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간증: 1358. [역경의 열매] 최관하 <1-21> “술꾼이 ‘울며 기도하는 교사’ 된 것은 아내 덕분”
아버지를 닮아 술독에 빠져 살다 5대째 믿음의 집안 여성과 결혼
1968년 부모와 떨어져 살던 여섯 살 때, 할머니를 따라 동네 사진관에서 누나와 찍은 사진. 무척 긴장한 표정으로 주먹을 쥐고 정면을 보지 못하고 있는 소년이 바로 나다.나는 서울 강북구 도봉로에 있는 영훈고등학교에서 국어를 가르치고 있다. 교직 경력은 27년째. ‘울며 기도하는 교사’라는 뜻으로 ‘울보선생’이란 별명을 갖고 있다.
아이들을 좋아해 선생님이 됐다. 국어를 좋아하는 소년이었고 글 쓰는 작가가 되길 원했다. 결국 1998년 시인으로 등단했다. 지금까지 4권의 시집을 포함해 총 17권의 책을 썼다.
초임교사 시절만 해도 신앙이 없었다. 기독교 신앙을 갖게 된 것은 아내 덕분이다. 서울 대방동에 있는 이전 학교에서 3년 남짓 교사생활을 할 무렵 아내를 만났다. 아내는 영어교사로 부임해 왔다. 학교에 온 지 3개월 만에 눈이 맞았고 데이트 7개월 만에 결혼에 골인했다. 내 나이 29세, 아내는 24세였다.
처가는 5대째 믿음의 집안이었다. 나중에 목사님이 되신 장모님은 당시 전도사였다. 현재 목포남부교회 담임목사인 둘째 처남은 신학생이었다.
나는 충남 공주가 고향인데, 우리 가정은 대대로 술을 엄청 많이 먹는 집안이었다. 할아버지 5형제가 술 때문에 돌아가셨다. 할머니들도 팔자타령을 하며 술을 많이 드셨다. 결국 술을 드시다 돌아가셨다고 한다.
아버지는 외아들로 내성적인 분이었다. 술만 드시면 말이 많아지는 그런 분이었다. 19세에 결혼을 하셨는데, 어머니가 시집온 첫날 할머니로부터 심한 말을 들었다고 한다. “하나밖에 없는 내 아들을 네가 빼앗아 갔어.”
어머니는 할머니와 함께 살 수 없었다. 결국 우리 4남매도 떨어져 지냈다. 나와 누나는 영문도 모른 채 서울 길음동에서 할아버지 할머니 손에 컸다. 여동생과 남동생은 부모와 서울 삼양동 빨래골에서 살았다. 부모의 사랑을 제대로 받지 못해서였을까. 나는 무척 소심한 아이로 자랐다.
한 번은 학교에서 인성검사를 받은 적이 있는데, 남자다운 성격이 100% 중 5%로 나왔다. 특기는 고무줄 줄넘기 공기놀이였다. 별명은 ‘색시’였다. 얼굴이 하얗고 창백한, 말 한마디 제대로 못하는 아이가 바로 나였다.
아버지가 미웠다. 가끔씩 할아버지 할머니 집에 술을 잔뜩 드시고 오는 아버지를 보며 ‘저 아저씨는 누군가’라고 생각할 정도였다. 희한한 것은 그 싫어하는 아버지를 내가 커가면서 닮아가고 있다는 것이다.
무엇보다 외모가 많이 닮았다. 아버지처럼 이마가 넓었고 목소리도 닮았다. 언젠가 가족과 노래방을 갔는데 여동생이 외쳤다. “오빠, 오빠는 노래할 때 아버지랑 목소리가 똑같아.”
그날 잡고 있던 마이크를 던져버렸다. 며칠 뒤 거울을 보는데 아뿔싸 내가 서 있는 것이 아니라 마치 아버지가 서 있는 것 같았다.
무엇보다 아버지를 닮은 것은 그놈의 몹쓸 술이었다. 엄청 술을 마셨다. 혼자 두세 병을 마셨는데도 다음날 정신이 맑았다. 기분이 그렇게 상쾌할 수가 없었다. 그렇다면 모태신앙으로 5대째 믿음의 집안인 아내는 술독에 빠져 살고 있는 나를 어떻게 남편감으로 찍었을까.
정리=유영대 기자 ydyoo@kmib.co.kr
* [역경의 열매] 최관하 <1> "술꾼이 '울며 기도하는 교사' 된 것은 아내 덕분"
* [역경의 열매] 최관하 <2> 교회 나갔지만 졸다가 오는 '선데이 크리스천' 계속
* [역경의 열매] 최관하 <3> 루게릭병 학생 2명 놓고 3년간 날마다 눈물기도
* [역경의 열매] 최관하 <4> 아픈 딸 위한 기도 응답 없다고 술김에 성경 찢어
* [역경의 열매] 최관하 <5> 무례한 학생 혼내다 고막 터지는 사고로 '위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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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약력 △1963년 충남 공주 출생 △동국대 국문과·교육대학원, 백석대 신학대학원 졸업 △유스코스타·두란노아버지학교 강사, 물댄동산수림교회 청소년부 담당목사△저서 ‘아버지파워’ ‘울보선생의 명품인생’ ‘마음 훔치기’ ‘영훈고 이야기’ ‘울보선생’ 등 다수
***[역경의 열매] 최관하 <2> 교회 나갔지만 졸다가 오는 ‘선데이 크리스천’ 계속
장모님 ‘사위를 위해서’ 21일 금식기도… 나를 변화시킬 계획 마련하신 하나님
1992년 11월 5대째 기독교를 믿는 집안의 딸인 영어교사와 서울 영락교회에서 결혼식을 올렸다. 그러나 한동안 일요일에 교회에 나가 졸다 오는 어설픈 신앙생활을 했다.믿지 않는 남편을 선택한 아내의 영성은 많이 다운돼 있었다. 모태신앙으로 자랐지만 믿음이 흔들릴 때 학교에서 멋진(?) 국어교사를 보자마자 이내 사랑에 빠진 것이다. 정신없이 믿지 않는 남자에게 빠져드는 딸을 보며 당시 전도사였던 장모님은 기도원에 가서 기도를 드렸다.
“하나님, 저 남자가 제 사위 맞나요? 적어도 우리 집에는 목사님 아들이나 장로님 아들이 와야 하는 것 아닌지요? ‘최관하’라는 남자는 전혀 신앙생활을 하지 않습니다.”
하나님께서는 1주일간 금식하며 기도하는 장모님께 이렇게 응답하셨다고 한다.
“네 사위 맞다. 빨리 하산해라.”
그리고 1992년 11월 7일 서울 중구 영락교회 예배당에서 결혼식을 올렸다. 장인께서 영락교회 사무국에 근무하셨기 때문에 나는 영락교회에 다니게 됐다.
결혼 후에도 아내와 처가의 첫 번째 기도제목은 사위인 내가 교회에서 신앙생활을 잘하는 것이었다. 하지만 그것은 말처럼 쉬운 일이 아니었다. 엿새는 술과 세상에 빠져 살고, 일요일에는 교회에 나가 졸다가 오는 소위 ‘선데이 크리스천’ 신앙생활이 계속됐다. 그렇게 5년, 장모님께서는 21일 금식기도를 하러 기도원에 가셨다. 기도제목은 ‘하나밖에 없는 사위를 위해’라고 전해 들었다. 아내에게 궁금한 것을 물었다.
“여보, 사람이 어떻게 21일을 금식할 수 있어? 119 구급차 불러서 어머니가 계신 기도원 앞에 대기시켜 놓아야 하는 것 아니야?”
하지만 내 걱정과 달리 장모님은 21일 금식을 무사히 마치고 기도원에서 오셨다. 돌아오신 날 저녁에 아내와 함께 처가를 방문했다. 거실에 들어서자 장모님은 몸을 일으키셨다. 많이 야위어 있었지만 희한하게 얼굴과 눈빛에서 광채가 나는 듯했다. 장모님은 달려오다시피 하며 나를 꽉 끌어안았다.
“최 서방, 내가 최 서방을 위해 기도하는데 하나님께서 얼마나 큰 감동과 눈물을 주셨는지 몰라.”
이 말을 듣는 순간 눈물이 왈칵 쏟아졌다. ‘꺼억 꺼억’ 울면서 장모님께 이렇게 말씀 드렸다.
“어머니, 사실은 저도 어머니를 위해 기도하고 있었어요.”
장모와 사위는 한동안 끌어안고 눈물과 감동 속에 있었다. 하나님께서는 목숨을 건 장모님의 기도를 사용하시고 나를 변화시킬 계획을 갖고 계셨던 것이다.
이 글을 쓰는 지금 장모님은 이 땅에 계시지 않는다. 1년 전 설날에 장모님은 돌아가셨다. 설날 가정예배를 드리시던 중 마지막 축복기도를 하시다 쓰러져 하늘나라에 가셨다. 장모님의 마지막 기도제목은 사위 최관하, 바로 나였다. 20년간 목회를 하시고 신들의 나라인 인도 선교를 열심히 다니셨던 장모님. 가깝고 먼 친지와 은혜가 갈급한 분들을 찾아 위로하고 기도하셨던 장모님은 늘 이렇게 외치고 다니셨다.
“하나님, 이 땅에서 제 사명이 다하는 날 바로 그 자리에서 저를 한 방에 하늘나라로 데려가 주세요.”
평소 원하던 대로 기도하며 하늘나라로 가신 장모님, 그분의 생전 모습을 생각하며 나도 지금 장모님과 같은 기도를 하나님께 드리고 있다.
“하나님, 저도 어머니처럼 이 땅에서 사명을 다하는 날 그렇게 한 방에 하나님 곁으로 데려가 주세요. 한 알의 밀알이 되게 해 주시고 삶과 죽음이 모두 간증이 되게 해 주세요.”
***[역경의 열매] 최관하 <3> 루게릭병 학생 2명 놓고 3년간 날마다 눈물기도
수능시험 직전 영접기도한 아이들에게 병 진행 멈추고 회복되는 기적 일어나
근육병에 걸린 제자들을 위해 학교에서 기도하는 필자. 하나님께서는 3년간의 기도에 응답하시고 아이들을 구원해주셨으며 병도 치유해 주셨다.1994년 9월 현재 근무하는 영훈고등학교로 전근을 오게 됐다. 나는 79년부터 81년까지 영훈고를 다닌 졸업생이다. 영훈고 출신 동문 교사로 모교에서 근무하게 된 것이다.
97년 고1 남학생 담임을 맡았을 때다. 첫날 첫 시간에 아이들 자리 배치를 하고 있는데, 한 남자아이가 자리에 들어가지 않았다. 그래서 그 아이에게 물었다.
“너는 왜 자리에 들어가지 않니?”
“선생님, 제가 몸이 좀 아파서요.”
그 아이는 다섯 손가락 중 세 손가락의 세포가 죽어 있었다. 그리고 허벅지가 매우 가늘었다. 근육병이었다. 자세히 말해 루게릭 병을 앓고 있는 아이가 우리 반에 들어온 것이다. 아뿔싸. 내가 도울 수 없는 것이 있다니…. 잘 가르치는 것으로도, 나의 사랑으로도 죽어가는 아이를 살릴 수 있는 방법은 도저히 없었다. 자괴감에 빠졌다. 그 아이를 볼 때마다 눈물이 났다. 울고 있는 내게 아내가 이렇게 말했다.
“여보, 새벽기도를 나가보지 않을래요. 새벽기도는 응답이 100%가 아니야. 200%야.”
번쩍 눈이 뜨였다. 지푸라기라도 잡는 심정으로 새벽기도에 나갔다. 당시 기도를 잘 할 줄 몰라 이렇게 기도했다.
