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김천시 구성면의 방초정 연못은 누각의 아름다움을 더해주는 경관적 기능과 함께 마을에서 흘러나온 오수를 정화하는 역할을 담당했다.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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누각 내부에 여닫이문이 설치돼 있는 방초정은 마을의 사랑방 역할을 담당했다. 누각 중앙에 있는 방 아래에는 구들이 있어 겨울에도 따뜻하게 지낼 수 있다.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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김천 구성초등학교 정문 옆에 위치한 숭례각에는 주자의 가례를 보완하고 재해석한 ‘가례증해’의 판목이 보관돼 있다. 상원리 주민 이철응씨가 판목을 점검하고 있다. |
산지로 둘러싸인 김천시 구성면의 남쪽으로는 감천이 유유히 흐른다. 백두대간에서 발원해 남에서 북으로 흐르는 감천 주변 취락의 형태는 매우 특이하다. 대개 남향인 우리나라의 촌락들과 달리, 감천유역의 마을 상당수는 감천을 바라보는 동향으로 조성됐다. 독특한 마을 배치는 ‘배산임수(背山臨水)’를 선호하는 풍수지리학의 영향이 컸는데, 구성면의 연안이씨 집성촌인 상원리도 마찬가지다. 상원리는 1974년 경북도 유형문화재 제46호로 지정된 방초정(芳草亭)과 조선의 예학을 집대성한 가례증해(家禮增解)로 유명하다.
‘감천 150리를 가다’ 23편에서는 조상을 기리고, 선비의 풍류를 간직한 방초정을 다른 각도에서 재조명했다. 또한 복잡한 예법을 정리, 조선 고유의 풍속을 지키고자 애썼던 유학자에 대한 이야기도 담았다.
#1.‘방랑시인’의 휴식처
김천시 구성면 상원리 입구에서는 조선 후기의 누각, 방초정의 우아한 자태를 직접 볼 수 있다. 방초정은 1625년(인조 3) 상원리 출신의 유학자 이정복(李廷馥)이 선조를 추모하기 위해 세운 누각이다.
방초정이 세워진 이후 수많은 시인·묵객이 이곳을 거쳐갔다. 방초정을 다녀간 선비들은 마을 앞 감천과 비옥한 들을 바라보며 세상의 이치를 깨닫곤 했다. 방초정 뜰 앞의 연못은 감천 건너편의 산세와 어우러지는 몽환적 풍경을 선비들에게 선사했다. 방초정은 원래 지금의 위치보다 감천과 가까웠는데, 가례증해를 저술한 경호(鏡湖) 이의조(李宜朝)가 1788년 지금의 자리에 다시 지었다.
상원리의 선비들과 교류한 수많은 인물이 방초정을 찾았고, 이들의 방문은 방초정에 뚜렷한 흔적을 남겼다. 현재 방초정에는 300여년의 세월 동안 이곳을 다녀간 선비들이 쓴 누정시 30여수가 마을의 내력을 뽐내듯 당당히 걸려있다.
누정시를 남긴 인물 중에는 이름만 들어도 알 법한 이들이 많다. 그중에서도 조선 후기의 문신 성담(性潭) 송환기(宋煥箕)가 가장 눈길을 끈다. 송환기는 우암(尤庵) 송시열(宋時烈)의 5세손으로 예조·이조판서를 지냈으며 학덕을 겸비해 선비들의 존경을 받은 인물이다.
송환기와 이의조는 서로를 잘 아는 벗이었다. 송환기는 평소 주변의 지인들에게까지 이의조의 학문적 깊이와 인품을 알렸을 정도로 두 사람은 돈독한 우정을 과시했다. 이들의 우정은 15세기 중반 김천 등 영남 일대를 유람한 우암의 영향을 받은 것으로 보인다. 또한 김천 일대의 선비들과 중앙정치무대 간 지속적이면서도 꾸준한 교류가 있었음을 짐작하게 한다.
방초정은 조상을 기리는 숭고한 뜻을 지녔으면서도 매우 실용적인 공간으로 정평이 나 있다. 평소 강학소의 기능과 함께 문인들이 풍류를 즐기는 유희 공간을 겸했지만, 마을의 사랑방 역할을 톡톡히 했다.
2층 누각인 방초정의 위층에는 문이 달려 있다. 이 문을 걸어올리면 넓은 마루가 되고, 내려닫으면 방으로 쓸 수 있다. 누각 중앙의 방 아래에는 돌과 흙으로 쌓아올린 구들이 있어, 매서운 한파가 몰아치는 겨울이라도 따뜻하게 지낼 수 있다. 통상 양 끝에 방이 있는 일반적인 누각의 구조와도 많이 다르다.
하지만 방초정은 아무나 드나들 수 있는 곳이 아니었다. 반세기 전만 해도 한시를 지을 정도의 학문적 깊이를 지닌 문인들만 누각에 오를 수 있었다. 6·25전쟁 직후까지도 부녀자들은 방초정에 함부로 들어갈 수 없었다고 한다. 물론 지금의 방초정은 마을주민 누구나 쉬어갈 수 있는 공간으로 바뀌어 있다.
