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왕희지의 서적이 당나라 때 전파된 것 :王羲之书迹在唐时期的传播
출처: "토성의 로고 아래" 작성자: 罗丰 중국 고고학 소스 : 동북아역사문물연구원
▲ 남송 양해의 우군서선도 왕희지의 서적은 탄생 때부터 전 사회의 사랑을 받아왔습니다.양무제 소연 시대부터 널리 수집되었는데, 소위 이왕의 서적은 15,000장 이상입니다.양무제는 왕희지의 서예를 감별하는 데 일가견이 있어 왕서에 관한 논술은 대서가 도홍경과 왕래한 서한에 집중되어 있습니다.
왕희지의 서예 지위의 확정은 의심할 여지 없이 양무제의 추앙과 불가분의 관계입니다. 당 태종 시대의 왕희지의 서적은 양 무제 시대보다 훨씬 적습니다, 태종은 전국의 힘을 다하여 심혈을 기울여 뒤졌습니다.우세남과 AAA1을 사용하여 진위를 구별하고 AAA2가 편찬한 '이왕서목'은 후대에 왕서를 이해하는 기본 문헌이 되었습니다.
왕희지의 서예를 전파하기 위해 태종은 근신이자 전임 탁서인인 구양순(欧陽询), 우세남(虞世南), 저수량(褚遂良), 풍승소(冯承素), 조모(趙模), 탕푸처(唐普彻) 등 탁모 왕희지의 서첩을 종실, 제자 및 대신들에게 나누어 주도록 명했습니다.내부에 소장되어 있던 왕희지의 서적의 모습을 세상 사람들이 목격하게 되면서 민간에 알려지게 된 것입니다.
유덕묘지 등 당나라 초기의 일부 서적은 이미 왕희지의 서법을 배우는 모습을 보이고 있으며, 개별 필적은 조금도 틀리지 않습니다.왕희지의 서예 전파 지역은 중원 지역에 국한되지 않고 둔황, 신장 및 기타 지역의 일부 발견은 먼 서역 사람들도 '난정서'와 같은 유명한 유적지를 배우고 있음을 보여주며, 특히 '십칠첩'의 서예 연습 수준이 높습니다.
일본 견당사는 당나라에서 대량의 물품을 가져왔는데, 그 중에는 왕희지, 왕헌지의 서적이 담긴 임모품이 포함되어 있습니다.이 서적들은 질서정연하게 전승되고 있으며, 일부는 심지어 현대까지 보존되어 있습니다.
일본 유명 서예가 빈바다, 최고, 오노도 바람 등 어느 것 하나 왕자의 영향을 받지 않았습니다.왕희지(王羲之)의 법서(法書)가 한자 문화권에 퍼지면서 고려·일본 등지의 한자 수준이 상당한 수준에 이르렀습니다.일본의 니시카와닝에서 항복한 많은 학자들은 이미 좋은 성과를 거두었습니다.
▲ 소익벌란정도는 양무제를 통해 수집되었고, 왕희지의 서적은 거의 다 짜여졌습니다.왕희지가 쓴 내용은 대부분 사적인 편지였는데, 유송 때부터 서신 첫 두 글자의 이름을 따서 서첩을 짓는데 익숙했고, '십칠첩(十七帖)' 등은 이런 결과가 많았습니다.
왕희지의 서첩은 세상에 나올 때부터 대중과 단절되어 있었고, 난세가 일어나야 황궁에서 민간으로 흘러나갔습니다.소위 '치세'와 '성세'가 일어나면, 황궁 내부의 소장품은 후세에 계승되고, 민간에 유입된 왕자도 권력자에 의해 수단과 방법을 가리지 않고 수색되어 다시 황궁으로 돌아와 깊이 숨길 것입니다.
유명한 '소익(萧翼)이 '난정(蘭亭)'을 벌었다는 이야기는 이런 윤회의 극단적인 독점 사상의 산물입니다. 왕서첩의 복제 수준은 당나라 때 전례 없는 절정에 달했습니다.왕희지 서첩에 대한 저의 논의는 크게 두 가지 경로를 따라 진행됩니다.
역대 서적 모조에 대한 기록은 우리에게 주요 단서를 제공하여 서적의 도구, 종이 사용 및 기본 방법을 일반적으로 이해할 수 있도록 했습니다.또한 현대적 기법을 이용하여 고대 서적을 관찰한 결과, 왕희지의 법첩이라는 기존의 소리 탁본 모작의 구체적인 방법과 노하우를 알 수 있게 됩니다.
1. 왕희지의 서적 수집 당나라 초년에 당 태종이 고심하여 수집한 왕희지의 서적은 대체로 기록되어 있습니다:문황제가 마음껏 구입하여 천하를 다 모았으나 대왕의 진서는 겨우 50용지, 행서 240용지, 초서 이천용지, 금보로 장식하였습니다.[1]그 중 진서가 적고 행서가 그 뒤를 잇고 있으며 초서가 총 2,900지로 13질 128권으로 구성되어 있습니다.
"진서, 오십지, 일질 여덟 장, 본의 길이에 따라 도, 행서, 이백사십지, 사질사십권, 사척도, 초서(草書), 이천지(千紙), 팔질팔질(八帙八卷)은 일장 이척으로 도를 이루고 금루잡보(金缕杂寶)는 축에 직조하여 질(帙)을 만들고 그 틈마다 소인(小印)을 찍어 그 글을 정관(貞觀)이라 합니다.[2]천하왕서(天下王書)는 비록 누락이 있을 수 있으나[3]대체로 그러합니다.
