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경신대출척
유사(遺事)가 많아 , 편집을 1, 2, 3부로 나누었습니다.
이때 부터 광산김씨는 7명의 대제학을 배출하기 시작하였다
1. 경신대출척. 6형제분.
김익열, 29세. 김익희 29세. 김익겸, 29세. 김 익훈, 29세.
김익후, 29세. 김익경, 29세.
2. 경대출척.
김만기, 30세. 김만중, 30세. 김진규, 31세. 김양택, 32세. 김영수, 37세.
3,경신대출척.
김 총, 26세. 김익렵, 29세. 김우화, 29세. 김정봉, 29세.
김우철, 29세 . 김자건, 27세. 김자남,27세. 김익화, 28세.
조선조 숙종 때 1680년, 당시 남인이 몰락하고
서인이 정권을 잡은 사건이다.
효종의 뒤를이은 현종은 15년간 재위 기간중 상복을 둘러싼
예송문제가 제기되었다.
1차는 효종이 승하 하자, 효종의 어머니 자의대비(인조 계비)의
복상 문제가 있었다. 서인는 기년설을, 남인는 3년설을 주장하였다
서인의 기년설이 채택되었다..
2차는 현종 15년(1674)에 인선대비(효종의 정비)가 승하하자,
자의대비의 복상문제가 또 일어났다.
서인은 대공설을, 남인은 기년설을 주장하였다.
남인의 기년설이 채택되었다.
예론문제가 대두되면 조선은 ‘5의례’를 참고하였는데,
여기에 대비의 복제가 실려있지 않아 생긴문제다.
2차 예송에서 정권을 잡은 남인들이 숙종이 등극하자,
신임을 받지못하였다.
영의정 허적이 조부의 시호를 맞이하는 잔치에,
왕실의 허락도 없이 먼져 천막을 가져다 쳤다가,
숙종의 진노를 불러 일으켰다.
왕은 대노하여 군권을 서인에 넘기는 전격 조치를하였다.
서인의 김석주, 김익훈이 허적의 서자 허견이 종실의 복창군과
3형제와 역모를 꾀한는 고변이있자,
허견은 능처참되고 복성군은 교수형에처했다.
숙종 6년(1680)에 허적 일가족과 윤휴가 살해되었다.
남인 일파도 옥사에 관련되어 대거 실각하면서
권력은 서인으로 넘어왔다.
이 때가 경신년 이었으므로 경신 대출척이라한다.
30세 문충공 휘 만기 (양간공파‧의정공파)
1633(인조11)-1687(숙종14) 조선중기 문신. 자는 영숙. 호는 서석.
시호는 문충공. 양관대제학.
아버지는 충정공 익겸이며 어머니는 증 정경부인 해평 윤씨이다.
숙종의 국구(장인, 인경왕후의 아버지)이며 우암 송시열의 문인이다.
1652(효종4) 생원 진사 양시에 장원하고 이듬해 별시 문과에
을과 3인으로 급제하여 장례원, 승문원 주서,
설서를 역임하고 예조, 병조좌랑과 사헌부 지평을 지냈다.
사간원 정언, 홍문관 부수찬, 헌종 2년 병조좌랑에서 곧
정랑으로 승진되고 현종4년에 수찬이 되었다.
응교, 사복시정, 성균관 사성, 의정부 사인, 동부승지를 거쳐
1666년 전라도 관찰사로 임명되었으나,
편모를 떠나 멀리 갈 수 없다고 사양하니
대사간이 되고 좌승지로 옮겼다.
이듬해 예조참의에 승진되었으나 곧 사직하고
그 후 광주부윤에 제수되어 선정을 베풀었다.
1671(현종13) 예조참판에 승진 도총부 부총관, 병조참판
이듬해 대사성이 되고 곧 부제학으로 전보되었다.
양관대제학, 지성균관사, 동지경연사, 의금 부사를 겸임 하다가
이듬해 병조판서, 지춘추관사를 겸했다.
1647년 예조판서에서 정헌대부로 승진되었다가 영돈령부사,
광성부원군에 책봉되고 도총관 호위대장, 전생서 제조로 겸했다.
