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대경상록자원봉사단 2018년4월 문화유적답사계획
일시 : 2018년 4월 18일(수)
장소 : 충남 부여(정림사지.정림사지박물관.국립부여박물관.백제역사문학관.백제문화단지)
** 시간(일정) 계획 **
연금공단(대구센터)(07:00출발) -(213km. 2시간30분) -궁남지(09시30분 도착. 40분 관람.10시10분 출발) _(1km. 3분) -부여박물관(10시13분 도착. 1시간 관람. 11시13분 출발) - (1km. 3분) - 정림사지 및 박물관(11시16분 도착. 관람 1시간. 12시16분 출발) - (0.9km. 3분) - 구드레 식당촌 점심(12시19분 도착. 점심 1시간. 1시19분 출발) - (0.5km. 5분) - 부소산(1시24분 도착. 관람 및 유람선. 관람2시간) - 구드레나루터(3시24분) - (7.2km 11분) - 백제역사문학관.백제문화단지(3시35분 도착. 관람 1시간30분. 5시05분 출발)- (221km. 2시간30분) -연금공단(대구센터)(7시35분 도착)
* 현지 사정에 따라 변경 될 수 있습니다.
* 백제문화단지 입장료가 7천5백원입니다.
경로는 무료입장되오니 필히 주민등록증을 지참하시기를 바랍니다.
* 신청은 대경상록자원봉사단 담당자에게 신청하여주십시오. 선착순 40분만 모십니다.
* 회비는 삼만원입니다.
궁남지(宮南池.사적 제135호. 충남 부여군 부여읍 동남리 117외)
부여읍 남쪽에 위치한 백제시대 별궁 연못이다. 백제 무왕 때 만들어진 것으로 보이며, "궁궐의 남쪽에 연못을 팠다"는 『삼국사기(三國史記)』의 기록을 근거로 궁남지라 부른다. 이 연못에 대해서는 『삼국사기』 무왕조(武王條)에 "3월에 궁성(宮城) 남쪽에 연못을 파고 물을 20여리나 되는 긴 수로로 끌어들였으며, 물가 주변의 사방에는 버드나무를 심고, 못 가운데에는 섬을 만들어 방장선산(方丈仙山)을 본떴다"라고 되어 있다. 사실, 백제에서 왕궁 근처에 연못을 만드는 전통은 이미 한성시대(漢城時代)부터 시작되었다. 다만, 한성시대에 조영된 왕궁에 딸린 연못은 아직 발굴된 바 없어서 그 실체를 확인하지 못하고 있다. 그에 비해 웅진(熊津)시대의 왕궁이었던 공산성(公山城) 안에서는 당시의 것으로 판단되는 연못이 왕궁지(王宮址)로 추정되는 건물지(建物址)와 함께 발굴되었다. 공산성에서 발굴된 이 연못은 바닥이 좁고, 위로 올라갈수록 넓어지는 원형의 연못인데 직경 7.3m, 바닥 직경 4.8m, 그리고 깊이 3m의 크기를 보이고 있다. 이로써 보면 백제에서 왕궁 근처에 연못을 만드는 전통은 매우 오래된 것임을 알 수 있다. 그러나, 한성시대와 웅진시대의 연못은 그자체만 확인될 뿐 여기에서와 같은 삼신산(三神山)의 존재는 확인되지 않는다. 삼신산은 봉래산(蓬萊山), 방장산(方丈山), 영주산(瀛州山)을 말하는 것으로, 중국의 전설에 의하면 삼신산(三神山)에는 신선(神仙)과 불로초(不老草)가 있고, 황금(黃金)과 백은(白銀)으로 된 궁궐도 있는 일종의 이상향이다. 따라서 기록대로 이 궁남지의 한가운데에 방장선산(方丈仙山)을 모방한 조산(造山)이 있었다면 이는 중국의 진-한대(秦-漢代)부터 신선사상에 근거하여 삼신산을 조성하였던 것이 백제의 왕궁 조원(造苑)에 처음 들어온 것을 보여주는 것이다. 