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신화란 말 그대로 태초의 자연과 인간의 전 존재를 심미적 통찰을 통해서 담은 서사시이다. 인간은 신화라는 언어를 가진 행성을 포함한 우주라는 공간에서 숨을 쉰다. 우리에게는 자연의 사계와 우주의 사계에서 생명체의 구성원인 지(地), 수(水), 화(化), 풍(風)의 기운으로 지구라는 틀 속에 존재한다. 제 각각의 인생관을 가지고 초 감성적인 고급두뇌로 주인행세를 하면서, 지배하고, 이상과 규범을 만들고, 원리와 규제, 전쟁과 파괴와 대학살, 물어뜯고 물리고, 시기와 질투, 미움과 사랑이 반복되는 과거와 현재, 그리고 미래를 여행하고 있다.
이 지구상의 생명체는 자체 진화의 결과로 각자 생명을 가지면서 진화를 거듭해 나가고 있다. 다윈의 진화론은 인간의 인생의 의미와 윤리적 근거를 없애는 과학이 아니라, 새로운 인생의 의미와 윤리적 근거를 창조하고자 하는 열정적 제안이다. 이와 같은 표현은 인생관과 세계관이 결국은 일맥상통하는 관계임을 나타내며 인생의 대부분을 반쯤 무의식의 세계에서 살아가기도 한다.
인간의 삶들은 세월 따라 강물처럼 흘러간다. 그러나 여기서 벗어난 예외가 있다. 어린 시절 누군가와 사랑에 빠졌을 때나, 상처받았을 경우가 그러하다. 사랑하는 사람과의 만남이라든지, 아이러니한 삶을 살아온 사람과의 참다운 인연이라든지, 과학의 발견과 예술세계에 빠지든지, 불가능한 현실이 가능해지든지 그러한 경우이다. 순간의 사고가 희망적이고 창조적인 인간은 모험과 경험에 익숙하게 되고 변화 속에 맛보는 신비로움과 놀라움이 운명처럼 다가오는 인생이 될 수 있다.
차의 중흥조이신 초의선사의 『동다송』과 『다신전』을 재해석한 책을 발간 후 경주의 차 문화 협회 행사에 참석했다가 차인들과의 인연이 깊어졌다. 그 중에 하양이라는 곳에서 차 문화 단체에서 활동하시는 유지원 차인을 알게 되었는데, 이 분의 소개로 도예가 겸 차인이신 무초(蕪草) 최차란님과의 인연이 시작되었다. 차인 겸 도공으로서 인생철학이 남다른 하늘같은 선배였다. 차인으로서 1세대라는 게 무색할 정도로 격이 없다. 귀인으로서 젊은 차인들에게 정신적인 힘이 되어주며, 언제나 인생의 내비게이션 같은 도공이다. 지금 이 시간에도 우리 곁에 존재하는 것만으로도 늘 감사드린다는 지원 차인의 이야기이다. 무초(無草)란 호는 ‘아무것도 없는 것에서 풀이 돋아나 자라다’는 뜻으로 해석된다고 한다. 풀은 처음으로 시작되는 생명체인걸 보면 무에서 새로 유를 만들어 낸다는 뜻이 아닐까? 아무런 지식도 없이 가르쳐 주는 이 아무도 없이 전통도자기를 시작했고, 처음부터 정호다완의 뜻을 찾아 사발을 빚기 시작 한 것 등 모두가 무(無)의 상태였다. 본 바도 없고 가르침을 받은 바도 없는 상태였음에도 불구하고 최초로 다도(茶道)라는 문화를 들여왔고, 들차회를 만들고, 황토방을 만들었다. 홀로 수많은 시행착오 끝에 정호다완을 재현하였으니 결코 헛된 꿈이 아니었다는 뜻에서 생긴 호일 것이다. 최 도공이 태어나신 곳은 경북 영일 비학산 골짜기 마을 미너리, 라는 곳으로 물 맑고 공기 좋은 아름다운 마을이다. 최 도공은 이곳에서 3대째 옹기를 구어 온 집안의 딸로 동학의 제1대 교주인 최제우의 형인 최세우 5대손이다.
“우주의 원리를 결코 무시하지 않으며
오직 진실만을 향하는 참다운 도공”
꿈을 일깨워 주는 도공이 되고 싶다.
내가 성형을 하고 물레를 돌리는 모습을 보면서
사람들이 “저 사람은 저렇게 자기 재능을 찾았는데
내가 가진 재능은 뭘까” 하고 고민 했으면 좋겠다.
