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당진 신리 다블리 주교 유적지[唐津新里-主敎遺蹟址]
정의
조선 후기 가장 많은 천주교 신자들이 거주하던 교우촌이며 현재는 천주교 성지로 지정되어 있는 마을.
개설
신리 다블뤼 주교 유적지는 ‘신리 성지’로 더 잘 알려져 있다. 비록 정치적 상황이나 특정한 사건에 의해 신리 신자들이 박해를 받았을지라도 그들은 신앙 안에서 순교의 길을 갔다.
신리의 지리적 환경
신리는 충청남도 당진시 합덕읍에 속한 삽교천 상류에 위치한 마을이다. 지금은 평야 한가운데에 있지만 조선 시대에는 밀물 때 배가 드나들 수 있었다. 신리는 인접한 거더리와 구분하지 않고 통칭하여 ‘신리’라 불리는데, 거더리에는 나루터가 있어 배로 외부와 왕래하기가 쉬웠다. 1860년대의 기록에 따르면 신리 일대는 온통 습지였으며, 우물이 없어 주변에 흐르는 소금기 섞인 물을 마셨다고 한다.
신리 앞을 지나는 삽교천의 상류로 조금만 올라가면 ‘고덕’이 나온다. 고덕에는 별암, 높은뫼, 한내 등 초기 교회 신자들이 거주하던 마을이 분포한다. 더 상류로 올라가면 덕산이 나오는데 그곳에 흥선 대원군의 아버지 남연군의 묘가 있다.
신리 신앙의 역사
신리에 천주교가 전해진 시기는 '내포의 사도' 이존창이 세례를 받은 1784년보다 약간 늦은 시기였다. 신앙이 전파되자 신리에 정착해 살던 밀양 손씨 집안을 중심으로 교우촌이 형성되어 1866년 무렵에는 마을 사람 400여 명 전체가 신자인 교우촌으로 성장하였다. 신리는 해로를 통해 외부와 접촉하기 쉬운 조건, 그리고 내포의 여러 교우촌들과 쉽게 연결되는 이점을 가지고 있었기에 조선 천주교회의 한 축을 담당하였다. 1865년부터 신리에는 제5대 조선 교구장 다블뤼 주교가 거주하였으며, 프랑스 선교사들이 배를 타고 입국하는 거점이 되었다. 기록상 신리의 첫 순교자는 1839년 기해박해 때 순교한 손경서[안드레아]이다. 1866년 병인박해 때 손자선[토마스] 성인이 공주에서 순교한 이후 서울, 수원, 홍주, 해미, 보령 갈매못 등에서 40명이 순교하였다. 이는 이름이 밝혀진 내포 지역 순교자들 중 10%에 해당하는 인원이다. 신리는 규모가 컸던 만큼 이름이 밝혀지지 않은 무명 순교자들도 많았는데, 인근 대전리 공동묘지에 있는 46기의 무명 순교자 묘소가 이를 말해 준다. 병인박해의 영향으로 신앙의 자유가 주어진 후에도 오랫동안 신리에는 신자들이 살지 못했다. 오랜 박해를 기억하는 주민들은 신자들이 신리에 들어와 사는 것을 거부하였다. 그러나 조선 시대 내포 교회의 중심이었고, 수많은 순교자들의 땅인 신리는 신자들 사이에서 회복해야 할 장소로 기억되고 있다.
신리와 병인박해
병인박해는 흥선 대원군의 명령으로 1866년 시작되어, 흥선 대원군이 실각하는 1873년까지 계속된 박해를 말한다. 흥선 대원군은 서양 세력이 확장해 오자 위기의식을 느꼈고, 자신의 정치 생명을 연장하기 위해 천주교 박해를 결정하였다. 비록 정치적 상황 속에서 박해가 시작되었을지라도 신자들은 신앙 안에서 이해하고 받아들였다.
신리에는 다블뤼 주교가 거처하고 있었기에 관련 인물들이 먼저 체포되었다. 이웃 교우촌에 있던 프랑스 선교사 오메트르 신부와 위앵 신부가 자수하여 다블뤼와 함께 순교의 길을 갔다. 또한 다블뤼가 거처하던 집주인 손자선[토마스]과 사목 활동을 돕던 황석두[루카]도 체포되었다. 이들 중 다블뤼 주교, 오메트르 신부, 위앵 신부, 황석두 복사는 1866년 3월 30일 보령 갈매못에서 순교하였고, 같은 날 손자선은 공주에서 순교하였다. 이어 4명의 신자가 더 1866년에 순교하였고, 이듬해 1867년에는 6명이 순교록에 이름을 올렸다.