“하나님이라는 분이 계십니까? 계시다면 우리아이 좀 살려주세요. 너무 불쌍하잖아요.”
울며 기도했다. 밤에는 선생님들과 술집에 가서 술을 마시며 그 아이 생각에 또 울었다. 어설픈 신앙인이긴 했지만 아이를 포기할 수 없어 학교에서도 하루에 한 번 이상 아이를 붙잡고 기도했다.
얼마나 울며 기도했는지 어느 날엔 아침에 일어났는데 쌍꺼풀이 없던 눈에 쌍꺼풀까지 생겼다. 그리고 눈물이 마르지 않는 ‘울보선생’이 됐다.
그렇게 6개월 남짓, 옆 반의 한 남자아이가 수업 후 복도로 달려 나왔다. 그러면서 자기도 근육병 진단을 받았다며 왼팔을 내밀었다. 그런데 그 아이는 이상한 종교를 믿고 있었다.
하나님께서는 루게릭 병에 걸린 두 명의 아이를 내 앞에 데려다 놓으셨다. 두 아이를 붙잡고 기도했다. 아이들이 힘들어 할 때마다 일주일에 몇 번씩 응급실에 가야했다.
그런 가운데 하나님께서는 아이들과 가족들을 교회로 인도하도록 하셨다. 근 3년간 기도가 계속됐다. 하지만 대입수능시험을 보기 일주일 전 아이들의 몸은 악화돼 있었다. 문득 이런 생각이 들었다.
‘이 아이들은 의사가 얘기하던 마지막 때가 다 됐다. 그렇다면 이 아이들이 죽는다면 과연 천국에 갈 수 있을까?’
아이들이 내가 기도하자니까 기도를 하긴 했지만 자기들의 입술로 ‘예수님은 나의 주님’이라는 고백을 하지 않았다는 생각이 들었다. 그래서 복음을 다시 전하고 아이들에게 영접기도를 따라하라고 권했다. 또 대입수능시험을 무사히 잘 보게 해달라고 기도했다. 그때 교회에서 제자훈련 중이었던 내게 주신 하나님의 말씀은 사도행전 3장 16절이었다.
“그 이름을 믿으므로 그 이름이 너희가 보고 아는 이 사람을 성하게 하였나니 예수로 말미암아 난 믿음이 너희 모든 사람 앞에서 이같이 완전히 낫게 하였느니라.”
두 아이는 수능시험을 무사히 치렀다. 그리고 그해 겨울방학 아이들에게 놀라운 일이 발생했다. 아이들의 병이 진행을 멈추고 건강이 차츰 회복된 것이다. 하나님께서는 이 아이들이 병 고침을 받는 과정을 통해 어설픈 ‘선데이 크리스천’이었던 나를 기도하는 교사로 만들고 계셨다. 할렐루야!
***[역경의 열매] 최관하 <4> 아픈 딸 위한 기도 응답 없다고 술김에 성경 찢어
다음날 갑자기 딸 천식 악화돼 입원… 다시 기도에 매달리면서 믿음 깊어져
둘째 딸 다빈이가 기관지 천식과 폐렴 합병증으로 아픈 시절을 보낼 때 찍은 사진. 왼쪽이 다빈, 오른쪽이 큰딸 다솜이다.하나님은 어느 때 어느 장소에서도 하나님의 사람을 남겨 놓으시고, 하나님의 뜻을 이뤄 가신다고 믿는다. 모세를 떨기나무 불꽃 가운데 부르시고 출애굽의 사명자로 사용하셨다. 바울은 다메섹에서 부활의 주님을 만났다. 갈릴리의 시골 어부들은 예수님을 만나 사람을 낚는 어부가 됐다. 이처럼 하나님께서 사람을 부르시는 방법은 다양하다.
나는 좋은 선생님이 될 자신이 있었다. 또 좋은 아빠가 될 자신도 있었다. 하지만 그것은 내 방법으로 생각하고 행동하는 일방적인 사랑일 뿐이었다. 하나님께서는 내 힘으로 할 수 있는 것들을 다 내려놓도록 인도하고 계셨다.
딸이 둘 있다. 큰딸은 대학생 다솜이, 둘째딸은 고등학생 다빈이다. 근육병에 걸린 제자들을 붙잡고 기도하던 중 다빈이가 태어났다. 다빈이는 시름시름 아플 때가 많았다. 다빈이의 병명은 기관지 천식과 폐렴의 합병증이었다. 가래가 목과 코를 꽉 막고 있어 숨을 잘 못 쉬었다. 급기야 내가 달려들어 다빈이의 코를 빨고 뱉었다.
‘아, 좋은 선생님 좋은 아빠가 되고 싶었는데….’ 실제 할 수 있는 일은 아무것도 없었다. 학교에서는 근육병에 걸린 제자 둘, 집에서는 기관지 천식을 앓는 다빈이. 하지만 모두 포기할 수 없었다. 제자들에게는 스승이요, 딸에게는 아빠였기 때문이다.
“유월절 전에 예수께서 자기가 세상을 떠나 아버지께로 돌아가실 때가 이른 줄 아시고 세상에 있는 자기 사람들을 사랑하시되 끝까지 사랑하시니라.”(요 13:1)
성경에 기록된 예수님의 사랑법은 끝까지 포기하지 않는 것이었다. 나 역시 제자와 딸을 포기해서는 안 된다는 마음을 하나님께서는 기도 가운데 계속 부어주고 계셨다.
힘겨운 하루하루가 계속됐다. 그러던 어느 날 새벽까지 잔뜩 술을 마시고 집에 들어왔다. 그리고 집에 있는 성경과 찬송을 모두 꺼내 찢었다. 방바닥에 가득한 종이 조각을 바라보며 이제는 모든 것이 끝났다고 생각했다. 지쳐 잠이 들어 있는 아내를 깨웠다.
“여보, 당신을 사랑하지 않는 건 아냐. 하지만 너무 힘들어. 아이들도 안 낫고…여보, 나의 하나님은 아닌 것 같아. 우리 헤어지자.” 술김에 내뱉은 말이었지만 참으로 슬픈 하루였다.
다음 날 퇴근을 하는데 아내가 나를 보자마자 큰 소리로 외쳤다.
“여보, 빨리 차 빼. 빨리….”
자세히 보니 다빈이의 눈동자가 돌아가 흰자위만 보이고 사시나무 떨듯 떨고 있었다. 그날 밤 다빈이는 입원했다. 울며불며 다빈이 앞에 무릎을 꿇었다.
“하나님, 우리 다빈이를 살려주세요. 제가 잘못했습니다. 그리고 저를 받아 주세요. 변화시켜주세요. 저를 완전히 하나님의 사람으로 변화시켜주세요.”
축 늘어진 딸아이 앞에서 이렇게 기도하고 또 기도했다. 다빈이는 6개월을 더 아팠다. 아이는 쉽게 낫지 않았다. 고난 때문인지 내 신앙심은 깊어만 갔다. 기도가 계속됐다. 결국 하나님께서는 근육병 제자들 병의 진행을 멈춰 주셨다. 다빈이도 가슴 속에 들끓던 가래가 없어지고 건강이 많이 회복됐다.
다빈이는 현재 고등학생이다. 별명은 ‘체육소녀’, 교회에서는 ‘전도왕’이다. 현대무용을 전공하는 예쁜 여고생으로 성장했다. 근육병 제자들과 둘째 딸 다빈이를 통해 나는 기도하는 교사, 기도하는 아빠로 거듭나고 있었다.
***[역경의 열매] 최관하 <5> 무례한 학생 혼내다 고막 터지는 사고로 ‘위기’
“아이들 만날 자신 없어요” 기도 끝 “수업 시작전 기도하라” 응답 받아
수업을 시작하기 전에 기도하는 필자와 학생들. 매년 학생들의 동의를 받고 기도한 뒤 수업을 진행했다. 기도하고 수업을 하니 집중이 잘 된다는 학생들이 많다.근육병 제자들과 아픈 딸을 회복시켜주시고 기도하는 교사로 살게 하신 하나님께 너무 감사했다. 그런 은혜 속에 살아가던 어느 날, 엄청난 위기가 닥쳤다.
학교에서 무례하게 구는 학생이 있었다. 하루는 그 학생을 격려한다고 어깨를 ‘툭’ 쳤다가 그만 고막이 터지는 사건이 발생했다. 그 학생이 내 손을 피하다 잘못 얻어맞은 것이다.
나는 하루아침에 폭력교사가 됐다. 학교에서는 사건의 자세한 경위를 보고받고 선처를 해주었다. 하지만 정작 나는 아이들을 다시 만날 자신이 없었다.
그 무렵 기독교육자들의 모임인 한국교육자선교회가 주관하는 연찬회에 사흘간 참석했다. 그 기간에 한 가지 기도제목을 놓고 하나님께 간절히 기도했다.
“하나님, 제가 폭력교사가 됐습니다. 이유야 어떻든 좀 더 참았어야 했는데, 하나님 저는 이제 순수한 우리 아이들의 눈망울을 바라볼 자신이 없습니다. 제가 계속해 아이들을 만나야 한다면 어떻게 해야 하는지 알려주세요.”
기도 속에 간절함이 묻어났다. 기도 사흘째 되던 날, 하나님께서는 마음속에 이런 생각을 갖게 해 주셨다.
“네가 정말로 이 시대의 아이들을 사랑하고 영혼을 사랑하는 교사로 살기를 원한다면 수업을 시작하기 전에 기도해라.”
하지만 실행하는 게 쉽지 않았다. 왜냐하면 영훈고는 기독교 학교가 아니었기 때문이다. 교회에서는 얼마든지 아이들과 함께 기도할 수 있지만 기독교 학교가 아닌 학교에서 수업 전에 기도하는 것, 이것은 우리 학교 상황으로 봤을 때 불가능했다. 믿지 않는 이사장님의 사택이 학교 안에 있고 학교 관리자와 동료 교사, 학생 등 믿지 않는 사람이 많은 학교가 아닌가. 정말 난감했다.
그렇게 며칠을 고민했다. 기도를 드리는데 문득 용기가 생겼다. 하나님께서는 상황이나 여건을 보고 일하시는 분이 아니라는 것, 계속되는 말씀훈련 속에 어느덧 하나님의 말씀을 전적으로 신뢰하는 믿음으로 변해가고 있었다.
“하겠습니다, 하나님. 그런데 어떻게 하면 좋을지 방법을 알려주세요. 상황으로 보아서는 불가능한 것 같습니다. 하지만 믿음으로 순종합니다. 모든 것 하나님께서 인도하실 줄 믿습니다.”
지혜를 구하는 자에게 하나님께서는 하나님의 지혜를 부어주셨다. 나는 첫날 첫 시간 아이들과의 만남 때 내 삶을 들려줬다. 근육병 제자들의 이야기, 아픈 딸 이야기, 그리고 폭력교사가 됐던 가슴 아팠던 이야기 등을 말이다. 그리고 성령님께서 주시는 마음으로 이렇게 아이들에게 말했다.
“얘들아. 나 소원이 하나 있는데 들어주겠니?”
“뭔데요? 선생님.”
“수업 시작 전에 너희들을 위해 기도하게 해다오.”
하나님께서는 아이들의 마음을 만져주고 계셨다. 각 학급 아이들에게 동의를 얻어 10여년 동안 수업 전에 기도를 드렸다. 믿는 아이들뿐 아니라 믿지 않는 아이들, 타종교를 갖고 있는 아이들도 진심으로 자신들을 위해 기도하는 선생님을 의지했다.
