내 종 싹을 나게 하리라
스가랴 3:1-10
좋으신 주님의 은총과 평화가 우리 가운데 함께하시기를 빕니다. 오늘은 사순절 세 번째 주일입니다. 사순절은 근본적으로 예수 그리스도의 고난과 십자가 죽음을 기억하는 절기입니다. 예수를 그리스도로 고백하고 그의 제자로 나선 이들을 기독교인이라고 한다면 신자들은 당연히 그런 고난에 동참해야만 합니다. 그 방법으로 교회 전통은 사순절 기간에 금식을 했습니다. 금식 습관은 인간의 가장 강렬한 본능인 식욕을 억제하는 방식으로 고난에 동참하는 행위입니다. 그리고 사순절 기간에 신자들은 구제와 선행에 힘을 썼습니다. 구제와 선행은 자기와 자기 가족만을 위한 생존 본능을 제어하는 신앙 태도입니다. 말하자면 ‘더불어’ 살아가는 삶의 차원으로 영적인 시야를 넓히는 것이라 할 수 있습니다. 이러한 것들은 기본적으로 자기부정을 가리킵니다. 자기를 부정하는 사람만이 하나님 나라에 합당하다고 했습니다. 이번 사순절이 철저한 자기부정을 훈련하고 경험하는 의미 있는 여정이 되기를 바랍니다.
모든 것이 불확실한 이 시대를 살아가느라 얼마나 힘겨우십니까? 이리 채이고 저리 채이는 동안 우리 영혼에는 시퍼런 멍이 들었습니다. 그 때문인지 사람들의 표정이 이전보다 어두워졌습니다. 가식 없는 천진한 웃음과 만나기 어려운 시대입니다. 그늘이 없는 사람이 없습니다. 누구라도 툭 건드리면 금방이라도 울음을 터뜨릴 것 같은 나날입니다. 직장생활을 하는 분들의 애환을 들으면 가슴이 먹먹합니다. 경제 상황이 좋지 못하다 보니 직장에서 살아남기가 매우 어렵습니다. 기업의 경쟁력을 높인다는 미명 하에 해고를 쉽게 하도록 법을 고치고, 필요한 인력은 비정규직 또는 하청 업체에 맡기는 것이 일반적인 관행이 되었습니다. 많은 사람들이 명예퇴직이라는 허울 좋은 구실로 퇴직을 하고 자영업에 뛰어들기도 합니다. 대부분 음식점이나 치킨집을 하는데 생존율은 10%라고 합니다. 그렇게 힘겨운 상황 속에서도 기어코 기독교인다움을 유지하기 위해 애쓰는 이들을 보면 그저 감사할 따름입니다. 이렇게 애를 쓰는 사람이 많음에도 오늘의 개신교회는 사뭇 매를 맞고 있습니다.
지난 2013년, <기독교윤리실천운동>이 실시한 ‘한국교회의 사회적 신뢰도 여론조사’ 결과에 따르면 3대 종교(개신교, 가톨릭, 불교) 가운데 개신교에 대한 신뢰도가 가장 낮게 나왔습니다. 종교인들 가운데는 겨우 20%가 개신교를 신뢰한다고 말했고, 종교를 갖지 않은 사람들 가운데는 오직 8%만이 신뢰한다고 대답했습니다. 이게 10년 전의 조사 결과인데, 과연 지금은 어떨까요? 그 이후로 이런 조사를 했다는 소리를 못 들었는데 그 이유가 혹시 결과에 대한 두려움 때문이 아닐까 싶은 생각이 듭니다. 참담한 현실입니다. 이게 우리의 현주소지 하면서도 가슴이 쓰린 건 사실입니다. 개신교가 사회봉사에 가장 열심이라는 것을 인정하면서도 신뢰도가 그렇게 낮은 것은 전적으로 목사들 책임입니다. 책임을 통감합니다. 바르게 살고, 바르게 선포하고, 바르게 가르치고, 바른 실천의 길을 제시하지 못했기 때문입니다. 요즘 들어 자주 이런 질문이 듭니다. 하나님은 정말 한국 개신교회를 버리시려는 것일까? 저는 이런 쓰린 마음을 안고 오늘의 본문을 읽었습니다.
