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논문 및 자료실 스크랩 19. 餘論第十九
청운 추천 0 조회 177 16.09.07 16:54 댓글 0
게시글 본문내용

19. 餘論第十九


【해제】

앞 몇 장에서 강유위는 유명한 비각을 평론하였고, 여기에서는 또한 비교적 버금가는 비각에 대하여 평론을 하였기 때문에 「여론」이라 하였다.  남북조에서 청나라 서예가에 이르기까지 모두 비교적 광범위하게 언급하였다.  개괄하여 보면, 강유위는 당나라를 경계선으로 잡아 이전의 서예는 밀(密)ㆍ무(茂)ㆍ서(舒)ㆍ후(厚)ㆍ화(和)ㆍ삽(澁)ㆍ곡(曲)ㆍ종(縱) 등의 장점이 있고, 이후의 서예는 소(疏)ㆍ조(凋)ㆍ박(迫)ㆍ박(薄)ㆍ쟁(爭)ㆍ활(滑)ㆍ직(直)ㆍ렴(斂)에 흐른다고 하였다.  서예를 배우는 사람이 만약 이 비를 익숙하게 보면, 마땅히 이러한 것을 깨달을 수 있을 것이다.  강유위의 이러한 견해를 객관적으로 말하면, 실제는 과분한 말이라 하겠다.


【원문】

包愼伯以般若碑爲西晉人書(1), 此未詳攷也. 今按此經完好, 在?山(2)映佛岩, 經主爲梁父令王子椿, 武平(3)元年造, 是齊碑也. 是碑雖簡穆, 然較龍顔暉福尙遜一籌, 今所見岡山尖山鐵山磨崖, 皆此類, 實開隋碑洞達爽?之體, 故曹子建碑亦有般若經筆意.


【해석】

포세신은 <반야비>를 서진 사람의 글씨라 하였는데, 이는 아직 자세하게 고찰하지 않은 것이다.  지금 생각하건대, 이 경은 완전하고 좋으며 해산의 영불암에 있다.  경의 주인은 양부현령 왕자춘이고 무평원년(570)에 조성하였으니, 제나라 비이다.  이 비는 비록 간결하고 그윽하나 <찬룡안비>ㆍ<휘복사비>에 비교하면 오히려 한 수 떨어진다.  지금 본 바의 강산ㆍ첨산ㆍ철산마애는 모두 이 유형으로 실제로 수나라 비의 통달하고 상쾌하며 풀어주는 체를 열어 주었던 까닭에 <조자건비> 또한 <반야경> 필의가 있다.


【주석】

(1) 包愼伯以般若碑爲西晉人書(포신백이반야비위서진인서) : 포세신(包世臣)의 『예주쌍즙(藝舟雙楫)』과 황소기(黃紹箕)의 『광예주쌍즙평어(廣藝舟雙楫評語)』에서 “<반야비>는 제나라 각석으로 위묵심 시집에서 일찍이 이를 언급하였다[般若碑是齊刻, 魏?深詩集中曾及之].”라고 하였다.  <반야비(般若碑)>는 또한 <영불암마애(映佛岩摩崖)>ㆍ<조래산대반야경마애(?徠山大般若經摩崖)>라고도 일컫는다.  조래산은 산동성에 있다.

(2) ?山(해산) : 해산은 호북성 곡성현(谷城縣)의 서남쪽으로 80리 떨어진 곳에 있는데, 일명 복룡산(伏龍山)이라고도 한다.  그러나 <반야비>는 산동성 조래산에 있기 때문에 강유위가 해산에 있다고 한 것은 잘못인 듯하다.  

(3) 武平(무평) : 이는 북제 후주 온공(溫公)의 연호(570-576)이다.


【원문】

六朝人書無露筋(1)者, 雍容和厚, 禮樂之美, 人道之文也. 夫人非病疾, 未有露筋. 惟武夫作氣勢, 矜(2)好身手者乃爲之, 君子不尙(3)也. 季海淸臣, 始以筋勝, 後世遂有去皮肉而專用筋者, 武健之餘, 流爲醜怪, 宜元章?之(4).


