第 十九 章 五雄의 歎息
일검쌍탈진신주 사여안은 농남(隴南) 땅으로 가서 사여명을 찾아보았지만 그것은 종시 허사에 그쳤다. 그것은 사여명과 요원이 일찍이 감숙(甘肅)을 떠난 뒤였던 때문이었다.
사철의 변화란 막을 수 없는 것인가?
이제부터는 갈수록 밤 시간이 짧아지기만 한다.
어제 밤, 그녀들은 속이 텅 빈 큰 고목나무 속에 숨어서 하루 밤을 지냈다. 이 근처에는 인가라고는 물론 찾아 볼 수가 없다. 다만 반쯤 무너진 고묘(古廟) 하나가 눈에 띌 뿐이었다.
허나 이 무너진 빈 사당은 왜 그런지 아가씨들의 발길을 끌지 못했다. 사당 속에서는 금시에 도깨비라도 나올 듯 아가씨들의 공포만을 자아낼 뿐이었다.
그리하여 그녀들은 차라리 이 큰 나무등걸 속에서 자기로 했던 것이다.
그러나 좀처럼 두 여인은 잠이 들지 않는다.
시간이 얼마나 흘렀을까? 요원은 살며시 몸을 비비고 일어나 보았다. 그녀는 두 눈을 뜨고 동구(洞口) 밖을 내다보았다. 동구 밖은 죽은 듯 고요한데 하늘과 땅, 그리고 그 사이에 있는 삼라만상(森羅萬象)은 모두 다 검은 빛 그것뿐이었다.
그러나 오랫동안 유랑(流浪)의 길을 떠돌던 경험으로 보아서 동편이 장차 밝아올 것을 알 수가 있었다.
요원은 다시 몸을 일으켰다. 그는 곤하게 잠들어 있는 사여명의 얼굴을 들여다본다.
활처럼 반쯤 꼬부라진 눈매가 한층 더 아름다운 곡선을 이루고 있다.
요원은 참을 수 없다는 듯이 몸을 꼬부려 사여명의 두 볼에 가볍게 입술을 대었다.
그리고 나서 몸을 일으켜 나무 밖으로 나왔다.
(이디 가서 세수물을 좀 떠 와야 할 텐데. 언니는 항상 내가 아무 것도 모르는 줄 안단 말야.)
몇 걸음 밖으로 발을 옮기면서 바라보니 저 건너편 파묘(破廟)가 똑바로 눈에 띈다.
벌써 새벽빛이 퍼지기 시작한 때라 간밤에 그렇게 무섭게만 보이던 파묘도 지금은 그 전모(全貌)가 눈앞에 들어나고 보니 그다지 험한 모습만은 아니다.
『간밤엔 그토록 처참하게만 보이더니 그렇지도 않은 걸 가지고 공연히 그랬구나. 저기서 잤더라면 더 좀 편했을 것을――』
이렇게 중얼거리면서 문득
(옳지. 저 사당에 가면 필시 우물이 있을게다. 내 가서 한 그릇 떠 가지고 오리라.)
생각하고 아가씨는 발걸음을 옮겨 사당을 향했다.
새벽바람은 한줄기 싸늘한 기운을 가져다가 아가씨의 몸에 끼얹어준다. 흰 치마가 바람에 펄럭일 때 마치 그것은 꽃잎이 휘날리는 한 개 선자(仙子)와도 같다.
(고묘(古廟)는 비록 한쪽 담이 허물어졌지만 그런대로 대문이 달려 있는데 아마 자물쇠를 걸어놓지는 않았으리라.)
요원은 이렇게 생각하고 대문에 손을 대고 가볍게 밀어 보았다. 검정칠이 반이나 벗어진 대문이 삐걱 소리를 내고 열리자 그녀는 마당을 한 바퀴 둘러보고 나서 조심조심 사당 안으로 들어섰다.
대문은 오랫동안 쓰지 않았던 탓인지 다시 한 번 삐꺽 소리를 내고 닫혀버린다. 담담한 새벽빛이 비치는 속에 요원이 눈을 들어 일그러진 사당을 쳐다보니 거기에는 거미줄과 먼지만이 천장에 가득할 뿐, 몇십 년 동안이나 사람의 발자취가 지난 것 같지 않다.
요원이 다시 오른쪽을 향해서 발을 옮겼을 때 그의 어린 마음을 깜짝 놀라게 해주는 것이 있었다.
그것은 원래 오른쪽 캄캄한 마루 위에 한 개 검은 몇 사람의 그림자가 어렴풋이 움직이고 있기 때문이었다. 그는 깜짝 놀라 두 걸음을 뒤로 물러섰다.
그러나 그 사람의 그림자는 갑자기 조금 움직여 보이더니 한 마디 침중한 신음하는 소리가 들려온다. 이것은 아마 요원의 모습을 보고 그 역시 놀라서 하는 소리일 것이다.
