이어가 지금에 이르렀다.
경북 영일 기계라는 산골에 일가를 이룬 후 하계공파로 분파하여 사십 세世에 이른다. 비학산에 둘러싸인 고요한 산골에 정착하여 집성촌을 이루었다.
내가 사십 세 손인데 형炯이란 돌림자를 쓴다. 형은 물론 동생이나 누님까지도 (같은) 돌림자를 쓴다. 그런데 이 돌림자의 위치가 문제 되었다. 요즘 세대는 사라지는 추세지만, 예전에서(엔) 이름의 글자 수는 두 자 아니면 외자였다. 외자이면 돌림자를 따르지 않지만, 두 자이면 거의 돌림자를 따랐다. 알다시피 돌림자는 조상을 찾을 수 있는 계기도 된다.
우리 이가李哥들의 돌림자는 흙土, 쇠金, 물水, 나무木, 불火의 오행으로 반복되고 있다. 그러나 그 윗분들의 돌림자는 알아챌 수가 없었다. 하지만 돌림자는 분명히 있었을 거지만 분석을 해내기엔 (유추하기엔) 지식의 한계가 있었다. 고조부 함자는 x규圭셨고, 증조부께서는 종鍾x 셨다. 조부께서는 x우雨셨고, 망부께선 상相x셨다. 여기에서도 하나의 규칙을 확인할 수 있다. 세계世系별로 돌림자와 나머지 한 자와의 순서도 반복한다.
그렇다면 아버지의 돌림자 순서가 앞이니. 우리 형제의 돌림자가 뒤로 가야 하는 순서이다. 하지만 보시다시피 火(⺣)가 앞에 그대로다. 우리 항렬의 다른 친척들을 확인해 보니 다들 뒤쪽에 자리하고 있었다. 사촌조차도 그러하였다. 내가 큰형 회사의 경영을 도와주고 있었을 때다. 당시 형의 회사는 거의 부도 직전이었다. 그때 형이 나에게 “니도 알아√놔라.” 하면서 이야기했다.
↖하소연이었고 변명이었다.
“왜 우리 집만 돌림자를 잘못했는지, 참! 상할배가 어쩌다가 깜빡하셔 이래놨는지.” // ‘상할배’란 증조부를 칭함이다. 조부께서 일찍 졸하(돌아가)셨기에 증조부가 집안 전체를(을) 주도하고 계셨다. 큰형의 돌림자를 보면, 증조부님이 앞이고 조부님이 뒤, 부친이 앞, 큰형이 뒤여야 한다. 그런데 증조부님이(도) 일찍 졸하(돌아가)셔서 계시지 않았던 조부님을 빠뜨렸던 탓이 아닌가 짐작할 뿐이다. 그 덕분(?)에 (그런 연유로) 우리 형제들은 돌림자가 줄줄이 뒤가 아닌 앞이 되었다. 옛날 옛적도 아니고 요즈음 세상에서 돌림자가 앞이든 뒤든 무슨 상관있겠느냐마는 큰형은 생각이 달랐다. 나도 그 말을 듣고 나니 기분이 찝찝하였다.
작은 산골이었지만 천석꾼이라며 그 고을에 명망이 높던 집안이었다. 어찌 된 셈인지 우리 형제 대代에 들어서(는) 하는 일마다 어그러졌다. 큰형은 두 차례의 사업 실패를 겪었고 작은 형도 신발√사업 실패로 회사 문을 닫았다. 동생도 토목업을 하기는 하나 운영이 힘들고 나조차 신용불량자 처지니, 어찌 된 영문인지 (하나같이) 되는 일이 없다.
게다가 큰형 앞으로(에게) 상속되었던 집안 재산을 첫 번째 부도 직전에 형이 삼촌 앞으로 명의 신탁해 놓았다. 그런데 (화를 피하려던) 그 재산은 삼촌이 갑작스럽게 돌아가시는 바람에 사촌 동생에게로 넘어갔다. 큰형은 여러 가지 상황 땜(때문)에 환수를 차일피일 미루다 사촌에게서 넘겨받지 못했다. 소송을 준비 중이지만 세월이 너무 흘러 돌려받기가 불가능할 것 같다.
(시류가 험난했을 뿐이지) 큰형의 한탄이 잘못이라고만 치부할 순 없잖은가(수 없다). 고향에만 해도 그렇다. 일가 내에 국회의원 등 정,(·) 재계 방면으로 자수성가한 같은 돌림자의 형제들은 (돌림자가) 모두 뒤편에 위치한다. (큰형 재산을) 횡재를 만난(한) 사촌도 뒤편에 위치한다.(마찬가지다.) 우연이라 하기에 뭔가 마뜩잖다.
지금도 형과 만나면 돌림자 얘기를 한다.
“그때 마, 이름이라도 바꿨으면 어떻게 됐겠노. 사대조 오대조 빠지지 않고 봉사해도 늘 살림이 이 꼴이니, 조상의 음덕, 음덕 카는 것이 어째 요렇게도 없노.” // 음복주 한 잔 마신(걸친) 형이 호탕하게 웃으며 부르짖는다. (헛웃음 지으며 탄식한다.) 씁쓸하다. (하기 짝이 없는 제삿날이다.)
↖가슴 속이 꽉 막힌 듯하다. 내 처지도 다름이 없으니 말이다.
이제 자식 대엔 돌림자를 바로 세워 놓았으니, 남 못지않게 살아가길 바란다. (바라고 또 바란다.)
(2023.03) (11.6매 1651자)
고래 심줄
김상영
촌구석에서 배달 우유라니 분에 넘치는 일이다. 그래도 받아먹게 된 건 아내 건강 때문이다. 삼겹살 석 점을 마지못해 집을 정도로 육식을 싫어하는 체질 탓에 풍요 속 영양실조인 사람이다. 그 부족분을 채우려 팩 우유라도 사 나르자니 대중없고, 무엇보다 속이 불편하였다. 먹었다 하면 화장실로 직행하기 예사니 딱한 노릇이다. 따뜻이 데워 넘겨도 위장이 너그럽지 않았다. 갱죽이나 속 편히 먹을까, 영양가 있는 음식들을 두루 먹질 못하니 낭패였다. 굳이 털어놓자면 대개(게) 하나는 되게 좋아한다. 그렇다고 소고기보다 비싼 걸 자주 대령할 순 없다. 콩과 더불어 완전식품이자 고기 대용으로 믿고 있는 우유에 대한 미련을 떨칠 수 없었다. 그러던 중 대구 처제가 권한 ○○우유가 가뭄 끝에 단비처럼 맞아떨어진 모양이었다.
