야마가타3 - 릿샤쿠지 절을 보고는 내려와 기차를 타고 야마가타에 도착하다!
2022년 11월 4일 높은 바위산에 산 아래에서 부터 산 꼭대기 정상에 까지 불당이 늘어선
릿쇼지 절 을 구경하고는 야마데라에키 山寺(산사) 역에서 센다이에서 오는 쾌속 열차
를 타고 22분 만에 야마카타 山形(산형) 역에 도착해 서구로 나가서 호텔을 찾아 갑니다.
야마가타 山形 (산형) 역에는 구내에 모형 기차며 관광지 소개와 다치바나 대나무 등 여러 장식
들을 보는데..... 이 도시 야마가타 山形 는 마미가사키 강변에 발달한 성읍으로
예로부터 모가미강 수운에 힘입어 저마와 생사 등의 거래가 성하여 상업 중심지가 되었습니다.
현재는 자동차 부품 제조와 관련된 주물공업이 성하며 오우선 奧羽線 과 아테라자와선 左澤線, 센잔선
仙山線 철도가 분기하는 교통의 요지 이고.... 데와 3산 은 산악신앙의 성스러운 산으로
숭배받으며, 우에스기 가문이 에치고에서 전봉된 남동부 요네자와에 모가미강 뱃놀이 가 유명합니다.
도요코인 東橫 イン 야마가타에키 니시구치 호텔은 죠우난마치 1-18-13 번지인데
아침을 주고 더불룸이 6,463엔 이니 1인당 3,200엔쯤 하는 저렴한 호텔 입니다.
내일 아침에 가조공원에 가서 야마가타성 을 보고 온천에 갈 예정인데... 역에서 버스로 45분
걸린다는 자오 온천 은 겨울에는 스키장 으로도 유명한데 설질도 좋고 수빙이 볼만하답니다.
그 외에 데와산잔 出羽三山(출우삼산) 은 옛 쇼나이번으로 쓰루오카시 교외에 하구로산,
갓산 및 유도노산 을 말하는데...... 산악신앙인 슈겐도 修驗道(수험도) 의 본고장 입니다.
백제계인 소가씨에게 살해당한 스슌청황(일왕)의 셋째 아들 이 난을 피해 관음보살의 화신인 하구로
곤겐 의 영험으로 신사를 열었다는데.... 빡빡한 일정이라 한 곳이라도 볼수 있을지 모르겠네요?
야마가타역 서구를 거닐다가 오늘 릿쇼지 절 에 다녀온 생각을 하는데.... 한국이나 일본 모두 조상의
위패를 절에 모시고 절에서 제사 를 지내는 사람들이 많은데, 요즘에는 사회 분위기
까지 바뀌면서 집에서 제사 를 지내는게 점점 어렵다고 부담을 느끼는 사람들이 늘어나는가 봅니다.
동아일보 송평인 논설위원의 글에 보면 “고조부모까지 제사... 조선시대에도 명시된 적 없다”
동의보감에 따르면 남자의 결혼 적령기는 16세, 여자는 14세 이다. 조선시대만 해도
조혼(早婚) 이 성행하고 대가족으로 모여 살았기 때문에 조혼한 부모가 낳은 아이를
기준으로 보면 인생 육십일 때 조부모뿐만 아니라 증조부모까지 함께 사는 것이 일반적 이었다.
사람에 따라서는 80, 90세 이상 사는 경우도 있었다. 그럴 경우 고조부모 하고도 같이 살았다는 얘기다.
그래서 넉넉잡아 기억에 남아 있을 수 있는 고조부모까지 제사 를 지냈다. 그것이 4대 봉사(奉祀) 다.
한국국학진흥원은 ‘제례문화에 대한 오해와 편견’ 이란 자료를 내고 조선시대에 4대 봉사가 원칙으로 명시된
적이 없다 고 밝혔다. 1484년 성종 때 편찬된 경국대전에 따르면 “6품 이상의 관료는 부모, 조부모,
증조부모 3대 까지 제사 지내고, 7품 이하는 2대 까지, 벼슬없는 평민은 부모 제사만 을 지낸다” 고 명시돼 있다.
