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3
천마교주 적용화의 눈빛은 어둡게 침잠이 되었다.
그녀는 말없이 창가로 다가가더니 처량한 시선으로 허공을 주시했다. 잠시의 침묵이 흐른 후 그녀는 탄식과 같은 중얼거림을 흘렸다.
[사랑...사랑이라... 그 한 번의 인연이 사랑이 될 수도 있는 것인지...]
(한 번의 인연?)
[그는 머리 깎은 돌중에다 술주정뱅이였고 호색한이었습니다. 그와의 인연은 대소림사에서 있었지요.]
[아... 대소림사...]
[처음에는 죽이고 싶도록 미워했었는데 왜 그렇게 그 사람의 얼굴이 잊혀지지 않는 것인지...]
천마교주 적용화는 고개를 다시 흔들며 쓸쓸히 탄식했다. 그 탄식 속에 밤은 깊어가고... 여심은 병들어 갔다.
적사전.
이곳은 적사도 마인들의 임시거처이다. 천마성의 북쪽에 위치한 거대한 회백색의 건물. 야심한 시간임에도 불구하고 아직 불이 꺼지지 않은 방이 있었다. 방 안에는 단엽을 비롯한 적사칠혼고 장산이 머물고 있었는데... 웬지 그들의 표정은 심각했다.
[문제로군.]
단엽은 미간을 찌푸린 채 무겁게 중얼거렸다.
[지난 삼일동안 천마교주에 대해 알아낸 것이 아무것도 없다니...]
그는 차가운 눈빛으로 적사육혼을 쓸어내렸다. 그러자, 빙후를 제외한 적사오혼은 풀이 죽은 표정으로 고개를 떨구었다.
[그 뿐만이 아니다. 우리 적사도를 제외한 나머지 무림칠대뇌옥의 인물에
대해서도 알아낸 것이 없지 않은가?]
[죄...죄송합니다. 주인.]
지옥겁이 기어들어가는 소리로 말했다. 단엽의 음성이 더욱 싸늘해졌다.
[실망이야. 그대들의 능력이 고작 이 정도라니... 천마대회합은 열흘 앞으로 다가왔다. 그 이전에 우리는 천마성을 완전히 장악해야 한다는 목표를 세웠고 그 계획의 첫 번째로 그대들은 무림육대뇌옥의 인물을 비롯한 천마교주의 실체에 대해서 철저한 조사를 시작했다. 한데 이제 와서 알아낸 것이 아무것도 없다니 그것이 말이나 되는 소리인가? 그대들이 누구인가? 적사도의 적사오혼이 아닌가? 그 엄청난 능력을 지니고 있으면서 그 정도의 일을 성사시키지 못하다니 내가 그대들을 너무 믿었나?]
[할 말이 없습니다.]
적사오혼은 식은 땀을 뻘뻘 흘리며 어쩔 줄을 몰라하고 있었다. 사목은 망설이던 끝에 입을 열었다.
[사실은 우리가 실패한 것은 전혀 예상치 못했던 무서운 인물들을 만났기 때문입니다.]
단엽은 눈쌀을 찌푸렸다.
[대체 그 자들은 누구인가?]
마동이 작은 소리로 대답했다.
[죄...죄송합니다만..그들에 대해서도 알아낸 것은 없습니다요. 다만...]
[다만...?]
[그들에 의해 우리는 철저히 감시당했고...철저히 행동의 제약을 받았습니다. 물론 무림육대뇌옥의 인물 역시 우리와 같은 처지였을 것입니다.]
단엽은 침음성을 흘렸다. 이번에는 은사혼이 무겁게 입을 열었다.
[그들은 기이하게도 모두가 한쪽 팔이 없었으며 이마에 건은 띠를 두르고 있었습니다. 노신이 파악한 그들의 숫자는 어림잡아 일백여명 정도인데 그들 개개인의 능력은결코 우리의 하수가 아니었습니다.]
[대단하군.]
단엽과 빙후의 얼굴에 경악의 빛이 흘렀다. 적사오혼의 능력을 누구보다 잘 알고 있는 두 사람이다. 한데 한쪽 팔이 없는 그들 백인의 능력이 적사오혼의 아래가 아니라면 실로 엄청난 것이다.
(대체 그들의 진정한 정체는 무엇인가?)
단엽은 내심 전율하며 물었다.
[그들과 직접 일전을 치룬 인물은 없는가?]
흑접이 기어들어가는 소리로 입을 열었다.
[실은 우리 모두 한차례씩 그들과 격전을 치루었습니다.]
[결과는?]
단엽은 궁금한 듯 바삐 묻자 적사오혼은 참담한 표정을 지었다.
[백초를 넘기지 못했습니다.]
그들은 이구동성으로 대답했다. 단엽과 빙후는 경악했다.
[그대들이 그들의 백초지적이 안되었단 말인가?]
[죄...죄송합니다만 그렇습니다.]
[그럴리가...]
단엽은 믿을 수가 없다는 표정을 지어 보였다. 한데 바로 이때다.
[헛허허... 믿을 수 없겠지만 믿어야 하오.]
바람처럼 실내로 흘러 들어오는 음성이 있었다. 물처럼 고요하면서도 한
줄기 위압감을 주는 음성.
