第 十八 章 눈보라의 女俠들
물결치듯 수천 리에 연이어 있는 복우산맥(伏牛山脈)에는 도처에 꾸불꾸불한 마치 갈이 나 있었다.
섬(陝), 예(豫), 악(鄂), 삼성(三省)을 오고 가는 객상(客商)들은 이곳을 지나지 않는 사람이 없었다.
이 복우산맥에는 하나의 지맥(支脈)이 있어 가을철이 되면 벌써 빙설(氷雪)이 가득히 덮여지기 시작한다. 파도같이 구비치는 산마루에 흰 눈이 덮인 모습은 설계(雪界)를 바라보는 듯한 장관을 이루어준다.
그러나 이곳을 처음 찾는 나그네는 감히 이 길을 걸을 엄두를 내지 못한다. 그것은 봉우리에 쌓인 눈은 아직 얼어붙지를 않아서 세찬 북풍이 불어 올 때면 무서운 눈사태가 일어나서 산골짜기에 더욱 장관을 이루고 길은 온통 눈에 묻혀 버리는 수가 많았기 때문이다.
한겨울 동안 눈에 덮였던 길은 입춘(立春)이 지나서야 빙설이 서서히 녹기 시작하는 까닭에 객상(客商)들은 멀리 동관(潼關)쪽을 돌아서 오고 갈망정 이 험한 길을 다니는 것을 원하지 않는다.
그러나 조물주(造物主)의 장난인지 이 험상궂고 험준한 복우산(伏牛山)도 그 아름다운 설경(雪景)은 사람으로 하여금 완전히 도취경에 이끄는 신비스러움이 있었다.
때는 어느 가을 맑은 새벽――
복우산맥의 지류에 연태산(蓮台山)이라고 부르는 그리 높지 않은 산이 있었다.
이 연태산 중턱을 한 필의 말이 서서히 달려오고 있었다. 산길에는 눈이 무릎까지 닿을 정도로 쌓여 있었다. 말도 걷기가 몹시 힘든 모양이었다.
그러나 말 위의 사나이는 별로 목적이 있어 말을 몰고 있는 것이 아니라 오직 말이 가는 대로 맡겨 둔 채로 절경(絶景)을 이룬 복우산의 경치에 도취되어 있는 것 같았다.
말 등에는 두툼한 담요가 덮여 있었고 입에는 쇠자갈이 물려 있는 것으로 보아 말이 소리를 질러 일을 그르칠까 염려가 되었던 모양이다.
가까이서 보니 말 위에는 남자가 아니라 한 여자가 타고 있었다.
두 볼은 추위에 붉게 달아올랐는지, 아니면 본래 혈색이 좋은 연유인가, 두 볼에는 홍조가 아른했다. 그나 그뿐이랴, 가볍게 덮여 쓴 방한모 아래에는 초승달 같은 눈썹이그려 놓은 것 같았고 옥으로 다듬어 놓은 것 같은 알맞은 코, 붉은 입술에 흰 이가 어딘가 고상한 아름다움을 풍겨 주는 것이었다. 그리고 정기(精氣) 어린 눈동자는 그녀의 마음을 비쳐주는 거울이리라.
그녀는 말위에 태연히 앉아서 멀리 굽이쳐 있는 복우산의 경치를 두리번거리면서 바라보고 있었다.
발밑에는 백설에 덮인 망망한 산하(山河)가 펼쳐 있고 하늘은 푸르기만 하니, 희고 푸른색이 조화되어 있으니 여인의 가냘픈 심정이 어찌 깊은 감상이 솟아오르지 않겠는가?
말이 걷는 바람에 지축이 울렸음인지 옆의 소나무에 쌓였던 눈이 송이를 이루어 여인의 어깨에 날려 떨어진다.
그녀는 깊은 감상에 젖었음인지 한 수의 노래를 읊기 시작한다.
『구월에 눈이 날리니
슬프도다, 북쪽의 추위여!
바람은 슬프게도 비석을 기울이니
얼음은 덩달아 뽕나무를 말리려 하는구나!』
그녀의 목소리는 낮으면서도 침중하게 울려 퍼져 찬바람에 묻혀버린다.
그녀는 손을 번쩍 들면서 말채찍을 내려치니 말은 흰 콧김을 뿜으면서 걸음을 재촉하여 달리기 시작한다.
말 위에서 그녀는 혼자 중얼거린다.
『사여명(查汝明)! 너는 남을 위하여 어떤 좋은 일을 하려느냐!』
그의 얼굴에는 갑자기 상심(傷心)하는 표정이 나타나기 시작하더니 여자의 방심(芳心)이 작용했음인가, 끝내는 제풀에 흐느껴 울기 시작한다.
이 때 갑자기 멀리서
『쿵! 쿵!』
하는 소리가 들려오니 벼락소리는 아닐 것이고, 눈사태가 일어나는 전주곡(前奏曲)임에 틀림이 없으리라.
말은 그 소리에 놀라서 걸음을 멈추었으나 말 위의 소녀는 태연히 앉은 채 눈 하나 깜짝하지 않는다. 그러자,
『콰르릉! 콰르릉!』
하는 소리와 함께 길 앞에 산더미 같은 눈덩이가 떨어지더니 주위에는 갑자기 눈보라가 치는 듯이 사방이 어두워진다.
커다란 눈덩이 하나가 굴러 떨어지면서 푹! 하는 소리를 내면서 그녀의 어깨를 내리치면서 산산 조각이 났다.
그녀는 떨어져오는 눈덩이를 충분히 피할 수가 있었으나, 그는 어깨를 부르르 떨면서 말에서 내려서더니 말의 엉덩이를 툭툭 치면서
『네 마음대로 가려무나.』
그러는 그녀의 말 속에는 만 가지의 사연이 도사리고 있는 듯했다.
말은 목을 한 번 치켜들더니 눈보라를 일으키면서 앞으로 치달려간다.
사여명은 산정(山頂)을 바라보면서
『만사는 모두 눈물뿐이네!
한 번 죽은들 무엇이 아까우랴!』
산봉우리에 가득 쌓인 눈은 그녀의 진기의 고동(鼓動)을 받자, 부름이라도 받은 듯이,
『와르르 쾅!』
하면서 밑으로 쏟아져 내려왔다.
사여명은 두 눈을 딱 감고 고개를 들어 눈사태가 쏟아져 내려오는 바람에 일어난 세찬 바람을 얼굴에 받으면서 마음껏 희열을 느꼈다.
산정에서 밑으로 쏟아지는 눈사태의 힘은 대단히 커서 주위에 무서운 폭음(暴音)을 일으켰다.
이 사나운 폭음에 섞여서 날카로운 사람의 비명소리가 들려왔다.
이때 그녀 자신은 허리 사이의 연마혈(軟麻穴)이 시큰해지는 것을 느꼈다. 누군가 그 허리를 채어가는 것이리라. 사여명은 자기도 모르는 사이에 옆에 다가온 젊은이에게 붙잡혀서 초벽(峭壁) 아래에 몸을 의지하고 있었다.
젊은이는 손에 장검을 꺾어 쥐고서는 초벽 위의 산더미 같은 눈을 후려치니, 두 사람이 의지할 수 있는 길이 생기자, 근근이 걸어서 그 초벽을 벗어날 수가 있었다.
이때 다시 새로운 눈사태가 일어나면서 눈더미가 산길을 막아버리는 것이었다.
사여명은 스스로 마음속에 일어나는 수치감을 참을 길이 없었다.
즉, 그녀는 벌써 다년간 무예를 익혀 강호를 돌아다닌 지가 해를 거듭하였는데, 지금 남에게 구원을 받았다는 것이 저윽이 부끄러워 스스로 무력함을 어쩔 수가 없었다. 그러나 그 위에 더욱 민망한 것은 과년한 처녀의 몸으로서 출가(出嫁)는커녕 제대로 떳떳한 장부조차 한 사람 만나지 못했다는 것이니, 스스로 마음속에 우러나는 서글픔이야 그 어디에 하소연하랴! 그녀는 자신도 모르게 은연히 저 화산 기슭에서 만난 운학의 그 늠름한 모습을 머릿속에 그렸다. 그의 마음은 어떤 것일까?
사여명은 그제서야 비로소 자기를 구해준 사람을 쳐다보니 그가 바로 여자라는데 다시 한 번 깜짝 놀랐다.
여인은 굳게 잡고 있던 사여명의 왼손을 슬그머니 놓으면서 사방의 아름다운 설경(雪景)을 한 번 멀거니 바라보고 나서 갑자기 오른손에 칼을 들고 왼손으로 장력을 쏟아내어 얼마만엔가 겨우 주위의 눈을 말끔히 치우고서는 연마혈(軟麻穴)을 찔린 사여명을 눕히고 치료를 하려고 하였다.
사여명은 아무 말 없이 멀거니 여인의 하는 양을 지켜보고 있었다. 자기를 구출한 여인에게 고맙다는 인사는 고사하고, 그저 멍멍히 그녀를 쳐다보고 있을 뿐이었다.
그러나 사여명은 무엇보다도 같은 여자이면서도 그녀의 아름다움에 내심 얼마나 탄복하였는지 모른다.
그 처녀는 십육,칠 세의 나이로서 사과같이 둥글고, 화색이 만면한 얼굴은 그 마음에 순결함을 상징하고 있는 것 같은 느낌을 준다.
