그랜드에서 이번 산행지를 주흘산主屹山으로 잡았습니다.
속칭 '블야 100대 명산 둘러보기 프로그램'의 일환입니다.
저로서는 마침 여름이고 지맥 산행 하기에도 적합하지 않아 명산을 기웃거리고 있었는데 가고 싶은 곳 중 적당한 산이 뜬겁니다.
백두대간 옆에 있는 산이어서 이기도 합니다.
예전에 한 번 들른 기억이 있는 곳이긴 하지만 많은 시간이 흘러서 어느덧 그 봉우리는 기억 저편에 있는 그곳이 되어버렸습니다.
그러니 그 봉우리나, 그 봉우리에서 보는 다른 봉우리들의 모습이 궁금해집니다.
주흘산主屹山이라!
주된 봉우리라는 이름이니 문경의 진산이라는 뜻일 겁니다.
사실 우리나라 산 아니 산줄기를 휘젓고 다니면서도 백두대간에서 살짝 벗어나 있다는 이유로 이 주흘산은 냄새만 맡고 지난 격입니다.
대간을 할 때와 다른 목적으로 오를 때 등 두어 번은 주흘산을 들를 기회가 있긴 했습니다.
하지만 일행이 있을 때는 그들의 편의를 위해서, 홀로 산행을 할 때에는 장거리에 대한 체력과 시간에 대한 부담감 때문에 번번이 기회를 놓치기 일쑤였습니다.
어쨌든 등로상태는 양호할 테고 그렇게 긴 구간도 아니어서 좀 아쉬운 감은 있지만 한여름 땀 흘리고 난 뒤 하산주 한잔하기 위해서라도 주흘산으로 가기로 합니다.
하산주하기에는 그랜드만한 곳도 또 없지 않겠습니까?
일류 호텔 cook보다 더 정갈하고 입에 맞는 음식을 뒷풀이로 마련해주니 말입니다.
우선 주흘산에 대해서 알아볼까요?
인터넷을 뒤지니 여러 개가 뜹니다.
한국학중앙연구원에서 집필한 한국민족문화대백과에서 인용해 봅니다.
경상북도 문경시 문경읍에 있는 산.
높이는 1,106m이다. 소백산맥의 주봉으로서 북동쪽의 소백산(1,440m)ㆍ문수봉(文繡峰, 1,162m), 남쪽의 속리산(1,058m)ㆍ황학산(黃鶴山, 1,111m)과 함께 충청북도와 경상북도의 도계를 이룬다.
고려 때 공민왕이 이 산에 피난했다하여 임금님이 머문 산이란 뜻으로 주흘산이라 칭하였다.
주변의 지질은 풍화에 약한 화강암지대이나, 이 산은 정상부는 규암질변성암(珪岩質變成巖)과 불국사통 화강암으로 된 종형산지를 이루고 잇다. 주봉은 돔(dome)상으로 옹립하고 있어 기복이 심하며, 이 돔 상의 산정을 정점으로 방사상으로 지릉이 발달하고 있다. 지질구조는 지체구조적인 면에서 경기육괴와 소백산육괴의 편마암류 기반 위에 옥천지향사대가 북동-남서방향으로 관통하며, 이는 다시 변성대와 비변성대 경계를 이루는 지역으로 우리나라의 지질을 해석하는데 중요한 지역이다.
주흘산은 고구려와 신라의 경계를 이루었던 산이며, 북동쪽사면은 급사면이나 서쪽사면은 이보다 완만하다.
산록에는 846년(문성왕 8)에 보조국사(普照國師)가 창건한 혜국사(惠國寺)가 있다. 또 서쪽 상초리에는 주흘산사(主屹山祠)가 있어 나라에서 봄ㆍ가을로 향(香)과 축(祝)을 내려 제사를 지냈다고 한다.
영남과 기호ㆍ서울을 잇는 교통의 요지였으며, 조선시대의 애사가 깃든 유서깊은 곳이다.
서쪽의 조령산(鳥嶺山, 1,017m)과의 사이에 조령 제1ㆍ2ㆍ3관문(사적 제147호)을 끼고 있고, 조령일대는 1981년 6월 도립공원으로 지정되었다.
[네이버 지식백과] 주흘산 [主屹山] (한국민족문화대백과, 한국학중앙연구원)
이런 안내글을 보면 우선 기분이 좀 찝찝해지는 건 어쩔 수 없습니다.
짐작하셨겠지만 '소백산맥'이라는 문구 때문입니다.
'백두대간 보전법'이 제정된 게 2003년이니 벌써 14년이나 지났습니다.
그럼에도 아직도 모든 백과사전이나 안내글 등 일반 자료에는 저렇게 '소백산맥'이라는 문구가 버젓이 올라와 있는 것을 볼 수 있습니다.
그러니 저같은 '산줄기파'에게는 '소백산맥의 주봉'이라는 문구가 눈에 거슬리기만 합니다.
물론 산맥이라는 개념을 사용하였으니 주흘산이 소백산맥의 주봉이라는 말도 사실 틀린 것만은 아닙니다.
즉 산맥은 지형학의 분수계의 개념이 아닌 지질학의 산괴山塊 혹은 지괴地塊의 개념이 아니냐고 반문을 하면 할 말이 없기 때문입니다.
사실 맞기도 하고요.
그렇지만 이는 땅속의 지질구조선을 이야기 하는 것이니 우리가 산을 보면서 얘기할 때 '산맥'이라는 용어를 쓰는 게 그다지 적절해 보이지는 않아 보입니다.
더욱이 산맥이라는 단어는 우리 선조들이 써왔던 말이잖습니까?
그것을 고토분지로가 우리나라 산줄기를 참절斬截하는 과정에서 도용한 개념이기도 하고요.
즉 돌이켜보면 1903년 고토분지로가 '조선산맥론'이라는 논문을 발표하면서 우리의 산줄기를 왜곡시켰습니다.
이후 통감부 체제를 거쳐 일제강점기 기간을 거치는 동안 잘못된 지리교육이 1980년 더 정확하게는 1988년경 정도까지는 우리나라의 교과서를 지배했었습니다.
그 여파는 산맥과 산줄기를 혼동케 하는 결과를 낳았습니다.
하나 예를 들어볼까요.
2주 정도 있으면 출간될 졸저 '현오와 걷는 백두대간'에서 인용해 보겠습니다.
잠시 무대를 태백산으로 옮깁니다.
(이하 노란 박스의 내용은 위 책의 원고에서 옮긴 내용입니다)
태백산맥에 태백산은 없다?
“그러니까 태백산 부쇠봉에서 온전하게 강원도로 들어간다는 얘기지? 그런데 예전에 우리가 잠시 백두대간을 몰랐었을 때 그때는 태백산맥이라고 불렀잖아. 그 태백산맥은 이 태백산 때문에 붙여진 이름 아니겠어? 그런데 태백산맥은 여기서 어떻게 낙동정맥 방향으로 이어지는 거야? 분명 낙동강을 건너야 할 텐데.”
