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1961년 5월 16일 새벽 0시 15분, 혁명 지도자 박정희 일행이 서울 영등포 6관구 사령부에 치고 들어갔다. 당초 모의 때 혁명 지휘소로 찍어두었던 곳이다. D-day H-hour 5월 16일 새벽 3시를 향해 루비콘 강을 건너려는 것이다.
그런데 상황이 좋지 않았다. 전날 밤 거사 계획이 일부 누설됐다는 보고가 속속 들어왔던 것이다. 서울 신당동 박정희 집에는 민간인으로 변장한 헌병 감시조가 붙었고, 박정희가 치고 들어간 6관구 사령부도 실은 호랑이 굴이었다.
장도영 참모총장이 전날 밤 10시 비상을 걸어놓았고 병력 출동이 예정돼 있던 30사단과 33사단 그리고 공수단에 출동금지 명령을 내린데 이어 서울지구방첩대에 박정희 미행을 지시했다. 6관구 사령부에 이광선 헌병차감이 이끄는 체포조 병력을 보낸 것도 그였다.
“각하 폭로가 된 것 같습니다.” “그래? 어떻게 할래?” “이래도 죽고 저래도 죽는데 빨리 6관구로 나오시죠. 제가 먼저 나가 장악하고 있겠습니다.”
부대 진입 직전 6관구 참모장 김재춘과 통화였다. 사령부 정문을 막 통과하던 시각 박정희의 마음은 복잡했다. 한강 다리를 건너기 전 거사가 좌초되면 어쩌나 하는 불길한 생각도 스쳤다. 얼마나 기다렸던 D-day인가? 삶과 죽음을 건 일생일대의 승부인데 여기서 물러설 수야 없지 않은가
모든 상황을 가정한 채 사령부 참모장실에 들어선 박정희는 이광선이 이끄는 수십 명의 병력부터 눈에 들어왔다. 그들 손에 쥐어진 조서용지, 수갑과 포승도 보았다.
“여러분 우리는 4·19혁명 후 나라가 바로 잡혀지기를 기다렸습니다. 그런데 이게 무슨 나라입니까? 자유당 정권을 능가하는 부패와 무능으로 나라를 멸망의 구렁텅이로 밀어 넣고 있는 이 정권을 보다 못해 우리는 목숨을 걸고 궐기한 것입니다. 그러나 우리의 혁명은 피를 흘려서는 절대로 안 됩니다.”
뜻밖이었다. 총격전이 벌어질 수 있는 분위기에서 박정희가 선택한 것은 즉석연설이었는데, 그게 5·16 명장면의 하나다. 자기가 혁명군 지휘자인데, 진압군 측도 기꺼이 참여하라는 권유다.
그리고 이광선에게 다가가 악수를 청하며 “혁명을 도와 달라”고 당부했다. 박정희의 담대한 연설에 이광선은 압도당했다. 5·16은 절반이 공개적으로 벌어졌던 혁명이다. “총구 대신 마음으로” 일으킨 혁명임을 여실히 보여 준 생생한 장면이었다. 그게 5·16의 진실이다.』
이상은 평론가 조우석이 쓴 ≪박정희 한국의 탄생≫에 실려 있는 혁명 당일의 극적인 장면이다.
오늘이 그날로부터 59년이 되는 날이다. 영광과 치욕으로 점철된 오천 년 우리 역사에서 그 누구도 만들어내지 못한 새로운 민족중흥 번영의 길을 가는 첫발을 내딛는 날이었다.
『박정희는 더러운 강물 같은 한 시대를 삼켜 바다와 같은 다른 시대를 빚어낸 사람이다. 그러면서도 자신의 정신을 맑게 유지했던 초인이었다.
그는 알렉산드로스 같은 영웅이 아니었고, 나폴레옹과 같은 전광석화의 천재도 아니었다. 부끄럼 타는 영웅, 눈물 많은 초인, 그리고 소박한 시민이었다. 민족의 한(恨)을 자신의 에너지로 승화시켜 근대화로써 그 한을 푼 혁명가였으며 권력을 쥐고도 부패하지 않은 혼(魂)을 지녔던 영웅이었다.』고 조갑제는 회상한다.
근대화 혁명가로서 비장한 생애를 살다 간 박정희의 국가관, 혁명관, 세계관을 보여주는 책 ≪국가와 혁명과 나≫는 박상길 전 청와대 대변인의 초고 정리 도움을 받아 박정희 자신이 집필하여 1963년 12월 제3공화국 출발 전까지 혁명위원회 2년간의 경과와 활동을 담아낸 책이다.
책의 서문에서 혁명의 본질은 “정치사상의 대체와 사회정치 구조의 변혁”이라며 국가, 민족, 역사의 명제를 제시하고 당시 나라의 실상을 열거하며 혁명의 필요성을 설명하고 혁명 2년간의 성과와 미래비전을 제시한다.