동학사상은 인내천(人乃天)사상, 유. 불. 선 3교의 장점을 모아서 조선후기사회의 문란과 외세에 맞서려했던 민중봉기 사회운동이다. 즉 사람은 곧 하늘(神)이라고 하여 인심이 곧 천심이요, 사람을 섬기는 것이 곧 하늘을 섬긴다는 뜻으로 평등사상이 내포되어 있다. 천주교가 서울을 중심으로 퍼졌다고 하면, 동학은 농민을 대상으로 단순한 종교운동이 아닌 보국안민을 부르짖으며, 외세배격과, 현실의 병폐를 개혁하려는 사회운동이었다. 동학혁명이 봉기하자 잘못된 판단으로 외세를 불러들인 조정과 개화파의 요청으로 청일이 출병함으로써 청일 전쟁이 발생하였다. 마음 아프게도 조선의 동학농민군은 일본군. 개화파. 양반의 연합세력에 눌렸을 뿐만 아니라 일제의 침략의 발판을 가져다 준 꼴이 된 것이다. 일종의 약소국의 슬픔이요 강대국들의 각축장의 장소가 되어버린 것은 마치 지금의 일본과의 한일정보협정관계도 모르긴 몰라도 분명 군국주의의 부활을 꿈꾸려는 의도가 아닐까 한다. 과거 일제 강점기에 그들은 우리의 역사를 일본에 예속된 것으로 표명하면서 부끄러운 역사의 교훈을 남겨 주었다. 남에게 기대려고 하는 타율성, 셋만 모이면 싸움을 하는 당파성, 발전할 의지가 없는 정체성 등이 그러하다 지금의 현실정치는 이러한 언어로부터 섞이지 말아야 한다. 민족의 자결주의가 필요하다고 생각한다. 좌파니 우파니 종북 세력이니 하는 그런 논쟁보다 미래에 후손에게 물려줄 수 있는 위대한 동방의 나라 통일된 대한민국이 필요한 것이다. 동학농민 전쟁은 훗날 의병 투쟁으로 이어졌다고 한다. 동학을 믿는 사람은 8족을 멸하라는 조정의 명령 때문에 집안사람들은 목숨을 부지하기 위해서 깊은 산속으로 들어와 옹기를 구우며 신분을 감추지 않았을까? 아버지 최정택 옹은 단순히 옹기만 굽는 옹기장이라기보다는 상업적인 두뇌도 가지셨던 분이었기에 서울에 올라와 금융조합 이사장까지 하셨다. 어머니는 두 분이 계셨는데, 두 분은 철학적인 교육과 어려운 현실에서도 철저한 실용주의적 사고로 큰 집안일을 도맡아서 하신 강인한 분으로 기억한다.
차인으로서 느낀 바는, 임진왜란으로 인해 잃어버렸던 우리의 전통문화인 차와 도자기 재현을 위해 분주히 일본을 오가며 문화를 정착시키고자 노력하였다는 점이다. 임진왜란을 일으킨 일본은 조선의 도공을 잡아가고 왜 무명도공의 막사발을 가져다가 국보로 삼아야 했을까? 이것이 화두이다. 막사발에 정호다완이라는 이름을 붙인 뜻은 “자연의 마음” 이었을 것이다. 우리의 도자기 예술은 분명 세계정상이었다. 고려시대의 청자가 그랬고 조선전기의 분청사기와 후기의 순수백자가 그랬다. 옛 선조들의 유산을 지키지 못해 일본이 임진왜란과 일제강점기에 빼앗긴 문화를 다시금 정착시키기 위해서 만든 요장이 바로 경주의 토함산 기슭에 백암 황토가 숨은 천혜의 ‘새등이요’이다. 경주는 신라 역사의 심장부라 불리는 이곳에 예술품들은 세계인이 쉽게 친숙해질 수 있는 흡입력을 가지고 있다.
