직장 때문에 서울에서 내려와 덜커덕 혼인까지 하는 바람에 대전에 눌러앉은 여인이 있습니다. 바로 제 아내입니다. 과년한 나이가 되기까지 서울토박이로 자란 그녀는 대전 생활 10년째인데도 여전히 서울을 그리워합니다. 물론 대전의 지리도 출퇴근하는 길 빼고는 젬병이지요. 굳이 알려고 하지도 않고요.
그래서 이번 주말엔 부여나들이를 계획했습니다. 충청도 땅의 역사를 조금 더 보여주었으면 해서요.
시댁이 보령이니 골백 번도 더 지나친 곳이 부여이건만 한 번도 정차해서 부여의 체취를 느끼게 해주지 못했네요. 대전에서 논산을 가다보면 너른 벌이 나옵니다. 계백이 5천 결사대를 이끌고 나와 탄현을 넘어 들어오는 김유신의 5만 병력을 맞아 싸운 곳이지요. 1:10의 전력으로 4합을 맞아 승세를 유지했으나 신라의 화랑 관창의 사기진작에 밀려 결국 백제군사 모두가 생을 마감한 곳이기도 하고요.
몇 해 전엔 욕쟁이 아저씨들이 등장하는 '황산벌'이란 영화로 희화화하기도 했었지요. 물론 1400여 년 전 백제,신라어의 간극은 지금의 경상,전라 방언의 차이 이상이었겠지요. 그래서 삼국통일 후 백제의 많은 지명이 한자화됩니다.
백제에선 이곳을 '黃等也山'이라 표기하는데 통일신라에선 '黃山'으로 고쳐지죠. 그래서 지금 사람들은 이 지대가 황토 산이 많아서 그런 지명이 붙었다고 오해하고 있는데 고려태조가 '黃山'을 '連山'을 한역한 것으로 보아서는 '黃'은 '누루 황'에서 나온 '느뫼)'의 훈음차이고 '連'은 '느르(連)>늘'의 훈차라 봐야할 것입니다. 실제로 이 지대는 36개의 봉우리가 연해있는 지형입니다.
부여와 공주가 이제 백제라는 테마로 몸부림을 해보려는 태가 납니다. 다시 한 번 역사는 상업의 울 안에서 변화를 맞이하려 합니다. 그게 긍정이든 부정이든.
논산에서 부여 시내권으로 진입하기 직전 능산리 고분군이라 부르는 백제 왕릉이 있습니다.
아시다시피 부여는 한강의 위례성, 공주(웅진475~538 )에 이어 성왕이 538년에 천도하여 660년 망하기까지 123년간 세번째 도읍지가 되었던 곳입니다. 해서 사비성 가까운 곳에 왕들의 무덤이 있지요.
실제 무덤을 다 개방할 수는 없으니 모형 전시실을 만들어 개방하고 있습니다.
이건 실제 같은 모형 무덤에 실물 같은 복제벽화입니다. 일제 때 발굴로 7개의 봉분이 있는데 모두 도굴된 상태였고 이런 벽화와 무덤의 구조만이 유일한 소득이었죠.
이곳에 오면 망한 나라의 왕들에 대한 상념보다는 이렇게 너른 잔디가 있는 풍경을 만들어 준 업적을 먼저 기리게 됩니다.
탁 트인 푸르름에 가슴까지 시원해지는 곳. 그냥 하릴 없이 걷다가 그늘의 의자에 앉아 쉴 수 있는 곳이어서 개인적으로 좋아하는 곳입니다. 그러나 대개는 이곳에 입장하기보다는 매표소 앞 자판기와 화장실을 이용하고 지나치는 때가 많지요.
여하튼 이곳에 오면 골프에 빠져드는 사람들의 심정을 어느정도나마 이해하게 됩니다.
왕릉 매표소 옆의 유일한 기념품가게.
널려있는 품목만 봐서는 이게 백제의 유적에서 만날 수 있는 물건들인지 동남아나 중국의 어느 유적에나 있을 물건이지 도통 구분할 수가 없습니다. 우리 나라의 관광정책과 상술에 아쉬움이 남는 부분입니다.
이제 시내권으로 들어오면 제일 먼저 부여국립박물관을 찾을 수밖에 없죠.