이어, 스스스... 흡사 공기 중에서 솟아나듯 한 사람이 실내에 소리 없이 나타나는 것이었다. 검은 유삼을 일신에 단아하게 걸친 중년인, 그 용모가 지극히 청수하고 온화한 인상이다. 눈빛은 물처럼 고요했으며 살결은 여인처럼 희고 곱다. 특징은 이마에 검은 띠를 두르고 있다는 것이며 왼팔이 헐렁한 것으로 보아 외팔이임이 분명했는데, 바로 적사오혼이 말했던 문제의 인물 가운데 일인이리라.
그의 출현에 적사오혼의 안색이 대변했다. 중년인은 잠시 적사오혼을 주시하더니 단엽을 향해 가볍게 포권의 예를 취해 보였다.
[본인은 북궁세가의 십대가신 중 일 인인 북궁현이라 하오. 귀하께서 소수천마이신지?]
단엽은 고개를 끄덕였다.
[그렇소. 본인이 바로 소수천마이오.]
[반갑소이다.]
북궁현이 빙그레 웃으며 고개를 숙여보였다. 단엽은 담담히 물었다.
[본인에게 무슨 볼 일이라도 있는 것이오.]
[물론이외다.]
북궁현은 빙그레 웃으며 빙후를 비롯한 적사오혼을 주시하며 가볍게 미간
을 찌푸렸다.
[한데 분위기가 어쩐지 너무 굳어진 것 같소이다.]
단엽은 말없이 적사오혼과 빙후에게 눈짓했다. 그러자, 적사오혼은 주춤주춤 실내를 빠져나갔고, 빙후는 걱정스런 눈빛으로 단엽을 주시하더니 탄식을 흘리며 마지못해 실내를 빠져나갔다.
[의자를 주어라.]
단엽은 남아있는 장산에게 명했다. 장산은 조심스럽게 나무의자를 끌어다가 북궁현의 앞에 놓았다.
[고맙소.]
북궁현은 고개를 끄덕이며 의자에 몸을 묻었다. 그러자, 장산은 다시 그 앞에 차잔을 놓았고 힐끔 북궁현을 경계의 눈초리로 바라보며 차를 따랐다.
단엽은 장산을 향해 물러가라는 손짓을 했다. 장산은 근심스러운 표정으로 단엽과 북궁현을 번갈아 바라보더니 뒷걸음으로 물러나갔다. 이제 남은 사람은 단엽과 북궁현 뿐이다.
[어떻소? 이 정도의 분위기라면 불청객에게는 과분한 것 같은데...]
단엽은 찻잔을 들어 입술을 축이며 담담히 말했다.
[헛허허...좋소. 아주 마음에 드는 분위기요.]
북궁현은 너털웃음을 흘리며 정색을 했다. 순간, 두 사람의 사이에 숨막힐 듯한 긴장감이 감돌았다. 동시에 잠시 죽음과 같은 침묵의 벽이 드리워졌다. 이 침묵을 북궁현이 먼저 깼다.
[충고 하나 하겠소이다.]
[충고?]
단엽은 차잔을 내려놓으며 북궁현을 주시했다.
[함부로 경거망동 하지 말라는 것이오.]
[무슨 뜻인가?]
단엽의 표정이 싸늘하게 굳어졌다. 북궁현은 찻잔을 들어 조용히 차를 들
이키더니 말을 이었다.
[당신들은 너무 자신을 과신하고 있는 것 같소이다. 과신은 쓸데없는 시간 낭비를 낳고 있을 뿐만이 아니라 당신들은 아주 불리한 국면으로 몰아넣고 있소. 더 이상 천마교주에 대해 알려 하지 말 것이며 무림육대뇌옥의 인물들과 접촉을 하려 들지도 마시오. 당신들은 다만 충실히 천마교주를 따르면 그 뿐이며 그것으로써 당신들이 적사도에서 받았던 모든 고통은 보상이 될 것이오.]
[후후...]
단엽은 냉소를 흘렸다.
[대단하군.]
단엽은 차가운 눈빛으로 북궁현을 주시하며 말을 이었다.
[감히 본인의 안전에서 그 따위 헛소리를 지껄일 용기가 있다니... 충고가 아니라 협박이로군. 그렇지 않은가?]
[마음대로 생각하시오.]
북궁현은 할 말을 다했다는 듯 몸을 일으켰다.
[그대는 그대의 의지로 이곳을 떠날 수가 있다고 생각하는가?]
단엽은 느릿하게 시선을 허공으로 던지며 말했다. 북궁현은 입가에 한줄기 조소를 머금었다.
[내가 가고자 한다면 당신은 결코 막을 수가 없소.]
[핫하하...]
단엽은 크게 웃었다.
[가소롭군. 그대는 스스로를 너무 과신하고 있어. 북궁현, 그대는 천마교주와 어떤 사이인가?]
[본인은 북궁세가의 십대가신 중 일인일 뿐이오.]
[그래? 그렇다면 북궁세가는 천마교주와 어떤 관계인가?]
[소수천마, 함부로 경거망동하지 말라는 나의 충고를 잊은 듯 하군.]