숙종 7년 분충효의병기협모보사공신 1등에 책록되고
숙종 13년 풍정도감 도제조를 지냈다.
효종이 승하한 뒤로 국세가 쇄약해지고
국방력이 차츰 무너지므로 벼슬을 버리고 정양할 뜻이 있었으나,
갑자기 국구가 되어 거취가 물러나기 어려웠을 뿐 아니라
위기를 당하여 형세가 급박하였다.
사화가 잇따르니 충성과 지혜를 다하여 종사를 편안케 하고,
훈업을 이룬 뒤 벼슬을 헌신같이 버리고 일없는 듯이 자처하려 하였으나,
국가에서는 주석같이 의지하고 선비들은 산악같이 우러렀다.
좋아하지 않았던 사람들도 처음에는 헐뜯었으나,
아무리 살펴도 털끝만큼 흠 잡을 곳이 없었으므로 결국은 따랐다.
경서, 사기 외에도 제가서에 통달하였으므로 의정부 영의정에 추증되고
시호는 문충공이며 부조(불천위)의 은전을 받았다.
시문16권과 문집이 있으며 1719(숙종46)현종 묘정에 배향되었다.
참고문헌: 광산김씨사.
30세 서포 휘 만중 (양간공파‧의정공파)
1637(인조15)-1692(숙종19) 조선 중기 문신이며 효자. 자는 중숙. 호는 서포.
아버지는 충정공 익겸이며 어머니는 정경부인 해평 윤씨이며
숙종의 장인 만기가 형이다.
우암 송시열의 문인이며 효종 4년 생원시에 장원으로 합격하였다.
현종 7년 정시 문과 갑과 1인으로 장원 급제하여 성균관 전적,
예조좌랑에 임명되고 이듬해 사간원 정언에 임명되었으나
사임하고 곧 시강원 사서에 임명되었다.
1667(헌종9) 사헌부 지평. 홍문관 수찬에서 병조좌랑으로 전보되었다가
교리 헌납을 거쳐 함경도 병마평사로 임명되었으나,.
노모 곁을 떠날 수 없다고 사양하니 교리에 제수 되었다.
헌종 12년에 이조정랑 지제교를 겸했고 이듬해
암행어사로 경기도 일원을 순찰하였다.
집권파 허적을 논박하다가 도리어 임금의 미움을 받아 국문을 받고
금성으로 귀양 갔다.
헌종 16년에 석방되어 교리 겸 사서에서
헌납 이조정랑에 제수 되었으나 부임하지 않았다.
곧 응교로 승진 사간으로 있다가
호조참의에 승진되었으나 나가지 않았다.
그 후 병조참의, 대사간 대사성으로 승문원 부제조를 겸하였다.
숙종 8년 예조‧병조참판을 거쳐
대사성, 병조참판, 도승지, 호조참판이 되었다가
공조판서. 양관대제학, 좌우참찬에 도총관을 겸했다.
숙종 12년에는 지돈령 예조판서를 지냈다.
이듬해 숙종이 장희빈에게 은총을 준 것이 잘못이라고 간하다가
왕의 노여움을 받아 선천으로 유배되었다가
석방되었고 숙종 16년에 다시 남해에 위리안치 되었다.
이곳에서 어머니에게 효성을 다하기 위한 글을 지으니,
그 유명한 소설이 구운몽이다. 유복자로 태어나
아버지(충정공 익겸)를 보지 못한 것이
평생의 한으로 여겼다. 어머니에게 지극히 효도하여 밤이면
어머니가 좋아하는 옛 사기와 잡기를 모아 읽어 드렸다.
남해에서 귀양살이하는 동안에 어머니가 돌아가셨는데
신위를 차려 놓고 조석으로 음식을 올리며 통곡하니
섬사람들이 따라서 모두 슬퍼하였다.
담제를 마치고 애통한 나머지 병들어 죽었다.
1694(숙종21)년 복관되어 부조(불천위)의 은전을 받았으며
숙종 묘정에 배향 되었다.