처음 ‘새등이요’의 뜻이 궁금하였다. 원래 신라시대(新羅時代) 때 설총이 이두로 나타낸 민문자로 새등이요(史等伊窯)라고 적는다. 새 것, 새 아침 동쪽으로 하여 밝다, 라는 뜻을 담고 있다 한다. 이 말은 기만이 없고 본심본성으로 행동하는데, 습사행심(拾捨行心)으로 옳은 것은 갖고 그른 것은 버려야 맑다, 라는 뜻도 포함하고 있다. 해가 가장 먼저 뜨는 동쪽에 흐르는 천이 바로 새등인데, 경주 토함산은 우리나라에서 가장 먼저 해를 맞는 산이며 태양의 강한 기를 가장 먼저 맞는 땅이라고 생각하였다. 그래서 이곳에 불가피하게 살아있는 신라인 윤선생의 권유로 선도요장을 만들었지만 반대하는 사람들로 인해 오래 작업을 하지 못하고 민예사라는 전통문화를 파는 가계만 운영하다가 접었다고 한다. 새등요라는 가마를 묻는 방법, 다시금 현대도자기의 형식주의적인 모더니즘에서 벗어나 우리 조상들의 맥을 잇는 전통도자기를 만드는 일말이다.
도공으로서 세계관이나 인생관은 포스트모더니즘에 해당되는 도자기를 재현하려는 도공이 되고 싶었다. 새로운 가치 기준을 제공해 주는 복고주의에 도전하는 르네상스 문화처럼 말이다. 그러기 위해선 얼마나 많은 시련과 아픔 고통의 시간을 겪어야만 했을까? 초등학교를 졸업하고 가정환경으로 진학을 포기하였다. 그 후 서울에 상경하여 사람들은 먹는 것 다음으로 좋아하는 옷 유행에 뒤지지 않는 맵시 좋은 옷을 만든 패션디자이너 격인 양재학원을 다녔다. 그 다음은 정신대에 끌려갔다가 돌아와 19살이라는 나이에 취직해서 돈을 벌었다. 그리고 고향에 인사차 잠시 들른 것이 결혼의 인연이 되었고 본인의 의지와는 상관없이 결혼을 하게 된다. 1946년에 첫 딸을 낳았고, 둘째딸을 낳은 시기에 6,25가 발발하여 남편을 잃었다. 피난 도중 오빠를 만나 문병을 잘못 갔다가 얻은 병으로 병원을 찾았는데 진찰 결과는 폐렴이었다. 마음속에 교차하는 생존자와 허무한 인생이 뇌리를 스쳐 갔지만, 아기가 있었기에 치열한 싸움이 필요했다. 완쾌된 후 피복 공장에 취업해서 어학도 배울 수 있는 기회를 얻기에 이른다. 하지만 전쟁으로 인한 남편과의 사별, 배고픔으로 인해 결코 겪지 말아야 할 슬픔 중 하나인 자식 잃은 슬픔을 겪게 된다. 혹독한 시대적 환경 속에서 자신의 육신을 질병과 배고픔에서 이겨내기 위해서 양장점을 내서 생계를 유지했다. 그리고 돈을 벌었고 30대에 들어선 민속학에 빠지게 되었고 문화재에 눈을 뜨게 되었다. 하늘의 인연으로 생각되는 기물에, 특히 돈의 목적보다는 불로 다스려 만들어지는 기물에 관심이 생겼다.
이로 인해 돈만 생기면 골동품을 사러 다니던 시절 가운데, 드디어 1967년에는 계룡산 도요지 발굴하여 정호다완을 재현하는 큰 성과를 거두게 된다. 하지만 또 다른 병이 육신을 침윤했고 이로 인해 폐를 잘라내고, 또 다시 자궁암이라는 판정으로 수술을 받아야 했다. 그래도 생계유지를 위해서 취업을 해야 했다. 취업 준비 중에 우연히 보게 된, 공고를 통해 부산에 최초로 민속 공예품 가게를 열었다. 장사가 제법 잘 되었지만 인간관계에서 뼈아픈 경험을 하게 되고 이로 인해 민속공예품을 판매하는 민예사를 두 번이나 정리해야만 했다. 1970년 수구초심의 마음으로 경주로 돌아왔다. 하지만 1년 후 또 사기를 당하고 어두운 골방에서 사흘을 울었던 기억만이 덩그런히 남게 된다. 후회 없는 인생을 살기 위해서 무엇을 해야만 하는가에 대해 고심 하던 차였다. 그 길로 점포를 구하러 다녔고 마침 미완성된 건물을 얻어 은행에 담보로 융자를 받아 건물을 완공하고 마침내 우미민예사의 간판을 내걸었다. 또 한 번의 인생의 보람을 맛볼 수 있을 만큼 점포 운영이 잘 되어 돈도 많이 벌수 있었는가 하면 관광협회이사로 추천을 받을 정도로 명예도 누릴 수가 있었다.
