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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가수 고복수 |
스타부부 1호로 기록되는 가수 고복수는 ‘알뜰한 당신’ ‘외로운 가로등’ 등의 황금심과 결혼, 이후 스타패밀리를 이루고 있다. 후학을 위해 직접 설립한 우리나라 최 의 가요학원인 ‘동화예술학원’을 통해 이미자, 안정애, 유성민, 오기택, 하춘화 등 역량 있는 후배가수들을 배출해내기도 했던 그를 기리기 위해 현재 울산시에 ‘고복수길’이 제정되어 있기도 하다. 탄생 100주년을 맞는 고복수의 삶과 노래의 재조명, 숱한 일화들이 그의 인간적인 면모로 회자되며 ‘가요계의 신사’로 그를 회고한다.
글·박성서 (대중음악평론가, 저널리스트)
황금심과 결혼, 대한민국 스타부부 1호
올해로 탄생 1백주년을 맞는 가수 고복수(高福壽, 1911.11.19~1972.2.10)는 일제 강점기에 등장해 ‘타향살이’, ‘짝사랑’, ‘사막의 한’ 등을 통해 나라 잃은 국민들의 설움을 달래주었다.
또한 ‘알뜰한 당신’ ‘외로운 가로등’, ‘울산아가씨’, ‘삼다도 소식’ 등으로 우리나라를 대표하는 여가수. 황금심(黃琴心, 본명 黃金童, 1922.10.9~2001.7.30)과 결혼해 스타부부 1호로 기록된 인물이기도 하다.
황금심 여사는 남들 앞에서 반드시 고복수를 ‘선생님’이라고 호칭하는 등 누구보다 예의바른 행동으로 모범과 귀감을 보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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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우리나라 스타부부 1호, 가수 고복수 황금심 |
고복수는 국민들의 사랑을 한 몸을 받은 전성기 시절인 40년대 , 일제 강압적인 취입 압박을 피해 만주 등지로 공연을 떠났던 인물이다.
황금심 여사는 생전에 ‘고복수 선생은 민족의 자존심을 지키려 했던 분’이라며 ’그 무렵 일제의 일본노래 취입 강요에 대해 ‘왜 일본말로 노래를 불러야 하느냐’며 반발, 일본말 노래 취입을 거절하는 방법으로 만주 등으로 기약 없는 공연을 떠났다.’고 증언했다.
또한 ‘공연 때 제공되는 일본차를 타고 싶지 다고 걸어가기도 했다’는 일화를 전하면서 ‘타향살이 짝사랑 같은 노래를 부름으로써 민족혼을 고취시켰고 그것이 일종의 총칼을 들지 고도 항일운동을 했던 분’이라고 늘 강조했다고 그의 아들 고영준은 전한다.
일제 강점기에 활동했던 많은 가요인들이 어쩔 수 없이 일제에 의해 군국가요, 친일가요를 취입한데 비해 고복수의 활동은 친일, 극일, 항일 등의 논란에서 비교적 자유스럽다. 그의 행동은 우리 민족의 자부심이기도 하다는 점에서도 반드시 재조명해야 할 것으로 보인다.
6.25 한국전쟁 당시 납북되어 가다 원산에서 미군 폭격 때 함께 끌려가던 기타리스트인 동생 고재천(高在天)의 도움으로 탈출, 국군에 의해 구출되면서 대구에서 군예대 창설에 합류. 전방 위문공연을 다녔다.
가수 고복수는 두 차 의 은퇴공연(1955년 8월 8일, 1957년 7월 8일, 시공관)을 즈음해 후학을 위해 직접 설립한 우리나라 최 의 가요학원인 ‘동화예술학원’을 통해 이미자, 안정애, 유성민, 오기택, 하춘화 등 역량 있는 후배가수들을 배출해냈다.
많은 공연과 영화 제작 등에 힘써온 고복수-황금심 부부의 가족은 소문난 연예인 집안으로 현재까지 그 명성을 이어오고 있다.
장남 고영준(高英準)은 ‘정에 약한 남자’, ‘눈물 젖은 빵’을 발표한 가수로 외모는 고스란히 부친 고복수를 닮았고 창법은 어머니 황금심 여사의 창법을 닮았다.