회인집서가 의지하는 왕희지의 서적은 기본적으로 내부 소장 범위를 벗어나지 않습니다. 물론 왕희지라는 방대한 서첩에 진위가 뒤섞여 있는 것이 꼭 왕희지의 진품일 필요는 없습니다.이 점은 당국 사람들이 잘 알고 있습니다,
그러나 함부로 부는 일은 이미 오래되었고, 장익과 승혜식이 우군을 섬기는 것과 같이 시인은 구별할 수 없습니다.최근에 석지영(释智永)이 초첩을 써서 진실을 혼란시키려고 합니다
예를 들어, 송나라의 많은 학령들, 강흔, 왕승건, 박소지, 양흔 등도 그 냄새를 혼합하려고 했습니다.이왕의 책에는 거짓 흔적이 많고 좋은 일에 특히 주의를 기울여야 하며, 훌륭한 보물은 연석과 같으며, 유식한 것은 비웃는 것입니다.[4] 이 서적들은 진위를 가릴 수 없지만 세속 사회에서도 가치를 평가하는 방법이 있는데, 간단하고 쉬운 측정 기준은 진실, 행, 풀의 세 가지 수로 각각 평가됩니다.
왕자는 적의 행서이고, 세 줄의 행서는 적의 행서이고, 편첩은 이와 같습니다.예를 들어 '락의', '황정', '태사잠', '화찬', '누표', '고서' 등이지만, 한 편을 만들어야 국보이기 때문에 글자 수가 천이나 만이 될 수 없습니다.감별이 정교하고 거칠어서, 그는 모두 이것을 모방했습니다.[5]
▲소익벌란정도萧翼赚兰亭图(일부) 유명 서예가 종소경 씨는 왕서를 좋아했고 파산도 마다하지 않았습니다.수백만 원의 돈으로 왕희행서 다섯 장만 얻었을 뿐, 한 글자 진서도 얻지 못했습니다.엄격한 서예 감정가의 진행 하에, 거의 다 수습된 왕희지의 서첩이 더욱 선별되었습니다.
주로 위징, 위세남, AAA수량 등이 진위를 감정했습니다[6].저수량이 쓴 《진우군 왕희지의 서목》에는 본서 5권 40첩, 행서 58권으로 정관 연간[7]에 나와 있습니다.
초서가 너무 번잡해서 그런지 한동안 마땅한 목록을 정리하지 못했습니다. 원본과 행서는 당초 70권에서 63권으로 줄었고, 명백히 사실이 아닌 왕자는 AAA 씨에서 제거되었음을 알 수 있습니다.가장 많은 수의 초서는 통계에 포함되지 않으며 초서를 구별하는 것이 더 어려울 수 있습니다.
왕희지 법첩의 초당(初唐)은 초서(草書)와 행서(行書)가 대종을 이루었는데, 초서의 식별 한 가지만은 초서에 능한 서가가 완성한 것으로 초서를 감상하는 것은 말할 것도 없습니다.
행서, 본서는 일반인이 감상하는 서체여야 합니다. 저수량의 변별력은 의심할 여지가 없지만, 방대한 이른바 왕서 진적(眞迹)에 대한 그의 심사가 어디까지 치밀했는지는 알 수 없으며, 그 후로는 내부에 소장되어 있는 왕희지의 서적에 대해 이렇게까지 세밀하게 접근한 사람은 아무도 없으며, 물론 저수량의 심사의견[8]을 뒤집을 수도 없습니다.
둘째, 왕희지 서적의 복제 태종 때, 왕희지 서적을 대량으로 수집하는 것 외에도 왕자를 더욱 전파하기 위해 탁서인을 두어 귀중한 서예 진적을 복제하는 데 사용하였습니다. 이 보물들은 일반 대중과 인연이 없을 뿐만 아니라, 왕공대신도 특정 장소에서만 얼굴을 볼 수 있습니다.
하연지(何延之)의 『난정기(蘭亭記)』는 당 태종이 『난정서(蘭亭序)』를 받은 후 "제명(帝命)은 탁서인 조모(趙模)·한도정(韓道政)·풍승소(冯承素)·제갈정(諸葛貞) 등 4명을 모시고 각각 『난정』을 수권씩 탁본하여 황태자·제왕·근신에게 하사하라"고 하였습니다[9].
탁서인(拓書人)은 조정에서 서적을 복사하기 위해 설치한 직위로, 문하성(門下省), 중서성(中書省), 태자 동궁(東宮)에는 다양한 수의 전문 탁서사들이 있었습니다.
문하성 홍문관(弘文館)에 탁서수(拓書手) 3인을 두었는데, 《당육전(唐六典)》에서는 정관(貞觀) 23년(649년), 용삭(龍朔) 3년(663년)이라 하였고, 관내 법서(法書) 9249권을 장정하여 그 탁서를 중지하였습니다.선룽 원년(705년), 중서성(中書省)에 또 설치[10].물론 홍문관에만 탁서수가 있는 것은 아닙니다. 중서성, 집현원에도 탁서수가 있습니다.
다만 조금 늦게 처음 두 사람을 간원전에 두었습니다.개원 14년(726)에 6명으로 증원[11].동궁 숭문관에도 탁서수 두 사람[12].태종은 왕자의 진적을 탁본한 후 방현령 이하 8명에게 하사했습니다.
탁서인 톰프처(汤普彻)는 탁서의 변을 빌려 "도둑질을 해서 밖으로 전해졌습니다."고종 때 풍승소(冯承素), 제갈정척(諸葛貞拓)에게 명하여 《악의론(樂毅論)》 및 잡첩본(杂帖本)을 내려 장손무기(無忌) 등 6명에게 하사하였는데, 외방에서는 [13]이 있었습니다.정관 13년(639) 이후 이 보물들은 외부인에게 노출되지 않았습니다.
적인걸의 능서를 들은 측천(武则天)은 "신은 어려서부터 좋은 책은 보지 못하고 우성만 따랐는데 어찌 만질 수 있겠습니까?"즉, 천변 내에 이왕의 진품 20권이 나옵니다."견왕품 중 사시는 모든 재상에게 표하고, 사의를 표한 후, 즉시 들어갈 것입니다." [14] 재상들이 비로소 운 좋게 보았습니다.무측천 때 왕희지의 서적은 한번 크게 흩어졌습니다.