소녀는 천진난만하게 사여명을 바라보면서
『내가 당신의 혈도를 풀어 주기는 아주 쉬운 일이어요. 그러나 언니는 다시는 소리 지르지 말아요. 또 눈이 쏟아지면 어떻게 하지요?』
사여명은 그의 얼굴을 쳐다보자, 한 번 노(怒)한 얼굴을 지어보이는 것이 좋다고 생각하고서는
『픽!』
하고 웃으면서 일부러 노한 얼굴을 짓고, 고개를 돌리면서 그녀는 거들떠보지도 않는다.
그러나 사실인즉 사여명의 공력으로 진기를 운행시켜 혼자의 힘으로 혈도를 풀기란 그리 어려운 일은 아니었다.
그렇지만 그녀가 악의 없는 장난꾼이란 것을 알자, 마음속으로 그녀를 한 번 놀려주는 것이 좋겠다고 생각하였다.
그녀는 사여명이 얼굴을 돌리는 것을 보자,
『이상한데…… 내가 당신의 혈도를 풀어 주지는 않았는데――, 아 참 장대가(張大哥)가 말하기를 고수는 스스로 혈도를 열 수가 있다고 하였지――』
말을 마치자 그는 사여명의 몸을 주물러 주면서 다시 말을 이어간다.
『장대가가 말하기를 귀요(鬼拗), 천현(天玄), 지해(地海), 삼혈(三穴)을 찔리지 않은 다음에는 언제나 자기 힘으로 혈도를 풀 수 있다고 했지……』
그는 사여명의 몸을 주물러 주면서 마치 무공이라도 가르쳐 주는 것 같은 태도로 말한다.
사여명은 완전히 그의 태도에 말려 들어가서 웃지도 못하고 울지도 못하는 이상야릇한 처지에 빠져버렸다.
그녀는 사여명을 보면서 이번에는 뜻하지 않은 말을 한다.
『당신이 아무 말 하지 않아도 좋아요. 난 오직 당신의 아혈(啞穴)을 찌르면 고만이니까요!』
사여명은 크게 놀라지 않을 수가 없었다.
그러나 순간, 아혈 위가 한 번 시큰해지면서 소리조차 지를 수가 없었다.
그는 사여명의 어깨를 툭툭 치면서 혼자 중얼거리는 듯하였으나 사여명에게 들어 보라는 듯이
『장대가가 평시에 가르쳐 준 것을 이제서야 써 먹게 되는군!』
말을 마치자, 그는 벌떡 일어서면서 뒤돌아보지도 않고 산 아래를 향하여 걸어가기 시작하였다.
사여명은 그에게 완전히 놀림을 당한 꼴이 되자 마음에 분한 생각이 들어서 몸을 꿈틀거려 보았으나, 전신에는 한 가닥의 공력도 남아 있지 않아서 어찌할 도리가 없었다.
그녀가 혈도를 찌른 무공이 얼마나 놀라운지 자신의 힘으로서는 막힌 혈도를 열어 볼 도리가 없었다.
사여명의 귓가에는
『윙!』
하는 바람 소리 같은 것이 계속 들려오고 있었다.
사여명은 그녀를 뒤쫓아 산 아래로 내려오면서도 마음속에 끝이 없는 의문이 생기기 시작하였다. 우선 그녀가 어느 파의 누구인지가 궁금하였고 자기가 강호를 지금까지 돌아다녔어도 그렇게 나이 어린 여걸(女傑)을 본 적도 또한 들은 적도 없는 일이었다.
잠시 걸어 산 아래로 내려오니 앞서 가던 그녀는 사여명에게 한 그루 고목나무 아래에 앉으라고 권하면서,
『장대가는 이렇게 말했어요! 사람을 구해주려면 끝까지 구원하여 주어야 한다고 했어요. 그러니 언니, 여기서 잠시 쉬어 갑시다.』
말을 마치자 혼자 눈에 덮인 숲속으로 들어가더니 얼마 뒤에 그녀는 큰 자루 하나를 어깨에 메고 돌아왔다.
사여명은 일부러 신음소리를 내었다.
그것은 행여나 그 자루를 자기 보고 메고 가라는 것이 아닐까 염려가 되어서였다.
그녀는 부대자루를 메고 길을 걷기 시작하니 사여명도 그와 어깨를 나란히 하여 걷기 시작하였다.
사여명은 얼마를 걷는 동안에 피로가 겹치고 요혈(要穴)을 찔린 상처 때문에 정신이 몽롱하여 발만이 땅을 짚고 있을 뿐이었다.
얼마를 걷다가 정신을 가다듬으니 어렴풋이 말소리가 귀에 들려온다.
『여보 주인, 빈 방 있어요?』
객잔(客棧) 대문가에 선 뚱뚱한 사나이는 소녀가 허리에 보검(寶劍)을 차고 등에 자루를 메고 있는 것을 보자, 무척 이상하게 여기는 눈치였으나 얼마만에야 입을 열어 대답을 한다.
『요새 며칠 대설(大雪)이 산길을 가로막아 별로 손님이 없어 빈 방이 많은데, 어떤 방을 찾으시오?』
그녀는 호기심에 넘치는 목소리로
『크고 조용하고 깨끗한 방을 하나 빌려 주시오.』
뚱뚱보 주인은 그녀의 호기에 눌렸음인지 연신 허리를 굽신거리면서
『손님을 동쪽 일호로 모셔라.』
하고 안을 향하여 소리를 지르니 나이 어린 하인이 달려 나오면서
『아가씨, 짐을 들어 드릴까요?』
『괜찮아, 몸에 익어 괜찮다. 네가 들면 망가질 물건이야!』
옆에서 듣고 있던 사여명도 저절로 웃음이 나왔다.
두 사람이 하인의 안내를 받아서 방에 들어서자, 그녀는 자루를 방바닥에 놓았다. 방은 아늑하고 훈기가 감돌았다.
사여명은 오랜만에 따뜻한 방에 누우니 온 몸이 녹는 것 같았고 파도와 같은 피로가 온몸을 엄습하여 왔다.
하인이 자루를 방구석으로 옮기는 척하더니 잘못하여 누워있는 사여명의 어깨를 건드려 버렸으나 그는 사과는 하지도 않고 혼잣말로 중얼거린다.
『이상한걸―― 자루 속엔 별 것도 아닌 것이 들은 모양이군! 말랑말랑한 것으로 봐서――』
사여명은 더욱 곤란한 처지에 빠진 것 같아 마음속으로
――이 건달 같은 하인 녀석에게 봉변을 당하고 말았구나! 요놈에게 한 번 따끔한 맛을 보여 주어야겠는걸!
생각을 하면서 소녀가 빨리 자기를 놓아 주기를 바랬다.
하인 녀석은 오래 손님이 없다가 손님을 맞이하여 즐거웠던지 휘파람을 불면서 까불거리고 흥이 나서 주인의 심부름을 하고 있었다.
그녀는 쉬지 않고 하인을 불러 이것저것 잔심부름을 시킨다.
밥 먹을 때가 되니 사여명은 몹시 시장기를 느껴서 참기 어려울 지경에 빠져 있으나, 하인이 가지고 온 밥상을 옆에 밀어 놓고는 딴전을 피우면서 영 밥 먹자는 말을 하지 않으니 구수한 음식 냄새가 창자를 찔러 사여명으로 하여금 입에서 군침이 돌게 하였다.
그러자 얼마 있다가 그녀는 혼자서 맛있게 음식을 먹기 시작하면서 사여명은 본 척도 하지 않으니 사여명은 야속하기만 하였다.
밥을 다 먹은 그녀는 상을 밀면서
『밥과 반찬을 흘리지 마십시오. 이 집엔 고양이가 있어 고기 냄새를 맡고 있으니까.』
사여명은 화가 머리끝까지 치밀었다. 그러나 어쩔 도리가 없는 일, 사여명은 배고픔을 참지 못하여 소녀가 먹다 남긴 밥을 먹어 치웠다.
하인 녀석이 밥상을 가지고 중얼거리면서 밖으로 나가자, 사여명은 혼자서 다시 생각에 잠겼다.
――어디에 그런 큰 고양이가 있단 말인가? 날 놀리려고 하는 것이 분명한데, 정말 사문(邪門)의 계집아이 같은걸!
그러면서도 사여명은 제발 그녀가 자기를 놓아주기를 바랬다.
그녀는 이때
『언니, 당신을 공연히 괴롭혀서 정말 미안해요. 저는 요원(姚畹)이라고 합니다. 앞으로 많은 가르침을 바래요.』
요원은 태도를 돌변하여 겸손하게 말을 하면서도 두 눈을 뒤집고 읽기 싫은 책을 억지로 읽는 눈치와도 같았다.
사여명은 이 괴상스러운 태도의 요원을 보자, 다시 한 번 분기(憤氣)가 머리끝까지 치밀어 올랐다.
그러나 지금의 처지로는 자신이 참을 수밖에 없었다.
이 깜찍스러운 소녀는 마치 자기를 장난감 같이 손아귀에 넣고 놀렸다 성나게 했다 하는 태도가 귀엽게까지 보이기도 하였다.