박물관 입구로 오르는 계단 옆에 전시된 비석받침입니다. 비석을 받치는 이 거북돌은 거북으로도 보고 용으로도 보는데 용의 아홉아들 가운데 비희라는 용이 있는데 모양은 거북을 닮고 본디 무거운 것을 지기 좋아해서 비석 받침으로 이녀석을 새기는 것이지요.
그런데 여러 돌거북 중 요놈을 특히 아끼는 까닭은 얼굴의 해학성 때문입니다. 마치 앞니 빠진 어린아이의 형용인양 이 사이로 혀를 빼어문 채 고개를 갸우뚱하고 있는 모습이 참으로 귀엽습니다. 서산에서 옮겨온 유물입니다.
백제의 마지막 태자 융(의자왕의 아들)이 당나라에 끌려가 생을 마감하고 낙양 근처 북망산(우리가 흔히 죽으면 간다고 하는 그 산 말입니다)에 묻힙니다. 거기서 발견한 비문을 복각해서 전시하고 있습니다. 원본은 당연 중국에 있겠죠?
부여박물관의 핵심은 여기 3전시실입니다.
바라보는 것만으로 역사적 가치가 줄줄 묻어 흐르는 유물 바로 칠지도입니다. 고대 백제와 일본의 관계를 살펴볼 수 있는 중요한 유물이지요. 강철로 만든 칼로 사진엔 잘 보이지 않지만 앞뒤로 글씨가 새겨져 있습니다.
앞면엔 언제 누가 만들었다는 말이 있고 뒷면엔 이런 내용이 있습니다.
"이전에 이런 칼이 없었으나 백제왕세자(근초고왕)가 특별히 왜왕을 위해 만들었으니, 후세에 보이노라"
우리 쪽에선 이걸 왜왕을 위한 하사품으로, 일본 쪽에선 왜왕을 위한 진상품으로 해석한다는 것은 교과서를 통해 익히 접했을 터.
그런 면에서 교과서에 나오는 유물 중 부여 땅에 그대로 남아 있는 몇 안 되는 유물입지요.
아아.......
바라보는 것만으로 가슴 뿌듯한 유물입니다. 부여 박물관의 간판스타이자 백제의 아이콘으로 자리 매김한 상징입니다. 백제금동대향로. 또다른 이름으로는 '금동용봉봉래산향로'라 합지요.
실상 이런 대스타가 등장한 것은 불과 15년밖에 되질 않습니다. 다시 말해 돌쇠의 고교시절엔 국사책이나 수학여행에선 이 녀석의 형상을 볼 수 없었다는 것이지요.
1993년. 앞서 들렀던 능산리 고분군의 주차장 공사 중에 발견한 깨진 토기와 기와가 아니었다면 이 녀석은 영영 땅 속에 잠들었을지도 모를 일입니다. 그때 발견한 백제의 토기와 기와로 실마리로 절터로 추정되는 이곳을 발굴하게 되었고 건물터 구덩이(공방 건물 안에 물을 담아놓는 나무통)에서 이 녀석을 발견하게 되었죠. 원형이 이토록 선명하게 보존된 채 말이지요.
기록으로만 남아있던 백제문화의 찬란함을 유물로 증명하게 된 쾌거였습니다.
용의 세 발로 떠받치는 산 위로 악사들이이 있고 산이 끝나는 지점에 봉황이 앉아있습니다.곧 날아오를 것 같은 자태로요. 사람들이 꿈꾸던 이상 세계가 이루어지면 날아오른다는 것이 바로 봉황이지요. 그런 면에서 이 향로는 사람들이 그리는 이상세계의 완성된 모습이라 보아도 되겠습니다.
봉황의 가슴엔 두 개의 구멍이 뚫려있습니다. 산 무늬 쪽의 열 개 구멍으로 안개가 형상화 되고 끝내 정상한 향 연기가 정상의 구멍으로 뿜어져 오르도록 고안된 구멍입니다. 실제 저 금동향로에서 오르는 향 연기와 향 내음을 맡고 싶어집니다.
잘 난 놈은 굳이 누가 추키지 않아도 시선을 끄는 매력이 있습니다. 마님이 흠뻑 빠졌네요.
금동관세음보살상. 너무 작아 사진엔 잘 보이지 않습니다만 나름 백제의 미소를 읽을 수 있었습니다.