【해석】

육조 사람의 글씨는 근을 드러냄이 없으니, 의젓하고 온화하며 두터워 예악의 아름다움과 사람 도리의 인문이 있다.  대저 사람은 질병이 아니면 아직 근을 드러내지 않는다.  오직 무사만 기세를 만들고, 솜씨를 자랑하길 좋아하는 이가 이를 하니, 군자는 숭상하지 않는다.  서호ㆍ안진경이 처음 근으로 뛰어났고, 후세 마침내 껍질과 살짐을 버리고 오로지 근을 운용하는 이가 있었다.  굳센 나머지 유행하여 추하고 괴이하게 되었으니, 마땅히 미불이 이를 꾸짖을 만하다.


【주석】

(1) 露筋(노근) : 위부인(衛夫人)은 『필진도(筆陣圖)』에서 “골이 많고 육이 적은 것을 근서라 일컫는다[多骨微肉者謂之筋書].”라고 하였다.  따라서 근을 드러내는 ‘노근(露筋)’은 서예의 병폐이다.

(2) 矜(긍) : 이는 자랑한다는 뜻이니, 반고(班固)는 「동도부(東都賦)」에서 “아들은 실제 진나라 사람이나 자랑하며 객사에 이르렀다[子實秦人, 矜?館至].”라고 하였다.  

(3) 不尙(불상) : ‘상(尙)’은 숭상한다는 뜻이니, 『문심조룡ㆍ물색(文心雕龍ㆍ物色)』에서 “말을 분석하고 간결함을 숭상한다[析辭尙簡].”라고 하였다.  따라서 ‘불상(不尙)’은 추대하고 숭상하지 않는다는 뜻이다.

(4) 宜元章?之(의원장초지) : ‘원장(元章)’은 미불(米?)이 자이다.  그는 『해악명언(海嶽名言)』에서 “근골의 말은 유공권에서 나왔는데, 세상 사람은 단지 성내고 펼치는 것을 근골로만 삼고 성내고 펼치지 않고 스스로 여기에 근골이 있음을 알지 못한다[筋骨之說出於柳, 世人但以怒張爲筋骨, 不知不怒張, 自有筋骨焉].”라고 하였다.  그러므로 유공권(柳公權)의 글씨를 꾸짖어 “추하고 괴이한 악찰의 종주이다[醜怪惡札祖].”라고 하였다.  또한 서호(徐浩)를 비평하여 “크고 작음은 하나의 무리이니, 관리의 해서와 같다[大小一倫, 猶吏楷也].”라고 하였으며, 안진경(顔眞卿)에 대해서는 “해서는 문득 속된 품에 들어간다[眞書便入俗品].”라고 하였다.  


【원문】

張長史謂大字促令小, 小字展令大(1), 非古法也. 張猛龍碑結?爲書家之至, 而短長俯仰, 各隨其體. 觀古鐘鼎書, 各隨字形, 大小活動圓備, 故知百物之狀. 


【해석】

장욱은 “큰 글씨는 재촉하여 작도록 하고, 작은 글씨는 펼쳐 크도록 한다.”라고 하였으니, 옛날 법이 아니다.  <장맹룡비> 결구는 서예가의 지극함이니, 짧고 길고 굽어보고 우러르는 것이 각각 그 형체를 따른다.  옛날 종정문 글씨를 보면, 각각 자형을 따라 크고 작은 활동이 완비되었던 까닭에 온갖 사물의 형상을 알 수 있다.


【주석】

(1) 大字促令小, 小字展令大(대자촉령소, 소자전령대) : 이는 안진경(顔眞卿)의 『술장장사필법십이의(述張長史筆法十二意)』에서 보인다.


【원문】

自小篆興, 持三尺法(1), 剪截齊割, 已失古意, 然?楷始興, 猶有異態, 至唐碑蓋不足觀矣. 唐碑惟馬君起浮圖, 奇姿異態, ?絶常製. 


【해석】

소전이 흥함으로부터 삼척법을 지니고 잘라서 가지런히 분할하여 이미 옛날 필의를 잃었다.  그러나 예서ㆍ해서가 비로소 흥하자 오히려 기이한 형태가 있었으니, 당나라 비에 이르러 대개 보기에 부족해졌다.  당나라 비는 오직 <마군기부도>만 기이한 자태가 있어 일상적 제작과 판이하게 달랐다.


