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출생에서 순국까지 = 고헌 박상진 의사는 1910년대 국내 독립운동의 대표적 단체인 대한광복회의 총사령으로 활동한 독립투사로 1884년 울산 송정에서 태어났다
그는 당시 법률·경제 전문학교과정인 서울 양정의숙을 졸업한 인재로 판사시험에 합격, 평양법원에까지 발령받았으나 식민 치하에서의 벼슬길을 버리고 구국을 위한 독립운동가로서의 척박한 길을 선택했다.
그는 집안의 가산을 저당잡혀 대구에 상덕태상회를 건립함으로써 본격적인 독립운동에 나섰다.
상덕태상회는 상점을 가장한 독립운동기지로 국내는 물론 만주 안동의 삼달양행이나 장춘 상원양행 등의 곡물상과 연결되면서 독립운동의 거점으로 자리잡아갔다.
아울러 영남 일대의 혁신유림 명사들을 주축으로 ‘조선국권회복단’을 결성했는데 이 단체는 직접적인 투쟁보다는 후방에서 독립군을 지원하는 성격을 띄고 있었다.
그러나 박상진은 조국의 독립을 위해서는 무장투쟁이 불가피하다고 판단, 풍기광복단이 합류한 가운데 1915년 7월15일 대구 달성공원에서 대한광복회를 조직한다.
박상진 의사는 친일 부호를 상대로 군자금 모집에 나섰지만, 식민지 권력체제에 안주한 친일 부호들의 외면에 부딪히자 그들을 처단하는 의협투쟁의 방략을 앞세워 나갔다.
칠곡부호 장승원, 친일인사인 도고면장 박용하 등이 대한광복회의 으로 처단됐으며 대한광복회도 결국 이 일로 발각되는 위기를 맞게 됐다.
칠곡부호 장승원을 처단한 뒤 안동에 피신해있던 박상진 의사는 어머니의 임종 소식을 듣고 경주 녹동집에 달려갔다가 일제에 의해 1918년 피체, 3여 년간 옥고를 치르던 중 1921년 8월 대구형무소에서 순국했다.
정부는 박 의사의 공훈과 애국충절을 기리기 위해 1963년 건국독립훈장 독립장을 추서했다.
◆유일한 흔적, 송정동 생가 = 고헌 박상진 의사의 생가(북구 송정동 355번지)는 그의 순국 후 남의 손에 넘어갔으나 지난 2005년 울산시가 예산 13억 원을 들여 복원공사에 착수, 광복절 62돌째인 8월 15일 준공을 맞았다.
고헌 박상진 의사와 울산의 인연은 그의 8대조 때인 1664년께로 거슬러 올라간다.
그의 선조는 8대조 때까지 영천에 거주했으나 영천 임고서원 병배시비로 인해 가산을 탕진하고 울산으로 옮기게 됐다.
당시 박상진 의사의 8대조는 훗날 울산 를 지낸 학성 이 씨 월진파 이동영(이휴정)과 함께 수학한 것을 계기로 인연을 맺고 있었고, 이동영 공은 박상진 의사의 일가를 위해 천곡(추정)에 거처를 마련해 주었다.
현재의 송정동 생가는 학성 이 씨 월진파가 집성촌을 이루며 살았던 곳인데 박상진 의사의 증조부가 이곳에 가택을 지어 옮기면서 밀양 박 씨의 집성촌이 됐다.
◆추모사업회의 태동과 추모비 = 울산에서 박상진 의사를 기리는 작업이 처음 실행된 것은 그가 서른여덟의 나이로 서거한 지 40년 만인 지난 1960년 6월 22일.
당시 윤득병·박성열·차용규·김택천·배철수·설두하·유승열·박응수 등은 울산읍 회의실에서 ‘고헌 박상진 의사 추모사업추진 준비위원회 결성대회’를 개최했다.
이어 9월 5일에는 대한광복회총사령 박상진 의사 추모비 제막식이 학성공원에서 개최됐는데 당시 건립위원장은 배철수, 부위원장에는 경남도교육위원회부위원장인 유승렬이 맡고 있었다.
건립위원에는 최병국 의원의 부친인 최두출(울산국교 교장) 등 321명이 참여했고, 최영근·정해영(민의원), 윤득병(울산군수), 박성열(울산교육감), 차용규(의회대표), 김택천(사회단체대표), 설두하(울산중학교장)는 고문으로 참여하고 있었다.