요원은 사여명의 대답을 듣지 못하자, 그가 아직도 자기에게 좋지 않은 인상을 갖고 있다는 것을 알자, 얼굴에 미소를 띠우면서
『아이참! 내가 정신이 나갔네! 언니의 혈도를 풀어 드려야 하는 것을 깜박 잊었네!』
요원은 말을 하면서 그의 옥과 같은 손가락으로 사여명의 네 곳의 혈도를 풀어 주고 있었다.
사여명은 그제서야 목이 터지면서 말을 할 수가 있게 되었다.
그러나 전신은 솜과 같이 힘이 풀어져 한 때 힘을 쓸 수가 없었다.
사여명은 마음속으로 요원이 혈도를 찌르는 무공의 힘이 비상함에 다시 한 번 탄복하지 않을 수가 없었다.
얼마가 지나고 나서야 사여명은 정신을 차릴 수가 있었다.
사여명은 몰래 온 몸에 진기를 운행시키니 몸은 거의 회복되어 있는 것 같았다. 그러자 그녀는 자리를 박차고 일어나면서
『꼬마 장난꾼, 정말 나를 비참하게 만들었군!』
요원은 그가 정말 화가 난 것을 알자 재빨리 몸을 피하여 식탁 뒤로 숨었다.
『사매는 정말 남의 착한 마음을 조금도 몰라주는군요. 내가 먹다 남긴 기름과자 드릴게요! 맛있어요.』
말을 하면서 식탁 위에 놓인 기름과자를 손가락으로 가리킨다.
사여명은 어이가 없도록 천진스러운 요원의 사과를 듣자 미움보다도 귀여움이 앞서 자기도 모르게 얼굴에 웃음을 띠우면서
『나는 사여명(查汝明)이라고 해, 나를 구해 주어 고마워요!』
말을 마치자 요원을 향하여 가볍게 읍하면서 그녀가 어떤 태도로 나오는지를 곁눈으로 바라보며 요원 역시 읍(揖)으로 답례하면서 말을 한다.
『장대가가 말하기를 의협(義俠)된 일을 하는 것이 우리들의 본분이라고 말하였는데 언니는 이렇게까지――』
하면서도 어딘가 뽀로통한 기색이 보이니 사여명은 그녀가 강호에 경험이 적어서 그렇다는 것을 알고서는 몇 마디 농담으로 그의 마음을 풀어주려고 하였다.
그때에 하인이 뜨거운 한 잔의 차를 가지고 오다가 두 사람의 모습을 문틈으로 보고서 몸을 움칫하자 요원은 별안간 한 가지 꾀가 생겨서
『얘, 너 나에게는 손님이 있으니 새로 밥상을 마련해 가지고 와.』
하인은 두 사람의 모습을 바라보다가 방구석에 쌓인 자루를 바라보았다.
하인이 찻잔을 식탁에 놓고 사라지자 사여명이 웃으면서
『아가씨, 지금 그 녀석이 이 집의 하인 녀석이지?』
요원은 고개를 끄덕인다.
사여명은 그 하인 녀석이 어깨를 치는 척하면서 자기 몸에 손을 댄 것이 화가 나서
『경박한 놈 같으니! 이 아가씨의 독한 맛을 알게 하여 주마!』
하면서 식탁에 놓인 찻잔을 들고 문가로 걸어간다.
사여명은 그 찻잔을 문지방 바로 밑에 놓아두고 다시 그 하인이 금시 가지고 온 뜨거운 찻잔을 문지방에서 반 자가량 떨어진 곳에 놓아 문과 일직선을 이루게 하여 두었다.
요원은 직감적으로 사여명이 하인을 골려 주려는 것이라고 알았으나 어떻게 골리려는 것인지는 알 수가 없었다.
조금 지나자 하인은 방문에 걸린 발을 거두면서
『주문하신 식사는 곧 가져 오겠습니다.』
하며 문지방 넘어 서려는 순간 찻잔을 걷어차니
『뎅그렁!』
하며 찻잔이 굴러가자 굴러가는 찻잔을 밟지 않으려고 앞으로 몸을 피하다가 두 번째에 놓인 찻잔을 걷어차니
『아앗, 뜨거!』
하면서 허리를 굽혀 발을 통통 굴러대기 시작하였다.
사여명은 보란 듯이 큰 소리로
『너 이 녀석! 눈도 없느냐? 앞을 좀 살피고 걸어오지 못하고!』
객잔의 정원에 모여 있던 많은 하인들은 이 비명을 듣고 방 가까이 와 보고서는 하인이 경솔하여 저지른 실수라고 인정하지 않을 수가 없으니 데어서 쩔쩔매는 하인을 부추겨 내리고 나갈 수밖에――
얼마 뒤에 새로운 하인이 주문하였던 밥상을 가지고 오니 요원은 씽긋이 웃으면서 기름에 튀긴 닭다리를 집어 사여명에게 주면서,
『언니는 정말 지독하군요. 다음번에 제가 언니에게 한 수 당하겠네요? 조심해야지!』
사여명은 요원에게 찔린 허리 부근의 혈도를 주무르면서
『흥! 꼬마 장난꾼 같으니――』
두 사람은 서로 바라보면서 뜻도 없는 웃음을 웃었다.
사여명은 성숙한 아름다움을 간직한 여자요, 요원은 아직 어린 기가 가시지 않은 꽃봉오리와 같은 사랑스러운 아가씨로서 정말 두 여자는 공교롭게 만난 것이었다.
이를 계기로 하여 두 사람은 다시없는 좋은 벗이 되었다.
두 사람이 만난 지도 어느덧 벌써 십여 일이 지났다.
이 때 두 사람은 십 년 전에 사귄 친구 모양 다정하게 섬서성(陝西省)의 장안(長安)을 향하여 걸어가고 있었다.
길을 걷는 중에 사여명은 나이도 많고 강호에 대한 경험도 많아서 이르는 곳마다 언니 행세를 했다. 그러나 요원은 아직도 치기(稚氣)가 남아있어서 사여명이 없었다면 정말 여러 번 사고를 일으킬 뻔하였다.
어느 때인가는 동관(潼關)에서 신부(新婦)가 가마를 타고 훌쩍훌쩍 울고 있었다.
이것은 흔히 볼 수 있는 신부의 교태(嬌態)인데, 요원은 무엇인가 까닭이 있을 것이라고 어림짐작하여 허리에서 장검을 빼들기가 무섭게 가마 곁으로 달려가려는 것을 사여명이 가까스로 뜯어말려 놓고 자세히 설명을 하여 주었으나 이해가 가지 않았는지 소란을 피워 서로의 입장을 난처하게 만들어 놓은 일이 있었는가 하면, 또 한 번은 장안으로 가는 도중 이틀째 접어들던 날 어느 조그만 마을에 이르렀을 때 엄한 촌로(村老)가 자기 아들을 훈계하면서 매채로 때려주는 것을 본 요원은 어린 아이를 도와주는 것이 의(義)로 알았음인지 홀연히 촌로에 덤비려는 것을 사여명이 가까스로 뜯어 말려 망신당할 뻔한 것을 가까스로 면한 일도 있었다.
그러나 이럴수록 두 사람의 우정(友情)은 점점 깊어가기만 하였다.
사여명은 요원에게 구원을 받은 은혜에 감격하기도 하였으나 무엇보다도 그녀의 갈기갈기 찢어진 마음의 고독감을 이 사랑스럽고 영리한 요원에게서 메꾸어 나갈 수가 있었기 때문이다.
요원 역시 그가 처음으로 세상에 나와서 적지 않게 당황하고 있던 때였으며, 어머니를 여의었고 손위의 언니가 없어 쓸쓸하던 터에 사여명을 만났으니 어찌 자매와 같은 사랑이 우러나지 않았으랴! 이리하여 그들에게는 어느덧 친정(親情) 이상의 두터운 사랑이 움트고 있었던 것이다.
그러나 그녀들은 서로 약속이나 한 것처럼 마음에 비밀을 지니고 있었다.
그들은 처녀의 몸이라서 마음속에 움트고 있는 사랑의 비밀을 털어놓을 수가 없었던 것이다.
그들은 정신없이 걸음을 재촉하여 장안을 지나서 더욱 서쪽으로 걸어갔다.
북풍은 그들의 실오리 같은 머리카락을 날려 주고 흰 눈이 그들의 몸에 쌓이니 두 사람의 마음은 더욱 화합하여 추위를 녹이려는 듯하였다.
이렇게 오랜 시일을 두고 두 사람이 여정을 더듬는 사이에 요원은 사여명의 마음에 무엇인가 깊은 슬픔이 잠겨 있는 것을 여러 차례 엿볼 수가 있었다.
그녀는 가끔 별과 같이 반짝이는 눈동자를 찡그리고 수심(愁心)에 잠겨 있는 것을 보아 왔기 때문이었다.
이리하여 그녀는 이 수심에 잠긴 사여명을 발견할 때마다 화산 위에서 수심에 잠겨 있던 장대가를 연상하게 하였다.
그는 세상이 고르지 못하다는 것을 깨닫는 것 같았다.
다시 말해서 자기 주위에 있는 좋은 사람들의 가슴에는 모두 수심이 잠겨 있는 것이 원망스러웠기 때문이다.