더 큰 박해는 1868년 무진년에 발생하여 신리 신자 19명이 순교하였다. 그해 4월 독일 상인 오페르트가 흥선 대원군의 아버지 남원군 묘를 도굴하기 위해 덕산에 침입한 사건이 있었다. 오페르트 일행은 몇몇 천주교 신자들의 도움을 받아 신리 앞을 흐르는 삽교천을 이용하여 남원군 묘에 이르렀다. 도굴 작업이 실패하고 오페르트가 도망하면서 신리를 포함한 내포 지역 교우촌 전체가 붕괴될 만큼 피해를 입었다. 신리 성지와 관련한 무명 순교자들 대부분은 1868년 오페르트 사건 이후 생겼을 것으로 추정한다. 이듬해 1869년에 3명, 1870년에 1명, 연도 미상 1명이 추가로 순교록에 기록되었으나 더 이상의 이름은 알지 못한다. 신리를 떠나 뿔뿔이 흩어진 신자들은 순교자들에 관해 증언할 형편이 못 될 정도로 어려운 삶을 살았다. 결국 이 박해로 신리 교우촌은 완전히 붕괴되어 한 사람의 신자도 살지 않는 비신자 마을이 되었다.
건립 경위
1890년대 들어 내포 지역에 성당을 설립할 여건이 갖추어지자 신리의 중요성이 부각되었다. 1892년 프랑스 선교사 퀴를리에 신부는 신리에서 서쪽으로 2㎞ 떨어진 양촌[현 충청남도 예산군 고덕면 상궁리]에 성당을 세웠다. 양촌은 언덕에 있어서 신리가 내려다보이는 마을이었다. 오랜 시간이 걸렸으나 신리에도 신자들이 생겨나 1923년 거더리[신리 포함]에 공소가 설립되었다. 1927년에 이르러서는 신자들이 다블뤼 주교가 기거하던 손자선 성인의 집을 매입하여 공소로 사용하였다. 현재 신리 성지 내 '주교관'이 그 자리이며, 주교관 내 천정의 대들보는 그 옛날의 역사를 간직하고 있다. 1968년 병인박해 순교자들이 시복되자 신리에는 순교 복자 기념비가 건립되었다. 1984년 한국 천주교 설립 200주년을 맞으면서 천주교 역사에 대한 관심이 높아지면서 신리의 중요성도 점차 부각되었다. 이에 따라 천주교 대전 교구에서는 2006년부터 신리 성지 전담 신부를 파견하여 순례자들을 맞이하고 있으며, 2008년 12월 22일에는 충청남도 기념물 제176호로 지정되었다가 2021년 11월 19일 문화재청 고시에 의해 문화재 지정번호가 폐지되어 충청남도 기념물로 재지정되었다.
위치
당진신리다블뤼주교유적지는 충청남도 당진시 합덕읍 평야6로 135[신리 62-3]에 있다.
형태
당진신리다블뤼주교유적지는 평야 한가운데에 있는 마을로 성당과 기념관이 건립되어 있다.
현황
당진신리다블뤼주교유적지는 성당, 다블뤼 주교 기념관, 손자선 생가가 모여 있으며 전담 신부가 파견되어 있다.
의의와 평가
당진신리다블뤼주교유적지는 조선 후기 천주교가 박해를 받을 때 가장 큰 교우촌을 형성하고 있으면서 선교사들을 도와 신앙 활동의 기반이 되었다. 지금은 성지로 지정되어 순례하는 신자들에게는 신앙 성숙에 도움을 주고 있으며, 일반 방문자들에게는 광활한 평야에서 느낄 수 있는 내면의 쉼터 역할을 하고 있다.
참고문헌
김성태, 『당진 신리 교유촌의 교회사적 성격』(공주 대학교 석사 학위 논문, 2010)
김정환 엮음, 『내포 천주교의 역사와 문화』(당진시·내포 교회사 연구소, 2012)
『내포의 천주교와 성지』(충청남도 역사 문화 연구원, 2015)
출처:(한국향토문화전자대전)
합덕시장[合德市場]
정의
충청남도 당진시 합덕읍 운산리에 있는 전통시장.
개설
전통시장은 5일장으로 시장이 서는 날은 '장날'이라 하여 이날은 큰 볼일이 없어도 가까운 장을 찾아 마을 사람들이 모이고 서로 생산한 물건을 팔고 사는 거래가 이루어졌다. 이때의 시장은 단순히 물건을 매매하는 것에 머무르지 않고 서로의 안부를 묻는 등 정담을 나누며 여러 가지 정보를 교환하며 막걸기도 한 잔씩 나누는 사교의 장이었다. 1900년대 합덕은 길다운 길이 없는 오지였으며, 북쪽으로는 바다에 막혀 더 가지 못하는 막다른 곳이며 서울로 가는 길목도 아니었다. 합덕읍 운산리는 야산에 인가도 별로 없고 들판을 흐르는 삽교천[버그내]은 서해의 밀물 때면 바닷물이 밀려 들어와 수로가 생겨 거룻배가 없으면 다닐 수 없는 마을이었다. 교통수단인 배로 우강면 공포리 배길을 이용하여 인천이나 서울 등지로 장삿배가 드나들어 상인들이 물건을 팔고 사며 장이 섰다. 1930년대부터 규모 있는 시장이 형성되어 발전하였으나 1930년 후반에 일본인들이 상권을 장악하여 1940년대의 합덕시장은 암흑기이었다. 1960년대 중반부터 소들 평야의 쌀 생산으로 합덕에 농기구 소공장들이 생겨 다시 시장이 호황을 이루었다. 하지만 1990년 후반에 유통 시장의 개방과 교통의 발달로 합덕 시장은 쇠퇴하여 전통시장의 상징으로 만족하고 있다.