다만 이후로 ‘주자가례’ 를 신봉하는 주자학 이 득세하면서 고조부모 까지 제사를 지내는 4대 봉사 가
양반집을 중심으로 확산됐다. 평민이 4대 봉사를 지키기는 현실적으로 어려웠다. 그러나 조선 후기
로 올수록 신분 질서가 무너지고 결정적으로 구한말 갑오경장에 의해 양반과 평민의 구분 이 없어집니다.
아베 신조 전 총리의 외고조부 오오시마 요시마사가 서울에 진주해 경복궁을 공격해 두시간만에 고종을
포로로 잡아 조선군의 항복을 받고는, 김홍집 친일내각 을 세우니 이노우에 공사가 지도해서
갑오경장 을 하는데..... 노비제도를 폐지 하고 양반과 상놈의 신분제도와 천민제도를 폐하며 500년
이어진 과부 재혼금지 제도를 철폐 하니.... 친일파 정부가 아니라 조선 스스로 개혁 했더라면 좋았을 것을!
하지만 지금 생각해 보아도 조선인 스스로 노비제도를 폐지한다든지 하는 개혁은 불가능한게
저 노비 는 사대부 양반들에게는 토지 보다도 더 알찬 실속있는 재산이니.... 1618년 이지
남매 분재기(分財記) 에 보면 노비 299구를 8남매가 분할 상속 했으며, 1570년 퇴계
이황 선생이 죽었을 때도 노비 367구를 5남매 가 나누니 "조선은 노예제 사회" 였기 때문입니다.
그런데 조선의 노비가 다른 나라와 다른 점은 로마나 유럽, 터키며 아메리카 등에서는 전쟁포로나 또는
돈을 주고 노예를 사니 모두 "이민족" 이며, 중국도 자국인의 노비를 금지 했는데, 오직
조선만은 자국인을 노예(노비) 로 부린다는 것이며, 로마 노예는 주인의 선심이나 돈을 주고 해방
되면 황제가 되기도 했지만 조선의 노비는 자손대대로 노비에서 벗어나는 것은 불가능 했다는 점입니다.
조선초에 3~4% 이던 양반이 조선말에는 90% 에 달해 평민의 양반화 가 이뤄져 모두가 4대 봉사를 원칙
으로 삼게됐다. 실제 지키건 안 지키건 그랬다는 말이다. 가난한 집에 시도때도 없이 돌아오는
제삿날을 간소화한 것은 뜻밖에 일제였다. 일제(총독부)는 가정의례준칙을 둬 2대 봉사 를 강제했습니다.
유교의 본산인 성균관은 광복 후 4대 봉사의 원칙을 재확인했다. 물론 그것을 엄격히 따를수 있는 일반 가정은
얼마 되지 않았다. 많은 가정이 조부모 까지만 제사를 지내거나 나중에는 어려워 부모 제사만 지내게 됐다.
성균관도 결국은 타협 해서 명절이나 부모 제사 때 4대까지 한꺼번에 모시는 간략한 방안 을
제시했다. 그런데 이번에 국학진흥원에서 4대 봉사의 원칙 자체를 부정 하고 나온 것이다.
국학진흥원은 “조혼 습속이 사라진 오늘날 고조부모 제사상을 차리는 건 시대착오적” 이라고 강조했다. 과거
에는 조혼 때문에 3대나 4대가 함께 살았지만 지금은 고령화(高齡化) 로 3대가 공존하는 것이 일반적이다.
수명 100세 시대가 되면 4대가 공존하는 것도 드물지 않아질 것이다. 그때의 예법은 또 어떨 것인가.
제사란 살아 있을 때 생활을 같이 하거나 따로 살아도 왕래하면서 쌓인 친밀감 을 토대로 한다.
봉사는 몇 대가 맞느냐를 따지기보다는 기억에 남아 있는 조상을 추모 하는 것임을 잊지 말아야 합니다.
거리를 거닐다 보니 고깃집에 만두집 그리고 이자카야에 우동집과 돈까스집 에 스시 등
여러 음식점들이 늘어서 있어 눈이 즐거운데 문득 경향신문에 실린 기사가 떠오릅니다.
일본 여행 중 스시를 쥐는 여성 셰프 를 보신 적이 있으신가요? 아마 없으실 겁니다. 일본에서 여성은
스시 전문 셰프가 되기 힘듭니다. 항간에는 여성의 손이 따뜻 해서 날생선으로 만드는 스시의
섬세한 맛을 파괴할 수 있기 때문이라는 속설이 있는데 사실일까요? 수족냉증은 여성
에게 더 많을 텐데요. 일본은 관습적으로 이어져 온 ‘여성은 금지’ 라는 잔재가 여러 곳에 있습니다.