기도의 효과는 놀라웠다. 보통 수업을 위해 교실에 들어서면 아이들은 떠들거나 엎드려 있기 십상이다. 엎드린 아이들은 몸이 피곤한 경우다. 그 아이들에게 다가가 어깨에 손을 얹고 조용히 기도했다. 그러면 졸린 아이는 일어났다. 아픈 아이들은 그대로 있었다. 아이들에게 기도는 위로가 됐고 평안을 안겨줬다. 그렇게 회복되는 하나님의 귀한 역사가 일어났다.
***[역경의 열매] 최관하 <6> 타종교 믿던 교장선생님 회심시킨 아이들의 기도
아이들 음악실에 모여 기도회… 순시하던 교장선생님 기도회 막으려다 자신 위해 기도하는 것 듣고 감동
기독학생들은 30분 일찍 등교해 학교를 위해 기도하는 ‘국기게양대기도운동’을 시작했다. 이 기도는 영훈고의 아침을 깨우고 하나님의 인도하심을 구하는 단초가 됐다.2000년대에 들어서자 나라와 민족, 학교를 위해 기도하자는 ‘국기게양대 기도운동’이 번지고 있었다. 이 운동은 1990년 미국 텍사스 주 벌슨교회의 10대 기독 청소년들에 의해 시작됐다. 이들은 주말 저녁 자신들이 다니는 학교의 성조기 게양대 아래에 모여 손을 잡고 학교와 가정, 사회의 도덕성 회복과 영적 각성을 위해 기도했다.
“그래, 바로 이거야. 우리 학교도 이런 기도운동을 해보는 거야.”
나는 예수님을 열심히 믿는 아이들이 학교 안에도 많이 있을 것이라고 생각하고 유심히 찾아봤다. 그랬더니 학교 앞의 교회를 빌려 일주일에 두 번 예배를 드리는 아이들이 20여명 있었다. 그 중 5명의 아이들과 대화를 나눴다.
“얘들아, 우리 학교 안에서 학교를 위해 기도하면 어떻겠니?”
아이들은 바로 “하겠다”고 답했다. 감사했다. 아이들을 데리고 학교 국기게양대 앞으로 갔다. 그런데 이게 웬일인가. 운동장을 가로질러 기독교 신앙을 갖지 않은 이사장의 사택이 보였다. 학교 직원들 중에도 기독교를 믿지 않는 분들이 많았다. 잠시 주춤했다. 하지만 우리의 결심은 되돌릴 수 없었다.
“얘들아, 우리 5층 음악실로 가자.”
이후 국기게양대 대신 음악실에서 기도하기 시작했다. 기도하는 아이들이 점점 늘어났다. 많을 땐 30명 가까이 됐다. 매일 아침 기도회는 뜨겁고 은혜로웠다.
그런데 희한한 일이 생겼다. 당시 교장 선생님은 독실한 불교신자였다. 아침 일찍 나와 순시를 하기 때문에 우리가 기도하는 것을 알 텐데도 아무 말이 없었다. 괜히 불안했다.
‘아침에 기도하고 있다고 자진해서 신고할까’라고 생각하고 있을 무렵 은사님 가운데 교회 장로님 한 분이 찾아오셨다.
“최 선생, 요즘 아이들 하고 학교에서 기도하고 있지?”
“네, 선생님. 그런데 이상해요. 교장선생님이 다 알고 계실 것 같은데 아무 말씀도 안 하셔요.”
은사님은 미소를 띠며 말씀하셨다.
“다 알고 계셔. 그런데 왜 최 선생한테 아무 말씀 안하시는 줄 알아? 이런 일이 있었더라고.”
그러면서 두 분이 대화했던 내용을 전해주셨다. 연배가 비슷하니까 솔직한 대화가 가능했던 것 같다. 사연은 이랬다.
어디선가 뜨겁게 부르짖는 기도소리를 들은 교장선생님이 “이건 무슨 소리지?”하고 음악실 유리창 안을 들여다봤다. 자세히 보니 최관하 선생과 20여명의 아이들이 무릎을 꿇고 눈물을 흘리며 기도하고 있는 것 아닌가.
‘아니, 이 자식들이…. 여기가 기독교학교야’라고 생각하며 문을 ‘확’ 열려는 순간, 교장선생님은 귀를 의심하지 않을 수 없었다. 기도내용을 들어보니 교장 자신을 위한 기도였다.
“하나님, 우리 교장선생님께서 학교와 우리를 위해 참 많이 애쓰고 수고하고 계십니다. 그런데 아직 하나님을 못 만나셨어요. 하나님, 우리 교장선생님 좀 구원해주세요.”
그때 하나님께서는 불교 신자인 교장선생님 마음 가운데 깊은 감동을 주셨다.
교장선생님은 ‘세상에 이렇게 아침 일찍 나와 기도하는 아이들이 있다니, 정말 고마운 일이로구나’하고 살며시 문을 닫고 나가셨다고 한다. 이 교장선생님은 후일 예수님을 만나셨다. 현재 미국에 살고 계신데 한인교회를 섬기고 있다. 교회 어른신 모임의 회장도 맡고 계시다고 한다. 할렐루야!
***[역경의 열매] 최관하 <7> 학생들이 점심찬양 제안… “하나님의 학교” 기도
매일 점심시간에 20분씩 합심기도… 주 2회 예배·성경공부반까지 만들어
2000년 초 학생들이 성경공부하는 모습. 이 아이들의 기도와 말씀 공부가 후배들에게도 이어져 영훈학원에 복음의 열매가 맺히는 계기가 됐다.학교를 위한 아침 기도모임이 계속되고 있는 동안 하나님께서는 기도하는 아이들을 강하게 주관하고 계셨다.
“선생님, 점심시간마다 음악실에서 찬양하고 기도하면 좋을 것 같아요. 어차피 점심 먹으러 가면 줄 서서 20분은 기다리니까요. 20분 동안 먼저 기도와 찬양을 하고 줄이 빠지면 가서 먹으면 되거든요.”
한 학생의 제안에 아이들은 모두 좋다고 반응했다. 그래서 2000년 4월 21일부터 점심찬양 기도회가 시작됐다. 이 기도 모임은 매일 진행됐다. 일주일에 두 번의 예배는 학교 앞 교회를 빌려 열렸다.
기도 외에 말씀이 필요할 것 같아 성경공부반도 만들었다. 학년별로 기독학생과 자원하는 비기독학생들을 모아 점심시간 또는 방과 후에 남아 일주일에 한 번씩 성경공부를 진행했다. 학급담임을 맡았을 때는 교회에 나가는 아이들을 중심으로 말씀을 전했다. 2000년 5명으로 시작된 성경공부반이 80명까지 확대됐다.
아이들이 너무 많아 혼자 감당하기 어려울 때는 신우회 박수영 선생님께서 함께 섬겨줬다. 지금은 퇴직하신 박 선생님께 이 자리를 빌려 감사의 말씀을 드린다.
기도하는 아이들과의 만남은 매우 즐거웠다. 말씀을 나누며 삶을 조명해보고 말씀을 통해 하나님의 비전 찾기에 노력했다.
한 번은 성경공부반 간식비가 없어 아이들에게 “미안하다”고 말한 적이 있었다. 그랬더니 한 아이가 “선생님, 금식하며 성경공부하면 더 은혜인 걸요”라고 말하는 게 아닌가. 그 아이의 은혜롭고 어른스러운 말을 들으며 얼마나 감사의 눈물을 흘렸는지 모른다.
병원에 입원해 계신 선생님을 찾아 기도한 후 병원 벤치에서 성경공부를 하기도 했다. 어려움을 당한 선생님과 아이들의 가정을 찾아 예배를 드리기도 했다. 아이들은 이를 ‘심방부대’라고 불렀다. 신우회 선생님들의 예배도 1주일에 한 번씩 학교 앞 교회에서 진행됐다. 서로 돌아가며 예배 준비를 했다. 대여섯 명의 선생님들이 말씀을 통해 서로의 이야기를 나누며 하나님의 음성을 듣고자 했다.
정말 간절히 기도를 드렸다. ‘영훈’이 하나님의 학교가 되고 하나님의 사랑이 실현되는 학교가 되게 해 달라고 합심해 기도했다. 하나님께서는 큰 은혜를 베풀어주셨고 하나님의 뜻하심을 하나씩 이뤄가고 계셨다. 환경은 기독교학교가 아니지만 하나님께서 원하시는 기도를 드리는 우리는 무척 감사하고 기뻤다.
이 무렵 하나님께서는 히브리서 11장 1절 말씀을 내게 주셨다. “믿음은 바라는 것들의 실상이요 보이지 않는 것들의 증거니.”
하나님은 영훈학원의 복음화, 하나님 사랑의 실현을 위해 기도하도록 마음을 주시고 인도하고 계셨다. 나는 그 마음을 매일 신우회 선생님, 기도하는 아이들과 나눴다.
동역자들에게 한 달에 한 번 이상 이메일 등을 통해 중보기도 요청을 드렸다. 그 기도는 온전히 하나님의 학교로 영훈학원을 변화시켜 달라는 기도였고 복음으로 접수해 달라는 기도였다.
하나님께서는 말씀과 기도, 찬양을 영훈고에 허락하셨다. 그것을 볼 때 하나님께서는 여건과 상황으로 일하시는 분이 아니다. 하나님의 헌신된 사람을 통해 일하시는 분이심을 알 수 있었다. 기도 가운데 하나님의 놀라운 역사하심은 계속되고 있었다.
***[역경의 열매] 최관하 <8> 기도 끝에 학교 지하 기술실에 예배처소 마련
예배 드리던 학교 앞 교회 이전… ‘예배처소 허락’ 기도 일주일 만에 응답
예배처로 꾸며놓은 영훈고 지하 기술실에서 기념촬영을 한 필자. 이곳에서 성경공부 찬양기도회 등 다양한 기독활동을 펼쳤다.어려운 일이 발생했다. 그동안 빌려서 예배드리던 학교 앞 교회가 이사를 간다는 것이었다. 학생들과 기도에 들어갔다. 신우회 선생님과 여러 동역자에게도 기도요청을 드렸다. 기도 제목은 ‘영훈고에 예배처소를 허락해 달라’는 것이었다. 하나님께서는 예레미야 33장 3절의 말씀을 주시며 기도하게 하셨다. 간절한 마음으로 금식기도를 했다.
“하나님, 꼭 예배처소를 허락해 주시옵소서.”
일주일 기도 끝에 하나님께서는 우리 기도에 응답하셨다. 예배처소는 학교 지하에 있는 기술실이었다. 기술실은 당시 창고로 바뀌어 특별히 활용도가 없는 공간이었다. 비가 오면 습기가 많이 차서 물품을 놓기도 어려웠다.
하지만 상관없었다. 예배를 드릴 공간만 있으면 된다고 생각했다. 기술실로 정하려고 하는데 또 다른 난관에 부닥쳤다. 기술실을 관리하는 선생님이 영훈고 역사상 가장 무서운, 연세가 좀 있으신 호랑이 선생님이었던 것이다. 그 선생님은 긴 마대 자루를 끌고 다니는 분이었는데, 기술실이 설령 창고라고 해도 우리에게 예배처소로 허락하실 분은 아니라는 생각이 들었다. 하지만 하나님께서 우리에게 주신 말씀을 계속 떠올리며 간절히 기도했다.
“너는 내게 부르짖으라 내가 네게 응답하겠고 네가 알지 못하는 크고 은밀한 일을 네게 보이리라.”(렘 33:3)
며칠 뒤 호랑이 선생님은 명예퇴직을 하셨다. 그리고 자연스럽게 우리는 학교에서 예배를 드릴 수 있게 됐다. 하나님께서 우리 기도에 응답하신 것이다.
기계 부품이 즐비한 지하의 기술실, 비가 오면 물이 빠져나가지 않아 물을 퍼내야 하는 곳이었음에도 우리는 예배를 드릴 수 있어 감사했다. 아침기도회, 점심시간 찬양기도회, 성경공부로 하나님을 향해 한 걸음씩 나아갔다.
