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23년 9월 17일 성령강림절 후 열여섯째 주일예배를 드리겠습니다.
찬송 38장입니다.
사도신경으로 신앙고백을 하겠습니다.
찬송 37장입니다.
광고, 헌금, 기도입니다.
성경 계2:1-7절 (신400)입니다.
성가대 찬양입니다.
제목: 우리 교회에게 주신 말씀
소아시아의 일곱 교회(2-3장)는 에베소, 서머나, 버가모, 두아디라. 사데, 빌라델비아, 라오디게아 교회입니다. 소아시아에 다른 교회들도 있었음에도 아래의 에베소에서 시계 방향으로 일곱 교회만을 선정하여 편지를 보낸 이유는 무엇일까요? 이것은 주 예수(성전)를 상징하는 일곱 가지(촛대)를 가진 ‘메노라(등대)’를 통하여 이 편지들이 주 예수의 모든 교회에게 주신 편지임을 암시하기 위해서입니다.
어떤 이들은 일곱 교회를 교회 역사의 일곱 시대로 나누는 것, 즉 에베소 교회는 는 초대 교회, 서머나 교회는 순교 시대, 버가모 교회는 국교 시대, 두아디라 교회는 암흑시대, 사데 교회는 종교개혁, 빌라델비아 교회는 선교시대, 라오디게아 교회는 종말 이 시대라고 생각합니다. 이런 주장은 성립될 수 없습니다. 일곱 교회는 소아시아에 실제 존재한 교회들인데(1:4), 교회 역사의 일곱 시대를 가리킨다면, 에베소 교회를 제외하고, 다른 교회들은 소아시아에 있지 않게 되기 때문입니다.
일곱 교회의 편지들(2-3장)은 1. ‘~에 있는 교회의 천사(사자)에게 편지하라’라는 주 예수의 명령, 2. ‘이가 이르시되’로 소개되는 그의 자기소개, 3. 교회의 선한 행위들에 대한 그의 칭찬(라오디게아 교회 제외), 4. 어떤 죄에 대한 그의 책망(서머나 교회 제외), 5. 회개하라는 그의 명령과 심판 경고, 6. 주신 말씀의 진리를 분별하라(귀 있는 자는~)는 그의 권면, 7. 이기는 자들에게 주시는 그의 영생 약속인 공통적인 일곱 단락으로 구성되어 있습니다.
성도 여러분, 오늘 본문인 에베소 교회에 보낸 주 예수의 편지를 통하여 성령이 오늘 우리에게 주시는 말씀에 ‘들을 귀 있는 자’가 되기를 원합니다.
1. “에베소 교회의 사자에게 편지하라”라는 주 예수의 명령입니다(1a).
여기서 ‘사자(천사)’는 교회와 일치(대표)하는 천상의 존재입니다. “나(천사)는 너와 및 예수의 증거를 받는 네 형제들과 같이 된 종이다”(19:10, 22:9)라는 말씀과 천사가 성도의 기도를 하나님 앞에 드리는 것(8:3-4)에서 천사가 교회를 대표(일치)합니다. 특히 7절은 성령이 ‘교회의 사자’에게 주신 주 예수의 말씀을 ‘교회들’에게 하시는 말씀으로 표현하여 ‘교회의 사자’가 ‘교회들’과 일치함을 이는 교회가 주 예수와 연합하여 지상과 동시에 하늘에 참여하고 있다는 사실을 나타내는 것과 같이 ‘교회의 사자(천사)’를 통하여서도 이 사실을 강조하기 위해서입니다.
2. 에베소 교회에 대한 주 예수의 자기소개입니다(1b).
“오른손에 있는 일곱 별을 붙잡고, 일곱 금 촛대 사이를 거니시는 이가 이르시되.” 주 예수는 구약의 예언자들이 하나님의 예언 말씀을 소개하기 위해 사용한 고정된 문구(전능하신 주가 이르시되)를 사용하여 자신을 소개합니다. 그러므로 일곱 교회의 편지는 단순한 편지가 아니라 ‘예언의 말씀들’(1:3)로 이해되어야 합니다.