북궁현의 표정이 딱딱하게 굳어졌다.
순간, 파아아... 뻗어지고 있었다.
북궁현의 한 손이 단엽의 가슴을 향해. 빠르다. 손이 뻗어진다고 느낀 순간 이미 단엽의 마의가 그의 손에 의해 날카롭게 찢겨져 나가고 있었으니...
사내의 손이 이렇게 아름다울 수도 있는가. 북궁현의 손은 얼음으로 빚은 듯 투명했으며 투명한 가운데 은은히 자색의 광채가 솟아나고 있었다. 것이다.
단엽은 경악했다. 상대의 손은 어떤 변화도 담지 않고 단지 빠르게만 뻗어왔다. 한데도, 그 손은 단엽이 필할 삼백 육십 방위를 완전히 차단하고 있었으며 더불어 수천만 근의 압력을 주는 것이 아닌가. 움직일 수가 없었다. 엄청난 무게가 사면팔방에서 쏟아져 밀려들고 있었기에.
(무서운 무공.)
단엽은 그제서야 상대의 무공이 적사오혼과는 질적으로 다른 차원의 것임을 느낄 수가 있었다. 그는 엉겁결에 공력을 칠성 가량 끌어 올렸으며 더불어 그의 신형은 엄청난압력의 공간에서 십여 번의 방위 이동을 했다.
찌이익... 그러나 그의 앞가슴의 옷은 보기 흉하게 길게 찢겨져 나갔고 북궁 현의 투명한 손은 그대로 단엽의 몸을 비껴나가 벽을 쳤다.
쾅! 순간 벽은 북궁현의 손에 닿자마자 그대로 한줌의 물로 녹아내리는 것이었다. 실로 가공할만한 위력이었다.
[후후...과연 소수천마로군.]
북궁현은 비릿하게 웃으며 단엽을 향해 다시 일수를 뻗었다. 더욱 가공할 위력을 담고 있다. 단엽은 냉소를 쳤다.
[제법이로군.]
단엽의 손이 그대로 북궁현의 손을 향해 뻗어 나갔다. 그의 장심에 피어 있는 자색의 단엽인. 단엽은 지금 불문최고의 기학이라는 단엽천불수를 전개하고 있었다.
파아악! 쌍수는 허공에서 격렬한 마주침을 일으켰다.
[으윽!]
그 충격으로 북궁현은 신음과 함께 주춤주춤 뒤로 물러서다가 간신히 벽에 기대어 섰다. 그의 입가에는 한줄기 선혈이 흐르고 있었으며 그의 두 눈은 경악과 불신, 회의의 빛을 담고 부릅떠져 있었다.
[이...이럴 수가. 소수천마 그대가 어찌 불문의 단엽천불수를...허억.]
그는 미처 말을 다 끝맺지 못하고 울컥 피를 토했다. 단엽은 다소 창백한 안색으로 북궁현을 향해 다가갔다.
[대단하군. 북궁세가의 십대가신의 무공이 이 정도라면... 북궁세가의 가주가 어떠한 인물이여 천마교주가 어떠한 인물이라는 것이 짐작이 가는군. 그러나 본인이 그들의 실력을 확실히 알지 못하듯 그들 역시 본인의 능력을 확실히 모른다. 그런 의미에서 우리는 아주 공정한 대결을 벌일 수 있다고 봐야 하겠지. 북궁현... 미안하지만 그대는 잠시 나와 함께 있어야 한다. 적어도 천마교주와 그대의 가주가 직접 본인의 면전에 나타나기 전까지는.]
[인질로 잡겠다는 것이로군.]
북궁현은 입가의 피를 훔치며 차갑게 웃었다. 한데, 그의 표정은 이 순간 믿을 수 없게도 담담했다.
[소수천마. 아직 나를 완전히 제압했다고는 생각지 말아라.]
[과연 그럴까?]
[후후...]
북궁현은 대답 대신 기이한 웃음을 흘렸다. 순간, 스스스... 그의 이마에
둘려진 검은 띠가 허공에 날린다. 바로 그때였다.
파아아... 광채. 한줄기 형용할 수 없는 기괴한 광채가 단엽의 눈을 향해 뻗어 나가는 것이었다. 그 광채는 북궁현의 미간으로부터 솟아나오고 있었다. 놀랍게도 북궁현의 미간에는 또 하나의 눈이 있었다.
수만 가닥의 각기 다른 광채가 어우러진 그래서 보는 이의 심혼을 산산이 잡아 끌어들이는 마력을 담고 있는 마안이었다.
단엽은 그 눈빛에 접하는 순간 자신의 머리가 심하게 어지러워짐을 느꼈다. 자신의 영혼이 마치 북궁현의 눈으로 빨려 들어가는 듯한 착각.
(이럴 수가... 인간이 삼안을 지닐 수도 있다니...)
단엽은 그 눈빛을 피해야 한다고 생각했으나 그의 의지와는 상관없이 그의 영혼은 그대로 눈빛에 빨려 들어가고 있었다. 그 위로 잔잔히 깔리는 북궁현의 여운과 같은 음성이 있었다.
