영화가 만들어내는 것은 '환영의 이야기들'이다. 영화를 보는 제일의 쾌감 중 하나는 의미와 재미를 겸비한 완결적 이야기를 경험하는 것에 있다.
영화가 만들어내는 것은 '환영의 이야기들'이다. 영화를 보는 제일의 쾌감 중 하나는 의미와 재미를 겸비한 완결적 이야기를 경험하는 것에 있다. 영화가 원하는 이야기의 방식과 스타일도 시대에 따라 진화한다. 굽이굽이 극적 파토스가 터지는 드라마틱한 이야기가 환대받는 시대가 있었던 반면, 현실에 젖줄을 댄 이야기들, 상상의 권능을 한껏 부린 기발한 착상이 대중을 매혹시키기도 했다. 이야기는 장르와 결합하고 유행을 만들며 영화의 스타일을 바꾼다.
할리우드 역시 언제나 새로운 이야기를 원했다. 문학과 영화가 맺어온 긴밀하고도 오랜 역사가 증명하듯이 가장 새롭고 빛나는 이야기는 거반이 할리우드로 흘러들었다. 지역과 국가를 가리지 않고 할리우드는 창조적인 작가들로부터 영감을 얻는다. 신선한 피를 갈망하는 뱀파이어처럼 할리우드는 그 자신이 애정을 표하는 작가들을 바꿔가며 새로운 이야기들을 수혈해왔다.
그렇다면 최근 할리우드의 구애를 받는 작가들은 누구일까? <황금나침반>의 필립 풀먼, <스타더스트> <베오울프>의 닐 게이먼, <미스틱 리버> <살인자들의 섬>의 데니스 루헤인이 그 주인공들이다. 최근 할리우드가 주목하고 있는 이들은 저마다의 스타일과 작법으로 소재 빈곤에 고뇌하는 할리우드에 창조적 영감을 제공하고 있다. 소설로 싹을 틔운 이들의 이야기는 앞다투어 스크린으로 옮겨진다. 우리 시대 가장 뛰어난 이야기꾼인 세 작가의 명철한 세계를 조명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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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할리우드 판타지'의 블루오션 필립 풀먼(<황금나침반> <마법의 검> <호박색 망원경>)
공상적 상상력과 현실이 절묘하게 교합하는 판타지는 21세기 할리우드의 화두다. J.R.R. 톨킨의 <반지의 제왕>을 비롯해 C.S. 루이스의 <나니아 연대기>, 그리고 닐 게이먼의 <스타더스트>, <해리 포터> 시리즈, <비밀의 숲 테라비시아> 등 유명한 판타지 소설은 빠짐없이 영화로 만들어졌다.
이런 와중에 필립 풀먼의 <황금나침반>의 첫 번째 이야기가 이제야 극장에 걸린다는 것은 다소 늦은 감이 없지 않다. 각본가이자 제작자, 감독으로 활동하고 있는 크리스 웨이츠(<어바웃 어 보이>)가 메가폰을 잡고 니콜 키드먼과 다니엘 크레이그, 이안 맥켈런(목소리 출연) 등 할리우드의 톱스타들이 참여한 <황금나침반>에 필립 풀먼 역시 프리프로덕션 과정부터 적극적으로 참여했다. <황금나침반>은 <반지의 제왕>이 지나간 자리를 잇는 판타지 대작으로 기대를 모으고 있다.
