행복
요즘 귀에 쏙 들어온 찬양이 하나 있다.
가사 하나하나가 참 좋다.
화려하지 않아도 정결하게 사는 삶
가진 것이 적어도 감사하며 사는 삶
내게 주신 작은 힘 나눠주며 사는 삶
이것이 나의 삶의 행복이라오
눈물 날 일 많지만 기도할 수 있는 것 억울한 일 많으나 주를 위해 참는 것
비록 짧은 작은 삶 주 뜻대로 사는 것 이것이 나의 삶의 행복이라오
이것이 행복 행복이라오
세상은 알 수 없는 하나님 선물
이것이 행복 행복이라오
하나님의 자녀로 살아가는 것
이것이 행복이라오
행복하고 싶지 않은 사람이 어디 있을까. 드라마를 봐도 뉴스를 봐도 시장통에서 아둥바둥 사는 사람들을 봐도 다 행복하고 싶어한다. 말 못하는 갓난 아이도 엄마 품에서 행복을 원한다. 우리는 이 행복을 어디에서 찾아볼 수 있을까. 행복한 삶을 살려고 각자 최선의 노력을 하며 산다. 돈을 많이 벌면 행복하다고 생각하는 사람은 그 길로, 명예가 갖추지면 행복하리라고 생각하는 사람들은 그 길로, 성적이 잘 나오면 행복하리라 생각하는 학생들은 공부에, 그렇게 각자 행복의 조건을 갖추기 위해 평생 노력하는 인생들이다. 그런데 나는 최근 이 행복과는 거리가 먼 상황에 처한 사람들을 가까이에서 먼데서 볼 기회가 있었다. 내가 장애를 입어도 참 고통스럽지만 그 환자를 평생 돌봐야 하는 보호자인 두 분의 삶을 보면서 저분들 앞에서 감히 행복을 논할 수 있을까 생각해보았다.
언제 나을지도 모른다. 언제 끝이 날지도 모른다. 언제까지 그와 같은 창살 없는 감옥의 삶을 살아야하지도 모른다. 환자의 곁을 지켜야하기에 오래 자리를 비울 수도 없다. 장기환자라서 다인실을사용하기에 내집처럼 편히 길게 잠을 잘 수도 없다. 새벽에도 옆 환자의 상황이나 혈압체크 등등 쪽잠을 잘수 밖에 없는 상황이고 아예 병원 보호자 간이침대가 집이 된지 오래이다. 게다가 환자의 상태를 늘 살펴야하고 기분까지 맞춰줘야 한다. 심통이 나서 치료를 안 받겠다고 하거나 그만 죽겠다고 하면 보호자는 더 미칠 지경이 된다. 다른 가족 친척들과의 멀어짐도 서글픈 현실이 된다. 경제적 궁핍상태도 말로 다 할 수 없다. 교회에 나가서 편히 예배 한번 드릴수 없고 간혹 외출이라도 할라치면 다른 보호자나 간병사를 불러야만 한다. 그나마 경제적인 상황에 가능할 때 이야기다. 아픈 사람이야 말할 것도 없고 그 아픈 사람을 돌보느라 몸도 마음도 지쳐가는 보호자들에게 멀쩡히 걸어다니는 건강한 사람들이 논하는 행복이 와닿기는 할까..
나와의 인연은 환자보다 보호자들이셨기에 나는 그분들의 안위가 더 궁금하고 걱정이 된다. 한 분이 고백하기를 그런 생활이 육칠년차가 되니 우울증이 와서 제발로 정신과를 찾아가셨다고 한다. 또 한 분은 왜소한 몸으로 거구의 환자를 일으키고 화장실 볼일을 보게 하고 씻기고 재활 다니느라 날마다 더 꼬챙이처럼 말라간다. 그분은 그 와중에 본인도 유방암에 걸려 항암치료까지 받으셨다. 환자를 눕혀놓고 그 옆에 같이 누워 치료를 받을 때도 있었다. 다 신실한 그리스도인들이다. 구원의 확신은 물론 병실의 광야에서 만난 하나님에 대한 특별한 간증 추억들이 많은 분들이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그 어려운 시기들을 지나는 동안 행복이라는 단어를 그분들이 소유할 수 있을까. 왜 하나님은 그토록 오랜 시간을 언제 끝이라고 알려주시지도 않은 채 그분들에게 허락하시는 것일까. 김양재 목사님은 "가정의 목적은 행복이 아니라 거룩함이다"고 하셨다. 그렇게 본다면 말이 될듯도 하다. 그러나 나라면 또 이런 질문을 던지게 될것 같다. 나의 거룩함을 위해서 꼭 이 방법을 쓰셔야했느냐고.
별 탈 없이 잘 사는 사람들도 많은데 왜 나에게.. 그러나 이 원망 섞인 질문만 던진다고 해서 달라지는 것은 아무 것도 없다. 그 진정한 해답은 우리가 하늘나라에 갔을 때 그분을 뵈면 그때서야 풀리지않을까 싶다.