셋째 아들 고병준씨는 작곡가로 활동 중으로 ‘보고 또 보고’, ‘여인천하’, ‘다모’ 등의 드라마음악을 만든 주인공이고 83년 제4회 강변가요제에서 ‘이름 없는 새’로 대상을 수상했던 가수 손현희씨가 둘째 며느리다.
우리나라 가요1세대 가수로 ‘타향살이’, ‘짝사랑’, ‘사막의 한’을 불러 일제 강점기 때 국민들의 아픔을 달래준 가수 고복수.
현재 그가 태어난 울산에서 매년 고복수가요제가 개최, 올해로 22회 째를 맞고 있고 또한 지난 2010년 울산시에 ‘고복수길’이 제정되었다.
18세에 시작된 가수 고복수의 삶과 노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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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1957년 8월 대구극장에서 가진 ‘고복수 은퇴공연’의 한 장면. 조춘영 악단의 연주로 박시춘이 지휘하고 있다 |
가수 고복수는 1911년 11월 19일, 경상남도 울주군 하상면 서리(지금의 울산광역시)에서 잡화상을 하던 부친 고상덕(高相德)과 모친 조부돌(趙扶乭)의 장남으로 출생했다.
호적상으로는 게 신고 되었으나(단기 4249년 11월 19일) 고복수의 생전 육성 기록(1971.4.11, 동아방송)과 주위 관련자들의 증언에서 1911년 생 임을 확인할 수 있다. 고복수의 대표곡 ‘타향살이’, ‘짝사랑’, ‘사막의 한’의 작곡가 손목인(1913.4.23~1999.1.9)은 그의 저서 ‘못다 부른 타향살이(1992년, 도서출판 HOTWIND 발행)’ 56 에서 고복수에 대해 이렇게 증언하고 있다.
“고복수는 착하고 고지식한 편이었다. 나보다 두 살 위였지만, 나는 그를 그냥 ‘복수’라고 불렀고 그는 나를 꼭 ‘손선생님’이라 부르는 특이한 관계의 길을 걸었다.” 고. 또한 황문평 저 ‘삶의 발자국’에서도 그의 출생을 1911년으로 기록하고 있다. 고복수는 어릴 때 유성기 노래를 따라 부르며 꿈 많던 소년시절을 보냈고 나이 18살 때는 부산 공회당에서 열린 콩쿠르에서 1등을 차지하면서 가수의 꿈을 키웠다.
결국 고복수는 가수가 되고자 경성(서울)을 향해 야간열차에 몸을 싣는다. 그의 조끼 주머니에 들어있던 돈은 60원. 부친 몰래 철사 끝에 엿을 붙여 돈 통에서 빼낸 60원을 움켜쥔 채 서울에 도착한 그는 콜롬비아 레코드가 주최한 ‘전선 9대도시(全鮮 九大都市)가요콩쿠르’가 열리는 경성공회당 무대에 선다.
전국에서 올라온 1백여 명의 가수 지망생이 노래를 겨룬 이 무대에서 고복수는 `두견새 우는 밤`과 자유곡인 `처량한 밤`을 불러 3위를 차지한다. 1위는 정일경, 2위는 조금자였고 당시 심사위원은 작곡가 홍난파, 현제명, 안기영 같은 당대의 쟁쟁한 음악인들이었다.
고복수는 이듬해인 1934년, 동경제국음악학교를 졸업하고 귀국한 작곡가 손목인의 권유로 데이지꾸(帝蓄 : 제국축음기주식회사)의 조선지사, 즉 즉 오케(Okeh)레코드사의 전속가수로 발탁된다.
계약금은 1천원, 월급 80원이었다. 당시 쌀 한가마니가 5원하던 시절이었다. 오케레코드 전속가수가 되어 처음으로 취입한 노래는 ‘타향살이(김능인 작사, 손목인 작곡, 원제 ‘타향’)`와 ‘이원애곡(김능인 작사, 손목인 작곡)’. 이때가 1934년 6월이었다.
이 노래는 발표되자마자 큰 반응을 얻었다. 한반도는 물론이고 특히 멀리 만주에서도 크게 인기를 얻었다. 일제 강점기 시절의 민족의 심정을 고스란히 담았기 때문이다.
유랑생활에 지친 국민들에게 ‘타향살이’는 그들의 심사를 어루만지기에 더없이 알맞은 노래였다.