박물관 내의 서산마애삼존불상 실물 모형. 조명이 바뀌면서 변화하는 얼굴의 이미지를 읽을 수 있도록 설치되어 있습니다. 제법 서산에서 보았던 이미지와 닮아있습니다.
박물관 기념품 판매대에서 탐낸 금동향로 실물모형입니다. 청동에 실제 금도금한 것이라 무척 탐났는데.....20만원이 아니라 200만원이어서 참았습니다. 꾸욱-
박물관 나오는 길에 정문 쪽에서 발견한 돌거북. 현관 쪽의 앞니 거북만큼이나 정이 가는 독특한 조형물입니다.
마님은 나보다 더 좋아하네요.
무슨 조각이 이 모양이야가 아니라 독특함과 투박함에 더 정을 느끼는 모습이 돌쇠와 무척 닮았다는 생각을 했습니다.
참 많이 다른데 사물이나 현상을 이해하는 눈에서 공통점이 있다는 것은 여러 모로 편하고 의지가 되게 하지요.
부여엔 두 개의 원형교차로(로터리)가 있습니다. 한 곳엔 사비 도읍시대를 열었던 성왕이 (마님은 의자에 앉아있는 모습이라서 의자왕인 줄 알았다나...)
다른 한 곳엔 사비 시대의 마지막을 장식한 계백장군이 서 있습니다. 절묘한 궁합입니다. 풍전등화의 국운을 알면서도 전장으로 향해야 했던 군인. 그는 자신이 5천의 병력으로 5만의 신라병을, 13만의 당군을 이길 수 있으리라 생각했을까요?
아니었겠지요. 그가 그 가족의 생명을 자신의 손으로 거둔 순간부터 그는 이길 수 없는 싸움이라 여겼을 것입니다. 군인이기에, 백제인이기에 선택할 수 있는 단 하나의 길을 걸었던 것이라 생각합니다.
원래 계백상은 지금과는 반대로 서천 방향의 백제교를 바라보고 박물관을 등진 채 세웠답니다. 그런데 건립 후에 왜 계백이 황산벌(논산방향)을 등지고 서있냐는, 즉 왜 도망가는 모양으로 서있냐는 이의제기에 반대로 방향을 틀어놓은 것이랍니다.
물론 어렸을 적 주워들은 이야기며 관청에 사실확인은 해보지 않은 내용입니다.
부여에 왔다면 이곳을 그냥 지나갈 순 없죠. 금동향로만큼은 아니지만 금동관세음보살상만큼은 유명한 부여의 명소입니다. 구드래쌈밥집. 구드래조각공원(구드래나루터) 바로 앞 음식단지에 있습니다.
1인 12000원짜리 주물럭돌쌈밥을 시켰습니다. 아직 주물럭과 돌솥밥은 나오지 않은 상황입니다. 쌈도 푸짐하고 반찬도 충청도 치고는 나무랄 데가 없습니다. 3명이 온 경우 2인분만 시켜도 싫은 내색 없이 밥 덜 그릇을 3개 갖다줍니다. 2008년 11월 현재상황으로는 일하시는 아주머니들 사이의 팀웍도 훌륭하고 교감이 있어서 소란스럽거나 퉁명스럽지 않습니다.
식당 내부 곳곳은 주인의 고풍스런 수집품으로 채워져 있습니다. 여기 말고도 옛 남포등이 많이 걸려있습니다. 밥 기다리며 마님과 내가 동시에 뱉은 말.
"저거 들고 캠핑가면 좋겠다"
휘발유를 품는 최신식 콜맨랜턴 말고 저런 호롱불 하나 곁에 두면 운치가 있겠다는 말을 자주 해오던 터였거든요. 결국 밥 먹으러 와서도 캠핑생각입니다.
옛 포스터들.
구드래돌쌈밥집의 내부.
사진에 잘 드러나지 않는 내부도 홀이 넓어서 동시 식사 가능인원이 약 240명이라지요. 이 말은 관광차 밀어닥치는 절정시간에 밥 먹으러 들어가면 대략 손님대접 못 받고 흥을 망칠 수 있다는 말이지요.
이제 부른 배를 안고 백마강(금강) 구드래나루에 섰습니다.
배를 통해 부소산으로 갈 수 있는 곳.
1인 왕복이 5500원, 편도 3500원.