그 무렵 나는 서울 노원구 수락산 쪽에 있는 청목교회 부설 야학에서 어려운 분들을 가르치고 있었다. 매주 월요일마다 방과 후에 4시간씩 국어 수업을 했다. 몸은 피곤했지만 가르치는 은사를 주신 하나님께 참 감사했다.
그러던 어느 날 야학 수업을 마치는 기도를 드린 뒤 눈을 떴다. 교탁 위에 하얀 봉투가 놓여 있었다. 봉투에는 ‘선생님, 집에 가시는 길에 봉투 안을 열어 보세요’라고 적혀 있었다. 봉투를 놓아두신 분은 수업을 받는 여 집사님이었다. 집으로 가는 버스 안에서 봉투를 열어 봤다. 거기에는 이렇게 적혀 있었다.
‘선생님, 학교에서 아이들과 예배드리는 공간에 반주기가 없다면서요. 제가 사용하던 피아노가 있는데 그 피아노를 드리고 싶어요.’
나는 속으로 ‘앗싸’ 하고 외쳤다.
편지 말미에는 이렇게 적혀 있었다. ‘선생님, 10년 된 중고이긴 하지만 쓸만할 거예요. 영창 피아노이거든요.’
그렇게 하나님께서는 피아노를 주셨다. 아이들이 자주 모이고 또 그 수가 늘어날수록 필요한 물질도 채워주셨다. 무엇을 달라는 기도는 따로 구하지 않았다. 대신 말씀을 붙잡았다.
“그런즉 너희는 먼저 그의 나라와 그의 의를 구하라 그리하면 이 모든 것을 너희에게 더하시리라.”(마 6:33)
하나님은 말씀을 부여잡고 기도하는 우리를 기특하게 보셨는지, 하나님의 방법대로 하나님이 원하시는 때에 꼭 필요한 것을 계속 우리에게 부어주셨다.
***[역경의 열매] 최관하 <9> “아이들 기도 들었다” 미국서 날아온 헌금 선물
기도실 난방·기물 등 채워달라 기도에 새너제이 임마누엘교회서 후원 응답
최관하 교사가 2003년 2월 미국 새너제이 임마누엘장로교회에서 간증집회를 가진 뒤 자신을 후원하는 이 교회 목장팀 성도들과 함께했다. 오른쪽 세 번째가 최 교사.영훈고 기독학생과 교사, 그리고 학부모들은 계속 학교에서 하나님의 사랑이 실현되도록 기도하고 있었다. 하나님께서는 때마다 여러 동역자를 보내주셨다. 학교 앞에 있는 153마트는 아이들의 음료수와 과자 등을 제공했고, 라스베리 과자점에서는 빵을, 낙원꽃집 집사님 내외께서는 물질로 섬겨 주셨다. 학교 근처 신성교회는 장소를 제공하고 물질과 기도로 협력했다.
특별히 2000년 초 만난 미국의 동역자를 잊을 수가 없다. 우연히 연락이 된 고등학교 동창 김승규 집사는 미국 새너제이에 살고 있었다. 김 집사가 섬기는 교회에는 20여개의 목장이 있었는데, 한 목장마다 한 선교지나 선교사를 정해 선교헌금을 보내고 있었다. 김 집사도 한 목장의 목자를 맡아 기도하며 선교헌금을 보낼 대상을 찾고 있었다. 그런데 내가 인터넷에 올린 중보기도 요청의 글을 보고 마음이 움직였다고 한다. 김 집사가 보내온 이메일을 보는 순간 나는 하나님의 강한 역사하심을 느꼈다. 할렐루야.
우리가 사용하는 예배실인 학교 기술실은 난방장치가 돼 있지 않았다. 마이크와 스피커 등 여러 기물도 부족했다. 성경·찬송책도 모자랐다. 하지만 무엇보다 기도의 동지가 필요했다. 학교 복음화를 구하는 기도를 함께 드릴 수 있는 동역자가 필요했던 것이다.
김 집사는 이메일로 한 달에 150달러 정도씩 선교헌금으로 보내겠다는 내용을 전해왔다. 모교의 후배 중 불우한 학생들도 따로 돕겠다고 약속했다. 그리고 목사님과 목장 팀원들에게 알릴 테니 미국에 와서 간증 겸 선교보고도 하라고 했다.
시간과 공간을 초월해 응답하시는 하나님을 놀랍게 바라보지 않을 수 없었다. 학교 안으로의 예배처소 이동, 비기독교 학교에서의 예배와 찬양과 기도회, 그리고 물질적으로 공급해주시며 선교사적 비전을 함께 주시는 하나님. 그 하나님의 사랑과 큰 뜻을 피부로 느낄 수 있었다.
며칠이 흘렀다. 새벽녘에 전화벨 소리가 올렸다. 아내가 받아 나에게 바꿔줬다. 미국에 있는 김 집사의 전화였다. 김 집사는 또 한번 확인했다.
“아무것도 걱정하지 마. 학교에서 선교사적 위치에 있는 너와 아이들을 가능한 대로 도울 거야. 기도로 물질로….”
아, 이것은 하나님의 음성이 아닐는지…. 감사한 마음으로 궁금했던 한 가지를 김 집사에게 물었다.
“그런데 선교헌금 보낼 곳을 더 많이 찾아볼 수도 있고, 더 필요한 곳이 있을 수도 있는데 어떻게 우리로 바로 결정을 내렸니?”
김 집사는 이렇게 대답했다.
“응, 여기저기 선교지를 찾으며 기도하던 중에 꿈을 꿨어. 꿈속에서 웬 아이들이 보이는데 눈물을 흘리면서 너무 간절히 기도를 하는 거야. 꿈에서 깨고서도 무슨 꿈인가 했는데, 다음날 네가 인터넷 한 카페에 올린 영훈 아이들의 기도, 찬양 등을 보고 ‘바로 여기가 하나님의 뜻이로구나’ 하고 결심하게 된 거야.”
이 말을 듣는 순간, 내 눈에서는 쉴 새 없이 눈물이 흘러내렸다. 이렇게 인도하시는 하나님의 세밀한 간섭에 무척이나 감사했다. 전화를 어떻게 끊었는지도 모르겠다. 나는 이불 위에서 그대로 기도를 올렸다. 눈물이 비 오듯 흘렀다. 나는 하나님의 때에 하나님의 방법으로 동역자를 붙여주시는 하나님께 감사 또 감사했다. 이후 수차례 나는 미국 새너제이의 임마누엘장로교회에서 간증 겸 선교보고를 했다.
***[역경의 열매] 최관하 <10> 미국 손님과 예배 드릴 기술실 폭우로 잠길 위기
예배 사흘 전부터 태풍으로 비 내려 학생들과 비를 멈춰달라고 밤새 간구… 아침에 멀쩡한 것 확인
2003년 8월 우리 모임을 후원하는 미국 임마누엘장로교회 손원배 목사 일행을 축복하며 학교 기술실에서 기도하는 기독학생들.우리를 돕고 있는 미국 임마누엘장로교회 손원배 담임목사님과 한글학교 교장이신 집사님, 그리고 선교부 담당 장로님께서 한국에 오셨다. 학생들과 함께 기도하며 손님들을 맞을 준비를 했다.
그런데 예기치 못한 일이 발생했다. 학교 안에 예배를 드리는 장소는 기술실인데, 지하라 어두컴컴하고 외국에서 오신 손님과 함께 예배드릴 장소로 적합하지 않았기 때문이다. 이곳은 비가 약간만 와도 물이 찼다. 그래서 헌물로 주신 피아노나 드럼의 아래에는 물에 잠기지 않도록 하기 위한 발판이 놓여 있다.
기독교학교가 아닌 곳에서 기술실을 사용하게 하신 것만도 감사해 아이들은 발목이 잠기면서도 기도하고 찬양했다. 때로는 아이들이 물을 하루 종일 퍼내기도 했다.
그런데 예배를 드리기로 한 사흘 전부터 태풍이 온다는 것이었다. 그것도 사상 최대의 태풍이라고 했다. 그 태풍의 이름은 ‘라마순’. 학생들과 함께 급하게 기도를 드렸다. 좋은 날씨를 허락해 달라고, 기술실에 물이 차지 않도록 해달라고, 예배드리는데 지장이 없도록 해 달라고 모일 때마다 하나님께 간구했다.
예배를 드리기로 예정된 전날 밤까지도 태풍과 함께 폭우가 쏟아졌다. 남쪽 지방은 더 심한 것 같았다. 집에 돌아와 늦은 시간 무릎 꿇고 태풍을 멈춰 달라고 간절히 기도했다. 그러면서도 한편으론 걱정이 앞섰다. 다음날 학교에 가자마자 아이들과 물을 퍼낼 생각을 했고, 옮기면 또 어디서 예배를 드려야 할지를 놓고 고민했다.
이튿날 아침 눈을 뜨니 비는 계속 내리고 있었다. 우산을 뒤집을 만큼 바람도 강했다. 출근길, 버스 안에서 또 기도했다.
“주님 뜻대로 하세요. 기술실이 아니면 빈 교실에서, 그것도 아니면 어디에서든 예배를 드리면 되지요.”
우산을 들고 학교 기술실 앞에 도착했다. 그런데 전날에 쏟아진 폭우라면 당연히 지하 계단 네댓 개는 물에 차 있어야 하는데 계단이 깨끗했다. 물에 닿은 흔적이 없었다. 의아했다. 기술실 문을 열었는데, 이게 어찌된 일인가. 물이 전혀 들어와 있지 않았다.
순간 기도하면서도 무릎 정도까지 물이 차 있을 것이라 의심했던 자신이 정말 부끄러웠다. 주님의 능력에 나는 겸손하게 무릎을 꿇었다. 회개와 감사의 기도를 드렸다. 기도를 드리는 중에 아이들이 오기 시작했다. 아이들도 기술실에 들어오며 놀라움을 금치 못했다.
“선생님, 이게 어찌 된 일인가요? 물이 하나도 없네요.”
“너희들이 기도했잖아. 기도의 응답이지. 얼마나 감사한 일이니. 그렇지?”
미국에서 오신 분들과 감동의 예배를 드렸다. 손 목사님께서는 설교 도중 이렇게 말씀하셨다.
“여러분, 참 감사합니다. 제가 양말을 벗지 않고 예배를 드릴 수 있도록 해주어서요. 여러분이 기도해서 하나님께서 즉각 응답을 해 주셨다면서요. 앞으로 이곳은 결코 물에 차지 않을 것임을 선포합니다. 아멘.”
목사님 일행을 붙잡고 아이들이 축복 기도를 할 때는 목사님, 장로님 모두 무릎을 꿇었다. 우리 아이들은 미국에서 방문하신 이분들을 붙잡고 하나님 은혜에 감사하며 눈물을 흘리며 기도했다. 감사와 찬송, 감동과 눈물, 그리고 하나님께 영광을 올려드리는 시간이었다.
***[역경의 열매] 최관하 <11> ‘가스펠 부르기반’ 만들자 해마다 학생들 몰려와
종교반 안돼 노래 동아리로 등록… 실질적 기독학생회로 복음화 활동
최관하 교사가 2000년대 초 영훈고 기독 동아리 ‘가스펠 부르기반’ 학생들과 함께한 모습.영훈고 기독학생들은 방학에도 두 번의 예배를 드리고 성경공부와 기도모임을 계속했다. 특히 교장 및 교감 선생님, 그리고 학교 선생님들을 위한 기도는 빠질 수 없었다.
2001년 새로 오실 교장 선생님께 기대를 갖고 있었다. 그분은 교회를 다니신다고 했기 때문이다. 그래서 더 열심히 기도했다. 신입생과 교장 선생님을 맞이하기 위한 기도는 3주 동안의 작정기도와 한 주간의 점심 금식으로 이어졌다.