비록 요원이 아무리 담대한 사람이라도 본래부터 몹시 공포에 쌓였던 터이고 보니 이때에 이르러 그의 놀란 가슴을 진정하기엔 무척 힘이 들었다.
그는 간신히 정신을 진정하여 가지고 그 움직이는 그림자를 자세히 살펴보았다.
캄캄한 사당 저편 마루 위에 사람 하나가 무릎을 도사리고 앉았는데 마음대로 몸을 움직이지 못하고 꿈틀거리기만 하는 것으로 보아 필시 심한 상처를 입은 사람이 분명하다.
요원은 천성이 풍부한 감정을 가진 여자다. 이 모습을 보자 이제는 불현 듯이 그를 동정하는 마음이 생겼다.
그는 마음을 도사려 먹고 그 사람 옆으로 가까이 가서 정체를 살펴보기로 했다.
도포를 입은 몸에 수염이 백설 같은 것을 보아 그 사람은 한 늙은 도사임에 분명하다.
이때 그 사람의 이마 위에는 무거운 이슬이 맺히기 시작하더니 이것이 갈수록 커지면서 연기 같은 증기가 떠오르고 있다. 요원이 이 모양을 보고 그는 분명 공력이 높은 도사일 것이라 생각하니 이 기회에 무술의 고수인 대가(大家)를 만났는지도 몰라 마음속으로 감복하기를 마지않는다.
그러나 이때 갑자기 그 노인의 이마에서 일어나는 증기(蒸氣)가 걷히면서 노인은 긴 목소리로 외마디 탄식을 하고나서 조그만 음성으로 말한다.
『내가 여기에 와서 목숨이 다할 줄이야――』
그 목소리는 쇠약할 대로 쇠약한 음성이라서 옆에 있는 사람도 알아들을 수 없으리만치 연약했으나 워낙 공력이 높은 사람이고 보니 뱃속에서 나오는 소리가 힘이 남아 있었고 더욱이 요원의 총명은 남에게 비교할 바 되지 않았기에 그 말뜻을 알아들을 수가 있었다.
요원은 속으로 가만히 생각해 본다.
『보아하니 저 도사는 필시 무술을 연공(連功)하다가 잘못된 사람이 분명하구나. 그러나 이제 저 사람의 공력이란 실로 범인들의 실력을 초월하여 바야흐로 성(聖)의 지경에 들어간 순간인데 마치 아름다운 꽃이 하루아침 이슬에 지듯이 저렇게 병이 들었구나.』
이때 노도사는 다시 한 번 길게 한숨을 내 쉰다.
요원이 한 걸음 더 가까이 다가서서 새벽빛 속에 그 노인의 면목을 자세히 살펴보니 하얀 터럭 속에 일종의 누를 수 없는 늠름한 기상이 서려 있었다.
요원은 다시금 노도사의 신상에 대해서 말할 수 없는 동정과 숭배하고 싶은 마음이 생기는 것을 억제하지 못하여 두렵던 마음을 일체 잊어버리고 그에게 물어본다.
『도장께서는 무술을 연공하시다가 병이 드셨나요?』
이 말을 듣자 노도사의 얼굴이 갑자기 하얗게 변하더니 두 눈을 깜박이고 아무런 대답이 없다.
그러나 요원은 벌써 그 노인의 눈이
『그렇다.』
는 뜻을 자기에게 호소하는 줄을 알았다.
또 그 노인의 눈동자는 이미 시력이 쇠약해져서 분명히 물건을 볼 수도 없는 것을 알았다.
『도장(道長)께서는 혹시 저 같은 만배(晩輩)의 도움이 필요치 않으십니까?
하고 요원은 물어본다.
그러나 노도사는 다만 입속으로 탄식하였고 역시 조그만 목소리로
『너는 빨리 이곳을 떠나 가거라. 너는 도저히 나를 도울 수 없을 것이니 빨리 가거라. 여기 있다가는 반드시 두려운 일이 생길 것이다. 그러나 너, 너는 참으로 좋은 계집애로구나.』
요원은 이 노도사를 평생에 처음 만나 보았다. 그런데 왜 그의 마음속에는 알 수 없는 일종의 친밀한 감정이 샘솟는 것일까.
저 노도사가
『너는 참 좋은 계집애로구나.』
하고 말을 할 때 요원의 심중에는 자기 조부(祖父)가 자기에게 대해서 하는 말과 똑같은 사랑스럽고 믿음직한 느낌이 있음을 깨달았다.
요원은 낮은 목소리로 말한다.
『도장님, 저는 무슨 소린지 잘못 알아듣겠어요.』
노도사는 두 눈을 지그시 감고 그의 말을 듣고 나더니
『너는 어떻게 해서 내가 이렇게 되었는지를 알게 없다. 빈도(貧道)는 다만 몸을 회복시킬 일이 급할 뿐이다. 헌데 네가 나의 내력을 알자면 이것은 말이 길어지는구나.』
그러나 요원은 다시 묻는다.