유람선, 아깝다 말고 한 번 타보시기 바랍니다. 강에서 보는 풍경은 강둑에서 보는 풍경과는 사뭇 다르니까요. 더구나 다른 강도 아니고 백마강 아닙니까. 소정방의 13만 수군이 배를 통해 여기 사비성으로 들어왔다는데 참으로 믿기질 않습니다. 지금은 배가 다니는 이 구간만 3~5m 깊이를 파서 수심을 유지하고 있을 뿐입니다.
과거 이 강을 왕래했던 황포 돛배를 흉내(재현이 아닙니다. 그냥 말 그대로 흉내)낸 '서동호'
이곳엔 두 대의 황포 돛배 흉내선이 있습니다. 나머지 하나의 이름은? 당연히 '선화호'지요. 지붕이 청기와 없이 평평한 나무로 이루어진 배가 선화호입니다.
바로 이 배이지요. 모든 것이 상품화되는 시대. 서동과 선화의 설화 몇 점도 윤색되고 포장되어 상품으로 나서야 하는 시대에 약간은 실소를 띄우다가 이곳 낙화암에서 쓴 곽재구 예술기행의 글을 떠올리며 마음을 풉니다.
" 옛 백제의 흥망 자체가 상품이 되고 있는 현실을 탓할 필요는 없었다. 역사는, 그 본질은 상품보다도 아무래도 교훈 쪽에, 백성들의 삶과 질과 추억 쪽에 존재하고 있을 터이므로. 백제의 싱싱한 강바람을 단돈 일이천 원에 몇 말, 몇 섬씩 실컷 마실 수 있는 그 자체가 오늘을 사는 행복일 수도 있다."
낙화암.
꽃들이 떨어진 곳.
사람들은 흔히 의자왕의 방탕함과 향락을 떠올리며 그의 삼천궁녀를 거론합니다.
당시 백제궁성의 구조와 인구비로는 3천의 궁녀가 성립할 수 없다는 것이나 당나라 백거이의 작품에도 나오듯 '삼천궁녀'는 그저 다수의 궁녀라는 수사적 표현임을 이해 못한다 하더라도 승자의 역사는 필연코의 승리의 당위성을 제공하기 위해 패자의 역사에 자체몰락의 이유를 심어놓을 수밖에 없음을 간파해야 하지만 이곳 낙화암에서 세인들은 그저 자극적인 옛일의 한 장면만을 기억하려고 합니다. 경기의 내용이 어떠했는가가 아니라 사라 포바의 치마길이가 어떠했는지를 기억하는 것처럼 말이지요.참으로 우매하고 어리석어서 안타까운 마음을 금할 수가 없습니다.
그래서 낙화암에 서면 두 번 슬퍼집니다.
전쟁의 발톱에 가장 처절히 유린당하는 대상은 군인이 아니라 언제나 여자였다는 점에서 한 번 슬퍼집니다. 낙화암에서 취한 궁녀들의 선택이 자의든 타의든 말이지요.
그리고 그런 역사의 현장에서 전쟁의 참혹함과 강대국에 몰린 한 나라의 패망이 주는 회한이 아니라 '삼천궁녀'의 어감에서 나오는 한 사내의 욕정과 향락만을 읽는 그 말초적인 감상 앞에서 다시 슬퍼집니다.
낙화암에 새겨진 붉은 글씨는 우암 송시열의 글씨라 하지요.
밑에서 올려다본 낙화암 옆 고란사입니다.
삼천궁녀의 혼을 달래기 위해(여기서도 그놈의 삼천궁녀 타령입니다)지어서인지 절 벽화의 한 부분은 낙화암에서 궁녀들이 투신하는 장면을 그려놓았습니다.
고란사 뒷벽에 있는 약수. 먹으면 3년씩 젊어진다는 설이 있지요. 과거에 아이가 없는 노부부가 있었대요. 할머니가 할아버지를 회춘시켜 아이를 가지려고 이 약수를 먹게 했다는데 물 마시러 간 남편이 돌아오지 않아 이곳에 와 보니 그만 갓난아이가 할아버지 옷 위에서 울고 있더라나. 과다복용의 부작용이었죠. 할머니가 그 아이(사실은 남편)를 정성껏 길러 장성한 후에 큰 벼슬자리에 올라 공을 많이 세웠다는 전설이 있는 곳입니다.