건립 경위
합덕시장은 1917년 합덕면사무소가 합덕면 대합덕리 덕곡에서 운산리로 이전하면서 각종 공공 기관들이 입주하면서 형성되었다. 인구가 증가하면서 생활필수품이 필요하게 되었고, 생활 경제의 필요성에 의해 시장이 자연 발생적으로 생성되었다.
변천
합덕 지역은 초창기에는 소규모의 장이 서기 시작하다가 1일과 6일에 장이 서는 5일장으로 자리를 굳히면서 매매상들이 증가하고 차차 번창하였다. 본래 음력으로 장날이 정해져 있었으나 일본인들이 1937년에 강제적으로 음력을 폐지하여 양력를 사용하면서 현재와 같은 형태의 5일장이 되었다. 합덕시장은 1930년대 이르러 기본적인 시장 규모를 형성했다. 합덕 금융 조합이 영업을 개시하였으며, 그 앞에는 일본인이 운영하는 학용품 상회와 그 밖의 20여 점포가 장날과 관계없이 상설 점포를 경영하고 있었다. 장날은 시간과 공간의 일치를 통해 인간과 인간, 인간과 상품이 만나 유통되는 것으로 합덕시장은 차츰 인근 지역인 우강, 면천, 순성 등과 예산, 고덕 등지의 상인들이 모여 들면서 시장의 중심지가 되었다. 합덕 지역은 곡창 지대로 상업이 번창하였다. 그러나 소들 평야에서 생산되는 많은 쌀의 대량 거래는 우강의 부리포를 통해 배로 인천, 서울 등지로 운반되어 거래되어 결과적으로 지역 자본이 유출되어 대지주는 인천, 서울에서 거주하게 되었다.
한편 합덕시장은 1930년대 후반부터 시장 중심 지역에 일본인이 토지를 매입하여 큰 자본을 장악하면서 지역 상인들은 영세성을 면하지 못했다. 그 당시 쌀은 모두 공출 약탈되었고 봄에 논에 심은 보리조차 공출로 약탈되어 지역 주민의 식량은 콩, 감자, 옥수수 등이 되었고, 다수는 나물을 캐어 생명을 유지했다. 일제 강점기를 지나 1960년대 후반부터 무쇠 가마솥, 탈곡기, 농약 등의 농업 생필품의 거래로 시장이 번창하여 합덕 장날 출입하는 장꾼[상인]이 1만 명이 넘었다. 1973년 7월 합덕면이 합덕읍으로 승격한 것이 결정적 원인이 되어 시장이 크게 발달하였다. 또한 새마을 운동의 결실로 인한 급속한 경제 발전으로 각 공장에서 생산된 공산품이 전국 각처에 보급되면서 시장은 더욱 활기를 띠었다. 1996년 합덕시장은 점포수가 34개로 청과, 의류, 떡집, 닭집, 노래방, 미용실 등의 점포가 영업하고 있었다. 노점상은 채소전이 26명, 곡물, 고추, 그릇, 빵, 오뎅, 젓갈 등 9명이 있었다. 5일장 상인은 72명으로 입주 장옥은 '가' 동 150평[495.867769㎡]에 상인 수는 30명으로 기성품, 섬유류, 공장 제품 등을 판매했다. '다' 동은 210평[694.214876㎡]에 상인 수 67명으로 잡화, 곡식류, 건어물, 고추 등을 판매했다.
구성
합덕시장은 2010년 9월 17일 현대화된 시설로 재건축 개장을 하였다. 지역 특산물인 쌀, 한우, 꽈리고추, 사과, 쪽파 등과 시장 대표 상품인 한우, 정육식당, 민물, 농축수산물 등의 신선한 먹을거리가 풍성하다. 시장 입구에는 주차장 시설도 넓게 마련되어 있다. 점포 수는 34개로 마트 1개 점포는 면적 542.6㎡, 창고 402.9㎡, 회의실 101.5㎡로 구성되어 있다. 한우 식당은 5개 점포에 점포당 면적은 112㎡이다. 정육점은 5개 점포에 점포당 면적은 48㎡이다. 농산물은 5개 점포에 점포 면적은 21㎡이다. 수산물은 6개 점포에 점포 면적은 21㎡이다. 건어물 4개 점포, 닭 2개 점포, 기타 6개 점포 등이 영업 중이다.