『하지만 제가 지금 뵙기에 도장님의 공력은 참으로 헤아릴 수 없이 고명하신 것 같은데――』
노도사는 머리를 흔들면서
『너는 빨리 여길 떠나기나 해라. 네 어린 나이로서 빈도의 연공하다 잘못된 것까지 알아내는 것을 보니 너야말로 필시 높은 무술가의 제자가 분명하구나. 내 너에게 한 마디만 물어 보겠는데 네가 일신의 무공을 공부해 가지고 필경은 어디다 쓰려는 게냐?』
하고 묻는다.
요원은 도사가 갑자기 이런 말을 하는 것을 보고 한편 놀라고 이상하게 여겨지기 시작하였다.
도무지 노도사의 말은 이해할 수 없는 데가 있다. 그로서는 알아들을 수 없는 구절이 너무도 많은 것이다.
요원은 무슨 영문인지 알 수가 없어 머리를 설레설레 내둘렀다.
이때 노도사는 눈은 비록 감고 있으면서도 요원의 이런 모습을 역력히 알고 있는 눈치다. 그는 또 한 번 탄식하고 나서 나직한 목소리로 속삭인다.
『네가 여길 떠나간 뒤에라도 분명히 기억해 두라. 이 황량한 한 개 파묘(破廟) 속에 이같이 맑고 맑은 새벽빛 아래 아무런 친척도 아무런 친구도 없이, 천하에서 제일 무술이 높은 한 고수가 이러한 모습으로 아무런 소리도 없이 인간을 떠났다는 것을――』
요원은 도사의 이러한 말을 듣고 자기의 연약한 감정이 또 한 번 뛰놀기 시작한다. 그녀는 자기가 여기 온 뜻도 잊어버리고 다시 정중한 음성으로 도사에게 말한다.
『도장님, 도장님께서 별 말씀을 하셔도 저는 알고 있습니다. 도장님은 현기(玄機), 옥관(玉關), 홍환(虹丸)의 삼혈(三穴)을 터득하시고서 이제 진기(眞氣)에로 들어가시다가 잘못되신 것이지요. 도장님은 도리어 당신의 공력이 너무 큰 것을 두려워하여 오히려 잘못 되려 하신 것이지요?』
노도사는 요원의 이 말을 듣고 나자 십분 놀라고 이상히 여겨 한쪽 눈을 둥그렇게 뜨고 무엇인가 찾아보는 것 같더니 그의 목소리는 또 다시 낮아진다.
『너! 네가 이런 것까지 아는 것을 보니 너의 견식이야말로 정말 적지 않구나.』
요원은 본래 장대가에게서 이런 말을 들은 일이 있다.
『무술을 공부하는 사람이 진기를 터득하게 될 때가 가장 위험한 것이어서 만일 자신의 공력이 만족치 못하고서는 마침내 고통을 느끼거나 여기서 죽고 마는 것이다. 이렇기 때문에 공력을 쌓은 사람들도 이 진기에 이르러서는 몹시 주저하게 되는 것이라 한다.』
그러나 노도사는 한참 잠자코 있다가 갑자기 큰 소리로 외친다.
『너는 빨리 먼데로 가라.』
요원이 아무 대답도 하지 않고 있자니 노도사는 다시
『너, 나를 위하여 한 가지 일을 해주고 싶은가.』
요원은 고개를 끄덕이면서
『무슨 일이신지 도장께서 분부만 내리시옵소서. 도장의 병환을 고칠 방법이라도 있는 것입니까?』
애가 타서 물었으나 노도사는 고개를 내 저으면서
『그런 것이 아니다. 나는 살아날 방도가 없는 몸이란다. 다만 너에게 한 가지 일을 가르쳐 줄 것이 있어서 그러는 것이다.』
요원은 양미(兩眉)를 가볍게 찡그리면서 감히 다시 물어 보지 못하고 있노라니 도사의 낮은 목소리가 들려온다.
『벌써 십여 년 전 일이로구나. 그날 저녁 나는 강남의 양주(楊洲)성 밖에 있는 운가(鄆家)라는 부호의 집에서 쉬고 있었다. 밤중이 되자 졸지에 불이 일어나 걷잡을 수 없이 타오르고 있는 것이다. 내가 밖으로 뛰어 나가 불을 놓은 장본인을 알아보니 그 자는 어찌나 독한 사람인지 운가의 일족을 모조리 잡아 죽이고 하나도 남기지 않았단 말이야――』
하면서 숨을 내쉬고 나서 다시 말을 계속하려 한다.