세계적으로 1억 4천만 부가 팔린 <황금나침반> 시리즈는 1995년 <황금나침반>, 1997년 <마법의 검>, 2000년 <호박색 망원경>으로 이어지는 3부작으로 완성된다. 톨킨의 <반지의 제왕>이 절대 권력의 위험을 경고하며 인간과 요정, 난장이들이 함께 살아가는 완전한 가상세계를 무대로 하고 있다면 풀먼의 판타지는 절대 권력을 보다 종교적 관점에서 관찰하고 17~18세기 영국이라는 시대배경을 적극적으로 끌어안는다. 곰과 마녀, '데몬'과 유령이 공존하는 범신론의 시대에 유일신 사상을 기반으로 한 기독교 세력확장이 가속화되고, 세계의 진실을 찾아 지구 끝까지 탐험하려는 학자들이 출현하는 시점이 풀먼 세계의 첫 포문을 연 <황금나침반>의 배경이다. 풀먼은 이러한 시공간에 인간의 영혼을 동물화한 '데몬'과 다른 세계에서 이쪽 세계로 전해지는 신비로운 미세물질 '더스트'라는 다소 형이상적인 소재를 가지고 세계의 비밀을 찾아 떠나는 열두 살 소녀 리라의 모험극을 풀어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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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야기의 시작은 이렇다. 옥스퍼드의 조던 대학에서 삼촌 아스리엘 경의 후원으로 살고 있는 리라는 귀족 출신임에도 불구하고 부엌데기 소년 로저와 어울리며 장난치길 좋아하는 영리하고 쾌활한 소녀. 동시에 그녀는 앞으로 다가올 거대한 전쟁에서 중요한 역할을 맡게 될 운명의 아이이기도 하다. 어느 날 삼촌의 방을 기웃거리던 리라는 '더스트'의 존재에 대해 알게 되고, 이를 찾아 북극에 가고 싶어하는데, 무서운 삼촌이 그녀를 데려갈 리 만무하다. 그런데 이즈음 '고블러'라 별명 붙은 자들에 의한 어린아이 납치사건이 연달아 벌어지게 된다. 오직 리라만이 해독할 수 있는 진실만 말하는 기계 '황금나침반'을 손에 넣게 된 그녀는 고블린에게 납치당한 로저를 찾기 위해 운명 같은 모험에 나서게 된다는 것이다.
조던대학에서 자라난 어린 소녀를 주인공으로 내세운 판타지 모험극이라는 <황금나침반>의 큰 줄거리는 옥스퍼드에 삶의 뿌리를 내리며 살았던 풀먼 본인의 경험에서 우러나온 것이다. 풀먼은 옥스퍼드대학을 졸업한 뒤 옥스퍼드 중학교에서 선생님으로 일하다가 옥스퍼드 웨스트민스터대학에서 빅토리아 시대의 소설과 설화 등을 가르쳤다. 다른 판타지 소설의 거장들과 마찬가지로 그 역시 환상적인 모험 속에 방대한 인류의 역사와 신화, 그리고 철학을 녹여낸 것은 일면 당연해 보인다. 그러나 필립 풀먼의 판타지가 특별한 이유는 인류의 역사에서 끊임없는 전쟁과 갈등을 불러일으켜 왔던 종교적 세계관의 충돌에 관한 내용 때문이다.
너희가 그것을 먹는 날에는 너희 눈이 밝아 너희들의 데몬이 진정한 형태를 갖추고, 하나님과 같이 되어 선악을 알 줄을 하나님이 아시기 때문이니라. 여자가 그 나무를 본즉 먹음직도 하고 보기도 좋으며, 데몬의 진정한 모습을 알고 싶기도 하여, 그 실과를 따 먹고 자기와 함께한 남편에게도 주매 그도 먹은지라. 이에 그들의 눈이 밝아 자기들의 데몬의 진정한 모습을 알고 말하니라. 네 얼굴에 땀이 흘러야 빵을 먹고 필경은 땅으로 돌아가리니, 그 속에서 네가 취함을 입었음이다. 너는 먼지(Dust)이니 먼지로 돌아갈 것이니라 하시니라.
- <황금나침반> 중에서
<황금나침반>에서 리라의 모험이 막바지에 다다를 때쯤 그녀의 삼촌인 과학자이자 탐험가 아스리엘 경은 성경구절에 얽혀 있는 비밀을 들려준다. 리라는 콜터 부인으로 상징되는 조직적, 정치적 종교집단의 권력 '성체위원회'에서 '인터시전'이라 불리는 데몬과 인간의 분리, 즉 영혼과 육체를 분리하려는 실험을 시도하는 것을 목도한다. 아스리엘 경은 풀먼이 성경의 창세기를 패러디한 이 대목을 읽어주며 '성체위원회'와는 다른 식의 인간과 데몬에 대한 해석을 들려준다. 아담과 이브가 선악과를 먹음으로써 생겨난 인간의 원죄는 반대로 인간이 자신의 영혼이 어떤 모습임을 알고자 하는 것이고, 그 알게 된 계기가 되었다고 긍정적으로 해석할 수 있음을 아스리엘 경은 말해준다.
