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제 또 새로운 학년이 시작되었다. 그런데 3학년 1학기의 교과서를 받고 보니 이게 보통 일이 아니다. 전공과목의 책 제목이 ≪문학비평론≫과 같이 무슨‘론’으로 되어 있고 질적 수준이 아주 높다. 책 부피만 해도 ≪고전시가론≫은 다른 교재의 거의 1.5배 분량이다.
그리고 숙명처럼 날아든 과제명을 보니 한숨이 절로 나온다. 과제물을 아예 논문 형식으로 작성하라거나 한 편의 단편소설을 창작해서 제출하라는 식이다. 이중≪고전소설강독≫은 “경판본 고소설 ≪홍길동전≫과 구보 박태원의 ≪홍길동전≫을 비교, 분석하라.”는 내용이다.
구보의 ≪홍길동전≫을 읽다가 “아버지를 아버지로 부르지 못하는” 천비 소생 홍길동, 그보다 더 기구한 삶을 사는 연산군 시절 다수의 힘없는 백성을 대표하는 인물인 평민 처녀 음전, 그들 사이에 연분홍빛 사랑이 싹틀 무렵, 채홍사에게 징발된 그녀가 생을 비관하여 자살하는 대목에서는 안타까움에 할 말을 잃었다. 독일의 철학자 하이데거의 주장처럼 우리의 의지와 상관없이 피투(被投)되기로 작정 되어 있었다면, ‘저런 세상에 태어나지 않은 것만 해도 얼마나 다행인가,’하며, 현재의 삶에 대한 고마움에 가슴이 먹먹해진다.
전공과목의 어려움 속에서도 그나마 다행인 것은 교양과목인 ≪신화의 세계≫를 통해 혼돈의 세상 카오스를 거쳐서, 신화의 마지막 영웅 오디세우스를 만난 것이다. 외눈박이 식인 거인과 맞닥뜨려 ‘아무것도 아닌 자Outis’가 되어 생명을 구하기도 하고, 노래로 사람을 홀리는 사이렌과 죽음의 소용돌이인 카리브디스를 헤쳐나가는 등, 숱한 위기를 극복하고 가족의 품으로 돌아가는 긴 여정을 함께했다. 행복이 어디에 있는가를 깨우치는 소중한 가르침이라 하겠다.
이번 출석 수업은 본부에서 출강 오신 학과장님의 간결한 말씀으로 요약이 되겠다. “우리 학과는 졸업할 때 한글이 어렵다는 것을 깨달으면 제대로 공부를 한 것이다.” 평소 글을 쓰다 보면 맞춤법, 특히 띄어쓰기가 정말 어렵다고 느끼고 있었는데, 교수님의 명쾌함에서 용기를 얻는다.
이제 1학기 마지막 관문인 기말고사를 준비한다. 기말시험을 앞두고 기출문제를 풀어보니 난이도가 예사롭지 않다. 그래서 평소에 하던 요약 노트를 더 정성 들여 정리했다. 이런 불길한 예감은 거의 예외 없이 적중하는 법이다. 기말시험을 치르고 난 학우들의 얼굴을 보니 공포로 새하얗게 질려 있었다. 덩달아 놀란 가슴을 요약 노트 덕분에 쓸어내린다.
2학기 교재 ≪고전소설론과 작가≫에 게재된 매월당 김시습의 문학관에 대해 학습의 심도를 높인다. 방송강의, 워크북은 물론 ≪금오신화≫도 구입해서 읽어본다.
그가 주장하는 귀신이 없다는 말은 무엇인가? ≪금오신화≫다섯 편 중 하나인 〈남염부주지〉에서는 지옥의 대왕인 염마와 경주의 유학자 박생을 동원해, 극락이니 저승이니 하는 별세계가 따로 없고 이승과 저승은 같은 세상이라는 ‘일원론적 세계관’을 드러내고 있다. 이 사상의 사실 여부는 확인할 길이 없다. 그렇지만 저승의 역사는 정말 오래된 것 같다. 기원전 8세기경 고대 희랍 시인인 호메로스와 헤시오도스의 서사시에 이미, 저승의 신인 하데스와 머리가 셋 달린 저승 지킴이 개 케르베로스를 거론하고 있으니 말이다.
저승을 소재로 한 시리즈물 영화가 상영되어 보고 왔더니 두 편 모두 천만 관객을 돌파했다고 한다. 모두 들 저승의 세계에서, 자유롭지 못하다는, 사실을 반증하는 것 같다.
새로운 길을 찾다
4학년 1학기의 시창작론 출석 시험에서 ‘원형 이미지를 사용한 산문시를 10행 이내에 작성하라’는 문제가 출제되었다.
