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4
단엽은 그런 그들을 주시하며 말했다.
[어쨌든 북궁현은 우리의 앞에서 죽음을 당했다. 그리고 그것은 북궁세가와 우리들 사이에 무서운 오해를 불러일으킬 것이니... 이제 북궁세가의 인물들은 우리가 북궁현을 죽였다는 오해로 우리를 죽이려 들 것이다. 우리의 힘으로 그들을 상대하기엔 역부족이다. 북궁현의 말이 사실 그대로라면. 이제 우리는 중대한 결단을 내릴 때가 되었다.]
[결단이라면?]
단엽은 잠시 허공을 보며 생각하다가 입을 열었다.
[각자 살길을 찾아야 하는 것이다. 방법은 오직 하나. 바로 그들에게 굴
복하는 것뿐이다.]
[아...]
적사오혼의 표정에 먹구름이 끼었다. 단엽은 빙긋이 웃었다.
[전혀 어려운 방법은 아니다. 그대들은 본인 대신 다른 주인을 섬기면 그
뿐이다.]
[무...무슨 말씀을?]
사목이 떨리는 음성으로 물었다. 단엽은 잠시 기이한 눈빛으로 그들을 주
시했다.
[본인은 그대들의 주인이 될 수가 없는 몸이다. 조금 전 북궁현의 말을 듣지 않았나? 본인은 소수천마가 아니다.]
[그...그럴리가? 어찌 그럴리가?]
적사오혼은 도저히 믿을 수 없다는 표정을 지었다. 그들의 안면근육은 이 순간 무겁게 떨렸다. 단엽은 믿지 못하는 그들을 보며 탄식했다. 그리고 자신이 어찌해서 천엽성승이 되었고 다시 소수천마가 되었는지에 대해서 간략하게 설명했다. 그러나 이런 단엽의 말에도 그들은 도저히 믿을 수 없다는 표정만을 짓고 있었다.
너무나 단엽의 말은 엄청난 것이었다. 적어도 적사오혼은 사실 그대로 받아들이기에는...
[할 수 없군.]
단엽은 탄식하며 무면천환기를 전개하여 천엽성승의 모습으로 변했다. 그리고 그 모습은 다시 본래 단엽의 용모로 변하니 삼 년여 만에 단엽의 모습이 되돌아오는 순간이었다.
단엽의 진면목. 그것은 너무나 아름다웠다.
백설같이 희디흰 살결. 그 위에 그린 듯 선명한 조화를 이루고 있는 아름다운 이목구비, 고요한 가운데 은은히 감도는 매혹이 신선하게 두 눈에 서려 있었고 얼굴 한 부분을 또렷하게 특징지우면서도 높지 않은 섬려한 콧날, 입술. 여인이라 해도 도저히 따를 수가 없는 완벽한 용모였다.
[단엽옥승의 모습이 아닌가?]
적사오혼은 경악했다. 언젠가 본적이 있는 모습이었던 것이다. 바로 단엽옥승이라 했던 천엽성승의 모습이 바로 그것이었다. 다른 점이 있다면, 지금 단엽의 모습은 더욱 요기롭다는 것이고 단엽옥승의 모습은 중의 모습이라면 지금의 단엽은 머리카락이 치렁치렁한 속인의 모습이라는 것 뿐.
[이것이 바로 나의 모습이오.]
단엽은 담담히 말했다.
[아아... 이럴 수가...]
적사오혼은 무섭게 몸을 떨었다. 장산 역시 두 눈을 크게 뜬 채 정신없이 단엽의 얼굴을 바라보고 있었다.
(세...세상에 이리도 잘 생긴 사람이 있었다니...)
장산은 아예 침마저 질질 흘리고 있었는데... 적사오혼은 할 말을 상실하고 있었다.
무려 삼년의 세월. 어찌보면 그들은 철저히 농락당한 채 생활한 것이다. 그것도 약관도 채 되어 보이지 않은 어린아이에게... 무섭게 분노가 치밀 법도 하다. 허나 그들은 전혀 분노의 표정을 짓고 있지 않았다. 다만 경악의 표정만을 짓고 있을 뿐이었다.
단엽은 그들을 주시하며 말했다.
[애초에 본인은 철저히 그대들을 이용한 후 죽이려 했소. 아마도 당신들에게 당한 고통이 너무 처절했기 때문일 것이오. 그 생각은 얼마 전까지 지속되어 왔소. 한데 지금에 와서 본인의 생각에 변화가 온 것은 나도 인간이기 때문일 것이오. 지난 삼년의 세월은 알게 모르게 본인으로 하여금 당신들에게 정을 느끼게 한 것이며 그 정이 고통을 잊게 한 것이며 이제 와서는 당신들을 죽일 수가 없게 하고 만 것이오.]
적사오혼은 몸을 떨고 있었다.
(정? 그래 정이 들고 말았다.)
(그가 누구인든... 소수천마이든... 천엽성승이든 아니든... 치고받는 세월 속에 정이 들고 만 것이야.)
(그래서 우리는 지금 분노할 수 없는 것이며...)
그들은 스스로 놀라고 있었다. 인간의 감정이 철저히 상실된 그들 적사오혼. 그들에게 인간의 정이 있다는 사실이 새삼스럽게 느껴지고 있었던 것이다.
[본인은 이제 본인의 진면목으로 돌아 갈 것이오. 그리고 본인은 천마교의 부활을 막기 위해 최선을 다할 것이오. 다시 말해 당신들과는 헤어져야 한다는 것이오. 우리는 헤어져야 하고... 다시 만날 때는 서로 적이 될 수도 있소.]