주문 전화를 넣자마자 읍내 ○○우유 대리점 주인이 시오리 재를 넘어왔다. 몇 달 전에 판촉차 동네를 훑어나갈 때 시식 우유조차 되 밀며 문전 박대했던 그 영감님이었다. 맛보기 우유를 널름 받아 마시면 내치기가 힘겨울 것 같아서다. 하도 깍쟁이 같은 세상이라 일단 밀어내고 보는 습관이 몸에 밴 까닭이기도 하다. 적군 대하듯 단호한 내 태도가 찬 바람처럼 냉랭했을 것이다. 우유 받을 형편 되는 집이라며 추천했었다는 옆집 지원네 할머니가 무색하게끔 말이다.
아내가 자청했으니 이번엔 주객이 바뀐 꼴이었다. 영감님과 나는 야외 탁자의 긴 의자에 나란히 앉아 겸연쩍게 삐딱 인사를 나눴다. 골격이 장대하고 훤칠한 모습이 엿보이는 것이, 왕년엔 한가락 하던 사람이 아닐까 싶었다. 남자다움에 호감이 일자 미안한 마음이 뭉클하였다.
영감님이 주섬주섬 크고 작은 프라이팬 두어 개를 계약 선물이라며 탁자에 올렸다. 웬 횡재, 마주 앉은 아내 입가에 미소가 번졌다. 보나 마나 차이나일 텐데 저리 좋을까. 싱크대 속 묵은내 나는 프라이팬들은 어쩌려고 저러실까. 새 걸 들이려면 헌것부터 버려야지 싶은 생각에 골치가 아팠다.
“꽁치 고등어 들고 일어나는 거 안 봤나?”
떨떠름한 내 표정에, 살림은 내가 살지 당신이 사냐는 듯 주제넘은 내게 면박을 준다. 토닥대는 우리 부부를 흥미롭게 지켜보던 영감님이 돌하르방처럼 점잖은 미소를 지었다.
어르고 엿 먹인다는 말이 들어맞는 장면이었다. “하이고 말도 마소.”하며 아내가 짐짓 늘어놓는 내 흉이 걸판지다. 영감님의 맞장구에 더하여 세상사가 버무려지는 분위기에 취하여 내 우유까지 계약하고 말았다. 싸모님 혼자 오래 살면 뭐 하냐는 부추김이 주효한 거였다. 어쩌다 내가 동네북이 된 듯싶은데도 실실 웃음이 나오니 희한한 날이었다.
2년 약정에 월요일과 목요일 각각 여섯 병씩, 아쉬운 대로 ‘아침의 우유’다. 일주일에 하루 빠끔, 보약 챙기듯 엿새 내리 숨 가쁘게 먹어야 한다. 그래 인생 뭐 있나, 먹고 죽은 귀신 때깔도 곱다지 않는가.
그런데 열두 병이 현관에 놓인 적이 가끔 있다. 한꺼번에 왜 이리 많이 왔을까, 그때마다 달력을 봤더니 다음 차수 날이 빨간 날이었다. 방학 기다리듯 공휴일을 고대하겠단 느낌이 들었다. 주 2회 배달까지야 양해할만해도 너무하다 싶었다. 무늬만 아침 우유지 마트 것보다 신선할 리 없었다. 더구나 다음 달부터 가격을 올리겠단 예고문이 지로용지와 함께 들어있다. 밉다니 업자는 꼴이다.
아내는 입이 짧다. 맛있네, 한두 번 끝에 심드렁해지는 미각이다. 우유도 예외가 아니었다. 반쯤 먹다가 이 탁자 저 베란다에 방치하는 날이 더러 있다. 네 맛도 내 맛도 아닌 뜨뜻미지근한 자투리 우유를 마셔 뒤처리하는 건 나다. 그뿐이랴, 뚜껑만 딴 우유가 식탁에 얹혀 있길래 대신 마셔 없앤 날도 있었다.
“식혀놓은 우유 못 봤나?”
“무신 말이고?”
숭늉인가 식히게, 아내의 생뚱맞은 질문에 딸내미가 즐겨하던 유행어를 흉내 냈다. 딴엔 냉장 우유를 꺼내 실온으로 미지근해질 때 마실 요량이었나 보다. 멀쩡한 전자레인지가 지척에 있건만 미적댄 게다. 짧은 입 아니랄까 봐, 처제 집 그 삼빡하였던 우유조차 심드렁해진 심산 줄 다 안다.
“여보, 우유 끊었뿌자.”
아침밥 상머리에서 짐짓 아내 속을 떠봤다.
“지금 무슨 소리 하노?”
못 이긴 채 동조할 줄 알았던 아내가 되려 나를 나무란다. 작심삼일에다 우유부단까지 갖다 붙이며 어퍼컷을 먹인다.
‘평생을 같이 살아도 저 사람의 속을 아나 맹세를 한다고 다 지키려나~♬’
어느 가수의 ‘반’이란 노래 가사가 맴돌던 날이었다.
하긴 프라이팬 큰 건 파전 부칠 때, 작은 건 고등어 구울 적에 이미 써먹어 버렸다. 수월찮은 위약금 생돈 물 일도 현실이었다. 그러나 발끈한 정황을 볼 때 그깟 위약금이 아까워서 쩨쩨할 아내가 아니었다. 그보다는 내 건강을 염두에 두고 우유 끊기를 저어하고 있음이 분명하였다.
나도 우유가 싫지 않다. 초등학교 시절 읽은 플랜더스의 개가 마음에 자리하고 있어서다. 불쌍한 파트라슈(Patrasche)가 끄는 우유 수레엔 ○○우유를 닮은 유리병 몇 개가 달랑댔다.
젊은 배달 친구는 다마스를 몰고 나타난다. 우리 모닝보다 더 경차인 데다 낡았다. 배달용이라 개의치 않는진 몰라도 털털한 성격인 듯 보인다. 모범 된 젊은이인 줄 짐작하겠지만, 나이는 가늠하기 어렵다. 모자를 폭 눌러쓴 바람에 얼굴 한번 제대로 보지 못했다. 그럼에도 바깥마당을 서성이는 나를 볼 때마다 우유 배달 봉지를 탁자 위에 올려놓으며 꾸뻑 인사를 빠뜨리지 않는다. 인사성 밝으니 가정교육을 제대로 받았음이다. 짐작건대 그 영감님 아들이 아닐까, 싶다.
장가들어 식솔을 건사하는지 모를 일이다. 아기까지 딸렸다면 우유 배달로는 어림없을 가장 노릇이다. 몇 잡(job) 뛰는진 물어보지 않았다. 잰걸음에 호리호리한 모습이 마치 해병대 복무 중인 우리 손자 보는 듯 애처롭다. 지나친 표현일지 모르겠지만, 우유를 끊는다는 건 그 젊은이 밥숟가락을 채는 행위와 진배없다는 생각이 든다.