【주석】

(1) 三尺法(삼척법) : 옛날에 법률조문을 3척 길이의 죽간에 썼던 까닭에 ‘삼척법(三尺法)’이라 일컫는다.  여기에서는 소전이 “잘라서 가지런히 분할한다[剪截齊割].”라는 것이 옛날 종정문의 글씨가 “각각 자형을 따라 크고 작은 활동이 완비되었다[各隨字形, 大小活動圓備].”라고 한 것만 같지 못함을 일컫는 말이다.


【원문】

吾於行書取蘭亭, 於正書取張猛龍, 各極其變化也.


【해석】

나는 행서는 <난정서>에서 취하였고, 해서는 <장맹룡비>에서 취하여 각각 변화를 다하였다.


【원문】

本朝書有四家, 皆集古大成以爲楷, 集分書之成, 伊汀洲也, 集?書之成, 鄧頑伯也, 集帖學之成, 劉石庵也, 集碑之成, 張廉卿也.


【해석】

청나라 서예에 사대가가 있으니, 모두 옛것을 집대성하여 법식을 만들었다.  팔분서의 집성은 이병수, 예서의 집성은 등석여, 첩학의 집성은 유용, 비의 집성은 장유쇠이다.


【원문】

魯公書如宋開府碑之高渾絶俗, 八關齋之氣體雍容, 昔人以爲似?鶴銘者(1), 誠爲絶作. 蓋魯公無體不有, 卽如離堆記, 若無可攷, 後世豈以爲魯公書乎. 然麻姑壇握拳透爪, 乃是魯公得意之筆, 所謂字外出力中藏?(2), 魯公諸碑, 當以爲第一也.


【해석】

안진경 글씨에서 <송개부비>(<宋璟碑>)의 높고 혼후하며 세속을 끊은 것과 <팔관재회보덕기>의 기운과 형체가 의젓한 것과 같음은 옛사람이 <예학명>과 같다고 여겼으니, 진실로 뛰어난 작품이다.  대개 안진경은 체가 있지 아니함이 없으니, 즉 <선우씨이퇴기>와 같음은 만약 고찰할 수 없다면, 후세에 어찌 안진경 글씨라 하겠는가?  그러나 <마고선단기>는 주먹을 쥐고 손톱을 침투하니, 안진경 득의의 필치이다.  이른바 “글자 밖에서 힘을 내는 가운데 능각을 감춘다.”라는 것이니, 안진경의 여러 비에서 응당 제일로 삼는다.


【주석】

(1) 昔人以爲似?鶴銘者(석인이위사예학명자) : 포세신(包世臣)의 『예주쌍즙ㆍ논서(藝舟雙楫ㆍ論書)』에서 “항주 공정암에 송나라 탁본 <팔관재> 72자를 소장하고 있었는데, 한번 보면 <예학명>이라 의심할 만하니, 비로소 옛사람이 <예학명>은 안진경 글씨를 닮았다는 설에 까닭이 있음을 알 수 있다[杭州?定庵藏宋拓八關齋七十二字, 一見疑爲鶴銘, 始知古人鶴銘似顔書之說有故].”라고 하였다.

(2) ‘사고본’ㆍ‘상해본’ㆍ‘호남본’ㆍ에는 ‘?’, ‘화정본’에는 ‘稜’이라 하였으나 여기에서는 전자를 따른다.


【원문】

聖敎序, 唐僧懷仁所集右軍書, 位置天然, 章法秩理, 可謂異才. 此與國朝黃亭(1)集唐人詩, 剪裁縫?, 皆若己出, 可謂無獨有偶矣. 


【해석】

<집자성교서>는 당나라 승려 회인이 왕희지 글씨를 집자한 것으로 위치는 자연스럽고, 장법은 차례와 조리가 있으니, 가히 기이한 재주라 일컬을 만하다.  이는 청나라 황지준이 당나라 사람의 시를 모아 자르고 마름질하며 재봉질 한 것과 더불어 모두 자신에게서 나온 것과 같으니, 혼자가 없고 짝이 있다고 일컬을 수 있다.  