그리고 세계사에 부각된 혁명의 사례들을 고찰하며 5·16 혁명의 위상을 비교하면서 기록한 것을 보면서 그의 역사적 지식을 확인할 수 있었다.
청나라 말기 열강들에게 찢어 발린 나라도 모자라 일·청 전쟁 패배로 대만을 일본에 빼앗기는 등 비참해진 중국에 ‘멸만흥한(滅滿興漢)’의 슬로건을 내세우며 1911년 10월 10일 혁명에 성공한 손일선(손문)이 다음해 1월 1일 남경에 세운 중화민국 대통령에 취임함으로써 삼천년 왕조를 끝내고 공화체제를 출발시킨 신해혁명.
260년 에도막부 시대를 종식시키고 천황의 권위를 회복시키며 의회정치로 전환하는 메이지 유신의 성공과 근대화를 향해 달려가는 과정의 그 주역 인물들의 역할과 의미를 소상히 알고 있었으며,
1차 세계대전 패배로 대국에서 몰락한 오스만 터키의 치욕적인 상황 하에서 1919년 5월 그리스 점령군의 만행에 저항하는 첫 총성을 울린 지 1년 만인 1920년 앙카라에 임시 정부를 수립하고 콘스탄티노플(이스탄불)의 술탄 정부에 대항해 진정한 독립을 쟁취한 케말 파샤의 터키 혁명.
19세기 초까지 터키 제국의 지배하에 있던 이집트가 1차 세계대전시 영국의 보호국이 되었으며 1922년 형식상 독립하지만 수에즈 운하지대의 주병권은 여전히 영국이 확보하고 있었고 2차 세계대전 발발 후 친영 정권 와프트 내각을 성립시키며 지배권을 강화해 나간다.
이에 영국군 철수를 요구하게 되었고 2차 세계대전 이후 더욱 거센 운동을 이끌며 1954년 혁명위원회에 의해 수상으로 추대되는 나세르의 이집트 혁명, 그리고 중남미국가들의 수많은 혁명에 대한 박정희의 정확하고 해박한 지식과 상황 인식 능력을 들여다 볼 수 있다.
그리고 2차 세계대전 패전국에서 라인강의 기적을 일궈낸 독일에 대한 이해와 관심, 한·미동맹 강화, 한·일간의 숙제를 고민하고 마지막으로 통일과 미래 대한민국을 위한 각오와 국민에게 호소하는 혁명가의 꿈과 진심을 발견할 수 있다.
『“한 세대의 생존은 유한하다. 조국과 민족의 생명은 영원한 것, 오늘 우리 세대가 땀 흘려 이룩하는 모든 것이 결코 오늘을 잘 살고자 함이 아니요, 이를 내일의 세대 앞에 물려주어 길이 겨레의 영원한 생명을 생동케 함이다“ 이는 박정희 대통령이 어느 해 서울대 총장에게 보낸 글이다.
국가 지도자로서 외롭고 힘든 여정을 끌고 가야하는 책임을 절감하고 자신을 혹독하게 채찍질 하며 한 시대를 살고 간 한 인간이 <주식회사 대한민국>과 함께 헤비 스톰(heavy storm)의 바다를 헤쳐 갔던 韓國號 선장 박정희 대통령의 국가관이다.』라고 작년 작고한 박정희 대통령의 테크노그라트 참모 오원철 경제 제2수석 겸 중화학공업 기획단장이 ≪박정희는 어떻게 경제 강국을 만들었나.≫라는 그의 저서에 남긴 글이다.
얼마 전 돌아가신 박정희 대통령의 비서실장(9년 3개월간) 김정렴은 그의 정치 회고록 ≪아, 박정희≫에서 박정희 대통령의 통치철학을 다음과 같이 정리했다.
『한 시대의 역사는 그 시대를 살아온 민족의 힘과 땀의 소산이며, 역사 창조의 방향을 제시하고 민족의 힘을 조직하고 개발하여 의욕과 자신감을 불어넣어 주는 지도자 없이는 영광된 역사가 기록될 수 없다.
지도자와 지도 세력이 투철한 사명 의식을 갖고 민족의 발전에 무한한 정열을 쏟는 시기에 역사는 융성했고, 백성들이야 살든 죽든 자기만 잘 살면 된다는 생각으로 권력욕에 사로잡혀 파쟁을 일삼았던 시기의 역사는 불행했다.
박 대통령은 우리 국사에 관한 책을 애독했고 조예가 깊었으며 뚜렷한 역사관을 가지고 있었다. 우리는 오천 년의 오랜 민족사를 통해 중국을 비롯한 주변 강대국으로부터 끊임없는 침공을 받아왔다.