한꺼번에 배달하든 값을 올리든 말든 끊을 수 없는 우유다. 이른 아침 후다닥 우리 집 들러 장터 쪽으로 내달리는 젊은이를 보면 짠하다. 참 열심히도 사는구나 싶다. 내 새끼들도 대처에서 날마다 깨지고 또 일어서며 요령 소리 나게 살아가지 않겠는가. 자식 여의고 나잇살이나 먹어가니 이웃들이 한층 더 정겨워진다. 어쩌다 맺은 인연이 고래 심줄처럼 질기게 생겼다.
(2023년 춘삼월 / 16.8매)
앗싸 콜라비
이 연 희
"아이고 추워라. 햇 늙은이 얼어 죽겠다."
아침에 운동하러 나갔더니 옷이 얇아 추웠다. 옷 갈아입고 대추차 한 잔 마시고 나가려고 집에 도로 들어왔다. 따끈한 차 한 잔 마시고 나니 슬그머니 마음이 바뀐다. 점심 먹고 따스해지면 나가자고 남편과 오랜만에 의기투합했다.
점심을 먹고 소파에 앉으니 온몸이 노골 노골 하니 (노곤해서) 잠이 쏟아진다. 어제 오랜만에 욱수골 정상까지 갔다 왔더니 그런가 (부대끼는가) 보다. 한번 뱉은 말은 실천해야 하는 줄 아는 맹꽁이 중의 상 맹꽁이가 바로 우리 부부다. 오후에 운동한다고 했으니 말한 대로 해야 마음이 편하다. 힐끗 남편을 보니 나가기 싫은 눈치가 역력하다. 내심 서로가 먼저 나가지 말자는 말을 꺼내길 기다렸다. 둘 다 (서로) 눈치만 보며 버티고 있다. (다가) 하는 수 없이 에둘러 남편에게 말했다. 봄나물은 요즘 먹는 게 보약이라고 너스레를 떨었다.
"운동 대신 시장 갔다 옵시다. 모처럼 장 구경도 하고 봄나물도 사고.“(”)
(봄나물은 요즘 먹는 게 보약 (중에 상 보약)이라고 너스레를 떨었다.)
아파트마다 벚꽃이 활짝 웃고 있다. 며칠 전 내린 비에 연분홍 벚꽃 눈이 내린 곳도 더러 보였(인)다.
↖미세먼지가 심하다더니 온 천지가 뿌옇다. 코로나에서 해방되나 싶었더니 잽싸게 (그) 틈새를 (잽싸게) 비집고 들어온 중국발 미세먼지! 창문 열고 환기(도) 할 수 없을 정도이다. 물건 넣을 배낭 하나 달랑 메고 살랑살랑 걸었다. 한 번도 가보지 않았던 동네 재래시장으로 갔다. 나는 시장보다 대형마트나 배달 주문을 선호하는 알뜰하지 못한 주부였다. 손가락 하나로 배달까지 해 주니 굳이 갈 필요가 없었다. 세일√한다고 요란스레 현수막이 나붙은 큰 마트를 제쳐놓고 (애써 외면하며) 시장으로 갔다.
길가에 쪼그리고 앉아 채소 파는 할머니가 먼저 (선뜻) 눈에 띈다. 마분지 쭉 찢어서 쓴 '처음 정구지'라는 삐뚤빼뚤한 글씨가 보인다. 어디서 뜯었는지 말쑥하게 보기 좋은 쑥도 한 자배기 놓여 있다. 시금치와 봄동 나물에(다) 맛있게(어) 보이는 쪽파까지 종류도 다양하다. 쪽파 뿌리가 통통하니 길이도 적당한 게 쪽파√전 부치기 안성맞춤이다. 곁의 (그 옆 전) 할머니 앞에도 비슷한 채소가 놓여 있다. 손톱 아프게 깐(깠을) 마늘이 한 가지 더 있다. 상한 곳은 도려낸 토종마늘이다. 두 할머니의 기대에 찬 눈길을 물리치고 빠른 걸음으로 지나갔다. 소심한 나는 두 사람(난전)이 비슷한 물건을 파(팔)면 누구에게 살까? 생각하는 게 싫다. (골치가 띵하다.) 그러다 보니 (이를 어쩌나, 측은지심이 발동하면) 양쪽 물건을 필요 이상 사게 된다. 차라리 눈 질끈 감고 지나치는 게 속이 더 편하다.
흥겨운 (난전을 번개같이 지나자) 음악 소리가 귀를 이끄는 (흥겨운) 곳으로 저절로 발길을 돌리게 되었다. 시장 입구에 젊은 총각이 하는 큰 가게가 있다. 언뜻 보니 듬직한 청년이 셋이다. 한 사람은 생선을 다듬는 중이고 가장 미끈하게 생긴 총각은 밖에서 흥을 돋우고 있다. 나머지 한 사람은 아주머니 와 (고객과) 흥정하는 중이었다.
젊은 사람이 궂은일 싫다고 하지 (마다) 않고 열심히 사는 것이 좋아 보였다. 설핏 둘러보니 채소랑 과일 그리고 생선에 건어물까지 다 있다. 잘 살아 보겠다고 노력하는 것이 기특하게 느껴져 거기서 한 방(꺼번)에 다 해결하기로 했다.
아버지가 좋아하시는 청어가 보인다. 싱싱해서 은빛이 눈부시기까지 한 청어가 세 마리에 오천 원이란다. 청어 비늘을 긁는 동안 가게 앞에 있던 총각이 노래에 맞춰 노래하며 엉덩이를 흔든다. 나도 덩달아 어깨가 들썩거려지는 신나는 음악이다. 나도 모르게 (이라) 장단을 맞춰줬다.
"앗싸."
뜻밖의 호응에 신이 난 총각이 답을 해준다. (기다렸다는 듯 반긴다.)
"앗싸 오늘은 즐겁고 ♬√신나는 토요일 오 예."
앗싸 한 마디에 총각과 급속히 친해진 기분이 들었다. 가시오이도 사고(와) 초벌 부추도 한 단 샀다. 마트보다 많은 양이 담겨진 (많은) 머위 나물도 한 봉지 넣었다. 청어를 넣은 배낭이 묵직해서 치이기 쉬운 부추와 오이 그리고 나물은 남편이 들었다. 계산하고 두어 발짝√떼니 총각이 구수한 목소리로 부른다.
“어머니 잠깐만요. 이리 좀 와 보세요.”
의아한 표정으로 다가갔더니 커다란 콜라비 하나를 배낭에 넣어 준다. '왜?'라는 표정의 내 눈길에 총각이 답해√준다(.)