[후후...소수천마. 본인은 이제 너의 영혼의 주인으로 군림할지니 나의 뜻..나의 뜻이 되어... 나의 몸...나의 몸이 되리니..이제 너의 모든 것은 나의 아래에 귀속이 되리라...귀속이 되리라.]
울린다. 이 음성은 인간의 음성이 아니라 영혼의 속삭임이었다. 눈빛만으로 상대의 영혼을 잡아끌고 상대를 노예로 부릴 수 있는 북궁현의 능력. 한데 단엽이 그대로 북궁현의 종으로 전락하려는 이 절대절명의 순간,
스스..
. 풀어지고 있었다. 단엽의 머리에 감긴 문사건이... 그것은 바로 풀어지며 도가 되는 천마건. 단지 그것뿐이었다. 북궁현이 볼 수 있는 것은.
[크아아아!]
북궁현의 입에서 처절한 비명이 터져 나온 것은 그때였고, 그의 마안에 한 줄기 깊은 혈선이 그어지며 선열한 피보라가 뿜어져 나오는 것이 아닌가.
단엽, 그는 절대 절명의 순간 천마도법 가운데 일초식인 천마멸을 전개했던 것이다.
한편, 적사육혼과 장산이 비명을 듣고 달려왔을 때는 북궁현이 죽은 듯이 바닥에 쓰러져 있었다. 단엽은 지친 모습으로 의자에 몸을 걸치고 있었다.
[죽지 않을 정도로 치료하도록 해라.]
간단히 명을 내린 후 그는 눈을 내리감았다.
(북궁세가... 도대체 그들의 정체가 무엇인가?)
단엽은 북궁현의 능력을 보며 북궁세가에 대해 한없는 신비와 경계를 느꼈다.
(이 자의 신분이 북궁세가의 십대가신 중 일인이라면 이 단엽은 앞으로 북궁세가를 상당히 경계해야 할 필요가 있겠군.)
단엽으로서는 오늘 최대의 적을 만났다고 해도 과언이 아니었다. 특히 미
심에 있는 마안의 위력은 실로 가공할만한 것이었다.
(검은 띠로 미간을 가린 백인의 고수들... 그들이 모두 북궁세가의 인물이라면... 그리고 그 무서운 마안을 이용하여 무림육대뇌옥의 인물들을 노예로 부린다면 그것만으로도 천마교는 완벽한 부활을 이룬 것이라 할 수 있다. 어쨌든 무림육대뇌옥의 인물들이 자의든 타의든 천마교주를 따르게 될 터이니...)
단엽은 짐작하고 있었다. 천마교주와 이 북궁세가와는 긴밀한 관계를 유지하고 있을 것이라고.
(아무튼 나는 천마교의 부활을 막아야 한다. 어떤 수단과 방법을 동원해서라도 만약 천마교 부활에 관한 열쇠를 북궁세가의 인물들이 쥐고 있다면)
단엽은 눈을 뜨며 천천히 몸을 일으켰다.
(북궁세가의 실체를 우선 파악하는 것이 이 단엽의 할 일인 것 같군.)
- 북궁세가, 과연 이들의 정체는 무엇인가. 모른다. 한 가지 분명한 것은 그들의 힘이 상상할 수도 없으리만큼 엄청날 것이라는 점 뿐이다. 어쩌면 그들은 이백여 년의 세월동안 천마교의 힘을 응축한 음모자들일지도 모른다.
이것은 숙명이다. 이 단엽과 그들이 이 천마성이라는 울타리 안에 함께 공존하고 있는 것은. 그리고 시작이었다. 이 단엽과 그들의 싸움의...
달빛은 처량하게 흘러내리고 있었다. 이날은 단엽과 북궁세가와의 운명적인 만남이 있었던 날.
[이제 이자를 어찌 할까요?]
북궁현을 대강 치료한 후 빙후는 단엽을 바라보며 나직이 물었다. 단엽은 감았던 눈을 천천히 떴다. 그리고 장산을 향해 차 한 잔을 가져다 줄 것을 명했다. 장산은 부리나케 차잔을 단엽에게 내민다. 장산의 순박한 얼굴에는 단엽을 걱정하는 빛이 역력하게 떠올라 있었다. 단엽은 말없이 찻잔을 들어 입술을 축인 후 북궁현을 주시했다.
북궁현은 창백한 안색으로 벽에 기대어 있었다. 단엽은 천천히 의자에서 몸을 일으켜 북궁현에게 다가갔다.
[사목, 이 자를 깨우도록 하라.]
[알겠습니다.]
사목은 단엽의 말이 떨어지기가 무섭게 북궁현의 몇군데 혈도를 쳤다.
[으음...]
북궁현은 전신을 한차례 격렬하게 떨더니 감은 눈을 떴다. 그의 눈빛은 아직도 경악과 불신의 빛을 담고 있었다. 한동안 멍하니 허공에 풀어져 있던 그의 시선은 천천히 단엽에게로 향했다.
[정신이 드는가?]
단엽은 북궁현을 주시하며 담담히 물었다. 그제서야 자신의 처지가 어떻게 되었음을 알게 된 북궁현은 흠칫하며 몸을 세우려 했다. 그러나 그는 전
혀 몸을 움직일 수가 없었다. 철저히 혈도가 제압이 되어 있었던 것이다.