그래서 박 대통령은 경제 개발과 국방을 통치의 2대 지주로 설정했다. 자조정신을 바탕으로 자립경제를 건설하고 자주국방의 태세를 갖추며 이를 바탕으로 민주주의를 뿌리내려 진정한 독립 국가를 이룩한 뒤 통일로 간다는 것이 박 대통령이 제시한 국가발전전략의 거대한 청사진이었다.
박 대통령은 재임 18년 동안 기회 있을 때마다 이 통치철학을 국민에게 되풀이하여 알리면서 나라를 이끌어 나갔다.』고 회고했다.
그리고 무려 15년을 끌어오던 한·일국교정상화 회담 한 가운데 서서 1965년 한·일 기본조약을 완성시킨 이동원 외무장관은 1992년 제3공화국 정치, 외교 비망록 ≪대통령을 그리며≫를 출간하는 심정을 서문에 쓰면서
『불쑥 떠오르는 한 마디 음성이 내 귀를 때리고 있음을 느낀다.
“나에 대한 평가는 내가 청와대에 있을 때 하는 게 아니오. 나중에 내가 물러나면 그때 역사와 국민이 해줄 것이오.”
소신의 화신 박 대통령을 주위에서 우려와 반대가 있을 때마다 이렇게 외쳤다. 오늘 만큼은 나도 그의 심정이고 싶다.』고 썼다. 박정희 리더십과 인간적인 매력을 느낄 수 있는 부분이다.
그 외에도 경제기획원 과장 시절 브리핑으로 박 대통령과의 첫 만남을 회상하며 당시 경제정책 실무경험을 ≪박정희 패러다임≫으로 펴낸 황병태 전 국회의원은
『“박정희가 민주화의 문을 열었다”며 민주사회는 하늘에서 갑자기 떨어지는 것이 아니다. 자유 시장경제 체제를 바탕으로 경제 개발과 나라 세우기의 과정을 거쳐 온 한국은 자체의 발전 모멘텀에 따라 자연스럽게 민주화 단계로 넘어가게 되어 있었다.』면서
책의 마지막 문장으로 “5·16으로 집권한 박정희 대통령은 대한민국의 근대화 혁명을 성공적으로 이룩함으로써 한국의 현대적 민주국가의 기틀을 마련한 위대한 정치 지도자로 영원히 기억될 것이다.”고 했다.
이 밖에도 박정희 대통령 연구를 했던 많은 지식인은 물론 위대한 혁명가와 국정을 함께한 많은 사람들 기억속의 박정희는 위대한 국가지도자의 전형이었다.
그의 삶이 국가와 민족을 위한 영웅의 대장정이었음을 말하듯 우리 곁을 떠날 때도 대인의 모습, 혁명가의 모습 그것이었다.
1979년 10월 26일 김재규의 총알을 가슴으로 받았을 때 등에서 뿜어나는 붉은 핏덩이를 막으며 “각하 정말 괜찮습니까?” 하고 신재순이 물었을 때, “응, 나는 괜찮아 …” 신재순은 이 마지막 말 뉘앙스를 ‘난 괜찮으니 너희들은 빨리 피하라’는 의미로 해석했다고
조갑제는 박정희의 62년 인생 62개 결정적 장면을 기록한 ≪박정희의 결정적 순간들≫에 기록했다.
이상 박정희 관련 서적들을 찾아 읽고 관련 사이트의 기록들을 접하면서 박정희 대통령에 대한 경이로운 흔적을 접하면서 존경과 경외감을 갖게 된 것은 자연스러운 현상이었다.
역사가들은 우리 민족의 역사에서 위대한 인물 세 명을 거명할 때, 신라 통일을 이룩한 김춘추, 한글 창제와 조선 초기 안정과 문화를 꽃피운 세종 그리고 잠자던 민족혼을 깨워 국가 성격의 색깔과 틀을 바꾼 혁명가 박정희를 꼽는다.
역사 평가에서 정치적인 이유로 제대로 기록되지 않고 정당한 평가를 받지 못하는 경우가 우리나라만큼 극심한 경우가 또 다른 나라에서 있을까. 더욱이 인물에 대해서는 더하다. 안타까운 부분이고 개선해야만 한다. 그래야 국민들이 대한민국에 자부심을 갖게 된다.
건국의 아버지들 근대화의 영웅 그리고 독립의 국부들을 기리는 현상을 미국과 일본을 비롯한 세계 많은 나라의 화폐에서 만날 수 있는데 우리는 왜 조선의 인물이 아닌 대한민국 인물 한 사람도 화폐에서 만나지 못할까.
해마다 5월이면 아카시아 꽃이 흐드러지며 그 진한 향기를 내뿜는다. 나는 올해도 그 향기를 맡으며 시대를 앞서간 한 초인 혁명가 박정희 대통령을 생각한다. 내 젊음의 시간과 함께한 행복했던 순간들에 감사하며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