하지만 늘 아쉬웠던 이유는 한 구석에서 전통문화를 만드는 사람이나 그것을 취급하는 사람들에 대한 우리나라 사람들의, 우리 문화에 대한 인식이 부족하다는 점이다. 작품들은 대부분 작가의 사상이 반영되어야 되는데, 작품이라기보다는 공장에서 만들어지는 기성품 정도로 밖에 취급되지 못했다. 그래서 자신이 직접 도자기를 구워보고 싶어졌다. 본시 옹기장의 딸로서 흙 만지는 일에 자신도 있었고 “살아있는 신라인” 윤선생의 도움으로 비록 가마를 묻었지만 주위의 반대로 성공하지는 못했다. 하지만 선도요 설립도 해봤다. 민예사의 번창으로 천마총에 또 다른 가게를 오픈 할 수 있었다. 여기서 팔리는 작품들은 신라왕의 금장귀고리와 신라의 유물 이미테이션을 팔아서 많은 돈을 벌수 있었다. 그런데 어느 날인가 검찰의 소환으로 영문도 모른 채 검찰에 출두 해야만 했다. 소환의 내용인 즉 “투서가 들어왔는데 당신이 신라 금장 귀고리를 도굴해 가지고 있다는데, 사실이오? 그게 사실이라면 어떻게 되는지 알아?” 도무지 있을 수도 없는 황-당 무계한 모함이었다.
늘 정직하게 원칙을 지키고 법 근처에 가는 것도 싫어했던 나에게 검찰의 소환으로 피의자가 되어 조사를 받게 된 것이다. 검사의 끊임없는 추궁에 했던 말, “검사님, 나는 당신 마음을 헤아릴 수 있는데 검사님은 왜, 내 마음을 엿보지 못하는교? 그럴 바에는 차라리 나를 빨리 가막소에 보내시오.” 그러자 겁주려고 교활한 의도로 살인범 소굴에 넣겠다고 말하기에 한 말 중에 “살인범도 인간인데 당신보다 더할까?” 검사의 무모한 수사 방식이 잘못되었음을 알 수 있었다.
검찰은 수사 시 충분한 자료와 증거물이 필요하며 심문 할 때에도 피해자(고소인)의 고소내용에만 의지 하지 말고 반드시 육하원칙에 입각한 피의자 심문을 해야 할 것이다. 검찰직원들의 대화기법에서 피의자를 함정에 빠뜨려 죄를 받게 하는 일들이 현 검찰의 문제점일 수도 있으리라 생각했다. 인간들에게 억울한 죄의 고통은 판결이 끝난 후에도 앉으나 서나 누우나 고통으로 따라 다닌다. 인간들의 본성은 본디 악도 선으로 풀려고 하는 성선설보다는 무섭고 죽이고 싶은 악마들이 있어 성악설에 가까울 지도 모른다. 그렇기에 종교가 필요하고 정의가 살아있는 재판법정과 재판과정이 필요하지 않을까 생각했다. 만약에 이러한 사건의 소용돌이에 빠져 들지 않았다면 천마총에다 가마를 묻고, 서구 유럽의 르네상스 문화의 고대 전통에 대한 복구를 꿈꾸었을 지도 모른다. 이를 통하여 우리의 막사발의 정체성을 찾고 전통 가마법을 복구하여 세계적으로 홍보하고 싶었다. 이 시대를 대표하는 레오나르도 다빈치와 미켈란젤로, 새로운 가치기준을 가졌던 인문주의자들처럼 바로 자신에 대한 관찰을 통해서 말이다. 선을 지향하고, 인간이 지식을 습득할 수 있는 방법과 같이 전통도자기에 대한 재현을 통해 후학들에게 귀중한 자료를 남겨 주고 싶다는 꿈을 가졌었다. 그런데 그 모든 것이 헛되고 헛되어, 천마총 가게뿐만 아니라 우미민예사까지 정리를 해야만 했다. “인간을 좌절하게 하는 것은 현실이 아니라 꿈인 듯하다.” 자신이 천마총에 가마를 묻고 싶은 의지와 꿈이 이루어지지는 않았지만, 오히려 토함산이라는 곳을 찾는 것이 오히려 억울함에서도 고단함에서도 해방된 기분이었다. 마치 응징이나 악과의 싸움보다는 진실이 왜곡되고 가짜와 거짓이 판치는 세상과는 휘둘려 살기가 싫어서 말이다.