요원은 생각해 본다. 캄캄한 밤중에 강도(强盜)가 나타나 불을 놓고 사람을 죽인다. 사람의 목에선 붉은 선혈이 점점이 흘러내리고――
요원은 부지중 온몸을 부르르 떨었다.
이때 노도사의 음성은 한결 더 낮아서 마치 모기소리만큼밖에 들려오지 않는다. 아마 그는 산공(散功)하여 목숨이 끊어질 시각이 박두(迫頭)해 오는 것이 아닌가. 그러나 그의 이야기는 들으면 들을수록 점점 신기한 데가 있었다. 요원은 자기도 모르는 사이에 노도사에게 바싹 다가서서 그의 가늘고도 청초(淸楚)한 목소리를 귀담아 듣고 있는 것이었다.
노도사는 말을 계속한다.
『네가 그놈을 잡으려고 쫓아 나갔을 때 한 사람이 온 몸에 검은 옷을 입은데다가 얼굴을 역시 검은 보로 가리고, 손에는 어린 아이 하나를 쥐고 큰 소리로 호통을 치는 것이 아니가. 빨리 말해봐. 네 누이동생은 어디가 있느냐 말이다. 이렇게 호통을 치지 않겠냐. 그러나 그 어린 아이는 내가 잠깐 보아도 크고 시원스런 눈동자와 불빛에 비치는 만만치 않는 얼굴을 보아 어딘지 모르게 사람을 누르는 늠연(凜然)한 기상이 있어 보였다. 아이는 날카로운 목소리로 외친다.
――네가 나를 죽인대도 나는 우리 누이 있는 곳을 대줄 수 없다――
검정 보를 뒤집어 쓴 사람은 어린 아이의 이 말을 듣더니 주먹으로 아이의 몸을 마구 때리는 것이다. 나는 생각해 보았다. 무림 중에서 쓰던 수법, 즉 사람의 뼈를 분지르고 심줄을 잘라 놓는 방법을 저런 어린아이에게 쓰다니―― 이런 꼴을 보고 있노라니 가슴에 치미는 화를 금할 수가 없다. 더욱이 내가 보기에 저 어린 아이는 실로 세상에 드물게 보는 기인(奇人)인 것 같은데――. 저로 하여금 땅바닥에 뒹굴어 입술에서 피가 흐르게 하다니――. 참으로 참을 수 없는 장면이었다.』
여기까지 듣고 있다가 이번에는 요원이 더 참을 수 없이 부르짖었다.
『도장(道長)! 도장은 왜 빨리 그 어린아이를 구해내지 않았지요?』
그러나 노도사는 탄식하는 것이다.
『왜 그대로 보고만 있었겠는가. 내가 뛰어 나가자 우선 한 손으로 그 아이를 빼앗으니 그 얼굴을 가린 사나이는 아직 내 얼굴을 보지 못한지라 갑자기 한 손바닥을 들어 내 등 뒤에 대고 한 번 힘껏 치는 것이다. 나도 한 손바닥을 들어 그 사람을 한 번 쳐서 세 발자국 물러서게 하고 나서 다시 딴 생각을 할 겨를이 없기에 어린애를 안은 채 그곳에서 뛰쳐나와 버렸던 것이다. 이래서 검은 보로 얼굴을 가린 그 사나이는 종시 내 얼굴을 보지 못한 채 헤어지고 말았던 것이다.』
요원이 급히 묻는다.
『그래서 그 아이는 어떻게 됐나요. 그곳을 도망쳐서 살아 나왔나요. 지금 어디 있나요.』
노도사는 나지막한 음성으로
『내가 그때 그 어린아이를 안고 일좌(一座) 산림 속으로 들어가 숨으려니 졸지에 한 떼 사람의 소리가 서쪽을 향해서 몰려오고 있었다. 나는 몸을 피하여 나무 위에 올라 앉아 그들의 하는 거동을 낱낱이 살펴보았다. 그들 중에는 역시 검은 보로 얼굴을 가린 사나이가 어느 늙은 사람과 대화를 하는 것이었다.』
늙은이가 먼저
『너는 원수 갚는 일을 이제 끝마쳤는가?』
하고 물으니 검은 몽면(蒙面)의 사나이가 대답한다.
『사부님! 제가 마악 복수를 하려는 찰나에 괴상한 사람 하나를 만나서 일이 낭패되었습니다. 그 사람이 운가의 꼬맹이를 구해가지고 도망갔습니다.』
노인은 다시 묻는다.
『그게 웬 사람이냐. 너는 그 사람의 얼굴을 아는가?』
몽면의 사나이가 다시 대답한다.
『그 사람은 저에게 계속 등을 지고 있었기 때문에 한 번도 그의 얼굴을 보지 못했습니다. 다만 그 사람은 공력이 실지로 보통이 지난 고명한 도사였습니다.』
노인은 속으로 신음하듯이 한숨을 쉬고 다시 말했다.