그런데 지금은 약발이.....
고란사에서 조금 올라가면 낙화암이 있는데 그 옆에 백화정이란 정자가 있습니다. 역시 삼천궁녀를 위로하기 위해 지은 정자. (그놈의 삼천궁녀, 삼천궁녀...)
낙화암. 눈 아래로 백마강이 도도하게 흐르고 있습니다. 그날 이후로도 1400년 가까이.
부소산의 낙화암 근처에선 스피커를 통해 끊임없이 한 곡만 반복되고 있습니다. 바로 '꿈꾸는 백마강 '이지요.
백마강 달밤에 물새가 울어
잃어버린 옛날이 애달프구나
저어라 사공아 일엽편주 두둥실
낙화암 그늘아래 울어나 보자
고란사 종소리 사무치면은
구곡간장 올올이 찢어지는듯
누구라 알리요 백마강 탄식을
깨어진 달빛만 옛날 같으리
그런데 배호가 아닌 여가수의 목소리인데 제 맛은 아니더이다.
낙화암에서 내려올 때 바라본 고란사 풍경입니다. 영일루와 군창터, 수혈주거지 등은 다음 기회에 부소산 주차장으로 진입하여 볼 것을 기약하고 배에 올랐습니다.
유람선에서만은 제대로 된 배호의 노래를 틀어주더군요.
이제 다시 구드래나루터로 돌아와 백구에 올라 백제교를 건넙니다.
보령에서 부여진입하는 방향의 수북정 위에서 본 백제교. 백제교가 끝나는 우측의 숲에 신동엽 시인의 시비가 있습니다. 제 개인적으로 부여를 이끄는 두 축은 백제와 신동엽입니다.
초행자들은 찾기 어려울 공간에 왜소하게 들어선 신동엽 시인의 시비. 69년 그가 간암으로 타계한 후 1주기에 세워진 것입니다.
"우리 강토와 겨레의 쓰란..."으로 시작해 "그가 나서 자란 이 백마강가에 세운다"로 끝나는 비 뒷면의 글엔 1970.4.7이란 날짜가 새겨져 있습니다. 독재와 외세에 항거한 그의 인생을 돌이켜볼 때 서슬퍼런 70년대에 시비를 세울 수 있었음은 다행이지만 그 때문에 부소산에 세우려던 시도가 좌절되어 궁벽한 이곳에 놓였습니다. 새겨놓은 시도 그의 대표작 <껍데기는 가라>가 아니라 <산에 언덕에>입니다.
여행을 떠나듯
우리들은 인생을 떠난다.
이미 끝난 것은
아무렇지도 않다.
신동엽의 서사시 <금강>의 7장 일부입니다. 1969.4.7일 그의 장례식으로 명성여고 제자들이 낭송한 구절이지요.
그는 그의 삶을 미리 정리해 놓았던 것일까요. 여행을 떠나듯, 우리들은 인생을 떠난다. 여행을 떠나듯....우리들은.....
그의 시구가 내내 뇌리를 떠나지 않습니다.
이어 신동엽 시인의 생가가 있는 골목을 찾았습니다.
성왕의 동상이 있는 로터리에서 계백장군 동상 로터리로 이동하다 보면 약 3/4지점, 그러니까 계백장군 로터리 약 50m 전 우측 골목으로 들어와 50m쯤 들어오면 파란 지붕이 있는 집이 그의 생가입니다.
큰길 옆 골목입구에 나무 간판이 하나 있기는 합니다만 처음오는 분들이 쉬이 찾을 수 있는 곳은 아니지요.
한국문학사에서 차지하는 그의 비중을 감안하면 그의 고향에서 참으로 대접을 받지 못하고 있는 것이지요. 참으로 모를 일입니다. 조금이라도 관광과 연관한 꺼리가 된다 싶으면 똥오줌 안 가리고 상품화하는 게 요사이 지자체의 속성인데 부여에선 신동엽 시인이 지나칠 정도로 저평가 되고 있습니다.
이 집입니다. 파란 기와. 신동엽 시인이 나고 자랐던 곳입니다. 마지막 순간까지 부친 신연순옹이 지켰던 집이기도 하고요. 6.25 전쟁 직후 인병순여사가 서울대를 그만 두고 내려와 신동엽의 아내가 될 인사를 올렸던 곳이기도 합니다.