“오늘은 즐겁고 신나는 토요일이잖아요.”
“아이고 고마워요. 잘 먹을게요. 다음 토요일에 또 와야겠네.”
앗싸 한 마디에 커다란 콜라비가 배낭으로 굴러 들어왔다.
자신과 통한다 싶은 사람에게 정이 가는 게 당연하다. 가게 총각이 나랑 통한다 싶은 마음이 들었나 보다. 묵직한 콜라비를 넣고 (얻어) 돌아서는 내 발걸음에 총각의 흥겨움이 실렸다. 짐은 졌는데 발길은 올 때보다 더 가볍게 느껴졌다. (어깨짐이 마냥 가볍다.)
'앗싸 (야로).‘
○ 남편과 함께 시장을 갔건만 내 얘기만 있습니다.
↳ 남편 얘기를 곁들이세요.
○ 마트 (mart) : 대형 할인점
(자등명) 自燈銘
권자이
人間?(이란) 글(한)자 모양만 봐도 막대 둘이 서로 기댄 사이다. 이렇듯 누구도 홀로는 존재할 수 없는 것이 인간이다. 하지만 아이러니하게도 홀로일 수밖에 없는 것이 또한 인간이다. 나고 늙고 병들고 죽는 것을 누구도 대신할 수 없으니 말이다. 모든 것은 내가 지어 내가 받는다. 인과는 있되 운명은 없다. 그 처음도 나요, 그 중간도 나이며, 그 마지막도 나다.
내 집을 방문하는 사람들, 특히 시골 살 때 대부분은 하나같은 질문을 한다.
“혼자 있으면 무섭지 않나?”
“외롭지(는) 않나(고)?”
어떤 유명인은 인터뷰를 해오면 (하게 되면) 모든 매체에서 거의 똑같은 질문을 해서 녹음한 테이프를 돌리고 싶다고 해서(하였다.) 나 또한 그 말에 크게 공감한 적이 있다.
↖난 그런 질문을 하는 사람들께 되묻고 싶다.
‘그대는 무서운 대상이 무엇이며, 그대는 외롭지 않느냐’고,(.) 옆구리 사이로 조금 시린 바람이 스칠 때 비로소 나 자신이지 (임이 느껴지지) 않던가. 앞서 어느 글에서도 말했지만 누가 나에게 왜 혼자 사느냐고 묻는다면 까닭도 이유도 없다. 굳이 이유가 있(를 댄)다면 그저 나답게 살기 위해서다. 그 나다움을 어떤 말이나 글로 전달할 수 있겠는가.
언어나 문자는 성인을 낳았고 화약은 군주를 만들었다지만, 언어(나) 문자가 전달의 매개√수단일 때 턱없이 부족할 때가 많다. 고로 인간에게 그림자 같이 따라 붙는 것이 고독과 외로움일 것이다. 그래서 나는 외로움은 친구요, 고독은 스승이라 생각한다. 사실 외로움이나 고독은 군중 속에 있지 홀로 속에 있는 것이 아니다. 홀로 속에는 적적寂寂함이 있을 따름이다. 그럴 때 깨어있는 성성惺惺한 나와 마주한다. 이럴 때 비로소 어떤 상대적 설렘이 아니라 절대적 설렘을 맛본다.
사회라는 곳에 발을 땐(뗀) 후 누구에게 기대본 적이 없다. 양친으로부터 상속받은 어떤 것도 없다. 물질적으로나 정신적으로 (나) 자신과 약속한 것이 있다. ‘나 자신을 등불로 삼고 진리를 등불 삼아 무소의 뿔처럼 혼자서 가는 거다.’ (라고.) 고한 나와의 (이) 약속을 오늘 이 시간까지 지키고 살았다. 아무리 죽고 못 살 인연이라도 한 생을 마감하면 나는 내 인연 따라 어떤 모태를 찾아 갈 것이고, 그대는 그대 인연 따라 또 다른 태를 찾아 입태 할 것이다. 이렇듯 몸뚱어리 오고 가는 데는 처절하게도 혼자다.
세세생생 이어질 내 삶! 곧추세운 내 척추를 의지하고 들숨과 날숨을 내 오관으로 바라보며 느끼고,(리라.) 내일이 生에 마지막일 지라 해도 지금 하고 있는 일을 계속할 수 있기를 바라는 마음이다. 세상 오고√가는 길 누구도 예외 없이 홀로이니, 외로움과 고독이 그림자인 그대 이름 인간이지 않던가. (자신의 등불을 밝히라는 자등명에 부끄럽지 않은 삶을 살다 가리라.)
내 탓이오
이지연
자동차보험 만기가 가까워졌다. 보험사에서 연락이 왔기에 예상 보험료를 조회하고는 뜨악했다. 작년보다 한두 푼 오른 금액이 아니다. 이유를 물어보니 인사 사고가 있어서 그렇단다.
(사고는 약간의 부주의에서 비롯되었다.)
↖땅거미가 질 때( 무렵) 방문 수업을 마치고 집으로 가는 길이었다. 좌회전 신호를 기다리고 있었다. (가 지루해질 때) 조수석 발치에 잃어버린 볼펜이 눈에 띄었다. 몸을 조수석으로 숙여 볼펜을 줍는데 차가 움직(진행하)여 앞 차 (꽁무니에 키스하고 말았다.) 에 맞닿으며 흔들렸다. 아뿔싸! 방심이 사고를 부르고 말았다. 볼펜을 줍는 순간 앞차 꽁무니에 키스를 하고 말았다. 브레이크 밟은 발이 느슨해져 내 의도와 상관없이 차가 움직인 것이다. 하지만 정차 중에 굴러간 거리가 겨우 한두 보폭이라 대수롭지 않게 생각했다. 앞 차에서 아저씨가 걸어왔다.
“쿵!소리 들었지요?”
죄송하다고 한 후 부드럽게 미끄러졌단 말을 덧붙였다. 맞닿은 부분 사진을 찍은 후 좌회전하여 가장자리에 주차했다. 부딪친 부분에 미세한 흠이 있었다. 뒤 범퍼 올 도색을 요구할 게 뻔하지만 어쩔 수 없다는 생각을 하고(으로) 보험사에 연락을 했다. 앞 차 (뒷좌석)에는 아저씨 두 명이 타고 있었다.(는데,) 생각지도 않은 인사(사고) 접수까지 요구했다. 아니, 정차한 차가 미끄러져 (살며시) 맞닿았을 뿐인데 어디를 다쳐서 (왜) 병원에 간단 말인가. 피해자 아저씨들을 구슬렸지만(,) 교통√사고는 후유증을 알 수 없기에 병원에 가야√된다고 요지부동이었다. 필시 유리로 만들어진 몸인가 보다. 여기저기 인맥을 동원하여 전화로 조언을 구했지만(,) 고구마 삼킨 기분만 들었다. 병원에 가야겠다는 피해자를 막을 방법이 없다는 것이다. 어쩔 수 없이 인사 사고 접수를 했다.