【주석】

(1) 黃亭(황오정) : 이는 마땅히 황지준(黃之雋, 1668-1748)을 가리킨다.  자는 석목이고 호는 오당(堂)이며, 휴령(休令) 사람이나 뒤에 강소성 화정(華亭, 지금의 上海市)으로 옮겼다.  벼슬은 편수에 이르렀고, 서예작품 모으기를 좋아하였으며, 저술이 풍부하였다.  저서로는 『오당집(堂集)』이 있다.  또한 구절을 집자하여 『향설집(香屑集)』을 지었고, 아울러 당나라 문구를 모아 서문을 썼는데 매우 공교하다는 칭찬을 들었다.


【원문】

然集字不止懷仁, 僧大雅所集之吳文碑, 亦用右軍書, 尤爲逋?. 古今集右軍書凡十八家, 以開福寺爲最, 不虛也. 此猶之劉鳳誥(1)之集杜詩乎.


【해석】

그러나 집자는 회인에 그치지 않았으니, 승려 대아가 집자한 <오문비>(<興福寺斷碑>) 또한 왕희지 글씨를 운용하여 더욱 다채로웠다.  고금에서 왕희지 글씨를 집자한 무릇 18명에서 <흥복사단비>를 제일로 삼았는데, 헛된 말이 아니다.  이는 유봉고가 두보의 시를 집자한 것과 같음이여!


【주석】

(1) 劉鳳誥(유봉고) : 유봉고(1761-1830)는 청나라 문학가로 자는 승목(丞牧)이고 호는 금문(金門)이며, 평향(萍鄕) 사람이다.  벼슬은 이부우시랑에 이르렀고, 저서로는 『존회재집(存悔齋集)』이 있다.


【원문】

完白山人計白當黑之論(1), 熟觀魏碑自見, 無不極茂密者. 若楊?張猛龍, 尤其顯然. 卽石門銘, 鄭文公, 朱君山之奇逸, 亦無不然. 乃知疎處可使走馬, 密處不使通風, 眞善言魏碑者. 


【해석】

등석여의 “공백을 헤아려 검은 필획을 마땅하게 한다.”라는 논리는 익숙하게 위비를 보면 스스로 나타나니, 매우 무성하고 긴밀하지 않음이 없다.  <양휘비>ㆍ<장맹룡비>와 같음은 더욱 분명하다.  즉 <석문명>ㆍ<정문공비>ㆍ<주대림묘지명>의 기이하고 표일함 또한 그렇지 않음이 없다.  이에 “성근 곳은 말을 달리게 할 수 있고, 긴밀한 곳은 바람을 침투하지 못하도록 한다.”라는 것이 참으로 위비를 잘 말하였음을 알았다.


【주석】

(1) 完白山人計白當黑之論(완백산인계백당흑지론) : 포세신(包世臣)의 『예주쌍즙ㆍ논서(藝舟雙楫ㆍ論書)』에서 “글자의 필획이 성근 곳은 말을 달리게 할 수 있고, 긴밀한 곳은 바람을 침투하지 못하도록 하며, 항상 공백을 헤아려 검은 필획을 마땅하게 하여야 기이한 정취가 나온다[字?疏處可以走馬, 密處不使透風, 常計白以當黑, 奇趣乃出].”라고 하였다.  


【원문】

至於隋唐疎朗雍容, 書乃大變, 豈一統之會宜爾邪. 柳誠懸平西王碑(1), 學伊闕石龕, 而無其厚氣, 且體格未成, 時柳公年已四十餘, 書乃如此, 可知古之名家, 亦不易就, 後人或?此碑, 則未解書道者也. 


【해석】

수ㆍ당나라의 성글고 또렷하며 의젓함에 이르러 글씨는 크게 변하였으니, 어찌 통일의 모임이 마땅히 그러하겠는가?  유공권의 <평서군왕이성비>는 <이궐석감명>을 배웠으나 두터운 기운이 없고, 또한 형체와 격식이 아직 이루어지지 않았다.  당시 유공권 나이 이미 40세이고, 글씨도 이와 같으니, 옛날의 명가 또한 나아가기가 쉽지 않음을 알 수 있다.  후인이 혹 이 비를 일컬으면 아직 서예의 이치를 이해하지 못한 자이다.  