풀먼은 이러한 대화를 통해 기독교의 유일신앙이 마녀와 집시, 토테미즘, 인간의 자유의지 등 오랫동안 인류와 함께 살아왔던 존재들을 부정하게 한다며, 종교적 다름이 '이단'으로 처단되던 기독교의 전통이 사람들의 자유로운 본성을 억누르고 있는 것이 아니냐는 기독교에 대한 근원적인 질문을 던진다. 풀먼은 "모든 사회는 정치적 권력이 주는 활기와 두려움 사이에서 긴장을 느껴왔다. 인간으로 인해 어떤 조직이 생기는 순간, 힘을 가진 자들이 나타나고 그 힘에 복종하는 사람들이 생긴다. 그 힘에 억압받는 사람도 있고 그 힘을 갖고 싶은 사람도 있다. 인간은 살아 있다는 것, 아름다운 우주의 한 부분이라는 것, 경이로움과 기쁨을 줄 수 있는 존재라는 자연스러운 가치와는 반대로 작용하는 체계들이, 인간이 만든 조직 안에 있다"고, 근본적인 가치를 추구하기보다 몸집 키우기에 혈안이 돼 있는 현재 미국의 기독교 사회를 비판한 적이 있다. <반지의 제왕>에서 절대 권력을 추구하고자 하는 인간의 욕망이 세계의 혼돈을 가져오는 것과 마찬가지로 개별자의 영혼을 일치시키려는 조직적 종교의 속성에 일침을 가하고 있는 것이다.
이런 '불경스런' 풀먼의 태도는 종교계의 반발을 불러올 만했다. 영국 최고의 청소년 문학상 '카네기 오브 카네기' 상은 물론, 가디언상, 휘트브래드상 등을 휩쓴 <황금나침반>을 두고 기독교 단체들은 "신을 모독하는 책"이라는 비난을 서슴지 않았다. 필립 풀먼이 J.R.R. 톨킨, C.S. 루이스 같은 동급의 현대 3대 판타지 작가 중 마지막 주자로 할리우드에 발을 내딛은 것도 어쩌면 이 신성모독의 도발성 때문인지도 모른다. 선과 악을 일방적으로 재단하고, 자유로운 사고와 개인의 존엄성을 규격화하려는 사회 안에서 필립 풀먼은 인간의 영혼이 무엇을 갈구해야 하는가에 대한 스펙터클하고 신나는 여행을 제안한다. (송순진 기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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혼용, 허물기로 구축한 환상세계 닐 게이먼(<스타더스트> <베오울프>)
J.R.R. 톨킨의 <반지의 제왕>으로 판타지 장르의 얼개는 완성된 듯 보였다. 서구 각 나라의 신화와 전설, 민담을 널리 아우르며 구축된 톨킨의 중간계는 오크, 엘프, 호빗이라는 생소한 존재들을 각인시키며 판타지라는 장르의 뿌리를 만들었다. 톨킨의 <반지의 제왕> 이후 등장한 판타지 장르 대부분이 그가 다져놓은 세계에서 시작하는 각양각색의 변주라고 해도 과언이 아닐 정도의 영향력이었다. 그러나 ‘환상성’이 뜻하는 광대한 범주만큼이나 판타지는 톨킨이나 <반지의 제왕>에만 국한될 수 없다. 그 증거가 될 만한 작가가 닐 게이먼이다.
만화, 소설, 희곡, 영화 등 대중문화 전반을 넘나드는 작가 닐 게이먼은 판타지 장르의 영역을 확장해나가는 사례다. <스타더스트> <베오울프> 등 최근 개봉한 할리우드 판타지영화에 색다른 밑거름을 제공한 그는 중간계와는 전혀 다른 세계, 또는 기존 판타지 장르를 패러디하는 작업을 통해 판타지 장르 외곽에 이질적인 축을 세우고 있는 것이다.