에베소 교회에게 주 예수의 자기소개는 두 가지입니다. 첫째는 ‘그의 오른손에 일곱 별을 붙잡고’입니다(1:16). 이것은 주 예수가 모든 교회를 그의 오른손(권능) 안에 꽉 붙잡고(현재분사) 계속 주관하신다는 것입니다. 둘째는 ‘일곱 금 촛대를 사이에 다니시는 이’입니다(1:13). 이것은 ‘일곱 금 촛대’가 상징하는 어둠의 세상에 대한 빛의 증거(선교) 하는 교회와 주 예수가 함께 하시고 있다는 것입니다(마28:20).
교회에 대한 주 예수의 이런 자기 계시는 그의 죽음과 부활(1:18)을 통하여 자신과 교회와의 일치와 주재권, 그리고 자신의 충성된 증거(1:5)와 교회의 증거와의 일치와 주재권을 강조합니다. 그러므로 성도 여러분, 우리 교회의 존재와 증거사역도 그의 복음과 성령을 통하여 영생의 주 예수와 일치하는 그의 소유이며, 그의 오른손(권능)에 꽉 붙잡혀 움직이고 있다는 것을 분명하게 아시기 바랍니다.
3. 교회에 대한 주 예수의 알아주심, 즉 칭찬입니다(2-3, 6).
“내가 네 행위와 수고와 네 인내를 알고 또 악한 자들을 용납하지 아니한 것과 자칭 사도라 하되 아닌 자들을 시험하여 그의 거짓된 것을 네가 드러낸 것과 또 네가 참고 내 이름을 위하여 견디고 게으르지 아니한 것을 아노라.” 여기서 ‘내가 알아왔다(오이다)’가 ‘알고’와 ‘아노라’(3절 마지막)로 되었지만, 원문은 맨 앞에 있습니다.
‘내가 너를 알고 있다(완료시제)’는 주 예수가 ‘오른손에 일곱 별을 붙잡고 일곱 금 촛대 사이를 거니시는 이’시기 때문입니다. 머리가 몸의 지체를 잘 아는 것과 같이 그는 교회의 머리로서 그의 모든 교회를 완전하게 알고 계십니다.
주 예수는 에베소 교회의 ‘행위, 즉 수고와 인내’를 칭찬하십니다. 이 세 항목은 살전1:3절과 비교됩니다. “너희의 믿음의 역사(행위)와 사랑의 수고와 우리 주 예수 그리스도에 대한 소망의 인내를 ... 기억함이니.” 살전1:3절에는 행위와 수고와 인내의 수단(내용)들이 있고 여기 2절에는 없는데, 그 수단과 내용은 무엇일까요?
교회의 ‘행위와 수고와 인내’를 3절에서 반복됩니다. “또 네가 참고 내 이름을 위하여 견디고 게으르지 아니한 것을 아노라.” 여기서 ‘인내’는 ‘참고’ ‘행위’는 짐을 짊어진다(길6:2)는 의미인 ‘견디고’, ‘수고’는 ‘게으르지 아니한 것’으로 반복됩니다.
이것들은 ‘내 이름을 위하여’입니다. ‘내 이름’은 주 예수의 인격과 사역인 믿음의 내용을 의미합니다(2:13). 즉 믿음의 행위와 수고와 인내로 이루어졌다는 것입니다.
특히 ‘수고’는 2b절에서 구체적으로 설명되는데, 사랑이 없는 믿음의 수고였습니다. “또 악한 자들을 용납하지 아니한 것과 자칭 사도라 하되 아닌 자들을 시험하여 그의 거짓된 것을 네가 드러낸 것”입니다.
첫째는 악한 자들을 수동적으로 참지 않았고, 둘째는 자칭 사도들의 가르침을 시험(부정과거)하였고, 그들의 가르침이 거짓된 것을 계속 드러낸(현재) 것입니다.
‘사도’는 ‘예수 그리스도의 사도’로서 그의 복음을 전하라고 그의 보냄을 받은 자들(종)입니다. 롬1:1절입니다. “예수 그리스도의 종 바울은 사도로 부르심을 받아 하나님의 복음을 위하여 택정함을 입었으니.” 여기서 ‘사도’를 판단하는 기준은 ‘주 예수의 부르심’과 ‘하나님의 복음’입니다. 진정한 사도(사역자)는 하나님의 복음을 말과 삶을 통하여 증거하라고 그의 부르심을 받아 보냄을 받았기 때문입니다.