단엽의 말이 여기에 이르렀을 때였다. 마동이 고개를 완강히 흔들었다.
[그럴 수는 없소. 그럴 수는 없소.]
그의 눈에 눈물이 그렁하게 맺히고 있었다.
[당신이 우리에게 정을 느꼈듯이... 우리도 당신에게 정을 주었소. 믿을 수 없지만 우리 스스로도 믿을 수 없지만 그것은 분명해졌소. 그런 우리가 당신과 적이 되어야 한다면 너무 가혹하오. 우리는 당신을 여전히 주인으로 섬길 것이며 죽음 또한 함께 할 것이오.]
흑접이 간절한 음성으로 말을 이었다.
[우리는 살기 위해 당신을 배반하지는 않을 거에요. 당신이 우리를 속였든 아니든 우리의 주인임은 확실하고 그 인연을 여기에서 끊어 버릴 수는 없어요. 당신을 따르겠어요. 당신과 적이 될 수는 없어요.]
단엽은 적사오혼이 이렇게 나올 줄은 미처 짐작치 못했다.
인간의 감정이라곤 손톱만큼도 찾아 볼 수 없었던 적사오혼이 아니던가. 한데 그들이 인간의 감정을 들먹이며 자신을 따르겠다 한다. 단엽의 가슴 밑바닥으로부터는 알 수 없는 뜨끈한 무엇인가가 솟구쳐 올랐다. 아마도 그것이 감동의 물결이리라. 그러나 단엽은 그들의 뜻을 그대로 받아들일 수가 없었다.
그는 이미 자신의 주위로 엄청난 위기가 몰려들고 있음을 피부로 느끼고 있었고 자신조차도 앞날을 장담할 수가 없는 상태에서 무작정 적사오혼을 이끌 수는 없는 것이다.
[당신들의 뜻이 그러하다니 고맙소. 그러나 나는 당신들을 죽음으로 몰고 갈 수는 없소.]
[북궁세가를 의식하는 겁니까?]
지옥겁이 불만 어린 어투로 물었다. 단엽은 고개를 끄덕였다.
[물론 그들을 의식하지 않을 수는 없소. 그러나 단지... 짐작이지만 북궁세가보다도 더욱 무서운 인물들이 이곳에 있을 수도 있소. 북궁세가만도 힘겨운 상황에서 그들을 동시에 상대할 수는 없는 것이오. 만약 그래도 당신들이 나를 주인으로 섬기고 싶다면 나의 뜻대로 천마교주에 복종을 하시오.
물론 잠시 동안이오. 그리고 언젠가 다시 우리가 만났을 때 우리는 지금과 같은 관계를 유지하면 되는 것이오.]
적사오혼은 서로의 얼굴을 마주보며 눈빛을 교환했다. 그런 후, 그들은 할 수 없다는 듯 고개를 끄덕였다.
[주인의 뜻이 정히 그러시다면... 노신들은 주인의 뜻대로 천마교주에게
잠시 동안 복종하겠습니다.]
[그러나... 그 시간이 결코 길지 않기를 바를 뿐입니다.]
그들은 진심 어린 표정으로 단엽을 올려다보았다.
[알겠소.]
단엽은 격동어린 눈빛으로 그들을 바라보며 고개를 끄덕였다. 이때였다.
장산이 울먹이는 음성으로 말했다.
[주...주인... 이 몸은 어찌하지요?]
단엽은 빙그레 웃었다.
[너는 거화에게 가 있도록 하여라.]
[거화에게요? 그 지독히도 못생긴 여자에게요?]
단엽은 고개를 끄덕였다. 장산은 시무룩한 표정을 지어 보였다.
[장산... 거화와 거화의 부친은 숨은 무림의 고수이고 너에게 무한한 복을 줄 사람들이다.]
[하...하지만...]
[장산, 고집을 피워서는 안 된다.]
[그...그럼 꼭 주인께서 다시 찾아 주시는 거지요?]
장산은 두 눈에 눈물을 머금고 기어 들어가는 소리로 물었다. 단엽은 고개를 끄덕였다.
[물론이지. 오래지 않아. 나는 너를 꼭 찾는다.]
[알겠습니다. 주인의 뜻대로 거화에게 가 있겠습니다.]
장산은 여전히 시무룩한 표정으로 고개를 끄덕인다. 못내 단엽과 헤어짐이 섭섭한 모양이었다. 한데 바로 이때였다. 휙! 누군가 창문을 헤치고 실내로 돌연 날아드는 것이었다. 단엽은 황망히 그 사람을 안아들었다.
[빙후...]
적사오혼과 단엽은 경악했다. 상대는 바로 빙후였던 것이다. 빙후의 전신은 이때 완전히 피투성이였다. 얼굴에는 미심에서부터 하관의 턱에 이르기까지 흰 선이 그어져 있었으며 그 흰선에서는 가는 선혈이 배어나고 있었다.
[어찌된 일이오? 빙후.]
단엽은 백납처럼 창백한 빙후의 얼굴을 보며 물었다. 빙후는 쉴 새 없이 검은 피를 토하고 있었다.
[당신은?]
그녀는 힘없이 감은 눈을 떴으나 생소한 단엽의 얼굴에 흠칫 경악하는 표정이었다. 그러자, 단엽은 탄식과 함께 간단히 자신에 대해 말했다. 한데, 모든 말을 듣고 난 그녀는 전혀 놀라는 표정을 짓지 않는 것이었다. 그녀의 입가에 희미한 미소마저 떠오른다.