[이렇게 된 것이로군.]
북궁현은 담담히 중얼거리며 단엽을 올려다보았다.
[본인을 모욕함은 북궁세가를 모독함과 다를 바 없는 것. 후회하게 될 것
이다.]
[두고 봐야겠지.]
단엽은 빙그레 웃었다. 이어 차 한 모금을 다시 들이킨 후 말했다.
[북궁현, 그대에게는 아주 좋지 못한 버릇이 있다. 말로써 상대를 협박하려드는 것이 바로 그것이다. 별로 좋지 않아. 그 버릇은...]
북궁현은 말없이 단엽을 주시하고 있을 뿐이었다. 그의 표정은 믿을 수 없게도 담담했다.
[그러나 말로써 하는 협박은 비실용적이지. 후후... 협박은... 행동으로 주는 것이 가장 효과적이다.]
단엽은 이렇게 말한 후 지옥겁에게 의미심장한 눈빛을 주었다. 지옥겁은 비릿하게 웃었다. 단엽이 원하는 것이 무엇인지를 알았다는 듯.
[주인...하명만 하십시오.]
[가장 확실한 것으로 하라.]
[흐흐...물론입지요. 노신은 언제나 확실한 것을 좋아합니다.]
지옥겁은 허리를 깊숙이 숙인 후 북궁현에게로 다가섰다.
(너...이제 죽었다. 흐흐흐..)
[북궁현이라 했지? 흐흐...이제 곧 느끼게 될 거야. 말로 주는 협박과 행동으로 주는 협박의 차이점을...]
[무슨 짓을 하려는 거냐?]
북궁현의 안색은 미미한 변화를 일으켰다. 지옥겁은 씩 웃었다.
[몰라서 묻나? 보아하니 주인께서 네놈에게 듣고자 하는 무엇인가가 있는 것 같으신데... 네놈은 순순히 입을 열지 않을 것이란 말씀이야. 그래서 우선 손을 좀 봐주려 하는 것이야. 알겠나.]
지옥겁은 말하면서 북궁현의 몸에 무엇인가를 바르고 있었다.
[기분이 어떤가? 내가 바르고 있는 것은 유황가루인데 이것은 우선 네놈의 살갗을 한겹 벗겨 내리게 될 것이다.]
[으으...]
북궁현의 이마에 식은땀이 맺히고 있었다.
(잔인한 놈!)
그는 단엽을 주시했다. 그러나 단엽은 담담한 눈빛으로 허공을 바라보고 있었다.
(도대체 저 놈의 진정한 정체는 무엇이란 말인가? 저 놈 결코 소수천마가 아니다.)
북궁현, 그가 지금 단엽의 정체를 의심하고 있을 뿐만 아니라 그가 소수천마가 아님을 정확하게 파악하고 있었으니 북궁세가의 십대가신 가운데 일인 그의 안목은 실로 경이로운 것임에 분명했다.
단엽은 그것을 아는지 모르는지 담담한 눈길로 허공만을 바라보고 있을 뿐이었다. 이때였다.
파스스
[으아악!]
북궁현은 자신의 살갗이 타 들어감을 느끼며 그 엄청난 고통에 비명을 토했다. 살이 타는 지독한 냄새와 더불어 살갗에 피어오르는 푸른 불꽃 그것을 보며 지옥겁은 더욱 비릿한 웃음을 흘리고 있었다.
[흐흐... 이것은 단지 시작일 뿐이야. 노신은 화약의 대가이고 화약으로 인체에 주는 고통을 수십 년간 연구해왔다. 우선 살갗을 벗겨 내리고 팔만 사천 모공을 따라 깊은 상처를 낸 후 그 상처에 다시 유황을 집어넣는다. 흐흐... 그리고 불을 당기면 어찌 되겠는가? 그 상처를 따라 불꽃이 피어오를 것이고 그 고통은 지금보다 백배는 더한 것이지. 그러나 그것이 다는 아냐. 그 고통이 끝나면 전신 혈맥마다에 유황가루를 주입하는 것이 남아 있지.
그 고통 혈맥을 따라 돌며 유황가루가 타들어가는 고통은 신이라 해도 참을
수가 없는 것이다. 그리고 서서히 죽어가는 것이지. 심장이 마지막으로 타버리는 순간까지... 흐흐흐.]
[으으악!]
북궁현은 마구 바닥을 뒹굴었다. 그의 살갗은 이때 완전히 시커멓게 그을려 있었다. 그 고통이야 상상이 되는 것. 지옥겁은 단엽을 바라보며 히죽 웃었다.
[주인...계속할까요? 잠시 쉬었다 할까요?]
단엽은 빙그레 웃으며 북궁현의 앞으로 다가갔다.
[되었다. 그 정도의 고통이면 순순히 나의 말에 답변을 하겠지.]
[으으...대체 네놈이 원하는 것이 무엇이냐?]
북궁현은 사색이 되어 외쳤다.
순간, 퍽! 마동의 한 발이 거칠게 북궁현의 입으로 날아들었다.