기도 중에 하나님께서는 새로 오신 교장 선생님을 만나라고 하셨다. ‘두려워하지 말라 하나님의 말을 네 입에 두었노라’고 하셨다. 교사가 새로 부임하는 교장 선생님을 만나 십수 년간 학교에서 인정하지 않았던 기독교반 및 종교반의 공인 문제를 놓고 대화한다는 건 쉬운 일이 아니었다. 그분이 크리스천이라도 말이다. 그분을 힘들게 해서도 안 되고, 그렇다고 이대로 가만히 있을 수도 없었다. 하나님께 지혜와 담대함을 달라고 계속 기도만 했다.
부임 첫날 오후 2시쯤 교장 선생님 방을 찾았다. 자리를 잡은 뒤 마음속으로 기도하며 찾아온 이유를 천천히 말씀드리기 시작했다.
“교장 선생님, 다름이 아니라 저희 학교 종교반에 대해 말씀을 드릴 것이 있습니다.”
교장 선생님은 조용히 나의 이야기를 듣고 계셨다.
“저희 학교는 김영훈 선생님께서 세우셔서 처음에는 모든 종교반을 인정하셨습니다. 그런데 김 선생님께서 돌아가시고, 믿지 않는 이사장님과 교장 선생님이 오셔서 급기야 다 없어지게 되었지요. 그렇게 16년 세월이 흘렀습니다. 하지만 기독교반만큼은 학교 앞의 교회를 빌려 예배를 드렸고, 지금은 학교 지하에 있는 기술실로 들어와 기도와 찬양, 예배를 드리고 있습니다. 이제 기독교반을 정식 동아리로 신청하려고 합니다. 교장 선생님께서 이해해주시고 허락해 주시면 감사하겠습니다.”
교장 선생님은 말씀하셨다.
“종교반이라면 기독교반뿐 아니라 원하는 학생들이 있으면 불교반, 천주교반, 유교반 다 허용하면 되는 것 아닌가요?”
“예, 그건 그렇습니다.”
“그럼 그런 쪽으로 해도 좋을 것 같네요. 신청자나 지도교사가 없으면 운영을 안 하면 되는 거고요.”
다음 날 교장 선생님께서는 학원 이사장님께 모든 종교반을 인정하자는 건의를 하셨던 것 같다. 그러나 이사장님은 그래도 종교반은 마음에 안 든다고 말씀하셨고 교장 선생님은 “이사장님의 생각이 그런데, 우길 수도 없다”고 하셨다. 다시 어려운 지경에 이르렀다.
나를 비롯한 신우회 선생님, 그리고 기독학생들은 하나님의 뜻을 알려달라고 더욱 부르짖었다. 그때 하나님께서 지혜를 주셨다.
“얘들아, 우리 ‘가스펠 부르기반’으로 동아리 신청을 해보자. 학교에 ‘팝송 부르기반’도 있는데 가스펠 부르기반은 왜 안 되겠니? 분명 하나님께서 인도해 주실 거야.”
교장 선생님을 다시 찾아갔다. 교장 선생님의 답변은 간단했다.
“그것 괜찮네요. 그럼 그렇게 하죠.”
하나님께서는 영훈고 기독학생회를 ‘가스펠 부르기반’으로 정식 허락하셨다. 이 동아리에는 해마다 많은 학생이 몰려왔고 지난해에는 56명이 활동했다. 동아리 이름도 ‘가스펠 부르기반’ ‘가스펠 섬김이반’ ‘가스펠 워십반’ ‘가스펠반’ 등으로 변모해 지금까지도 학교에서 지속적으로 복음 전하는 사역을 감당하고 있다.
***[역경의 열매] 최관하 <12> 동아리서 시작한 순결서약 3년 만에 학교 행사로
한 학년 전체 축복송 부르며 서약식… 지금까지 모두 2800여명 서약 참여
2004년 7월 9일 영훈고 2학년 학생 540여명이 순결서약을 하는 모습. 순결서약식은 지금도 계속되고 있다.2001년 5월 19일 첫 순결서약식을 열었다. 개최 이유는 제자들과 이야기를 나누고 설문조사를 하면서 중요한 사실을 깨달았기 때문이다. 학생 10명 중 1명꼴로 성관계나 성에 관한 안 좋은 일을 경험하고 있었다. 우리 아이들을 이대로 둘 수 없었다. 한동대에서 청년들을 대상으로 실시하는 순결서약 프로그램을 벤치마킹해 청소년 눈높이에 맞춘 순결서약 프로그램을 만들었다.
초기에는 학교 옆 교회를 빌려 동아리나 학급별로 30∼50명의 학생을 초대해 순결서약식을 진행했다. 기독교학교가 아니기 때문에 당시 학교에서 기독교식으로 이런 행사를 진행하기엔 어려움이 많았다. 순결서약은 이미 순결을 잃은 학생들에겐 회복의 시간이요, 순결을 지키고자 하는 서약의 시간이며, 순결을 지키고자 할 때 피할 길을 달라는 간구의 시간이었다. 이런 의미를 담아서인지 순결서약식에 참여하는 학생들은 그 어느 때보다 진지했다.
하나님은 영훈고 학생들의 순결서약을 기쁘게 여기셨다. 교장 선생님의 마음이 움직였다. 2004년 7월 12일 1학년 학생 460명을 대상으로 영훈고 체육관에서 순결서약식을 개최했다.
이날 2학년 기독 학생들과 신우회 박수영 선생님이 ‘사랑은 언제나 오래 참고’를 은혜롭게 불렀다. 이어 교장 선생님의 축사가 있었다. 신성교회 이희수 목사님은 ‘순결의 중요성’에 대해 말씀을 전했고, 서약 시간이 이어졌다. 그리고 ‘순결배지 달아주기’ 시간에는 ‘순결’이라는 글자를 새긴 물고기 모양의 배지를 선생님이 학생들에게 달아주며 서로 안아주고 축복했다.
마지막 순서는 ‘당신은 사랑받기 위해 태어난 사람’으로 시작하는 축복송을 불렀다. 1학년 학생들은 미리 연습이라도 한 듯 힘차게 축복송을 불렀고 환하게 미소 지었다.
기독교학교가 아닌 영훈고에서 순결서약식을 통해 목사님의 메시지를 듣고 서로를 축복하는 찬양이 울려 퍼지다니…. 이 모습이야말로 하나님이 함께한 천국잔치가 아니고 무엇이겠는가.
순결서약에 대한 학교 예산이 잡혀 있지 않아 학교의 지원은 받지 못했다. 1·2학년을 대상으로 모두 행사를 진행하려면 최소 150만원이 필요했다. 그래서 기도하며 매달렸다. 동역자들에게 기도 요청문도 돌렸다. 기도하는 가운데 동역자들이 감동의 메시지와 함께 순결서약에 필요한 물질을 보내줬다. 특히 신성교회에서는 288만원이라는 적지 않은 돈을 보내왔다. 금요 심야기도회 때 목사님께서 기독교학교가 아닌 영훈고에서 펼쳐지는 이 놀라운 역사하심에 감동을 받아 성도들에게 권면하고 기도 요청도 하셨다는 말씀을 들을 수 있었다. 순결서약식을 마치고 교회로 돌아가시는 목사님께서 이렇게 말씀하셨다.
“선생님, 참 감사합니다. 영훈고의 복음화에 대한 기도를 언젠가부터 하나님께서 많이 시키십니다.”
“네, 목사님. 저도 기도하고 있어요. 하나님께서 그 비전을 꼭 이루실 것입니다.”
순결서약식은 지금도 계속되고 있다. 지금까지 순결서약에 참여한 학생을 헤아려보면 2800명 정도 된다. 학교 여건상 전교생을 대상으로 하지는 못하지만 하나님께서 허락하신 대로 학급별, 동아리별로 진행하고 있다. 앞으로도 하나님의 은혜 가운데 계속될 것이라고 믿고 있다. 할렐루야!
***[역경의 열매] 최관하 <13> 순결서약 등 ‘10대 프로젝트’ 하나님이 주셔
2004년 ‘제1회 영훈기독인대회’ 개최… 합심기도회 통해 학원 복음화 간구
최관하 교사와 기독학생들이 2004년 7월 15일 서울 송천동 신성교회에서 열린 ‘제1회 영훈기독인대회’에서 참석자들을 축복하고 있다.2004년 하나님께 기도하는 가운데 영훈학원에 주신 비전의 핵심은 이것이다.
‘일어나 빛을 발하라’ ‘사랑이 넘치는 학교’ ‘가정 같은 학교, 가족 같은 스승과 제자’ ‘섬김과 봉사의 장’ ‘시대를 섬기는 일꾼’ ‘선한 영향력을 미치는 미래의 일꾼’ 등이다.
하나님은 특히 10개의 구체적인 프로젝트를 주시며 기도하게 하셨다. 그것은 학교홍보와 교사들의 양육, 순결서약, 학생의 영적 양육 그리고 가정회복을 위한 아버지학교, 어머니학교, 가정세미나, 학부모기도회 운영 등이었다.
궁극적으로 하나님의 비전을 이룰 수 있도록 영훈학원의 복음화를 위해 계속 기도하라고 하셨다.
하나님께서 이것들을 언제 어떤 방법으로 이루어 가실지는 누구도 모를 일이었다. 하지만 하나님이 허락하신 복음의 비전을, 믿음의 눈으로 바라보고 나아가는 것은 소망을 잃지 않음이요, 바라는 것들의 실상을 이뤄드리는 일이었다.
능력의 하나님께서는 10가지 프로젝트 중 두 가지를 한 학기 내에 이루셨다. 첫째는 순결서약식을 전교생을 대상으로 진행하게 한 것이고, 둘째는 ‘제1회 영훈기독인대회’를 허락하신 것이었다.
영훈기독인대회는 말 그대로 영훈을 둘러싸고 있는 기도의 동역자들이 한 자리에 모여 영훈학교를 위해 기도하는 자리였다. 하나님께서는 연초에 요한복음 15장 4절의 말씀을 허락하시며 기도하게 하셨다. “내 안에 거하라. 나도 너희 안에 거하리라.”
그해 5월부터 영훈기독인대회를 준비했다. 기독 학생들은 찬양과 워십, 율동 등을 연습했고 기독동문회가 주관해 플래카드와 순서, 식사, 프로그램, 초청장 등을 준비했다.
안티 세력에 대해 영적 민감함을 구하는 기도도 늦추지 않았다. 하나님께서는 첫 영훈기독인대회에 대해 ‘가족 같은 평안함으로 하라’는 음성을 들려주셨다.
7월 15일 드디어 학교 인근에 있는 신성교회(이희수 목사)에서 ‘제1회 영훈기독인대회’가 열렸다.
먼저 졸업생인 차인화의 인도로 기독학생들의 찬양, 워십, 율동이 한 시간 정도 진행됐다. 이미 찬양으로 마음을 활짝 열고 우리는 하나가 돼 있었다. 성령님께서 온전히 주장하시는 시간이었다. 김재록 동문의 대표기도에 이어, 학부형이신 갈보리교회 양인모 목사님의 메시지가 선포됐다. 중간 중간 그동안의 활동상을 담은 동영상과 사진을 소개했다.
이어 영훈고를 위해 기도하는 중보기도자, 기독동문회, 기독학부모회, 기독교사신우회, 기독학생회를 차례로 소개했다. 100여명 동역자들의 모임은 한마디로 축제였다.
그리고 합심기도회를 통해 학교의 회복과 학원 복음화를 간구했다. 교사와 학생들을 위해서도 기도했다. 모두 눈물을 흘렸다. 무릎을 꿇고 기도하는 사람도 있었다. 나는 기도회를 인도하며 이렇게 말했다.