“중요한 지적이야. 사실 백두대간과 태백산맥의 개념은 전혀 다른 거야. 백두대간은 분수계의 개념인 반면 태백산맥은 지질학적 개념이라 볼 수 있지. 땅속에 있던 지질구조선을 얘기하는 거니까. 그게 지리학에 편입이 된 건 순전히 지형의 형성 과정 파악에 필요했기 때문이었어. 즉 거의 평평했던 지구에 화산 활동을 동반한 단층이나 습곡작용 같은 지각변동이 일어났고 그로 인해 구조선이 발달하게 됐다는 것. 그러니까 지각변동에 의해서 형성되는 단층, 습곡, 산맥 등을 구조선이라고 하잖아. 산맥 얘기할 때 자세히 보기로 하고. 어쨌든 그 지질구조선이 수천만 년을 지나면서 침식 ∙ 풍화작용을 거쳐 현재의 형상을 갖춘 게 분수계인 산줄기잖아. 그러니까 백두대간을 이렇게 정의하면 될 거야. ‘지각변동에 의하여 형성된 지질구조선이 수천만 년이라는 시간이 흐르면서 침식, 풍화작용을 통하여 현재의 산줄기가 만들어졌다. 그 산줄기는 분수계 역할을 하는데, 그 중 민족의 영산 백두산을 축軸으로 한반도를 동서로 양분하여 지리산에 이르는 가장 긴 산줄기를 백두대간이라 한다. 이 백두대간을 아버지 줄기로 나라의 모든 산과 모든 물이 여기서 흘러나가니 백두산은 그들의 조종(祖宗)이라 불린다.’ 이 정도면 되지 않겠나? 그러니 예전엔 학교에서 구조선도 아니고 그렇다고 산줄기 개념도 아닌 엉성한 산맥 개념만 가르치고 배웠던 게 우리 기성세대에게는 큰 약점이었어. 당시 지리학자들도 그러했을 것이니까.”
“지리 교육이 잘못 됐다는 거 아니야?”
“고토 분지로로부터 시작된 우리나라 근대 지리교육이 지금껏 별다른 변화 없이 이어졌다는 것에 대하여 지리학계의 노력이 부족했다는 거지. 지금은 사실 학자들이 여기서 벗어나려는 흔적이 많이 보여.”
“그럼 예전에는 태백산맥 종주를 어떻게 한 거야?”
“말은 태백산맥 종주였는데 산맥을 종주한 게 아니고 실제는 백두대간 일부와 낙동정맥 일부를 이어서 걸은 것이지. 백번 양보하여 그 당시 개념으로 얘기하더라도 태백산맥을 걸은 게 아니고 태백산맥의 분수계만 걸었다는 것이지. 산맥 = 분수계의 개념으로 알고 있었으니까. 그런데 엄격하게 따지면 산맥은 사람이 걷거나 종주할 수 있는 개념이 아니야.”
“그래도 명색이 태백산맥인데 태백산은 지나야 했을 거 아니야!”
“결론을 우선 보자면 그들이 걸었던 태백산맥에는 태백산이 없었어. 즉 태백산맥 안에는 태백산이 없었던 거야!”
그랬다. 태백산맥은 태백산을 품어야 태백산맥이라는 이름을 붙일 수 있었을 것 아닌가. 당연히 구조선은 분수계와 달라 태백산맥이라 하면 산줄기의 분수계를 얘기하는 게 아니고 지괴地塊나 산괴山塊를 얘기하는 것이기 때문에 태백산맥은 당연히 태백산을 품고 있다고 얘기할 수도 있다. 그러나 그렇게 인식하고 있었던 사람이 얼마나 있었겠는가?
남난희가 걸은 태백산맥
“그래서 예전에 태백산맥을 종주하던 사람들은 항상 여기서 ‘알바’를 하기 마련이었던 거야.”
그것을 입증해 줄 중요한 증거가 하나 있다. 여성 산악인 중에 울진 출신 남난희(1957 ~ )가 바로 그 증거다. 지금도 지리산에 묻혀 살고 있으니 영원한 산악인이다. 아리따운 처녀시절 ‘국토를 제대로 알자.’는 슬로건으로 국토순례회가 결성되었을 때, 그녀는 1984년 동계 태백산맥 단독 종주를 여성으로서는 처음으로 결행하게 된다. 예정 진행 구간을 개념도로 보면 1984. 1. 1. 금정산을 출발하여 주왕산과 백암산을 지나 1984. 2. 11. 구봉산 ~ 매봉산을 지나 대덕산에 이른 다음, 두타산 ~ 황병산을 거쳐 1984. 3. 10. 진부령에 도착한다는 것이다. 그리고 그녀가 진행 중 6차 지원조와 만나는 곳은 정선군 두문동에 있는 지금은 두문동재로 더 많이 불리는 싸리재이다. 그녀의 손에는 1/25,000 지도가 들려 있다.
한 가지 특기할 만한 것은 태백산맥을 종주하는 그녀의 계획서에는 태백산이 들어 있지 않았다. 태백산맥을 종주한다고 하면서 정작 태백산은 지나지 않는다는 것이었다. 그러면서도 1984. 2. 12.로 예정된 6차 지원조와 싸리재에서 만날 수 있을까? 산경표를 알아 마루금을 읽을 줄 아는 우리는 벌써부터 걱정스러운 눈길을 그녀에게 보낸다. 싸리재는 백두대간 매봉산 ~ 태백산 구간(태백산맥)에 있고 낙동정맥이 대간을 만나는 곳은 삼수령인 피재인데 어쩌나....
남난희를 따라가 본다. 1984. 1. 1. 금정산을 출발한 그녀는 갖은 고생을 다하면서 1984. 2. 7. 통리역으로 떨어진다. 대단하다. 통리역 부근에서 1박을 한 후, 예당골 ~ 매봉산에서 왼쪽으로 틀어 고랭지 채소밭을 경작하는 마을들을 보고는 1279봉(지금 지도의 1277.4봉)을 거쳐 예정보다 이르게 금대봉1420m(책에는 1418봉)에 떨어지게 된다. 그러고는 싸리재 헬기장으로 내려가 지원조와 만난다. 지원조와 헤어져 하루 휴식을 취하고 그녀는 대덕산 방향으로 틀어 태백산맥을 이어가다가 물줄기를 만나는 바람에 고개를 갸우뚱거리게 된다. 그러고는 다행히 인근 마을 주민을 만나 그들로부터 피재 ~ 건의령 얘기를 들으면서 다시 지도를 확인하여 보았지만 이미 상당 구간을 우회한 뒤였다. 3일이라는 시간을 허비하였던 것이다.
뭐가 잘못 되었을까? ⓵애초에 이 ‘국토순례회’ 팀은 태백산맥 종주 중 태백산은 지날 수 없다는 것을 알았다. ⓶그렇더라도 태백산맥 종주에 태백산이 포함되지 않은 것에 추호도 의심하지 않았다. ⓷이들이 산맥 산행에 충실하였다면 남난희는 이런 식으로 운행을 하였어야 했다. 즉 1984. 2. 6. 석개재를 지나 면산1246.3m(책에서는 금산이라고 하였는데 아마 綿山을 錦山으로 잘못 읽은 듯)에서 야영을 한다. 그러고는 다음 날 토산령으로 진행하여 통리로 가게 되는데 여기서 대형알바의 서곡은 시작되었던 것이다.
남난희는 이 면산에서 좌회전하여 강원도와 경상북도 도계 능선을 탄 다음,
삼방산1176.7m을 지나 878.4봉에서 910번 도로를 만난 다음 느긋하게 낙동강을 석포대교로 건너 연화산1053.5m ~ 화성재 ~ 싸리재 ~ 문수봉1514.9m ~ 부쇠봉1549.4m을 지나 태백산 장군봉으로 진행(아쉬움에 지도 상에는 ‘남난희 루트’라 표기)했어야 했다. 그래야 함백산을 지나 싸리재(두문동재)에서 일행도 만날 수 있었을 것이다. 그러면 태백산도 지날 수 있었고 그렇게 함으로써 태백산맥 종주 산행에 충실할 수도 있었다.