『허허! 그런 일이 있었던가?』
몽면의 사나이가 무엇인가 생각하더니 갑자기 노인 앞에 머리를 숙이고 말했다.
『사부님! 저에게 백설주사십이식(白雪朱砂十二式)을 언제 가르쳐 주시렵니까.』
노인은
『너는 급히도 서두르는구나. 반정(反正)을 일으킨 다음 해에 너의 대표들과 우리들 일파가 천하대전(天下大戰)에 참가할 때 내 반드시 너에게 전해주리라.』
몽면의 사나이는 또 말했다.
『사부님이 그렇게 말씀하시니 저는 무엇이라 감격의 말씀을 드릴지 모르겠습니다.』
요원은 여기까지 들었으나 그다지 자기에게 긴요한 이야기가 아니었다. 다만 그 말속에는 문득 음음(陰陰)하고 삼삼(森森)한 살기가 서리어 있어 가슴이 싸늘해지고 또 두려운 마음이 남을 어찌 할 수 없다. 자기도 모르는 사이에 노도사의 곁으로 바짝 다가서서 그의 옷소매를 가볍게 쥐어 본다.
노도사는 다시 가느다란 목소리로 말한다.
『나도 역시 그때 반정(反正) 뒤 해에 있을 각파의 결투에 참가하게 되어 있던 터라, 마음속으로 생각하기를 저 사람도 어느 한 파의 사람인가 했더니 졸지에 이 노인의 음성을 듣고 보니 몹시 고괴(古怪)한 데가 있는 지라, 이는 필시 우리네와 상관없는 딴 파계(派系)인가 보다 하고 생각했었다.』
그 노인은 다시
『우리는 이제 그만 앞으로 가자.』
하고 말했으나 이 말이 끝나기도 전에 갑자기 복면의 사나이는 등 뒤에서 한 칼을 빼어 노인의 심장을 향하여 한 번 찌르자 노인은 비참한 목소리로 겨우
『아! 네가!』
한 마디 지르고는 아무 말도 못한다. 복면의 사나이는 다시 두 손바닥으로 노인을 치고 나서 몸을 뒤로 물러서니 노인도 두 손으로 일진(一陣)을 어지러이 가로쳤으나 이내 아무런 동작도 맘대로 되지 않는지 금시에 땅 위에 쓰러지고 말았다.
듣고 있던 요원의 얼굴빛은 새파랗게 변하여 아무 말도 없이 노도사의 얼굴만 쳐다본다.
노도사는 다시 말을 계속한다.
『내가 즉시 뛰어 내려가 노인을 구하려 했지만 그 때 내 품속에 있던 어린애가 졸지에 혼수상태에 있어서――』
요원은 본래 이 어린아이에 대해서 특별한 관심이 있던 터라
『어머나, 이를 어째!』
하고 소리를 질렀다.
그러나 노도사는
『나는 황급해서 어린애의 동정을 살피노라니 금시에 어린애는 유유(幽幽)히 깨어나 아무런 일도 없는 것 같았다. 다시 복면의 사나이에게 관심을 돌려 그의 행동을 살피고 있노라니 그는 쓰러진 노인의 몸에서 비밀히 감추어 있는 책 몇 권을 꺼내 자기 품에 간직하고 나서
『늙은이가 죽지도 않고 이런 걸 가지고 다녀. 쳇――』
하고 냉소하는 것이다.
더 참을 수 없이 내가 나무에서 뛰어 내렸을 때는 벌써 복면의 사나이는 그림자도 없이 사라져버린 뒤였다.
『그 사람의 얼굴은 내 비록 보지는 못했지만 그의 몸 놀리는 동작은 내가 역력히 보아 두었던 터로 언제 만나도 그 사람을 찾아낼 수 있었는데 마침 며칠 전에 나는 또 그 사람을 발견하고 말았다.』
요원은 두 눈을 커다랗게 뜨고 있노라니 노도사는 졸지에 숨이 가빠지면서 급한 목소리로 말한다.
『내 그 얘기를 빨리 해야겠구나. 그 사람은 검은 보로 얼굴을 가렸기 때문에 내가 그 당시에는 못 알아봤지만 현재는 내가 그 사람을 기억할 수가 있다. 그 사람은 분명 조금도 틀림없는 그 흉악한 놈――』
요원은 낙심하고 그의 손등을 만져보니 한 조각 얼음과도 같이 싸늘하다. 어린 마음은 다시 어지럽기 한량없었다.
이 때 노도사는 쇠잔한 기운이 마치 한 가닥 실오리만큼 약해지면서 겨우 입안으로 중얼거리니 그 말소리를 요원도 알아듣기가 힘들다.