고집스럽게 우리의 옛것을 재현하려고 가마를 묻은 게 1974년 “새등이요”이다. 민예사 시절 상업적 목적으로 일본을 가게 되었는데 그때 처음 도쿄 박물관에서 눈을 번쩍 뜨이게 한 막사발, 거기에는 분명 국보고려정호다완(國寶高麗井戶茶碗)이라는 명패가 붙어 있었다는 사실이었다. 왜 조선의 그릇이 일본의 국보가 되어야만 했는가 말이다. 막사발은 그냥 단순하고 질박한 사발인데. 정호다완이 다도에 쓰이는 그릇이라는 사실을 안 후로 다도에 대한 관심에 빠져 버렸다. 다도를 배우지 않을 수 없었다. 하지만 다도의 기본 철학은 초전, 사범, 오전의 세단계로 나누어 실행도의 룰을 가르치고 시험을 치르게 하는 일종의 자격시험에 그치는 한계가 있었다. 그래서 다도에 대한 철학을 깨닫기 위해서는 다도보다는 사발에 대한 연구가 더 필요하다고 생각했다. 그것은 일인일심일작의 정신이었다. 다도라는 말은 우리나라가 차 문화의 근본인데도 불구하고 일본이 그것을 받아들여 처음 사용한 말이라고 한다. 흔히 차를 마시고 싶을 때 마시는 차를 음다(飮茶)라고 한다. 다례(茶禮)는 음다를 행할 때 예를 갖추는 것이다. 도는 우주세계의 원리가 태극세계, 삼성세계, 자연세계, 생활세계가 하나로 엮어지는 흐름을 말한다. 도는 우주원리에서 생성된 사물이 다시 우주원리로 돌아가는 흐름의 연결이다. 도는 어느 한곳에 치우침이 없는 중용이다. 우주의 원리의 흐름을 도라고 한다면 이 도를 생활 세계에서는 법도라고 한다. 사람들이 생활 속에서 법도만 잘 지키면 그것이 곧 도에 이르는 길이다, 라고 생각하며 조선조 막사발이 그토록 중요하다면 그 깊은 뜻을 깨닫기 위서 직접 빚어 보는 방법 밖에 없다고 생각했다.
흙의 중요성을 인식하고 온종일 씨름 하다 보면 시간 가는 줄 몰랐기에 시장을 간다거나 하는 일상이 비일상이 되어버리기 일쑤였다. 밖에 외출 시 외모에 신경을 쓰지 못한 관계로 주위 사람들에게 오해도 받고 피해도 주었던 날들도 기억에서 지울 수가 없다. 이러한 행색들이 결국엔 거창한 정호다완을 만드는데 쏟아온 정열의 흔적이 아니었겠는가? 반평생의 시간이 흘러갔고 그 훈장의 덕으로 정호다완의 정신을 탐. 진. 치라는 삼악을 극복하라는 뜻으로 정립하였다. 또한 정호다완은 12가지의 작품으로 1. 백공차완 2. 청공차완 3. 태리앙금차완 4. 덩어리차완 5. 발화성차완 6. 용영차완 7. 주취알차완 8. 암반암구차완 9. 구정차완 10. 석돌차완 11. 자연차완 12. 새등이차완 등의 다완을 완성하였다. 완성하기까지 돈뿐만 아니라 명예와 대인관계를 포기했으며 다완의 빛깔을 찾는 데는 태토의 중요성도 발견 하였다. 최 도공은 시인은 아니지만 가끔씩 가슴시린 시를 즉흥시로 쓰기를 좋아한다. 제목은 “대화”이다.
이것은 하나의 사발
둘레는 비틀고 일그러져도
오백년 풍진이 담겨 있는
하나의 투박한 사발
아픈 세월에 찍힌
찌들고 때 묻는 너의 모습
이 빠진 자국마다
군더더기 눈가림의 땜질
수없이 손에서 손으로
옮겨온 너
드디어 내 집에까지 찾아온
기막힌 이 인연이여
이제 때를 씻고
군더더기를 벗기고
너 타고난 살결 위에
나는 눈으로 어루만진다
비틀고 일그러진
너의 꾸밈없는 모습
더불어 밤마다 나는
끝없는 이야기를 나눈다.