"태평공주는 왕질 50권을 가져다가 호서 인봉하지 마세요. 재상 각 30권, 장군, 부마 각 10권입니다.그 이후로 내부 창고의 진적이 모든 집에 흩어져 있습니다.
▲ 난정서(神龍本)는 부분 개원 17년(729년)에 왕서를 집현원(集賢院)에 보내어 20권을 탁본하고 황태자와 제왕학(諸王學)에게 하사하였는데, 이 작업은 약 2년 동안 진행되어 개원 19년(731)에야 비로소 내부가 마무리되었습니다.
[16]그 방법은 "영집자탁진(令集字拓進)하고, 또한 문탁(文拓)에 따라 두 권을 안으로 들여보내어 여러 왕에게 나누어 하사하라"는 것인데, 다만 후에 권틀이 방대하여 150권이나 되었기 때문일 것이다, "후속차가 수도에 들어왔으나 진본에 들어갔으나, 뜻밖에도 집자"[17].목표대로 되지 않은 것 같지만, '집자탁진'이라는 방법은 우리가 탁서를 이해할 때 선택할 수 있는 선택입니다.'집자(集字)'는 황자가 공부하기에 편할 것입니다.
공식 탁서인은 왕희지의 서첩 보급을 추진하는 중견 인파로, 결국 이런 전문적인 기술을 모든 사람이 습득할 수 있는 것은 아닙니다.대부분의 사람들의 학습 방법은 주로 모사이며, 물론 일반 서가들도 각고의 노력을 기울이면 왕자를 조금도 틀리지 않게 모사할 수 있습니다.AAA1의 여동생인 AAA2가 마씨에게 시집갔는데, 마씨 유씨라고 불리는 여류 서가는 안실란정을 강제로 몰아붙여 진품을 빼앗았습니다.예를 들면 밀비가 교묘하게 생긴 것과 같고, 안녕은 옛날과 같습니다[18].
▲ 『매지첩』은 『난정서』를 '모탈진적(母夺眞迹)'으로 모사할 정도로 수준급.현존하는 소위 당나라 사람들이 '난정서'를 모사한 것은 아마도 폭넓은 인지를 바탕으로 한 산물일 것입니다.유진서 冩당 현종의 '다섯째 손녀 묘지'도 발견되었는데, 그 직함은 조의랑, 행태자궁문랑, 한림원 봉안 유진서, 책 冩시간은 천보 13년(754)이고 문행서는 한림서일로[19]입니다.
복제 외에도 다른 사람들은 왕서를 위조하였는데, 이회림은 "국초시호위적"이라고 하였고, "대급취"는 왕서 및 칠현서, 가짜 운설도형서, 그리고 죽림서사병위부인, 기강절교서, 그리고 회림의 위적이 라고 하였습니다."20]
▲<유덕묘지>와 왕희지<난정서>의 행서용자 비교3, <유덕묘지> 당<유덕묘지>의 하남 안양 출토[21], 뜻이 없는 자, 인덕 원년(664)의 문행서(文行書)가 유창한데 주목할 만한 점은 지문의 일부 용자 중 32자가 <난정서>의 용자와 유사하다는 것입니다.우리가 비교에 사용한 원본은 펑청쑤의 모델입니다.
『유덕묘지』는 왕희지의 『난정서(蘭亭序)』 탁본(拓本)을 임습한 것으로 추정되는데, 이 32자는 유사도가 높고 심지어 똑같습니다.특히 '문(文)'자는 그림을 누르는 굵은 글씨까지 닮았습니다.유𫗧《수당가화(隋唐嘉話)》에는 "정관(貞觀) 10년, 탁본(拓本) 10권을 근신(近臣)에게 하사하였습니다.
황제가 무너지고, 중서는 AAA에게 '난정' 선제가 중히 여기니 남기지 말라'고 명령했습니다.마침내 소릉에 비밀로 했습니다."[22]먹수(墨薮)는 "탁서인 탕푸처(汤普彻) 등이 탁서한 난정(蘭亭)을 사량공방(赐梁公房)의 현령(玄令)이 여덟 명이나 되었습니다.
철저하게 몰래 빼내어 밖으로 퍼뜨렸습니다."[23] 탁서인 톰프처(汤普彻)가 『난정(蘭亭)』을 도려내 외전(外傳)했다면, 『유덕묘지(劉德墓誌)』가 쓰인 지 불과 30여 년 만에 민간에 퍼진 속도다.물론 《난정》의 전파사에는 양나라 때 《난정》이 내부로 흘러들어갔다는 기록이 있는데, 수 개황 연간에 《난정》은 이미 상석에 《개황본》이라는 설이 탁본되어 있고, 옹방강은 이와 유사한 설을 일축하고 있습니다[24].
즉, 정관 연간에 내부에서 유출되어 불과 30년 만에 고수가 이첩을 이렇게까지 오묘하게 배울 수 있었던 것은 난정서의 존재 가능성을 방증하는 것이기도 합니다.초당시대 사람들은 이것을 본떠 왕희지의 서예를 배우러 왔습니다.
'유덕묘지'의 필자는 아직 자신의 것을 섞지 않고 비슷한 것을 목표로 하고 있으며, 적어도 이 30여 글자는 우리에게 비교할 만한 모범 사례를 남겼습니다.
▲ 북송 탁의 성교서(성교서) 넷, 난정서(蘭亭序) 열일곱 첩은 서역 왕희지의 난정서(蘭亭序)가 발견된 이후 가장 큰 영향을 미치는 서첩으로 급부상하며 널리 퍼졌습니다.
돈황문서 P.4764호 《서한》의 한 단락은 《난정서》를 임습하는 것인데, 물론 이러한 임습은 제멋대로이며 유행하는 스타일과는 약간 다르며, 개별 글자는 중복으로 쓰기도 하는데, 예를 들어 "격"자가 세 번 있는데, 워싱화(沃興華)는 정식으로 쓰기 전에 연습한 것으로 추측되며, 아래의 글자를 보기 좋게 베끼기 위해서이다[25].