스가랴는 바벨론 포로 생활에서 귀환한 공동체가 전쟁으로 인해 무너졌던 성전을 재건함으로써 하나님의 백성으로서의 정체성을 재확인하려던 시기에 활동하던 예언자입니다. 스가랴는 '여호와께서 기억하신다'는 뜻입니다. 그는 바벨론에 잡혀갔던 제사장 가문 출신으로 성전 재건이 시작되던 시기에 예언자로 부름을 받았습니다. 그는 성전 재건을 진두지휘하던 스룹바벨 총독에게 큰 기대를 걸었던 것 같습니다. 성전만 재건되면 세계 질서가 재편될 것이라고 믿었습니다. 페르시아의 세계 지배는 끝장이 나고 하나님께서 시온에 좌정하여 세상을 다스릴 날이 올 것이라고 기대했습니다. 그는 영적으로 민감한 사람이었습니다. 그래서 그는 여러 예언자들 가운데 가장 많은 비전을 본 사람입니다. 그 비전들은 엄혹한 시기를 지나고 있는 백성들을 위로하고 힘을 북돋고, 또 때로는 하나님께 신실하지 못한 백성들을 준엄하게 꾸짖으며 새로운 삶을 독려하는 내용이었습니다. 그 비전을 바르게 해석하기란 여간 어려운 게 아닙니다. 그래서 스가랴서는 성경 66권 중에 가장 어려운 책 가운데 하나입니다.
오늘 우리가 읽은 본문은 스가랴가 보았던 네 번째 비전입니다. 앞서의 세 비전은 실의에 빠져 있던 시온과 그 백성을 위로하고, 에스겔과 제2이사야를 통해 주신 약속을 반드시 이루실 것임을 확신시키기 위해 주어졌습니다. 첫 번째 비전에서 하나님은 그의 백성들을 불쌍히 여기셔서 무너졌던 당신의 집을 다시 세우시겠다 말씀하십니다. 그러니까 성전 건축은 성전을 건축하여 하나님께 바치려는 사람들의 의지가 아니라 그 백성을 만나시기 위해 세우시려는 하나님의 의지라는 것입니다. 두 번째 비전은 하나님께서 그의 백성을 괴롭혔던 주변의 교만한 나라의 뿔을 꺾으실 것임을 예고합니다. 세 번째 비전은 하나님께서 스스로 불 성벽이 되어 그 백성을 눈동자처럼 지켜주시리라는 환상이었습니다.
네 번째와 다섯 번째 비전은 새로운 시대를 이끌 영적 지도자와 정치 지도자와 관련된 것입니다. 오늘 본문 이후에 나오는 스가랴가 보았던 금으로 만든 등잔대 양쪽에 서 있던 두 그루 감람나무 즉, 올리브나무가 바로 그 상징입니다(4:2~3). 천사는 그 올리브나무가 “온 세상을 다스리시는 주님을 섬기도록, 주님께서 기름 부어서 거룩히 구별하신 두 사람”(4:14)이라고 일러줍니다. 한 사람은 정치 지도자를 상징하고, 한 사람은 종교 지도자를 상징하는 것입니다. 정치 지도자 못지않게 종교 지도자가 귀환한 이스라엘 공동체에 중요한 리더십임을 보여주고 있습니다. 외세에 의해 왕정이 무너진 후 대제사장의 역할이 더욱 커졌습니다. 특별히 고단한 유배 생활 가운데서도 백성들이 소망을 잃지 않도록 격려하고 그들이 전통을 굳게 지키도록 독려한 것이 사제집단임을 생각해보면 납득이 될 것입니다.
오늘 본문은 마치 연극 무대를 보는 것처럼 입체적입니다. 무대는 하나님의 보좌가 있는 하늘궁전입니다. 스가랴는 관객이 되어 그 광경을 바라봅니다. 우리는 마치 거울의 방에 들어간 것처럼 그 광경을 또 보고 있습니다. 참 재미있습니다. 하나님의 보좌 앞에 천사들이 줄지어 서 있습니다. 놀라운 것은 그 자리에 사탄의 자리도 있습니다. 욥기의 산문 부분도 하늘 회의 장면에 사탄을 등장시킵니다. 하늘 회의에 참석하는 사탄은 우리를 위협하는 영적 실체로서의 악마나 귀신과는 좀 다릅니다. 사탄의 뜻은 ‘참소하는 자’입니다. 뭔가 트집을 잡는 자가 사탄이라는 말입니다. 하나님의 판단에 대해 이의를 제기하는 역할을 합니다. 욥기에서 하나님은 사탄에게 물으십니다. “너는 어디에서 왔느냐?” 그러자 사탄은 “세상 이곳저곳을 두루 돌아다니다 왔습니다”라고 대답합니다. 사탄은 세상을 두루 돌아다니는 자입니다. 세상을 두루 돌아다니는 그는 누구보다 세상 현실에 대해 잘 안다고 자처합니다. 그런 의미에서 볼 때 세상 현실에 대해 모르는 것이 없는 것처럼 처신하는 사람은 사탄과 통하는 사람이라고 봐도 무방할 것입니다. 그런데 그 사탄이 지금 하나님 앞에 서서 누군가를 참소하고 있습니다. 바로 그 자리에 배석하고 있었던 대제사장 여호수아입니다. 여호수아가 하늘 회의에 참석하고 있다는 사실도 대단히 놀랍습니다. 당시에 대제사장이 얼마나 중요한 인물로 인식되었는지를 알 수 있는 대목입니다.