“여러분, 오늘은 여러분들이 할 수 있는 최고의 기도를 해주십시오. 소리를 높이고, 두 팔을 들고, 무릎으로, 눈물로 기도해주십시오. 여러분들의 기도로 영훈학교가 살아나며, 학교가 온전히 회복될 것입니다. 여러분들과 제가 드리는 오늘의 기도가 이미 응답된 줄로 믿습니다.”
이날 자리에 참석한 한 분은 이렇게 소감을 말했다.
“선생님, 정말 좋았습니다. 집회가 이렇게 편안하고 감동이 있을 줄은 몰랐습니다. 큰 은혜를 받았습니다.
***[역경의 열매] 최관하 <14> 학교 앞 호프집 ‘접수’해 영훈선교센터로 바꿔
“학교 가까이 선교센터 세우라” 음성… 한 학생의 2만원 헌금 ‘오병이어’로 필요한 개설 자금 모여
2006년 4월 1일 영훈선교문화센터 창립예배를 드린 뒤 동역자들과 찍은 사진. 이 자리에는 기독학생과 동문, 교사, 학부모, 중보 기도자들이 함께했다.기도 가운데 학교에서 가장 가까운 곳에 ‘선교센터를 세우라’는 하나님의 음성을 듣게 됐다. 다음세대 아이들은 학교나 교회 가정에만 있는 것이 아니라는 것, 그래서 밖으로 배회하는 청소년을 흡수할 수 있는 여과 장치가 필요하다는 것을 깨닫게 하신 것이다.
하나님의 음성에 순종했다. 그리고 학교 근처에 임대할 수 있는 공간이 있는가를 찾아봤다. 동역자와 함께 1년 남짓 기도할 무렵, 하나님께서는 한 장소를 허락하셨다.
2006년 4월 1일 학교 앞에 ‘영훈선교문화센터’(약칭 영훈센터)를 세웠다. 보증금 2000만원을 주고 89㎡ 공간을 얻었다. 월세는 108만원이었다. 보증금은 뒤에서 늘 기도로 응원해주시는 한 장로님께서 헌금해주셨다.
그리 크지 않은 공간이었지만 기독학생들의 예배와 학급초청 예배, 아이들의 쉼터 역할을 충분히 해냈다. 영훈센터를 설립한 지 4년쯤 지났을 무렵 한 남학생이 학교 앞을 지나는 내게 다가와 물었다.
“선생님, 저게 뭐예요?”
그 아이가 손으로 가리키는 곳에 호프집이 하나 있었다.
“응, 저거는 왜?”
아이는 큰 소리로 말했다.
“선생님, 어떻게 학교 정문에서 100m도 안 되는 곳에 술집이 있을 수가 있어요?”
그랬다. 학교 앞에 떡하니 호프집 하나가 들어서 있었다.
“그래, 그렇구나. 그럼 우리 저거 접수할까?”
나는 ‘접수’라는 말을 잘 쓰곤 했다. 복음적이지 못한 곳을 복음으로 접수하는 것, 그것은 매우 신나는 일이 아닐 수 없었다. 즉시 기도 요청문을 만들어 동역자들에게 배포했다.
“기도 부탁드립니다. 술집을 접수해 청소년센터로 바꾸려고 합니다. 4000만원이 필요하고 여러 집기 등도 필요합니다.” 여러 동역자들이 기도하고 후원하겠다고 메일을 보내왔다.
그리고 어느 날, 고3 남학생반 수업 때였다. 이런 이야기를 전해 들은 한 남학생이 갑자기 뒷주머니에서 지갑을 꺼냈다. 그러더니 내게 2만원을 주며 말했다.
“선생님, 받으세요.”
“일한아, 이게 뭐니?”
“선생님께서 그러셨잖아요. 우리들을 위해 학교 앞에 있는 선교센터를 확장·이전하신다고요. 아니 호프집을 접수하신다고요.”
대견했다. 일한이의 2만원이 오병이어가 됐다. 다음날 한 분이 30만원, 그리고 퇴직을 앞둔 선생님 두 분이 각 200만원, 한 분이 500만원, 또 다른 한 분이 1000만원 등을 보내주시며 4000만원이 모였다.
결국 2011년 4월 6일 우리는 그 호프집을 접수하고 입성하게 됐다. 그리고 영훈센터 확장 이전과 북부 청소년쉼터를 창립하게 됐다. 매달 121만원의 월세는 동역자들이 보내주시는 헌금으로 충당했다.
영훈센터 창립 10주년 예배가 오는 4월 16일 예정돼 있다. 기독교학교가 아닌 영훈고에서 교내 활동뿐 아니라 학교 밖의 활동도 허락하시며 10년이 지나도록 복음을 전하도록 허락하신 하나님께 감사와 찬양을 올려드린다. 특히 영훈센터 건립과 운영을 위해 기도하며 귀한 물질과 자원봉사 등으로 함께하시는 동역자들에게도 깊은 감사의 말씀을 드리고 싶다. 할렐루야!
***[역경의 열매] 최관하 <15> “이사장에 복음 전하라” 또렷한 하나님 음성
마음 열고도 교회 안나가던 이사장님 ‘영훈 블레싱 데이’에서 “내년엔 더 성대하게 치르세요” 축사
2012년 11월 10일 서울 영훈고 소강당에서 열린 ‘영훈 블레싱 데이(Blessing day)’ 모습.“이사장실에 들어가라. 가서 만나라. 복음을 전하라.”
왜 이리 몰아치는 것일까. 기도할 때마다 하나님께서는 이런 음성을 또렷하게 들려주셨다.
2000년 초 꿈에서 이사장님을 뵈었다. 학교 교정에서 손을 흔들며 외롭게 서 계시던 모습을 잊을 수 없다. 이튿날 하나님께서 주시는 마음으로 이사장실을 찾아가 꿈 이야기를 하며 위로해 드리고, 매일 기도하고 있다고 말씀드렸다.
신앙이 없던 이사장님께서 학교에 처음 부임하시던 1980년 중반, 종교활동은 교내에서 어려웠다. 당시 기독학생들과 신우회 교사들은 학교 앞 교회를 빌려 예배를 드리고 있었다. 2000년에 들어서며 하나님께서는 영훈고에 다시 부흥의 불길로 축복하고 계셨다.
학교법인 영훈학원의 이사장님, 교육계 원로이며 어른이신지라 나 같은 평교사가 대하기 쉬운 분은 아니었다. 하지만 하나님께서는 이사장님을, 하나님을 만나지 못한 한 영혼으로 보게 하시며 긍휼한 마음을 주고 기도하게 하셨다.
1년에 두세 차례 이사장실을 방문했다. 그때마다 안부를 묻고 마음의 평안을 여쭈었다. 하나님을 만나시길 바라는 마음도 편지에 담아 드렸다. 그리고 뵐 때마다 이 말을 빠뜨리지 않았다.
“이사장님, 제가 이사장님을 위해 매일 기도하고 있습니다. 힘내세요.”
기도한다는 말에 이사장님은 한 번도 인상을 찌푸린 적이 없으셨다. 오히려 얼굴에 환한 미소를 띠고 계셨다. 어느 날 나는 이렇게 말씀을 드렸다.
“이사장님, 몇 주 전부터 이사장님을 위해 기도하는데 자꾸 이런 마음이 들었습니다. 물론 건강관리를 잘하고 계시지만 이사장님께서도 연로하시고 언젠가는 하늘나라에 가셔야 할 때가 오지 않겠습니까. 이제 예수님 잘 믿으시고 교회에 나가시라고 말씀드리고 싶어 뵈러 왔습니다.”
그 무엇이었을까. 가슴속에서 끓어오르는 울컥하는 자맥질 같은 것은….
하나님께서는 부드러움과 담대함을 가득 부어 주고 계셨다. 때가 되어 복음을 전하게 하시는 은혜에 나는 감격했다.
이사장님은 내게 한 사람의 구원받아야 할 영혼으로 각인됐다. 하나님께서 선택하신 영혼, 그 귀한 영혼으로 보인 것이다. 이사장님은 차츰 입을 열었다.
“알았어요, 최 선생. 나도 교회 나갈게요. 조만간.”
그렇게 말씀하신 이사장님을 그 후에도 계속 찾아가 복음을 전했다. 하지만 이사장님은 바로 교회에 출석하지는 않으셨다. 2012년 11월 기독동문회 주관으로 학교 소강당에서 ‘영훈 블레싱 데이(Blessing day)’ 행사를 열었다. 찬양사역자 소리엘, 옹기장이, 박광식 등이 출연했다. 이 자리에 참석했던 이사장님께선 인사말을 통해 이렇게 선포하셨다.
“내년부터는 학교 체육관에서 더 성대하게 하십시오. 참 보기 좋았습니다.”
그러나 이사장님은 2013년 영훈국제중 사건으로 3년6개월 형을 받으셨다. 현재 복역 중이시다. 나는 편지를 드리고 있다. 지금까지 드린 편지만 해도 100통은 족히 넘는 것 같다. 하나님께서는 기어코 이사장님으로 하여금 복음을 접하게 하실 것이고, 교회에 출석하게 하실 것이라고 믿는다.
***[역경의 열매] 최관하 <16> 기독교계 특목고에서 스카우트 제의받고 고민
“영훈 떠나야 하나요” 기도로 묻다가 영적싸움 피하려는 마음 발견… 회개
최관하 교사가 학교 생활에 힘들어 하는 제자를 부둥켜안고 기도하고 있다.2000년대 중반 여름, 낯선 이름의 이메일 한 통이 왔다. 한 특목고 교장 선생님께서 보내신 편지였다. 핵심은 특목고로 와서 함께 동역하자는 내용, 일명 ‘스카우트’ 제안이었다. 무시할 수는 없었다. 교장 선생님께서 정성스레 글을 쓰신 흔적이 역력했고, 무엇보다 기도하시는 분이라는 마음이 강하게 와 닿았다.
나는 한 달 가량 기도하고 연락드리겠다고 말씀드렸다. 그리고 기도에 들어갔다. 그러나 기도를 하면 할수록 ‘옮겨도 좋다’, 아니 ‘옮겨야 한다’는 확신이 서지 않았다. 여러 면에서 특목고는 여건이 좋았다. 일단 학생들의 수준이 높다는 점, 신앙을 겸비해 양육하고 시대의 지도자로 키울 수 있다는 점, 무엇보다 기독교학교이며 교장 선생님의 비전이 나와 같다는 게 호감이 갔다. 나는 이렇게 기도했다.
“주님, 제가 영훈고를 떠나야 합니까. 영훈고는 제 모교이고 지금까지 주님께서 허락하신 복음의 산지인데, 제가 움직여야 하는 것이 하나님의 뜻입니까.”
그 무렵 학교 안에서는 여러 기독 활동들이 왕성하게 이뤄지고 있었다. 특히 ‘영훈학원 40년사’라는 방대한 책을 집필하고 있었다. 이 책은 영훈초·중·고 연합 사료집으로 발간 예정일이 1년밖에 남지 않아 학교를 옮기면 중단될 수밖에 없는 상황이었다.
오전 7시 학교에 도착해 기술실로 가서 무릎을 꿇었다. 기도를 시작하는데 갑자기 가슴으로부터 ‘왈칵’ 치밀어 오르는 것이 있었다. 눈물이 쏟아졌다. 놀랐다. 하나님께서는 그때 회개의 영을 부어주고 계셨다. 영훈고는 영적 싸움이 무척 심한 곳이다. 믿음으로 이겨내고 있었지만 수년간 힘들었다. 그래서 이제는 기독교학교로 건너가 편안하게 생활하며 아이들을 양육하고자 하는 마음이 나도 모르게 내면에 깔려 있었다는 것을 발견했다.