궁남지에 대한 직접적인 것은 아니지만, 《삼국사기(三國史記)》무왕 37년조에는 "8월에 망해루(望海樓)에서 군신(群臣)들에게 잔치를 베풀었다"는 기록이 보이고 있고, 다시 39년조(年條)에는 "3월에 왕이 왕궁(王宮)의 처첩(妻妾)과 함께 대지에서 배를 띄우고 놀았다"라는 기록이 남아 있다. 이로써 볼 때 이 궁남지는 처음 만들어질 때부터 붙여진 이름은 아니고, 백제시대에는 단지 대지라고 불리고 있었던 것을 알 수 있다. 아울러 뱃놀이를 할 수 있을 만큼 그 규모가 컸음을 짐작해 볼 수 있다. 그 규모가 얼마나 컸었는지는 정확히 알 수 없고 현재는 1만평 정도만 남아 있지만 얼마 전까지만 해도 약 3만평 정도가 연못으로 되어 있었다고 한다. 그러나 정확한 크기는 발굴조사를 통해서 만이 확인될 수 있을 듯하다. 이 궁남지와 관련하여 주목되는 또 다른 기록은 《삼국사기(三國史記)》 의자왕(義慈王) 15년조에 보이는 《"2월에 태자궁(太子宮)을 지극히 화려하게 수리하고 왕궁 남쪽에 망해정(望海亭)을 세웠다"》라는 기록이다. 망해루(望海樓)나 망해정(望海亭)에서 대지(宮南池)를 바라보면 바다와 같이 시원한 느낌을 받았을 터이고, 이렇게 바다와 같이 큰 연못을 왕궁 근처에 만드는 것이 백제가 처음이었음을 알 수 있다. 즉, 신라의 경우 문무왕대(文武王代)에 안압지(雁鴨池)를 만들고, 그 안에 삼신도(三神島)를 조성하며, 주변에 임해전(臨海殿)을 세우게 되는데, 이 모든 것이 기본적으로 백제의 궁남지와 같은 개념이었음을 알 수 있다. 그런 점에서 백제의 조원(造苑) 기술은 삼국 중 으뜸이었으며, 통일신라의 조원에 큰 영향을 끼쳤음을 확인할 수 있다
부여박물관(충청남도 부여군 부여읍 금성로 5)
충청남도 부여는 도시 전체가 '사비시대의 백제'를 담아내고 있다. 678년 역사의 백제는 도읍지를 세 차례나 옮겼는데, 한성(서울)과 웅진(공주)을 거쳐 마지막으로 정착한 곳이 바로 이곳 부여다. 옛날에는 부여를 '사비'라 불렀고, 백제의 도읍지가 부여였던 538년부터 660년까지를 '사비시대'라고 부른다. 백제의 독창적 문화가 꽃피운 시기도 이때다.
1929년 부여고적보존회로 출발한 박물관은 1975년 국립부여박물관으로 승격됐다. 그리고 1993년 금성산 아래에 터를 잡고 지금의 자리에 새롭게 문을 열었다. 국보 세 점, 보물 여섯 점을 비롯해 총 1만 9000여 점의 유물을 소장하고 있는데, 이 중 백제 유물이 1만 1000여 점에 달한다.
상설전시실은 2014년 8월까지 전면개편 공사로 휴실하고, 이 기간에 대표 유물을 엄선해 '한눈에 보는 사비백제' 전시를 열기도 했다. 총 네 개의 상설전시실과 기획전시관, 보존과학관, 어린이박물관, 야외 전시실 등으로 구성된 박물관은 백제 문화재를 주제로 한 체험 행사와 주변 백제 유적이 어우러져 많은 관람객이 찾는 명소다.
제1 전시실 에는 청동기, 초기 철기, 원삼국 시대 유물이 전시되어 있어 백제가 세워지기 전 이 지역에서 살았던 사람들의 생활을 살펴볼 수 있다. 부여 지역은 중국 요령 지역의 문화와 한강 유역의 문화가 어울려 독특한 청동기 문화를 형성했다. 청동기시대 마을 유적을 볼 수 있는 곳이 '부여 송국리 유적'이다. 나무 울타리로 둘러싸인 마을 안에 100여 기가 넘는 집터가 있었던 것으로 추정되지만, 현재는 집터 60여 기와 무덤 10여 기가 조사된 것으로 알려졌다. 송국리 돌널무덤에서 발견된 요령식 동검과 한국식 동검이 어떻게 다른지 비교해보자.