다친 데가 없으니 물리치료비나 들겠지 하는 안일한 생각이 오산이었다. 보험사의 처리 결과를 전해 듣고 (보험사로부터 자동차 보험금 결정 내역을 통보받고는) 크게 놀랐다. 겨우 한 번 병원에 다녀온 그들은 1인당 백만 원의 정신적 피해를 요구했단다. 인체에 충격이 없었는데 무리하게 (거금을) 요구하는 데는 이해가 되지 않았다. 별사람 다 있다는 생각을 하며 보험료 오를 생각에 운전 부주의를 후회했다.
무리한 피해 청구로 모든 운전자들이(가) 고스란히 피해를 본다. 딸내미에게 하소연 하니 교통사고 피해자가 되면 그 아저씨들처럼 보상을 노리는 사람이 많다고 했다. 그러면서 내 잘못을 꼬집었다.
“엄마는 차에서 먼저 내리지도 않았지?”
아주 가벼운 접촉일지라도 대단히 미안하다는 표정으로 사과해야 한다는 것이다. 당시에는 사소한 잘못을 과하게 사과하면 상대방이 옳다구나! 하며 나이롱환자 흉내 낼까 봐 내 딴에는 뻗댄 것이 손실로 돌아오고 말았다. 이럴 줄 알았으면 그 자리에서 현금 사례를 할 건데 보험사에 인사 접수까지 한 게 잘못이었다. 그 사람들이 설사 옳다구나! 했더라도 미안할 정도로 사과하고 예의를 갖추었다면 결과가 달라질 수도 있지 않았을까 싶기도 하다.
유리로 둘러싸인 몸이나 나이롱환자를 탓할 게 아니라, 그 자리에서 병원비를 쥐어주지 않은 내 잘못이 크다. 인생은 시행착오의 연속이다. 이렇게 또 하나를 (씁쓸함을) 배우고 한 고비를 넘기는 게 인생인가 보다. (세상은 수학 공식처럼 딱딱 맞아떨어지지 않고, 도덕책처럼 정직하지도 않다. 유리 몸이니 나이롱환자니 뭐니 늘어놓고 싶지 않다. 부주의한 내 잘못이고, 해결하지 못한 내 탓이다.)
어느 날 갑자기
(새록새록)
배정행
베란다에 있는 식물들이 모두 누렇게 떠 있다. 바쁘다는 핑계로 거의 매일 저녁에 들어오는 바람에 베란다로 눈길 한번 줄 시간이 없었다. 주말 아침 모처럼 날씨가 따뜻해 바깥쪽 베란다 새(섀)시 문을 열어보다가 깜짝 놀랐다. 사시사철 푸르고 싱싱하던 잎들이 고개를 떨구고 있었기 때문이다. 천장을 뚫을 기세로 뻗어나가던 관음죽의 손가락 같은 잎들은 류머티스 환자처럼 끝이 오그라져 있었다. 황폐해진 베란다의 풍경에 놀라는 내 모습을 보고 시어머니가 다가와 말했다.
"식물들도 나처럼 늙나 보다(봐). 오래되니 다 저렇게 누렇게 변해버리네 (저리 누레지네)."
시아버지가 (시아버님) 돌아가신 뒤 시어머니는(가) 우리 집으로 들어오셨다. 그 후로 쭈욱 화분에 물 주는 일을 도맡아 왔었는데 (은) 덕분에 식물들이 예전보다 더 잘 자란다고 가족들이 좋아했다. 내가 기를 때는 몇 달을 넘기지 못하고 시들어 버리기 일쑤여서 우리 집 베란다에는 화분이 몇 개 없었다. 시어머니가 보살핀 덕분에 반짝반짝 윤기 나는 새잎을 피워내자 우리는 집 안으로 더 많은 식물을 들여왔다. 거실에 앉아 바라보면 작은 식물원을 보는 느낌이 들 정도로 베란다는 싱그러운 힐링 공간이 되었다.
우리 집에서 오래 살아 명이 다한 것도 있다. 20년 가까이 잘 자라다가 더 이상 새순이 돋아나지 않는 천냥금은 잎이 모두 황갈색으로 변해 버렸다. 작년까지만 해도 끊임없이 빨간 꽃잎을 피워대던 제라늄은 이제 침묵을 지키고 있다. 모두 제 명보다 오래 버텨낸 것들이라는 걸 알고 있다. 하지만 아직 한창인 다른 식물들마저 시들어 버린 건 필시 물을 주지 않아 그렇게 된 것이 (않은 탓임이) 분명했다. 한√번도 물주는 일을 거른 적이 없는 분이시라 이상하다고 생각하는 (란 생각이 드는) 순간 요즈음(들어 부쩍) 이상해진 시어머니의 행동이 생각났다.
산책하러 간다고 하시곤 시어머니가 나간 뒤 곧이어 현관 벨 누르는 소리가 났다. 요즘은 식구들이 스마트 키의 비밀번호를 누르고 들어오기 때문에 벨 소리를 들을 일도(이) 별로 없다. 누가 왔나 궁금해하며 인터폰 화면을 보니 시어머니의 얼굴이 보이는 것이 아닌가? 깜짝 놀라서 문을 열어 드리니 핸드폰을 두고 나갔단다. 비밀번호를 눌렀는데 자꾸 오류가 나서 벨을 눌렀다며 "내가 요새 이렇게 정신이 없다." 하신다.
저번에도 스마트 키를 잘못 누르신 적이 있었다. 집에 아무도 없을 때 비밀 번호가 생각나지 않으면 큰일 나겠다 싶어서 종이에 숫자를 적어 드렸다. 호주머니에 늘 넣어 다니시라고 신신당부를 드렸더니 시어머니는 언짢은 기색으로 종이를 받으며 말했다.
"조금 있으면 다 생각나는데 그렇게까지 할 필요가 있겠냐?
(그런데) 이번에는 달랐다. 아무리 생각해봐도 바뀐 번호가 떠오르지 않더라는 것이다. 끝의 한 자리를 바꾼 탓에 남편과 나도 한 번씩 (헷갈려) 옛 번호를 누르기도 한다. 하지만 곧 다시 (어렵사리) 새 번호로 고 하는데 (고쳐 누르는데 시어머니는) 좀 전에는 도무지 끝 번호를 모르겠더라며 시어머니는 또 나이 탓을 했다. 이제부터는 종이쪽지를 꼭 챙겨 다녀야겠다고 단단히 마음 먹는 (다짐하는) 것 같았다.