【주석】

(1) 柳誠懸平西王碑(유성현평서왕비) : 황소기(黃紹箕)는 『광예주쌍즙평어(廣藝舟雙楫評語)』에서 “<평서왕비>는 번각본으로 <이궐불감비>와 서로 가깝지 않다[平西王碑是飜刻, 與伊闕龕不相近].”라고 하였다.


【원문】

書若人然, 須備筋骨血肉(1), 血濃骨老, 筋藏肉瑩, 加之姿態奇逸, 可謂美矣. 吾愛米友仁(2)書, 殆亦散僧(3)入聖者, 求之北碑, 六十人造像李超亦可以當之.


【해석】

글씨는 사람이 그러한 것과 같으니, 모름지기 근ㆍ골ㆍ혈ㆍ육을 갖추어야 한다.  혈이 짙고, 골이 노숙하며, 근을 감추고, 육이 밝으며, 자태의 기이하고 표일함을 더하여야 아름답다고 일컬을 수 있다.  나는 미우인의 글씨를 좋아하는데, 거의 또한 산승이 성인에 들어간 것 같으니, 이를 북비에서 구하면 <육십인조상기>ㆍ<이초묘지명> 또한 이에 합당할 수 있다.


【주석】

(1) 筋骨血肉(근골혈육) : 과거 서예가들은 서예의 ‘근골혈육’을 논한 것이 매우 많았는데, 모두 대동소이하다.  일반적으로 필봉을 글씨의 ‘근’으로 견주어 ‘장(藏)’과 ‘도(度)’를 강구하였으니, 이래야 비로소 죽은 필획이 없다.  글씨에서 ‘골’은 집필에서 엄지손가락 아래 마디 골을 가리킨다.  이를 들면 글씨에서 골이 굳건해지고, 놓으면 글씨에서 골이 회전축으로 활동한다.  이른바 글씨에서 ‘혈’은 즉 수묵이다.  모두 부호의 안에 저장하였다가 웅크리면 물이 나오고, 머무르면 물이 모이니, 붓을 운용할 때 구체적 상황을 보아 결정한다.  ‘육’은 붓털을 가리킨다.  성근 곳과 평평한 곳은 날획을 가득 차게 하여야 하니 즉 이른바 ‘비(肥)’라 하고, 긴밀한 곳과 험절한 곳은 들어 날아가야 하니 즉 이른바 ‘수(瘦)’라 한다.  또한 용묵과 결합한 것을 보면, 마른 먹은 붓이 조금 습하여야 하고, 습한 먹은 붓이 조금 말라야 하며, 먹이 너무 진하면 육이 막히고, 너무 엷으면 육이 가벼워진다.  이러한 내용은 진역증(陳繹曾)의 『한림요결(翰林要訣)』, 풍반(馮班)의 『둔음서요(鈍吟書要)』, 소식(蘇軾)의 『논서(論書)』 등에 보인다.

(2) 米友仁(미우인) : 미우인(1074-1153)은 미불의 아들로 자는 원휘(元暉)ㆍ윤인(尹仁)이고, 어렸을 적의 자는 호아(虎兒)이며, 자칭 나졸노인(懶拙老人)이라 일컬었다.  힘써 옛것을 배웠고, 또한 서화를 잘 하였으며 ‘소미(小米)’라 불렸다.  벼슬은 부문각직학사에 이르렀다.

(3) 散僧(산승) : 이는 아직 선문(禪門)의 직책을 받지 않은 승려를 가리킨다.


【원문】

靈廟碑陰佳絶, 其將軍?烏洛陵江高州等字, 筆墨渾穆, 大有石鼓, 瑯?臺, 石經筆意, 眞正書之極則, 得其指甲(1), 可無唐宋人矣.