‘부평 같은 신세’는 바로 국민들 자신이었고 ‘고향 떠난 10여년에 청춘만 늙어’는 바로 당시 우리 민족의 현실이었다.
고향을 떠난 사람들에 의해 무대를 온통 통곡의 바다로 만들었다는 `타향살이`,
한 여인은 이 노래를 듣고 슬픔에 못 이겨 자살했다는 소식도 들려왔다. 그야말로 노래따라 울고 노래 한 곡에 죽을 수도 있었던 시대이기도 했다.
‘사랑에 속고 돈에 울고’ 등의 극작가 이서구는 고복수의 음성에 대해 이렇게 평가했다.
‘별다른 기교 없이 구수하면서도 우수가 깃든 음색을 구사해 당시 우리 민족이 일제에 압박에 눌려 살면서 사무친 원한을 풀어주는 역할을 했다’고.
군국가요 취입 강요 피해 만주공연길로 피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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당시는 우리나라의 많은 국민들이 일제의 만행에 쫓겨 어쩔 수 없이 조국을 등져야 했던 때이기도 했다.
당시 의혈청년, 도산 안창호 선생이 중국목선을 타고 제물포를 떠나면서 남긴 시, ‘거국가’,
‘나 간다고 서러마라, 나의 사랑 한반도야’로 끝나는 이 통한의 ‘거국가’를 남긴 채 기약 없는 망명길에 올랐던 때가 1910년 4월 7일. 우리 민족의 한 맺힌 유랑사가 시작되던 시기였다.
독립투사들이 상해 등지로 뿔뿔이 흩어지고 농토를 빼앗긴 농민들이 어쩔 수 없이 압록강, 두만강을 건 갔던 때, 나라 없이 흘러 다니는 이 유랑 민족을 누가 반겨줄리 없었다. 때문에 만주의 간도 땅에서 대부분 농토를 개간하며 살아야 했다.
역사적으로나 지리적으로나 유대가 깊은 만주는 우리 동포들이 개간했던 척박한 땅이었다.
황무지의 8할 이상이 우리 동포들의 피땀으로 개간되었고 3.1운동을 전후해서 이주민수가 2백여만 명에 이르렀다. 그러나 우리 동포들은 가는 곳마다 농토를 만들고 학교를 세우고 독립단을 조직함으로써 날 무장독립투쟁의 중심지가 된다. 이러한 당시 민족의 고난사는 박경리의 ‘토지’나 안수길의 ‘북간도’ 같은 소설을 통해서도 단편적으로나마 기록으로 전해지고 있다.
이러한 혹한의 황무지에서 만주인들의 무시와 적대감, 그리고 수시로 출몰하는 마적의 횡포와 위협, 또한 수시로 찾아드는 대흉년의 공포, 이러한 삶을 버텨가며 흘려야했던 타향살이의 피눈물은 상상할 수 없을 정도였을 터이니 ‘고향 떠난 여 년에 청춘만 늙어...’하는 ‘타향살이’의 노랫말이 그들의 심정을 어떻게 대변하였는가, 쉽게 미루어 짐작할 수 있다.
이 노래는 처음 ‘타향’이라는 제목으로 발표, 이후 더욱 구체적인 단어 타향살이로 제목이 바꿔 오늘에 이른다. 최근 한 보고서에 의하면 우리 국민들 10명 가운데 7명이 타향살이를 하고 있다고 한다. 대부분 질곡의 역사에 떠밀려 타향으로 강제로 내몰린 사람들에 의해 불리어지기 시작한 노래는 이제금 고향에 대한 향수를 대변하는 노래로 여전히 국민들로부터 애창되고 있다.
1934년 `타향살이`에 이어 내 놓은 고복수의 두 번 째 히트곡은 `사막의 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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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제1회 부산국제가요대상 시상식 후 기념 촬영에서의 고복수 황금심 |
‘자고나도 사막의 길 꿈속에도 사막의 길...’로 시작되는 이 노래는 인생을 카라반에 비유, 고달픈 인생역정을 노래에 담았고 ‘아~ 으악새 슬피 우니 가을인가요’로 시작되는 `짝사랑` 또한 잃어버린 조국에 대한 슬픔을 그린 대표적이 노래다.