남편이 요즘 시어머니 잔소리가 심해졌다며 불평한다. 아침에 "날씨가 추우니 옷 든든하게 입고 나가라."라는 말을 세 번도 넘게 했다는 것이다. 낼모레 칠순인 아들에게 해도 해도 너무한다고 짜증을 낸다. 하지만 잔소리와 되풀이는 느낌이 다르다. 몇 번을 말해도 똑같은 어조의 느낌이라면 그건 분명히 앞서 했던 말을 잊어버리고 하는 단순한 반복이다. 시어머니는 요즘 녹음해 놓은 말을 무한 반복으로 재생하고 있는 것 같다.
구순을 앞둔 노인이 수시로 깜빡깜빡하는 게 당연한 일인지도 모른다. 기억력 감퇴는 자연스러운 노화 현상이다. (멀쩡히 잘 다니던 길 위에서 '여기가 어디지?' 하는 느낌이 온다면 기억의 미로 속으로 발을 들여놓는 순간이 될 것이다.) 하지만 그런 증상들이 치매의 초기 단계는 아닌지 두렵다. 아침마다 신문을 꼭 읽으시고 드라마 보다 교양 프로나 바둑 방송을 즐겨 보는 시어머니 였기에(시다. 그러기에) 기억을 잃어버리거나 인지력이 떨어질 일은 없을 거라고 믿고 있었다. (살았다.) 나이 앞에 장사 없다고 하더니 시어머니도 세월을 비껴갈 수는 없는 모양이다.
어느 날 갑자기 멀쩡히 잘 다니던 길 위에서 '여기가 어디지?' 하는 느낌이 온다면 기억의 미로 속으로 발을 들여놓는 순간이 될 것이다. (천만다행으로) 시어머니는 코로나19가 막바지로 접어들면서 일단은 그 길로의 진입을 늦추신 것 같다. 점심 같이 먹자고 (는 전화를 받고) 아파트 경로당에서 전화 와서 나가봐야 한다고 말씀하시는 (으로 나가시는) 시어머니의 얼굴이 발갛게 상기되어 있다. 마스크까지 벗게 되니 마음 놓고 모인다고 (개운해서 좋다시는 ) 좋아하시는 걸 보니 그동안의 걱정이 씻은 듯 사라진다.
어쩌면 팬데믹 때문에 혼자 지내는 날이 많아진 탓에 시어머니의 기억이 잠시 흐려진 건 아닐까? 그러고 보니 주인 따라 베란다 식물들에도 다시 활력이 생겨나는 것 같다. 시어머님도 식물(꽃나무)들도 모두 건강하길 빌어보는 벚꽃 만개한 봄날이다. (, 때는 바야흐로 춘삼월이다.)
○ 상기되다 : 흥분이나 수치감으로 붉어지게 되다
남아수독오거서
엄영희
“제 아들을 보는 것 같아 서글펐어요.”
커트하는 동안 단골 미용사의 푸념을 들었다. 예닐곱 살 되어 보이는 여자애가 아빠를 따라와 머릴 자르고 갔단다. 직장 다니는 엄마를 대신하여 아빠가 따라온 모양이었다. 단골 미용사는 아들과 함께하지 못할 미래를 걱정하고 있었다. 그녀는 갓 돌 지난 아들을 친정어머니께 맡겨 키우는 중이다. 늦은 나이에 결혼하여 아들을 얻었는데 일과 양육을 병행하면서 겪는 어려움을 하소연하곤 한다. 아이 이야기로 죽이 맞다 보니 커트 시간이 금방 지나가 버린다. 일하는 엄마들이 겪는 양육의 어려움은 수십 년이 지나도 별반 다르지 않은 것 같다.
아들을 키우면서 시댁과 친정 가족을 다 동원했다. 돌 전에는 친정엄마가 주로 돌보았고, 친정엄마가 바쁠 땐 내 외할머니와 막내 시누이가 틈을 메워 주었다. 맡길 데가 마땅찮아 유아원을 삼 년 넘게 다녔다. 한나절 유아원을 다녀온 후에도 돌봐줄 손길은 필요하다. 유아원 (그) 시절엔 가족을 벗어나 다른 이들의 도움을 받았다. 목사 사모와 이웃, 방학 때는 아르바이트 학생을 쓰기도 했다. 아이가 초등학교 들어가서도 출장이나 교육으로 집을 비워야 할 경우엔 난감하기 짝이 없었다.
말귀를 알아들을 즈음엔 눈을 쳐다보고 설득하면 말이 먹혀들었다. 유아원을 마치고 집으로 돌아온 후, 거실만 벗어나면 바로 옆 보건진료소에 내가 있었지만, 아들의 엄마는 아니었다. 끊임없이 나를 찾는 사람들이 있었고, 주민들은 날 필요로 했다. 아들에게 말했다.
“누가 오더라도 니가 먼저 나가면 안 돼, 여기서 나오면 안 되는 거야. 알았지?”
아들은 고개를 끄덕이며 대답했다. (은 철석같이 하였지만, 아니었다.) 말귀를 알아듣는 것도 그때뿐 보건진료소 미닫이문 소리가 나면 나보다 먼저 뛰어나가 주민들에게 인사를 했다. 이런 일이 반복되자 아들에게 더 단단히 주의 주었다.
서너 살 아들은 심심했다. 아침나절 TV에서 ‘뽀뽀뽀’가 끝나고 나면 유아 대상 프로그램이라곤 구경하기 힘든 시절이었다. 화장실 벽에 붙여놓은 한글 자모음 표를 오며 가며 묻더니 한글을 터득했다. 어느 날 보니 동화책을 읽기 시작했고 글이란 글은 죄다 읽어댔다. 혼자 있어도 심심하지 않은 시간이 찾아온 것이었다. 호기심 많은 아들은 남편 책상 위에 펼쳐진 책 제목도 읽기 시작했다. 아들이 천재인 줄 알았다.
유독 아들을 귀여워하는 아저씨가 있었다. 방 안에까지 들여다보며 아들을 불러내어 간식√값을 주곤 하던 분이었다. 무릎 위에 앉혀 두고 그림책을 읽어주던 아저씨는 깜짝 놀랐다. 글 모르는 줄 알고 읽어줬는데 손에 과자를 움켜쥐고 다리를 까닥거리며 아저씨와 소리 내어 그림책을 읽었다. 그가 물었다.
“아이고, 그놈 기특타. 느거 아부지는 뭐 하는 사람이고?”
“우리 아빠는 존 듀이랑 성균관 대사성 공부해요.”
“뭐라꼬?”
“니는 커서 뭐가 될려고 하노?”
“저는 커서 남아수독오거서南兒須讀五車書할 거예요.”