남이 보기에는 요원의 이런 생각에는 이치에 맞지 않는 듯싶었으나 나이 어리고 순진한 그의 가슴속에 이런 생각이 움텄다는 것은 당연한 일이라고 할 수 있을 것이다.
요원은 그러나 자기의 마음에는 하나도 수심이 없다고 해서 자기는 결코 나쁜 사람이 아니라는 것을 마음속으로 강력하게 주장하고 있었다.
그런 마음의 주장에는 자기뿐이 아니라 지난 날 만났던 운학(鄆鶴)의 얼굴에서도 수심을 찾아 볼 수가 없었기 때문에 그에 대한 마음의 주장이 더욱 강력한 자리를 차지하고 있었음은 더 말할 필요가 없는 일이었다.
서북 지역의 때는 황혼――
석양은 마지막 넘어가는 빛을 온 누리에 비추어 주니 은색의 광막한 대지는 붉게 물들며 휘황한 장관을 이루었다.
요원과 사여명은 말에 채찍질을 하여 황야를 질풍과 같이 달려간다.
요원은 고개를 돌리면서
『언니, 쉬어 가요.』
사여명은 엷은 웃음을 짓고서 말고삐를 잡아당기니 말은 그 자리를 한 번 맴돌고는 곧 멈추어 선다.
길가에는 한 그루의 버드나무가 서 있었다.
요원은 말고삐를 돌려 자기를 향하여 다가오는 사여명을 바라보면서 문득 호수같이 맑은 그녀의 두 눈동자와 아름다운 얼굴 맵시를 보고서는 다시 한 번 감탄하는 마음이 일어난다.
그녀는 목소리를 가다음어 시를 읊기 시작하였다.
――먹칠한 듯 새카만 눈동자와, 봉황 같은 눈꼬리는 머리까지 뻗히니, 천연의 아름다움이 잠겨 있도다.
――꽃을 멀리하고 천공(天空)을 바라보면, 드문드문 별은 반짝 반짝, 난간에 의지하여 보면, 물은 넘실넘실.
――단정한 얼굴이 오랜 뒤에, 한 번 웃기를 기다려, 꿈같은 사랑을 이루네.
이것으로 사여명의 아름다움을 완전히 나타내었다고 만족할 수는 없을 것 같았다.
사여명은 요원의 곁으로 다가섰다.
사여명은 요원이 중얼거리는 것을 보고서는 짐짓 교태를 지으면서
『원(畹) 동생, 누구를 그렇게 생각하고 중얼거리고 있는 거야!』
요원은 갑자기 놀라면서 뾰로통한 말을 한다.
『저는 한참 사(査) 언니의 아름다운 눈동자를 칭찬하여 시(詩)로그려 보고 있었어요.』
사여명의 아름다운 양쪽 볼이 붉게 물들었다.
『원 동생! 자신의 아름다운 눈동자는 어떻게 하고――』
요원은 못마땅한 듯이 눈을 껌벅거리면서
『어떤 훌륭한 낭군이 있어 언니 같은 선녀(仙女)를 택하게 되실까?』
이 요원의 말은 사여명의 마음의 괴로움을 적중시킨 말이었다.
사여명의 아름다운 얼굴에는 갑자기 이슬이 덮이면서 두 눈을 구슬 같은 눈물이 어리는 것 같이 보였다.
눈치 빠른 요원은 자신이 그의 마음의 괴로움을 건드렸다는 것을 눈치 채고서는
『사(査) 언니, 언니에게 옛 이야기 하나 들려 드릴까요?』
사여명은 한창 어색한 입장에 놓인 자기를 감추려고 하던 참이라서 고개를 끄덕일 수밖에 없었다.
요원이 말에서 내려서니 잇따라 사여명 역시 말에서 내려섰다.
두 사람은 눈길을 서서히 걷기 시작하였다. 저녁 바람은 두 처녀의 예쁜 머리카락을 가볍게 스치고 지나간다.
그러나 그들은 아무 말도 없이 눈에 덮인 대지의 경치를 바라보고 있을 뿐이었다.
요원은 약속한 옛이야기를 생각하노라고 여념이 없었다.
그의 머리에는 갑자기 장대가(張大哥)가 들려준 옛 이야기가 생각이 났다.
사여명은 이야기를 시작하지 않는 요원이 이상하게 보였다.
얼마만에 요원의 입에서 나오기 시작한 옛 이야기는 다음과 같은 것이었다.
――옛날 어느 곳에 한 사람의 노무사(老武師)가 있었습니다――
그이 이야기의 서두(序頭)가 마치 동화(童話)의 한 구절같이 들리게 되자 사여명은,
『픽!』
하고 웃어 보였다.
요원은 사여명을 바라보면서 정색을 하며 다시 이야기를 시작하였다.
――그 무사에게는 세 사람의 도제(徒弟)가 있었어! 세 사람의 성은 각각 장(張), 운(鄆), 김(金)씨가 있었는데 그 가운데 김씨가 가장 훌륭했었어요――
사여명은 놀리는 듯 웃으며 요원의 이야기를 중단시키면서
『그 도제 가운데에 요씨 성(姓) 가진 사람은 없었나?』
요원은 생긋이 웃어 보이면서
『가만히 있어요. 요씨 성은 없었어요.』
――그런데 그 김씨가 노무사(老武師)의 딸을 사랑한 끝에 아기를 낳아――
사여명은 눈을 크게 뜨며 놀라
『뭐라고? 아기를 낳았다고!』
요원은 얼굴을 붉히면서
『언니는 듣기나 해요!』
요원은 약간 성이 난 듯한 표정을 지으면서
――그러니 노무사는 기분이 대단히 좋지 않아서 곧 김씨라는 도제를 감금하여 가법(家法)에 따라서 처리했어요! 이 김씨는 대단히 성격이 괴팍한 사람이라 사형(師兄) 되는 운(鄆)씨를 속이고 도망을 쳐 버렸어요.
그것은 어느 날 훈풍이 불던 저녁이었어요. 넓은 대지는 바람소리 하나 들려오지 않는 적막에 잠겨 있었어요!
더욱 이 노사(老師)가 살고 있던 장원(壯苑)은 조용하기만 하고 아무런 동정을 살필 수가 없었어요. 그러나 노사가 살고 있던 집 후원에는 조그만 누방(樓房)이 있었는데 그곳에는 상상하지도 못할 큰 사건이 벌어졌어요――
사여명은 처음에 요원이 하는 이야기가 동화조(童話調)로 나오는 것 같아서 웃어버리고 말았으나 요원이 이야기하는 태도에 무엇인가 진실이 잠겨 있는 것같이 느껴져서 그의 이야기에 귀를 기울이게 되었다.
요원은 다시 이야기를 시작한다.
――이 누방의 이층이 바로 이 노무사의 딸의 침실이었어요, 이때 바로 그 침실에는 한 사람의 불청객이 서 있었어요. 그 사람은 바로 김씨였어요. 즉 노사의 딸의 애인이었던 것이지요. 그 김씨는 그 딸의 나이 어린 두 명의 몸종과 늙은 심부름꾼 노파를 칼로 위협하여 꼼짝도 못하게 하여 놓고서는 애인에게
『사부는 지금 우리 두 사람을 죽이려 하고 있으니 우리는 빨리 도망을 갑시다.』
그녀는 고개를 숙이고
『우리는 어찌 일을 그르치겠어요. 저는 따라가지 않겠으니 당신이나 빨리 가세요.』
그러자 김씨는 노하면서
『그대와 나는 맹세코 서로 떨어지지 않기로 약속했지 않아! 그대는 새로 태어난 우리들의 아이와 함께 이곳에서 여러 사람의 비웃음 속에서 살자는 것은 아니겠지!』
노사의 딸은 가볍게 이를 갈았어요. 몹시 상심(傷心)하고 있는 것이었지요. 드디어 그녀는
『아직도 당신의 저의 마음을 모르세요. 아이는 당신 마음대로 데리고 가세요. 그리고 안심하세요. 당신과 제가 이별하는 날은 제가 죽는 날이니까요. 당신은 오직 아이를 잘 돌봐서 다시는 나와 같은 전철(前轍)을 밟지 않도록 하세요!』
그 사나이는 때가 급하다는 것을 깨닫고서는 아이를 품속에 안고 세 사람의 연마혈(軟麻穴)을 칼끝으로 찔러 놓고서는
『이별이오! 나의 사랑하는――』
그리고는 곧 몸을 날려서 어둠 속으로 몸을 감추고 말았어요――
사여명은 크게 감명을 받았다.
그는 요원을 뚫어져라 쳐다보면서
『노무사(老武師)의 딸은 어떻게 되었지?』
요원은 고개를 들어 어둠이 깔린 허공을 바라보았다.
요원은 어둠에 잠긴 허공에서 비명에 죽어간 큰 언니의 얼굴이 보이는 것 같았다.
――만약 큰 언니가 살아 있다면은 저 사여명 언니처럼 나를 사랑하여 줄까?
요원의 눈에는 그리움의 눈물방울이 맺히기 시작하였다.
그는 낮은 소리로 흐느껴 울면서,
『노무사의 딸은 자살(自殺)했어요. 그날 밤으로 목을 맸지요.』
이 비극에 잠긴 요원의 옛 이야기를 듣고 사여명은 노무사의 딸의 영혼에 마음속으로 기도를 드려 주었다.