얼마나 하나님께 부끄러웠는지, 죄송했는지 모른다. 눈물은 계속해 쏟아졌다. 그랬다. 하나님께서는 도피하려는 마음을 용납하지 않으셨다. 하나님께서 수고할 기회를 주시고 또 헌신하며 기도하게 하시는 것은 그 자체가 은혜라는 마음을 주셨다. 하나님은 힘들고 어렵게 사는 강북지역 우리 아이들을 더 감당하라는 마음을 부어 주고 계셨다. 회개하며 결단의 기도를 드렸다.
“주님, 부끄러운 마음을 가졌던 것 죄송합니다. 모두 다 은혜인 걸요. 주님이 가신 십자가의 길에 비하면 제가 뭐 그리 힘들겠습니까. 특목고에 가서도 할 일이 많고 또 귀한 일이지만 주님께서 마음을 주신대로 영훈고에서 더 사역하라는 뜻으로 감사히 전달받습니다. 그러니 주님, 더 힘을 주세요. 영훈학교를 복음화시켜 주시고, 영훈을 사용하셔서 이 땅의 학교들을 회복시켜 주세요. 참으로 어리석고 부족한 저이지만 끝까지 사용해주세요. 사랑합니다, 주님.”
하나님께서는 평강을 허락하셨다. 고난 가운데서도 끝까지 하나님의 사명을 다했던 예수 그리스도를 떠올리며 나 역시 ‘작은 예수’로 살기로 다시 한 번 결단했다. 그때 아침기도회에 참여하고자 하는 기독학생들이 하나둘 기술실로 들어오고 있었다.
***[역경의 열매] 최관하 <17> ‘가정의 회복’ 기도 5년 만에 아버지학교 열어
부모-자녀의 변화가 필수임을 깨달아 청소년감동캠프까지 가정사역 확대
최관하 교사(앞줄 왼쪽 네 번째)가 서울 북부아버지학교 제작진들과 함께한 모습. 그는 2002년 아버지학교 수료 후 아내와 함께 가정사역 강사로도 섬기고 있다.2002년 5월에 두란노 서부2기 아버지학교를 수료했다. 그 후 아버지학교 스태프로 봉사하다 지금은 아버지학교 강사로 활동하고 있다. 또한 서울 북부아버지학교 지도목사이기도 하다.
아버지학교에서 배운 ‘자녀를 사랑하는 20가지 이유’ 써보기를 매년 ‘아빠를 사랑하는 20가지 이유’ 써보기로 바꿔 학생들에게 과제로 내줬다. 그리고 아빠에게 읽어주도록 했다. 학생들의 고백을 들은 아빠들 반응은 다양했다.
“아빠가요∼ 먹을 것을 엄청 많이 사 주셨어요.” “아빠가 뜬금없이 용돈을 주셨어요.” “아빠가 통곡하며 우시는데 깜짝 놀랐어요.” “기분 좋다고 아빠가 치킨을 사주셔서 가족 모두 맛있게 먹었어요.”
눈물과 감동의 피드백을 받으면서 감사기도를 드렸다. “하나님, 우리 아이들의 가정을 회복시켜 주시옵소서. 학교 현장의 회복은 가정의 회복 없이는 되지 않습니다. 영훈고 안에서 학부모를 대상으로 하는 아버지학교를 허락해주세요. 아버지들의 회복이 필요합니다.”
이런 기도는 4년간 계속됐다. 하나님께서는 기도 가운데 지혜를 주셔서 먼저 ‘영훈 가정세미나’를 열도록 인도하셨다. 아버지들만 모이는 게 쉽지 않아 가정세미나라는 이름으로 학부모를 대상으로 계획을 잡은 것이다. 교장 선생님, 이사장님도 무척 좋아하시며 세미나를 허락하셨다.
2005년 5월 23일 오후 6시40분부터 영훈고 소강당에서 가정세미나를 열게 됐다. 아버지학교 본부장 김성묵 장로님과 어머니학교 본부장인 한은경 권사님 부부가 강의를 해주셨다. 약 300명의 학부모들이 몰려와 270석 규모의 소강당에 보조의자를 갖다 놓아야 할 정도였다. 행사가 끝난 후 설문조사를 했는데 99%가 긍정적인 반응이었다. 이 내용을 토대로 계속 기도하며 준비했다.
“하나님, 우리 학교에 학부형들을 대상으로 한 아버지학교를 허락해 주시옵소서.”
하나님께서는 2007년 1월 영훈고에서 80명의 학부형과 지역 주민을 대상으로 아버지학교를 열었다. 기독교학교는 아니지만 하나님께서는 기독교적으로 운영하기를 원하셨다. 여건도 좋지 않고, 난방도 안 되는 열악한 학교였지만 각 지방에서 아버지학교를 섬기기 위해 아버지 스태프들이 함께했다. 그들의 헌신적인 모습에 큰 감동을 받았다.
가정은 그물망처럼 연결돼 있어 아버지만이 아니라 어머니, 자녀도 함께 변화돼야 한다는 것을 하나님께서는 깨닫게 하셨다. 그래서 ‘부모와 자녀가 함께하는 청소년감동캠프’를 계획했다.
2010년 학교 앞 영훈센터에서 20가정 40명을 대상으로 ‘제1회 영훈 청소년감동캠프’를 개최했다. 2011년에도 14가정 28명을 대상으로 열었다. 하루 4시간짜리 프로그램으로 재구성해 진행했다. 특히 자녀가 부모의 발을 씻기는 세족식을 할 때 부모는 물론 자녀들도 모두 눈물바다가 됐다. 하나님께서는 막힌 담을 무너뜨리고 허물어진 것을 세워가는 가정회복을 이루고 계셨던 것이다.
나는 현재 아버지학교와 청소년감동캠프뿐 아니라 부부를 대상으로 하는 사역도 펼치고 있다. 아내 역시 어머니학교 강사로, 또 나와 함께 부부학교 강사로 섬기고 있다. 지속적으로 아버지학교와 어머니학교, 부부학교, 청소년감동캠프 등의 가정사역이 영훈고에서 펼쳐지기를 기도하고 있다.
***[역경의 열매] 최관하 <18> 초등학생이 “죽고 싶어요”… 집에 데려와 함께 생활
육체·정신적으로 아팠던 아이 강건하게 회복 뮤지컬 공부 중
보호시설의 어린이를 함께 돌보며 회복시켰던 우이제일교회 청년들과 함께한 모습. 최관하 교사는 우이제일교회 청년부 담당목사로 섬겼다.교직생활 20여년 중 가장 힘든 아이를 만난 것은 2012년 겨울. 그때 성이는 보호시설에 있었다. 수년전 지방으로 청소년들을 대상으로 한 개학부흥회 강의를 하러 갔는데, 성이는 초등학생으로 그 자리에 있었다. 내 강의를 들은 후 성이는 이메일로 연락을 해왔다.
“선생님. 저∼ 자살하고 싶어요. 죽고 싶어요.”
어려서부터 아버지로 인한 폭행과 엄마의 가출, 그리고 친오빠와 동네학생들의 집단 폭행 등이 원인이었다. 아이가 ‘죽고 싶다’는 말을 해올 때마다 이렇게 말했다.
“선생님이 너를 보러 갈 때까지 절대 죽지 말아 다오.”
지방에 강의가 있을 때면 성이를 찾아가 격려하고 기도했다. 성이는 물도 제대로 먹지 못할 정도로 육체에 이상이 있고, 정신적으로도 어려움이 많았다. 다만 실낱같이 하나님의 이름을 부르고 매달렸다.
2012년 11월 말 이 아이는 무작정 상경해 나를 찾아왔다. 나는 밥을 먹이고 이 아이를 어쩌나하며 기도했다. 시설에 보냈는데 계속 뛰쳐나왔다. 성이는 학교를 다니고 싶고, 따뜻한 집에서 살기를 원했다. 기도 가운데 하나님께서는 내게 말씀하셨다.
“네가 맡아라.”
말씀에 순종해 2년 가까이 우리 집에서 함께 살았다. 성이는 시도 때도 없이 쓰러지고 자빠졌다. 하루는 일곱 번을 쓰러진 적도 있었다. 그때마다 낮 밤 새벽 할 것 없이 응급실로 뛰었다.
힘든 나날을 보낼 때 하나님께서는 귀한 동역자를 붙여주셨다. 바로 북부범죄피해자지원센터의 송귀채 사무총장이다. 송 총장은 교육청에 아이의 사정을 말하고 영훈고에 입학시켰다. 동사무소 전입신청 및 병원연결과 1200만원의 병원비 대부분을 지원해 주었다. 이분의 섬김이 없었다면 나 홀로 성이를 감당하기 어려웠을 것이다.
성이는 그해 겨울 자기 생일에 아버지에게 울면서 전화를 했다.
“아빠, 나를 낳아줘서 고마워요.”
엄마에게도 전화를 했다.
“엄마, 나를 낳아줘서 고마워요.”
그리고 후회했다. ‘나를 버린 아빠 엄마를 왜 사랑한다고 했을까’라며…. 아이는 커터칼로 손목을 그었다. 나는 또 응급실로 뛰었다. 다행히 상처는 깊지 않았다. 하지만 이튿날 성이는 또 손목을 그었다. 그렇게 일주일 사이에 네 번이나 그랬다. 과거의 트라우마가 아이를 힘들게 할 때마다 나는 울며 기도했다.
내가 섬기던 우이제일교회 청년들이 성이 옆에 있어주며 돌봤다. 한 아이를 살리기 위해 동역해준 교회 청년들에게 그저 감사할 따름이다.
학교에서는 성이를 태운 휠체어를 밀고 다닐 때도 있었다. 동료 교사들이 아이의 사정을 알고 옷과 용돈, 먹을 것을 챙겨줬다. 감사했다. 상황은 힘들었지만 성이를 포기할 수는 없었다. 1년 10개월이 지났을 때 성이는 수업 일수가 모자라 자퇴했다. 그리고 검정고시로 고등학교를 졸업했다.
이후 하나님께서는 성이를 회복시켜 주셨다. 성이는 현재 영적으로 정신적으로 온전히 회복된 상태다. 육체도 강건하게 회복됐다. 지금은 뮤지컬공부를 하며 열심히 비전을 찾아가고 있다. 한 영혼을 포기하지 않게 하시고 기도 가운데 성이를 회복시켜 주신 하나님을 찬양한다.
***[역경의 열매] 최관하 <19> 영훈센터 관련 근거 없는 기사 때문에 오해도
확인도 없이 ‘학부모에 돈 요구’ 보도… 감사관에 통장내역 제시 혐의 벗어
최관하 교사(오른쪽)가 2013년 6월 4일 자신의 시가 새겨진 영훈고 모교사랑비 앞에서 동문들과 함께했다.2013년 영훈학원 안에는 이해하기 힘든 일이 일어났다. 크고 작은 교육청 감사가 연속으로 진행됐고, 은사님이었던 교장선생님이 횡령사건으로 도중하차하는 사건도 일어났다. 학교 내 문서위조 사건도 발생했다.
나는 위기상황을 놓고 기도하다 교장선생님을 위한 탄원서를 썼다. 직원회의 때 발표하고 선생님들께 서명을 부탁했다. 80%가 넘는 선생님들이 탄원서에 서명했다. 교장선생님은 나중에 무죄로 판명 받았다.
그런데 이 모든 사건이 학교 내 어떤 분의 개인적 욕심 때문에 벌어지고 있다는 말이 돌았다. 그와 관련해 교사모임이 만들어졌고 정확한 파악에 나서게 됐다.