[이미 짐작은 했었지요. 이...이몸이 아무리 멍청하다 해도... 남편을 알아보지 못할 정도는 아니지요. 그동안 당신을 죽이려고도 했었는데...]
그녀의 눈가에 처연한 그림자가 스쳐지나갔다.
[그러나...죽일수가...없었지요. 당신을 죽임으로 인해서...밤마다 찾아들 고독이 못 견디게 두려웠기에...당신과 잠을 자는 그 순간에도 죄의식을 느꼈지만 죽일 수가 없었습니다. 세월이 지나면서...나는 오히려 당신의 뛰어난 능력에 그 무서운 지혜에 동화되어 갔고...결코 사랑이라 말할 수 없는 감정을 느꼈지요. 그런데... 당신이 이렇게 뛰어난 미남자에다 나이어린 사람일 줄은 몰랐습니다....다...당신과 보낸 세월...어쩌면 그것이 하늘이 내게 준 마지막 자비일 것을...]
그녀의 음성이 점점 흐려지고 있었다. 얼굴에는 죽음의 그림자가 시시각각 덮여 내리고 있었으며 그녀를 보며 적사오혼도 말없이 눈물을 흘리고 있었다. 단엽은 무섭게 가라앉은 음성으로 물었다.
[대체 당신을 이렇게 만든 인물은 누구요?]
순간 빙후의 몸이 무섭게 떨렸다. 그리고 그녀의 얼굴에 어리는 한 가닥 공포의 빛. 그녀는 한동안 몸을 떨다가 간신히 입을 열고 있었다.
[여...여인.. 무서운 무공의 소유자.]
[여인?]
단엽은 그녀의 말을 한마디도 빠짐없이 마음에 새겨넣으려는 듯 그녀의 말을 되새기고 있었다.
[헉헉...그녀의 몸은 완전 금강불괴에 만독불침... 나의 믿었던 마라독공...무려 백여 년의 세월에 걸쳐 연성한 마라독공으로도 그녀를 상하게 할 수 어..어..없었음... 헉헉...부..북궁세가의 인물은 결코 아니었음... 두 팔이 모두 있었고..양손...석고로 만든듯 희디흰 소수... 헉헉...그녀...그녀..북궁세가의 인물...일곱을 죽이고...이곳에서 동북방의 검은 대리석 건물로...사라짐...]
여기에서 빙후의 음성이 끊어졌다. 그녀는 무슨 말인가를 애써 하려 했으나 입술이 떨어지지 않고 있었다. 눈썹이 미미하게 떨리고 있었고 그녀의 얼굴에 그어진 흰선에서 폭포수처럼 선혈이 터져 나오고 있었다.
[끄으으...]
그녀는 기이한 신음을 토하며 단엽의 손을 잡았다. 그것이 마지막이었다.
일세의 대마녀 빙후, 천마교의 천마삼비 가운데 일인이었던 이 여인은 끝내 눈을 감고 만다. 그 순간 그녀의 머리가 산산이 터지고 있었다. 그러나,
그녀의 몸은 아직도 단엽의 품에 안겨 있었으며 그녀의 두 손은 뜨겁게 단엽의 손을 움켜쥐고 있었다. 단엽은 그녀가 마지막으로 하고 싶어 했던 말을 짐작하고 있었다.
- 나를 꼭 안아주세요.
들리지 않는 음성이나 단엽의 귓전에는 여운처럼 그 음성이 울리고 있었다. 단엽은 한동안 그대로 굳어져 있었다.
(이것이 죄악이다.. 내 살기 위해 소수천마로 변신한 것이..이제와서 이렇듯 죄의식으로 와닿을 줄이야.)
단엽은 빙후라는 여인을 단 한번도 사랑이라는 감정으로 대해 본 적이 없었다. 단지 이용물로만 생각했을 뿐이다. 그 여인은 죽었다. 한데 왜 이렇게 가슴이 답답한 것인가.
(후후...그래...내 소수천마로 변신한 것은 ...단지 살기 위함이 아니었고 어쩌면 이 여인을 노리고 행한 짓이었으리라. 내 몸에 도사리고 있는 요기. 그것이 나도 모르게 그것을 강요한 것이리라. 그래서 이렇듯 죄책감이 드는 것이리라.)
그는 천천히 몸을 일으켰다. 그리고, 적사오혼을 주시했다. 그는 빙후의 싸늘히 식은 몸을 내려놓으며 말했다.
[모두 들으시오. 나는 이 길로 빙후가 말한 검은 대리석 건물로 갈 것이오. 그리고 볼 것이오. 도대체 그 여인이 누구이며 그 여인의 배후에 어떤 인물들이 도사리고 있는지. 다시 만날 때까지 여러분은 몸조심하도록 하시오. 결코 경거망동은 하지 말 것이며 그대로 천마교주에게 복종하면 머지않아 우리는 다시 만날 수가 있을 것이오.]
[명심하겠습니다.]
적사오혼은 눈물을 훔치며 허리를 숙였다. 장산은 단엽의 뒤를 따르며 간절한 음성으로 말했다.
[주인...부디 조심하셔야 합니다.]
단엽은 고개를 끄덕였다. 그리고 정감이 담긴 눈길로 그들을 한차례 쓸어 본 후 몸을 날렸다.
적사오혼의 탄식이 그 뒤를 애잔히 따르고 달빛은 처량히 흘러내리고 있었다.
