華輪 10분 ·
해병대 채상병 사건에서 보여준 군대의 태도는 오래된 전통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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전두환 제주도 방문시 비행기 사고로 죽었던 공수부대원에 대해 두환이는 물론이고 당시 특전사 사령관이였던 박희도는 당시 일이 오래되어 기억이 나지 않는다고 했습니다.
실질적으로 명령을 내렸던 장세동이도 같은 반응 보였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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존나 고민끝에 눈물을 머금고 월남 파병을 결정한것으로 알려진 박정희의 경우...
파병이 끝나고 귀국했을때 국군 포로는 단 한명도 없다는 개소리를 했습니다.
정말 그렇게나 가슴이 미어지도록 아파했다면 포로를 구하려는 노력조차 안하고 모르쇠로 일관했던 꼬라지는 뭐라고 하면 좋을까요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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승만이는 국민의용군 사건부터 그야말로 개막장이였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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6월 6일 현충일은 어떻게 결정되었을까 ?
국가보훈부(옛 국가보훈처)에 따르면 6월 6일이 현충일로 지정된 것은 망종(亡種, 곡식의 씨를 뿌리는 날)과 관련이 있고 6.25 전쟁을 끼워넣어 설명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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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런데 말입니다.
1949년 6월 6일은 일제청산을 위해 특별법에 의해 설립된 반민족행위특별조사위원회(反民族行爲特別調査委員會)를 경찰 40여명을 동원해 무력으로 해산시킨 통한의 날입니다.
우리나라 역사에서 돌이킬 수 없는 최악의 부끄러운 사건으로 ‘반민특위습격사건’이라 부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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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956년 1월 30일 오전 7시 30분 경, 이승만의 충실한 개였던 육군 특무대장 김창룡 소장이 출근 도중 서울 용산구 원효로 1가 자혜병원 앞 노상에서 괴한의 습격을 받고 피살되었습니다.
이승만은 김창룡의 죽음을 애통하게 생각하면서
휴전 이후 육군, 공군, 해군이 각각 전몰 장병 추도식을 거행하던 것을 1956년 동작동에 국군묘지를 새로 단장 하는 것을 기점으로 정부 주최로 전몰 장병 추도식을 거행하기로 국무회의에서 의결 후 국군묘지가 국립묘지로 격상되면서 추모 대상도 전몰 국군장병과 더불어 전국 각지에서 나라를 위하여 목숨을 바친 애국선열의 넋을 위로하고 그 충절을 추모하는 행사로 ...
반민특위 해체에 혁혁한 공을 세웠던 만주 헌병 출신 김창용이 죽은해에 반민특위를 해산시킨 6월 6일을 현충일로 만들었습니다..
6월 6일은 이승만의 작품입니다..
이승만에게 김창룡은 너무나 아까운 애국지사였던 겁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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김창룡(金昌龍, 1920년 7월 18일 ~ 1956년 1월 30일 암살됨.)
일본군과 대한민국 국군에서 복무를 한 대한민국의 군인이다.
호(號)는 옥도(玉島)이며 창씨명은 다마시마 쇼류(玉島 昌龍). 헌병 출신으로 일제하 공산주의 계열 항일조직을 무너뜨리고 독립군을 체포하고 고문한 것으로 유명하다.
해방 전 2년 동안 적발한 항일조직은 50여 개에 달한다. 그러나 해방 후에는 이승만 세력에 가담해 반공 투사로 전향하여 자유민주체제를 전복하려고 간첩 활동을 하던 남로당 등을 색출하여 처벌하는 등 혁혁한 공을 세우고 국립대전현충원 장군1묘역 69호에 묻혔다.
주요 이력
일제시절 만주 관동군 헌병으로 항일 독립군을 추격·체포했던 김창룡은 당시 방첩대장, 특무부대장 등을 맡아, 이승만 대통령의 비호를 받으며 온갖 정치공작과 사건 조작, 전횡, 비리를 일삼았다.
일제강점기에는 일본군 부사관으로 태평양 전쟁에 참전하였고, 해방 이후에는 여순 사건의 진압과 한국 전쟁에 참여하였다. 이승만의 총애를 받던 대한민국 육군 특무부대 지휘관이자 정치군인이었으며, 여순 사건과 관련해서 체포된 박정희(朴正熙, 후에 5~9대 대통령을 역임) 소령을 수사하기도 했다. 함경남도 영흥 출생이며, 현재는 민족문제연구소의 친일인명사전 군 부문에 포함이 되어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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