미국 매체 허프포스트에서 조명한 도쿄 아키하바라의 스시집 ‘나데시코 스시‘ 셰프인
유키 치즈이 씨는 셰프 이전에 여성은 스시를 쥘 수 없다는 편견과 싸워 나가고 있는
투사에 가깝습니다. 그녀의 전쟁은 스시 만드는 것을 배울 때 부터 시작됐다고 합니다.
진짜 스시를 만들고 싶으면 파운데이션이 떨어질 수 있으니 화장을 하지 말라든지, 남성처럼 머리카락을 짧게
자르라는 요구를 받았다고 합니다. 그러나 그녀는 스시를 쥐는 일은 음식을 만드는 일이기도 하지만 하나의
퍼포먼스 라 생각하기에 화장도 곱게 하고 머리를 단장하고 기모노 도 갖춰 입으며 기존 관념에 반기를 듭니다.
스시집을 운영하는 것 역시 편견과 싸우는 일 입니다. 남자 두 명이 와서 여성이 스시를 만드는 모습을 보고
“와 진짜 못 먹겠다” 라고 말한다든지, “여성이 만든 스시는 안전하지 않다” 라고 대놓고 불평을 늘어놓는
손님도 있다고 합니다. 심지어 이 정도는 진상 축에도 끼지 못할 정도로 불만을 표하는 손님이 많다고 합니다.
이런 이유로 일본에서 스시 장인은 여성이 진입 하기 힘든 분야입니다. 일본 미쉐린 3스타에 등재된 426곳 의
스시 레스토랑 중 단 한 곳만 여성 스시 요리사 가 있을 정도 입니다. ‘스시 치요’ 라는 곳인데 이곳에
여성 셰프가 있는 이유는 이곳이 장인 양성 학교인 일본 식음료 대학에서 운영하는 곳이기 때문
입니다. 식당 주방 허드렛일로 부터 시작하는 보통의 스시 장인의 길에 여성이 들어갈 틈은 없는 것이죠.
일본은 왜 여성이 스시를 만들지 못하게 하는 걸까요? “여성의 손바닥은 체온이 높아 재료의
신선도 가 떨어진다” 라든지 “월경이 맛에 영향 을 준다” 라는 속설이 있습니다.
스시 양성소의 한 관계자는 후지TV 와의 인터뷰에서 “그런 소문이 있지만 손바닥의
온도 차이는 남녀 차이가 아니라 오히려 개인차가 있는 것” 이라며 단호하게 부정 합니다.
또한 손 온도가 높아 쌀알이 손바닥에 쉽게 달라붙거나 재료가 따뜻해질 수 있다는 걱정
은 스시 초보자 에게만 해당하는 경우라고 합니다. 훈련된 장인의 손놀림
이라면 손바닥의 미세한 온도 차이가 요리를 만드는데 크게 영향을 주지 않는다는 것이죠.
스시 업계 관계자는 여성 셰프가 없는 이유에 대해 속설보다는 “스시는 오랫동안 일본의 전통
요리 였고 업계에서는 ‘여성 금지’ 라는 그들만의 법이 있으며 신성한 스시의 부엌은 남성
들만을 위한 장 소라는 옛말이 여전히 남아있기 때문” 이라고 밝힙니다. 스시 양성
학교에 조차 이런 편견 때문에 여학생의 비율이 전체 학생 수의 20% 에 불과하다고 말합니다.
그러나 이런 인식은 10년 전 보다 조금씩 변화를 일으키고 있다고 합니다. 앞서 매체가 주목한
유키 치즈이 씨 처럼 편견과 관습에 맞서 싸우기 시작한 여성 셰프 가 늘어나고 있습니다.
스시 양성 학교는 여성 장인을 받아들이도록 장려 하고 있고, 젊은 세대 셰프들 사이에서도
고루한 인식을 바꾸자는 하는 분위기 가 조성되고 있답니다. 이제 스시를 먹는 손님들만
변하면 되겠네요. 언젠가 일본에서 여성 셰프가 쥐어주는 스시 를 한번 먹어 보고 싶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