이 땅에서는 어떡하든지 살아내야하기에 두가지 선택을 할 수 있다고 본다. 원망하든지 감사하든지. 거부하든지 버텨내든지. 만약 거부하고 원망한다면 환자는 더 일찍 죽게 될 것이고 자신도 분명 그 죄책감을 평생 떨칠 수는 없을 것 같다. 그럼 남은 한가지 방법 밖에 없는데 끌어안고 버티면서 이 악물고 원망 안하는 차원이 아니라 이 상황 그대로 감사를 찾아내는 삶이다. 말이 쉽지 이것이 어떻게 삶으로 나타나겠는가. 그래서 나는 이 두 분들을 존경한다. 복음 전하고 순교 당한 분들의 상급 못지 않게 이분들의 상급 또한 크지 않을까 싶다. 하나님이 원하시는 것은 대단한 무슨 업적이 아니라 네가 지금 처한 현실에서 내 마음을 가지고 사는냐가 아닐까 싶다. 힘들고 어렵고 외롭고 지칠 때라도 보이지 않는 그분의 손길을 놓치지 않고 꼭 잡고 가는 것.
때로는 감사보다 원망이 나올 때도 있겠고 주임재보다 세상천지에 나혼자인 것 같은 고독과 허무가 몰려올 때도 있겠지만 항상 결론은 그래도 하나님이 계시니까. 내사정 알고 계시니까. 지금은 풀리지 않는 수학문제처럼 어렵기만 하지만 끝내는 답이 딱 나오는 것처럼 하늘나라에 가기만 하면 그 답을 얻을 수 있으리란 소망으로 견디고 버티는 것.
세상은 행복을 더 많이 가지고 누리면 된다고 하지만 그만큼 가져보고 누려본 자들이 일치감치 말해주었다. 다 헛되다고.. 또 세상에선 다 잃어버린 자들 같은 분이 고백하는 말은 나는 하나님이 있어서 행복하고, 기도할 수 있어서 행복하고, 죽으면 답이 나오는 영원한 세상이 기다려서 행복하고, 엎어지고 넘어지더라도 바라볼 주님이 계셔서 행복하다고 한다.
현실은 울어 마땅한데 울면서도 그들은 눈가에 흐르는 눈물을 훔치면서 말한다. 행복하다고.
지난 주 수능일에 있었던 여성금식기도회에 강사로 온 김효진 소장은 얼굴에 화상을 입어 끔찍한 세월을 보냈지만 누군가 다시 태어난다면 예수를 모르는 건강한 삶과 화상 입은 지금의 삶 중에 어느 것을 택할 것이냐는 물음에 주님을 만난 지금의 삶을 택할 것이라고 눈물로 고백하였다. 자살 시도까지 했던 끔찍한 삶에서 지금은 행복하다고 말하는 인생반전역전의 사람들. 그리고 내 주위에 이름 없는 들꽃처럼, 눈에 잘 띄이지는 않으나 강인한 생명력을 뿜어내고 있는 사람들. 아프지도 않고 보호자 노릇도 할 일이 없는 나는 감히 근접하지 못하는 영적내공의 소유자들이다. 과부와 고아를 돌아보고 세속에 물들지 않게 네 자신을 지켜 정결하게 하는 것이 참된 경건이라는 야고보서 말씀에 비추어본다면 그분들은 과부와 고아에 속하는 약자. 즉 누군가 돌보지 않으면 삶을 영위할 수 없는 아픈 가족을 위해 건강한 자신의 삶을 송두리째 바치고 있다. 바깥에 마음대로 못 나오고 어쩌다 몇시간 겨우 외출이라도 할라치면 온갖 응급상황에 대비해서 신경안테나를 바짝 세워야하는 피곤한 삶이지만 그분들은 우리 시대 무정하고 이기적인 세상에서 주님의 마음을 보여주는 대표자로서 그 사명을 다하고 있다고 말해주고 싶다.
행복이란 무엇일까
금방석에 앉았어도 불행한 사람이 있고 잿더미에 앉았어도 행복한 사람이 있다. "행복은 실로 소유에 비례하지 않고 감사에 비례한다"는 어느 말처럼 내가 처한 상황에서 감사를 발견하고 하나님 마음으로 사는 것이 아닐까. 연약한 인간인지라 때로 힘든 탄식이 나오고 가끔 왜 라는 질문도 해보겠지만 우리는 이미 답을 알고 있다. 아니 그 답을 가지신 분을 알고 있기에 그분을 신뢰한다면 이 땅에서는 좀 모르더라도 믿고 갈수 있는 것이다.
포기하지만 않으면 된다. 누군가 포기는 김장배추 헤아릴 때나 쓰는 말이라고 했다. 지금도 힘든 삶을 꾸역꾸역 살고 있는 이들에게 해주고 싶은 말. 포기하지 말고 주님 바라보고 계속 그 길을 가세요. 믿음의 선진들이 지켜보고 응원하고 있어요. 그리고 우리도 당신을 응원하고 있어요. 그럼에도 불구하고 살아있다는 것. 하나님을 안다는 것. 그분께 소리쳐 SOS를 보낼수 있다는 것. 응답이 없어 지쳐갈때에라도 침묵 속에 거하시는 하나님이 그 침묵의 이유까지 깨닫게 해주실 그 날이 기다리고 있다는 것.
그것을 잊지마세요! 행복은 바로 이것이 행복이랍니다! 이렇게 말해주고 싶다. 그리고 이 말은 남의 고통보다 내 손톱 밑의 가시가 더 아픈 나에게도 해주고 싶은 말이다.
행복이 별거냐. 이런 글을 쓰고 나눌수 것만도 행복이지. 교회에 혼자 남아 이 찬양을 부르면서 나혼자 취해서 녹음까지 해와서 애들 귀에 들려주면서 행복을 강요하는 내가 실로 행복한 사람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