그런데 남난희는 토산령을 넘어 통리에서 구봉산으로 진행하는 능선에 충실하려 했던 것이 매봉산 ~ 금대봉
루트를 타게 된 결과가 됐다. 즉 산줄기 개념을 제대로 이해 못했던 당시의 사고방식으로는 구봉산 ~ 매봉산 ~ 금대봉 ~ 대덕산 ~ 35번 도로 ~ 큰재로 진행하려던 것이 대형알바를 하게 된 원인이었던 것이다.
왜 그랬을까? 남난희는 얘기한다. “이상하게도 엉뚱한 물줄기가 가로놓여 있고 길이 끊어져 있는 것이 아닌가?”
여기서 최소한 두 가지를 지적해야 한다. 첫째 남난희는 태백산맥을 종주하면서 산맥이라는 개념을 학교에서 배운 대로 그대로 믿는 우(愚)를 범했다. 즉 산맥은 분수계가 아니라 물줄기도 건너는 그런 지질구조선이라는 것을 알았어야 했는데 그녀는 산맥을 분수계 즉 산줄기로 오해했던 것이다. 만약 ‘산맥 ≠ 산줄기, 분수계’라는 사실만 제대로 알았더라면 과감하게 황지천과 철암천이 모여서 오는 낙동강을 건넜을 것이다. 그러고는 태백산맥이라는 이름에 충실하게 태백산도 지났을 것이다.
둘째 아니면 애초 태백산맥 종주에는 태백산으로 진행할 수 없다는 사실을 깨달아 매봉산이나 대덕산을 아예 산행 예정지에 넣지 말았어야 했다. 그러니 지원조와의 만남도 싸리재가 아닌 피재 즉 삼수령이었어야 했다.
즉 태백산맥은 땅속에서 올라온 지질구조선 혹은 지괴 등을 이야기하는 것이지 분수계를 얘기하는 게 아니라는 것을 미리 알았어야 했다. 하지만 그때는 제대로 몰랐었다. 산맥 = 산줄기로만 알았던 것이다. 학교에서 그렇게 가르쳐줬으니까.
다시 말해서 낙동정맥을 타고 온 산줄기는 피재 즉 삼수령에서 바로 직진을 하여 건의령 ~ 푯대봉 방향으로 진행을 하여야 하기 때문에 매봉산이나 대덕산을 산행계획표에 넣지 말았어야 했다. “처음 계획을 세울 때, 먼저 태백산맥을 했던 우정산악회와 성량수 씨의 계획서대로 했다가 나중에 보니 수맥이 가로놓인 곳이 몇 군데 있어 급히 계획을 바꾼 것인데 그게 잘못된 듯했다.”고 술회한다.
이 내용은 아주 중요한 점을 시사해준다. 즉 고토 분지로도 이 지점에서 “소백산맥이 태백산맥에서 갈라지는 지점을 찾지 못했다”고 술회하였기 때문이다. 이는 고토도 산맥을 이어지는 선 즉 분수계로 인식했음을 어느 정도 확인해 주는 대목이라 하겠다.
“안타깝네. 산경표를 몰랐었으니. 그리고 대간으로 간 것도 아니고 지금의 어천지맥으로 가버렸으니.”
여전히 꽉 막힌 숲속을 걷다보면 우측으로 청옥산1278.7m으로 흘러내려 가는 줄기 하나가 보이고 삼거리가 나오면서 태백시에서 세운 ‘깃대배기봉1370m’ 정상석이 나온다. 여기서 눈에 익은 이름인 석포면을 만나게 된다. 후에 낙동정맥을 하게 되면 몇 번이고 반복해 들어야 할 이름이다. 그렇다면 조금 더 진행하면 우측으로 낙동정맥을 볼 수 있으리란 기대감이 생긴다.
그런데 재미있는 것이 여기서 2분 더 진행하면 산림청에서 만든 또 다른 깃대배기 정상석1368m이 나온다. 예전에 처음 이곳을 지나면서 조금은 놀랐던 기억이 있다. 나무 데크를 지나 한결 부드러워진 능선을 오르다 보면 좌측으로 군 포격장이 보인다. 이내 태백산으로 갈리는 삼거리가 나오면 무조건 우측 부쇠봉을 따른다. 그 삼거리에서 우측 길로 든 지 5분도 채 되지 않아 우측으로 낙동정맥의 화려한 줄기가 보이기 시작한다.
더욱이 전망대에 올라서면 동해바다까지 눈에 들어온다. 백병산1154m, 삿갓봉1120m이 명백하고 그 우측으로 동천지맥 상의 일월산1218m이 보이니 바로 옆 좌측에 있는 게 장군봉1137m이고 그 좌측 뒤 희미한 봉우리가 정상이 헬기장으로 조성되어 있는 통고산1067m일 것이다. 그러고는 부쇠봉1549.4m이다.
부쇠봉에는 정상석과 삼각점(태백24)이 있다. ‘산맥파’는 이 부쇠봉을 태백산맥과 소백산맥의 분기점으로 보고 있다. 하지만 정작 고토는 태백산맥과 소백산맥의 분기점을 찾지 못했다고 한다. 그런데 산맥에도 분기점이 있을까? 설사 있다고 해도 그걸 육안으로 볼 수 있을까?
하지만 이건 히말라야 산맥이나 안데스, 로키에서나 통용이 될 법한 얘기지 우리 한반도라는 조그마한 땅덩어리에 들어오면 얘기가 좀 달라지지 않을까? 하지만 학문적으로는 그 생성원인 즉 성인(成因)을 밝혀야 한다고 한다. 가령 이 태백산맥이라는 것은 유라시아 대륙 지각판과 태평양 지각판이 수렴, 충돌하는 과정에서 횡압력에 영향을 받아 형성된 것이라고 한다. 신생대 제3기 때라고 하니 무려 6,500만 년 전 이야기이다. 이때 수평으로 가해진 횡압력이 대륙의 서쪽 연변부를 들어 올리게 되었다고 한다. 그래서 동고서저의 경동지형이 만들어지게 된 것이라는 것이다. 그렇게 만들어진 태백산맥을 분수계의 개념으로 봐서는 곤란하다고 한다. 그러는 그들에게 산경표를 들이대는 우리를 지리학자들이 답답해하는 점도 이해는 할만하다.
잔소리가 길었습니다.
어쨌든 이 사전의 안내글은 이 주흘산이 경상북도와 충청북도의 도계道界 역할을 하고 있다고 설명을 하던 중 황학산을 거론합니다.
김천의 황학산이겠죠.
그런데 어감이 좀 이상하죠?
황학산입니까? 아니면 황악산입니까?
그러고는 황악산1111.4m이다. 그런데 황악산은 여타 지도에는 물론 산경표에도 황악산으로 나와 있고 현지의 정상석도 황악산으로 표기하여 놓았는데 유독 국토지리정보원 지도에만 황학산(黃鶴山)으로 표기되어 있었다. 그러다 다행히 최근 지도에 황악산(黃岳山)으로 그 바뀌었다.
황악산의 뜻은?
“전에는 왜 항학산이었을까?”