밤... 천마성의 밤은 유난히 적막했고 어두웠다.
[부가주... 믿을 수 없게도 십대가신 가운데 칠대가신이 죽음을 당했습니다. 무림칠대뇌옥의 인물들을 감시하던 우리 북궁세가의 눈은 그것으로 막을 내리게 되었습니다. 칠대가신은 같은 무공에 의해 죽음을 당했으며 그 무공은 군협천의 군협동에 비장된 군협삼대금학 가운데 하나인 백야수가 틀림없습니다.]
노인, 어둠에 잠긴 거대한 대전의 중앙에 부복한 채 조용한 음성으로 말하고 이는 사람은 노인이었다. 일신에는 검은 유삼을 헐렁하게 걸치고 있었으며 한쪽이 팔이 없는 외팔이였고 이마에는 검은 띠를 두르고 있었다.
이것으로 짐작컨대 이 노인은 북궁세가의 인물인 듯 싶었다.
한편, 노인의 면전에는 한명의 청년이 가부좌의 자세로 검을 닦고 있었는데 역시 외팔이였으며 미간에는 검은 띠를 두르고 있었다. 일신에 걸친 옷은 빛바랜 검은 유삼. 관옥 같은 용모의 소유자. 눈썹은 세치이상 쭉 뻗은 검미요, 콧날은 절벽처럼 날카롭다. 나이는 이십이삼세 가량. 한지를 입에 물고 마른 헝겊으로 검신을 정성스레 문질러가는 그 모습은 마치 고여 있는 물을 보는 듯했다.
한지를 입에 문 것은 검에 입김이 스미는 것을 막기 위한 오랜 습관.
검을 쓸어내리는 청년의 한손은 기이하게도 노을빛이었다.
슥...스윽...
마른 헝겊에 스쳐지나 갈 때마다 검신은 노을빛에 젖어들고 있었고 검을 바라보는 두눈은 일점의 흔들림도 없었다. 북궁천. 바로 이 인물이 문제의 북궁세가의 부가주인 것이다.
침묵, 노인,
즉 북궁세가의 십대가신 중 일인인 북궁숭은 오랫동안 북궁천이 침묵하자 숨막힐 듯한 긴장감을 느꼈다.
그는 한지를 입에 물고 검을 훔치는 것이 북궁천의 습관이듯 북궁천이 침묵하는 것 또한 하나의 습관임을 알고 있었던 것이다. 그의 침묵은 분노를 대변한다.
그 분노가 클수록 침묵은 길어지는 것이다.
(칠대가신이 죽음을 당했으니... 저분의 분노는 당연한 것이다.)
북궁승은 탄식했다. 어느 순간이었을까? 문득 북궁천의 검을 닦던 동작이 뚝 멈추었다. 그의 눈빛은 느릿하게 북궁승에게 향했다. 그의 눈빛은 억년의 호수인 양 깊숙이 가라앉았다. 이어, 최초로 그의 입술이 무겁게 떨어졌다.
[운명인가? 이 천마성에서 일천년의 세월 동안이나 마주침이 없었던 서궁
세가와 마주친 것도...]
그의 시선이 허공으로 던져졌다.
[언제인가 한번은 숙명적으로 마주쳐야 할 상대라면..굳이 피할 생각은 없다. 칠대가신이 죽음을 당한 지금은 더욱 그렇다.]
그 순간, 번쩍! 그의 애검이 환상처럼 어둠을 가르고 단지 번뜩였을 뿐이건만 그의 입에서 떨어진 한지가 그대로 한꺼번에 가루가 되어 대전 가득히휘날린다. 빨랐다.
그저 빠를 뿐이었다. 북궁숭의 몸이 격렬하게 떨린다.
(오오, 저분은! 북궁세가 사상 그 누구도 연성치 못했다는 사령전린검법
마저 연성하셨다니... 북궁세가의 영광이로다!)
이때, 북궁천은 천천히 몸을 일으키며 담담히 말했다.
[이 사실을 당분간은 가주에게 알리지 마시오.]
[알겠습니다.]
[이 분노는 나의 선에서 끝나야 하는 것. 모든 것은 내가 직접 처리하겠소.]
[명대로 따르겠습니다.]
북궁승은 허리만을 깊숙이 숙일 뿐이었다. 그는 알고 있었다. 북궁천이 가주인 북궁추림에게 이 사실을 알리지 않으려는 의도를... 북궁천은 가주를 깊이 사랑하고 있었다. 부가주가 아닌 한 남자로서. 그리하여 그는 크나큰 충격을 사랑하는 사람에게 주려하지 않고 있는 것이니... 그 사랑의 농도. 북궁승은 다만 감동할 뿐이었다.
검은 대리석 건물.
이곳은 천마교주의 거처와 정반대의 방향에 위치하고 있었다.
이름은 마황루. 천마성의 또 한군데 금역이기도 하다.
이른 새벽, 아침 안개가 아스라이 마황루를 감싸며 돌고 있었다.
단엽은 참으로 오랫동안 마황루에서 얼마 떨어지지 않은 한 그루의 노송위에서 저 거대한 검은 대리석 건물을 바라보고 있었다
. 허름한 마의. 치렁한 흑발. 그 아래 단아하고 깨끗한 이마. 단엽의 희디흰 피부와 섬세하고 뚜렷한 윤곽으로 이루어진 얼굴은 아침 안개 속에서 이슬처럼 청초하게 빛나고 있었다.