그러나 슬퍼하는 요원을 보고서도 사여명은 노무사는 요원의 아버지요, 비명에 죽은 노무사의 딸은 요원의 큰 언니라는 것을 알지는 못하였다.
사여명은 목소리를 낮추면서,
『그 나쁜 자식은?』
요원은 깜짝 놀라면서,
『나쁜 자식이라뇨? 언니는 그 김씨를 말하는 거지요?』
요원은 항의를 받자 스스로 자신의 실언을 깨달아서 어찌할까 하였으나 다행히도 사여명의 태도에 별로 변함이 없는 것을 알자 마음이 놓였다.
요원은 큰 소리로
『김씨는 그대로 악(惡)을 고치지 않고 무림계에 나서서 소란을 피웠지! 그 결과 그의 사부(師父)는 두 사형(師兄)을 시켜서 그를 잡아 오도록 보내어 어느 깊은 산골짜기에서 억지로 그를 찾아 일전(一戰)을 치렀으나 결과는 정의(正義)가 이겼어요.』
『그 나쁜 놈은 죽었나?』
요원은 지그시 웃으면서
『그는 두 사형의 면목을 봐서 몸을 깊은 골짜기에 날려 밑바닥이 보이지 않는 골짜기로 떨어졌으니 죽지 않고 배길 수가 있었겠어요?』
이번에는 오히려 사여명이
『죽었겠군!』
그러나 요원은 눈을 반짝이면서,
『언니! 그런데 나는 이상한 예감이 들어요! 그가 죽지 않았을 것 같아요. 왜냐하면――』
이야기가 여기에 이르자 그의 이야기는 점점 침착하여지기 시작하였다.
무엇인가 말하기 힘든 것 같은 표정을 짓는다.
사여명은 궁금해서 급히
『어째서?』
『왜냐하면 나도 일찍이 황산 위에서 골짜기로 떨어진 일이 있었는데 죽지 않았거든요.』
이 말을 듣자 사여명의 머리에서 지금까지 죽었으리라고 믿었던 마음에 약간 의심이 가기 시작하였다.
그것은 자기도 천 길의 절벽에서 떨어져도 죽지 않은 실례를 본 적이 있기 때문이었다.
요원은 엎드려서 한 주먹의 눈을 집어 주무르면서
『나는 또 하나 그가 죽지 않았으리라고 믿는 원인이 있어요. 그것은 그가 한 달 남짓이나 산 위에서 몸을 치료하고 공력을 단련했기 때문에 가령 천 길의 절벽에서 떨어졌다 하더라도 어찌 퇴로(退路)를 생각하지 않을 수가 있겠어요? 두 분의 사형에게는 골짜기로 떨어지는 듯이 보여 그가 죽었다는 소문을 무림에 퍼뜨리게 하여 놓기 위해서 위계(僞計)를 쓰고 퇴로를 이용해서 도망쳤을 것이라고 생각해요 언니!』
사여명은 이야기를 듣고 나서 고개를 끄덕인다.
『언니! 또 하나 이상한 것이 있어요. 그 때의 그 어린 아들이 종무소식(終無消息)이에요. 만약 그가 죽었다면 세상에 그 딸이 살아남아서 소문이라도 들릴 것이 아니겠어요?』
사여명은 무엇인가 신기한 것을 발견이라도 한 듯이 눈을 둥그렇게 뜨면서
『원 동생, 그런 억측은 그만 하자! 날이 저물었으니 빨리 가야지! 내가 알기로는 한 십 리쯤 앞으로 가면은 촌락(村落)이 있을 것이라고 알고 있어!』
말을 하면서 그가 가볍게 몸을 날려 말에 올라탔다.
요원은 사여명이 자기의 추측에 십분 동의하는 것이라 믿으면서 말에 올라탔다.
이 때 사방은 이미 어둠에 쌓여 있었다.
두 사람의 말이 달리기 시작하니 말굽소리가 어둠에 잠든 공기를 가볍게 뒤흔들어 놓았다.
서산머리에 실 같은 초승달이 걸려 있으니 나그네의 마음을 한결 쓸쓸하게 만들어 준다.
얼마를 말이 달렸을까――
두 사람이 달려가는 앞에 희미하게 마을이 보이기 시작하였다.
초라한 농가의 창문에는 희미한 불빛이 새어 나오는 것이 보이고 하루의 일을 끝마친 온가족의 단란한 한 때를 보내고 있을 사람들의 모습이 보이는 것 같았다.
두 사람은 말을 재촉하여 마을에 이르니 그곳이 바로 장원이었다.
이 거리의 중심은 큰 관도(官道)가 지나고 있었다.
사여명은 이곳저곳을 기웃거리며 객잔(客棧)을 찾았으나 별로 신통한 곳이 없었다.
얼마동안 관도를 오가다가 억지로 내승노잔(來昇老棧)이란 객주 집을 찾았으나 제법 손님이 많은 것 같아 주인에게 겨우 간청하여 구석진 곳에 있는 창고 같은 방을 하나 억지로 빌렸다.
요원의 성격으로 봐서 도저히 이런 곳에 묵으려 하지 않았으나 사여명이 간곡히 타일러서 그 방에서 하루를 쉬게 되었다.
두 사람이 말의 짐을 풀고 객줏집 문을 들어서자, 맞은편에서 두어 사람의 사나이가 걸어 나오고 있었다. 사여명은 금시에 그들이 과히 좋은 사람이 아니라는 것을 깨달을 수가 있었다. 그래서 속으로는 슬그머니 경계를 하면서 만반의 태세를 갖추었다.
사나이들은 괴상한 옷차림을 한 두 사람의 여인을 보고서는 서로 회심(會心)의 웃음을 짓는 것이 무엇인가 머리에 간교(奸狡)스러운 생각이 떠오르는 모양이다.
두 사람은 방에서 저녁상을 물리치고 방을 걸어 잠근 다음에 요원은 조용히 정좌(正座)를 하고서는 좌공(坐功)의 연습을 시작하였다. 그녀는 연습을 하면서 마음에 흔희작약(欣喜雀躍)하는 기쁨을 감추지 못하였다.
그것은 지난 날 장대가가 가르쳐 준 소림파의 천일대사의 심전(心傳)을 운공(運功)하는 것을 배운 것이 크게 진보될 것 같이 느꼈기 때문이었다.
연습이 끝난 다음 요원은
――이제 나는 운학과 어깨를 나란히 할 날이 멀지 않았구나!
하는 생각이 머리에 떠올라 입가에 가벼운 미소를 지었다.
왜?
사해(四海)에는 전진(全眞)이 있고
복파보(伏波堡)는 팔종(八宗)을 진동한다.
(四海有全眞 伏波震八宗)
란 말이 강호에 나돌고 있었기 때문이다.
사여명은 요원의 얼굴이 보름달과 같이 빛나고 눈은 호수가의 물보다 더 맑은 것을 보고서는 가볍게 웃었다.
요원은 마치 가을 황금 추파(秋波)처럼, 말을 알아듣는 한 송이의 꽃처럼 그 아름다움은 비길 데가 없었다.
사여명은 자신의 생각에 이르렀다.
일찍부터 한 가닥의 우수(憂愁)에 잠겨서 살아왔던 자기를 생각할 때 요원이 끝없이 부럽기만 하였다.
그러나 순간 운학의 모습이 머리를 번개같이 스쳐 지나갔다.
그러나 그 운학은 박정(薄情)한 사나이로밖에는 보이지가 않았으니 혹시 그의 마음속에는 벌써 딴 생각이 도사리고 있는 것이나 아닐까? 하는 생각이 들자, 그녀는 또 다시 깊은 수심에 잠겨 버리며 탄식하였다.
요원은 사여명의 장탄식을 듣고서는 사여명에게 깊은 동정이 갔다.
요원은 스스로
――나도 나이가 차서 어른이 되면은 언니처럼 깊은 우수에 잠기게 되는 것이나 아닐까?
두 사람 사이에는 얼마동안 말없이 침묵이 흘렀다.
이 때 갑자기 옆의 방에서 거친 사나이들의 떠드는 목소리가 들려왔다.
들려오는 목소리로 보아서 네 사람이 무엇인가 수군거리며 의논을 했다가는 왈가왈부(曰可曰否)로 떠들어대고 하는 것 같았다.
요원이 재빨리 몸을 날려 벽에다 귀를 기울이니
『노대(老大)! 우리들의 장문(掌門) 역시 나이가 사십이 넘었지만 괜찮아! 그것보다는 우리 형제들의 일을 생각하여 봐야 할 것 아냐! 그런데 옆방의 두 여자는 정말 멋쟁이던데. 당신은 어떻게 생각하지?』
『장아칠(張阿七), 말을 삼가. 떠들면 우물 안의 고기를 놓치네!』
『노대! 내가 아칠의 말을 돕는 것은 아니지만, 그까짓 계집 둘쯤이야, 우리 천전교는 사람 놓치지 않는 것으로 유명하지 않아? 우리들의 장문은 십팔 세부터 이름을 날려 삼,사십 리 안에서는 탄복하지 않은 사람이 없었고 반항하는 사람이 없었지 않아.』
이 사나이의 말이 끝나기가 무섭게 갑자기
『탁!』
하는 소리가 들려왔다.
아마도 그 사나이들이 이야기하다가 신이 나서 무릎을 치는 소리임에 틀림이 없었다.