종이가 없던 시절 어디에 글을 썼을까?
아마 국립부여박물관을 찾은 관람객이라면 절대 놓치고 싶지 않은 유물이 동양 최고의 금속공예품인 '백제금동대향로'일 것이다. 이를 포함해 백제 사람들의 생활을 알아볼 수 있는 곳이 제2 전시실이다.
백제금동대향로를 보기 전에 꼭 살펴볼 것이 백제의 대표적인 금석문, '사택지적비'다. '사택지적'이라는 인물이 남긴 이 비석은 부여 부소산 남쪽의 돌무더기에서 발견됐는데, 화강암을 잘 갈고 네모 칸을 친 뒤 글자를 새겨두었다. 지금은 부서져 56자만 남았다. 종이가 발명되기 전에는 돌이나 금속, 기와, 나무 등에 문자를 새겨 역사를 기록했다. 백제의 대표적인 금석문으로는 사택지적비와 백제창왕명석조사리감(국보 제288호)이 있다.
하늘에 올리는 염원, 백제금동대향로
자, 그럼 전시장 한가운데 자리한 아름다움의 절정, 백제금동대향로를 만나보자. 향로는 향을 피우는 도구다. 우리 조상들은 나쁜 기운을 없애고 하늘과 소통하고자 향을 피웠다. 국보 제287호로 지정된 이 백제금동대향로는 1993년 능산리 절터를 발굴하면서 세상에 모습을 드러냈다. 높이 61.8cm, 무게 11.85kg으로 한 마리의 봉황이 장식된 머리 부분, 신선이 살았다는 상상 속의 산을 표현한 뚜껑 부분, 연꽃잎 모양을 도드라지게 표현한 몸통 부분, 한 마리의 용이 향로 전체를 받드는 받침 부분으로 나뉘어 있다. 향로는 청동으로 만든 다음 금칠을 했다.
백제금동대향로는 발길을 뗄 수 없이 눈부시다. 백제왕실의 사상을 압축해 표현했고, 불교와 도교의 복합적 요소를 드러냈다는 평가를 받는 이 유물은 모든 수식어를 차치하고 '보는 것' 자체로 가슴이 벅차오른다.
남성이 사용한 요강, 호자 그리고 여성이 사용한 요강
전시실에는 재미있는 모양의 그릇도 보인다. '호자'라는 이름의 이 그릇은 남성이 사용한 요강이다. 호랑이 모습을 해학적으로 표현했다. 남성과 여성 요강의 형태가 다른 것 또한 재미있다.
백제 불교미술의 정수를 만나다
제3 전시실에는 석불상, 금동불상, 탑과 각종 꾸미개 등 백제의 예술 세계를 살펴볼 수 있는 다양한 유물이 있다. 백제 침류왕 1년(384년)에 불교가 전래된 이후, 사비시대는 불교가 가장 융성한 시기로 일본에까지 불교를 전파했다고 한다. 그래서 불상 조각이 발전해 지금까지 많은 유물이 남아 있다.
백제의 금동불 중 현재까지 남아 있는 것은 대부분 크기 25cm 이하의 작은 불상들이다. '백제의 미소'라고 불리는 서산마애삼존불을 비롯해 국보 제293호 '금동관음보살입상'이 그 진수다.
국립부여박물관은 어린이박물관과 각종 교육 프로그램, 문화나눔 프로그램 등을 운영하고 있다. 홈페이지에 있는 '미리 알고 가는 박물관' 메뉴에서 어린이박물관 활동지를 내려받아, 아이의 문화재 이해를 도와주자.