당시의 비문찬은 울산국교 였던 윤영출 선생이 지었다. 이후 1978년 창립총회를 거쳐 법인이 설립됐으며 김택천이 초대회장으로 선출됐다.
1987년에는 이병직이 2대 회장으로, 1990년에는 이철호가 3대 회장을, 1993년에는 이석호가 4대 회장을 맡았고 1997년에는 권기술 전 의원이 미등기임원 회장을, 그리고 지난해에는 최병국 의원이 제5대 회장으로 추대됐다.
박상진 의사 추모사업회장 최병국 의원(한나라당) 인터뷰“독립투사 후손 자긍심 살려야” 기념공원 등 조성 울산정신 확립을
▶고헌 박상진 의사 추모사업회 회장직을 맡게 된 취지와 추모사업회의 활동 방향은?
= 나라가 망해 민족의 강토를 뺏기고 백성들은 노예가 되었던 암흑의 시절, 선생께서는 판사직도 만석군의 재산도 다 초개 같이 버리시고 민족독립을 위해 헌신하셨다.
울산인으로서 고헌 선생을 우리 울산, 대한민국의 이름으로 추앙하여 받드는 것은 후손으로서 당연한 일이다.
현재 추모사업회는 매년 8월 15일 북정근린공원에서 추모제를 열고, 경주 외남면 노곡에 있는 묘소참배향사도 갖고 있다.
앞으로 고헌 기념공원 조성, 관련 출판물 제작사업, 고헌 선생의 업적을 포함한 역사교육 실시, 울산정신 확립을 위한 범시민운동 선도 등 다양한 과제를 하나씩 실천해 나갈 계획이다.
▶ 박상진 의사 추모사업회를 이끌면서 느낀 소감은?
= 지난 3월 박상진 의사의 증손인 박대훈 씨가 작고했다.
그는 박상진 의사 생가의 관리를 맡고 있었는데, 생전에 “이 땅을 구하려던 독립운동가들의 자손들은 모두 못산다. 가난에, 학력부족에, 능력부족에, 아무리 노력해봐도 잘 풀리지 않는다”고 자조 섞인 말을 하곤했다.
이 얼마나 부끄럽고 안타까운 일인가. 조국과 민족을 위해 헌신한 분들과 그 자손들이 자긍심을 지킬 수 있는 제도적 기반이 마련되었으면 한다.
▶ 현재 박상진 의사에 대해 정부가 부여하고 있는 독립운동포상에서의 서훈이 3급이다. 박상진 의사의 수하에 있던 김좌진 장군의 서훈이 1급임을 비추어볼 때 다소 낮은 서훈이 아니냐는 이 있는데 이에 대한 소견은?
= 정말 부끄럽고 안타깝게 생각한다.
박상진 의사뿐만 아니라 모든 독립운동가들의 공과를 철저하게 파악한 뒤 그에 상당한 서훈이 봉헌되어야 한다고 믿는다.
그러기 위해 역사적 진실을 제대로 밝혀줄 의 수집부터 사료에 대한 전문적인 연구와 그 평가에 이르기까지 우리의 노력이 더욱 절실하다.
▶ 과거 최병국 의원의 선대(先代)에서 독립운동에 가담한 바가 있는지?
= 저의 선친이신 두(斗)자 출(出)자 아버님은 일제 때 초등학교 교사로서 우리나라 역사(당시는 조선사라고 했다)를 연구하셔서 그 우수성을 학생들에게 가르치고 우리글로 책자(조선역사)를 만들어 후진들에게 민족혼을 깨우치게 하시는데 전력하셨다.
때문에 당시 선고께서는 불령선인으로서 요시찰 대상이 되기도 하셨다.
박상진 의사에서 숨은 인물까지
박상진 의사(1884~1921)는 경남 울산군 농소면 송정리(현 울산 북구 농소 송정리)의 상당히 부유한 가문에서 태어났다. 박상진 의사는 1910년 이후 3.1독립운동까지 약 10년간 가장 전투적이고 활발한 무장활동을 한 대한광복회를 이끌었다. 당시 지역별로 활동하던 풍기광복단과 조선국권회복단을 통합해 결성한 대한광복회는 1915년 대구에서 결성돼 경상도 일대를 거점조직으로 점차 전국으로 조직을 확대해 갔다. 국내뿐 아니라 만주와 상해, 남경 등으로까지 활동영역을 넓힌 대한광복회는 총사령관인 박상진 의사의 주도 아래 비밀, 폭동, 암살, 명령이라는 4대 강령을 세우고 독립군 양성과 군자금 조달, 무장투쟁 등 온갖 거친 일을 도맡아 했다. 군자금 조달을 위해 자신의 재산을 내놓고 친일 부호들로부터 강압적으로 돈을 거두기도 했으며, 일제가 수탈한 세금을 압수하기도 했다.