현황
현재 합덕시장은 20개 점포에 과일 가게부터 순대집, 반찬집, 잡화상 등 다양한 업종의 점포가 성업 중이며 비 가림막 공사를 했다. 합덕시장을 대표하는 골목인 중앙통 아래에는 한우 특화 거리가 있다. 한우 특화 거리에는 당진에서 나고 자란 한우를 맛 볼 수 있는 식당들과, 우수한 품질의 한우를 공급받아 판매하는 정육점이 여러 곳 있다. 반대편에는 당진 지역 농수산물을 판매하는 농산물 상가가 있으며, 외곽에는 많은 노점상들이 산재해 있다. 장날에는 즉석에서 튀겨 주는 도너츠, 순대, 돼지머리 국밥, 곤계란, 즉석 핫바 등의 먹을거리와 볼거리, 줄길거리가 진행된다. 온누리 상품권, 당진 사랑 상품권 등의 사용이 가능하다.
참고문헌
당진군지 편찬 위원회, 『당진군지』(당진군, 1997)
『합덕읍지』(합덕읍지 편찬 위원회, 1997)
『한국 고중세사 사전』(한국사 사전 편찬회, 2007)
당진읍지 편찬 위원회, 『당진읍지』(당진읍, 2011)
충남 전통시장(http://market.chungnam.net)
출처:(한국향토문화전자대전)
성동산성[城東山城]
정의
충청남도 당진시 합덕읍 성동리에 있는 삼국 시대 백제 토성.
변천
성동산성(城東山城)은 삼국 시대 백제 토성으로, 산 능선을 따라 퇴뫼식으로 토축하여 성벽을 쌓은 산성이다. 백제 시기에는 합덕 지방의 치성(雉城)으로 쓰였을 것으로 추측된다. 성동산성은 후백제 견훤이 축조했다는 전설이 전하는데, 합덕을 차지하는 세력이 전체적인 패권을 차지할 가능성이 컸기 때문에 성동산성은 합덕제와 함께 후백제 견훤과 고려에게는 매우 중요한 전략적 요충지였다. 결국 고려가 합덕 전투에서 승리함으로써 후삼국을 통일하게 된 배경이 되었다. 성동산성에 관한 또 다른 기록은 1894년 동학 농민 혁명에 관한 것이다. 합덕의 농민들이 동학 농민 혁명 과정에서 기포(起包)[동학 농민 운동 때 농민 등이 동학의 조직인 포(包)를 중심으로 하여 봉기]하여 합덕제 인근에 있는 소들성에 주둔하게 되자, 홍주 목사 이승우가 성동산성에 홍주 관군을 파견하여 합덕의 동학 농민군과 전투를 벌이게 되었다. 이때 전투는 6일간에 걸쳐 치열하게 전개되었다. 『홍양기사』에는 당시의 전투 상황이 자세히 기록되어 있으며, 성동산성을 비롯한 주변에는 당시 전투의 흔적이 고스란히 남아 있다. 현재 남아 있는 성동산성의 성벽은 동학 농민 혁명 당시 홍주 목사 이승우가 동학 농민군과의 전투를 준비하기 위해 개축한 토성으로 보이며, 당시에는 홍주 관군의 주둔지로 군사적 요충지 역할을 하였다.
위치
성동산성의 위치는 충청남도 당진시 합덕읍 성동리 성동산 일대이며 둘레가 1㎞ 정도 되는 큰 성이다.
현황
성동산성은 성동산 능선을 따라 토축된 산성의 형태가 고스란히 남아 있지만 시간이 지나면서 훼손되고 방치되는 형편이다.
의의와 평가
성동산성은 합덕제와 함께 후백제 견훤과 관련한 전설이 깃든 곳이고, 근대에는 동학 농민 혁명과 관련한 농민들이 혁명 의지가 고스란히 남아 있는 역사의 현장이다. 작은 산성이지만 매 시기 중요한 역사적 사건이 벌어졌던 것은 성동산성이 있는 합덕 지방이 가지는 지리적·역사적 위상을 반영한 것이라는 평가를 할 수 있다.
참고문헌
임한주, 『홍양기사(洪陽紀事)』(1958)
『당나루의 맥락』12-전설 편(당진 문화원, 1993)
당진군지 편찬 위원회, 『당진군지』(당진군, 1997)
당진 역사 문화 연구소 편,『당진에서 본 동학 농민 혁명』(당진 문화원, 2015)
출처:(한국향토문화전자대전)
2023-11-29 작성자 명사십리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