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하준
제법 긴 시간 동안 윤동주를 공부했다. 한 사람의 삶을 평전 하나로 다 헤아릴 순 없지만, 전보다는 더 잘 알 수 있었다. 예전에는 몇몇 유명한 시들만 알고 있었지만 지금은 윤동주의 삶을 안다. 삶을 알게 되니 그의 시가 한층 더 깊이 있게 느껴진다.
윤동주 공부하며 100년 가까이 시간이 흘렀지만 공감되는 부분이 많이 있었다. 뭔가 막 ‘민족시인 윤동주’라는 느낌보다는 그냥 아는 형 느낌이 들었다. (나이차도 별로 안 나니까.) 윤동주는 명동에서 태어나 어린 시절을 보내다가 용정으로 간다. 거기서도 오래 지내지 못하고 평양 숭실중학교에 편입했다가 신사참배 문제로 다시 용정에 있는 광명학원(아이러니하게도 친일계 학교다)에서 공부하다 연희전문학교와 일본유학도 한다.
그 속에서, 윤동주의 많은 모습을 본다. 윤동주의 가족사와 친구관계, 송몽규와는 평생 삶을 함께 나눠온 만큼 서로 영향을 많이 주고받았다. 한 예로, 송몽규가 신춘문예에 글을 실은 게 윤동주의 창작에 불을 지폈다. 독립운동에서도 서로 뜻을 함께한다. 윤동주는 전학도 엄청 많이 다닌다. 특히 숭실중학교 때는 편입시험에 떨어져 한 학년 아래로 생활한다. 또 5년제 학교가 마땅치 않아 친일계인 광명학원에 다닌다. 그가 학교를 옮겨 다니며 느꼈을 여러 감정을 헤아려보게 된다.
윤동주는 어렸을 때부터 신앙을 가까이 접하고, 시에서도 중요하게 나타난다. 그리고 신앙에 대해 회의하는 시기도 있다. 일제 막바지 억압과 핍박이 일상이던 시절, 윤동주는 하나님이 있다면 왜 구원해주시지 않을까 아파한다(라고 책에선 나온다). 그때 쓴 〈팔복〉이라는 시가 있는데 내가 좋아하는 시다. 시대상황을 알고, 그가 시를 쓰던 원고까지 살펴보니 더 그가 가깝게 느껴진다. 나도 신에 대해 많이 고민했고, 하고 있기 때문에 더 인상 깊은 대목이었다.
팔복
마태복음 5장 3~12
슬퍼하는 자는 복이 있나니
슬퍼하는 자는 복이 있나니
슬퍼하는 자는 복이 있나니
슬퍼하는 자는 복이 있나니
슬퍼하는 자는 복이 있나니
슬퍼하는 자는 복이 있나니
슬퍼하는 자는 복이 있나니
슬퍼하는 자는 복이 있나니
저희가 영원히 슬플 것이오.
윤동주의 삶의 모습 중 좀 생각되는 부분이 있다. 일본 유학에 관한 거다. 윤동주는 연희전문학교를 졸업하고 일본 유학을 가기로 마음먹는다. 그렇지만 유학을 가려면 창씨개명을 해야 했다. 창씨개명은 윤동주의 뜻에 반하는 일이었다. 윤동주는 고민하다 결국 창씨개명을 하고 일본유학을 가는 선택을 하는데, 일본 유학이 그만큼 의미 있는 일이었을까? 의문이다. 난 자신의 신념을 지키는 게 더 중요하다 생각한다. (이 행동이 옳다, 그르다는 아니고 윤동주는 이런 선택을 했구나….)
시인이란 슬픈 천명이다. 시인은 이 세상을 똑바로 마주하고 잘 감각해야 한다. 윤동주도 끝까지 부끄러워할 줄 알았고 참회할 줄 알았으며 괴로워할 줄 알았다. 자신의 불완전성, 시대한계를 알았다. 감각이 무뎌지면 괴로워하지 않아도 될 텐데…. 살기 편할 텐데…. 암울한 시대이지만 자기 앞에 놓인 상황에 치열하게 사는 모습이 멋있다. 그래서 많은 사람들이 윤동주를 좋아하는 게 아닐까?