최 도공은 사람은 고독할수록 사물의 본질을 쉽게 찾는다고 생각한다. 여의주를 물고 하늘로 오르는 용은 지배자의 모습이자 정의의 표상인데 마치 너구리 가마의 형상이 그러하고, 붉게 달구어진 불기운을 볼 때 그러하고, 굴뚝의 연기가 용의 꼬리 같고, 가마가 이글이글 끓을 때의 기물이 여의주라 여기는 이유는 신적인 동물인데다 가마가 생명을 연명하는 음식을 담는 기물을 생산하기 때문에 그러하지 않을까? 후에 팔정도에 입각한 새등토속음식점을 개업하여 주위로부터 많은 찬사를 받았다. 최 도공 분명 디오니소스형리라고 말할 수 있을 것 같다. 태토를 선정하고 수비해서 성형을 할 때면 손과 마음, 두뇌 기술이 삼위일체가 되어야 하지 않는가? 성형의 기본은 토봉을 바로 세우는 것이 중요함을 알았는가 하면 잿물의 성분에 따라 작품의 성향이 달라짐을 알았다. 가마에 불을 때면서 불의 중요성과 청자와 분청사기와 백자의 산화염과 환원염의 조정방법과 다완 굽의 모양에 따라 다완 이름이 달라지는 것과 자연의 공기와 도공의 솜씨에 따라 작품이 다르다는 점을 터득했다.
가마는 어머니의 자궁이다.
도공의 마음은 본심본성이고
불을 땔 때는 신에게 기도하는 것처럼 하라.
그리고 오로지 외로움과 기다림이다.
최 도공이 서산대사의 시 읊조린다.
일만 나라 서울도 개미가 성을 쌓는 것
일천 집 영웅호걸 촛 벌레 같으니
무한한 솔바람 곡조 다시 멋지거니
창밖에 비친 달빛 베개 위에 머무른다.
가마 어미가 자식을 잉태하는 시간.
대작은 10일, 중작은 5일, 소작은 3일간 공이 필요하다.
인간은 늙으면 늙을수록 추해진다
기물은 오래되면 될수록 가치와 미감을 준다.
못생긴 기물도 생명이니 자식처럼 사랑해라.
그리고 올바른 사기장의 쓰임새 찾아라.
운명이 가혹하면 가혹할수록 인간은 강해진다. 또한 한편으로는 정신적인 고결함과 우월성을 지닌 채 조금도 비껴 나가지 않는 삶에 대한 정직성을 갖추고서 자신만의 독특한 색깔을 지닌 개성과 인간성이 돋보인다. 고운 빛깔의 전통도자기 재현을 위하여 6년 만에 지핀 가마에서 꺼낸 작품 중에서 마음에 든 그릇이 나오지 않았다면 가마를 헐고 새 가마를 묻는다. 그리고 천신만고 끝에 불을 때고 가마를 열자 빛깔이 좋은 작품이 탄생하니 흙에 대한 본심본성을 찾아가는 과정을 설명할 수 있게 되었다. 그러자 도자기 애호가들이 감탄사를 자아냈고 그릇들을 하나하나 개성에 맞게 손질을 하고 나니 몸에 이상기운이 생기고 또다시 병마와 싸워야 하는 신세가 되었다.
최 도공은 깨달았다. 모든 생명의 원천과 소생은 우주만물의 4대 요소인 지, 수, 화, 풍과 깊은 연관이 있고 사발의 생성원리에서 우주의 생성원리가 연결될 수 있음을. 그래서 황토방을 택했고 그곳에서 전신에 퍼진 암을 황토방에 의지했다. 그리고 드디어 목숨을 건졌다. 황토 굴에 불을 지피고 약쑥을 깔고 누웠다. 바닥의 온도는 110도에서 120도 사이에다가, 실내온도는 28도에서 32도 정도였다. 몸에서 땀이 비 오듯 했다. 여기 있어도 죽고 밖에 나가도 죽을 운명이라면 차라리 여기서 죽을 테니 내가 죽거든 그대로 묻어 달라는 유언까지 했다. 20일간을 버티면서 쑥뜸으로 살이 타고 황토방에서 몸은 도자기와 다를 바 없음을 느꼈다. 죽음의 그림자는 사라지고 들 차회 행사도 다니면서 생활의 리듬도 찾았다. 하지만 과하게 활동하여 재발의 기운이 있었지만 다시 치료 하면서 책도 집필하고 구정사발도 빚고, 황토의 오묘함과 신비함도 체험한 셈이다. 황토는 생명체를 살리는 효능이 있다. 오물의 악취를 제거하고 썩은 물도 정화하는 힘을 말이다. 지상 70센티미터 아래의 황토를 퍼다가 약 4배의 약수에 풀어놓아 휘저은 뒤 가라앉혀 놓고 마셨던 지장수는 암과 폐병을 치유하는 힘이 있었다. 병균은 죽이지 못하지만 성(性)의 역기를 사라지게 하는 특효가 있음을 알게 되었다. 황토방의 무로 개방과 강의도 하게 되는 등등 몸이 어느 정도 완쾌된 후 정호다완 재현에 다시 박차를 가하였다. 그러다 보니 이번에는 경제적인 문제로 힘들었지만 국내 수요보다는 일본 사람이 작품을 사가는 일들이 벌어졌는데 특히 요코하마의 오가와(小川)씨의 도움을 많이 받았다.
