글 밭 일구기 / 이동실
퇴직이 가까워졌다. 일 년을 앞두고는 어떻게 살 것인가가 나의 화두가 되었다. 퇴직 후를 생각하지 않은 건 아니지만, 정년은 내 인생에서 중요한 변곡점이 될 것 같았다.
퇴직하면 무얼 할 것인지 버킷리스트를 작성해 보았다. 우선 나 자신을 위한 휴식 시간을 가지고 한적한 오솔길을 걸으며 귀밑머리 스치는 바람과 흘러가는 구름을 보며 사색에 젖어보리라. 누구에게도 구속받지 않고 자유를 만끽하며 혼자서 영화관도 가고 대형 서점에 들러 마음에 풍요도 가지리라. 집안 곳곳의 오래된 물건을 비워내는 일도 해야겠다. 그런 다음 제주도로 떠나 한 달 살아보기를 하면서 글 밭을 일구어 수필집도 내고 싶었다. 하고 싶은 일들이 꽤 많았다. 그렇게 퇴직 후를 생각하던 지난가을 벼가 바람에 황금 물결을 치던 어느 날이었다.
지인으로부터 퇴직을 조금 앞당기고 새로운 일을 시작해보는 게 어떠냐는 제안을 받았다. 조건도 좋단다. 일 년에 서너 달만 고생하면 시간적 여유도 있고 정년이 없는 곳이라며 적극적으로 권했다. 그렇게 좋은 자리라면 내게까지 올 리가 있겠느냐고 사양했지만, 일단 서류를 접수해 보라며 권유를 하는 것이 아닌가.
교장 선생님께 의논을 드렸다. 아쉽지만 좋은 일이라며 당신의 생각을 들려주셨다. 학교에 있으면서 많은 사람이 퇴직하는 것을 보아왔고, 그들의 퇴직 후 생활도 눈여겨봐 지더란다. 불과 10년 전만 해도 명예퇴직은 조심스러웠고, 다른 선생님들 또한 지금의 자리를 공고히 굳혀 가려 했단다. 그러나 백세 시대로 접어든 현실은 하루가 다르게 달라지고 있고, 먹고사는 일도 중요하지만, 여가를 어떻게 보내야 할지 당신도 얼마 남지 않은 퇴직 후가 걱정이라고 하셨다. 그런 면에서 보면 나는 행운일 수 있으니 학교 일은 다음 사람에게 넘겨주고 도전을 해 보라셨다. 학기 중간이라 책임감 없는 사람이라 탓하실 줄 알았는데 격려를 해주셔서 감사한 마음으로 정리를 할 수 있었다.
학교에서 전문상담사로 일했고, 새로운 직장에서는 직업상담사로 일을 하게 되었으니 나름대로 의미 있는 일이 될 것 같기도 했다. 상담사가 갖추어야 할 자세를 바로 알아차린다면 대상이 청소년에서 어른으로 바뀌는 것 외에는 별문제가 없으리라 여겼다. 사람이 하는 일이라는 가벼운 생각도 들었다. 그것이 얼마나 큰 오산이라는 걸 깨닫기까지는 결코 오랜 시간이 걸리지 않았다.
구직자를 모집해서 관리하며, 농가가 원하는 날짜에 그 인력을 작업 장소에까지 배치해야 하고, 그에 따른 제반(諸般) 문제를 해결하는 건 기본이고 행정적인 일까지 책임져야 하는 일이 내가 할 일이다. 결국, 전천후 인간상을 원했는데, 깊이 알아보지도 않고 덥석 결정한 게 현명치 못한 내 처사였을 뿐이다.
사업의 목적은 일손 부족한 농촌의 어려움에 지자체가 나서서 농가가 필요한 인력을 수급해주고, 비용 일부까지 예산을 확보하여 지원하는 것이다. 효과는, 치솟는 인건비 상승 억제는 물론 농가의 경제적인 부분까지 덜어 주고 있으니 농촌에 꼭 필요한 사업이기도 하다. 그러나 그 어려운 일의 책임을 내가 져야 한다는 사실은 태산이 앞에 놓인 것처럼 막막할 뿐이다. 인력을 관리하는 일이 큰 과제이기도 하고, 잠시라도 집중하지 않으면 매일 100여 명에 가까운 사람들의 상황이 헷갈려 다음 일에 지장을 초래하고 만다.
농민들이 일을 시작하는 새벽이면 나도 어김없이 출근해야 하고, 그에 따른 각종 사안을 정리하고 나면 밤 10시나 돼서야 퇴근이다. 농번기에 휴일을 찾는다는 건 호사스러운 꿈같은 일이다. 사려 깊게 생각하지 못한 나의 결정은 참새가 왕거미 줄에 걸려든 것이나 다름없다. 산더미 같은 일은 세상에 공돈은 없다는 걸 깜빡 잊고 깐죽댄 나를 비웃기라도 하는 듯하다. 회계(會計)하면서는 식은땀을 손에 쥐곤 한다. 모르는 문제는 젊은이들에게 신세를 져야 하니, 동료들이 감내할 불편함에 쥐구멍에라도 숨고 싶은 심정이다. 전공과 전혀 다른 일에 맞닥뜨린 셈이다. 깊은 잠을 이루기도 어렵고, 잠든다 해도 업무가 서툴러 헤매는 꿈을 꾸다 눈을 뜨기 일쑤다.
이런 회한 속에서도 나를 견디게 하는 일은 내가 글을 쓴다는 것이다. 짙은 새벽 안갯길을 달려 출근을 하면서도 글을 쓴다는 일이 얼마나 다행스러웠던가. 힘들고 물기 젖은 날도 있지만 그런 날까지도 문학은 내게 참아 낼 힘이 되어준다. 슬퍼만 할 게 아니다.
논밭에서 농민들과 함께 부대끼며 그들의 삶을 응원하다 보면, 그들은 내게 나만이 낼 수 있는 맛과 냄새와 분위기를 가진 글 밭을 일구어 나가게 할 것이다. 그것은 가시밭길을 헤매면서도 외딴집 불빛이 나를 비추고 있음을 깨닫고 그곳을 향해 걸어가는 일이다. 그 반짝이는 불빛이 내 가슴을 채워주는 문학이라는 희망의 이정표이지 않겠는가.
첫댓글 쉼없이 도전하는 이동실작가님께 박수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