그러다 광복회의 실체가 드러나 3.1독립만세운동이 일어나기 1년 전인 1918년 체포돼 옥고를 치르다 1년 반 만에 형장의 이슬로 사라졌는데 그 때 나이가 38세였다. 박상진 의사는 대한광복회 총사령관으로서 만주 청산리전투를 이끈 김좌진 장군을 만주 부사령으로 임명한 인물인 점을 감안할 때 역사적인 평가는 매우 인색하다. 당시 시가로 6~7만원에 해당하는 99두락의 농토를 소유한 박상진 의사의 집안도 대부분 재산이 독립운동 군자금으로 들어가면서 박상진 의사가 사형당한 후 순식간에 몰락하고 말았다. 「박상진 의사 중」
울산의 독립운동은 1919년 3.1독립만세운동과 함께 벌였던 병영, 언양, 남창 만세운동이 비교적 잘 알려져 있다. 하지만 울산 동구지역에서 ‘적호소년회’, ‘자오회’, ‘울산적색농민조합조직회’, ‘신간회’, ‘북풍회’ 등 사회단체가 활발히 활동한 사례는 제대로 알려져 있지 않다. 그 중 동구 일산진 일대의 중고등학생들로 이뤄진 ‘적호소년단’의 투철한 애국심은 당시에도 화제였다고 한다.
지금의 현대중공업 공장 부지 내에 약수터가 있었는데, 경치가 좋고 물이 맑아 여름이면 주민들이 나들이를 많이 하던 곳으로 유명했다. 그런데 당시 일산으로 이주해 온 한 일본인이 자신의 별장으로 쓰기 위해 2층 목조건물을 지었는데, 적호소년회원들이 이에 반발해 건물을 부수기로 작정을 했다. 그래서 약수터가 있는 뒷산으로 올라가 큰 돌을 굴려내려 건물을 부숴버렸다. 그러자 방어진 경찰서 일산 주재 순사들이 적호소년회원들을 잡아가 협박과 문초를 했지만 어느 누구 하나 자백한 이가 없어 결국 순사들이 주동자를 잡지 못한 일이 있었다. 이후 일본사람들은 동구 일산진을 ‘제2의 모스크바’라고 불렀다고 한다. 「독립운동 미서훈자 중」
울산의 독립운동 체계적 정리
독립운동사 재조명위원회는 이번 작업에서 울산의 독립운동을 체계적으로 정리하고, 지금까지 잘 알려지지 않은 독립운동 참여자들을 대거 발굴했다는데 상당한 의의를 두고 있다. 현재 울산지역 독립운동가는 언양 33명, 병영 26명, 남창 10명 등 69명이다. 이들 대부분은 1919년 3.1독립만세운동 당시 울산에서 벌어졌던 만세운동 참가자들이다. 이들을 포함해 이번에 발굴한 125명을 더해 모두 194명을 정리했다. 이채형 재조명위원회 위원장은 “이번에 발굴한 분들도 다 같이 목숨을 바쳐 독립운동을 했는데, 알려지지 않고 있으니 정말 안타까웠다”며 “의사들 가운데는 국내뿐 아니라 외국에서 독립운동을 펼친 경우도 적지 않았다”고 말했다.
재조명위원회는 이 책자 제1편 ‘시대별로 본 독립운동사’에서 1910년대 독립운동(독립운동의 배경, 3.1독립운동, 울산의 3.1독립운동), 1920년대 독립운동(청년운동, 사회운동, 사회단체), 1930~1940년대 독립운동을 정리했다. 제2편 ‘울산의 서훈자와 미서훈자 현황’에서는 울산지역 독립운동 서훈자 명단과 그들의 공적, 미서훈자 발굴 과정을 상세히 제시했다.
재조명위원회는 “울산지역의 독립운동가들을 더 이상 방치해서는 안 되고, 적극 발굴해 선양해야 하는 일이 우리 후학들에게 있다고 생각해 이 작업을 시작하게 됐다”며 “울산시민들에게 널리 알려져 고귀한 정신이 이어지길 기대한다”고 밝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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