그런데 스가랴는 뜻밖의 말을 합니다. 대제사장 여호수아는 냄새나는 더러운 옷을 입고 서 있더라는 것입니다. 여기서 ‘냄새나는 더러운 옷’이라는 표현은 아주 점잖게 번역된 말입니다. 이것을 원어의 의미에 맞게 번역을 하자면 ‘인분이 묻은 옷’입니다. 그 말은 그의 행실이 그렇게 아름답지 못하다는 사실을 암시합니다. 대제사장으로서 마땅히 해야 할 역할을 하지 못하고 인간적인 탐욕으로 어두워진 사람임을 보여 주는 대목입니다. 사탄은 아마도 여호수아 대제사장을 처벌해야 한다고 하나님께 아뢰었던 것 같습니다. 사탄의 참소는 근거 없는 것이 아닙니다. 하지만 하나님은 뜻밖의 말씀을 하십니다. “사탄아, 나 주가 너를 책망한다. 예루살렘을 사랑하여 선택한 나 주가 너를 책망한다. 이 사람은 불에서 꺼낸 타다 남은 나무토막이다.”(3:2) 여호수아의 부적절한 처신과 삶을 고발한 사탄은 칭찬이 아니라 책망을 받습니다. 조금 억울하겠습니다. 사탄의 문제가 무엇이었습니까? 물론 사탄은 모든 것이 다 문제라고 하면 할 말이 없습니다만, 여기서 사탄의 문제는, 사탄은 세상에 대해 잘 안다고 자부했지만, 하나님이 어떤 분이냐에 대한 이해는 깊지 못합니다. 사탄은 인과응보의 논리에 따라 상과 벌을 주시는 하나님만 알지, 누군가를 사랑하여 애를 태우시는 하나님은 알지 못합니다. 사탄은 그런 겁니다. 사탄은 일종의 원리입니다. 그런데 그 원리는 따뜻한 마음이 없는 원리입니다. 죄지은 사람은 벌을 받아야 하고, 아름다운 사람은 상 받아야 한다는 것만 알지, 죄지은 사람 때문에 애를 태우시는 하나님의 마음은 알지 못합니다. 이것이 사탄과 하나님의 차이입니다. ‘예루살렘을 사랑하여 선택한’ 하나님은 여호수아 대제사장의 허물과 죄를 모르지 않지만 그를 쉽게 버리지도 않으십니다. 그래서 그를 일러 ‘불에서 꺼낸 타다 남은 나무토막’이라 이르십니다. 건축자가 버린 돌로 새로운 세상의 모퉁이 돌을 삼으시는 분이 하나님이십니다. 하나님께 쓰임 받은 사람들을 보면 흠이 없는 사람이 없습니다. 성경에 등장하는 위대한 인물들 가운데 문제가 없는 사람이 누구입니까? 아무도 없습니다. 하나님의 은총으로 살면서도 자신이 ‘불에서 꺼낸 타다 남은 나무토막’이라는 사실을 모르는 사람들, 자신의 성취에 도취되어 그 사실을 까맣게 잊어버린 사람들이 참 많습니다. 그들이 문제입니다. 자기가 허물이 많음에도 불구하고 하나님의 은혜가 자신을 사로잡고 있다는 사실을 알지 못하고 마치 자신이 위대한 일을 하는 것으로 생각하는 이들이 오늘의 개신교회를 이 지경으로 만들었다고 말 할 수 있겠습니다. ‘나는 대단한 존재가 아니라 불에서 꺼냄 받은 그슬린 나무토막이다.’ 그 사실을 망각할 때 사람들은 교만해질 수밖에 없습니다.
의롭기에 하나님의 일을 하는 것이 아닙니다. 하나님의 손에 붙들렸기에 하는 것입니다. 하지만 인분이 묻은 옷을 입고서 하나님의 일을 수행할 수는 없는 일입니다. 그래서 천사가 다른 천사들에게 그가 입고 있는 냄새 나는 더러운 옷을 벗기라고 이릅니다. 그리고 마치 선포하듯이 말합니다.