지금까지 요원이 엿들은 이야기의 줄거리로 봐서 그 사나이들은 천전교의 졸개들임에 틀림이 없었다.
요원과 사여명은 이 사나이들의 이야기를 듣고 마구 웃어주고 싶었으나, 혀를 물고 웃음을 참았다.
그러나 요원(姚畹)은 그들의 이야기에 잘 이해가 가지 않았을 뿐 아니라, 천전교(天全教)에 대해서도 이름만 들었을 정도로, 아는 바가 없었기 때문에 별로 대수롭게 생각하지 않는 눈치였다.
사여명이 요원을 보고서는 손짓을 하여 주의를 환기시키니 요원은 비로소 옆방의 사나이들을 어수룩하게 볼 것이 아니라는 것을 깨닫고 다시 귀를 곤두세우기 시작하였다.
과연 그들은 조금도 조심성이 없어 여전히 제멋대로 떠들어대고 있었다. 다른 한 놈의 굵직한 목소리가 들려왔다.
『노사(老四)의 말에 일리(一理)가 있어. 그러나 큰형의 말도 옳아. 우리들이 옆방의 두 계집을 잡지 못한다면 이 오천성(鄔天星) 역시 얼굴을 들고 다닐 수가 없게 되지!』
『너는 누구의 말이던 다 일리가 있고 옳다니, 정말 어떤 것이 옳다는 말이냐? 전번에도 너더러 재주껏 돈을 훔쳐 오라니까 들켜서 주리경만 치고 왔지 않아! 큰 소리는 치지 말아!』
이 말을 듣고 오천성은 화가 치밀어 오른 모양이었다.
『장아칠, 넌 꼭 손오공의 동생인 돼지의 화신 저팔계(豬八戒)처럼 남의 호통만 건드려 놓지 마라! 똥 묻은 개가 겨 묻은 개 나무란다고, 내가 뭘 잘못했다고 나를 헐뜯는 거야?』
이 때 노대는 화를 버럭 내면서
『이게 뭐야! 집안싸움에, 없는 집 팔아먹겠다. 조심해라! 옆방의 두 여자는 손바닥에 들어온 물건이라고 생각하면 안 된다.』
그들은 한 놈이 말하면 또 한 놈이 그 말을 되받아 갑론을박(甲論乙駁)을 벌리고 있었다.
결국 그들의 여러 사람의 의견이 일치되지 않아서 제각기 제멋대로 행동을 하는 눈치였다.
사여명은 그들의 이야기를 이상 더 엿듣는 것이 더러운 생각이 들어서 요원의 귀를 잡아 당겨 입에다 대고서는 뒤에 일어날 일에 대한 대책을 의논하기 시작하였다.
이튿날 아침, 그들은 일찌감치 길을 떠났다.
겨우 십리나 걸었을까 할 무렵에 두 사람의 머리 위를 한 마리의 비둘기가 가볍게 날아간다.
비둘기를 보아, 요원은 보중에서 자기가 기르던 비둘기의 생각이 나더니 불현듯이 집 생각이 나기 시작하였다.
위엄이 가득한 오빠 요백삼(姚百森)이며, 장대가(張大哥)이며, 신필(神筆) 왕천(王天)의 얼굴이 주마등같이 눈앞에 지나가는 것이었다.
다시 요원의 머리에는 지난 날 무림의 군웅들이 복파보에서 소란을 피우던 생각이 머리에 떠올랐다.
그 당시 거기에 모였던 군웅 중에서도 사부 능상노파(凌霜老婆), 무림삼영(武林三英) 중의 두 사람 등등 그러나 최후로 그의 머리를 떠나지 않은 이가 있으니 그는 누구일까?
그 씩씩하고 늠름하던 마부 운학(鄆鶴)의 모습이었다.
사여명은 말채찍으로 날아가는 비둘기를 가리키면서
『원매! 그 원숭이 같은 놈들이 구원병을 청하는 비둘기야!』
원아는 그제서야 잠에서 깨어난 사람 모양으로 풀이 죽어서,
『사언니, 앞으로 일이 아주 재미없게 될 것 같지 않아요? 네 놈의 대한이 어제 밤 그들의 이야기와는 달리 전연 반응이 없다가 원병을 청하는 비둘기가 나르니!』
사여명은 태연하게
『죽은 죄는 면하기 쉬우나 산 죄는 피하기 어렵다는 말이 있듯이 그 놈들의 주둥이를 막지 못한 사람이 없을 리가 있나!』
요원은 다시 한 번 생각하여 보았다. 마음속으로는 풀리지 않는 의문 때문에 참지 못하겠다는 눈치이다.
『그럼 지금 어떻게 하지?』
사여명은 지난 날 운학이 자기를 떠난 뒤에 가슴속에 쌓였던 번민을 풀을 곳이 없던 차였다. 그 울분이 이 때 노여움으로 변하여 표독스럽게 말을 한다.
『그 천전교의 도적들은 보는 대로 해치우면 된다. 어떤 놈이 오더라도 난 눈 하나 깜짝하지 않는다.』
요원은 사여명의 마음에 불같이 일어나고 있는 반항심을 금시에 알아 볼 수가 있었다.
그러나 그 반항심이란 마음속의 감정이 쌓여서야 밖으로 쏟아져 나오는 법이다.
운학으로 인하여 그의 마음속에 얼마나 많은 번민과 고뇌의 감정이 쌓였는가를 짐작 할 수 있는 일이었다.
사여명과 요원은 서로 눈짓을 하며 쳐다보다가 멋쩍었음인지 한 번 씽긋 웃었다.
다시 두 사람은 침묵을 지키면서 말에 채찍을 하여 관도 위를 달려갔다.
길 양 쪽의 아름다운 설경(雪景)은 나는 새와 같이 두 필의 말 뒤로 뒤쳐져갔다.
요원은 그렇게 오랫동안 주유천하(周遊天下)의 소망이 이루어져서 따그덕따그덕 말굽소리가 들릴 때마다 가슴속이 시원스럽게 씻겨지는 것 같았고, 또한 그녀의 귀에 들려오는 소리는 모두가 운학에게 한 발 한 발 가까이 다가서는 것을 뜻하는 것같이 느껴졌다. 더욱이 신룡검객(神龍劍客)이 난주(蘭州)에 나타났다는 소문을 일찍이 들어오지 않았던가. 지금 두 사람은 난주를 향하여 길을 재촉하고 있는 것이었다.
사여명은 자기들이 달리고 있는 전면에는 반드시 천전교도들이 길을 막고 있으리라는 것을 알고 있었던 까닭에 반드시 그들과 일전(一戰)을 치러야 할 것이라 각오하고 있었다.
또한 그녀는 자기 나름대로의 혼자 생각인지 모르지만 천전교도 몇 놈쯤 죽인다는 것은 정의(正義)의 승리라고 생각이 되기도 하였다. 그러나 마지막으로 그의 생각이 미친 것은 역시 운학 그 사람이었다. 그가 악착같이 천전교를 주멸하려고 하니 자신도 그를 도우는 것이 의(義)를 위한 첩경이라고 생각한 것이다.
사여명은 지난날 자기의 사부가 일러주던 말이 머리에 떠올랐다.
――그 반동강이 난 옥환(玉環) 위에 새겨진 이름이 곧 너의 장부(丈夫)가 될 사람의 이름이니라――
그 당시 이 말을 들은 그녀는 반은 놀라고 반은 괴로웠다.
그것은 자기의 일생을 위탁할 사람이 어떻게 생긴 사람인지도 모르고 반동강이가 난 옥환에 새겨진 이름의 주인공에게 의지해야 한다는 것이 어딘가 쑥스럽고 불합리한 것처럼 느껴졌기 때문이었다. 그래서 사부의 밑을 하직할 때 명목상으로 수도(修道)의 길을 떠난다고 했지만 실은 그녀 자신의 종신대사(終身大事)를 위함이었다.
그녀는 자신의 부모를 원망하였으나 어찌하랴! 자신에게 내려진 이 운명을. 결국 그녀는 자기 일생의 가장 중대한 모험을 하고 있는 것이었다. 그이 일생을 운학이라는 사나이에게 맡기는 모험을――
일찍이 화산에서 운학을 만났을 때의 호감은 생명의 은인으로서의 순수한 감정이었을 뿐 결코 장부로서의 호감은 아니었다. 그러나 그 뒤로부터 그는 잠도 제대로 이루지 못하고 운학의 환상(幻像)을 마음속 깊이 그리기 시작하였던 것이다.
그녀는 그가 만난 뭇 남자 중에서 제각기 몇 가지씩 좋은 면을 발견하였으나 모두가 운학이 지닌 단점만도 못하였다.
그녀는 사부의 밑을 떠날 때에 이미 결심한 바가 있었다. 즉, 그녀가 맞이하려는 장부가 자기의 이상에 맞지 않을 경우에는 사부를 모시고 일생을 불가(佛家)에 귀의하여 참선하며 법열의 세계에서 생을 마치리라.
그 뒤에 회천현(會川縣)에서 운학을 만났을 때 어떻게 해서 운학의 위급한 처지를 구하게 되었는지 자신도 잘 알 수가 없었다. 그때는 오직 운학이라는 한 남자라는 단순한 생각이었다고 변명을 하면서도 마음속 어느 구석에선가 이성(異性)의 싹이 터오기 시작하였던 것은 스스로도 깨닫지 못하고 있었던 것이다.