『너는 빨리 가서 그 아이를 찾아라. 그래서 좀 빨리 전해다오. 그 때 운가의 집에 불을 놓은 놈은 늘 얼굴에 검은 보를 쓴 복면의 사나이다. 그 사람은 현재 공력이 얼마나 진보되었는지 몰라. 그 사람은 지금 천하 각파의 명가(名家)들보다도 앞섰을 것이다. 허나 그런 것을 따질 것은 없다. 그는 복파보(伏波堡)――』
요원은 복파보라는 말을 한 번 듣더니 온몸을 한 번 부르르 떨면서 참을 수 없다는 듯이 부르짖었다.
『복파보라구요?』
노도사는 갑자기 온 골격에서 일진의 괴상한 소리가 나더니 급한 목소리로
『너는 빨리 가라. 빨리 가서 그에게 내 말을 전해라.』
요원도 다급해져서
『누구한테 전하란 말입니까. 누구한테요?』
하고 다그쳐 물으니 노도사는 온 몸에 있는 힘을 다하여 소리를 지른다.
『운학(鄆鶴)이 말이다. 운학!』
요원의 몸 전신에 마치 한 가닥 전류(電流)라도 지나가는 듯, 정신이 번쩍 나면서 자기도 모르게 외마디 소리를 버럭 질렀다.
『운학이라구요?』
그러는 요원의 머릿속에는 재빨리 떠오르는 몇 가지 사실이 있었다.
(옳지! 이 사람은 청목도장(青木道長)이로구나. 천하제일의 청목도장이로구나)
요원은 다시 더 생각할 필요가 없다. 전신의 진력을 다하여 청목도장에게 현기(玄機), 옥관(玉關), 홍환(虹丸)의 삼대요혈을 풀어줄 뿐이었다.
황산(黃山) 마루턱에는 괴이한 바위들이 여기 저기 늘어 서 있다.
마치 하늘의 별이나 바둑 판 위의 바둑처럼 널려 있는 이들 큰 바위 사이에는 한 그루 한 그루 무성한 나무들이 겨울에도 청청한 채 자라나고 있는 것이다.
노인 한 사람이 갑자기 커다란 소나무 위에서 뛰어 내렸다.
그는 휘파람을 구성지게 불면서 땅 위에다 한 손으로는 동그라미를 그리고 또 한 손으로는 네모꼴을 그리고 있다. 그는 필시 자기가 여기 나타난 표적을 남기려는 것인지?
이때 저쪽 큰 바위 후면에서 또 한 사람 노인이 나타나더니 먼저 사람을 보고 웃으면서 말을 건넨다.
『여! 노사(老四)! 자네는 한 걸음 늦었네그려! 내가 노이(老二)가 되는 거지?』
노사는 한 대 얻어맞은 것 같은 심정이다. 뒤에 나타난 노오(老五)를 보고 바쁘게 변명한다.
『자네는 모르는 소리. 나는 산 위에서 벌써 사흘을 묵고 있었는데 자네가 이제 겨우 나타났으니 순서가 어찌 됐는가?』
노오는 그의 말을 듣자 늙은 얼굴이 불그레해지면서
『쓸데없는 소리 하지 말게. 사흘을 묵었는지, 닷새를 잤는지, 내가 알게 무어란 말인가? 이런 거짓말은 통과가 되지 않는 법이야. 분명히 자네에게 말해 두지만 내 이제 구십이 넘는 나이에 한 번 우쭐하는 모습을 보여줄까?』
두 사람은 모두 불그레한 얼굴에 기다란 수염이 휘날리고 있다. 그들이 서로 말다툼을 하고 있을 무렵 저편 커다란 소나무 위에서 난데없는 웃음소리가 들려온다.
『무얼 가지고 다투는가? 노부는 여기 먼저 와 있었는데――』
노사는 깜짝 놀라면서
『아! 노대(老大)!』
노오도 노대의 음성을 알아듣고 깨닫는 바 있어 다시는 아무 말도 없이 실망한 표정으로 부지런히 신녀봉(信女峯)을 향해서 발을 옮겼다.
원래 이들 다섯 사람 영웅들이 보물을 얻은 이후에 본래의 지점으로 돌아올 것을 약속했었는데 이들 두 사람은 서로 다투느라고 가장 자기들에게 중요한 한 가지 일을 잊어버리고 있었던 것이다.
노사는 가장 총명한 사람이라, 곧 노오의 뒤를 따라 발을 옮기지 않을 리가 있겠는가. 그는 있는 힘을 다하여 노오를 따라가고 있었다.
이리하여 이들 세 사람은 마치 토끼가 뛰듯이 또는 소리개가 날듯이 빠르기가 유성(流星)과도 같이 자기들의 배운 공력을 다하여 앞을 다투어 이제 모두 신녀봉 마루턱에 각각 당도했다.
노사가 저편 커다란 바위 위에 발을 디디고 보니 이것은 바로 반년 전에 자기가 요원(姚畹)과 연귀(聯句)를 짓던 곳이었다.