닐 게이먼을 언급할 때 반드시 따라붙는 대표적인 만화 <샌드맨>은 그의 독자적인 노선을 확인할 수 있는 역작이다. 제목 ‘샌드맨(잠을 몰고 오는 상상의 존재)’이 의미하는 것처럼 꿈을 관장하는 초월적 존재에 관한 이야기인 이 작품은 꿈을 이야기의 중심에 두고 있는 만큼 동서고금을 막론한 다채로운 신화적 소재, 이를 버무리는 막힘없는 상상력이 돋보인다. 1988년 DC 코믹스를 통해 연재한 <샌드맨> 시리즈는 종종 꿈이라는 자유로운 토양을 근거로 이미 존재하는 다른 세계의 판타지들을 한 세계 안에 몰아넣는 기이한 혼용을 보여준다. 이질적 문화와 세계로부터 나온 신화, 전설, 상상의 산물들이 한 이야기 안에서 충돌하고 융화하는 이야기는 공포만화라는 외피 속에서 환상성을 증식해나가는 닐 게이먼의 독특한 세계관을 대표할 만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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닐 게이먼을 명실 공히 판타지 장르의 총아로 자리매김하게 한 <샌드맨> 시리즈는 윌 아이스너 만화산업대상을 아홉 차례나 수상하며 작품성을 인정받았다. 그중 셰익스피어의 희곡 <한여름 밤의 꿈>을 기반으로 한 <샌드맨> 시리즈의 단편인 1991년 작 <한여름 밤의 꿈>은 만화로는 최초로 세계환상문학상 수상작으로 선정되는 영광을 안기도 했다. 요정들이 등장하는 동명 원작 희곡을 기반으로 한 닐 게이먼의 <한여름 밤의 꿈>은 셰익스피어의 연극을 실제 공연하던 중 진짜 요정들이 연극을 관람하며 벌어지는 일련의 작은 소동극을 그린 작품이다. 이 작품을 통해 닐 게이먼은 셰익스피어의 연극을 현대적인 감각으로 재해석하는 것은 물론 다양한 신화적 존재를 끌어들이는 방식을 보여준다. 이렇듯 <샌드맨>은 수많은 종교, 신화, 민담, 전설 등에 근거한 다양한 상상력의 원천과 공간들, 그리고 판타지의 기원을 이루는 생명체들을 유려하게 섞어가며 판타지 장르의 독특한 변주법을 제시했다.
만화계에서 입지를 굳힌 닐 게이먼은 테리 프래챗과 공저한 소설 <멋진 징조들 Good omens>을 통해 소설로도 발을 넓혔다. <멋진 징조들>은 인류의 종말을 이끄는 적그리스도의 이야기인 영화 <오멘>을 패러디한 작품으로 유쾌한 풍자와 기독교적 세계관을 전복하는 발칙한 상상력으로 묵시록을 재해석한다. <멋진 징조들>의 성공을 발판으로 BBC를 통해 방영된 6부작 판타지 드라마 <네버웨어>의 각본을 집필하기 시작한 그는 만화를 통해 선보였던 독특한 판타지 세계를 본격적으로 영상화하기 시작한다.
<네버웨어>는 런던의 지하세계를 현실의 평행세계로 가정하고 여기에 무자비한 암살자와 신화 속 괴물들이 살아 숨 쉬는 독특한 판타지를 구현한다. 런던 지하와 버려진 지하철역을 또 다른 세계로 가정하는 설정도 기발하지만 나약한 샐러리맨 주인공 메이휴를 비롯해 등장인물 대부분이 미스터리와 판타지가 뒤섞인 독특한 질감을 띤 것이 특히 주목할 만하다. 신화와 전설을 모티브로 했거나 패러디를 통해 캐릭터를 완성했던 닐 게이먼은 “이 작품에서는 새로운 인물을 창조하며 새로운 공간의 의미를 더욱 배가시키려 했다”고 밝힌 바 있다. <네버웨어>는 이후 영상으로는 미처 보여주지 못한 세밀한 구성을 덧붙여 그의 첫 단독소설로 출판되었다.
1998년 선보인 장편소설 <스타더스트>는 2007년 매튜 본 감독에 의해 영화화된다. 다분히 동화적인 상상력을 바탕으로 한 <스타더스트>는 소년의 성장을 다룬 전형적인 판타지 장르로 읽힌다. 그러나 별을 의인화하고, 사랑을 쟁취하기 위해 별을 갈구하다 마침내는 별의 여인과 사랑에 빠지는 설정이 그러하듯 낭만적이고 동화적인 세계를 구현하며 신비로운 분위기를 자아낸다. 젊음을 갈구하는 늙은 마녀와 같은 전형적인 캐릭터를 반동인물로 놓고 여성성을 숨기고 사는 해적선장을 주인공의 조력자로 내세우는 등 기묘한 캐릭터의 변주 역시 극에 독특한 분위기를 가미한다.