“보아라, 내가 너의 죄를 없애 준다. 이제, 너에게 거룩한 예식에 입는 옷을 입힌다.”(3:4b)
옷을 갈아입는다는 것은 죄가 씻음 받았다는 사실을 가시적으로 표현한 것입니다. 바울 사도도 이런 상징을 자주 사용했습니다. 옛사람을 벗어버리고 새 사람을 입으라는 말이 그것입니다(엡4:22-24). 로마서에서는 밤이 깊고 낮이 가까이 왔으니 어둠의 행실을 벗어버리고 빛의 갑옷을 입자(롬13:12)로 말하기도 했습니다.
그런데 하늘 회의의 참관인으로 그 자리에 있던 스가랴가 불쑥 천사들의 일에 끼어듭니다. 그는 여호수아 대제사장의 머리에 깨끗한 관을 씌워 달라고 청했습니다. ‘관’이라고 번역된 이 단어는 사실 머리를 감는 터번입니다. 영어 성경에는 그렇게 번역되어 있습니다. 여기에 사용된 똑같은 단어가 이사야 3:23에서는 ‘머릿수건’으로 나옵니다. 그것은 부유하고 귀한 여성의 상징이었습니다. 제사장의 복장이라기보다는 그의 고귀함을 드러내기 위한 오브제였습니다. 천사는 요구받은 대로 여호수아 대제사장에게 관을 씌우고, 거룩한 예식에 입는 옷을 입혔습니다. 하나님의 은총은 이렇게 값없이 주어집니다. 여기에 여호수아가 한 일은 아무것도 없습니다. 그런데 잊지 말아야 할 것이 있습니다. 고귀한 관, 그리고 거룩한 예식에 입는 옷은 무거운 책임이지 특권이 아닙니다. 그것을 특권으로 이해하는 데서 문제가 발생합니다. 책임을 다하지 않으면 그에게 주어진 소명은 철회될 것입니다. 하나님은 천사를 통해 그에게 엄중하게 이르십니다.
“네가 내 도를 준행하며 내 율례를 지키면 네가 내 집을 다스릴 것이요 내 뜰을 지킬 것이며 여기에서 섬기는 사람들 사이를 자유로이 출입하게 할 것이다.”(3:7)
하나님에 의해 관 씌워진 사람들, 하나님에 의해 거룩한 옷으로 갈아입혀진 사람들은 누구입니까? 오늘 본문에서는 대제사장을 뜻하지만 사실 그들은 바로 우리들입니다. 이 자리에 있는 우리 모두가 바로 그런 사람입니다. 그들은 하나님의 뜻을 몸으로 살아내야 합니다. 성도라고 하는 이름은 특권이 아닙니다. 그것은 책임입니다. 삶으로 번역되지 않은 영적 지식은 교만이나 위선 혹은 독선으로 변합니다. 잘 믿는다고 하는 사람들이 수많은 사람에게 상처를 입힙니다. 잘 믿는다는 사람일수록 폭력적일 때가 있습니다. 왜 그럴까요? 삶에 무게가 담보되지 않을 때 그들은 타인을 원망하고 타인을 정죄함으로 자신을 정당화하려 하기 때문입니다. 하나님의 집을 다스리는 권위는 하나님의 뜻대로 사는 삶에서 나오는 것입니다. 많은 종교인들이 자기들의 권위를 내세우기 위해 자신의 허물에도 불구하고 하나님의 선택은 철회되지 않는다고 말하지만, 사실 이 본문에서 우리가 주목해야 할 것은 ‘네가 내 도를 준행하며 내 율례를 지키면’이라는 조건절입니다. 그것은 참 무거운 책임입니다. 제사장들이, 성도들이 그렇게 살게 될 때 그들이 ‘내 뜰을 지킬 것’이라고 말씀합니다. ‘내 뜰’이 어디입니까? 지금 하나님께서 현존하시는 그 자리입니다. 그러므로 ‘내 뜰을 지킨다’는 것은 하나님의 회의에 참여할 자격을 얻는다는 말일 겁니다.