이때 노대는 벌써 태산의 반석같이 편안한 자리에 앉아 있는지라 마음속으로 생각하기에 벌써 그에게 한 수 빼앗긴 셈이었다.
자기는 산 위에 와서 사흘씩이나 묶었으면서도 저 노대에게 기회를 주고 말았으니――
다시 저편을 보니 노오가 십여 보(步) 밖에 도착해 앉아 있다. 그의 모습을 보니 더 한층 불덩이가 치밀어 오른다. 내가 그렇듯 부지런히 왔는데도 그 결과는 겨우 노삼(老三)이 되고 저 노오가 노이(老二)로 변할 것을 생각하니 어찌 남의 비웃음을 거리지 아니하겠는가.
그는 맘속으로 한 가지 계교를 생각하고 큰 소리로 외친다.
『야아! 저기 뱀이 있다. 뱀이――』
이렇듯 떠들면서 그 자리에 앉지 못하고 앞으로 달려 도망한다.
원래 노오는 젊었을 때 뱀에게 물린 일이 있었기 때문에 보통 사람과 달리 뱀을 무서워하지 않을 뿐더러 도리어 뱀을 때려잡기를 좋아하는 성미다.
노오는 노사가 뒤에서 부르짖는 소리를 듣고 필시 커다란 뱀이 도사리고 있으리라 생각하고 머리를 돌이켜 뱀 있는 곳을 바라다보니 자연 다리가 허술해질 수밖에 없었다.
이때 그의 귓가에 졸지에 한 가닥 이상한 바람이 불어오더니 마치 호랑이가 우짖는 커다란 한 마디 소리가 들려온다.
사정이 급하게 됐다. 노오는 오른쪽 주먹으로 곧장 노사의 등을 쳤다.
그러나 한 가닥 권풍(拳風)은 다시금 노오의 앞으로 몰아닥치고 있으니 이 얼마나 놀라운 일인가.
이 노오는 본래 정령(精靈)의 화신이라 의회신통(意會神通)하는 경지에까지 도달한 처지였다.
노사는 생각하기에 노오가 벌써 죽었으리 했던 것인데 그는 아무렇지도 않다는 듯이 숨을 내쉬고 나서 양쪽 소매를 한꺼번에 흔들어 보인다.
이때 다만 들리더니 벽력 치는 소리, 땅 위에는 모래와 돌이 날으더니 바람 속에 휘감겨 하늘 높이 올라가 버리고 말았다.
노오는 그의 반격의 힘을 받고 보니 몸이 다시금 육중해 진다. 그러나 노사는 그 힘을 빌어서 앞으로 나가더니 지금은 벌써 바위 위에 올라 서 있는 것이다.
그들의 대세는 벌써 정해졌다. 노대는 소리 내어 웃으면서
『당초에 우리가 내기를 정할 때에 무슨 약속을 했지?』
두 사람은 다 같이 말한다.
『누가 먼저 보물을 얻어 가지고 본래의 장소로 돌아오던지 그 사람이 노대가 되기로 했지요.』
그러나 노오는 계속해서
『좋다. 그러면 그대가 노대가 되고 나는 두 계급을 올라서야 할 것이니 내가 노이(老二)가 되지.』
노사도 옆의 바윗돌을 힘껏 치면서 말한다.
『나는 한 계급 올라서 노삼(老三)이다.』
그러나 노대의 심중은 자못 불쾌한 눈치다.
노대는 소리 내어 웃으면서 말한다.
『그럼 그 보물은 어디 있지?』
노사는 보물이란 두 글자를 듣자 오른쪽 주먹으로 자기의 뒤통수를 한 번 치니 혓바닥을 빼물고 몹시 유쾌하지 못한 음성으로
『말하지 말라. 말하면 진기(眞氣)가 죽어버린다.』
이런 말을 하는 것으로 보아 거기에는 무한한 곡절이 서리어 있는 것 같다.
노오는 놀라서 묻는다.
『그래, 누구를 만났는가?』
노사는 마치 부끄럼을 당한 처녀 모양으로 머리를 수그리고 간신히 대답한다.
『별 것 아니야. 저 파고검객(破褲劍客)!』
노대와 노오는 이 말을 듣고 동시에 말한다.
『뭣이라고 파고검객?』
노사는 그들의 이렇듯 이상히 여기는 모습을 보고 빙그레 웃으면서
『그는 다름 아닌 서가(徐家)라는 죽일 놈의 늙은이야.』
이런 말을 하는 노사는 자기 자신이 벌써 늙어 있는 것을 전연 잊어버린 눈치다.
이 때 노오는 불현 듯 크게 깨닫는 바가 있어 부르짖는다.
『파죽검객(破竹劍客)!』
노대가 이 말을 듣더니 머리를 한 번 흔들자 그의 눈 위에서는 흰 눈썹이 어지러이 춤추고 있다.