【해석】

<중악숭고령묘비음>은 뛰어났으니, ‘將ㆍ軍ㆍ?ㆍ烏ㆍ洛ㆍ陵ㆍ江ㆍ高ㆍ州’ 등의 글자는 필묵이 혼후하고 그윽하며, 크게 <석고문>ㆍ<낭야대각석>ㆍ<희평석경>의 필의가 있다.  진실로 해서의 법칙으로 극히 작은 한 부분을 얻으면, 당ㆍ송나라 사람은 없어도 가하다.


【주석】

(1) 指甲(지갑) : 이는 즉 ‘일린반조(一鱗半爪)’로 용의 비늘 한 조각과 발톱 반쪽을 가리키니, 단편적 사물의 극히 작은 한 부분이라는 뜻이다.  


【원문】

惠輔造像記端?峻整, ?冠方袍, 具官人氣象, 字僅三四分, 而筆法茂密, 大有唐風矣. 


【해석】

<혜보조상기>는 단정하고 풍요로우면서 험준하며 정제되어 관과 방포를 높이하고 관인의 기상을 갖추었다.  글씨는 겨우 3-4푼이나 필법은 무성하고 긴밀하며, 크게 당나라 풍이 있다.


【원문】

龍門造像自爲一體, 意象相近, 皆雄峻偉茂, 極意發宕, 方筆之極軌也, 中惟法生用圓筆耳. 北海王元詳筆雖流美, 仍非大異. 惟優塡王則氣體卑薄, 可謂非種在必?者, 故擧龍門, 皆?其方筆也.


【해석】

용문조상기는 스스로 하나의 체를 만들고 이미지가 서로 가깝다.  모두 웅건하고 험준하면서 뛰어나며 무성하여 필의를 다하고 질탕함을 펴내며, 방필의 지극한 법도이다.  이 중에서 오직 <법생조상기>만 원필을 운용하였을 뿐이다.  <북해왕원상조상기>의 필치는 비록 흐르듯 아름다우나 여전히 크게 다름이 아니다.  오직 <우전왕조상기>만 기운과 형체가 비루하고 경박하며 호미질을 하여서 심은 것이 아닌 까닭에 용문조상기를 들어 모두 방필이라 일컫는다.



【원문】

魏碑大種有三, 一曰龍門造像, 一曰雲峰石刻, 一曰岡山尖山鐵山磨崖, 皆數十種同一體者. 龍門爲方筆之極軌, 雲峰爲圓筆之極軌, 二種爭盟, 可謂極盛. 四山摩崖通?楷, 備方圓, 高渾簡穆, 爲擘?(1)之極軌也. 


【해석】

위비는 크게 3종류가 있으니, 첫째는 용문조상기이고, 둘째는 운봉산각석이며, 셋째는 강산ㆍ첨산ㆍ철산마애이니, 모두 수십 종류가 동일한 체이다.  용문조상기는 방필의 지극한 법칙이고, 운봉산각석은 원필의 지극한 법칙이며, 두 종류는 맹주를 다투며 가히 극성이라 일컬을 만하다.  사산마애는 예서ㆍ해서를 통하였고, 방필ㆍ원필을 갖추었으며, 높고 혼후하면서 간결하고 그윽하며 벽과서의 지극한 법칙이다.


【주석】

(1) 擘?(벽과) : 안진경(顔眞卿)은 「걸어서방생지비액표(乞御書放生池碑額表)」에서 “앞 글씨의 점과 획은 조금 가늘어 아마도 오랜 시간을 경과한 것을 견디지 못한 것 같습니다.  신은 지금 삼가 돌의 벽과 큰 글씨를 근거하겠습니다[前書點?稍細, 恐不堪經久, 臣今謹據石擘?大書].”라고 하였다.  이후 넓게 큰 글씨를 가리켜 ‘벽과서(擘?書)’라 일컬었다.



【원문】

龍門二十品(1)中, 自法生, 北海, 優塡外, 率皆雄拔. 然約而分之, 亦有數體, 楊大眼, 魏靈藏, 一佛, 惠感, 道匠, 孫秋生, 鄭長猷, 沈著勁重爲一體. 長樂王, 廣川王, 太妃, 高樹, 端方峻整爲一體. 解伯達, 齊郡王祐, 峻骨妙氣爲一體. 慈香, 安定王元燮, 峻蕩奇偉爲一體. 總而名之, 皆可謂之龍門體也.