부여정림사지(扶餘定林寺址.사적 제301호.충남 부여군 부여읍 동남리 254)백제가 부여로 도읍을 옮긴 시기(538-660)의 중심 사찰이 있던 자리다. 발굴조사 때 강당터에서 나온 기와에서 ‘태평 8년 무진 정림사 대장당초(太平八年 戊辰 定林寺 大藏唐草)’라는 글이 발견되어, 고려 현종 19년(1028) 당시 정림사로 불렀음을 알 수 있다. 즉 고려시대에 백제사찰의 강당위에 다시 건물을 짓고 대장전이라 했던 것으로 보인다. 정림사의 주요 건물 배치는 중문, 오층석탑, 금당, 강당에 이르는 중심축선이 남북으로 일직선상에 놓이고, 건물을 복도로 감싸고 있는 배치를 하고 있다. 그러나 특이하게 가람 중심부를 둘러싼 복도의 형태가 정사각형이 아닌, 북쪽의 간격이 넓은 사다리꼴 평면으로 되어있다. 발굴조사에서 드러난 중문 앞의 연못이 정비되어 있고, 석불좌상을 보호하기 위한 건물은 1993년에 지어졌다. 백제 때에 세워진 5층석탑(국보 제9호)과 고려시대에 만들어진 석불좌상(보물 제108호)이 남아 있다. 출토유물로는 백제와 고려시대의 장식기와를 비롯하여 백제 벼루, 토기와 흙으로 빚은 불상들이 있다
부여 정림사지 오층석탑(扶餘 定林寺址 五層石塔.국보 제9호.충남 부여군 부여읍 동남리 254)
부여 정림사터에 세워져 있는 석탑으로, 좁고 낮은 1단의 기단(基壇)위에 5층의 탑신(塔身)을 세운 모습이다. 신라와의 연합군으로 백제를 멸망시킨 당나라 장수 소정방이 ‘백제를 정벌한 기념탑’이라는 뜻의 글귀를 이 탑에 남겨놓아, 한때는 ‘평제탑’이라고 잘못 불리어지는 수모를 겪기도 하였다. 기단은 각 면의 가운데와 모서리에 기둥돌을 끼워 놓았고, 탑신부의 각 층 몸돌에는 모서리마다 기둥을 세워놓았는데, 위아래가 좁고 가운데를 볼록하게 표현하는 목조건물의 배흘림기법을 이용하였다. 얇고 넓은 지붕돌은 처마의 네 귀퉁이에서 부드럽게 들려져 단아한 자태를 보여준다. 좁고 얕은 1단의 기단과 배흘림기법의 기둥표현, 얇고 넓은 지붕돌의 형태 등은 목조건물의 형식을 충실히 이행하면서도 단순한 모방이 아닌 세련되고 창의적인 조형을 보여주며, 전체의 형태가 매우 장중하고 아름답다. 익산미륵사지석탑(국보 제11호)과 함께 2기만 남아있는 백제시대의 석탑이라는 점에서도 귀중한 자료로 평가되며, 세련되고 정제된 조형미를 통해 격조높은 기품을 풍기고 있는 아름다운 작품이다
부여 정림사지 석조여래좌상(扶餘 定林寺址 石造如來坐像.보물 제108호)
충청남도 부여의 정림사지에 남아 있는 석조불상으로 정림사지 5층석탑(국보 제9호)와 남북으로 마주보고 있다. 정림사는 6세기 중엽에 처음 창건되어 백제 멸망 때까지 번창하였던 사찰로 고려시대에 다시 번창했던 것으로 추정되는데, 이 석불상은 고려 때의 번성을 보여주는 것이다. 지금의 머리와 보관은 제작 당시의 것이 아니라, 후대에 다시 만들어 얹은 것으로 보인다. 신체는 극심한 파괴와 마멸로 형체만 겨우 남아 있어 세부적인 양식과 수법을 알아보기 어렵지만, 어깨가 밋밋하게 내려와 왜소한 몸집을 보여준다. 좁아진 어깨와 가슴으로 올라간 왼손의 표현으로 보아 왼손 검지 손가락을 오른손으로 감싸쥔 비로자나불을 형상화한 것으로 추정된다. 불상이 앉아 있는 대좌(臺座)는 상대·중대·하대로 이루어진 8각으로 불상보다 공들여 만든 흔적이 역력하다. 상대는 연꽃이 활작 핀 모양이며, 중대의 8각 받침돌은 각 면에 큼직한 눈모양을 새겼다. 하대에는 연꽃이 엎어진 모양과 안상을 3중으로 중첩되게 표현했다. 현재 불상이 자리잡고 있는 위치가 백제시대 정림사지의 강당 자리로 이곳에서 발견된 명문기와를 통해 이 작품은 고려시대에 절을 고쳐 지을때 세운 본존불로 추정된다.