최 도공께서는『막사발에 목숨을 쏟아놓고』 라는 책에서 토해낸 글을 읽어보면 파란만장한 아픔과 역경과 싸웠는가 하면 눈물겨운 인생여행의 시작에서 조금도 흔들리지 않았음을 엿볼 수 있다. 인생을 뭔가에 목표를 두고 살아왔고 앞으로도 살아갈 것이다. 민예사 시절과 도자기를 통해서 많은 지인과 교류를 할 수 있었다. 그 중에서도 살아있는 신라인 윤경렬님, 화가 이당 김은호, 일본의 와비차전승과 다도에 쓰이는 향합 조각가 고모리 슈운 선생, 도쿄 부관장 하야시야 세이조 선생이시다.
일본 두 분은 다문화에 식견이 많은 분
우리문화 원형을 찾으려고 노력할 때
우리문화 정체성에 대해 함께 고민하면서 큰 도움을 받았다.
한국의 선은 둥근 모양이며 직선이 아니며
20년이라는 긴 세월 격려하고 다완 평가를 해주고
일본의 인간 국보 도공 즈까모도 가이시
그는 나의 작품을 보고서 이런 말을 던졌다.
“나는 한국에서 도자기의 맥이 끊긴 줄 알았는데 비로소 당신으로 하여금 되살아나고 있군요.” 경주 토함산과 석굴암 불상의 기품이 넘치는 모습, 본존 주변의 벽이나 좌우의 석상이 따뜻한 미소를 머금고 자비롭게 구원하시는 것.
아름다운 가을
청명한 하늘과 흰 구름이 있고
온갖 꽃들의 선명한 빛깔
무궁화가 나라꽃이 된 곳
경주 감은사의 삼층탑의 은은한 느낌과 아름다움은 교토의 부처에서 볼 수 없는 조용한 기품이 배어 있다
순간순간 소중히 살펴
한순간도 훌륭한 생각을 하시는 최 선생은 참 귀하신 분
삶이 모든 것을 깨닫지 못하고
우왕좌왕 해서는 안 된다는 생각입니다.
과연 도공이란 누구인가? 도공으로서 종종 제기하는 자문일 것이다. 도공은 누구인가를 해명하는 분석과 작품의 완성도를 제시하면서 도공으로서 사명감을 갖는 것이다. 실패를 거듭하면 할수록 오직 한마음으로 한 작품을 완성하는데 최선을 다 해야 된다는 철학을 갖고 어떠한 고난도 이겨내려고 노력해야 한다. 공심공력(公心)에 대한 깨우침, 무심(無心) 상태 에서의 가능성, 물과 불과 흙과 일치되는 조화를 터득한다. 그런 다음 프로정신에 입각한 전통도자기에 대한 재현과 전통을 근거로 한 현대적인 도자기를 만들어 세계적인 예술적 가치를 드높여야 한다고 생각한다.
진정한 차인은 누구란 말인가? 다도에서 도는 우주의 원리의 흐름을 뜻하는 것이요, 차는 인간의 오감을 즐겁게 해준다고 본다. 기(氣), 향(香), 미(味), 미(美), 촉(觸), 법(法)이라고 했던가? 요즈음엔 유럽핵입자물리연구소(cern)에서 힉스이론이 나오고 있다. 이 이론은 다른 기본 입자들에 질량을 부여한다고 하는 이론상의 입자를 해석하는 것으로 보인다. 신의 입자니, 질량입자니, 수줍은 입자니, 사라진 입자니 등등이라 하는데 생성과 동시에 사라지는 입자라는 말이다. 16개 입자로 구성되어 있고 표준모형이라고도 하는데 물질세계의 삼라만상을 설명할 수 있다는 이론이다. 그러고 보면 아무튼 인류 태초에 이 우주는 자연의 섭리에 의하여 각자의 핵의 구성과입자로 하나의 생명체로 태어난 것으로 추측된다.