둔황 투루판 문서 중 왕희지의 서적 필사본 중 '난정서' 임본이 가장 많으며 이미 9건[26]이 있습니다.이 임시본들 중 일부는 전문을 베꼈는데, 예를 들면 P.2544호, 일부 임습 장면, P. 제외4764호 외에 P.2622호 P.3194호 등;일부 단어연습,예,S.문서 1619호.
▲ P.3194 전체적으로 볼만한 글씨가 있긴 하지만 서예 임습의 관점에서 보면 모방 수준이 보통입니다.따라서 연구자들 사이에서 문장을 베끼느냐 서예를 위한 임시 베끼느냐의 차이가 발생합니다[27].
《난정서》가 서역에 멀리 전파되었다는 사실은 관청의 강력한 추천으로 왕희지의 서예가 널리 전파되었음을 보여주며, 타림분지의 남서쪽 우전 지역에서도 《난정서》의 텍스트가 8세기경에 임습되었습니다.
돈황문서에 전해지는 왕희지 임습서첩 중 하나는 왕희지 각첩에 자취는 없고 여러 종류의 임본이 전해지는데, 이것이 바로 《상상황기첩》입니다.
왕희지의 《상상황기첩》은 저수량의 《우군서목》에 "상상황기칠행."[29]그러나 이 글의 원첩이 왕희지(王羲之)가 쓴 것인지는 양나라 때 논란이 되었는데, 도홍경은 "'상상황기첩(尙想黃绮帖)' 한 종이나 '수결체(遂滞)' 한 종이나 모두 두 편이나 후세에 배운 것이 매우 졸렬합니다.”[30] S.214、S.3287、P.2671、P.3368 등의 문서에는 『상상황기첩(尙想黃绮帖)』 임습본[31]이 있습니다.
투루판 72TAM 179:18 아래의 각 습자 조각은 모두 '상상황기첩'의 단편입니다.필사본에는 앞서 언급한 둔황 문서보다 먼저 무주라는 새로운 글자가 있습니다.더 중요한 것은 당시 학생들의 습자 습관을 볼 수 있는데, 한 글자당 두 줄을 쓰고 선생님은 평어를 써야 합니다.
왕자의 해서는 당나라 습자의 표본으로 중원에서만 전해지지 않고 서역에 도달했습니다[32].《상상황기첩(尙想黃绮帖)》은 일본에도 전해졌는데, 후지와라노 유키시게(藤原行成)의 일기 《권기(權記)》에 관홍(宽弘) 8년(1011) 6월 8일에 관홍(宽弘) 5년 4월 14일에 빌린 의양전 어본(御本) 6권을 조기(條記)로 반환하였다고 기록되어 있는데, 그중 왕희지의 진서 《상상황기첩(尙想黃绮)》[33]이 있습니다.
왕희지 초서첩 중 '십칠첩'이 가장 유명한데, 이 첩은 왕희지가 익주자사 주무에게 보낸 편지로 전해지고 있습니다.당 태종의 유명한 소장품 중 하나로 일찍부터 각석으로 전해지고 있습니다.『십칠첩』은 『郗사마첩』『일민첩』『용보첩』『사포의첩』『적설응한첩』『복식첩』『지족하첩』『첨근접(瞻近帖)】『천서고첩(天鼠膏)】〈주처인(朱處仁)〉〈칠십첩(七帖)〉 등 29책으로 구성되어 있습니다[34].
▲ S.3735 그 중 S.3735호, 첨근첩, 용보첩, P.4642호는 '찬 罽 호두첩'[35]에, 오장본 ДХ11204호는 '복식첩'[36]에 임하며, 본래의 연대는 당나라와 5대 때쯤[37]에 임합니다.
4개의 행은 후세에 쓴 글과 약간 다르지만 기본 텍스트는 거의 동일하며 약간 다른 글은 후세에 쓴 글보다 문장이 더 매끄럽고 교정 가치가 있습니다.린의 필체는 강하고 유창하며 필획의 무게와 리듬이 분명하며 전체 필체는 삶의 자태를 살피고 필치가 연결되어 있으며 크기가 들쭉날쭉합니다.
분명히 전통적인 각본보다 훨씬 더 생생하며, 마오추근은 임본이 먹물에 더 가까운 각본의 의지처를 가지고 있다고 추측합니다.또한 둔황본 『기서첩』은 당인 쌍구의 왕희지(王羲之)의 서예이다[38]. 요컨대 둔황의 투루판 문서 등 왕희지의 임습 서첩 중 '난정서'가 가장 멀리 전해지고 있으며, '십칠첩' 임본은 전체 임본 중 서예 수준이 가장 높습니다.
이것들은 모두 왕자의 실제 영향과 일치합니다. 전자는 왕희지의 가장 유명한 서첩이고, 《십칠첩》은 서예인의 마음속에서 중요한 의미를 가지고 있습니다. 초서의 임습 문지방은 타체보다 현저히 높습니다.
▲ P.4642 전 남당의 징심당첩(澄心堂帖) 본의 낙신부(洛神赋)도 왕비첩의 한 집입니다.[39]글씨는 행해서로, 청나라 건륭 연간에 사람 장황(張煌)이 소장하고 있으며, 청나라 사람 철보 등이 소장하고 있으며, 말서 "영화 10년 2월 6일 진우장군 왕희지서"로 되어 있으며, 영화 10년은 서기 354년입니다.
청나라 사람 손승택의 한가헌첩고(闲者軒帖考)는 남당이후주(南唐李後主)가 출비부진장(出秘府珍藏)하여 네 권을 새겼다고 합니다.각 권의 후각은 승원 2년 3월 건업문방모륵상석(建業文房模勒)으로, 《순화각첩(淳化閣帖)》의 시조입니다.