특히 형제들을 죽여야 왕위를 계승할 수 있다는 암묵적 규칙을 벗어던지고 처음부터 ‘암살의 법칙’을 뒤엎는 방식은 <멋진 징조들>에서 보여줬던 풍자와 해학을 그대로 판타지에 적용한 예로 읽힌다. 이는 현실과 다를 바 없이 구축된 또 다른 세계 위에 장대하고 무거운 이야기를 서술해나가야만 한다는 판타지에 대한 할리우드의 강박관념에 반한다. 죽은 상태 그대로의 모습으로 이승을 맴도는 왕자의 혼들이 농담 따먹기를 하며 만들어내는 위트는 <스타더스트>가 갖는 낭만적 분위기와 동화적 분위기에 미려하게 흘러든다.
북유럽 신화를 바탕으로 한 고대서사시, 그러나 현대에는 지루하기 이를 데 없는 고전 취급을 받는 <베오울프>를 흥미진진한 영웅 일대기로 재구성한 것 역시 닐 게이먼의 역량을 증명한다. 베오울프 신화는 무척 단순하다. 크게 두 부분으로 나뉘는 베오울프의 이야기는 괴물 그렌델을 죽이는 전반부, 그리고 시간이 많이 흐른 뒤 용을 죽이는 후반부로 이뤄져 있다. 그러나 닐 게이먼과 케이틀린 R. 키어넌이 함께 작업한 소설 <베오울프>는 이런 도약하는 영웅의 일대기를 완성하지 않고 영웅의 몰락에 집중한다. 로버트 저메키스 감독이 영상으로 구현한 <베오울프>는 압도적인 시각적 성취가 우선 다가온다. 그러나 닐 게이먼과 로저 애버리가 함께 완성한 시나리오는 영웅의 화려한 액션에 집중하는 데 그치지 않고, 선과 악의 모호한 구도와 그저 영웅이기만 했던 베오울프의 면모를 완전히 뒤집으며 고민하고 갈등하고 유혹받는 인간의 이야기로 완성한다.
<스타더스트> <베오울프>의 국내 개봉에 발맞춰 닐 게이먼의 작품들이 국내에도 속속 출간되고 있다. 그러나 판타지라는 장르로 뭉뚱그릴 수 없을 만큼 방대한 영역에서 열정적으로 작업하는 닐 게이먼은 종잡을 수 없는 판타지 작가다. 구축된 것들을 재활용하고 또 허물기를 반복하면서 판타지의 너른 영역과 구석구석을 헤집는 닐 게이먼식 스타일. 다방면으로 활동하다 할리우드와 손을 잡은 닐 게이먼의 판타지 세계는 앞으로도 '환상성'의 의미를 더 넓게 확장시켜 놓을 것이다. (강상준 기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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할리우드가 편애한 장르의 제왕 데니스 루헤인(<미스틱 리버> <가라, 아이야, 가라> <살인자들의 섬>)
스릴러, 호러 같은 장르 소설을 번역하다보면 예기치 않은 호사를 누릴 때가 있다. '영화화'라는 것인데, 할리우드의 낙점이 곧바로 책의 판매율과 직결되다보니 작가에 비할 바는 아니더라도 가난한 번역쟁이에게도 콩고물 정도는 떨어지게 마련이다. 올해는 필자가 작업한 책들의 영화화 소식이 많이 전해진 해이기도 하다. 막 개봉한 <나는 전설이다>, 스티븐 킹의 <1408> <미스트> <셀>이 줄줄이 영화화됐거나 영화화를 앞두고 있다. 최근에는 <미스틱 리버>의 원작자 데니스 루헤인의 <가라, 아이야, 가라>가 미국에서 개봉했으며 마틴 스콜세지는 <살인자들의 섬>을 영화화하기로 했다.
