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재지 : 전라남도 영광군 영광읍 중앙로2길 40 (도동리 143)
영광 지역 순교자들을 위한 순교자 기념 성당
1801년 신유박해 직전 영광 지역 신자로 붙잡혀 처벌을 받은 신자들로 이우집, 이종집, 오씨, 이화백, 윤종백, 남조이와
그녀의 남편 김득겸 등 7명이 있다.
이 가운데 이화백과 복산리의 양반 오씨만이 신유박해 때 영광에서 순교하였고, 김치명과 유문보는 병인박해 때
공주와 나주에서 각각 순교하였으며, 배교자 이우집은 신유박해 때 전주에서 처형당했다.
광주대교구 교구장 김희중 대주교는 2010년 9월 16일 영광 성당을 대교구 산하 성당 중 처음으로 순교자 기념 성당으로 지정했다고 밝혔다.
영광 지역은 1791년 신해박해 이전부터 천주교가 전해진 곳으로, 전주, 고산 지역과 더불어 호남 지역에서는 천주교가
다른 지역에 비해 광범위하게 퍼져 있었던 곳이다.
영광에서 순교한 이화백과 오씨가 참수형으로 순교한 곳을 서종태 박사는 참수터의 입지조건을 조사하여
도동리 석장승 남쪽의 옛날 우시장이 있었던 곳으로 추정하고 있다.
도동리 석장승 남쪽 땅은 읍성 밖이고 많은 사람들이 다니는 대로변이며 수백 명을 수용할 수 있는 넓은 공터이고
개울가에 위치해 있는 등 참수터로서 갖추어야 할 입지조건을 두루 갖추고 있기 때문에 신유박해 때 이화백과 오씨가
참수형을 받아 순교한 곳은 도동리 석장승 남쪽(영광 성당 앞쪽)의 옛날 우시장이 있었던 곳으로 보는 것이 가장 타당하다고
주장하고 있다.
1832년(순조32)에 잡귀·액·살 등 부정한 것을 막아주는 역할을 하는 석장승을 이곳에 세운 것도 이곳이 순교터였기 때문이 아닌가 한다.
전라도는 한국 천주교회 창설 직후에 전주의 유항검(柳恒儉, 1756~1801, 아우구스티노)과 진산의 윤지충(尹持忠, 바오로, 1759~1791)이
천주교를 받아들여 신앙공동체를 형성한 뒤 전라도 각지로 복음을 전파 시켜나갔다.
영광에는 유항검 집안과의 인척 관계를 통해서 복음이 전해졌다.
영광의 월산리는 유항검의 이복동생 유관검의 사촌형의 처가가 있던 곳인데 유관검은 사촌형의 처남인 월산리에 사는 이우집李宇集) 등에게 복음을 전파하였다
유항검의 사돈인 영광 사람 이종집(李宗集)도 유관검을 통해서 입교한 것으로 보여진다.
또한 1801년 신유박해때 영광에서 참수형을 당한 양반 오씨도 그의 거주지가 이우집이 살던 월산리에서 가까운
복산(현 장성군 삼계면 부성리 복산마을)이었던 것으로 보아 유관검을 통해 입교한 이우집·이종집 등의 전교로 입교한 것으로 믿어진다.
윤지헌이 사는 고산 저구리에는 많은 사람들이 그의 집을 출입하며 천주교 교리를 배웠는데 그 사람들 가운데는
고산의 김방통(金方通)·안무산安茂山), 진산의 목서중(睦序中)·박춘지(朴春之), 금산의 김종우(金宗祐)·박맹손(朴孟孫),
강진의 윤제현(尹濟賢) 등과 더불어 영광의 윤종백(尹宗白)이 포함되어 있었다.
고창 개갑 사람 순교자 최여겸은 영광과 이웃 고을인 무장현 동음치면 개갑(현 고창군 공음면 갑촌) 사람으로
무장과 이웃 고을의 사람들을 대거 입교시켰는데 그들 가운데 28명이 신유박해 때 붙잡혔다
그 가운데는 무장에사는 조카 최수천(崔壽千), 금노라고 부르는 조카 최일안, 함평의 남중만(南重萬),
흥덕의 김처당(金處當) 등과 더불어 영광 고을 양반 이화백이 포함되어 있다
신유박해 직전의 영광 지역 신자들의 숫자는 7명보다 훨씬 더 많았을 것이다. 신유박해 때 신문 과정에서 드러난
영광 지역 신자들의 수가 7명으로 전라도에서 세 번째로 많았고 또한 처벌된 신자들의 수도 처형된 자 3명과 유배된 자 2명을 합쳐
모두 5명으로 역시 전라도에서 세 번째로 많았다.
이것은 당시 영광 지역의 교세가 전라도에서 세 번째로 컸다는 것을 말해준다.
그렇기에 유관검이 주문모 신부의 은닉처로 영광 지역 신앙 공동체를 고려했을 것이다.
■ 영광 출신 순교자
○ 이화백 : 무장의 최여겸의 제자로 영광에서 참수당함(한국전주교회사)
○ 오씨(吳氏) : 영광의 복산에 사는 오씨도 최여겸에게 천주교를 접했을 것으로 생각됨. 영광에서 참수당함 (한국천주교회사)
○ 남씨부인 : 그는 그의 남편인 김득겸에게서 천주교를 접하였고, 김득겸이 죽은 뒤 많은 사람에게 전도하였는데,
신유박해 당시 은율에 유배됨(사학징의)
○ 윤종백(尹宗白) : 그는 고산의 윤지헌(尹持憲)에 의해 천주교를 접했는데, 신유박해 당시 전주감영의 감옥에 갇혔으며,
이후의 행적은 알수 없음.
○ 이우집(李宇集) (1761∼1801) : 전라도 영광 월산리 출신 이우집은 영광양반으로 유항검의 친사돈이었다.
당시 양반들의 꿈처럼 여러 차례 과거시험에 응시했다. 그는 유항검의 인격과 신앙에 감화되고 유관검의 권유를 받아
입교하여 교리를 배웠다.
의금부 결안에 보면 이우집은 유항검과 같이 몰래 이류(異類; 오랑케)와 통하여 큰 선박을 나오도록 청하는 일에 놀라서
달려가 고하려는 마음은 없이 수컷이 암컷을 부르면 화답하는 것같이 적극적으로 수작하였으며 실정을 알고도
고하지 않은 불고지죄로 나온다.
그해 3월에 체포되어 전주감영 포청 형조를 거처 의금부에서 사형선고를 받아 10월 24일 전주(현 전동 성당 터)에서 참수형을 받았다. 그의 나이 40세 였다.
■ 영광 성당 역사
1937년에 설립되었다가 폐쇄된 후, 1965년 12월 15일에 재설립된 본당으로 초대 신부로 멀컨 토마스 신부가 부임하였다.
1920년대 초 나주 노안 본당의 서 미카엘 가족이 영광군 백수면으로 이주하면서 영광 지역에 신앙 공동체가 형성되었다.
노안 본당의 카다스 신부의 활동으로 신자가 늘어나면서 영광 공소가 설립되었으며, 1937년 본당으로 승격되고
골롬반 외방선교회 소속의 멀컨 신부가 부임하였다.
초대 주임 신부 부임후 성당 신축을 시작하는 한편 3년 과정의 초등학교인 성심학원을 설립하기도 하였다.
이후 본당 신부가 일제에 의해 수감되면서 쇠퇴하여 공소로 되었다가 6.25전쟁으로 성당 건물이 전소되었는데,
1965년 성당을 재건하고 다시 본당으로 승격되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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