휘이이~
한 줄기 미풍이 불어올 때마다 휘날리는 흑발은 실로 운치가 있었고 서늘한 두 눈은 마황루에 고정된 채 움직일 줄을 몰랐다. 지난밤, 그는 줄곧 이렇게 노송에 머물고 있었다. 그러나 그가 저 마황루에서 발견한 것은 아무것도 없었다. 밤 사이 개미새끼 한마리 얼씬 거리지 않았던 것이다.
(저 안에는 전혀 사람이 없는 듯 하다.)
인간이 머물고 있는 곳이라면 인기척이라도 있을 법한 것인데 백장 밖에서 낙엽 떨어지는 소리까지 훤히 들을 수 있는 예리한 청각을 지니고 있는 단엽이지만 아무런 인기척을 들을 수가 없었던 것이다.
(그러나 빙후가 죽어가면서 남긴 말... 분명 백옥수로써 빙후를 죽이고 또한 북궁세가의 칠대가신을 죽인 여인은 저곳으로 들어갔다고 했다.)
그 신비의 여인. 빙후를 간단히 죽일만한 엄청난 능력을 지닌 그녀의 정체는 무엇일까. 모른다. 그러나 한 가지 분명한 것은 그녀의 신분이 범상치가 않다는 것이다.
(빙후... 이 여인은 천마삼비 가운데 일인으로서 가공할 마라독공을 일백년의 세월에 걸쳐 연성한 일대의 마녀이다. 무림을 통틀어 이 여인을 자신있게 죽일 수 있는 인물은 적어도 내가 알기론 많지 않다. 그럴 가능성이 있는 인물이라면 군협처의 군협천주 철군무와 대소림사의 천엽성승... 그리
고 누구인가? 여인으로서 그런 정도의 능력을 지닌 인물이 과연 있었던가?)
아무리 생각해도 그런 인물이 언뜻 떠오르지 않는다.
(북궁현의 말이 사실이라면 북궁세가의 가주와 천마교주는 여인이다. 그
두 사람이 가능성이 있는 인물이라면 인물인데... 그 두 사람은 빙후를 결코 죽이지 않았다.)
단엽은 고개를 저었다. 북궁세가의 인물 일곱을 죽인 인물이 어찌 북궁세가의 가주가 될 수 있겠는가. 그리고 천마교주는 북궁세가의 도움을 받고 있는 입장이니 역시 빙후와 북궁세가의 인물을 죽일리 만무했다. 그렇다면 가능성은 오직 한 가지.
(바로 제 삼의 인물... 그들 가운데 여인이 빙후를 죽였을 것이다. 그것도 보통 신분의 여인이 아니라 대단한 신분의...)
단엽의 시선이 마황루로 향한다.
(그렇다면 저곳에 제삼의 인물이 존재할 수도 있다는 결론이 나오는데..)
긴장이 되고 있었다. 이런 긴장이 단엽으로 하여금 섣불리 마황루에 접근을 못하게 하고 있었던 것이다. 그리고, 이런 생각은 벌써 수십 번도 더했다. 매번 결론은 제삼의 음모자들이었다.
백옥수를 사용하는 인물이 바로 제삼의 인물일 것이라는 희미한 확신. 그것은 이런 이유로 인해서 결론이 나온 것이다.
천마교의 부활. 이것은 애초에 제삼의 음모자들에 의해 시작이 된 것이다. 무림칠대뇌옥을 파괴한 장본인들은 북궁세가의 인물들이었지만 제 삼의 음모자들이 이 천마교의 부활에 개입하지 않을 리가 없다.
(만약... 그들이 천마교의 부활에 개입하고 있다면 이곳 천마성의 어딘가에 분명히 도사리고 있다. 있다면...바로 이 마황루가 가장 유력하다.)
그러나저러나 단엽은 망설이고 있었다. 무작정 저 마황루로 들어가야 하는가 아니면 좀 더 마황루를 살핀 후 들어가야 하는가. 이것이 문제라면 문제라고 할 수 있는데...
(기다릴 만큼 기다렸다. 더 이상 기다릴 수는 없지 않은가.)
단엽은 내심 결단을 내렸다.
스스스... 그의 신형은 허공에서 수십 수백번의 방위 이동을 시작하더니 그대로 마황루의 대전을 향해 소리 없이 스며 들어갔다. 본래 신법이라곤 연성하지 않은 단엽이다. 그러나, 천마도법을 연성하기 위해선 그 자살도법에서 살아남기 위해선 무려 아흔아홉 번의 방위이동이 필요하다. 그것도 찰나지간에. 기실 그 아흔아홉 번의 방위이동은 인간의 능력으로선 전개하기가 거의 불가능한 것이었는데 어쨌든 그 불가능을 단엽은 뛰어넘어 아흔아홉번의 방위이동을 전개할 수 있었다. 이것은 단지 피하기 위한 동작이 아니라 이것을 신법으로 이용할 경우에는 찰나지간에 자신이 원하는 아무 곳이든 갈 수 있는 또 하나의 불가사의한 능력을 주는 것이었다.
지금 단엽이 소리 없이 마황루의 대전으로 스며든 것도 알고 보면 그런 이유에서 나온 것이다. 안개에 휩싸인 신비로운 마황루. 그 검은 대리석 대전. 죽음과 같은 적막만이 감돌고 있었다.
단엽은 대전의 중앙에 서 있었다. 그는 뒷짐을 진채 천천히 대전의 중앙에 펼쳐진 융단을 따라 거닐었다. 저벅저벅.. 그의 발걸음 소리만이 적막을 깨고 있을 뿐이었다. 문득, 단엽의 입가에 희미한 미소가 감돌았다.