[이 새끼야. 아직도 입이 거칠다. 다시 주둥이를 함부로 놀리면 그땐 이 마동이 손을 봐주겠다.]
[으으...]
북궁현은 충혈된 눈빛으로 마동을 주시했다.
(두...두고 보자... 네놈들 모조리 내 직접 죽여주겠다.)
그는 내심으로 이빨을 갈며 단엽에게 다시 말했다.
[원하는 것이 무엇이오?]
[헤헤...진작 그렇게 나왔어야지.]
마동은 그제서야 히죽 웃으며 뒤로 물러선다. 단엽은 담담히 말했다.
[북궁세가와 천마교주와의 관계를 말하라. 그리고 북궁세가의 진정한 정
체에 대해서도... 또한 목적에 대해서도...]
[모두 말하겠소... 모두...]
북궁현은 정신없이 고개를 끄덕였다.
[그러나 결코 당신들의 협박이 두려워서 말하는 것은 아니오. 후후... 굳
이 비밀이어야 할 필요가 없기 때문에 말하는 것일 뿐이오.]
단엽은 그가 순순히 나오자 고개를 끄덕인다.
[그럼 말하라. 우선 북궁세가에 대해서...]
[좋소.]
북궁현은 고개를 끄덕인 후 잠시 생각하는 듯 하다가 입을 열었다.
[북궁세가를 알려면...우선 천년의 역사부터 알아야 하오.]
[천 년의 역사?]
[후후... 북궁세가의 역사가 일천 년이니 당연히 그렇소.]
단엽과 적사육혼의 입에서 탄성이 흘러나왔다. 말이 일천 년이지 실로 엄
청나게 긴 역사였다.
(내가 알고 있는 기억으로는 일천 년의 전통을 지닌 가문은 없다. 천마교
의 우상인 적용가문도. 그리고 군협천의 우상인 철씨 가문도 오백여년의 역
사와 전통을 지녔을 뿐이다. 한데 북궁세가가 일천년의 역사와 전통을 지니
고 있다니. 그럼에도 무림에 전혀 알려지지 않은 존재로 남아 있었다니...)
단엽은 경이롭다는 생각을 했다. 북궁현의 음성은 담담히 흘러나왔다.
[지금으로부터 일천 년 전 무림에는 서북쌍가라는 이대가문이 있었소. 북궁세가와 서궁세가가 바로 그것이오. 물론 이들 가문은 무림에 전혀 알려지지 않은 은자의 가문이었소. 그러나 이 두가문의 핏줄을 타고난 인물들의 자질은 가히 놀라운 것이었소. 한마디로 서북쌍가의 인물 가운데 어느 한명이라도 무림에 나온다면 그는 곧 무림의 최고 기재로 불릴 만큼 대단한 자질을 타고 났던 것이오.]
(그게 사실이라면 대단하군.)
단엽은 내심으로 한가닥 전율을 금치 못했다.
[태어나는 그 순간부터 천기의 흐름을 피부로 느끼고 보는 무엇이든 자신의 것으로 흡수해버리는 그들의 능력. 만약 그들 이대가문이 무림에 눈을 돌렸다면 무림은 그들의 것이 되고 말았을 것이오. 그러나 그들 가문은 무림에는 별로 관심이 없었소. 하늘을 조롱하고도 남음이 있을 정도의 지혜와 능력을 지닌 그들이 피비린내 나는 무림에 관심을 가져야 할 하등의 이유가 없었던 것이오. 서궁세가는 대자연과 동화되어 인세에서는 찾아볼 수 없는 학문을 찾아 전념했고, 북궁세가는 무림에 나돌고 있는 무학과는 전혀 차원이 다른 무학에 심취해 세월을 보내었던 것이오. 이것이 북궁세가의 전부이오. 현재의 가주는 사십 사대인 북궁추림이며 부가주는 북궁천이고 이 두 사람은 북궁세가 일천년 사상 최고의 기재이오.]
단엽은 이 두 사람의 이름을 마음 깊이 새겨놓는다.
(북궁세가... 사상 최고의 기재라면... 대단한 인물들이겠군.)
두 사람에게서 묘한 숙명 같은 것을 느낀 것은 그때. 북궁현의 말은 이어
지고 있었다.
[본인은 십대가신 가운데 가자 보잘 것 없는 존재이며 가주와 부가주에게
는 십에 일할도 미치지 못하오.]
[그래서?]
[지금이라도 늦지 않았소. 나를 풀어주고 천마교주를 따른다면 지금 있었던 불미한 일은 없었던 것으로 하겠소이다.]
[또 협박이로군.]
단엽은 차갑게 웃었다. 북궁현은 고개를 저었다.
[협박은 아니오. 사실을 사실대로 말했을 뿐이오.]
[좋다. 이제는 천마교주와 북궁세가와의 관계를 말하라.]
단엽은 말을 간단히 잘랐다. 북궁현은 할 수 없다는 듯이 천천히 입을 열
었다.