송나라 사람이 본전을 뒤져 가추학인이 찍혀 있습니다.[40] 왕희지도 《낙신부》를 썼는데, 도홍경은 《여량무제논서계》라는 글에서 "신은 과거 마징(馬澄)에서 견일소정서(見日少正書) 목록 1권에 증운(澄雲)이 '우군 《권진》 《낙신부》의 제서 10여 수가 모두 금체(今體)인데 《급취편》 2권, 고법(古法)이 치밀하다'고 하였습니다.
또 "'일소유명지적(一少有名之迹)'은 몇 곡에 불과하며, '황정(黃亭)' '권진(權進)' '상찬(像赞)' '낙신(洛神)' 등 불심(不审)이 남아 있습니다.'전'황초 3년'이라는 종이 한 장.후세 사람이 우군을 배우는 것입니다."[41]왕헌지(王献之)는 '낙신십삼행(洛神十三行)'이 있습니다.
이첩은 양나라 사람의 문헌에서 영감을 받아 차명 왕헌의 서적을 모은 것으로 보입니다. 5. 왕희지의 서첩은 동해에서 왕희지의 서첩이 주변국에 널리 퍼졌는데, 당시에는 매우 널리 퍼져 있었을 것입니다만, 기록이 부족하여 지금은 볼 수 있는 것이 매우 희박합니다.
그러나 일본에서는 문헌에서 실물까지 흥미로운 발견이 있습니다.7세기부터 일본은 당나라에 견당사를 파견하여 중국에 유학시켰고, 유학생과 승려들은 중국에 와서 각종 문화지식을 배웠으며, 일본 나라 헤이안 시대의 천황은 당나라의 제도 문물을 매우 동경하여 많은 당나라의 수입품을 수집하였는데, 유명한 사람들의 서적은 그들이 수집하려는 중요한 물품이었습니다.
견당사는 이러한 물품의 주요 수집자이며 그들이 수집한 보물에는 여러 가지가 있습니다.길비진비는 견당사(遣唐使)의 일원으로 17년 동안 당나라에 머물렀는데, 그가 수집한 물품은 간단한 목록으로 귀국 후 조정에 바쳤습니다:《당례》130권,《태연경력성》12권,《악서요록》10권,측영철자,동율관,철여방향으로 율관소리를 쓰고,곧바로 작은 옻칠 각궁을 마시고,갑궁을 쏘았습니다.[42]
기비진비가 가져온 물품은 일본에 부족했던 당나라 예악제도 서적과 실물이 주를 이뤘습니다.당나라 예악제도는 일본에 큰 영향을 끼쳤기 때문에 예악 서적의 전파와 밀접한 관련이 있을 것으로 생각됩니다. 물론 서예는 수집의 핵심 중 하나입니다.
▲ 이융기 『다섯째 손녀 묘지』 천평 7년(735) 기비진비가 귀국하여 중국에서 얻은 많은 서적을 성무천황[43]에게 바칩니다.그 후 감진 스님은 천신만고 끝에 일본으로 건너가 불법(佛法)을 선양하였으며, '당대 스님 동정전'이라는 책에는 감진이 일본으로 건너갈 때마다 구입하여 소지한 물품에 대한 상세한 기록이 있습니다.
천보 12년(753) 10월 19일자 목록에는 왕우군 진적행서 1첩, 소왕 진적 3첩, '천축' '주화' 등 잡체 서첩 50첩이 들어 있습니다.[44]감진이 죽지의 대재부에 도착하자 배와 함께 온 왕희행서 진적(眞迹) 1첩도 기록되어 있습니다[45]: 헌묵본 10권.덕종황제의 진품 1권, 구양문의 진품 1권, 대왕 '제사첩'권, '불공삼장비' 1권, '안화상비' 1포, 서시랑 '보림사시' 1권, 석령기 8분 1첩을 행초라고 합니다.
성령집' 홍인 2년 8월 공해 스님이 사가 천황을 봉헌합니다.홍인 5년 윤7월에 『왕우군 난정비』 1권 등 탁본[46]을 봉헌하였습니다. 견당사(遣唐使)를 비롯한 여러 유통경로를 통해 일본은 왕희지의 서첩 및 복제품이 가장 많이 유입된 지역이 되었으며, 또한 이러한 수입품들이 대부분 자세하게 기록되어 오늘날까지 전해지고 있기 때문에 과거에는 잘 알려지지 않았던 왕희지의 서첩 및 복제품이 전해지고 있는 상황을 알 수 있습니다.
덴표 가쓰호 8년(756) 6월 21일은 일본 성무천황의 77번째 기일. 광명황후는 유명 사찰인 도다이지(東大寺)에서 성무천황을 위한 불사를 거행했습니다.생전에 천황이 좋아했던 물건 600여 점을 동대사에 바칩니다.
봉헌물은 나라 쇼쿠라원에 남아 있는 도다이지 헌물대장 목록에 정성껏 기록되어 있습니다.《동대사헌물대장》에는 왕희지의 서첩(書帖) 상황을 상세히 기록하고 있는데, 탁본(响拓本) 진우군(晋右軍) 왕희지(王羲之)의 초서(草書)가 20권으로 되어 있으며, 각 권의 글씨, 지색, 행수 및 장식이 기록되어 있습니다.
권1~권10은 초서이고, 나머지는 권51~권60이며, 그 중 권57은 없고, 대체품은 부채면 한 권입니다.권56, 권60에는 행서[47]가 표시되어 있습니다. 또한 병풍 2구가 있는데, 하나는 구양문의 서예 진품인 12구이고, 다른 하나는 황·백·벽록 등의 종이로 만든 12구 병풍으로 왕희지의 서첩[48]을 마주하고 있습니다.
대소왕 진적대장'에 따르면 대소왕 진적서는 한 권입니다.노란색 반지에 대왕서 9행 77자, 소왕서 10행 99자, 양끝에 끈적끈적한 청갈색 종이가 있습니다.또 도갈색 종이가 자색 비단 띠와 수정 축을 감싸고 있습니다.우서예는 혁세의 전설입니다.