아무래도 <반지의 제왕> <해리 포터> 시리즈, <다빈치코드> 등의 성공으로 몇 년 전부터 장르 소설의 영화화 붐이 할리우드에 불고 있기 때문일 것이다. 데니스 루헤인 역시 이런 현상의 일부에 불과할지 모르겠다. 그러나 굳이 순위를 매기자면 루헤인은 2007년 할리우드가 낙점한 장르 소설의 제왕이라 해도 부족함이 없어 보인다. 2003년 클린트 이스트우드에 의해 영화화된 여섯 번째 소설인 <미스틱 리버>로 끝난 줄 알았던 루헤인과 할리우드의 인연은 2007년 봇물처럼 터졌다. 얼마 전 <가라, 아이야, 가라 Gone, Baby, Gone>가 배우 벤 애플렉의 감독 데뷔작으로 만들어져 대단한 호평을 받았고, <살인자들의 섬 Shutter Island>은 마틴 스콜세지 감독과 마크 러팔로, 레오나르도 디카프리오를 내세워 제작 전부터 화제를 모으고 있다. 게다가 조시 올슨이 단편집 <코로나도> 중 '그웬을 만나기 전 Until Gwen'을 연출하겠다고 나섰으며, <가라, 아이야, 가라>의 속편 격인 <비를 바라는 기도 Prayer for Rain> 역시 파라마운트가 준비하고 있다는 소식이다. 이미 출간된 장편소설 7편 중 총 4편, 그리고 단편 하나가 영화로 제작되었거나 준비 중이다. 게다가 얼마 전 탈고한 역사소설 <더 기븐 데이 The Given Day> 역시 할리우드가 군침을 흘리고 있다는 소문이 자자하다.
할리우드가 선호하는 장르 소설의 경향이 판타지와 호러에 편중돼 있다는 현실을 비춰볼 때 루헤인의 선전은 상당히 의외로 보인다. 최근에는 형사, 탐정소설을 영화화하는 예가 보기 드물었을 뿐 아니라, 마이클 코넬리, 조지 펠레카노스 등 어쩌면 루헤인보다 더 유명한 소설가에게도 할리우드의 러브콜은 좀처럼 없었기 때문이다. CG 기술의 발전이 로봇에게도 생명을 부여하는 마당에, 자동차 추격 신 같은 간단한 볼거리조차 없는 수사물이라니. 속내를 들여다보면 반드시 그렇지만은 않은 것 같다. 세 친구의 과거에 얽힌 분노와 비극을 그린 클린트 이스트우드 감독의 <미스틱 리버>의 성공은 차치하고라도, 네 살 난 소녀의 실종사건을 다룬 범죄 수사물 <가라, 아이야, 가라>는 평점이 무려 9.3에(미국 영화사이트 '로튼토마토닷컴' 현재 기준) 신인감독 벤 애플렉에게 '뛰어난 감독상'까지 안겨주지 않았던가. 데니스 루헤인의 소설은 단순한 관심을 넘어 할리우드 제작자와 감독들이 군침을 흘릴 만한 먹잇감임에 틀림없다. 대감독 마틴 스콜세지까지, 어쩌면 케케묵었다고도 할 수 있는 2004년도 작품 <살인자들의 섬> 카드를 꺼내든 것도 이해할 만한 대목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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빠르고 지적인 전개, 수준 높은 유머, 상식을 뛰어넘는 연속적인 반전, 세상을 바라보는 새로운 시각 등. 루헤인 소설의 매력은 끝이 없다. 그러나 이런 것들은 독서 비평의 기준이 될지언정 할리우드의 선택을 이끌 만한 미덕은 아니다. 스크린은 언어가 아니라 '액션'으로 설명하고 사건이 아니라 '화면'으로 승부하는 세계가 아니던가. 사실 루헤인의 소설 속 장면들은 매혹적이다. 그것도 그냥 매혹적인 것이 아니라 치밀하게 매혹적이다. <미스틱 리버>에서 딸의 시체를 내려다보는 지미(숀 펜)의 눈빛, <가라, 아이야, 가라>에서 비오는 날 켄지와 레미 브루사드 형사(에드 해리스)와 미식축구 시합을 하는 장면, 소파에 앉아 성인 프로그램을 보는 아만다의 얼굴 위로 TV의 광고 화면이 핥고 지나가는 장면들. 이들은 루헤인 식의 독특한 캐릭터들과 조합돼 어느 판타지나 공포영화보다도 커다란 전율을 불러일으킨다.