똑똑한 아들 뒀다고 동네 소문이 났다.
서울에서 며칠간 교육이 있는 날이었다. 유아원에 결석하고 아들을 데리고 출장길에 올랐다. 과천에 형님이 살고 있어 출장 기간에 아들을 돌봐주기로 했다. 교육 마지막 날 아들을 데리고 형님네 집에서 나왔는데 난감한 일이 생겼다. 교육 장소인 코엑스 현장 (교육 장소)에 다시 들릴 일이 생긴 것이다. 혼자라면 잠시 갔다 오면 되겠지만 아이가 딸렸으니 어찌해야 하나? 전후 사정을 무시하고 (걱정하며) 코엑스까지 갔다. 아이 눈을 쳐다보며 말했다.
"슬기야, 엄마가 볼일을 다 못 마쳐서 교육 장소에 잠깐 올라갔다 와야 하는데 어쩌면 좋을꼬?"
잠시 머뭇거리던 아들이 눈을 깜빡이며 말했다. "엄마, 음료수만 사 주면 저기 보이는 경비실에 맡겨져 있을께."
정말 음료수 몇 개 사서 경비 아저씨께 사정을 말하고 아이 맡기고 볼일을 마쳤다.
초등학교나 중고등학교에 진학해도 엄마 손길은 필요하(였)다. (돌이켜보건대) 비 오는 날 우산 가져다주기, 놓친 준비물이나 도시락 챙겨주기에 소홀했고, 학부모 모임에 적극적으로 참여하지 못했다. 이러다간 영영 기회를 놓치겠다 싶어 시간이 자유로운 남편이 참석하기 시작했다. 대부분 엄마가 참석하는 학부모 회의에 앞자리(에) 앉아 경청하는 남편을 보고 선생님이 진땀을 흘렸다는 후문이 들렸다.
한 자녀 갖기를 목표로 하던 시대에 아이를 낳고 키웠다. ‘하나씩만 낳아도 삼천리는 초만원’, ‘잘 키운 딸 하나 열 아들 안 부럽다’를 표어로 하던 시대였다. ‘덮어놓고 낳다 보면 거지꼴을 못 면한다.’에서 시작한 표어가 한 자녀 시대를 지나고 (‘)무자식 상팔자(’)가 대세가 되어가는 (로 자리 잡은) 시대다.
갈수록 출산율이 떨어지고 있다. 정부가 돈을 쏟아부었으나 출산율을 끌어올리는 데 실패했다.
“이런데 애 낳아?”
직장인 절반이 출산·육아휴직을 자유롭게 쓰지 못한다는 조간신문 기사 제목이다. 수십 년 전 상황과 다르지 않다. 단순히 현금으로 인센티브 더 준다고 해서 아이를 낳을 것인가? 출산 문제는 개인이나 가족 차원이 아니라 아이는 부모가 낳지만, 양육은 사회가 함께 책임지는 인식 전환이 되어야 한다. 출산과 육아 때문에 일자리를 잃거나 불이익을 당하지 않아야 함은 말할 것도 없다. 다시 젊은 날로 돌아간다고 해도 아이를 더 낳는 것에는 선택의 여지가 없었는가 자문해 본다. 전업주부였다면 몰라도 직장인으로서는 아들 한 명이 (하나가) 최선이었다.
주먹만 한 벚꽃이 만개한 밤이다. 거기 그 자리에 가만히 있었는데도 햇빛이 훑고, 바람에 흔들리고, 꽃이 피었다. 돌이켜보면 아들을 키운 것도 햇빛과 바람이었고, 보이지 않는 손이었다. 학교와 가족과 이웃들이었다. 단골 미용사의 걱정이 기우이길 바란다. 일하는 여성들이 마음 놓고 아이를 키우고, 내가 겪었던 전철을 밟지 않았으면 (않고 마음 놓고 아이를 키웠으면) 좋겠다.
어릴 때 먹을 것만 주면 책을 들던 아들은 책과 담을 쌓고 지낸(지 오래)다. 남아수독오거서는 (다섯 수레 책을 읽어야 한다던 두보의 시구는) 빈말이 되었고, 천재가 아닌, 심심하지 않은 아들이 (내) 곁에 있다. (16.1매)
○ "엄마, 음료수만 사 주면 저기 보이는 경비실에 맡겨져 있을께.“
↳ 압권입니다.
그래.(,) 알았다.
이광조
그래. 알았다. 니(네) 마음이 그렇다면 내가 어쩌겠나. 젊디젊은 너와 백발투성이의 내가 만난 것부터가 개(소)가 들어도 웃을 얘기지만, 시들고 있는 내 인생의 마지막 복이려니 했었다.
너와 함께했던 지난 시간이 내게는 꿈만 같구나. 처음 만난 날도 너는 쌀쌀맞게 나를 대하더구나. 그렇지만 산전수전 다 겪은 내가 그 눈치 없었겠나. 원래 여자들은 그렇지. 약간 튕기는 게 남자를 더 안달하게 한다는 건 너도 본능적으로 알고 있더구나. 그래서 내가 나이답잖게 유치한 짓 해가면서 니(네) 마음을 흔들었고 너는 이내 빗장을 거두고 나를 파트너로 인정했었지.
아, 그때의 감격을 내 어찌 잊으랴. 칠십을 코앞에 두고 너 같이 순수한 사람을 만나 시공을 잊으며 서로에게 빠져들었으니 말이다. 사실 나도 내 안에 그런 감정이 있는 줄은 (미처) 몰랐었다. 세상 때가 덕지덕지 묻은 나도 너를 만나면서 달라지는 걸 느꼈거든. 살아온 세월로 보면 내가 너에게 줄 것이 (더) 많을 텐데, 아니더라. 너의 끝을 가늠할 수 없는 그 순수 앞에 내 영혼이 대책 없이 녹아내리더구나.
같이 밥을 먹고 음악 듣고 가슴을 맞대고 춤을 추었던 그 순간순간들을 어떤 이름으로 간직해야 할지 아득하구나. 니(네)가 등을 보이며 내게서 멀어져 갔다고 해서 그런 시간들까지 (어찌) 부정할 순 없지 않겠느냐.(하랴.) 느리고 가는(가냘픈) 선율에 맞춰 너의 어깨를 토닥이면 너는 내 볼을 쓰다듬으며 가는(젖은) 눈으로 쳐다보았었지. 그런 순간, 그런 (애련한) 장면을 내 어찌 지우란 말이냐.
오늘은 그만 써야겠다. 참고 있는 내 마음이 (의 옹벽이 무너져내려 눈물보가 터지기 전에 말이다.) 더 무너지기 전에 (날 밝으면) 다시 어른으로 돌아가 아무 일도 없는 듯이 (에헴 하며), 덤덤한 미소로 위장하고(한 채) 의미 없는 시간을 버텨야 할√테니까.