그러나 ‘자칭 사도’는 주 예수의 부르심과 파송을 받았다고 주장하지만, 다른 복음, 즉 거짓 교훈을 전하였고, 그 가르침을 통해 자기의 이익을 추구하였습니다.
고후12:17-18절입니다. “내가 너희에게 보낸 자 중에 누구로 너희의 이득을 취하더냐 내기 디도를 권하고 한께 한 형제를 보내었으니 디도가 너희의 이득을 취하더냐 우리가 동일한 성령으로 행하지 아니하더냐 동일한 보조로 하지아니하더냐” 이것은 바울과 그의 동역자들은 복음을 전하였고, 복음의 바른 이해에 따라 주 예수와 성도를 위해서 사역하였다는 것을 반복하여 강조합니다. 성도 여러분, 오늘 사역자들도 주의 부르심을 받았다는 주관적인 확신으로 신학교에 가고 훈련받아 사역자들이 됩니다. 사역자로서 주관적인 부르심을 강조하는데 바른 복음으로 사역하는가에 대해서는 무시되고 있습니다. 우리도 에베소 교회와 같이 그들의 가르침과 삶을 주 예수의 복음으로 반드시 시험하고 판단하여야 할 것입니다.
주 예수는 교회의 ‘이러한 수고’에 대한 그의 칭찬에 ‘니골라 당의 행위를 미워하는 것’을 더하십니다. 이것은 교회에 대하여 처음 사랑을 버렸다는 책망(4)과 회개의 명령과 심판의 경고(5) 후에 나온 6절입니다. “오직(그러나) 네게 이것이 있으니, 네가 니골라 당의 행위를 미워하는도다. 나도 이것을 미워하노라.”
‘니골라 당’(15)이 누구일까요? 이것은 ‘니골라오스’라는 사람 이름에서 유래했을 것입니다. 요한계시록에서 이름들이 상징적인데, ‘니골라오스’도 이김이라는 ’니코스‘와 백성이라는 ’라오스’의 합성어로서 ‘발람’의 동의어인 ‘백성을 지배하여 파괴한 자들’인 의미를 가졌습니다. ‘도날드 그레이 반하우스’ 박사는 ‘니골라 당’을 평신도 위에 군림하는 성직자 무리라고 이해합니다. ‘니골라 당’은 교회의 일을 한다고 하지만 자신들과 평신도로 분리함으로 실제로는 교회를 파괴하는 자들입니다. 이는 주 예수 안에서 하나가 되게 하는 복음의 진리(엡1:10)를 부인하기 때문입니다. 마23:8절입니다. “그러나 너희는 랍비라 칭함을 받지 말라 너희 선생은 하나요 너희는 다 형제니라.” 성도 여러분, ‘니골라 당의 행위’는 만인 제사장(1:6)의 교리를 믿는 개신교 교회보다 평신도와 성직자를 구분하는 천주교회에 더욱 해당하는 것 같습니다. 그러나 개신교회 안에서도 목사의 절대적 권위로 성도를 지배하거나 소유하여 상속하는 교회들은 주 예수가 미워하는 ‘니골라 당’의 잘못된 행위의 위험 가운데 있으니, 주의하시기 바랍니다.
4. 교회에 대한 주 예수의 책망입니다(4).
에베소 교회는 주 예수가 칭찬할 것이 많았으나, 부족한 딱 한 가지가 있었습니다. 이것은 악한 자들과 자칭 사도들을 시험하고 그들이 거짓 교사인 것을 드러내는 복음의 진리를 지키는 수고(2)의 과정에서 처음 사랑이 부족하게 된 것 같습니다. 그래서 주 예수는 그것을 부드럽게 지적하십니다(4). “그러나 너를 책망할 것이 있나니 너의 처음 사랑을 버렸느니라.”
’처음 사랑‘이 무엇일까요? ‘처음 사랑’은 그들이 복음을 처음 믿었을 때 가졌던 사랑, 즉 복음이 처음으로 가르치는 사랑입니다. 그런데 ‘처음 사랑’이 하나님에 대한 사랑인가, 복음에 의하여 주 안에서 하나가 된 성도와 더 나아가 세상 사람에 대한 이웃 사랑인가, 아니면 두 가지 사랑을 다 의미하는 것일까요?