[우리 북궁세가와 천마교주가 관계를 맺은 것은 우연한 계기에서 비롯되었소. 지금으로부터 삼여 년 전이었소. 현천마교주는 거의 죽음에 이른 상태에서 우연히 우리 북궁세가의 처소에 찾아들었고 그것이 인연이 되어... 우리 북궁세가는 천마교주를 돕게 된 것이오. 그러나 천하에 대한 야망은 없소. 단지 우리의 능력을 시험하기 위해 천마교의 부활을 시도하게 된 것일 뿐이오. 천마교주에 대해서는 가주와 부가주만이 알고 있을 뿐이오. 그녀의 진정한 정체 무엇이며 그녀가 무슨 이유로 천마교의 부활을 노리는 것인지 가주와 부가주를 제외한 우리들은 전혀 모르고 있소.]
[그녀라니... 그렇다면 천마교주는 여인이던가?]
단엽은 눈빛을 빛내며 물었다. 북궁현은 고개를 끄덕였다.
[그렇소. 그녀는 항시 면사를 쓰고 있지만, 분명 여인이었소.]
[음...]
단엽은 침음성을 흘렸다. 천마교주가 여인이라는 사실이 그에게 작은 충격을 주었던 것이다. 잠시의 무거운 침묵이 흘렀다. 이때, 문득 빙후가 침묵을 깨고 입을 열었다.
[듣자니 북궁세가의 인물들은 백여 명 정도이고 그들은 모두 팔이 하나 뿐이라고 하던데... 원래부터 북궁세가의 인물들은 팔이 하나 없는 기형아로 탄생이 되는 건가?]
그러자, 단엽이 다시 물었다.
[팔이 하나 없을 뿐만이 아니라 눈이 하나 더 있는 기형아인 것 같은데 그런가?]
[후...]
북궁현은 실소를 머금었다.
[절대 선천적인 기형아는 아니오. 삼안에 외팔이라는 것이 기형이라면..
그것은 후전적인 것일 뿐이오.]
[후천적?]
[그렇소. 우리는 일천년의 세월동안 거듭 연구되어 마침내 완성된 사령마안과 사령자하수라는 두가지 무공을 연성하기 위해 후천적인 기형의 인간이 되었을 뿐이오. 사령자하수를 연성하기 위해서는 오직 한 팔만이 필요했기에 한 팔을 자른 것이며 사령마안을 연성한 우리에게는 또 하나의 눈이 생겼던 것이오. 후후 장담컨대 사령마안과 사령자하수는무림사상 최강의 묵옹이오. 만약 이 무공을 십이성 대성하면 단지 눈빛하나만으로 사람을 죽이고 살릴 수 있으며 영혼을 제압하여 노예로 부릴 수가 있고 설사 죽은 자라
해도 깨어내 종으로 부릴 수가 있소. 사령마안을 십이성 대성한 인물은 북궁세가 사상 두 명 뿐이오. 바로 그 두 명은 현세에 존재하며 북궁세가 사상 가장 뛰어난 기재라는 현가주와 부가주가 그것을 대성하셨소. 사령자하수. 이것을 극성으로 익히게 되면 한 팔은 그 어떤 도검으로도 상해할 수 없으며 단지 뿜어지는 호신강기만으로도 백장 거리에 있는 모든 생물체를 살상할 수 있소. 극성으로 연성할수록 팔은 노을빛을 띄게 되며 그 노을빛만으로 인간을 죽일 수도 살릴수도 있소. 역시 이것을 대성한 인물은 현가주와 부가주 뿐이시오. 본인은 사령마안을 불과 삼성... 그리고 사령자하수를 불과 사성 정도 연성했을 뿐이오. 만약 내가 이 두가지의 무공을 오성 이상만 연성했어도 후후후...상황은 지금의 반대가 되었을 것이오.]
북궁현은 단엽을 바라보며 담담히 웃었다. 그것은 대단한 자부심이 담긴 웃음이었다.
(으음... 이자의 말이 사실 그대로라면 북궁추림과 북궁천이라는 인물의 무공은 인간의 한계를 넘어선 것이리라. 믿을 수 없는 일이로군. 그런 무서운 인물이 이땅에 존재하고 있었다는 사실이...)
단엽은 침음성을 흘렸다. 이어 그는 한가지 사실을 확신했다. 그것은 이들 북궁세가가 무려 이백년 세월 동안 이 땅을 거대한 음모의 소용돌이로 몰아넣고 있었다는 사실이...)
단엽은 침음성을 확신했다. 그것은 이들 북궁세가가 무려 이백년 세월 동안 이 땅을 거대한 음모의 소용돌이로 몰아넣고 있는 제 삼의 인물, 즉 음모자라는 것은 아니라는 점이었다.
(그렇다면 그들은 누구인가? 한 가지 분명한 것은 그들 음모자가 이들 북궁세가가 지닌 능력 이상의 것을 지녔다는 것인데...)
무거워지고 있었다. 단엽의 가슴을 짓누르고 있는 음모자들의 무게가...
[더 물을 것이 있소?]
북궁현은 음성에 무게를 담고 물었다. 그는 나름대로 생각하고 있었다.
(후후...나는 사실을 사실 그대로 말했을 뿐이다. 나의 말을 듣고 상대가 소수천마이든 아니든 겁을 집어먹지 않으면 인간도 아니다. 아니 당연히 겁을 집어먹을 것이다. 이 땅에서 나의 말을 듣고 겁을 집어먹지 않을 자가 있다면 그것은 서궁세가의 인물들 뿐이다.)