우리나라에서 차 문화에 대한 기록은 신라시대에 중국차의 영향을 받아 충담사에 의해 활성화 되었다. 화랑도들이 차를 즐겨 마셨고 고려시대에 와서는 일반인도 차를 즐겨 마셨으며 다례제도가 생기면서 민족의식과 생활에 깊은 영향이 미쳤다고 한다. 차 문화에서의 다례는 조선말기 다성(茶聖)이라 불리는 초의 선사와 다산 정약용, 추사 김정희 선생의 공적에 빚진 바가 크다. 오죽하면 차 문화 세계에서 불러 칭송하랴.
최 도공께서 주신 책 중에 이런 글귀를 읽을 수 있었다. 차도이야기를 하기 전에 먼저 차도에 대한 용어부터 정립해야 한다고 말이다. 차도는 단순히 차를 마시는 것에 국한되는 것이 아니다. 우주의 원리로부터 태극 세계를 거쳐 자연세계, 생활세계 이르는 과정이 한 줄기로 이어지는 것을 도(道)라고 하고, 그것을 찻상차림에 옮겨 놓은 것이 우리나라의 차도이다, 라는 과거 법정스님의 글 속에는 자연가치의 소중함과 무욕세계의 소박한 삶을 말한다. 법정 스님이 자신의 인생을 살아가는데 있어서 깊은 성찰을 기록하셨다면, 최 도공은 차와 도자기를 통해서 인생을 사는 법을 전하려는 취지가 엿보인다. 그러므로 차도에는 중용의 도를 함축하고 있으며, 흙으로부터 시작하여 옥(玉)이 되기까지의 과정이 우주원리의 흐름과 같은 찻 사발의 내력에 함축되어 있다. 일본사람들은 뒤늦게 차 문화를 수입해서 그들만의 고유문화로 정착함과 동시에 민족적 성격을 강화시키는 도구로 만들어 그들만의 차별화된 정신문화로 오랜 세월 동안 발전시켜 왔다. 반면 우리문화에 있어서는 여전히 인식 부족과 철학이 미약하고 장인정신의 밥사발의 철학을 알지 못해 한스럽다. 먼저 태어나고 먼저 신분이 상승했다고 다 인생의 선배가 되는 건 아니다. 시대적인 상황과 생활, 올바른 환경에 대한 이해의 필요성을 느끼지 못하면 어린아이와 같은 얕은 문화의 저변에 머물게 된다. 우리의 우둔함에 늘 깨어 있어야 하며 부끄러워야 한다.
도공으로서 생각하고 후학들에게 전하고 싶은 이야기는 뭘까? 자연이라는 섭리를 가까이 하고 본심본성을 가지면 문제가 생길 게 없음을 깨우쳐 주고, 도자기라는 숨결에 배어 있는 깊은 철학을 이해시키고, 전통을 계승함과 동시에 후손들에게 민족적인 정신을 전달하여야 한다. 그리고 이를 세계전시를 통해서 가장 “한국적인 것이 가장 세계적” 이라는 것을 보여줌과 동시에 우리민족문화에 대한 긍지와 자부심을 심어주어야 할 것이다.
차인으로서 생각은 어떠할까?
한국 차례가 아닌 차도가 가야할 올바른 길을 정립하려면 어떠한 노력이 있어야 하는가가 화두이다.
어느 단체나-. 명예욕과 물욕보다는 올바른 의식세계가 필요하다. 모든 인간은 혼자이다. 그러나 혼자만의 우주는 아니다. 그 어떤 것을 가진 인간도 죽음 앞에선 혼자이다. 혼자가 된 인간은 지난 과거를 떠올리거나 현재의 나를 헤아리는 법을 배우고 우주의 혼연일체가 된 상대방의 배려가 필요함을 알아야 한다. 자아성찰로 시간을 흘려보내야 한다. 황혼기를 향해 달려가고 있고 그 연령이 아니더라도 삶의 공허함과 고독감을 맛보게 된다. 자신만의 욕망충족을 위하는 삶보다는 모두를 위한 삶이 필요하다.
solkwahak@hanmail.net
*필자/김재광. 출판인. 솔과 학 대표. 칼럼니스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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