정림사지의 의의
백제 성왕은 538년 봄에 지금의 부여인 사비성으로 도읍을 옮겼습니다. 왕궁과 관청을 비롯하여 사비도성 안을 중앙 동 ·서 ·남 ·북 등 5부로 가르고 그 안에 거주민을 조성하는 도시계획과 더불어 사찰이 건립되었습니다. 백제가 사비성으로 천도하던 시기의 도성의 모습이 중국 사서「주서(周書)」백제전에는 " 절과 탑이 매우 많다(寺塔甚多)" 라고 적혀있습니다.사비성 도읍기의 사찰 가운데 가장 중심적인 위치에 있었던 사찰은 단연 정림사지입니다. 게다가 정림사지는 나성(扶餘羅城 부여읍의 동쪽에 있는 토성土城. 백제 때, 사비성의 외곽을 이루었다)으로 에워싸인 사비도성 구간 내에서도 중심지에 자리 잡았습니다. 이러한 입지조건은 정림사지가 사비도성을 조성할 때 일정한 계획 하에 조영되었음을 암시하는 것입니다. 이와 관련해 정림사지와 왕궁과의 관계는 중국의 북위 낙양성 내의 황궁과 영녕사(永寧寺)와의 관계와 흡사하여 사비도성의 기본구조가 북위의 영향을 받았음을 시사합니다.또한 정림사지 석탑 1층 탑신 표면에 당나라가 백제를 멸망시킨 전승기념비적인 내용이 새겨져있는데, 이것은 백제 왕실 내지는 국가의 명운과 직결된 상징성의 공간으로 정림사지가 존재했음을 시사합니다.
정림사지는 중문·탑·금당·강당이 남북 자오선상에 일직선으로 놓인 백제 전형의 1탑1금당식 가람배치 구조입니다. 이 가람 배치 구조는 고대 일본 가람조영의 모태가 되어 백제와 동일한 일본의 사천왕사(시텐노지. 四天王寺) 양식을 낳았습니다.정림사지는 복도가 건물을 감싸는 배치 형태입니다. 하지만 특이하게 가람 중심부를 둘러싼 복도의 형태가 정사각이 아닌 북쪽이 넓은 사다리꼴 평면입니다. 또한 중문 바깥에는 동·서 양쪽으로 각각 연못을 파서 다리를 통하여 건너가게 하였습니다. 현재까지 발굴된 최고(最古) 연못이며 이러한 연못의 존재는 삼국시대 사찰 조경 연구에 귀중한 자료가 됩니다.이 밖에도 정림사지는 금당의 이중기단, 강당지 및 회랑지의 와적기단, 석탑부의 판축기법등 고대 가람의 특별한 형식을 보여주어 백제 건축의 사료적 의의를 갖습니다.
정림사지5층석탑의 비례
탑과 탑을 둘러싼 건물들의 배치와 구성은 매우 정교한 수치에 의해서 구성되었습니다. 탑이 아름다워 보이는 것은 우리가 자세히 알지 못하는 수리적 원리가 작용하기 때문입니다.탑의 건립에서 가장 중요한 요소는 지대석의 크기입니다. 지대석의 크기에 의해 모든 탑은 높이와 너비가 결정됩니다. 정림사지 5층 석탑은 지대석의 넓이가 14척(그 당시에 주로 사용하던 단위‘고려척’)이며, 그 절반인 7척이 이 탑의 건립 기본 단위가 되었습니다.