“글쎄 황학산이면 그만한 이유가 있겠지. 그러려면 ‘학(鶴)’과 이 주위 지명이 좀 어울려야 하는 게 아니겠니? 가령 ‘예로부터 누런 학이 많이 날아와 노닐던 곳이라 하여 황학산(黃鶴山)이라고 불렀다.’고 한다면 이 주변의 신선봉, 망월봉, 백운봉 그리고 운수봉과 연결시켜 부르면 뭐 할 말도 없어. 그런데 황악산으로 확실하게 못 박았는데 그 뜻은 무엇일까? 혹자는 오방색(五方色)까지 동원하여 나라의 중앙을 나타내는 색깔이 노란색이므로 이 황악산이 5산 중 중앙에 위치하는 산임을 나타낸다고 하지. 그러나 이건 그렇게 볼 게 아니야. 우선 황(黃)은 우리말을 한자로 차자(借字)한 것에 불과해. ‘누를’ 황이니까 이 누를의 어간 ‘늘’ 혹은 ‘느르’에 맞는 한자어가 없다보니 비슷한 발음의 ‘누를 황(黃)’을 갖다 쓴 거라고 보는 거지. 그러면 ‘늘’이나 ‘느르’의 뜻은 무엇일까? 나는 그 예를 논산 옆에 있는 황산에서 찾고 싶어. 그 자체도 ‘늘어진 산’이라는 뜻이니까 말이야. 그 옆의 지명인 연산(連山)이나 논산(論山)과도 같은 말이기도 하고. 그러니 ‘늘뫼’ 혹은 ‘늘산’의 한자어인 황산(黃山)이었으면 ‘그저 그런 산이 평야까지 길게 늘어진 산’ 정도였을 것인데 김천의 진산인 이 산은 일반 산(山)보다는 더 큰 산이라 ‘큰 산이 평야까지 길게 늘어진 것’이어서 산(山)이 아닌 악(嶽)을 쓰고 싶었던 게 아닌가 싶어. 그래서 황산이 아닌 황악(黃嶽)이 되었고 이것의 뜻은 누런산이 아니라 ‘길게 늘어진 큰 산’이라는 의미였다는 거지. 그러니 아마 한자가 들어오기 전인 신라시대 때에는 분명 ‘늘뫼’로 불렀을 거야.”
“그런 깊은 뜻이. 형 대단하네. 그러면 황학산이라는 말은 호사가들이 지어낸 말이겠네. 예전부터 이 산을 황학산으로 부른 게 아니라 황악산으로 부른 게 맞는 거고. 택리지나 대동여지도 심지어 직지사 일주문까지도 황악산으로 썼음이 이를 뒷받침해 주니 말이야.”
“일반적으로는 그래. 그런데 악(岳, 嶽)과 학(鶴)의 관계에 주목해 해석하는 유력한 견해가 있어. 즉 이 학(鶴)을 두루미와 혼동을 해서 붙인 거라는 것이지 그러니까 지리산 즉 두류산을 볼 때 ‘두름/둠’을 봤잖아. 이 뜻이 ‘두르다, 에워싸다’의 명사형이 ‘두름’이니 이때 발음이 ‘두루미’와 비슷하잖아? 그래서 그걸 한자어로 표기하다보니까 ‘학(鶴)’을 갖다 붙이게 됐고, 그러다보니 ‘학(鶴)’자 계열의 산이 생기게 된 거지. 간단한 예로 인천에 있는 문학산이 그런 경우야. 이 황악산을 황학산이라고 부르게 된 이유가 있다면 바로 ‘김천을 에워싸고 있는 큰 산이 평야지대로 길게 늘어지는 모습’에 주목을 했다는 것이지.”
그렇다면 황악산도 황학산도 가능하다는 얘기 같다. 대동여지도에는 황악산(黃岳山)으로 표기했다.
일반등산지도에는 국토지리정보원 지도의 그 927.9봉을 신선봉으로, 576.3봉을 망월봉으로, 천덕산 가는 곳의 바위봉은 백운봉 그리고 '천덕산'은 운수산으로 나타냈던 게 황학산으로 오인케 한 근거가 될 지도 모르겠다.
정상을 넘어서면 직지사 갈림길인 헬기장을 지나게 된다. 부드러운 등로는 우측으로 김천시 정경을 보여준다. 여기서 주의할 점은 이곳의 모든 이정표는 백두대간과는 관련이 없다는 점이다. 무조건 ‘직지사’ 위주로 표기되어 있기 때문에 혼란을 가질 수도 있다. 예전에는 그랬다. 그 때문인지 김천시에서는 이정표의 하단부에는 고맙게도 '백두대간 등산로'라는 글귀를 새로 넣었다.
'그리고 공민왕이 이 산에 피난했다하여 임금님이 머문 산이란 뜻으로 주흘산이라 칭하였다.'는 말도 믿기 어렵기는 다른 내용과 다를 바 없습니다.
즉 공민왕이 하늘재를 지나간 건 사실 맞습니다.
그리고 이 부근의 동화원을 지었다는 얘기도 그렇고.....
그러나 그가 머문 곳은 여기서 더 북서진하여 황장산을 지나 작성산성 그곳이었습니다.
지루하시죠?
그럼 필요한 건 관련된 곳에서 더 살펴보기로 하고 오늘 산행을 시작하기로 합니다.
잠실을 출발한 버스는 상일동 육교를 출발하여 고속도로로 올라섭니다.
문경시 문경읍으로 들어가더니 죠차로에서 좌회전하면서 좀 불미스러운 일이 생기는군요.
서둘러 마무리하고 하늘재로 들어갑니다.
하늘재 소고(小考)
백두대간이 처음 열린 고개가 바로 이 하늘재다. 기록에 의하면 삼국이 제대로 정립이 되기 전인 AD156년 신라 아달라 이사금이 북진 즉 한강 유역으로 진출하기 위해 개척한 고개가 바로 여기라는 것이다. 역사적으로도 이 하늘재가 열린 뒤 2년이 지나 비로소 죽령도 열리게 됐다. 후에 이 하늘재 길을 마의태자가 지났음도 기억하자. 새롭게 깨끗이 정비된 이곳에는 계립령 유허비가 있고 우측으로는 하늘재 산장도 있다. 하늘재는 계립령, 대원령, 지릅재 등으로 불렸다. 계립령은 산경표에 등장하는 이름이다. 대동여지도에도 계립령이라 표기되어 있다. 대원령(大院嶺)은 불교국가인 고려와 연관을 시켜야 한다. 즉 고려시대에 들어와 미륵중원사지 옆에 큰 원(院)을 두어 오가는 이들의 숙박 시설로 이용하였다. 그러니 대원(大院)이고 이를 한글로 표기하니 한울이었다. 그 한울이 있는 고개이니 한울령 혹은 한울재가 되었고 그 '한울재'가 음운변화를 일으켜 하늘재가 되었음은 쉽게 짐작할 수 있겠다.
이 하늘재를 중심으로 충주 쪽은 미륵리, 문경 쪽은 관음리라는 지명이 불교 냄새가 솔솔 나게 한다. 곧 관음리가 현세의 관세음보살의 세계라고 한다면 미륵리는 미래의 미륵불의 정토를 떠올리게 한다. 즉 하늘재는 현세와 미래의 경계인 셈이다. 참 교묘하고도 절묘한 지명이다. 마찬가지로 분수령인 이 하늘재의 좌측으로 흐르는 빗방울은 달천이 되어 남한강으로 흘러 서해로 가게 되고 반면 우측으로 떨어진 빗방울은 신북천이 되어 낙동강으로 가서는 남해로 가게 되니 실로 종이 한 장 차이로 그 물의 운명이 뒤바뀌게 되는 것이다.