(기척... 그렇다. 인기척이다. 한두 명이 아닌 수십여 명..)
언뜻 그의 두 눈에 경악의 빛이 스치고 지나간다.
(놀라운 일이다. 한두 명도 아닌 수십여 명이 완벽하게 자신들을 숨기고 있다니..이것은 고도의 훈련된 인물이 아니면 감히 흉내 내기도 힘든 것이다.)
스윽... 돌연 잿빛 손 하나가 바로 단엽의 발 끝부분에서 솟아 나오는 것이었다. 검은 대리석 바닥에서.
그 뿐만이 아니었다. 단엽을 중심으로해서 둥근 원을 그리며 십여 쌍의 손이 바닥에서 소리 없이 솟아나고 있었으며 그것은 단엽으로서도 전혀 예상치 못한 것이었다.
파아아... 십여 쌍의 손은 그대로 단엽의 하복부를 향해 무섭게 날아들었다. 빨랐다. 전혀 예상치 못한 방향에서 솟아나온 것도 그렇고 나타났다고 느끼는 순간 그대로 빛처럼 하복부를 향해 날아드니 단엽으로서는 도저히 그것을 막을 수가 없을 것만 같았다.
퍽퍽! 단엽의 몸에 십여 쌍의 손은 그대로 적중이 되었고 그 순간 단엽의 신형은 쓰러질 듯 휘청거렸다.
[으윽! 헉!]
비명을 토하는 인물은 단엽이 아니라 십여 쌍의 손의 주인들이었다. 그리고 십여 쌍의 손들이 녹아들고 있었다. 이 순간, 단엽은 모친으로부터 전해받은 수음마공을 전개한 것이다. 수음마공. 이것은 전신을 완전히 금강불괴로 만들 뿐만이 아니라 전개하는 순간 가공할만한 극음지기를 뿌린다. 이 극음지기는 수음지기라 불리우며 무려 일백여년의 세월동안 만월의 음기를 체내로 흡입하여 연성하는 것이다. 그 음기를 일천 명 사내들의 순양지기로 융화시킨다. 그래서 형성이 된 수음지기는 천지간에서 가장 음한 것이다.
일단 전개하면 닿는 무엇이든 그대로 물로 녹아버린다. 지금 바로 단엽이 위기에 순간에 그 수음마공을 전개했으니 십여 쌍의 손들이 녹아내리는 것은 너무도 당연했다.
[흐흐흐... 대단하군.]
음산한 음성이 대전을 뒤흔든다고 느끼는 그 순간이었다.
파아아! 이번에는 대전의 천정에서 십여 쌍의 손이 단엽의 머리를 노리고 짓쳐드는 것이었다. 역시 손은 잿빛. 그리고 그 잿빛 손으로부터 이번에는 무엇인가 쏟아져 나오고 있었다. 그것은 눈부시게 흰빛. 바로 하얀 모래 백사였다. 단엽은 흠칫했다.
[백사지대의 인물이었던가?]
무림 칠대뇌옥 가운데 하나, 모든 것이 흰모래 뿐이라는 죽음의 땅.
[헌데 어찌 백사지대의 인물들이 이 마황루에...]
단엽은 크게 의혹을 느꼈다. 그러나 그것을 길게 생각할 시간적 여유는 기실 눈곱만큼도 없었다. 하얀 모래. 마치 눈가루처럼 떨어져 내리며 단엽의 팔만사천모공을 향해 마치 눈이라도 달린듯 쏘아져 오고 있었다.
(한 알의 모래라도 맞는다면 치명적인 부상을 면치 못할 것이다.)
생각과 동시에 단엽의 몸은 그 자리에서 무려 아흔아홉 번의 방위이동을 시작했다. 그것은 거의 육안으로서는 볼 수 없으리만큼 빠른 동작.
스스스... 단엽의 몸은 그대로 대전의 천정을 폭풍처럼 휩쓸고 지나갔다.
[크아아! 으악! 컥!]
동시에 터져 나오는 비명은 열 마디. 대전의 천정이 검푸르게 물드는가 싶더니 이내 열쌍의 손은 그대로 검은 물로 녹아내린다.
마라독공. 이 가공할 마공이 지금 단엽의 손에 의해 전개되고 있었다. 일단 전개하면 단엽의 그림자로서도 살아있는 그 어떠한 생물체라도 한 줌의 독수로 녹아내리게 할 수 있는 가공할 독공. 단지 녹아내리는 것은 열 쌍의 손만은 아니었다.
그 열쌍의 손의 주인도 모두 한줌의 독수로 녹아내리고 있었다.
비릿한 피비린내. 그리고 역한 내음. 대전은 죽음과 같은 침묵에 휩싸였다.
너무도 순식간에 열명이 독수로 녹아내리고 열 쌍의 손이 한줌의 물로 녹내리자 단엽을 공격하던 상대도 주춤하는 기색이 분명했다. 단엽은 태연히 마치 아무일도 없었다는 듯 계속하여 바닥에 깔린 융단을 따라 걸어갔다.
[후후후... 대단한 고수로군.]
한줄기 싸늘한 음성이 단엽의 머리 위를 회선하는가 싶더니 소리 없이 단엽의 면전에 나타나는 한 사람이 있었다.