【해석】

용문이십품에서 <법생조상기>ㆍ<북해왕원상조상기>ㆍ<우전왕조상기> 이외에 대체로 모두 웅건하고 빼어났다.  그러나 간략하게 나누면 또한 몇 가지 체가 있다.  <양대안조상기>ㆍ<위령장조상기>ㆍ<일불조상기>ㆍ<혜감조상기>ㆍ<도장조상기>ㆍ<손추생조상기>ㆍ<정장유조상기>는 침착하고 굳세며 중후한 하나의 체를 만들었다.  <장락왕부인위지조상기>ㆍ<광천왕부인태비후조상기>ㆍ<광천왕조모태비후조상기>ㆍ<고수조상기>는 단정하고 모나면서 험준하며 정제한 하나의 체를 만들었다.  <해백달조상기>ㆍ<제군왕원우조상기>는 험준한 골과 묘한 기운이 하나의 체를 만들었다.  <자향조상기>ㆍ<안정왕원섭조상기>는 험준하고 넓으면서 기이하며 뛰어난 하나의 체를 만들었다.  종합하여 명명하면, 모두 ‘용문체’라 일컬을 수 있다.


【주석】

(1) 龍門二十品(용문이십품) : 이는 하남성 낙양시에서 남쪽으로 10km에 있는 이수(伊水) 양쪽 해안에 있는 용문 조각에서 대표적인 20개의 조상기를 가리키는데, 이 중에서 고양동(古陽洞)에 19품이 있다.  용문이십품은 <장락왕구목릉량부인위지조상기(長樂王丘穆陵亮夫人尉遲造像記)>ㆍ<북해왕원조상기(北海王元造像記)>ㆍ<정장유조상기(鄭長猷造像記)>ㆍ<고수조상기(高樹造像記)>ㆍ<광천왕하란한조상기(廣川王賀蘭汗造像記)>ㆍ<광천왕조모태비후조상기(廣川王祖母太妃侯造像記)>ㆍ<안정왕원섭조상기(安定王元燮造像記)>ㆍ<비구니자향조상기(比丘尼慈香造像記)>ㆍ<북해왕국태비고조상기(北海王國太妃高造像記)>ㆍ<비구도장조상기(比丘道匠造像記)>ㆍ<손추생조상기(孫秋生造像記)>ㆍ<사마해백달조상기(司馬解伯達造像記)>ㆍ<일불조상기(一弗造像記)>ㆍ<낙주자사시평공조상기(洛州刺史始平公造像記)>ㆍ<양대안조상기(楊大眼造像記)>ㆍ<위령장설법소조상기(魏靈藏薛法紹造像記)>ㆍ<비구혜감조상기(比丘惠感造像記)>ㆍ<비구법생조상기(比丘法生造像記)>ㆍ<제군왕우조상기(齊群王祐造像記)>ㆍ<우전왕조상기(優塡王造像記)> 등이다.


【원문】

枳陽府君筆法之佳, 固也. 攷其體裁, 可見?楷之變, 質其文義, 絶無諛墓(1)之詞. 體與元常諸帖近, 眞魏晉之宗風(2)也. 葛府君字少, 難得佳?, 寶子太高, 惟此碑字多而?佳, 當爲正書古石第一本.


【해석】

<지양부군비>는 필법이 아름답고 굳세다.  그 체재를 고찰하면 예서ㆍ해서의 변함을 볼 수 있고, 글의 뜻을 질정하면 절대로 부풀린 말이 없다.  형체는 종요의 여러 첩과 가까우니, 참으로 위ㆍ진나라 유파이다.  <갈부군비액> 글자는 적어 아름다운 탁본을 얻기 힘들고, <찬보자비>는 너무 높으며, 오직 이 비만 글자가 많고 탁본이 아름다워 마땅히 해서 옛날 비갈의 제일 본이다.  