데니스 루헤인은 2004년 영화 <미스틱 리버>의 제작과 관련한 어느 인터뷰에서 “캐릭터가 액션이다. 그건 아리스토텔레스까지 거슬러 올라가는 뿌리 깊은 창작의 원칙이며, 플롯이란 그저 캐릭터들이 활동하는 무대에 지나지 않는다”라는 말로 자신의 작품세계를 요약한 바 있는데, 필자 역시 그의 자평에 전적으로 동의하는 바다. 덧붙이자면 그의 소설을 스크린으로 전환하고, 더 나아가 관객들의 시선을 사로잡을 만큼 매혹적으로 만드는 데 필요한 액션과 장면은 바로 그의 캐릭터에서 나온다는 뜻이다. 이 같은 루헤인의 원칙은 감독들에 의해서도 충분히 증명되고 있다. 제작이 완료된 <미스틱 리버> <가라, 아이야, 가라>는 원작에 대한 각색이 거의 없을 뿐더러 러팔로, 디카프리오를 전면에 내세운 <살인자들의 섬>처럼 유례가 없을 정도의 묵직한 연기파 배우들로 채워져 있다. 하물며 <가라, 아이야, 가라>는 에드 해리스, 모건 프리먼 등 조연급 배우의 관록에 더 신경을 쓴 듯하다.
데니스 루헤인은 타고난 작가이자 플로리다 대학원에서 영문학 창작과정의 석사학위를 마친, 전문 작가다. 데뷔작 <전쟁 전의 한 잔 A Drink before the War>부터 셰이머스상을 거머쥔 이후로도, <미스틱 리버>와 단편 '그웬을 만나기 전' 등으로 적지 않은 수상과 아마존 베스트셀러의 영예를 차지하면서 장르 문학계를 평정했다. 할리우드가 자신을 주목한 이유에 대해 “행운”이라고 간단히 답했으나, 루헤인은 이미 장르 문학의 테두리를 넘어서는 재능과 탄탄한 능력을 겸비하고 있는 작가였다.
“설마 저 안에 뛰어들 생각은 아니겠지?” “왜 아니겠어?” (중략) 내가 몸을 돌렸을 때 이미 그녀의 몸은 허공을 날고 있었다. 두 다리를 쭉 뻗고 가슴을 활짝 열어놓은 그녀. 마침 오른쪽으로 선회한 헬기의 조명을 받은 그녀는 한 마리 학처럼 고고해 보였다. 그리고 미사일처럼 곤두박질쳤다. 하얀 불빛 속의 검은 점. 물속을 헤집는 날카로운 단도.
- <가라, 아이야, 가라> 중에서
루헤인의 장면 묘사는 이런 식이다. 깊은 밤 어느 채석장에서 어린 아이의 시체를 찾아다니는 중이건만 전체적인 분위기는 잘 연출된 블록버스터 화면을 보는 듯 화려하다. 물론 이런 연출을 가능케 하는 것은 칠흑 같은 어둠 속에서 15미터 낭떠러지로 일말의 주저 없이 뛰어드는 앤지의 현실-비현실적인 성격이다. 이른바 ‘캐릭터가 액션’이라는 루헤인식 철학이 적절하게 배어든 대목이다. 루헤인이 캐릭터에 쏟는 열정은 혀를 내두를 만하다. 단 한 장면밖에 나오지 않는 단역이라도 개성적으로 묘사된다.
철두철미한 루헤인의 작가정신을 보건대 할리우드는 계속 그를 주목하게 될 것이다. 특히 루헤인의 캐릭터 연출은 독특하다. 우리는 <미스틱 리버>의 지미에서 <살인자들의 섬>의 수수께끼 형사 테디, 그리고 <가라, 아이야, 가라>의 패트릭까지 그의 주인공들은 물론, 주요 조연들까지 모두 현실-비현실, 선-악의 가장자리에 발을 걸치고 있음을 볼 수 있다. 작가는 바로 그 점을 이용해 캐릭터들이 뛰어놀아야 할 플롯이라는 공간을 현실의 극한까지 확장하고 있는데, 궁극적으로는 장면 하나하나를 블록버스터 판타지 화면처럼 화려하고 신선하게 채색해놓는 것이다. 요컨대 할리우드가 루헤인의 소설에서 보는 것은 단순한 리얼리티 형사물이 아니라, 오히려 일종의 판타지와 호러였다는 뜻이다. (조영학(장르문학번역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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