#2.‘오래된 미래’를 간직한 방초정
방초정과 뜰 앞에 조성된 연못은 조선시대 정원 연구의 소중한 자료로 활용되고 있다. 그런데 방초정을 미학적인 측면에만 치중하지 않고, 환경적인 시각에서 재해석한 연구결과가 있어 눈길을 끈다.
10여년 전 상원리를 방문한 한남대 건축학과 한필원 교수의 저서 ‘한국의 전통마을을 가다’는 방초정이 경관적 기능 이외에 환경적으로도 매우 중요한 역할을 담당했다고 기록하고 있다.
방초정 연못이 마을에서 흘러나온 오수를 정화해 감천으로 배출한다는 내용이 그것이다. 한 교수와 제자들은 2002년 방초정 연못의 수질을 분석했고, 연못이 수질정화 기능을 충실히 수행하고 있다는 결과를 이끌어냈다.
유학을 숭상하는 조선의 선비들이 환경오염을 막는 정원을 세웠다는 점이 매우 놀랍다. 선인들의 지혜로움은 마을 곳곳에 남아 있다. 상원리 노인들에 따르면 과거 마을 샛길 주변으로는 방초정 연못으로 향하는 수로가 있었고, 일부는 지금도 형태를 유지하고 있다. 이러한 수로 덕분에 마을의 오수는 모두 연못으로 모였다. 현재 일부 배수로에는 하수관이 설치돼 옛 모습을 떠올리기가 쉽지는 않다. 하지만 마을의 수로가 하수도의 기능을 담당한 것은 분명해 보인다.
환경을 고려한 정원의 설계 덕택에 마을에서 발생한 오염물질은 방초정 연못에서 분해됐다. 오염이 심한 분뇨는 소중한 거름으로 쓰였기에 마을에서는 어떠한 오염물질도 나오지 않았다. 시골 마을의 작은 연못이 거추장스러운 현대의 하수정화처리시설보다 훌륭히 제 역할을 하고 있었던 것이다.
방초정 외에도 친환경적인 정원은 김천 곳곳에 흩어져 있었다. 구성면 인근 지례면에도 연정이라는 누각이 있었는데, 지금은 도로로 편입돼 사라지고 없다. 연꽃이 만개한 연정의 연못 역시 오염된 물을 정화해 감천으로 흘려보냈다고 전해진다.
#3.조선의 예학(禮學)을 정리하다
조선 현종(顯宗, 1641~1674) 때 인조의 계비인 조대비(趙大妃)의 상례(喪禮)를 두고 남인과 서인이 두 차례에 걸쳐 다툰 사건이 있었다. 후대에선 이를 1·2차 예송논쟁이라 하는데 예법의 옳고 그름을 두고 각 정치세력이 자신의 주장을 관철시키려 했던 사건이다. 유교를 국가통치 이념으로 삼았던 조선에서 예(禮)의 본질을 연구하는 예학(禮學)이 얼마나 중요했는지를 보여주는 일화다.
17세기의 예학 논쟁은 조선후기 수많은 예학서적이 출간되는 계기가 됐다. 조선 초기만 해도 송나라의 유학자 주자가 쓴 주자가례(朱子家禮)가 모든 예법의 기준이었다. 하지만 시간이 지나면서 가례에 담긴 의미가 다양하게 해석되자, 예학과 관련된 연구와 저술이 활발해진다.
그중에서도 조선 후기 상원리 출신의 유학자 경호 이의조가 주자의 가례를 보완하고 재해석한 ‘가례증해’의 존재는 눈여겨볼 만하다. 18세기 영·정조 시대에 활동한 학자인 이의조는 어렸을 적부터 영민함이 남달랐다. 이의조는 김천 이외에도 호서지방 선비들과 교류하며 학문적 깊이를 쌓았다. 40대가 되어서는 경호서사를 짓고 강학에 주력, 후학을 양성했다. 정조 때 영남어사 황승원의 천거로 관직에 임명되었으나, 이를 거부하고 향리에 은거하는 등 천성적인 학자로서의 면모를 보였다.
총 14권으로 구성된 가례증해는 경호의 아버지 이윤적이 모은 자료를 바탕으로 쓰였다. 부자(父子)가 대를 이어 책을 쓸 정도로 학문에 대한 열정은 대단했던 것이다.
가례증해는 1792년(정조 16) 간행됐다. 이후 가례증해는 조선후기의 학자이자 정치가인 이재(李縡)가 쓴 사례편람(四禮便覽)과 함께 주자가례의 보충서 및 해설서로 널리 보급됐다.
지금도 김천 구성초등학교 정문 옆 숭례각에는 가례증해의 판목이 보관돼 있다. 1995년 지어진 숭례각은 정면 3칸, 측면 2칸이며, 건물 위아래로 환기구가 있어 판목이 부패되거나 훼손되는 것을 막을 수 있다. 판목의 크기는 46X55㎝ 이며, 총 475매에 달하는 방대한 양이다. 정성스레 새겨진 글귀 옆에는 세밀하게 표현된 그림까지 곁들여져 있을 정도로 매우 정밀한 각판기술이 적용됐다.
문재원 국사편찬위원회 사료조사위원