생가의 처마밑엔 부인 인병선 여사가 짓고 신영복이 쓴 '생가'라는 글이 있습니다.
우리의 만남을 / 헛되이/ 흘려버리고 싶지 않다.
있었던 일을/ 늘 있는 일로/ 하고 싶은 마음이
당신과 내가 처음 맺어진/ 이 자리를
새삼 꾸미는 뜻이라
우리는 살고 가는 것이 아니라/ 언제까지나
살며 있는 것이다.
절절한 내용입니다. 남편을 보내고 2남 1녀를 혼자 키우며 가슴에 간직했을 사랑과 한이 조용하게 묻어나옵니다. '있었던 일'을 '늘 있는 일'로 하고 싶은 그 마음이.
현대인에게 '생가'란 어떤 존재일까요. 아니 생가가 존재하기나 할까요? 이촌향도로, 재개발로, 잦은 이사로....번호로 존재하는 아파트의 일련번호 말고, 나와 가족의 생활상이 묻어있는 '살고 가는 것이 아니라' '언제까지나 살며 있'을 수 있는 그런 공간이 존재하기나 할까요.
아직 고향엔 나의 생가가 존재합니다. 출생 당시의 건축형태와는 다소 변화가 있었지만 어린 시절의 기억과 한 인간으로서의 나가 만들어지기까지의 과정이 오롯하게 묻어있는 공간이. 그러나 그리 멀지 않은 시일은 그곳도 헐리우고 다른 그 공간을 지키고 계신 어머니도 다른 공간을 찾아 움직이게 될 것입니다.
그렇기에 이제 옛 사람이 된 시인의 생가에서 느끼는 감회는 깊고 뭉클합니다. 비록 창호지가 다 뜯기고 인적도 없는 폐가의 형상을 닮아가고 있다 하더라도요. 시인의 생가를 문학관으로 활용하겠다고 유족이 밝힌지 몇 해가 되는데 아직 생가는 버려진 건축물 그대로의 모습입니다. 부디 저 공간이 끝까지 남아 시인을 추억하는 자들에게 생동감과 감동을 주는 등대로 남았으면 하는 바람입니다.
우상숭배를 배척하는 종교조차도 십자가라는 상징물을 만들 듯, 만물에 부처가 깃들었다 하지만 유난히 그의 상을 따로 만들어 모시 듯 흩어지기 쉬운 인간의 마음을 구체적으로 잡아내는 것은 실재하는 상징물, 그것이니까요.
헛헛한 마음으로 시인의 생가를 나서 궁남지가 있는 서동공원에서 전시 중인 국화꽃을 봤습니다.
의자왕의 아버지인 백제 무왕이 지었다는 궁전 남쪽의 연못 궁남지.
무왕이 지었다니 또 억지 서동과 선화의 사랑터로 포장하여 대대적으로 복원조성했지만 학계에선 여기가 그 터가 아니라는 설도 있지요.
그 궁남지의 정자 '포룡정(泡龍亭)'에 앉아 천 년도 넘는 세월 전에 망했지만 관념 속에 남아 있는 어떤 나라와 40년도 넘는 세월 전에 타계했지만 여전히 강한 울림으로 남은 한 시인을 생각하며 싸늘한 공기를 들이켰습니다.
아내에게 내가, 우리가 숨 쉬는 주변 땅의 의미를 보여주려다 괜스리 나만 또 감회에 젖었습니다그려.
그럼
안녕
언젠가
또 다시 만나지리라
무너진 석벽/ 쓰다듬고 가다가
눈인사로 부딪혔을 때 우린
십겁(十劫)의 인연(因緣)
......
그럼 /안녕 / 안녕
논길 / 서해안으로 뻗은 저녁노을의
들길, 소담스럽게 결실한
붉은 수수밭 사잇길에서
우리의 입김은 혹
해후할지도 몰라.
-신동엽 <금강> 부분
첫댓글 돌쇠님 옛길따라 도보여행 마친날 아들 공부로 사진에 나온 낙화암, 구드래 쌈밥집 둘러보고 밤에 동학사 캠핑장으로 마중 갔던 생각이 새록새록 납니다.