이후 뼈저린 고독의 나날! 시련과 번민으로 그 얼마나 많은 밤을 뜬 눈으로 세웠던가! 그러나 이제 운학을 만난다면 이렇듯 애타는 연정을 그 어떤 계제로 그에게 고백하랴! 그 뿐만인가! 만일 그가 이미 혼례(婚禮)를 치룬 몸이라면 어떻게 할 것인가.
사여명의 머릿속은 천 가지 만 가지 번민(煩悶)으로 어지러웠다. 그리고 번민은 번민의 꼬리를 물고 이어갔다.
회천현에서 만났던 운학의 모습―― 그 자리에서 사여명은 운학에게 스스로의 마음을 비추어 주었건만, 그 무슨 연유에서였던가, 운학은 스스로 자기를 피하는 눈치가 아니었던가. 그 때 그 사람의 야속했던 심정, 사여명은 그 순간의 부끄러움을 영원히 잊지 못하리라. 더욱이 이 편은 여자의 몸이 아니었던가.
이제 그녀는 영원히 버림받은 외로운 몸이라는 서글픔이 뼛속에까지 사무쳐 저리는 듯 쓰라렸다.
두 필의 말은 질풍같이 눈 덮인 넓은 관도 위를 달리고 있다. 보이는 것은 광막한 지평선, 나무 그림자 하나 찾아볼 수 없다.
사여명의 눈에서는 쉬지 않고 눈물이 흘러내렸다. 아, 차라리 그때 운태산의 눈사태 속에서 자신의 외로운 혼을 날려 보냈었던들 오죽이나 좋았으랴! 그 어인 운명이었기에 이 철부지 계집아이가 그곳에 이르렀던 것인가.
사여명은 말머리를 나란히 하고 달리는 요원을 바라보았다. 요원은 힐끗 이쪽을 돌아보는 것 같았으나 이내 머리를 거두며 채찍을 날린다. 사랑스러운 모습이었다. 그러나 얄밉도록 미운 계집이기도 하였다. 그러자 사여명은 슬그머니 화가 치밀었다.
이 세상에 어느 여자 치고 자기의 사랑하는 사람을 뺏기는 것을 좋아한 이가 있으리오마는 사여명은 요원의 아름다운 모습을 보자 무엇인가 보이지 않는 질투심이 일어났다.
사여명은 이 화를 풀어 버릴 곳이 없었는지 말채찍을 휘둘러대니 말은 고개를 번쩍 들며 질풍같이 내달기 시작하였다.
요원은 갑작스럽게 돌변한 사여명의 태도를 보고서는 깜짝 놀라서 큰 소리를 내어
『사씨 언니!』
하고 소리치며 사여명의 뒤를 쫓았다.
얼마를 달려가자 그네들 앞에 작은 숲이 나타났다.
두 필의 말은 서로 앞서거니 뒤서거니 눈보라를 일으키며 달려간다.
눈앞에 나타나는 숲이나 가로수가 흰 눈에 덮여 있는 모습이 마치 산호수와도 같이 보였다.
이 자연의 아름다운 경치에 도취되어 정신없이 말을 몰고 앞으로 달려가고 있을 때 멀리 앞에서 아주 음독(陰毒)한 사람의 술렁거리는 소리가 들려오기 시작하였다.
요원과 사여명의 눈앞에 사람의 그림자가 나타나자, 그네들은 비로소 사세가 긴박함을 알았다.
요원은 놀라서,
『사씨 언니!』
하고 소리를 질렀으나, 사여명은 조금도 당황하지 않으며 말 위에서 몸을 반쯤 일으키면서 앵두 같은 입술에 한 개의 화살을 물었다.
요원은 급히 말을 달려 사여명의 뒤를 바짝 따랐다.
요원은 사여명의 옥과 같은 흰 이에 검은 화살이 물려져 있는 것이 어찌나 아름다워 보였는지, 넋을 잃고 바라보았다.
가까이 앞에 있는 숲속으로부터 십여 기의 말 잔등에 바위 같은 대한들이 올라타고 두 사람을 향하여 비호(飛虎)와 같이 달려오면서
『훌륭하신 모습이오. 이 호천요(胡天拗), 이렇게 인사 드리오.』
사여명은 그놈의 입심이 경박하다는 것을 알자, 뚫어져라 하고 그를 노려보았다. 효천요라는 사나이의 나이는 사십쯤 되어 보였으며 키는 그리 큰 것 같지는 않았다. 천전교의 어느 지소(支所)의 장문(掌門)이리라.
사나이는 두 여자가 아무 대답이 없는 것을 보자, 매우 언짢은 눈치였다.
그러나 말에 탄 두 소녀의 모습이 수려함을 보고, 자기를 뒤쫓아 온 수하(手下)들이 그 미모에 현혹되어 있다는 것을 보자, 선두에 서 있던 호천요는
『본인은 입지룡(入地龍) 호천요(胡天拗)라 하며 사하(沙河) 천전교의 지소(支所) 장문이오. 두 분의 성명은 무엇이라 하오?』
요원은 그의 태도나 말버릇이 대단히 겸손하지 못하다는 것을 느끼고 비위가 상하여 몇 마디 쏘아주려고 할 때 갑자기,
『휙!』
하는 소리가 나면서 사여명의 입에 물려 있던 검은 화살이 호천요를 향하여 번개같이 날아갔다.
그의 수하들은 일제히 깜짝 놀라 눈을 둥그렇게 뜨고 사여명을 멀거니 쳐다보고 있었다.
사여명의 입을 떠난 화살은 유성과 같이 날아가서 말의 앞 다리에 꽂혀서 말은 한 차례 비명을 지르면서 앞발을 번쩍 공중으로 들었다. 그러자 말 위에 정신없이 앉아 있던 호천요의 몸은 허공에서 한 번 맴돌더니 눈 위에 머리를 틀어박고 떨어져 버렸다.
그는 눈 속에서 머리를 빼내더니 눈을 부릅뜨고 사여명을 노려보면서 몸을 일으키기가 무섭게 쌍장(雙掌)으로 사여명을 공격하여 왔다.
사여명은 손을 뻗쳐 휘저으면서
『원매야, 이놈의 입지룡(入地龍)의 절기를 연출하고 있는 거야.』
사여명의 손이 번쩍 들려지면서 장풍이 이르는 곳에서 호천요는 다시 한 번 곤두박질하였다.
호천요는 당시 강호에 그렇게 이름이 떨쳐진 고수는 아니었지만 그렇다고 해서 지금 사여명에게 당한 것처럼 망신을 당해 본 일은 처음이었다.
호천요는 지금과 같이 사세가 불리함을 깨달았다면 의당 싸움을 중단했어야 할 일이었으나 오히려 최후의 발악을 하면서 사여명에게 공격의 손속을 늦추지 않았다.
사여명은 그를 쳐다보면서 미소를 짓고서는
『입지룡의 이름을 갈아야 되겠구나!』
그이 수하들은 그들의 장문이 만신창이가 되어 망신을 당하는 것을 보자, 일찌감치 손을 써야만 할 일이었으나, 사여명의 날카로운 손속을 보자, 감히 어찌 할 도리가 없었다.
호천요(胡天拗)라고 하면 그래도 사하(沙河) 부근에서는 널리 알려진 이름이었으니 그가 여자에게 참패를 당하였다는 소문이 사하에 나돈다면 그에게는 치명상(致命傷)이 될 것이라는 것을 알고 있었으나, 그가 사여명의 적수가 될 수 없다는 것을 알고서야 아무리 기가 올라도 어찌할 도리가 없는 일이었다.
호천요는 눈에 뒹굴었다가 가까스로 몸을 꿈틀거리며 일어서니 아이들이 장난삼아 만들어 놓은 눈사람과 흡사하였다.
드디어 호천요는
『끝났다. 모든 것이 끝이 났어! 이 입지룡이 무슨 면목으로 다시 교중의 형제들을 대할 것이냐?』
이렇게 처절하게 중얼대면서 칼을 뽑아 목에 그어대려고 한다.
옆에 서 있던 수하들은 그를 뜯어 말리려고 하였으나, 이미 때가 늦은 것 같았고 넋을 잃고 있던 차라, 어찌할 바를 모르고 당황하고만 있었다.
놀란 것은 요원이었다.
요원은 비호와 같이 말 위에서 몸을 날려 경공술을 발휘하여 호천요 앞으로 다가서기가 무섭게 입지룡의 팔을 걷어차니 그의 칼은 허공을 한 번 맴돌고서는 눈 위에 푹 꽂혀 버렸다.
이 요원의 날카로운 동작 역시 사여명에게 뒤지지 않으리만큼 날래기 이를 데 없는 것이었다.
호천요는 입에 거품을 물면서 고래고래 소리를 지르며 그를 붙들고 있는 수하들을 보고 욕질을 마고 퍼부었다.
요원은 눈 위에 꽂힌 칼을 뽑아 호천요에게 던져주면서
『승패는 병가상사(兵家常事)인데 당신은 왜 아깝게 자살을 하려고 하오? 여기 있는 사씨 언니는 천전교의 두 호법도 당해내지 못하던 고수랍니다. 오늘의 당신의 패배는 부끄럽다기보다는 오히려 영광인지 모르오!』
요원의 다정스럽고 이치에 맞는 한 마디 한 마디는 천전교 문하들을 크게 감동시켰다.