조정에서 효자의 정려를 내렸으며 시효는 문효공이다.
저서는 구운몽, 사씨남정기, 서포만필, 영정이 있다.
참고문헌 : 광산김씨사
31세 문천공 휘 진규(양간공파‧의정공파)
1658(효종10)-1716(숙종43) 조선 중기 문신. 자는 달보.
호는 죽천. 시호는 문청공.
아버지는 문충공 만기이며 어머니는 서원 부부인 청주 한씨이다.
우암 송시열의 문인이며 1682(숙종9)년 진사과 장원으로 합격하였다.
숙종 13년에 정시 문과 갑과 1인으로 장원 급제 하였으며,
전적에 제수되고 예조좌랑, 사헌부 지평이 되었다.
숙종 16년 기사환국으로 남인이 집권하자 거제도로 유배되었다.
갑술옥사가 일어나자 다시 지평으로 기용되어
수찬, 헌납, 부교리, 이조좌랑, 정랑 사서, 교리 역임. 그러나 소론으로부터
척신으로 궁중 출입이 잦고 월권행위가 많다는 탄핵을 받아 사직했다.
그 후 대신들의 천거로 사인, 보덕, 사간, 필선, 부응교를 지냈고
숙종 23년 회양 부사가 되었다.
숙종 26년 통정에 승진되어 승정원 동부승지, 우부승지가 되어
스승 송시열을 배반한 윤증을 공박하여 소론과 대립하였다.
숙종27(1700)년 예조참의 좌부승지,
공조참의에서 이듬해 대사간, 대사성, 좌승지,
호조참의를 거쳐 가선에 승진 호조참의에서
이듬해 이조참판. 공조참판을 거쳐
숙종33년 병조참판에서 소론의 집권으로 덕산에 유배되었다.
1710(숙종37)년 양관대제학, 숙종 39년에 예조판서 이듬해
정헌에 승진 좌참찬이 되었다.
문장이 뛰어났고 전서, 예서 및 산수화 인물화에도 능하다.
영의정에 추증되었고 시호는 문청공이며
저서로 죽천집이 있고 죽천보를 창간하였다.
영정이 있으며 거제의 반곡 서원에 배향되었다.
참고문헌: 광산 김씨사
예조판서 문정공 진규 묘표
공의 휘는 진규요. 호는 죽천이다.
공은 천품이 높고 문학이 숙성하여 25세에 초시 복시를 마쳤는데
하나는 으뜸으로 장원하였다.
공은 젊어서 능면히 품질이 달라 명망이 한 때에 으뜸이었고,
임금에게 도움이 많았다. 공의 일생에 큰 일 두 가지가 있는데
하나는 사문을 지키기 위함이요, 둘째는 명의를 높임이다.
공은 국가가 안위한 기회에 사문시비의 법을 일에 따라 다 말하니,
여러 무리 소인들은 엿보아 주먹질과 발길질이 서로 오고 갔으나,
공은 확실한 뜻을 세우고 조금도 좌절함이 없었다.
임금이 일찍이 위로하고 풀어 말하기를
경이 사관을 맡아서는 마음가짐이 공정하였고,
벼슬에 임해서 그 직무에 충실을 다 하였으니
여기에 그 가상함을 엿 볼 수 있다 하였다.
공은 항상 성품이 강직하고 깨끗하여
훼방하는 것을 구애받지 않고,
몸소 지극히 작은 일까지 생각하여 오직 착한 일만 하였다.
주역을 즐겨 읽으며 주자서에 잠심하여
의리를 강론함에 식별하고 해석함이 명확하였다.
언제나 학문으로서 자처하지 않고 일상생활에 말하고,
행동하는 것이 법도에 맞지 않음이 드물었으며,
문장은 총각에 더욱 능하고 겸하여 글씨는 전서, 예서에 조예가 깊었다.
이미 임금을 바르게 보필하고
풍속을 바로 잡는 것을 자신의 소임으로 여기고
협읍강도를 보장하는데 각각 정당하게 어루만졌다.