선제의 놀이는 상자 안에 남겨져 있고, 감명을 받아 노사나불을 바치며, 이 선한 길을 따라, 방광의 큰 길을 여행하며, 원이의 묘리를 계속 이어갑니다.[49] 고대 문헌의 기록 외에도 일본에 전해져 현재에 이르고 있는 왕희지향 탁법첩(王羲之响法帖)도 가장 신뢰할 수 있는 왕희지 서첩의 복제품으로 평가되고 있습니다.궁내청에 소장되어 있는 '상란첩'에는 '엔랴쿠 칙정(延历定)'이라는 네 글자의 주인이 찍혀 있는데, 엔랴쿠 천황의 연호인 엔랴쿠 시대 말기에 헤이안 시대 초기(782~806)에 사망했습니다.
인장은 이첩이 환무천황에서 빌린 것임을 나타내며, 답장할 때 검인을 했습니다.왕희지 서첩의 회답 날짜는 연력 3년(784) 3월 29일[50]입니다. 황실이 소장하고 있는 이 왕희지 서첩들은 사가 천황 히로히토 11년(820) 10월 3일 이후 '대소왕 진적 소반지, 나그세거.진초서 이습권, 납은박평문거, (별필) 이미 책에 실렸다 직오십관문헌전'은 민간에 떠돌아다니며 궁정 기록에 나타나지 않습니다[51].상란첩'은 사실 모두 3첩으로 '이사첩'과 '득시첩'과 한 권을 표구했습니다.
도쿄 마에다 야쿠토쿠회가 소장하고 있는 '공시중첩'도 '상란첩'과 마찬가지로 '엔랴쿠 칙정' 주인을 찍었습니다.'애화첩', '공시중첩', '우현첩'으로 구성되어 있습니다.개인이 소장하고 있는 《매지첩》과 근년에 새로 나온 소위 《대보첩》에 사용된 종이와 탁모의 기법은 전자와 같으며 [52] 또한 중요한 왕희지의 서첩인 당대 탁본입니다.
▲ 왕희지의 <대보첩> 6. 왕희지의 서첩의 정확한 복제 기술은 예외 없이 섬세하고 정교한 기술 위에 세워질 수 있습니다. 도구를 사용하여 일반인들은 상상할 수 없는 구조의 구현이 가능했습니다.
글씨의 크기를 마음대로 줄인 것은 아마도 사진 기술을 사용한 결과일 것입니다.그러나 유사한 기술이 당나라에 존재했는지 여부는 사실 어떤 역사적 자료도 뒷받침하지 않습니다.
왕희지의 글씨를 비석 위로 원활하고 정확하게 옮기기 위해서는 비슷한 상상의 여지가 많습니다. 옛 사람들이 법첩을 복사하는 것은 소위 임모, 모사, 소리와 탁본을 말하는 것이 있는데, 황보스는 세 가지의 차이를 설명하는데, 세상 사람들은 임모와 모사의 차이를 잘 모릅니다.임은 종이로 고첩에서 그 형세를 방관하며 배운 것이라고 하는데, 임연이 임하면 임이라 합니다.모사, 이것을 얇은 종이로 고첩을 덮고 가늘고 큰 종이로 탁본하는 것인데, 그림을 모사하면 모사라고 합니다.
또 두꺼운 종이로 덮은 것을 창경으로 모사하여 샹타오(响拓)라고도 합니다. 안타깝게도 당나라의 이런 쌍구법은 나중에 이미 전해지지 않았을 것입니다.명인 판지종은 이 방법을 논할 때 이중고리의 방법은 잉크가 글자를 어지럽히지 않도록 하거나 그 안을 채우거나 등을 주어서 살코기와 살코기 본체를 얻어야 한다는 논의가 있었습니다.
비록 여전히 비싸고 말랐지만 일꾼들이 그것을 새기고 긁어모으게 하면 날씬하고 뚱뚱합니다.혹은 구름과 쌍커플일 때 반드시 거꾸로 놓아야 하며, 그 사이에 개인적인 의도가 있어서는 안 됩니다.만약 아래가 회잡하고 상지가 두꺼우나, 글을 쓸 수 있는 자가 필의를 보내야 합니다.
부봉망전각(夫锋芒)의 정신은 대개 쌍구(雙勾)가 먼저이니, 주기가 등을 돌렸을 때 약간의 인사를 해야 합니다.[54] 판 씨의 논술에 무슨 문제가 있다고 말할 수는 없지만 먹물로는 글밖에도 번지지 않고 그 속을 도려낸다고 말하는 것만으로는 부족하며 고수들의 쌍구탁서에 대한 요구는 아닌 것 같습니다.
쌍구슬을 '반복해야 한다'고 할 때, 혹은 선조들이 언급하지 않고, 반복할 때 쌍구슬은 글자의 획수에 따라만 할 수 있으며, 주로 탁본자의 사의를 제한하고 얇은 종이를 사용하는 것도 핵심입니다.두꺼운 종이를 사용하면 좋은 서적의 조작이 필요하며 원본 서적의 필의를 밝힐 수 있습니다.
그러나 유사한 주장은 현대의 기계 사용 관찰과 일치하지 않으며 고대 방법은 오랫동안 전해지지 않았습니다.쌍구필묵법은 늦어도 원나라에서는 전해 내려오고 있습니다.원나라에서 정나라까지 육계선이 '난정서'를 모사하였는데, 모두 5지 7절지인데 자세히 살펴보면 글씨의 윤곽을 쌍으로 체크한 후 먹물을 채우는 방법이 있습니다.
먹물을 칠할 때 먹으로 칠하는 것이 아니라 가는 붓으로 획을 따라 글을 쓰는데, 글 가운데 '또', '연', '족', '아니오', '부', '문'이라는 글자가 여전히 호리호리한 글씨로 보입니다[55].