이후 고복수는 오케레코드에서 빅터레코드 산하의 반도악극좌로 이적한다. 이 빅터레코드에는 바로 소녀가수 황금심씨가 전속가수로 있었다.
황금심은 박시춘 작곡의 ‘왜 못 오시나’를 발표하며 혜성처럼 등장해 `알뜰한 당신` ‘외로운 가로등’으로 빅타 레코드 황금시대를 이끌었던 인물.
장안의 화제가 된 `알뜰한 당신`의 16세의 소녀 가수 황금심은 박단마와 함께 빅터의 대표가수로 군림, 빅터레코드의 라이벌이던 오케레코드에선 거액을 들여 황금심을 다시 스카우트하려 했으나 황금심은 한 번 빅타로 옮겨 전속계약했던 의리를 지켜 끝까지 빅터레코드를 지켰다.
자청해서 전속을 빅터로 옮긴 고복수와 황금심은 빅터가극단에서 막을 올린 가극 ‘춘향전’의 이도령역과 춘향역을 각각 맡으면서 둘의 사랑이 드디어 결실을 맺기 시작한다. 이들의 로맨스는 당시 최고 남녀가수의 결혼이었던 만큼 세인의 관심을 한 몸에 받았다.
이후 이들 부부는 1941년에 발표하는 듀엣 곡 ‘풍년송(김용호 작사, 문호월 작곡)’을 끝으로 고복수는 음반 취입 활동을 접는다.
‘한국의 게리 쿠퍼’로 불리던 ‘가요계의 신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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일제의 탄압이 극에 달했던 일본의 강압적인 취입제의를 피해가기 위해 만주로 공연을 떠났다.
당시 시대적 상황은 일제말기의 탄압절정기를 향해 치닫고 있었으므로 당시의 가요는 시한부 목숨이자 풍전등화였다. 국민들도 문전옥답을 모두 빼앗기고 살길도 막막하고 일자리도 없어 일본 광산에 가면 품팔이가 좋다는 입소문에 ‘모집꾼’을 따라 현해탄을 건 가는 사람들도 늘어만 가던 때였다.
태평양전쟁 말기, 일제의 탄압은 극에 달한다. 특히 인기가수들은 나없이 군국가요 취입을 강요받으며 오로지 군국가요만이 울려 퍼졌던 때였다.
당시 많은 인기가수들이 군국가요를 부를 수밖에 없었던 때였지만 고복수는 스스로 활동을 접음으로써 화살을 피해갔다.
점잖고 자상하다고 ‘가요계의 신사’라 불리던 그는 키가 훤칠한 멋쟁이로 ‘한국의 게리 쿠퍼’라는 닉네임으로 불리기도 했다.
6.25 한국전쟁 때는 북한군에 잡혀 강제 입대하였으나 원산폭격 당시 극적으로 탈출, 남한군에 의해 구출된 이후 군예대에서 활동하기도 했다.
우리나라 최 의 가요학원인 동화예술학원을 차려 실력 있는 후학을 배출하기도 했지만 이후 영화사, 운수업 등이 잇달아 실패하면서 1972년 뇌신경고혈압으로 타계했다.
현재 생존해 있는 원로들은 그를 ‘품성이 따뜻하고 그러운 인물’로 그를 회고한다. ‘불효자는 웁니다’, ‘꽃마차’의 가수 진방남으로도 활동했던 원로작사가 반야월(2012년 타계) 선생은 고복수의 자상한 면에 감동을 받았던 일화를 이렇게 전한다.
“내가 처음 가수가 되기 전 당시 최고 인기가수였던 고복수 선생에게 편지를 보냈어요. 가수가 되고 싶은데 방법을 알려달라고 물었지요. 그런데 놀랍게도 고복수 선생이 그 바빴을 와중에도 직접 자 로 자상하게 답장을 보내왔어요. 가수가 되는 길은 매우 험하다는 말로 시작해 가수가 되려면 서울로 올라와야 하는데 심지어 하숙비가 얼마가 들고...까지 상세히 조목조목 적어 보냈던 거죠. 그만큼 자상한 분이었습니다.”라고.
손수 시골 청년에게 답장을 해줄 정도로 자상했던 고복수에 대한 감동적인 일화는 많다.