그릇된 일을 바로 잡으며 빈틈없이 일을 처리하여
대략 피폐한 풍속을 바로 잡았다.
성을 쌓고 주린 백성을 구제하는데
이해관계와 남북 변방을 방어하는 일을 의논함에
말이 조리에 맞으니 더욱 지려가 박통한 것을 알 수 있다.
지조를 연마하여 티끌만큼도 세속에 물들지 않고 몸소 실행하여
숙슬괴금(잠잘 때 이불에서도 부끄러움이 없는 일)하는 이런 일에 대하여는
세상이 공을 많이 칭찬하였는데 특히 보통 때 늘 하는 일이다.
도곡 이의현 찬
형제대제학: 30세. 만기, ‧ 만중
부자대제학: 31세, 만기, 진규
3대 대제학: 29세. 익히, 만기, 만중
32세 영의정 휘 양택(양간공파‧의정공파)
1712(숙종39)-1776(정조1) 조선 중기 문신. 자는 사서. 호는 건암.
시호는 문간공.
아버지는 문청공 진규이며 어머니는 증 정경부인 연일 정씨이다.
1741(영조18) 생원시에 장원으로 합격하고, 1743년
문과에 병과 3인으로 급제하였다.
세자 시강원, 설서, 문학을 거쳐 강동 현감으로 나갔다가
이듬해 홍문관 부수찬이 되자,
좌의정 정석오를 논박하는 상소를 올려 임금의 노여움을 받았다.
곧 사천 현감으로 좌천되었다가 얼마 안 되어 다시
수찬이 되고 시강원 필선이 되었다.
영조 28년에 통정에 승진되어 좌승지가 되었다가 부사로 나갔다.
그 후 대사성, 이조참의, 양관대제학과 병조, 이조판서를 거쳐
의정부 영의정에 이르렀고 시호는 문간공이다.
1864년(고종2)에 복관 되었으며 문집이 있다.
참고문헌: 광산 김씨사
영의정 시 문간공 양택 묘표
공의 휘는 양택이요, 자는 사서이다.
영조 19년에 문과에 급제하여 선발되어 세자 시강원에 들어가
겸설서가 되었고 문학을 거쳐 강동 현감으로 나갔다.
이듬해 홍문관에 들어와 부수찬이 되자
상소로 좌의정 정석오를 논박하니
임금이 크게 성을 내어 전중에서 불러 접견하고
산청 현감으로 좌천 시켰다가 얼마 되지 않아 다시
수찬과 시강원 필선이 되었다.
공의 가문이 유학으로 알려졌으니
문원공 휘 장생은 문묘에 배향 되었으니 공의 5대조가 된다.
충정공의 휘는 익겸이요 영의정에 증직 되었으며 대의에 죽었으니
공에는 증조가 된다.
문충공 휘 만기는 국구(임금의 장인)로서 공이 사직에 있고
직위가 영돈령부사(왕실의 인척관리)에 이르렀으니
공에게는 할아버지가 된다.
문청공 고 대제학 휘 진규는 숙종을 섬겨 정신의 절개가 있었고
직위가 예조판서에 이르렀으니 공에게는 아버지가 되며,
영묘(英廟)가
세한송백(歲寒松柏)이라는 글자를 써주어 그의 직절을 장려했다.
공은 부조의 업적을 이어받아 대제학이 되니
세상에선 삼대 전문형(대제학)이라 칭한다.
청렴하고 검소하여 몸이 자주 쇠약하듯 하나 마음이 단정하고 개결하고 굳어서
사람을 사귐에 변태가 없었다. 벼슬을 할 때 간략해서 일찍이
봉급의 남은 재물이 있어도 논과 밭은 사지 않았다.
대제학으로 있을 때 시험을 엄격히 하고 글 읽기를 좋아해서
늙어도 게을리 하지 않았다.
일찍이 왕명을 받들어 원릉의 묘지문을 지었고(영조릉) 건암이라 자호 하였다.
문집 약간이 집에 보관되어 있다. 경원이 소년 때에
문간공 천보, 남문천공 유용와 같이 놀고 서로 같이 생활하면서 심히 즐거워했다.