부여 부소산성(扶餘 扶蘇山城.사적 제5호.충남 부여군 부여읍 부소로 31 (쌍북리))
백마강 남쪽 부소산을 감싸고 쌓은 산성으로 사비시대의 도성(都城)이다.『삼국사기』「백제본기」에는 사비성·소부리성으로 기록되어 있으나, 성이 위치한 산의 이름을 따서 부소산성이라 부른다.웅진(지금의 공주)에서 사비(지금의 부여)로 수도를 옮기던 시기인 백제 성왕 16년(538)에 왕궁을 수호하기 위하여 이중(二重)의 성벽을 쌓은 것으로 보인다. 그러나 동성왕 22년(500)경에 이미 산 정상을 둘러쌓은 테뫼식 산성이 있던 것을 무왕 6년(605)경에 지금의 모습으로 완성한 것으로 짐작되어 백제 성곽 발달사를 보여주는데 중요한 자료가 되고 있다.성곽의 형식은 산봉우리를 중심으로 빙 둘러싼 테뫼식과 다시 그 주위를 감싸게 쌓은 포곡식이 혼합된 복합식 산성이다. 동·서·남문터가 남아 있으며, 북문터에는 금강으로 향하는 낮은 곳에 물을 빼는 수구가 있던 것으로 보인다.성 안에는 군창터 및 백제 때 건물터와 영일루·사비루·고란사·낙화암 등이 남아있다. 성 안에 군창터와 건물터 등이 있는 것으로 보아, 유사시에는 군사적 목적으로 사용하고, 평상시에는 백마강과 부소산의 아름다운 경관을 이용하여 왕과 귀족들이 즐기던 곳으로 쓰인 듯하다.이 산성은 사비시대의 중심 산성으로서 백제가 멸망할 때까지 수도를 방어한 곳으로 역사적 의의가 있다.
삼충사(三忠祠.문화재자료 제115호.충남 부여군 부여읍 쌍북리 40-1번지)
백제의 충신이었던 성충·흥수·계백을 기리기 위해 지은 사당이다.성충은 백제 의자왕(재위 641∼660) 때 충신으로, 좌평으로 있으면서 잘못된 정치를 바로잡기 위해 애쓰다 옥중에서 단식을 하다 죽었다.흥수는 백제 의자왕 20년(660) 나당연합군이 공격해 오자 탄현을 지키다 대신들의 반대로 지키지 못하고 결국은 멸망하였다.계백은 나당연합군이 공격해 오자 결사대 5,000여명을 뽑아 지금의 연산인 황산에서 싸우다 전사하였다.1957년 지은 이 사당은 1981년 다시 지어 현재의 모습을 하고 있으며, 해마다 10월 백제문화재 때 삼충제를 지내고 있다
부여 구드래 일원(扶餘 구드래 一圓.명승 제63호.충남 부여군 부여읍 쌍북리 산1번지 등)
'구드래'는 부소산 서쪽 기슭의 백마강 가에 있는 나루터 일대를 말한다.이 명칭은 ‘구들돌’이라는 말에서 나온 것으로 추측하는데,『삼국유사』에 의하면, 백제왕이 왕흥사에 예불을 드리러 가다 사비수 언덕 바위에 올라 부처님을 향해 절을 하자, 바위가 저절로 따뜻해져서 이 곳을 ‘자온대(自溫臺)’라 부르게 되었고, 그 이름에서 구들돌, 그리고 다시 구드래로 변하여 구드래라는 이름이 유래되었다는 견해가 있다. 또한 백제를 오가는 왜의 배들이 구드래 나루터를 통해 백제의 수도인 사비에 들어 왔는데, 왜에서 백제를 부를 때 ‘구다라’라고 부른 것은 ‘구드래’와 관련된 것으로 보인다.구드래 나루를 건너 울성산 남쪽 기슭에는 백제 법왕 2년(600)에 세운 왕흥사가 있고, 옛 문헌에 ‘사비의 강’으로 기록된 백마강이 부소산 기슭을 따라 흐르고 있다. 백마강 양쪽에는 왕흥사와 호함리절터, 부소산성, 부여나성을 비롯한 당시의 유적들이 많이 분포되어 있는데, 아름다운 자연경관과 소중한 문화유산이 조화를 이루고 있는 곳으로 중요한 유적이다.