직접 제작했지만 흥행에 실패해 빚더미에 앉게 만든 영화 ‘타향살이’의 경우도 주위에서는 감독을 잘못 만나서 그렇다며 법적인 책임을 물어 제작비를 환수하라고 했지만 되레 고복수는 모든 책임이 자신에게 있다며 모든 빚을 혼자 껴안을 정도로 호인이었다.
그러나 연예인의 도리에 대해서만큼은 누구보다 후배들에게 엄했다고 전해진다.
당시 연예인들은 일반 군대보다 위계질서가 엄했다. 여러 날을 함께 공연해야 하기 때문에 어느 조직보다 확실한 위계질서가 요하기 때문이다. 고복수 또한 후배들에게 엄했고 그러한 만큼 스스로 귀감을 보였다.
부친의 길을 따라 가수의 길을 걷고 있는 장남 고영준의 회고에 의하면 ‘부친은 무대 올라가기 전에 절대 긴장을 풀거나 흐트러지지 고 기를 모은 뒤 무대에서라 모든 열정을 쏟아야 한다.’고 늘 강조했다고 전한다. ‘눈물 젖은 두만강’의 가수 김정구 선생으로부터 직접 들었던 몇 가지 일화도 전한다.
언젠가 “김정구 선생이 말씀하시더군요. 고복수 선생은 후배들이 의상 앞으로 왔다 갔다 하기만 해도 곧바로 호통을 치시는 분이라고. 특히 바로 아래 후배들에게 더욱 엄했는데 이 규율을 이어갈 사람들이기 때문이었기 때문이겠지요. 그래서 보통 대기실에서 잡담을 나누다가도 고복수 선생의 발자욱 소리만 나면 모두들 조용해졌다고 합니다. 고복수 선생은 그러한 후배들의 행동을 알고 미리 헛기침을 해서 신호를 보낸 뒤 항상 대기실로 들어왔다고 하더군요.”.
후배들에게 엄하게 강조했던 그대로 본인 또한 솔선수범해 무대를 목숨처럼 여겼던 인물이었다.
고복수 선생이 타계 1년 전인 1971년 4월, 만년에 고혈압을 앓고 있으면서도 누구보다 무대를, 그리고 노래를 사랑했다고 당시 동아방송에 출연해 이렇게 회고했다.
“뇌신경고혈압을 3년 전부터 앓고 있어요. 의사는 절대 안정이 요하다고 하는데 어떻게 안정이 됩니까? 눈은 비록 안보이지만 누구보다도 예민한 제가 무대만큼은 잊을래야 잊을 수가 없고 눈 감을래야 감을 수가 없습니다.”라고. 그렇듯 그는 비록 무대를 떠났지만 마음은 늘 무대에 있었다. NM
가수 황금심(黃琴心)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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가수 황금심 |
1922년 부산 동래(東萊)에서 태어나 1934년 오케레코드를 통해 ‘왜 못 오시나’, ‘지는 석양 어이 하리(예명 黃金子)’로 데뷔. 이후 빅터로 옮긴 뒤 ‘알뜰한 당신’, ‘외로운 가로등’을 발표. 18살 때 ‘타향살이’의 가수 고복수(高福壽)와 결혼 최 의 스타 커플로 화제를 모음. 1930년대 말부터 일본, 만주, 사할린 등으로 위문공연을 다니며 나라 잃은 동포들의 애환을 달랬고 일제 말기에는 남편과 함께 ‘고복수와 그 악단’을 결성해 공연 활동을 펼쳤고 6·25 한국전쟁 동안에도 남편과 위문단을 만들어 공연을 다녔다. 1990년 원로 연예인들의 모임인 상록회 최고위원을 지냈고, 대중문화에 기여한 공을 인정받아 1992년 옥관문화훈장을 받았다. 2001년 7월 30일 파킨슨병으로 타계. 대표곡으로는 그 외에도 ‘울산아가씨’, ‘삼다도 소식’, ‘뽕따러 가세’, ‘장희빈’, ‘양산도 맘보’ 등이 있다.
첫댓글 두분이 나이차가 많았네여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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와인님 말고 고선생님과 황선생님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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내가 아니고 고복수님 말씀이 내나이가 어때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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우리나라 최 의 가요학원인 동화예술학원을 차려 실력 있는 후학을 배출하기도 .......
그 학원에서 배출된 가수로 60년대초 대전부르스의 안정애님이 있죠.
아,그렇습니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