▲ 육계선 모사계첩 '연', '족', '부', '문'자 육계선은 부엽발문에 "선친자순부, 당나라 사람이 '난정서' 세 권을 모사했습니다.하나는 동창의 고공가물인데 제가 어찌 사모하겠습니까.AAA형은 허베이성 쥐털로 매우 정교하게 펜을 만들었습니다.
시선사 균암 야오 선생과 문민 조공을 생각하며 쌍구채곽의 방법을 들었습니다.그래서 형의 휴가를 받아 이를 본받았고, 앞뒤가 모두 다섯 종이였습니다.형은 만나 뵙고 기뻐하며, 곧 회포를 풀었습니다.
"[56] 커큐는 "평소에 본즉 어찌 수십 권에 그치지 아니하니, 농한(弄翰)이 우군(右軍)의 필의(筆意)를 간직하기를 청하노니, 이삼귀(二三耳)를 덮으라.이 책은 저하남의 본문에서 나온 것으로, 휘날리며 함축되어 옛 뜻이 매우 크며, 무술을 닦는 습성을 씻으면 유행할 만합니다.현세의 학자는 무각본의 법을 지키니 견지용투호와(茧紙龍跳虎卧)의 뜻을 알겠느냐.고치 종이는 다시 볼 수 없습니다,
당모사를 볼 수 있습니다, 당모사는 얻기 어려우니, 보즈권을 얻으면 대대로 석각이 많을 것입니다.잘 살펴서 제 말을 그대로 받아들여야 합니다."[57] 가씨가 극구 추앙하던 육씨 모사본이 채집된 초본을 저수량 모사본으로 정하였습니다.
육모본은 기존의 이른바 당모사 '난정서'와 비교했을 때 풍승소 모사본과 일치해야 하며, 이 모사본은 원나라 때 AAA1의 모사본으로 여겨졌음을 알 수 있습니다.
한편, 진여는 그가 수도에서 AAA1의 쌍구인 '난정서'를 본 적이 있다며 "숫자를 남기면 기입하지 않으니, 모사본도.붓의 뜻이 나부끼면, 후세 사람들은 여전히 당시 술에 취해 굳은 종이 위에 있는 사람을 볼 수 있습니다."[58]. AAA가 남긴 글씨는 채우지 않아 현재 전해지지 않고 있으며, 진술은 '난정서'의 전본 형식을 풍부하게 합니다.
지정 5년(1339) 9월 15일 진방(陳方)은 발문에서 "갈고리모척법(钩填摹法)은 송나라 때 미남궁(米南宮)과 설소팽(薛绍彭)이 능지(能之)합니다.붓의 뜻에 맞게 덮은 후에 이것을 만들 수 있습니다.그렇지 않으면 주얼리를 그리는 법을 배우는 어린이와 같이 잉크가 정확하지 않습니다.(육)계친인 청야오 선생과 자오원민은 모두 서예를 압니다.그래서 오늘날 AAA의 '수계첩'은 필치가 모두 철저하여, 그 방법을 깊이 얻지 못한 자는 여기까지 오기 쉽지 않으나, 속세의 눈에 띄지 않습니다.
"[59]원시구매립탁법은 필법을 잘 아는 극소수의 서가들, 즉 요균암(姚筠庵)에서 전승되고 있음을 알 수 있습니다. 이 체크 표시 방법은 이중 체크 표시 잉크, 즉 이중 체크 표시 방법을 사용하여 필체의 윤곽을 그린 다음 여백에 잉크를 채우는 방법과 다릅니다.
일본 학자들이 현대 과학 기술 방법을 사용하여 글씨를 확장한 후 얻은 결과와 유사하게 후자는 분명히 더 복잡합니다.서천녕은 일찍이 《공시중첩》과 《상란첩》의 두 첩을 관찰하였는데, 필획의 일부 비백은 거의 붓끝마다 가는 선으로 그렸습니다.
일부 획은 '현침세로'와 같이 쌍구가 아니라 종이로 원적 위에 덧씌우고 붓으로 '홀' 한 획 아래를 그려서 진적의 느낌이 드러나게 합니다[60]. 당나라의 종이는 기러기 껍질의 약 55%, 닥 껍질의 약 45%를 테스트하여 두 가지를 혼합하여 만듭니다.
종이 두께는 그다지 균일하지 않으며 가장 두꺼운 부분은 0.078mm, 얇은 부분은 0.051mm, 평균은 약 0.064mm입니다[61].당 고종 때의 이른바 '장안궁중사경(長安宮中使經)' 종이는 0.07mm 정도가 많았습니다.이중 체크를 한 후에도 머리카락처럼 가는 뾰족한 선으로 채워지며 기법이 매우 복잡합니다.
원서의 시작, 속면, 비백은 일부 벌레먹은 흔적을 포함하여 이 방법을 사용하여 충실히 재현해야 합니다[62]. 조모, 한도정, 풍승소, 제갈정 등 궁중 탁서의 고수들은 모두 이런 기법으로 원서와 똑같은 복제품을 만들었습니다.이런 기법이 정교한 모서의 방법은 아마도 명나라 이후에 이미 전해지지 않을 것입니다.
중국에서 소장하고 있는 전왕희지 서첩의 모사본에도 비슷한 연구 방법이 쓰일 것으로 보입니다. 7.일본인의 임습 왕희지가 일본에 전한 서첩은 아마 이뿐만이 아닐 것입니다.
정창원에는 임왕희지의 서첩이 숨겨져 있습니다.아마 사경생 임습작일 것입니다.필로 웅건하고 힘이 있습니다[63]. 11~12세기로 전해지는 《추디첩》은 일본의 유명한 법첩으로, 첫 번째 종이에 두 곡의 와카(和歌)가 있고, 두 번째 종이에 마흔여섯 곡의 와카(和歌)가 있으며, 마지막 12첩은 《초월지25첩》(《초월첩》), 《지근원첩》(知近遠帖), 《절불가첩(《不得)》, 《향아무첩》(知阿人帖), 《향리인첩》(鄕里人帖), 《유월19일》(得) 《득단양서첩 (丹陽書帖),《고상고상청단양단청그 중 『향리인첩』과 『득단양서첩』은 저수량의 『우군서목』에 기록[65]되어 있습니다.