낙화암
부여 백마 강변의 부소산 서쪽 낭떠러지 바위를 가리켜 '낙화암'이라 부른다. '꽃이 떨어지는 바위'라는 아름다운 이름의 이 바위에는 슬픈 역사가 깃들어 있다. 백제 의자왕 때 신라와 당나라 연합군이 쳐들어와 백제를 짓밟자, 치욕을 면치 못할 것을 안 궁녀들은 치마를 뒤집어쓰고 벼랑에서 몸을 던졌다. 이곳 낙화암이 바로 그 벼랑이다. 이곳의 원래 이름은 '타사암'이었다고 하는데, 훗날 궁녀들을 꽃에 비유하여 낙화암이라고 고쳐 불렀다.
고란사(皐蘭寺.문화재자료 제98호.충남 부여군 부여읍 쌍북리 산1번지)
부소산 북쪽기슭의 백마강 좌안(左岸)에 자리한 고란사는 정면 7칸, 측면 4칸의 법당과 요사(窯舍)의 건물로 이루어진 조그마한 사찰이다. 이 사찰은 불적(佛跡)보다는 고란초에 의해 널리 알려져 있는데 법당 뒤편에서 나오는 약수와 함께 이 사찰의 명물을 이루고 있다. 고란사는 백제멸망과 관련된 여러 가지 전설이 전하나 정확한 유적이나 유물은 없고, 현재의 고란사는 고려시대에 창건되었는데 현 사찰건물(寺刹建物)은 은산(恩山) 승각사(乘角寺)를 이건(移建)한 것으로 전하고 있다.
백제역사문학관
백제역사재현단지내에 건립된 백제역사문화관은 출토 유물의 전시가 아닌 백제시대의 중요한 유적이나 역사적 사실을 축소모형이나 그래픽 또는 영상으로 표현하여 관람객이 쉽게 이해할 수 있도록 한 것으로, 예를 들면, 성왕의 사비천도행렬, 사비도성, 미륵사, 정지산 제사유적 등은 축소모형으로 재현하고, 금동대향로, 일본속의 백제유물, 은산별신제, 무령왕릉 등은 영상으로 설명과 함께 보여주는 것입니다.
백제문화단지
3,276천㎡(100만평) 규모를 자랑하는 백제문화단지는, 충청남도 부여군 규암면 합정리에 위치하고 있으며 공공시설인 사비성(왕궁,능사,생활문화마을 등), 백제역사문화관, 한국전통문화학교와 민자시설인 숙박시설(콘도,스파빌리지), 테마파크, 테마아울렛, 체육시설(대중골프장) 등으로 구성되어 있다.
지난 1994년 백제문화권 종합개발계획이 확정되고, 1997년말 백제문화단지 기반시설공사를 착수한 이래, 현재 공공시설은 완공하였고 테마파크, 테마아울렛과 체육시설 등 일부 민자시설은 2013년까지 준공하여 명실상부한 세계적인 역사테마파크로 육성할 계획이다.
백제문화단지는, 국내 최초로 삼국시대 백제왕궁을 재현한 곳으로 왕궁/사찰의 하앙(下昻)식 구조와 청아하고 은은한 단청은 백제시대의 대표적인 건축양식으로 사비성의 모든 건물마다 백제시대 유적과 유물에 근거한 사실적 재현을 통하여 백제의 역사/문화를 이해하는데 큰 도움을 준다.
또한, 지난 2006년 개관한 백제역사문화관은 전국 유일의 백제사 전문박물관으로 백제의 역사와 문화를 한 눈에 보여주는 상설전시실을 비롯하여 기획전시실, 금동대향로극장, i-백제 체험장 등 다양한 전시ㆍ교육시설을 갖추고 있다.
* 백제문화단지 입장료가 7천5백원입니다. 경로는 무료입장되오니 필히 주민등록증을 지참하시기를 바랍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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좋은 정보 올려주셔서 감사드립니다.
우리 역사 유물에 대한 사진과 해박한 내용에 대하여 즐겁게 보았습니다. 송학