이 공(천보, 유용)이 세상을 버림으로써 교유하던 분이 없는데
공마저 별세하니 슬프도다.
제학 황경원 찬
36세 문헌공 휘 상현 (양간공파‧의정공파)
1807(순조8)-1874(고종12) 조선 후기 문신. 자는 위사. 호는 경대.
시호는 문헌공.
아버지는 증 판서 재곤. 어머니는 증 정부인 기계 유씨.
1827(순조28) 증 생원시 3등 2인으로 합격하여 인릉 참봉. 사재 감봉사. 직장. 주부.
청양. 증산 현감을 지냈는데 , 가는 곳마다 유도를 숭상하고 학문을 진흥시켰다.
영평 군수에 제수 되었으나 부임하지 않았다.
1859(철종11) 별시 문과에 갑과 3인으로 장원급제하여 통정에 승진
동부, 좌부승지, 병조참지, 대사간, 안동 부사를 지냈다.
고종2년 이조참의를 거쳤다.
고종 4년에 가선에 승진 한성좌윤, 형조참판, 도총부부총관, 의정부, 돈령부,
춘추관, 성균관사, 대사성, 이조참판, 홍문관 제학, 도승지,
이후에도 경기, 평안감사, 양관대제학, 세자좌빈객. 판의금부사에 제수되어
어사주를 하사 받고 보국 봉조하에 들어가고
시호는 문헌공이다.
봉조하 문헌공 상현 묘갈명
공의 휘는 상현이요. 자는 위사며 호는 노현 또는 경대이다.
공이 태어나 어려서부터 총명 영특함이 뛰어나서
열 살에 경전과 사기를 통달하였다.
1827(정해년) 17세에 사마시에 합격하고 인릉 참봉이 되고 청양. 증산 현감 등
여러 관직을 지냈는데 가는 곳마다 유도를 숭상하고 학문을 일으켰다.
간사함을 척결하고 백성을 구제하니 백성들의 영원한 사랑을 입게 되었다.
영평 군수에 제수 되었으나 부임하지 않았으며,
철종 11년에 증광문과 갑과에 3등으로 장원하자 통정에 승진되었다.
공의 용모가 풍만하고 기국이 상쾌하여 법가의 언행으로서
법도에 넘치지 않고 대인의 도량으로 한계를 두지 않았다.
검소함과 간략함으로써 스스로 지조를 지켜 재상에 이르렀으되
거처하기를 빈한 선비와 같이 하였다.
친척과 인아척당에게는 빈궁한 사람을 돌보되
재산을 기울이면서 인색한 표정을 짓지 않았다.
이는 공의 효제와 화목함이 속마음에 독실한 점이다.
학문함에 있어서는 젊어서부터 선대 유훈에 복종했고 장성하여서는
스승의 지도에 의뢰하여 뗏목을 하해에 띄우는 듯 하였다.
묘법농을 적포에 지도하듯 해서 관통하지 않음이 없었다.
또한 학예 깊이를 연구하여 변례와 의례의 질의 논란에 이르러서는
선현의 정론을 자기가 기록한 말을 외우는 것과 같이 하였다.
순정하고 온후하며 준엄하고 정제하며 고고해서
법도가 구비함으로서 스스로 일가를 이루었다.
또한 시나 병려 문제에도 체제가
거문고와 옥과 같아서 천연적인 률이 있으므로
문장가의 말만 꾸며 만드는 자로는 미칠 바가 아니었다.
급기야 대제학이 되자 조정이나 세가의 금석지문이
공의 손에 나옴으로써 우뚝하게 당세의 우두머리가 되었다.
노년에 이르러서도 정밀하고 강건하여 더욱 힘써서
주야로 책읽기를 멈추지 않았다. 후진을 지도함에 있어 혹시
재기가 있는 사람을 만나면 기쁜 낯빛을 띄웠다.
국조의 옛일을 의논함에 성악을 분별하고
시비를 결정하여 조목에 따라 담판하는데
사기와 의리가 준엄 정직하여 어엿이 범치 못할 기색이었다.