그는 단엽의 표정을 면밀히 살폈다. 그 표정에 드리워진 어떤 변화라도 놓치지 않겠다는 듯. 그러나 그는 이내 실망하고 말았다. 단엽의 표정은 너무도 담담했기 때문이다. 마치 북궁세가의 존재는 안중에도 없다는 듯이.
단엽은 담담히 물었다.
[한 가지만 더 묻겠다.
[그대들은 사령마안의 힘으로 무림칠대뇌옥의 인물들을 모조리 노예로 삼으려 했는가?]
[물론이오. 우리 십대가신 중 일곱의 능력이면 그것이 충분히 가능하리라 믿었소.] 한데 당신을 확실히 모른 것이 실수라면 실수였소. 당신은 분명히 소수천마는 아니오.]
순간 적사육혼의 얼굴에 흠칫 놀라움의 빛이 스치고 지났다.
(소...소수천마가 아니라니...그럴리가?)
그들은 경악과 의혹의 눈빛으로 단엽을 주시했다. 단엽은 빙그레 웃었다.
(이제 때가 되었는가? 그렇군. 더 이상 소수천마의 신분으로 행동할 하등
의 이유는 없는 셈이로군.)
그는 천천히 적사육혼을 주시했다. 그리고 무슨 말인가를 하려는 순간,
파아아... 엄청나게 빠른 속도로 실내의 창문을 헤치며 날아오는 무엇인가가 있었다. 그것은 눈이 부시게 찬란한 빛무리와도 같았고, 어찌보면 눈처럼 흰 손과도 같았으니 분명한 것은 빠르다는 것이다.
나타났다고 느껴지는 순간, 그 백옥수는 북궁현의 이마로부터 하관에 이르기까지 수직으로 흰 선을 그었고, 다음 순간, 퍽! 북궁현의 머리는 그 흰선을 따라 그대로 터져버리는 것이었다.
비명도 없었다. 갈라진 양 눈만이 경악과 불신의 빛을 담은 채 바닥에 허무로이 뒹굴고 있었을 뿐이다. 무섭도록 빠른 기습이었고 이미 그 흰 선이 안개처럼 사라지고 있었다.
(이...이럴 수가.)
단엽은 경악하며 몸을 날리려 했다. 한데 그때였다.
[소첩에게 맡기세요.]
빙후가 빠르게 말한후 신형을 날려 실내를 빠져나갔다.
펑! 창문은 빙후에 의해 박살이 나서 허공에 뿌려졌으며 적막한 어둠속에는 달빛만이 흐르고 있었다. 적사오혼과 장산은 굳어져 있었다.
(무서운 무공이었다. 전혀 듣지도 보지도 못한...)
적사오혼은 떨리는 눈빛으로 망연히 빙후가 사라진 방향만을 주시했다.
[누구인가? 그는 무슨 목적으로 북궁현을 죽인 것인가?]
단엽은 의혹의 표정으로 중얼거렸다. 은사혼이 물었다.
[북궁세가의 인물이 아닐까요.]
[아니다. 방금 나타난 백옥수는 사령자하수와 전혀 질이 다른 것이었다.]
[그렇다면...?]
[아직은 모른다. 한 가지 분명한 것은 이 천마성에는 지금 우리가 상상할
수도 없는 무서운 고수들이 자신들을 철저히 감춘 채 존재하고 있다는 사실
이다. 그들은 천마교의 부활을 노리고 치열한 암투를 벌이고 있으며 북궁세
가가 그 암투자 가운데 가장 강한 것 같지만 더욱 무서운 인물들이 도사리고 있을 것이다. 바로 백옥수의 주인도 그 가운데 한명이 분명하고...]
적사오혼은 침음성을 흘렸다. 장산은 떨리는 음성으로 물었다.
[주인...그들은 우리를 죽이려 하나요...?]
[그럴 수도 있다. 만약 우리가 순순히 그들 암투자의 뜻에 따른다면 별 문제이지만 우리가 만약 천마교주의 자리를 놓고 그들의 뜻을 거역하려 든다면 그들은 목적에 의해서 우리들을 죽이려 들 수도 있다.]
[아...]
장산의 얼굴은 사색이 되었다.
[설령 죽지는 않는다 해도 북궁세가의 인물들에 의해 영혼이 제압이 된 상태에서 종으로 전락할 수도 있지.]
[어...어쩌지요?]
장산은 겁먹은 표정으로 물었다. 적사오혼 역시 질려 있었다. 그들은 몰랐던 것이다. 자신 위의 인물은 오직 소수천마와 빙후 뿐일 것이라는 그들의 생각, 그러나 그런 생각이 얼마나 어리석었나를 지금에서야 실감하고 있는 것이었다.
적사도에서의 그들의 성취도 놀라운 것이나 그 세월에 무림은 너무도 달라져 있었던 것이다. 오히려 그들이 얻은 성취 이상으로 무림의 인물들은 놀라운 성취를 이룩하고 있었으며 이제 와서는 적사오혼 스스로의 무공이 보잘 것 없다는 인식이 들게 하고 있는 것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