신라에 의하여 개척된 이 하늘재는 남진정책을 쓴 고구려 광개토대왕 당시 고구려와 신라의 국경선이 됐다. 자연스럽게 백두대간 라인이 삼국의 국경이 된 것이다. 고구려 사람으로는 온달장군과 연개소문이 이 하늘재 이야기에 동원이 되며 고려 사람으로는 동화원을 얘기할 때 잠시 언급했듯이 단연 공민왕이다. 1362년 홍건적의 난을 피하여 봉화 청량산으로 갈 때 이 길을 이용했다고 한다. 그리고 그 공민왕의 흔적은 황장산의 작성(鵲城)에도 나오며 낙동정맥으로 가서는 울진에도 나온다.
지도 #1
10:46
'하늘재 선녀'님의 하늘재 산장입니다.
예전에는 대간을 하는 분들의 쉼터 역할을 톡톡히 하였었습니다.
요즘은 홀로산행을 하는 이들보다 산악회를 이용하여 편하게 대간을 하다보니 대간꾼들의 기억에는 조금씩 사라지는 모양새입니다.
책에서 언급한 계립령 유허비遺墟碑입니다.계립령이 열리게 된 내력을 서명해놓은 것입니다.
이 하늘재가 백두대간 길이므로 이 대간길은 경상북도와 충청북도를 나누는 도계道界가 됩니다.
초소 너머는 충주의 미륵리이고 하늘재 산장이 있는 곳은 문경시 관음리라는 얘기죠.
그러니 좌측으로 진행을 하면 조령산 ~ 이화령으로 가는 길이 되며,
우측으로 가면 포암산 ~ 대미산으로 진행하게 됩니다.
10여분 올라가면 하늘샘이 나오겠죠?
10:48
우리는 좌측으로 나무계단을 올라 이화령 방향을 택합니다.
계단을 오르면서 좌측으로 포암산의 흰벽을 봅니다.
포암산 바위 구간은 예전의 로프와 철제 와이어를 철 계단이 대체했다. 거친 바위 구간에서 지나온 주흘산이나 부봉, 마폐봉 그리고 멀리 조령산의 봉긋한 모습을 조망할 수 있다는 것도 커다란 즐거움이다. 하늘재에서 쉬엄쉬엄 한 시간을 오르면 이내 포암산이다. 케른 앞에 앙증맞게 서 있던 예전의 ‘白頭大幹 布巖山(속칭 마골산, 지릅산)’ 정상석은 커다란 ‘포암산 962m’ 정상석으로 바뀌었다. 지금 이 포암산은 멀리서 볼 때 흰 바위산이다. 그래서 이 바위 모습이 껍질을 벗겨 놓은 삼대 같다고 하여 마골산(麻骨山)이라는 이름이 붙게 되었다. 그런데 정작 국토지리정보원 지도의 포암산은 케른과 삼각점이 있는 봉우리에서 8분 정도 더 뒤로 가야한다. 조망도 없고 잡목만 덩그러니 있는 963.1봉이 나라에서 공인한 포암산이라는 인식은 하고 지나야겠다.
10:52
하늘재 표지석이 있는 하늘재 광장입니다.
가방을 내려놓고 몸을 풀기로 합니다.
푸암산 우측으로 대간이 보이는군요.
1034.3봉에 이어 우측 끝의 대미산1115.1m이 뾰족하게 보이는군요.
조금 이따 주흘산으로 진행하다보면 좌측으로 터질 조망이 은근히 기대가 됩니다.
11:09
모래산이라는 곳입니다.
지도 #1의 '가'의 곳입니다.
별 특이한 곳도 없는 이곳이 모래산이라는 이름을 가졌다?
모르긴 몰라도 속살을 드러낸 이 모습때문에 그런건가요?
아니면 원래 이 봉우리를 예전부터 모래산이라는 이름으로 불렀기 때문인가요?
산과 관련하여 '모래'란 이름이 나올 때에는 우리 고유어 '몰'을 생각해야 합니다.
즏 '몰'은 뫼의 이전 형태였다는 것입니다.
이 '몰'이 몰〉모리〉모이 〉뫼가 됐다는 것이죠.
그러니 성남의 모란시장은 '몰+안'의 형태소였던 것이어서' 산의 안쪽에 있는' 동네를 얘기하는 것이겠고,
모래내는 '몰안애〉모라내〉 모래내'일 것이고 모래재같은 경우도 그냥 산에 있는 고개라는 뜻일 겁니다.
그러니 모래산이라고 한다면 모래가 많이 있는 산이라는 말이 아니라 그냥 산 혹은 봉우리라는 말로 이해하면 될 것입니다.
참고로 대간을 하면서 몇 번 만나게 되는 사치재沙峙岾 혹은 사치沙峙는 모래고개가 아니고 그저 '산에 있는 고개'로 이해하여야 합니다.
우리말이 없던 시절 가장 가까운 한자를 음을 따거나 훈을 따서 썼기 때문입니다.
음차音借 혹은 훈차訓借라고 하죠?
오래된 이 내무부 말뚝을 볼 수 있는 곳도 흔치 않은데 이곳부터 마패봉까지는 자주 볼 수 있습니다.
11:21
느닷없이 삼각점이 두 개나 박혀 있는 곳(지도 #1의 '나')입니다.
국토지리정보원 족보에는 없는 삼각점입니다.
기암......
11:33
지도 #1의 '다'의 곳에 올라 우틀하니,
11:34
잠시 조망이 트입니다.
대간길을 조망하려는 욕심은 아직이르군요.
조금 부족하긴 하지만 한 번 그림을 그려봅니다.
영강지맥 라인입니다.
신산경표에서는 운달지맥이라고 하죠.
백두대간의 대미산에서 가지를 친 줄기입니다.
그러고보니 좌측 끝 나무에 가린 부분이 여우재(여우목고개)로군요.
'가'가 국사봉943m이고 '나'의 움푹 파인 곳이 마전령입니다.
923번 도로가 지나는 곳입니다.
그러고는 다시 기지개를 펴서 926봉('다')으로 오른 다음 다시 장구령으로 떨어집니다.
그런 다음 이 지맥의 최고봉인 운달산1103.2m('라')을 지나 '마'의 조항령을 지나게 됩니다.
눈치채셨습니까?
영강지맥은 뭐고 운달지맥은 뭐냐는 겁니다.
신산경표의 운달지맥을 봅니다.
참고도 #1 산경도
운달지맥은 대미산에서 분기하여 국사봉 ~ 운달산 ~ 단산을 지나 달고개 ~ 천마산 ~ 큰고개를 지나 내성천 좌측으로 잠기는 도상거리 약48.8km의 지맥입니다.
지맥枝脈은 산경표에는 없는 개념입니다.
산경표에는 1대간 1정간 13정맥까지만 설정해놨습니다.
그리고 그 이하는 우리 후손들에게 맡겨두었던 것이죠.
우리나라 산경표에 관한 한 일가견이 있으신 조석필 선생은 그의 명저 '태백산맥은 없다'에서 우리나라 산줄기를 좀 폭넓게 쓰자고 제안합니다.
즉 그 개념을 기맥岐脈, 지맥枝脈으로 확장하자는 거죠.
가령 정맥급의 산줄기 세력을 가졌으면서도 10대강을 끼고 있지 못한 산줄기를 기맥으로 보고 30km급 이상의 줄기를 지맥으로 보자는 것이었습니다.
이를 확대하여 조금 더 발전시킨 것이 박성태 선생의 산산경표입니다.
신상경표가 발간된 이후 우리같이 산줄기 산행을 즐기던 산꾼들은 나라 안의 산줄기에 이름이 붙은 것을 신기해 가며 미친듯이 산줄기를 헤집고 다니기 시작했습니다.
마치 오늘 이 '블야100명산'이라고 하여 정상석 앞에서 포즈를 취하듯이 말입니다.