【주석】

(1) 諛墓(유묘) : 다른 사람이 묘지명을 써줄 때 극구 찬양하여 실제보다 부풀린 것을 ‘유모(諛墓)’라 일컫는다.  

(2) 宗風(종풍) : 이는 유파 또는 풍격을 가리킨다.


【원문】

六朝筆法, 所以過絶後世者, 結體之密, 用筆之厚, 最其顯著. 而其筆?意勢舒長, 雖極小字, 嚴整之中, 無不縱筆勢之宕往. 自唐以後, 局促?急, 若有不終日之勢, 此眞古今人之不相及也. 


【해석】

육조 필법이 후세에 뛰어난 까닭은 결체의 긴밀함과 용필의 두터움이 가장 현저하였기 때문이다.  필획ㆍ필의ㆍ필세를 길게 펴서 비록 매우 작은 글씨라도 엄정한 가운데 방종한 필세의 질탕함이 가지 않음이 없다.  당나라 이후로부터 국면을 재촉하고 좁으며 급하여 하루를 마치지 않는 필세가 있으니, 이는 참으로 고금의 사람이 서로 이르지 못함과 같다. 


【원문】

約而論之, 自唐爲界, 唐以前之書密, 唐以後之書疎, 唐以前之書茂, 唐以後之書凋, 唐以前之書舒, 唐以後之書迫, 唐以前之書厚, 唐以後之書薄, 唐以前之書和, 唐以後之書爭, 唐以前之書?, 唐以後之書滑, 唐以前之書曲, 唐以後之書直, 唐以前之書縱, 唐以後之書斂(1). 學者熟觀北碑, 當自得之.


【해석】

간략하게 논하면, 당나라로부터 경계를 삼아 당나라 이전의 글씨는 긴밀하고 당나라 이후의 글씨는 성글며, 당나라 이전의 글씨는 무성하고 당나라 이후의 글씨는 조락하며, 당나라 이전의 글씨는 펴고 당나라 이후의 글씨는 다그치며, 당나라 이전의 글씨는 두텁고 당나라 이후의 글씨는 경박하며, 당나라 이전의 글씨는 화목하고 당나라 이후의 글씨는 다투며, 당나라 이전의 글씨는 껄끄럽고 당나라 이후의 글씨는 매끄러우며, 당나라 이전의 글씨는 굽고 당나라 이후의 글씨는 곧으며, 당나라 이전의 글씨는 방종하고 당나라 이후의 글씨는 수렴한다.  배우는 사람이 익숙하게 이 비를 보면, 마땅히 스스로 얻을 것이다.


【주석】

(1) 여기에서 ‘밀(密)’은 기세가 긴밀함, ‘무(茂)’는 기운생동함, ‘서(舒)’는 자연스럽게 형체를 얻음, ‘후(厚)’는 용필이 두텁고 실함, ‘화(和)’는 필의와 자태가 평화로움, ‘삽(澁)’은 걸음마다 머무르고 꺾음, ‘곡(曲)’은 선의 변화가 많음, ‘종(縱)’은 자유분방함을 가리킨다.  그리고 ‘소(疏)ㆍ조(凋)ㆍ박(迫)ㆍ박(薄)ㆍ쟁(爭)ㆍ활(滑)ㆍ직(直)ㆍ렴(斂)’은 모두 위에서 말한 것과 반대의 뜻이니, 서예의 병폐이다.


【원문】

龍藏寺秀韻芳情, 馨香溢時, 然所得自齊碑出. 齊碑中靈塔銘百人造像, 皆於瘦硬中有淸?氣, 龍藏變化, 加以活筆, 遂覺靑出於藍耳. ?河南則出於龍藏, ?不能變化之.


【해석】

<용장사비>는 빼어난 운치와 꽃다운 성정이 향기가 당시 넘쳐흐르나 얻은 바는 제나라 비로부터 나왔다.  제나라 비에서 <영탑명>ㆍ<백인조상기>는 모두 파리하고 굳센 가운데 맑고 기름진 기운이 있고, <용장사비>가 변화하고 활발한 필치를 더하여 마침내 청출어람을 깨달았을 뿐이다.  저수량은 <용장사비>에서 나왔고, 아울러 변화할 수 없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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