여기서 ‘처음 사랑’이 하나님의 사랑도 의미할 수 있지만, ‘이웃 사랑’을 가리킨다고 생각합니다. 이는 주 예수가 에베소 교회의 행위를 구체적으로 칭찬하셨고(2), 특히 3절에서 자신의 이름을 위하여 참고 견디며 피곤하거나 낙심하지 아니하였다고 칭찬하셨기 때문입니다. 이것은 주 예수에 대한 그들의 믿음과 사랑에서 나온 행위들일 것입니다.
2세기 초 안디옥의 ‘이그나티우스 주교’는 에베소 교회에 대하여 이렇게 썼습니다. “너희는 다 진리를 따라 사니 너희 가운데 이단이 들어설 틈이 없다. 너희는 진리 안에서 예수 그리스도에 관한 말이 아니면 아예 듣지 않는구나.” 이것은 교회가 주 예수를 진정으로 믿었고 사랑하였다는 것을 보여줍니다.
또한, 에베소 교회가 니골라 당의 행위들을 미워한다는 주 예수의 말씀도 ‘처음 사랑이 이웃 사랑’임을 암시합니다. 6절입니다. “오직(그러나) 네게 이것이 있으니, 네가 니골라 당의 행위를 미워하는도다. 나도 이것을 미워하노라.”
교회가 미워한 것이 니골라 당(사람들)이 아니라 그들의 행위(죄)들이라는 사실이지만, 교회가 니골라 당의 행위(죄)를 미워하면서 그들에 대한 사랑을 잃어버렸을 것입니다. 성도 여러분, 우리도 이단의 잘못된 가르침과 악한 행위의 비판과 함께 자연스럽게 그들을 미워합니다. 그러나 하나님은 ‘그들의 행위’를 미워하시지만, 이단인 그들을 여전히 사랑하십니다. 요3:16절입니다. “하나님이 세상을 이처럼 사랑하사 독생자를 주셨으니 이는 그를 믿는 자마다 멸망하지 않고 영생을 얻게 하려 하심이라.” 여기서 하나님은 누구를 사랑하십니까? 죄악의 세상 사람입니다.
이것이 그의 독생자의 성육신과 십자가의 동기입니다. 이 사랑이 주 예수의 교회 의 선교 동기입니다. 성도 여러분, ‘니골라 당’과 같은 자들의 행위(죄)를 미워하면서 동시에 그들을 미워하면, 주 예수는 에베소 교회와 같이 우리도 복음이 가르치는 처음 사랑을 잃어버렸다고 책망하실 것입니다.
5. 교회에 대한 주 예수의 권면과 심판의 경고입니다(5).
먼저 3개 명령인 권면입니다(5a). “그러므로 어디서 떨어졌는지를 생각하고 회개하여 처음 행위를 가지라.” 첫째는 어디서 떨어졌는지를 생각하라는 명령입니다. 여기서 ‘생각하라’는 현재 명령법으로 지속적이며 반복적으로 기억하라는 것입니다.
‘어디서 (처음 사랑이) 떨어졌는지를 생각하라’에서 ‘어디서’ 떨어졌을까요? 복음에 대한 바른 이해에서 떨어진 것입니다. 그 교회는 복음의 내용인 주 예수에 대한 믿음과 사랑을 나타냈지만, 그 복음은 주 예수 안에서 다른 성도와 하나(사랑)가 되게 한다는 사실과 주 예수 밖에 있는 세상 사람에 대한 그의 사랑(생명)을 증거하게 한다는 사실, 즉 복음의 바른 이해에서 떨어진 것입니다.
둘째는 회개하라는 명령입니다. 이것이 부정과거 명령법인 것은 위급한 상황에서 결정적이고 급한 행위를 강조합니다. 이것은 단순히 말로만 잘못을 고백하는 것이 아니라 이전에 잘못된 방향으로 행하였던 것에서 돌아서는 행위를 의미합니다.
그래서 셋째는 처음 행위를 가지라는 명령입니다. 이것도 회개하라는 명령과 같이 부정과거 명령법으로 당장 급하게 행하는 것이며, 회개의 다른 측면을 가리킵니다.