짜장면
정진권
짜장면은 좀 침침한 작은 중국집에서 먹어야 맛이 난다.
그 방은 퍽 좁아야 하고, 될 수 있는 대로 깨끗지 못해야 하고, 칸막이에는 콩알만한 구멍들이 몇 개 뚫려 있어야 한다.
식탁은 널판으로 아무렇게나 만든 앉은뱅이어야 하고, 그 위엔 담뱃불에 탄 자국들이 검게 또렸하게 무수히 산재해 있어야 정이 간다.
고춧가루 그릇은 약간의 먼지가 끼어 있는 게 좋고, 금이 갔거나 다소 깨져 있으면 더욱 운치가 있다. 그리고 그 안에 담긴 고춧가루는 누렇고 굵고? 억센 것이어야 한다. 식초병에도 때가 끼어 있어야 가벼운 마음으로 손을 댈 수 있다.
방석도 때에 절어 윤이 날듯하고, 손으로 잡으면 단번에 쩍하고 달라붙을 것 같은 것이어야 앉기에 편하다.
짜장면 그릇의 원형이 어떤 것인지에 관해선 알아본 바 없으나, 가장 흔한 것은 희고 납작한 것에 테가 두어 줄 그어져 있는 것인 듯한데, 할 수 있으면 거무스레하고, 거기다 한두 군데 이가 빠져있으면 좋다.
그리고 그 집 주인은 뚱뚱해야 한다. 머리엔 한 번도 기름을 바른 일이 없고, 인심 좋은 얼굴에는 개기름이 번들거리며, 깨끗지 못한 손은 소두방(솥뚜떵)만 하고, 신발은 여름이라도 털신이어야 좋다. 나는 그가 검은색의 중국 옷을 입고, 그 옷은 때에 찌든 것이기를 바라지만 지금은 그런 옷을 찾기 어려우니 낡은 스웨터로 참아두자. 어린 나를 무척 귀여워해 주던 내 고향의 짱궤는 스웨터가 아니었는데…. 하여간 이런 주인에게 돈을 치르고 나오면 언제나 마음이 평안해서 좋다.
내가 어려서 최초로 대면한 중국 음식이 짜장면이었고, 내가 제일 처음 본 내 고향의 중국집이 그런 집이었고, 이따금 흑설탕을 한 봉지씩 싸주며 “이거 먹어 해, 헤헤헤” 하던? 그 집 주인이 이런 사람이어서, 나는 짜장면이 중국 음식의 전부로 알았고, 중국집이나 중국 사람은 다 그런 줄로만 알고 컸다.
스무 살 때던가, 서울에 처음 왔을 때도 나는 짜장면을 잘 사 먹었는데 그 그릇이나 맛, 그 방안의 풍경이나 분위기는 말할 것도 없고, 비록 흑설탕은 싸주지 않았으나 그 주인의 모습까지도 내 고향의 짜장면, 그 중국집, 그 짱궤와 다르지 않았던 것으로 기억한다. 변두리만 찾아서였을까?
해서, 내가 처음으로 으리으리한 중국집을 보았을 때, 그리고 엄청난 중국요리 앞에 앉았을 때, 나는 그것들이 온통 가짜처럼 보였고, 겁이 났고, 괜히 왔구나 했다.
서울, 시골 할 것 없이 음식점은 많이도 불어났다. 한식, 중국식, 일본식, 서양식, 또 무슨 식이 더 있는지 모른다. 값이 비싸다는 데도 있고, 보통이라는 데도 있고, 싼 듯한 곳도 있다. 비싸다는 곳의 사정은 잘 모르지만 보통이라는 데는 더러 가 보았다. 그러나 얻어먹을 때는 불안하고 내가 낼 때는 갈빗대가 휘어서 그곳의 분위기와 그 음식 맛을 제대로 감상할 수 없음이 큰 흠이다.
그러므로 내가 마음 놓고 갈 수 있는 곳은 그 싼 듯한 곳일 수밖에 없고 그 싼 듯한 곳 중에선 위에 말한 그런 주인의 그런 중국집일 수밖에 없는 것이다. 싸구려 한식은 집에서 늘 먹으니 갈 필요가 없고, 싸구려 왜, 양식은 먹어봤자 국적을 찾을 수 없기 때문이다. (국적 있는 왜, 양식을 먹으려면 비싸다는데 내지 최소한 보통이라는 덴 가야 할 것이다.)
그러나 내 친애하는 짜장면 장수 여러분들도 자꾸만 집을 수리하고 늘리고 새 시설을 갖추는 모양이어서 마음 편히 갈만한 곳이 줄어들까 걱정이다. 돈을 벌고, 빌딩을 세우고, 나보다 훌륭한 고객을 맞고 싶은 것이야 물론 그분들의 큰 소원이겠지만, 적어도 내가 사는 동네와 내가 다니는 직장 근처에서만은, 좁은 데다 깨끗지 못한 중국집과 내 어린 날의 그 짱궤 같은 뚱뚱한 주인이 오래오래 몇만 남아있어 줬으면 한다. 세상이 아무리 변해도…. 그러면 나는 어느 일요일 저녁때, 호기 있게 내 아이들을 인솔하고, 우리 동네 그 중국집으로 갈 것이다. 아이들은 입술에다 볼에다 짜장을 바르고 깔깔대며 맛있게 먹을 것이고, 나는 모처럼 유능한 아버지가 될 수 있을 것이다.
퇴근길에 친구를 만나면, 나는 그의 어깨를 한 팔로 얼싸안고 그 중국집으로 선뜻 들어갈 것이다. 양파 조각에 짜장을 묻혀들고 “이 사람, 어서 들어”하며, 고랑주 한 병을 맛있게 비운 다음, 좀 굳었지만 함께 짜장면을 나눌 것이다. 내 친구도 세상을 좁게 겁 많게 사는 사람이니, 나를 보고 인정 있는 친구라고 할 것이 아닌가. (11.6매)
정진권 : (1935~2019) ▲충청북도 영동 출생, 영동고등학교, 서울대학교 사범대학 국어교육과, 명지대학교 대학원 국어국문학과(석사과정) 졸업, 논산농업고등학교, 인천제물포고등학교, 서울대학교 사범대학 부속고등학교 교사, 문교부(현 교육부) 편수관, 한국체육대학교 교수 역임
첫댓글 젤 늦게까지 숙제하시느라 수고하셨습니다. 꼼꼼한 합평~ 늘 감사드립니다.^^
숙제 하면 제가 늘 꼬리인 셈이지요. ㅎㅎ