시로 자신을 표현하고, 죽는 날까지 한 점 부끄럼 없이 살기를 바란 윤동주를 닮고 싶다. 윤동주의 인생길 들은 느낌이다. 좋은 배움이었다.
#준
한 달이 넘는 시간에 걸쳐 윤동주와 그의 작품세계, 삶을 함께 공부했다. 한국 사람으로서 공부하기 이전부터 가지고 있었던 윤동주에 대한 상이 있었는데, 일본 감옥에서 죽어갔던 비운의 민족시인 정도였다. 하지만 이번에 같이 공부하며 그런 수식어들로는 전부 담지 못할 윤동주의 깊고 어두운 내면을 들여다볼 수 있었다.
윤동주는 1917년, 지금은 중국의 영토인 북간도 명동촌에서 태어났다. 이번에 새롭게 윤동주 공부하며 윤동주를 경계인의 관점에서 새롭게 볼 수 있었다. 그가 나와 같은 민족인 것은 맞지만 윤동주는 엄밀히 말하면 한국과는 아무 관계도 없다. 중국의 동북공정에 윤동주 채가기(?)도 한 축으로 있는데 이전에는 완전히 무지성으로 중국을 공격했다면 지금 와서는 중국의 말이 완전히 허무맹랑만 하지는 않다고 생각한다. 윤동주를 중국의 민족시인이라 하는 것은 아주 큰 문제이긴 하지만 그들의 삶터가 중국의 행정권 아래였다는 사실은 부인할 수 없는 사실이니까. 우리나라 사람들은 이 아름답고 순결한 시인을 내 것으로, 우리 민족의 것으로 소유하려는 마음이 큰 것 같다. ‘역사를 지키는 것’과는 별개로 그의 시들을, 삶을 존재 자체로 바라봐주길 바라는 마음이다.
윤동주의 작품세계에 엄청난 영향을 미친 것이 바로 신앙이었다. 명동촌에 기독교가 들어오며 자연스레 윤동주도 신앙을 접하게 되고 후에 그에게 굉장한 영향을 주기도 한다. 〈초 한 대〉, 〈십자가〉, 〈팔복〉처럼 성경이 직접적으로 묘사되는 시가 있는가 하면, 절망적인 세상 앞에서 자신이 할 수 있는 것이 아무것도 없다는 허무감 속에 윤동주가 신에게 느낀 회의감이 시에 고스란히 녹아져 있기도 하다. 그 누구보다 솔직하고 뜨거운 사람이었던 윤동주이기에, 그가 일제강점기에 느꼈을 절망감과 허무함이 시에서 처절히 느껴진다. 태양을 사모하고 별을 사랑하고픈 순수한 소년의 마음이, 신앙심이 어둡던 시절과 대비되어 암울하게 다가온다.
하지만 윤동주의 시에는 희망이 담겨 있다. 깊은 어둠을 그대로 마주하고 직면하지만, 그것에 갇히지 않고 아름다움을, 희망을 노래한다. 이런 세계관이 〈자화상〉이라는 시에 고스란히 담겨 있다고 생각된다. 우물의 물과 달빛이 거울이 되어 모든 것을 비춘다. 나의 부끄럽고 나약한 모습까지도 전부 우물에 들어 있다. 제대로 살지 못하는 것 같아 밉고, 완벽할 수 없는 인간이기에 그리고 그것이 현실이고 운명이기에 밉지만, 그럼에도 그런 모습까지 전부 ‘나’이기에 스스로와 화해하고 다시 새 걸음 내딛을 힘을 얻는다. 삶의 회의를 느꼈을 윤동주가 다시금 오늘을 살아갈 수 있었던 그 작은 마음에 귀를 귀울여본다.
자화상
산모퉁이를 돌아 논가 외딴 우물을
홀로 찾아가선 가만히 들여다봅니다.
우물 속에는 달이 밝고 구름이 흐르고 하늘이 펼치고
파아란 바람이 불고 가을이 있습니다.