향리인첩', 1행, 9자, 초서, 일찍이 '순화각첩' 권7에, '득단양서첩', 5행, 42자에, 황백사는 이를 위첩으로 하여 '순화각첩' 권7[66]에 새겼습니다. 추디첩'의 앞면에는 당나라가 쓴 '회남홍렬병략간경제20'(이하 '회남자'라 함)이 있으며, 서가는 '회남자'의 뒷면을 이용하여 46곡의 화가를 쓴 후 왕희지의 서첩을 임시로 씁니다.
후지와라노 유키나리(古谷稔)는 일반적인 견해를 가지고 있습니다.우선 후지와라노 유키시게와 필법이 비슷하고, 후지와라노 유키시게의 책 '백씨시권'과 필적을 대조한 결과 '월(月)', '다섯(五)', '하(下)', '아니(不)', '년(年)', '지(之)', '사(思)' 등의 필적이 유사하며, 또 다른 점으로는 후지와라노 유키시게의 일기인 권기(權記)에 "관홍 6년(1011) 6월 8일에 왕희지의 《낙의론》을 차람하였다고 기록되어 있습니다.
후지와라노 유키시게는 자주 황궁에서 법첩을 빌려 읽었고, '권기' 장보 2년(100) 8월 9일 조기: "어소에서 어본 28권을 주었습니다.이 외에 문제가 많이 틀리거나 왕희지의 서예인 현오 같은 것을 보고 답례합니다."8월 14일 또기: "오늘부터 물건들이 금기를 삼가합니다.
하지만 당분간은 안 됩니다.목차 의양전 17질."후지와라는 황궁에서 28권의 '어본'을 빌릴 수 있습니다. 비록 모두 왕희지의 서첩일 필요는 없지만, 왕희지의 이름을 따서 지어졌습니다. 의양전은 황실에서 법첩을 보관하던 곳으로 등원목록 17질입니다.
권기(權記) 관홍(宽弘) 8년(1011) 6월 8일 경술, 참내, 관홍(宽弘) 5년 4월 14일 의양전 어본 6권(지초 천자문 한 장), 동진서 초향(草香), 일왕희지(一王羲之)의 진서 악의론(樂毅論), 동진서 황정경(黃亭經), 동진서 상상, 동진서 하도)을 하사하였다고 기록되어 있습니다.
머리에서 중장을 돌려보내라." 이 6권의 의양전 어법첩은 후지와라노 유키시게의 손에 3년 넘게 보관되어 있습니다.후지와라노는 당연히 여유롭게 쓸 시간이 충분합니다.필치가 능숙하여 분명히 원본이 있습니다.
관홍 4년(1007) 6월 26일, '한서' 伝 3질 10권(현재 1권)을 헌정하고 작년에 '회남자'에 9권을 주었습니다."[68]다만 '회남자' 같은 귀중한 필사본 뒤에 왕희지 서첩을 쓴다는 것은 이해할 수 없습니다. 일본 역사에서 '추디첩'을 후지와라노 유키시게의 서적이라고 보는 것 외에도 오노 미치요(小野道風書安起破)가 '추디첩'의 저자로 여겨지고 있으며, 일부 각본에는 '오노 미치요시(小野道風書) 안기파(安起几) 몇첩'[69]이 직접 표시되어 있습니다.
후지와라노와 오노는 모두 왕자를 익혀 글쓰기에 약간의 차이는 있지만 임시 서풍은 구별하기 쉽지 않으니, 어쩐지 이 책이 두 사람에게 돌아가는 현상이 있었습니다. 《락의론》은 왕희지의 소해서로 전해지며, 그 아들 관노에게 서납되었습니다.
양무제는 도홍경과 이 법첩에 대해 논의한 결과, 내부가 소장하고 있는 것이 진품이 아닐지도 모른다는 결론을 내렸습니다[70].이 모사본은 위술(韦書錄)에 따르면 "장안(長安)과 신룡(神龍)이 있을 때 태평공주(太平公主)가 외탁(外拓)을 주필(奏写)했다"고 되어 있어 도난당했습니다[71].
광명황후는 본 '락의론'을 현재 정창원에 소장하고 있으며, 저울 16년 10월 2일, 즉 서기 744년에 글을 쓰고 있습니다. 광명황후 임본은 후세에 전해진 성봉루첩본과 비교적 가깝고 송원우 3년 비각첩본에 속합니다.그 조상은 대략 저수량의 《탁본악의론기》에서 풍승소 등의 모사본으로, 이 탁본은 장손무기(無忌), 방현령(房玄龄), 고사렴(高士廉), 후군집(侯君集), 위징(魏征), 양사또(楊師道) 등 6명에게 하사된 바 있습니다[72].
광명황후 임본은 전생비각첩본에 비해 다소 거리가 있지만[73] 일본 황실이 왕희지로 전해지는 해서체에 얼마나 익숙했는지를 보여주는 자료이기도 합니다. 일본인들은 왕희지의 서첩에 대한 임습을 매우 보편적으로 여겼고, 훗날 송나라 사람들의 마음속에는 약간의 존경심마저 품게 되었습니다.
일본 천태종 승려 적조가 바다를 건너 송나라로 오는데, 강소우는 '황조류원'에 "적조령도 7명은 모두 중국어를 통하지 않았습니다.국중에서 왕우군을 많이 익혔는데, 적조는 꽤 필치를 얻었습니다.
"[74]신라 승려 김생(711-?)서예실습 왕희지.북송 휘종 숭녕 연간에 고려의 사도 홍瓘가 김생행 초서를 가지고 송에 들어와 양구와 이웨이의 조서를 받자 보는 사람들이 모두 놀라며 왕희지의 진품인 줄 알았습니다.
분류:고고학 연구
본문 태그: 왕희지 서법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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