경악에 있을 때 간곡하게 임금을 권면함으로써 임금의 마음을 감동시켰다.
저술한 시와 글이 20권, 학연소술 8권, 독론일찬 8권이 집에 보장되어 있다.
족질 대제학 영수 찬
참고문헌: 광산 김씨사
37세 문헌공 휘 영수 (양간공파‧의정공파)
1829(순조30)-1899(광무3) 조선 후기 문신. 자는 복여.
호는 하정. 시호는 문헌공
아버지는 증 우의정 우현이며 어머니는 증 정경부인 남양 홍씨이다.
1858(철종10) 진사시에 합격하였다.
1870(고종8) 별시 문과에 을과 2인으로 급제하여 규장각 요지를 거쳐
승지에 승진되고 임오군란과 신미양요에 호종한 공이 있다.
양관 대제학 시강원 이사를 역임하고 보국에 승자되었으며
시호는 문헌공이다.
문헌공 영수 묘표
공의 좋은 명망이 이미 남의 이목에 빛났으니 돌이켜 보건데 ,
내 말이 필요하다 하겠는가.
특진공의 묘지문에 상세히 기록되어 있으니 내가 또한 무엇을 기술하겠는가.
다만 생각건대 공이 젊었을 때부터 이미 태어남 명망이 있었으므로
사람들은 공을 지목했다.
잠시 동안 음직에 있었으나 부임하는 곳마다 치적이 있어
아전들은 두려워하고 백성들은 기뻐했다.
해임하고 떠날 때에는 읍민들이 화상을 그려 사당에 제향하고
어사가 첫 번째로 표창하며 방백은 별다른 대우를 하였다.
이로 말미암아 훌륭한 재주와 지혜로서 상하의 존중을 받게 되었다.
급제 후 임관하여 좋은 외직에 추대되었고
드디어 호조의 일을 전담하게 되었으니,
모두가 공이 스스로 이룩한 것이다.
그러나 오히려 어려운 것이라 하기에는 미흡하다.
공에는 더 이상 어려운 일이었다.
공은 성상에게서 지우를 받아서 은총이 높고 빛이 났다.
항상 소명을 받고 임금 곁에 있으면서 모든 일을 상의함에 조심하였다.
상감이 다른 사람 보다 더 두텁게 대하여서 직무에 관한 일이면 당연히
품할 것 이외에는 절대로 사삿일에 언급한 적이 없었다.
공의 휘는 영수요, 자는 복여이며, 하정은 하사받은 호이다.
1829(기축)년에 출생하여 무오년에 사마시에 합격하고
계해년에 동부도사에 임명되었다.
정묘년에 신령 현감에 제수되고 기사년에
합천 군수가 되고 경오년에
정시 문과에 급제하고 홍문관 교리에 임명되었다.
규장각 직각으로 선발되어 통정에 승진되었다.
여러 벼슬을 거쳐 병자년에 대사성이 되었다.
신사년에 직제학에 승진하였으며 이조 참판, 형조 판서에 승진되어
홍문관 예문관 양관제학이 되었다.
임오년에 평양 감사, 갑술년에 호조 판서 겸임, 병술년에 병조 판서,
이조 판서, 판의금에서 특점을 받아 숭정에 승진되었다.
경인년에 숭록, 신묘년에 보국에 승진되어
특별히 대제학에 제수 받았다.
아! 내가 공에게서 선비가 세상에 수용되려면
유교 보다 더 좋은 것이 없음을 알겠도다.
유술이란 문학을 체통으로 삼고 재능을 쓰임을 삼는 것이니 이것이
유술이라 이를 것이며 공으로써 어려운 일에 능한 분이라 하겠다.
이일에 종사하면서 학문에 종사하지 않는다면,
그 재능은 족히 칭찬의 대상이 못되기 때문이다.
대제학 안동 김학진 찬
광산김씨약사. 광산김씨사.
2023년, 6월.
편집인. 대구 경북종친회, 전 부화장. 선국