사여명 역시 이지와 인정에 가득 찬 요원의 아름다운 마음씨에 깊은 감동을 받았다.
그러나 사여명은 여전히 냉혹한 소리로
『원매, 이 따위 천전 적자(賊子)들과 무슨 이야기할 필요가 있어! 한 놈씩 모조리 베어야 되는 거야.』
이 얼음과 같은 냉혹한 말에 천전교도들은 온 몸에 공포감이 일어나 대경실색하였다.
꽃과 같이 아름다운 그에게서 어떻게 냉혹한 목소리가 나올 수가 있을 것인가, 하고 눈을 둥그렇게 뜨고 벌린 입들을 다물지 못하고 있었다.
이 때 사여명은 분명히 자기가 본심(本心)이 아니라는 것을 스스로 알 수가 있었다. 그것은 그가 화산에서 운학에게 쓰라린 이별을 당한 뒤에 가끔 발작하는 마음의 추세였다.
더욱 천전교주인 사형령주에 대한 원한이 컸음은 다시 말할 필요도 없을 정도로 처절한 것이었다.
왜냐하면 사여명으로 하여금 운학을 만나도록 해 놓고서는 그녀의 아름다운 꿈을 깨뜨려 놓지 않았는가?
그러나 세상 사람들이 어찌 이 사여명의 숨은 마음의 비밀을 알 까닭이 있으랴! 요원은 의외라는 듯 사여명을 바라본다. 그리고는 눈 위에서 벌벌 떨고 있는 천전교도들과 눈 위에서 죽을 것 같은 고통을 억지로 참고 있는 호천요를 바라보자, 동정이 갔던 모양이었는지
『사씨 언니! 한 번 용서해 줍시다.』
이것은 두 사람이 언니와 동생으로 부르게 된 뒤에 처음으로 맞서는 이견(異見)이었다.
사여명은 놀란 듯이 요원을 바라보았다. 그녀는 요원이 그들에게 그렇게 친절을 베풀어야 하는 까닭을 알 수가 없는 것이었다.
지금 사여명은 마음속으로 자기의 행동이 지나쳤다는 것을 깨달으면서도 여전히 노기가 가시지 않은 목소리로
『흥! 망할 것들! 갈려면 가라지!』
말이 끝나자 말에 채찍을 가하여
『휘익――』
하는 소리와 함께 천전교도들의 옆을 스쳐서 몸을 앞으로 달렸다. 그 서슬에 천전교도들은 일제히 길을 피하였다.
사여명은 빨리 이 자리를 피하고 싶어서 말을 앞으로 몰아대니 두 사람의 천전교도가 돌연 몸을 날려 그녀의 옆으로 다가왔다. 말 위에서 눈치를 챈 사여명은 온 몸에 쌓였던 공력을 채찍에 모아 다가오는 두 사람의 천전교도를 내려치니 그들은 비명을 지르면서 몸을 땅에 굴린다.
사여명의 채찍이 지나자 두 사람의 옷은 갈기갈기 찢어지고 퍼렇게 멍이 들어 검붉은 피부 위에 한 줄기의 상처가그려졌다.
두 사람의 속살까지 채찍이 파고 들어간 것을 보니 사여명의 노심(怒心)이 이만저만이 아닌 것 같았다.
요원은 말 위에서 고개를 돌려 천전교의 졸개들을 돌아보면서
『뒤에, 만날 날이 있을 거야――』
요원은 될 수 있으면 사여명을 재촉하여 그 자리를 피하는 것이 살상을 피하고, 감정을 가라앉히는 방법이라 생각하였다. 그러나 그들 천전교도들이 무림에서 행패를 부리고 온천하의 지탄을 받고 있다는 사실은 전연 모르고 있었던 것이다.
사여명이 말에 채찍을 후리치며 그곳을 떠나 앞으로 달려가니 요원도 재빨리 그의 뒤를 따랐다.
사여명은 말 위에서 자신의 괴벽하게 변하여 버린 성격이며 난폭하여진 행동에 대하여 깊이 반성을 하면서도 어째서 그렇게 되었는지 그 까닭을 알 수가 없었다.
사여명은 운학을 알기 전까지만 하여도 요원(姚畹)이 이상으로 사랑스럽고 온순한 성격의 계집애가 아니었던가?
그러나 그들 천전교도들이 무림을 소란케 하고 강호를 떠다니면서 온갖 행패를 부리고 있다는 사실을 알고 있는 사여명은 그들을 응징하는 일은 의당 옳은 일이라고 생각하니 스스로가 취한 생동에 조그마한 거리낌도 없었다. 그러자 그녀는 요원을 책망하고 싶은 생각이 일어났다.
요원의 착하고 너그러운 마음씨는 지금처럼 험난한 세상에서는 합당한 천성이 아닌 것이리라.
그러나 사여명의 요원에 대한 이런 생각은 어디까지나 자기중심의 생각에 지나지 않는다. 왜냐하면 요원의 성격 역시 사여명 이상으로 날카롭고 거친 곳이 있다는 것을 그가 알지 못하고 있었고 단지 요원을 아주 나이 어린 철부지로 생각하고 있었던 것이다.
사여명 역시 사부의 곁을 떠나 운학을 찾게 되자 그의 마음에 쌓여가는 번민으로 인하여 어떤 때는 여성으로의 미덕을 망각하는 경우가 한두 번이 아니었다.
사여명은 요원의 천진스럽고 명랑한 모습에 질투심까지 일기 시작하였으나 반사적으로 운학을 원망하는 마음의 괴로움은 느끼지 않는 것을 보니 자기의 마음이 얼마나 많이 그에게 이성(異性)으로서의 애정을 느끼고 있는가를 짐작할 수가 있을 것 같았다.
사여명의 생각이 이에 이르자 그녀는 분수없고 철없는 나이 어린 요원을 자기가 보살펴 주어야 한다는 책임감이 우러났다.
앞을 달려가던 요원은 고개를 돌리면서
『사씨 언니!』
하고 불렀으나 사여명은 위엄을 보이면서 못 본 체하고 대답을 하지 않았다.
그러나 자기의 이런 행동이 어딘가 지나친 것 같아서 그는 말을 날려 요원에게로 바싹 다가섰다.
두 필의 말이 만나자 약속이나 한 것처럼 두 사람은 말에서 내려 말고삐를 잡고 천천히 걷기 시작한다.
요원은 사여명을 쳐다보면서,
『나, 언니 말 잘 들을게요. 언제나 나에게 지금 같이 인자하게 대해줘요.』
순간 사여명은 마음속에 미안한 생각이 들어
『원매, 걱정 말아!』
사여명의 눈에는 한 방울의 눈물이 어리는 것 같았다.
『언니, 더 말하지 말아요. 우리 빨리 갑시다.』
요원은 말이 끝나기도 전에 몸을 말에 실었다.
두 사람은 질풍같이 말을 서쪽으로 몰아 달렸다.
그러나 두 소녀가 똑같이 이 서행(西行) 길의 목적이 같으면서도, 서로가 그것을 궁금히 여기고 있으니, 이것이야말로 여자의 항심이라고 할까, 운학을 만나 보자는 두 사람의 꼭 같은 욕심을 서로가 밝히지 않았기 때문이었다.
어느덧 두 사람은 서안성(西安城) 남쪽의 자은사(慈恩寺)에 이르렀다.
성동(城東)의 장관으로는 칠십이 개의 구멍이 뚫린 파교(灞橋)가 있었고 대웅전 앞뜰에는 당나라 사람들의 유적이 이곳저곳에 널려 있었다.
그들은 다시 함양성북(咸陽城北)의 비림(碑林)과 주대 제왕(周代帝王)들의 유릉(遺陵)을 유람하기도 하였다.
또 시인 묵객의 시제에 가장 많이 올랐던 대산관(大散關)과 고금 명가들이 가보고 싶어 하는 동관(潼關)을 답사하기도 하였다.
그러나 이 웅휘한 장관들도 두 여인의 마음을 완전히 사로잡지는 못하였고 그들을 잠시 멈추게 한 것에 불과했다.
그녀들은 길에서 날로 심해가는 천전교의 행패가 세상을 떠들썩하게 하고 있다는 소문을 들었다.
소문에 의하면 천전교의 교주인 사형령주가 온갖 폭행을 자행할 뿐이 아니라 심지어 어린 아이들까지도 꺼리지 않고 살육을 서슴지 않는 만행을 하고 돌아다닌다는 것이다.
요원과 사여명은 이런 소문을 듣고 마음에는 정의의 불길이 일어났으나 그들 머리에 새겨진 운학의 영준한 모습을 앞질러 가지는 못하였다.
두 사람은 그 소문에 운학이 나타나 주기를 기다렸으나 별다른 소문을 들을 수가 없었다.
요원과 사여명은 다시 서북쪽으로 말을 몰아 발길을 재촉하였다.
두 여인의 마음속에는 끝없이 깊은 우정이 맺어져 갔으나 서로가 같은 인물의 이성을 그리워하고 있다는 비밀은 끝내 모르는 채 있는 것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