〈달의 무심〉
요양병원에서 정월 달빛 좋은 밤에 급한 연락이 왔다.
허둥대는 머리에 차디찬 은백색이 부서져 내린다
숨을 쉬려는 안간힘 들숨의 폭 좁은 고통도 이런 고통이 없다
잠시라도 더 잡고 싶은 심정이 체념으로 변하는 순간
엄마 귀에 가만히 “엄마, 잘 가세요” 속삭이는 딸의 흐느낌
손에 쥔 가루 곱게 뿌리며 좋은데 가시라는 딸의 속울음
칠칠재 백팔 배 온몸 던져 엄마의 명복을 비는 딸의 애끓는
또 다른 딸이 보내온 초음파 영상, “엄마, 아기가 집을 참 예쁘게 지었지?”
전생의 무슨 끈이 이리도 질긴가?
오늘도 까만 하늘엔 달만 무심히 떠 있다
집에 와서 아내에게 적어 낸 내용을 보여주니 눈물이 앞서서 읽을 수가 없다고 한다. 7년간의
긴 병수발과 어머니를 여윈 슬픔에 심신이 오롯이 지친 아내를 위로하고자, 시간을 쪼개어 잠시
동남아 여행을 다녀왔다.
이제 마지막 학기를 맞이했다. 과제물 네 과목 중 두 과목이 페미니즘과 관련되어 있다. 그중
≪국문학연습≫은 진채선과 나혜석을 비교 분석하는 내용이다. 조선조의 신분제와 가부장적 사고
가 잔재하던 시기에, 관기의 신분으로 남성이 장악한 소리판에서 최초의 여류 명창이 된 진채선,
신여성이자 최초의 여성 서양화가인 나혜석의 자화상과도 같은 작품 〈경희〉를 통해, 남성 우월주
의의 사고가 여성에게 얼마나 큰 족쇄였는지, 성 평등의 사회가 왜 중요한지를 깊이 성찰하게 하
였다.
듀이J. Dewey는 “인간의 삶은 새로운 경험의 과정이며, 새로운 경험으로 계속 성장하지 못하는
삶은 아니다.”라고 했다. 인간은 살아 있는 동안은 계속 배우고 발전해 나가야 마땅하다는 뜻으로
받아들여진다.
부침과 굴곡이 있는 긴 공직생활을 완주하고 나니, 에너지를 다 소모해서 그런지 꼭 바람 빠진
축구공처럼 매사에 의욕이 없었다. 그래서 새로운 일에 도전하기보다는 그저 주어진 조건에 만족
하며 애써 편한 것만 찾으려고 했는지 모른다. 모처럼 국문학이란 고급스러운 재질로 텅 비어 있
는 속을 채워 나가니 이제야 또 다른 삶을 살아가는 것 같다.
처음 시작할 때는 중도에 그만둘지도 모른다는 스스로의 불신으로 가득했었다. 그래도 꾸역꾸
역 하다 보니 이제 졸업이 눈앞에 와 있다. 젊지 않은 나이에 배우고자 하니 어려움이 왜 없겠냐
마는 공부에 남다른 열정으로 임했더니, 편입한 이후로 상위 7%에게 주는 성적 우수 전액 장학
금을 단 한 차례도 놓친 적이 없다.
한편, 글쓰기는 여전히 큰 벽을 마주한 기분이다. 각종 공모에는 낙선을 거듭하고 있고, 지역대
학 문예지에만 등단한 작가들 사이에서 미숙함을 맘껏 뽐내고 있다. 그래도 이런 모자란 점을 메
꿔 줄 학문이 눈앞에 있다는 것에 안도하며, 남은 학기 마무리를 잘해서 이렇게 늦게나마 배움의
길로 들어선 것이 내 인생의 마지막 잘 한 일로 남았으면 하는 바람이다.
부산지역대학에서 발간한 문예지 ≪낟가리≫에 수록된 졸작을 소개하면서 늦깎이 대학 생활의
기록을 마감하고자 한다.
〈가을바람〉
뒷산// 가을바람 소리// 쓱 쏴악// 꿀밤 떨어지는 소리//
툭 투둑// 갈색 줄무늬 옷 다람쥐// 귀 쫑긋// 하얀 억새는//
사알랑 살랑// 가을볕에 졸던 살모사// 슬그니 꼬리를 감춘다.
첫댓글
대단하십니다.
다녀가심감사드립니다. 김 선생님은 저도 대단하신 분이라 알고 있습니다. 늦은 공부에 도 지치지 않고 이루어 내신 것에 그 용기에 감탄합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