청년, 구리빛 피부의 오관이 수려한 약관의 청년이었다. 백사지대에서 태어나고 그 뛰어난 자질로 인해 백사지대의 수뇌가 되어 있는 인물, 바로 백사혼이었다. 그가 나타나는 그 순간 그의 뒤로 소리 없이 다시 나타나는 일단의 무리가 있었다. 정확히 오십일인, 그들 가운데 열 명은 손목이 없는 상태였다. 그들의 피부는 시커멓게 그을려 있었으며 대부분 철립을 쓰고 있었고 검은 피풍의로 전신을 휘감고 있었다.
바로 백사지대의 인물들. 단엽은 잠시 걸음을 멈춘채 느릿한 시선으로 그들을 휘둘러보았다.
백사혼은 잠시 감탄의 시선을 단엽에게 던지고 있었다.
(대단한 미남자로군. 한데 이자의 진정한 정체는 무엇인가? 천마성 내에 이런 인물이 있었다는 말을 들어본 적이 없는데...)
그는 단엽의 수려한 얼굴을 들여다 보며 내심 의혹을 금치 못했다.
(한 가지 분명한 것은 그는 무림칠대뇌옥의 인물은 아니다. 그렇다면 그는 무슨 목적으로 어디에서 온 것인가?)
그의 무심한 시선은 단엽의 전신을 예리하게 쓸어내리고 있었다.
(수십여 년의 세월 동안 백사지대에서 오직 무공 수련에만 전념해 온 나의 형제들 중 십여 명이 순식간에 죽음을 당하다니...아무튼 놀라운 인물이다.)
단엽의 눈빛은 고요하게 백사혼에게 향하고 있었는데 그 눈빛에 접한 백사혼은 자신의 영혼이 단엽의 눈으로 빨려 들어가는 듯한 착각을 느끼고 흠칫했다.
(중원에 기인 이사가 많다고 하더니 허언은 아니었군. 이 백사혼에게 최초로 패배를 안겨준 인물. 그리하여 이 백사혼으로 하여금 이 마황루에게 귀속케 한 인물. 그도 뛰어났지만 이 인물 역시 뛰어나다.)
이때, 단엽 역시 나름대로 생각하고 판단하고 있었다.
(이들 백사지대의 인물이 이 마황루에 머물고 있는 것으로 보아 무림육대뇌옥 가운데 상당수의 인물이 이곳에 귀속이 된 것 같은데 과연 이들을 굴복시킨 인물은 누구인가? 어쨌든 내가 이곳에서 할 일은 이곳 마황루에 대해 철저히 조사하는 것이다. 천마교 부활에 대한 열쇠와 현재 무림에 던져져 있는 모든 음모에 대한 열쇠를 이곳에서 쥐고 있을 수도 있기 때문이다.
이곳의 인물들이 제삼의 음모자와 관련이 있다면...)
단엽의 생각이 여기에 이르렀을 때다. 백사혼이 잠시의 침묵을 깨고 무겁게 입을 열었다.
[이곳은 외부인이 함부로 출입할 수 없는 곳이오. 다시 말해 이곳은 천마성의 금지이며 천마교주의 허락 없이 이곳을 출입하는 자는 오죽 죽음뿐이오.]
단엽은 미간을 살짝 찌푸리며 물었다.
[천마교주의 허락이라면 이곳이 천마교주의 처소라도 된단 말이오?]
[물론이오. 이곳은 분명히 그분의 처소이오.]
[알 수 없는 일이로군.]
단엽은 고개를 갸웃했다.
[내가 알기로는 천마성 내에서 천마교주의 처소는 오직 한 곳뿐이며 그곳은 바로 천마루라고 알고 있는데 이곳이 또한 천마교주의 처소라면 천마교주가 둘 이라도 된단 말이오?]
백사혼은 말없이 기이한 웃음을 흘렸다. 그것은 단엽의 말에 대한 시인 같기도 했으며 부정 같기도 했다.
그는 잠시 시선을 허공에 두었다가 느릿하게 말했다.
[다시 말하지만 이곳은 분명히 천마교주의 처소이오. 그리고 우리 백사지대가 천마교주에게 충성을 약속했듯이 이제 모든 인물들이 천마교주에게 복종해야 하오. 당신 역시 예외가 될 수 없소.]
[후후...]
단엽은 잠시 어이가 없다는 듯 실소를 흘렸다.
[그렇다면 나 역시 천마교주에게 복종해야 한다는 말 같은데...그렇소?]
[그것이 살아남을 수 있는 유일한 길이오.]
[그래서 자네도 살기 위해 천마교주에게 투신했는가?]
[예외란 것은 항상 있는 법이지.]
백사혼은 담담히 말했다.
[이 백사혼은 애초에 천마교주의 자리를 노리고 이곳 천마성에 들었다.
그러나 백사혼은 천마교주와의 정당한 대결에서 패했고 진심으로 그 분에게 굴복했기에 이곳 마황루에 남게 된 것이다.]
[진심으로 굴복했다면 천마교주의 능력이 상당한 것 같군.]
단엽은 다분히 조소어린 어투로 말한후 천천히 걸음을 옮겼다. 순간, 백사혼은 소리 없이 방위를 이동해 앞을 가로막아 섰다.
[그대는 나의 말뜻을 아직 이해 못하고 있군.]
[호오... 그대의 말뜻은 무엇이던가?]
[둘 중 하나를 택하라는 말이다. 천마교주에 진심으로 복종하면 죽음은 면할 수 있을 것이며, 그 반대이면 죽는다.]
[물론 선택은 나의 자유이겠지.]
단엽은 백사혼을 주시하며 빙그레 웃어보였다.
[그러나 그 이전에 천마교주를 만나고 싶다.]
[이유는?]