그리고 한 사나이가 있습니다.
어쩐지 그 사나이가 미워져 돌아갑니다.
돌아가다 생각하니 그 사나이가 가엾어집니다.
도로 가 들여다보니 사나이는 그대로 있습니다.
다시 그 사나이가 미워져 돌아갑니다.
돌아가다 생각하니 그 사나이가 그리워집니다.
우물 속에는 달이 밝고 구름이 흐르고 하늘이 펼치고
파아란 바람이 불고 가을이 있고
추억처럼 사나이가 있습니다.
윤동주의 시 중 유독 내 마음에 길게 남은 두 편의 시가 있었다. 첫 번째 시는 바로 〈길〉이라는 시였다. 무엇인가를 잃어버린 화자는 끝없이 이어진 돌담을 따라 걷는다. 화자는 잃어버린 것이 ‘나’임을 깨닫는다. 담 저쪽 편 남아 있는 나를 찾기 위해 끝없이 이어진 길을 오늘도 걷는다. 잘 사는 삶, 나답게 사는 삶에 대해 생각해본다. 나답게 사는 것이 행복한 삶이라면 ‘나’를 잃어버린 화자는 행복하지 않을 것이다. 다만 인생이 행복을 찾기 위한 여정인 것이다. 나는 나를 잃지 않았는지 타인이, 세상이 강요하는 삶을 의심 없이 살고 있지는 않은지 돌아본다. 윤동주가 이야기한 ‘다만 잃은 것을 찾는 그 삶’이라는 여정이 쓸쓸해 보이지만 피할 수 없는 길이라는 생각이 든다. 윤동주의 절실함이 오래 가슴에 남았다.
길
잃어버렸습니다.
무얼 어디다 잃었는지 몰라
두 손이 주머니를 더듬어
길에 나아갑니다.
돌과 돌과 돌이 끊없이 연달아
길은 돌담을 끼고 갑니다.
담은 쇠문을 굳게 닫아
길 위에 긴 그림자를 드리우고
길은 아침에서 저녁으로
저녁에서 아침으로 통했습니다.
돌담을 더듬어 눈물짓다
쳐다보면 하늘은 부끄럽게 푸릅니다.
풀 한 포기 없는 이 길을 걷는 것은
담 저쪽 내가 남아 있는 까닭이고
내가 사는 것은, 다만,
잃은 것을 찾는 까닭입니다.
두 번째 시는 〈내일은 없다〉라는 시다. 이 시는 윤동주의 시들 중 가장 초창기 시들 중 하나다. 윤동주의 세계관이 잘 담겨 있다 생각된다. 시 내용은 단순하다. 내일이 무어냐고 물은 화자에게 누군가 밤 지나 동틀 때가 내일이라고 일러준다. 하지만 동이 트자 그날은 이미 오늘이더라는 것이다. 우리가 살아갈 수 있는 유일한 시간은 오늘뿐이다. 어제는 이미 지나간 오늘, 내일은 아직 오지 않은 오늘이다. 어제(과거), 또는 내일(미래)을 살 수 없는 우리지만 끝없이 과거를 생각하며 후회하고 미래를 생각하며 걱정하고 불안해한다. 윤동주는 이런 행동들이 전부 부질없음을 이야기하고 내게 주어진 유일한 시간인 오늘 현재를 살아가고자 마음 다잡는다.
내일은 없다
내일 내일 하기에
물었더니
밤을 자고 동틀 때
내일이라고.
새날을 찾던 나는
잠을 자고 돌아보니
그때는 내일이 아니라
오늘이더라.
무리여!
내일은 없나니
……
나 또한 윤동주의 마음을 떠올려본다. 민족을 잃고, 일본 감옥에 수감되어 있을 때도 윤동주는 지금 이 순간을 살자 다짐했을 것이다. 일상의 막막함과 절망감 속에서 〈내일은 없다〉를 떠올리겠다. 윤동주의 마음 떠올리며 그저 내가 살아갈 수 있는 지금을 살겠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