하얀 사슴 연못
황유원
백록담이라는 말에는 하얀
사슴이 살고 있다
이곳의 사슴 다 잡아들여도 매해 연말이면 하늘에서 사슴이
눈처럼 내려와 이듬해 다시
번성하곤 했다는데
이제 하얀 사슴은 백록담이라는 말
속에만 살고
벌써 백년째 이곳은 지용의 <백록담> 표지에서
사슴 모두 뛰쳐나가고 남은
빈자리 같아
그래도 이곳의 옛 선인들이 백록으로 담근 술을 마셨다는 기록이 있는 것을 보면
백록은 어쩌면 동물이 아니라
기운에 가깝고
뛰어다니기보다는 바람을 타고 퍼지는 것에 가까워
백록담,이라고 발음할 때마다 <백록담> 표지 밖에서 표지 안으로
돌아오는 것도 같고
하얀 사슴 몇마리가 백록담 위를 찬 바람처럼 달려가고 있을 거라는 생각만으로도 머릿속은
청량해진다
연못에 잠시 생각의 뿔을 담갔다
빼기라도 한 것처럼
사실 지용이 <백록담>을 썼을 때 사슴은 이미 여기 없었다
표지의 사슴 두마리는 없는 사슴이었고
길진섭의 그림은 그저 상상화일 뿐이었는데
어인 일일까
백록담,이라고 발음할 때마다
살이 오른 사슴들이
빈 표지 같은 내 가슴속으로 다시 뛰어 들어와
마실 물을 찾는다
놀랍게도 물은 늘
그곳에 있다
작가 소개 :
황유원
시인이자 번역
1982년 울산 출생. 2013년 <문학동네> 신인상으로 시 등단. 서강대 종교학과와 철학과를 졸업
2015년 제 34회 김수영 문학상 수상, 2022년 대한민국예술원 젊은 예술가상 수상, 2023년 68회 현대 문학상 수상.
시집 <세상의 모든 최대화>, <이 왕관이 나는 마음에 드네> , <초자연적 3D 프린팅>
작품 감상 :
시가 좋아서, 좋은 시를 쓰고 싶어서, 매일 시를 쓴다. 서투른 나의 시는 어른 흉내내고 싶어 엄마의 굽 높은 삐닥구두 신은 여섯살 어린 소녀 같다. 시를 알고 싶어 요즘 젊은 사람들의 시를 찾아 읽어보면 그들의 세계와 나의 세계 사이에는 좁혀 지기 힘든 너른 강이 있어 뱅글뱅글 제자리서 돌다 그만 덮어 버리고 만다. 그러나 이 시는, 내가 대학생이었을 때 태어난 젊은 시인인데 내가 이해할 수 있는 쉬운 언어로 쓴 시가 맑은 수채화처럼 내 머리속에 그림을 그린다. 한라산의 백록담 (그저 그 이름을 풀어 놓은 것일뿐인데)에 청량한 물을 나도 한 모금 마신 듯한 느낌을 준다. 이렇게 쉬운 언어로도 이런 아름다운 그림을 그릴 수 있다는 것을 알았다
첫댓글 한라산 백록담과 정지용 시인의 백록담 시집을 동시에 엮어 낸 시네요!
또 시각적인 백록담과 그것을 발음할 때의 뉘앙스를 시에 펼쳐 낸 젊은 시인의 시어 다루는 솜씨가 돋보입니다.
벌써 김수영문학상까지 수상한 걸 보니 문단의 인정도 나쁘지 않은 것 같습니다.
열심히 쓴다는 것, 자신만의 독특한 시세계를 구축한다는 것 등 부러움 투성입니다.
정말 많은 노력을 해야겠다 다짐합니다.
좋은 시 소개해 주셔서 잘 감상했습니다.
감사합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