신산경표가 산줄기를 그은 그 기준은 분명합니다.
(자세한 것은 곧 출간될 졸저 '현오와 걸은 백두대간' 499쪽 이하 '박성태 신산경표 만들다' 참조)
그 기준은 바로 산자분수령입니다.
산자분수령山自分水嶺이 뭡니까?
제1법칙은 '산은 물을 건너지 못하고 물은 산을 건너지 못한다'는 것 아닙니까
그리고 그 2법칙은 '산줄기는 항상 그 산줄기를 에워싸고 있는 두 물줄기의 합수점에서 그 맥을 다한다." 는 것이죠.
그 물줄기도 자기보다 하나 더 상위 등급의 물줄기 말입니다.
이 이론은 많은 경우를 파생합니다.
복잡한 건 다음으로 미루고 우선 운달지맥 하나만 보기로 합니다.
위 산경도에서 명백하듯 운달지맥은 백두대간상의 대미산에서 가지를 친 줄기입니다.
이때 대간과 이 줄기 사이에서 신북천이 발원이 됩니다.
신북천은 조령천이 되고 조령천은 영강에 흡수된 다음 이 영강은 내성천에 흡수되는 과정을 거치게 됩니다.
조금 전 살펴 본 '산자분수령의 제2법칙'에 의하여 이 지맥은 가지 칠 때 나온 물줄기와 관련이 있어야 합니다.
즉 신북천이나 조령천 그리고 영강과 관련된 산줄기이므로 자신보다 한 끗발 위의 물줄기 곧 내성천과 만나는 합수점에서 그 맥을 다하여야 합니다.
그런데 신산경표를 보면 그 끝은 영강이 아닌 자신과는 무관한 물줄기인 금천이 내성천과 만나는 합수점에서 맥이 끝나게 그엇습니다.
끝 부분을 자세히 들여다보죠.
참고도 #2 대한산경표와 신산경표의 비교
운달지맥이건 영강지맥이건 대미산에서 분기한 산줄기는 천마산274.4m까지는 별문제 없이 잘 옵니다.
그런데 천마산에 이르러 운달지맥은 직진하여 그 끝을 큰고개 쪽으로 돌려 금천이 내성천을 만나는 원달지 부근에서 그 맥을 다하게 만듭니다.
그럴 경우 운달지맥은 도상거리 약48.8km의 지맥이 됩니다.
운달지맥은 신북천, 조령천, 영강과 관계 있는 것이지 금천과는 무관한 줄기입니다.
오히려 금천은 신산경표의 국사지맥과 관계가 있지 않습니까?
그래서 이에 대한 반동으로 나온 것이 대한산경표입니다.
좀 더 넓게 보겠습니다.
참고도 #3 내성천이 싸고 있는 산줄기
주지하다시피 백두대간은 국토를 동서로 양분하는 나라의 큰 줄기입니다.
그 줄기는 태백산 부근 삼수령(피재)에 이르러 낙동정맥이라는 가지를 하나 내면서 남서진을 합니다.
이때 대간과 낙동정맥 사이에서는 낙동강을 발원하게 되는 것이죠.
그러면서 이 낙동강은 백두대간과 낙동정맥의 각 산줄기에서 분기하는 모든 산줄기를 에워싸면서 그 산줄기들에서 발원하는 물줄기나 산줄기들을 모두 잠기게 합니다.
낙동강의 관할하에 있게 된다는 얘깁니다.
이들 강줄기 중 그래도 그나마 길게 뻗어가는 물줄기들은곧 그 산줄기들과 세력을 같이 합니다.
물줄기의 세력 ≡ 산줄기 세력이라는 겁니다.
꼭 같지는 않아도 거의 일치한다는 얘기죠.
낙동강에 흡수되는 이런 물줄기들 중 대표적인 것이 남강과 위천 황강, 금호강 그리고 내성천 등을 들 수 있습니다.
즉 내성천은 서천, 금천, 한천 등보다는 한끗 위의 물줄기이긴 하나 영강과는 무관한 줄기이므로 영강은 자신보다 윗 단계의 강 그러니까 낙동강만 신경쓰면 됩니다.
그러니 이 대미산에서 가지를 치는 줄기는 금천을 만나면 되는 게 아니라 영강과 낙동강이 만나는 그 합수점에서 맥을 다하여야 할 것입니다.
그렇다면 참고도 #2의 영강지맥으로 진행을 하여 천마산에서 우틀 괴포고개를 넘어 물탕거리를 지나 영강과 낙동강이 만나는 합수점에서 그 맥을 다하여야 합니다.
그럴 경우 영강지맥은 도상거리 약 48.1km의 지맥이 됩니다.
영강지맥을 표방하는 대한산경표와 운달지맥을 내세우는 신산경표의 차이점은 무엇일까요?
간단하게 보면 이렇습니다.
산경 즉 산줄기가 길게 가는 것을 택하느냐 아니면 두 물줄기의 합수점으로 가느냐 하는 문제입니다.
간단하게 돈만 많으면 되느냐 아니면 장손의 뿌리를 중시하느냐의 차이와 같습니다.
이 미묘한 차이는 산줄기 전체를 놓고 보면 '일관성'의 여부로 귀결됩니다.
즉 대한산경표는 물줄기의 흐름을 중시하고 모든 산줄기는 산줄기의 길이 여하에 상관 없이 두 물이 만나는 합수점만 일관되게 고집합니다.
따라서 이런 취지에 따라 줄기의 이름을 산이름이 아닌 강이름에서 따오게 됩니다.
산경표의 취지에 좀 더 가깝고 충실하게 하고자 함입니다.
대한산경표 집필에 들어간 이유이기도 하고....
집채만한 바위를 지나,
11:37
이정목을 지나니,
아!
진행방향으로 조망이 트이는군요.
앞에 뼈족한 게 영봉 뒤에 오뚜기 같이 튀어 나온 게 이 주흘산의 주봉이군요.
그리고 좌측 바로 앞에 국사봉과 926봉 사이로 마전령의 모습이 명백하고 923번 도로 아래로 갈평리 마을도 뚜렷합니다.
운달산과 그 우측의 조항령.
11:51
지도 #1의 '라'의 곳인 854.4봉입니다.
여기서는 탄항산이라고 표기해 놓았군요.
우리말로는 숯목봉이겠네요.
국어학적으로 살펴보면 탄은 '검, 감'에서 온 말입니다.
우리 엣말 '검, 감'은 보통 '신성, 신령'의 의미를 가졌는데 이걸 검다'는 뜻으로 잘못 이해하여 검은 것은 숯이니 이를 한자로 炭으로 표기하는 경우가 허다합니다.
서울 외각을 흐르다 한강으로 들어온 탄천의 경우가 대표적입니다.
이뜻 이외에 마을이나 동네 뒤를 '검, 곰' 등으로 표기하기도 합니다.
그래서 곰내 혹은 곰뫼라고 할 경우 마을 뒤에 있는 겅 혹은 산을 뜻하는데 탄항산의 경우에는 '문경 뒷산'이라는 의미에서 온 것 같습니다.
정상석을 확인합니다.
12:09
이정표를 지나,
12:15
평전치를 지납니다.
지도 #1의 안부입니다.
나무 계단을 올라,
12:44
드디어 안부 삼거리인 961.1봉입니다.
대간길은 우틀.
주흘산은 좌틀합니다.
여기서 대간길과 작별을 하고 우리가 가는 능선길도 도계를 떠나 온전하게 문경시 안으로 들어갑니다.
바로 조망이 터집니다.