또 여호수아와 그의 동료들은 앞으로 나타날 일의 표가 되어야 합니다. 앞으로 나타날 일은 ‘싹’이라 불리는 이의 도래입니다. 또 ‘일곱 눈을 가진 돌’의 도래입니다. 표현은 다르지만, 이 둘은 하나입니다. 물론 이것은 메시야를 가리키는 말일 겁니다. 메시야를 ‘싹’이라 이르는 게 참 의미심장합니다. 싹은 여립니다. 하지만 그 속에 생명의 기운이 가득 차 있습니다. 두터운 대지 혹은 두꺼운 나무껍질을 뚫고 솟아 나오는 싹은 아름답습니다. 그리고 장엄합니다. 하나님의 신비가 가득 차 있음을 느끼기 때문입니다. 이사야도 싹이라는 은유를 통해 메시야적 존재를 드러낸 바 있습니다. 그는 “이새의 줄기에서 한 싹이 나며 그 뿌리에서 한 가지가 자라서 열매를 맺는다”(사11:1)고 말했습니다. ‘일곱 눈을 가진 돌’은 참 이해하기 어려운 상징입니다. 어떤 이는 그것이 제사장의 옷에 매단 보석의 일곱 면을 일컫는 것이라고 말하고, 어떤 이는 히브리어로 ‘돌’이라는 단어가 ‘샘’이라는 말과 유사하다는 점에 착안하여 ‘샘’ 뜻하는 것이라고 설명하기도 합니다. 사실 13장에서 스가랴는 샘의 이미지를 통해 구원받은 삶을 나타내고 있습니다.
“그 날이 오면, 샘 하나가 터져서, 다윗 집안과 예루살렘에 사는 사람들의 죄와 더러움을 씻어 줄 것이다.”(13:1)
‘돌’이든 ‘샘’이든 그 역할은 사람들의 죄를 씻어 새로운 존재로 만들어 내는 것입니다. 제사장들은 백성들의 죄 사함을 위해 매번 새롭게 제사를 바쳐야 했습니다. 그러나 오실 그분은 땅의 죄를 하루 만에 없애실 것입니다. 제사장들이 그분을 가리키는 손가락 역할을 잘할 때 세상은 평화롭게 됩니다. 그래서 주님은 확약을 하듯 말씀하십니다.
“그 날이 오면, 너희는 서로 자기 포도나무와 무화과나무 아래로 이웃을 초대할 것이다.”(3:10)
평범한 이 말씀이 저는 정말 좋습니다. 사람들이 사귐을 위해 서로를 초대하는 세상은 얼마나 아름답습니까? 사람들은 이제 다른 이들을 사적 공간에 초대하려 하지 않습니다. 사생활이 보호받기를 원한다며 점점 장벽을 높이 쌓고 있습니다. 장벽이 높아질수록 안심은 될지 모르지만 외로움은 깊어집니다. 사귀어 두면 덕을 볼 것 같아서가 아니라, 어떤 일을 도모하기 위해서가 아니라 그저 사람이 좋아서 누군가를 초대할 수 있는 세상이 속히 왔으면 좋겠습니다. 인간의 인간다움은 경계를 초월하여 다른 이들을 환대할 줄 아는 것이 아니겠습니까?
어느 철학자는 현대인을 가리키는 기호를 만들어냈습니다. 영어 S자 한복판에 빗금을 그은 것($)입니다. S는 주체를 뜻하는 subject라는 단어에서 온 것이고, 빗금은 사람들의 영혼에 새겨진 상처의 흔적을 상징합니다. 세상에 상처나 아픔의 기억이 없는 사람은 없습니다. 그 상처는 이유 없는 환대의 공간 속에서라야 치유됩니다. 교회는 바로 그런 환대의 공간이어야 합니다. 우리가 서로를 포도나무 아래로, 무화과나무 아래로 초대할 수 있는 것은 하나님의 사랑, 그리고 성령의 능력이 우리 가운데 있을 때입니다.
우리는 모두 싹이라 불리는 분을 알고 있습니다. 예수 그리스도, 그분은 힘으로 사람들을 강압하고 지배하는 세상이 아니라, 서로가 벗이 되어 주고, 서로가 든든한 버팀목이 되어 살아가는 새로운 세상을 시작하셨습니다. 그를 믿는다고 고백하는 우리 또한 이 땅에서 싹이 되어야 합니다. 오늘 외로운 사람들, 아픈 사람들, 내몰린 사람들을 초대하는 것이 우리에게 주어진 소명입니다. 이 소명에 성실하게 응답하는 우리가 되기를 기원합니다. 아멘.
첫댓글 의롭기에 하나님의 일을 하는 것이 아니라 하나님의 손에 붙들렸기에 하는 것입니다. 여호수아 대제사장의 허물과 죄를 알고 계셨지만 거룩한 옷, 고귀한 관을 씌우며 소명을 주신 하나님께서 불에서 꺼낸 타다 남은 나무토막 같은 저희도 택하여 불러 주셔서 감사합니다. 예수님을 그리스도로 고백하고 제자로 나선 저희들이 주의 고난에도 기꺼이 동참할 수 있는 믿음과 용기 주시기를 원합니다. 희망의 싹이 되신 예수님의 비전을 소명으로 알고 실현하고자 애쓰는 저희에게 힘과 성실을 더하여 주시기를 기도합니다. 아멘.