[그대처럼 천마교주와 정당한 대결을 벌이고 싶기 때문이다.]
[음...]
백사혼은 침음성을 흘렸다. 그러나 그것은 순간적인 것일 뿐 백사혼은 느
릿하게 고개를 가로저었다.
[지금 상태로는 불가능하다.]
[이유는?]
[그대의 신분과 목적이 의심스럽기 때문이겠지.]
[그래도 내가 만나고 싶다면?]
[물론 방법은 있다. 그대가 이 백사혼을 먼저 제압한다면 내 직접 그대를 천마교주에게 모시고 가겠다.]
[후회 할텐데...]
[크핫하하... 그것은 두고 봐야 하겠지.]
백사혼은 앙천광소를 토하며 뒤에 시립한 인물들에게 물러가라는 손짓을 했다. 이어 스스슥! 그의 신형이 흡사 안개처럼 사라져 버리는 것이다.
[조심하라.]
동시에 허공에서 울리는 백사혼의 차가운 음성.
파아아... 돌연 음성에 이어 불쑥 그의 손이 허공 중에서 튀어나오더니 단엽의 가슴을 놀리고 무서운 속도로 짓쳐드는 것이었다. 단지 날아드는 정도가 아니었다. 전후좌우 삼백 육십 방위를 차단한 무서운 공세였던 것이다. 더욱이나 그의 몸은 보이지 않고 오직 손 하나만 보이는 것이었다.
단엽의 안색이 미미한 변화를 일으킨다.
(과연 백사지대의 최고인물답군.)
그러나 생각 이전에 그의 신형은 움직이고 있었다. 좌로 움직이는가 싶더니 거의 찰나지간에 수십번의 방위이동을 시작한다. 백사혼의 잿빛 손은 그
대로 목표를 상실하고 허공을 가격했고 그 순간,
[제법이로군. 그러나 아직 멀었다.]
백사혼의 음성이 다시 허공중에서 울리고 또 하나의 손이 불쑥 단엽의 가
슴 한치 앞에서 나타나는 것이었다. 동시에 그 손에서 다시 잿빛 검 하나가 튕겨 나왔다.
너무도 가까운 거리에서 시작된 공격인지라 도저히 단엽이 피할 수는 없을 것 같았다.
(무서운 은영잠행술이다. 이런 류의 잠행술은 수십여 년의 세월에 걸쳐 고도의 훈련이 수반이 되었을 때만이 연성할 수 있는 것. 더욱이나 그 죽음의 땅에서의 생활 끝에 연성한 이 자의 은영잠행술은 전혀 기척도 찾아볼 수가 없어 상대하기가 거의 불가능에 가깝다.)
막 백사혼의 손에서 솟아나온 검이 그의 가슴을 그대로 관통하려는 순간,
슈욱! 무엇인가 그의 가슴 부근에서 무섭게 튕겨 나갔고 그것은 그대로 검을 퉁겨내는가 싶더니 보이지 않는 허공에서 허공을 향해 수십 줄기의 도기를 뿌려댄다.
그것은 한쌍의 천마비도. 불과 어른 손가락 크기 정도의 두 자루 천마비도는 허공의 삼백 육십 방위를 완벽하게 차단한 채 사정없이 도기를 뿌려대고 있었다.
[우욱!]
한줄기 고통스러운 신음이 허공중에서 터져나왔다. 더불어 허공가득 피어나는 혈화. 그것으로써 이 일련의 대결은 끝이 나 있었다.
흐릿하게 나타나는 백사혼. 그의 옷은 이때 갈기갈기 찢겨져 있었으며 찢겨진 옷자락 사이에서는 시뻘건 핏물이 배어나오고 있었다. 미미하게 떨리는 신형과, 경악과 불신의 빛에 젖은 두 눈.
(무...무서운 고수다. 천마교주만이 이 백사혼 위의 고수라고 생각했더니 이 자 역시 천마교주에 비해 뒤지지 않는 무공을 지니고 있지 않은가.)
그는 한동안 굳어진 자세로 단엽을 주시했다. 단엽은 뒷짐을 진채 여유있게 허공을 바라보고 있었다.
마치 천정의 조각된 여러 가지의 문양을 감상하기라도 하듯. 방금 전 생사와 좌우되는 무서운 혈전을 벌였음에도 아무 일도 없었다는 듯한 태도였다. 백사혼은 그 여유에 질려버리고 말았다. 그는 상대가 도저히 자신으로서는 상대할 수 없는 인물임을 솔직이 인정했다. 그는 단엽을 바라보며 말했다.
[따라 오시오. 약속대로 천마교주에게 안내하겠소.]
[고맙소이다.]
단엽은 빙그레 웃으며 백사혼의 뒤를 따랐다. 한데,
[크아아!]
돌연 대전의 입구를 막 빠져 나가던 백사혼의 입에서 처절한 비명이 터져
나오는 것이었다.
백사혼의 가슴. 거기에는 노을빛 한 자루의 검이 가슴을 관통해 등 뒤까지 삐져나와 있었고 그 검끝을 타고 점점이 떨어져 내리는 핏물. 움직이고 있었다. 그의 가슴을 관통한 노을빛 검은.
파아아! 순간 백사혼은 난도분시 되어 핏물과 함께 바닥에 떨어져 내렸다. 비명을 끝으로...
단 한마디의 말도 남기지 못한 채 천마교주의 권좌라는 야망을 품고 중원에 나온 백사혼은 그대로 절명하고 만 것이다.
[모두 죽여라!]