그날 먼 길임에도 애써 찾아주신 것 잊지 않고 있습니다. 서동요 세트장까지 다녀오셨던 것도요. 그러고보니 오뚜기령의 아픈 기억부터 여주의 도보여행까지 안츠님과 쌓은 추억도 많네요.
구드레 돌쌈밥집....대전에서 일할 때 부여 모 초등학교 여선생님과 선 본다고 점심먹었던 곳인데....ㅎㅎㅎㅎ..부여는 언제 다녀오신거여요?^^
부여는 지난 일요일에 다녀왔네. 그랬었군. 같은 장소라도 사람의 수만큼 다른 느낌과 기억이 있다는 것을 새삼 느껴.
설풍님...언제 일박이일 해야지......??
써든님 살아계셨군요....ㅎㅎㅎㅎㅎ
제일 역사적으로 조명 받지 못한곳이 백제 문화인것 같아요. 그래도 일본 나라시를 여행할때는 뿌듯 했는데.... 그래도 요즘은 백제 문화에 대한 관심이 조금씩 일고 있는것 같더라구요... 좋은 내용 멋진 사진 감사합니다. 이곳에 백마강이란 음악 배경음악으로 깔아 주시면.. ㅎㅎㅎ
그러게요. 음악 배경음악으로 깔려면 어찌하지요?
걍 노래파일 복사해서 붙이기 하시면 됩니다....
금동항로에 푹~빠진 마님이 참 이뻐 보입니다...^^ 뭐든 심취하면 다른이까지 빠지는 마력이 있나 봅니다 가까운곳에 이리도 아름답고 고풍스러운것이 있는데도 한참을 돌고돌아 서울처자이신 마님께서는 십년만에 둘러보신듯하군요... 좋은공부 오늘도 많이 했습니다
작업중이라해서 ....... 몇일 앓다가왔더니 훌륭한 여행기....몰두하다 갑니다... 뒤돌아보게되고, 퍼져 앉어보게되고,역사도배우고 , 인생도 느끼고 가오 ~~ 여행가면 건성으로 눈요기만 했던 지난날이 왜 ~이리 아까운지요....
고맙습니다. 많이 돌아보고 분투하겠습니다.
내가표현못한 글들에 대해서도 감탄스럽지만......많이알고있는예문들도...... 속속히 파고드는 정신과맘의느낌이 돌쇠님을 어떤사람인지도 돌아보게합니다, 깨달음을 주니까요........
낙화암이 바로 저곳이 군요... 3천궁녀가 뛰어내린 상상을 하며 백제의 역사를 다시 한번 돌아보게 되었습니다.
3천궁녀 아니라고 본문에 그리 썼건만! 하여튼 케이티님 글자 안 읽으시는 건 여전.^^하하
ㅎㅎㅎ 패망이주는회한을 모르시고 , 사내의욕정,향락, 말초적인감상의 슬픔을 몰라주니 돌쇠님 서운하셨구마요 ㅎㅎ
예전에 갔던 기억이 새록새록 합니다..... 일본과의 연관성때문에 공부했던 자료들이 아직 집안 어딘가에 있을텐데.... 올가을 찾아봐야 겠네요.... 잘 보았습니다^^
일본과의 연관성 때문에 공부했다 하심은? 개인적 관심에서, 혹은 일과 관련해서? 어쩐지 인디님은 범상치 않은 냄새가 나더라 했어요.
나머지 못읽은건 이쪽에서 읽었네요....ㅎㅎㅎ 거의 가본곳이긴 한데...그리 큰 기억은......~!
형~ 언제 부여로 함 가유~^0^
자세한 내용 잘봤습니다. 궁남지 연꽃축제는 좋았던 기억이 있네요
지난 번 사진만 있을때 잠시 보았다가 뒤늦게 여행기를 읽습니다. 수 년 전 가족들과 백제역사 기행을 위해 풍납토성부터 공주를 거쳐 부여까지 세 차례의 주말여행을 했었지요. 부소산성에서 바라보던 백마강이 떠오릅니다. 진한 감동으로 페이지를 닫습니다.
고향이 부여라 평소에도 자주가지만 사진으로 보니 새롭게 다가오네요~감사합니다~^^ 쌈밥집 역시 친구네집입니다..그뒤쪽 마을에 살았었는데~ㅎㅎ여전히 장사는 잘되는가 봅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