맨 좌측이 월악산 상봉1092m, 가운데가 만수봉984.6m 그리고 우측이 아까 본 포암산969.1m입니다.
조금 왼쪽으로 움직여 구도를 잡아봅니다.
가운데가 백두대간상의 조령산1026m이니 그 우측이 예전에는 깃대봉이라는 이름을 가졌던 신선바위봉798.3m이군요.
그러면 그뒤가 이만봉과 희양산이겠고....
육안으로는 왼쪽으로 속리산 천왕봉과 문장대도 보이건만.....
부봉라인은 잡목에 가려 잘 잡히지 않는군요.
가던 길을 재촉합니다.
바위 지대를 지나,
12:59
우측으로 터지는 조망을 즐깁니다.
문경 지역 119구조안내판.
버리미기재에서 장성봉을 오를 때 보던 팻말입니다.
13:06
999.7봉을 지나는데 우측으로 조망이 터지는군요.
시원한 바람과 함께 그방향을 조망합니다.
좌측이 말뫼산688.6m 가운데가 월악산 우측이 아까 보았던 만수봉이군요.
맨 앞라인 좌측이 탄항산.
우측 바위봉이 포암산.
그 우측으로 포암산과 뒷라인의 우측의 문수봉1162m이 아주 높게 보입니다.
오늘 아주 끝내줍니다.
연화봉 우측으로 도솔산도 보이지만 사진상으로는.....
13:41
영봉으로 오르는 길은 좀 비알입니다.
그러고는 주흘산 영봉1108.4m입니다.
땀 좀 흘립니다.
오늘 폭염 특보가 내렸는데....
여긴 뒷면.
삼각점을 찾아야 하는데 이게 웬일입니까?
아무리 샅샅이 뒤져봐도 삼각점이 안 보입니다.
일반삼각점도 아니고 명색이 1등급 대삼각점인데 안 보일 리가 만무한데....
한 5분 정도 왔다갔다 뒤져도 나오지 않습니다.
순간적으로 두타산에 있는 1등급 대삼각점(삼척11)을 떠올립니다.
그 삼각점도 완전히 마모가 되어 찾기가 보통어려웠던 게 아니었기 때문입니다.
마음을 가다듬고 천천히 주위를 둘러봅니다.
그런데 이정목 바로 옆에 뭔가가 보입니다.
그냥 말뚝같은 것데 ...
석질을 보아하니 화강암이 맞는 것 같습니다.
거꾸로 고개를 숙이고 들여다 보니,
그렇군요.
빙위표인 열十자가 선명하게 보입니다.
국가기준점인 삼각점.
그것도 1등급대삼각점의 보관 상태가 이렇습니다.
2003년도 국토지리정보원에서 조사를 할 때만 해도 이렇게 제자리에 있던 삼각점이 뽑혀져 있는 겁니다.
그리고 그 자리에 정상석을 세운 것 같습니다.
이럴 수가......
하도 답답해서 다시 원거리에서 촬영을 해봅니다.
허탈한 마음으로 영봉을 빠져나오는데,
지도 #2
아까는 제대로 보이지않던 대미산과 거기서 가지를 친 1040.4봉 그리고 여우목고개가 하나의 선으로 보입니다.
즉 영강지맥입니다.
갈림길인 대미산에 대해서 좀 살펴볼까요?
잠깐 무대를 대미산으로 이동합니다.
우측으로 조망이 트일 때 멀리 봉긋 솟은 봉우리가 제일 눈에 띈다. 대미산1115.1m이다. 그 우측으로 1040.4봉이 보이고 그 능선은 고도를 떨어뜨려 여우목고개로 진행하는 모습이 뚜렷하게 보인다. 영강지맥이다.
“장감독 좀 멀리 생각해 보자. 우리가 속리산 갈령 지날 때 갈령에서 화북으로 흘러내리는 물이나 대야산 우측으로 내려가는 물 그리고 이화령, 주흘산이나 조금 전 지나온 하늘재 우측의 신북천 그리고 이 우측의 신선천 등 모든 물이 모여서 영강이 되거든. 그 영강이 낙동강과 만나는 합수점에서 저 대미산에서 시작한 줄기가 맥을 다하게 돼. 그러니 영강지맥이 되는 거고.”
“그거 참 신기하네.”
대미산(大美山, 대동여지도에는 大弥山, 1115m) 정상석이 있는 우측으로 영강지맥 등로가 희미하게 보인다. 물론 여기서 여우목고개까지도 비탐방구간이다. 대간 등로는 좌회전이다. 본시 이 대미산은 大美山이 아니고 黛眉山이다. 즉 검푸른 눈썹 산으로 '산경표'에 기록되어 있다. 그래서인가? 대미산에서 내려오자마자 만나는 샘물은 이에 착안하여 누군가가 눈썹 밑에서 나는 물 즉 눈물, 그곳이 나오는 원천이니 눈물샘으로 작명을 하였으니 참으로 멋들어진 작명이다.
참고로 한두 가지 더 들어볼까요.
국사봉이라는 이름은 우리나라 전통의 산악숭배사상의 결과물입니다.
국사國師는 불가의 승계를 얘기하는 게 아니고 우리의 국조 단군 왕검을뜻하는 말입니다.
그러니 우리나라에서 가장 많은 봉우리의 이름이 결국 국사봉인거죠.
또 하나 여우목이라 여우가 동물 여우를 얘기하는게 아니고 우리말 '엿, 옅'에서 온 것입니다,
대동여지도에는 여우목고개를 狐項嶺이라 표기하였다. 예전 우리말을 적당한 한자로 표기한 다음 이를 근자에 들어 한글로 뜻풀이를 하여 올린 것이리라. 그러니 이 ‘여우’도 동물 여우가 아님은 지난 황악산의 ‘여시굴’에서 본 바와 같다. 마찬가지로 이 고개도 여우목狐項에 해당하는 곳에 위치한 고개라는 말은 절대 아니다. 오히려 우리말의 ‘옅다/엿다’가 ‘여우/여시’로 변형이 되었고, 이 말이 지명으로 올 때에는 ‘물이 깊지 않은 곳’ 혹은 ‘’(地帶가) 높지 않은 곳‘을 뜻하는 말이 되었다는 것이다. 이 여우목고개가 그런 곳이라는 얘기가 아니다. 다만 이 고개에서 가장 가까운 곳에 위치해 있고 또한 그런 뜻을 가지고 있는 문경읍 중평리 여우목 마을에서 그 이름을 가져와서 고개 이름을 지었다는 것이다.
아까 본 영강기맥 줄기이지만 봐도봐도 질리지 않는군요.
산이란 이런 것이죠?
음...........
13:58
이번에는 주흘산 주봉에서 남봉(최근에는 관봉이라고 많이 불림)으로 이어지는 라인을 봅니다.
가운데 조령산과 뒷쪽 좌측이 희양산이 있는 대간 라인.
가운데 조령산과 그 우측으로 신선바위봉 그리고 우측 끝이 삼각점이 있는 812.7봉.
다시 숲으로 들어갑니다.
숲은 햇볕은 가려주기는 하지만 온실효과가 있는 것 같습니다.
땀이 줄줄 흐릅니다.
14:14
주봉 올라가기 바로 전 좌측으로 조망이 트입니다.
팔영리 일대가 보이고 그 뒤의 영강지맥 라인은 여전합니다.
대미산 ~ 1040.4봉 ~ 여우목고개 ~ 국사봉 ~ 마전령까지가 조망되고......
가운데 운달산 ~ 조항령 으로 이어지고 앞 라인은 시루봉531m.