이제 그의 경고입니다(5b). “만일 그리하지 아니하고 회개하지 아니하면, 내가 네게 가서 네 촛대를 그 자리에서 옮기리라.”
주 예수는 그의 명령에 순종할 것을 ’만일 그러하지 아니하면‘과 ’회개하지 아니하면‘ 반복하여 그의 명령에 순종할 것을 강조하십니다.
불순종하는 결과는 “내가 네게 가서 네 촛대를 그 자리에서 옮기리라”입니다. 여기서 ’내가 네게 가서‘는 미래 시제가 아니라 현재 시제로서 최후의 심판이 이루어지기 전에 주 예수가 촛대를 옮길 징계 심판을 위해 오시고 있는 것을 말합니다.
’네 촛대를 그 자리에서 옮기리라‘는 교회가 증거의 사명을 감당하는 역할을 하지 못하게 될 것이라는 경고입니다. 성도 여러분, 어떤 교회가 촛대가 이미 옮겨졌다는 사실을 알지 못한 채 계속 존재한다는 것은 아주 비극적인 일입니다. 이러한 주 예수의 경고를 가지고 우리 교회를 주의하여 살펴보아야 할 것입니다. 그리고 성도 여러분, 복음이 가르치는 처음 사랑, 즉 하나님 사랑뿐만 아니라 이웃 사랑을 잃어버린 것도 교회의 촛대가 옮길 수 있다는 것을 아시기 바랍니다.
6. 성령의 말씀을 분별하라는 주 예수의 권면입니다(7a).
“귀 있는 자는 성령이 교회들에게 하시는 말씀을 들을지어다.”
주 예수의 말씀은 성령이 하시는 말씀은 주 예수의 말씀이며, 에베소 교회만이 아니라 일곱 교회(모든 교회)에게 주신 말씀입니다.
’귀 있는 자는 들을지어다‘는 공관복음서의 용어와 거의 같으며(마13:9), 사6:9-10절을 암시합니다. 이것은 선택받아 들을 귀 있는 자들은 주의 예언 말씀을 듣고 이해하지만, 불신자들은 거절한다는 것을 상징하는 2중의 역할을 합니다. 성도 여러분, 들을 귀 있는 자로서 교회에게 주시는 성령의 말씀을 잘 분별하시기 바랍니다.
7. 이기는 자들에 대한 주 예수의 영생 약속입니다(7b).
“이기는 그에게는 내가 하나님의 낙원에 있는 생명나무의 열매를 주어 먹게 하리라.” ’이기는 자들‘은 특별한 성도가 아니라 주 예수 안에 있는 모든 성도를 가리킵니다. 이는 복음을 믿음으로 이기는 자가 되기 때문입니다(12:11). 요일5:4절입니다. “무릇 하나님께로부터 난 자마다 세상을 이기느니라. 세상을 이기는 승리는 이것이니 우리의 믿음이니라.”
’이기는 자들‘에게 주시는 주 예수의 약속은 ’하나님의 낙원에 있는 생명나무의 열매(영생)‘입니다. 이것은 성령을 통하여 이기는 우리에게 이미 이루어지고 있으며, 그의 재림으로 완전히 성취하게 될 것입니다(22:1-5). 성도 여러분, 우리는 복음에 의하여 이기는 자이며, 이기는 자가 될 것입니다.
성도 여러분, 에베소 교회에게 보낸 주 예수의 예언 말씀을 오늘 성령이 우리에게 주시는 말씀으로 들었습니다. 이 말씀을 통해서 영원히 산 자이시며 만물의 주인이신 주 예수가 우리(교회)의 존재와 증거에서 일치하고 있다는 사실을 항상 기억하시기 바랍니다. 그리고 성도 여러분, 우리(교회)에 대한 그의 칭찬과 책망이 무엇인지를 살펴보시고 그의 회개 권면과 심판 경고에 순종하시기 원합니다. 그리하여 이기는 우리(교회)에게 주시는 그의 약속인 영생을 풍성하게 누리시기 바랍니다.
찬송 308장을 부르시고 다같이 기도하며 축도로 예배를 마칩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