얼마 뒤 한 신문사 기자에게 전화가 오기 시작했다. 모르는 번호라 받지 않았다. 그런데 인터넷에 기사가 떴다. 내가 명함에 적어놓은 계좌로 학부모들에게 돈을 요구했고, 학교 앞 영훈센터를 사들였다는 내용이었다. 강제로 종교편향적 교육을 학생들에게 했다는 내용도 있었다. 나는 그 신문과 인터뷰한 적이 없었다. 그 기사는 다른 언론으로 전혀 퍼지지 않았다. 사실이 아니었기 때문이다. 당시 영훈기독동문회와 동역자들은 매일 나를 위해 눈물로 기도했다.
영훈국제중의 비리에 대한 감사가 진행될 때 나도 기사 때문에 감사를 받았다. 5년 동안 개인 통장과 영훈선교회 공동 통장의 내역을 감사관에게 상세히 뽑아주었다. 당시 명함의 계좌는 선교활동을 위한 것이고, 선교센터는 산 것이 아니라 월세가 121만원씩 지출되고 있었다. 또 우리 학교에는 정식 기독동아리 ‘가스펠반’이 있어 종교활동을 강제로 한 것도 아니었다.
이 신문사는 다음 날 기사를 30%만 남기고 나머지 내용을 삭제했다. 재학생들과 졸업한 제자들이 나를 변호하는 댓글을 600여개나 달았다. 댓글을 읽으며 아이들의 사랑을 느끼고 눈물을 얼마나 많이 흘렸는지 모른다. 이 과정에 분명히 하나님의 섭리가 있으리라 믿었다.
기사가 나간 다음 날 선생님들은 자체 직원회의를 열었다. 그리고 하나가 됐고 몇 분의 선생님은 분통의 눈물을 흘렸다. 두 달 뒤 감사결과가 나왔다. 영훈국제중 사건과 관련된 분들은 검찰에 기소됐지만 내겐 아무 일도 일어나지 않았다.
하나님께서는 영훈학원을 놓고 기독동문들과 함께 더욱 기도하게 하셨다. 하나님의 분명한 뜻이 있으리라 믿었다. 그 무렵 국제중 교감선생님이 자살을 하는 안타까운 사건이 발생했다. 3주 전에 찾아갔을 때 나는 검찰 조사를 다녀온 교감선생님께 이렇게 말했었다.
“교감선생님, 죽지만 마세요. 버텨내세요.” 그분은 고등학교 교감을 지내셨고 성실한 분이었다. 그런데 당시 사건으로 매우 힘겨워하고 있었다.
주일에 교회를 다녀온 후 학교에 있었는데 법인실에서 급한 연락이 왔다. 달려갔더니 교감선생님이 국제중 현관 2층 난간에 매달린 채 숨져 있었다. 나는 수사관들에게 외쳤다.
“왜 저렇게 놔두세요. 빨리 내려주세요.”
전화로 보호자의 동의를 받은 뒤 수사관이 줄을 위에서 끊었다. 나는 교감선생님을 조심스레 안아 내렸다. 현관에 눕혀 놓고 이마에 손을 얹고 기도했다. 가슴이 찢어질 듯했다. 눈에서는 눈물이 솟구치고 자맥질 같은 울음이 터져 나왔다.
***[역경의 열매] 최관하 <20> 영훈학원, 관선이사 파견으로 새 운영자 물색
“다음 운영자는 교회로” 중보기도 시작… 인수자로 오륜교회가 최종 승인돼
지난 12일 서울 오륜교회 금요심야기도회에서 김은호 오륜교회 목사와 함께한 최관하 교사(왼쪽).2013년부터 3년간 영훈학원은 50년 역사 속에 가장 큰 어려움을 겪었다. 하지만 하나님께서는 기도할 때마다 조금도 염려하지 말라는 마음을 부어주셨다.
북이스라엘과 남유다가 죄악을 저지를 때 회개하지 않아 각각 아수르와 바벨론을 통해 징계를 받았던 말씀을 생각나게 하셨다. 그리고 징계 후에 다시 회복시키시고 세워 가시는 하나님의 마음을 기대하게 하셨다.
학원 이사장님은 옥중생활을 시작했다. 초·중·고등학교의 관리자들이 잇따라 바뀌었다. 세 분의 국제중 선생님이 퇴직하게 됐고, 여러 행정 직원들도 학교를 떠나야만 했다. 영훈학원에는 관선이사들이 파견됐다.
나는 쉴 새 없이 하나님의 음성을 듣고자 했다. 이것이 끝이 아니라는 마음 때문이었다. 무너진 것을 회복시키시고, 막혔던 담을 무너뜨리는 하나님을 부르며 동역자들과 함께 기도했다.
그 무렵, 옥중에 계신 이사장님께서 결단을 내렸다. 영훈학원의 재정 기여자(인수자)를 찾는다는 광고를 냈다. 그 광고를 보고 세 곳에서 서류를 받아갔다고 했는데, 그중 한 곳이 ‘교회’라고 했다.
그 말을 듣는 순간 학교 5층 음악실로 올라가 부르짖으며 이렇게 기도했다. “하나님, 이단은 안 됩니다. 우리 영훈학교가 어떤 학교입니까. 이단이 절대로 인수해서는 안 됩니다.”
그리고 얼마 후 나는 서류를 받아간 교회가 김은호 목사님께서 시무하시는 서울 강동구 오륜교회라는 사실을 확인하고 안도의 한숨을 쉬었다. 그리고 하나님께 감사의 기도를 드렸다. 그것은 오륜교회가 대형 교회이면서도 매우 건강한 교회로 알려져 있었기 때문이다.
하지만 오륜교회가 영훈학원을 인수하는 것은 그리 쉬운 일이 아니었다. 무엇보다 종전 이사진의 승인이 있어야만 했다. 결국 하나님께 기도하는 수밖에 없었다.
하나님의 계획이 영훈학원의 다음 운영자가 있어야 한다면 다른 기업이나 개인보다 교회가 운영하는 것이 하나님의 뜻이라는 확신으로 기도하며 나아갔다.
치열한 영적 싸움과 여러 보이지 않는 술수들이 난무했다. 드러나지 않는 싸움이 이어졌다. 하지만 그럴 때마다 하나님께서는 강한 마음을 주시고 중보기도를 하게 하셨다. 학교 관리자들과 선생님들을 만나 격려하고 손을 붙잡고 기도했다. 그리고 옥중의 이사장님께 계속 편지를 보냈다.
“이사장님, 인내하세요. 지금의 상황은 동굴이 아니라 터널입니다.”
이사장님께서는 결국 오륜교회로 마음을 정하셨다. 그리고 이렇게 말씀하셨다고 한다.
“대기업이 학교를 운영하다 망하면 학교까지 망하지만 내가 보니까 오륜교회는 절대 망할 교회는 아닌 것 같다. 그래서 나는 교회로 정하겠다.”
이 말을 전해 듣고 참 많은 눈물을 흘렸다. 하나님께서 그분의 마음을 주관하신다는 확신이 들었다. 2015년 12월 28일 영훈학원의 인수자가 교육부의 최종 승인으로 오륜교회로 확정됐다.
나중에 안 사실이지만 오륜교회에서도 11월 ‘다니엘 세이레 기도회’를 하며 하나님께서 영훈학원을 선물로 허락하신 것이라고 믿었다고 했다.
하나님께서는 오륜교회를 통해 영훈학원을 기독교적으로 운영토록 역사하셨다. 2000년부터 5명의 학생과 음악실에서 월요일 아침마다 학교 발전을 위해 부르짖게 하신 하나님께서 하나님의 때에, 하나님의 방법으로 기도에 응답하신 것이다. 할렐루야!
***[역경의 열매] 최관하 <21·끝> 영훈학원 미션스쿨 변화는 15년간 기도의 응답
오는 27일 영훈학원 창립 51주년 맞아 학교 강당서 ‘영훈오륜교회’ 첫 예배
지난 12일 서울 오륜교회에서 열린 금요심야기도회에서 최관하 교사가 간증하는 모습.오륜교회가 영훈학원의 인수자로 확정된 뒤 학교는 변화하고 있었다. 영훈학원이 미션스쿨로 바뀐다는 것은 사실 엄청난 하나님의 역사하심이라고 할 수밖에 없다. 어려워진 학교를 돈 많은 교회가 인수하는 정도가 아니었다. 하나님께서 15년 만에 기도 응답을 하셨다는 사실에 놀랐고, 신실하신 언약의 하나님을 찬양하지 않을 수 없었다.
지난 4일 영훈초·중·고등학교의 신우회 선생님들이 연합찬양을 준비했다. 같은 달 12일 오륜교회 금요심야기도회에서 특송을 하도록 초청받았기 때문이었다. 20여년 만에 영훈의 초·중·고 교사들이 함께 하나님을 찬양하는 것은 매우 고무적인 일이었다.
드디어 오륜교회 금요심야기도회 날, 영훈학원 관계자와 교사, 행정직원들이 삼삼오오 참석했다. 찬양팀의 찬양, 새 이사진 소개, 초·중·고 교장선생님의 인사 등으로 순서가 진행됐다. 그리고 내 간증시간, 하나님께서 그동안 행하신 일들을 1시간20분가량 하나하나 증거했다.
그 자리에 참석한 2000여 성도들은 영훈학교에 역사하신 하나님의 은혜를 들으며 웃기도 했고, 아픔을 나눌 때는 같은 마음으로 공감의 눈물도 흘렸다. 오륜교회가 영훈학교를 운영하는 것에 대한 잘못된 보도와 잡음으로 인한 갈등이 다 해소되는 듯했다. 하나님께서는 하나의 영으로 모두를 묶어가고 관계를 회복시키고 계셨다.
간증 도중 하나님의 마음으로 ‘희년’을 선포했다. 50년 영훈학원의 역사는 아픔이었지만 51년을 향하는 이때, 하나님께서 오륜교회와 연계토록 하시며 새 희망을 부어주실 것임을 강조했다. 강북지역의 영적 회복을 오륜교회와 영훈학원을 통해 이루실 것이라고 선포했다. 성도들은 한목소리로 ‘아멘, 할렐루야’를 거듭 외쳤다.
같은 달 19일, 오륜교회 김은호 목사님과 새 이사진이 영훈고의 선생님들과 워크숍을 갖고 앞으로 비전을 나누었다. 하나님께서는 이 만남을 통해 영훈고 선생님들의 마음에 위로와 평강을 가득 부어주셨다. 또 다음세대를 향한 가정과 교회, 학교의 연합 필요성을 목사님의 입술을 사용하셔서 절감토록 하셨다. 워크숍이 끝난 뒤 몇몇 선생님이 나를 찾아왔다. 한 선생님이 이렇게 말했다.
“선생님, 저는 그동안 교회를 안 다니려고 이리저리 도망을 다녔는데, 오늘 하나님께서 마음을 강하게 이끌어 주셨어요. 선생님, 저 이제부터 교회에 나갈 거예요.”
오는 27일은 영훈학원 창립 51주년 되는 날이다. 부활주일이기도 하다.
이날 ‘영훈오륜교회’ 첫 예배가 영훈학교 강당에서 열린다. 앞으로 하나님이 매주 베푸실 예배에 대한 기대가 크다. 교회학교는 교실과 영훈센터에서 진행된다. 감격스러운 일이 아닐 수 없다.
학원을 복음화하고 학교 안에 교회가 서게 해달라는 기도에 한 치의 오차도 없이 응답하시며 영광 받으시는 하나님을 찬양한다. 영훈학원의 전 이사장님께서도 이제 ‘영훈오륜교회’에서 예배드리도록 하나님께서 역사하실 줄 믿고 기도드린다. 비기독교 학교인 영훈학원에서처럼 하나님의 놀라우신 역사가 오륜교회와 함께 나아가는 길에도 계속될 것이라고 굳게 믿는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