그 우측으로 활공장이 있는 단산959.4m.
아까 버스타고 들어올 때 보이던 문경저수지는 시루봉에 가려보이질 않는군요.
14:18
주봉 삼거리입니다.
주봉을 올라갔다 다시 내려와서 능선을 이어가야겠죠?
직진하면 주봉, 우틀하면 1, 2관문으로 내려가는 길입니다.
직진하여 올라가면 드디어 오늘의 마지막 봉인 주흘산 주봉입니다.
와우!
그냥 뻥 돌아가실 지경입니다.
오늘 날씨 정말 끝내줍니다.
관봉 그 뒤로 버리미기재 ~ 이화령 구간을 할 경우 꼭지점 역할을 하고 있는 백화산1063.6m.
대간 라인을 타고 희양산을 거쳐 대야산 ~ 문장대 ~ 천왕봉 라인이 확실하게 보이는군요.
그런데 천왕봉 좌측의 저 봉우리는 작약산774m 밖에 없는데...
바로 앞 라인이 우리가 내려갈 지곡리.
좌측이 팔영리 그리고 우측이 하초리....
그러니 지곡리 맞은편 산이 봉명산692m이고 그 우측으로 숨은 곳이 문경CC로군요.
아까 봤듯이 그 좌측이 활공장이 있는 단산 .
봉명산 우측 뒤가 오정산811m.
영강지맥은 저 단산 뒤로 넘어가게 되는군요.
마음같아서는 관봉을 우측으로 우회하여 좌측으로 달라붙어 능선을 타고 내려오고 싶지만 너무 더워서 길도 없을 그곳을 지날 엄두가 나지않습니다.
지도로는 충분히 가능한데....
..............
내려갈 곳을 다시 한 번 가늠하고....
14:28
다시 계단을 통해 내려갑니다.
기억 속의 2관문 사거리(지도 #2의 '마')입니다.
여기서 직진이나 우틀하여 2관문으로 내려가면 그저 그런 산행이었고 아마 저는 오늘 산행에 참석하지 않았을 것입니다.
하지만 주최측에서는 여기서 좌틀하는 코스를 잡은 것입니다.
당연히 좌틀하는 지곡리 코스는 이정표 표시가 없습니다.
많이들 찾지 않는 루트라는 얘깁니다.
내려서자 마자 그 유명한 석간수가 좌측으로 흘러내립니다.
그런데 양이나 아주 적군요.
더위 탓인가?
물도 미지근하고....
14:34
너덜지대를 잠시 보고,
너덜이 내려가는 방향도 잡아 봅니다.
14:41
이제 능선에서 벗어나 본격적으로 지곡리 마을로 향하는 길로 들어섭니다.
지도 #2의 '바'의 곳입니다.
간간이 등로 작업 현장도 만나고....
오늘의 첫 물줄기를 만납니다.
이따 이 물로 알탕을 할 생각만 떠올립니다.
등로 정비를 너무 잘 해놓아서 문경시청 공무원들에게 감사한 마음을 갖습니다.
인상적인 소나무를 보고 나니....
뒤로 관봉이 보이고.....
15:34
그러고는 월복사를 봅니다.
조용한 절집 뒤에 계곡이 있다하고....
거기로 가서 알탕을 하고 옷을 갈아입었는데 물에서 나오자마자 또 덥군요.
할 수 없이 이열치열!
알코올로 몸을 데우기로 합니다.
역시 그랜드의 후식은 최고입니다.
여기가 일류 레스토랑인지 아니면 고급 한식집인지.....
오늘 산행은 월복사에서 마치고 여유롭게 귀경을 합니다.
첫댓글 산행기가 아닌 책을 한 권 읽었습니다.
다행히 아는 지명과 산명이 좀 있어서 재미있게 읽었습니다. 40분 소요 ㅎㅎ.
엄청시리 더운 날씨에 상세 설명 고맙습니다.고생하셨고요~~.
즐산 안산 하시길 바라면서....
출간 책 기대합니다.
총무님 성화가 터질 때까지 하산주 하시더니
오타가 눈에 콕콕 (지송해요♡ 소머즈 눈이라서)
ㅎ
읽느라 힘드셨죠?
그랜드의 성격이 바뀌고는 이번이 두 번째 산행이지만 이제는 낯 좀 익고 생경함이 덜해졌습니다.
오래오래 뵙죠.
감사합니다.
잘 편집된 사진과 주흘산을 중심으로 속리산방향과 소백산방향의 대간길설명과 영강지맥/운달지맥이 대미산에서 가지쳐
흘러가는 모습이랑 월악산 방향의 산군들이 눈을 즐겁게 해주었으며 대간할때 이화령에서 조령산올라 신선암봉 으로 진행하며 건너다보았던 부봉과 주흘산 영봉과 주봉 그리고 관봉 정말 압권이었지요. 그런데 오늘 접속로로 이용한 대간길도 많이 변했음을 느껴봅니다. 주흘산 갈림길에 왠 나무계단이 새로 설치되었으며 개구멍바위도 아닌것이 그렇다고 홍천 팔봉산의 해산바위와는 많이 다른구멍 바위같고 대간할때는 그 구멍바위를 통과한 기억이 나지않고 모래산 이정목도 새로 세워놓은것 같고 기록물 감동 또 감동~
대간길을 하면서 항상 그리워했던 주흘산 루트.
그 길에서 조령산이나 대미산 그리고 영강지맥을 자세히 들여다 보고 싶었었는데 이번에 그 한을 풀었습니다.
형님하고 주위 둘러보면서 걷는 맛이란....
눈으로는 대덕산도 보이고 수도산도 보였지만 역시 사진으로는 아니더군요.
그나마 날씨 덕분에 희미하게나마 육안으로 다관찰할 수 있었다는 것이 큰 소득이었습니다.
9월 초까지 주말에는 명산이나 다니렵니다.
자주 뵙게 되기를 희망합니다.
오랜만에 현오아우님과 주흘산 함께 걸으며 몸과 마음도 편했으며 사람과 산에대한 생각을 되세겨 보게됬었구 막걸리 한잔으로 만족했습니다. 1시간 동안 산행설명서 몰입하여 읽어보고 포토샾하여 잘 편집된 사진과 지도를 보며 과연 산줄기와 물줄기 그리고 지역의 역사성 많은 자료와 기록물로 설명을 세밀하게 기록해주니 보고 읽는 사람으로 하여금 감동과 기쁨을 주니 고맙고 감사하다는 생각이 절로 듭니다. 늘 건강한 모습으로 오래도록 산행을 이어갔으며 좋겠어요.
행소리님 현오님 언제나 감사합니다.
일일이 하나 하나 빠뜨리지 않고 댓글로서 귀한 문장 만들어 주시는 행소리대장님 현오박사님 .감사합니다.
제가 산행을 계속해서 하는것은 길게하든 짧게하든 그것이 문제가 아니고 그 끈을 놓지않으려고 발버둥 치는거라고 보면 되옵니다 한번 그 맥이 끊어지면 잇기도 어렵겠지만 변함없는 전진이 멈춰지는것이 두려워 하는것이라 보면 될것입니다.두분의 산에대한열정참으로 존걍 합니다..고맙습니다
현오박사님^^한글 한글 마음의 소리를 들으며 소중한 글에 쉬어 갑니다.
고맙습니다 36도 무더운날씨 산행하기도 힘든데 이렇듯 귀한글 올려주시어서 진심으로 감사드립니다
入神의 境地에 도달한 현오님의 산행기 잘읽었습니다
아울러 백두대간 책자 발행 축하합니다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