노사는 웃음을 참을 수 없다는 듯이 노대를 쳐다보고 말한다.
『그전에 내 그의 옷자락을 찢은 일이 있지? 그러니 그 놈이 파고검객(破褲劍客)이 아니란 말인가?』
노오가 웃으면서 무릎을 치고 한 손바닥으로 큰 바위돌을 한 번 내리치니 그 바위 한 귀퉁이가 부서져 버린다.
노사는 웃음소리를 뚝 그치고 나더니 양양자득한 모습으로 말한다.
『내가 한 번 그와 만났을 적엔 큰 소리로 파고대협(破褲大俠)을 불렀더니 그의 개가 여동빈(呂洞賓)을 물고 또 거리로 나와서 어지럽게 뛰어다닐 줄 누가 알았나?』
노대는 웃으면서 말한다.
『그대는 너무 버티지 말게. 요컨대 내게는 쓸데없는 엄포가 필요치 않단 말이야.』
이번에는 노오가 말한다.
『저 서(徐)노두(老頭)야말로 형편없는 놈으로 가장 간사스런 인간이거든. 그 전진파의 하찮은 풋내기를 믿고 까불어 대는 모양인데, 그렇지 않았더라면 똥줄이나 쌌을 거야! 내 또 만나기만 해봐라!』
이 때 노사가 머리를 흔들면서 말한다.
『그렇지 않아! 그 늙은이가 쉽게 죽지는 않을 거야. 엔간한 놈이지. 나이 구십이 넘었는데도 말라빠진 머리에 그 정력이 말할 수 없이 좋으니. 그렇지만 내가 그 늙은이와 기련산(祈連山)에 갔을 적에도 그는 내 뒤만 따라다녔단 말야.』
노대는 그 사람이 반드시 대수롭지 않은 서가임을 알았다. 그 사람은 항상 남의 뒤만 따라 다니는――
『그 사람은 용피투(龍皮套)와 무슨 관계라도 있나?』
노사가 말한다.
『북해(北海) 용피투! 북해 용피투! 나는 그 사람의 꼬임에 한 번 넘어가서 북해까지 끌려간 일이 있지만 무슨 용피투가 있단 말인가? 용피투는커녕 우피포(牛皮袍)도 못 봤네. 하! 하!』
그리고 나서 노사는 다시 노오에게 반문한다.
『그대는 어떤가?』
노오는 얼굴빛을 금시에 변하면서
『나는 운수가 그대보다는 좋은 놈이야!』
노대는 자기 손에 영지초(靈芝草)를 갖지 못한 것을 생각하면서 말한다.
『그런데 그 백충주(百蟲珠)는 어데 있나?』
노오가 탄식하는 말투로 말한다.
『남쪽 땅에는 이런 벌레가 많은 데야. 적어도 백 가지 종류는 있지? 헌데 막상 백충주를 잡으려니 그게 없단 말야.』
노사가 이사하다는 듯이 말한다.
『그럴 리가 있는가? 그대들은 나보다 운수가 좋은 터에――』
노오가 웃으면서 대꾸를 한다.
『본래 이 백충주(百蟲珠)란 자웅(雌雄) 한 쌍이 있단 말야. 이것은 남쪽 땅에 있는 일종 기사(奇蛇)의 영주(靈珠)로 무술을 써서 만들어진 것이라는 거야. 그런데 이런 기사는 백년 만에나 한 번 볼지 말지 한 거란 말야. 또 이런 무술을 쓴대도 삼십 년 만에나 대공(大功)을 이룰 수 있다니 이제 만일 삼십 년이나 오십 년이 지나고 나면 나는 늙어 꼬부라질 테니 영주가 나타난들 무슨 소용이 있겠나?』
노대도 자기의 하얀 수염을 쓰다듬으면서 말한다.
『자네는 참 걱정도 많네. 영주(靈珠)만 생겨난다면 고마운 일이지.』
노오가 쓴 웃음을 지으면서 말한다.
『자네야말로 말도 많네. 그 보배는 참으로 신고(辛苦)를 들여 만드는 것으로 한 번 쓰려면 삼사일이나 운공(運功)을 해야 하는 것일세. 그러나 그것도 자웅 두 개를 나누어서 두 번에 쓰는데 나도 그것을 갖은 신고를 다 쏟은 뒤에야 부어(符語)를 겨우 풀었거든. 하지만 실제로 쓰자니 약(藥)이 되나? 잘 풀리지를 않는단 말야. 그 구슬을 얻어 온대도 쓸 줄은 모르는데 하차 딴 사람이 먼저 가져가게 하겠는가?』
노오는 어깨를 으싯거리며 말한다.
『그렇다면 우리는 그것을 심으면 되지 않겠나?』
노사가 마땅치 않은 듯이 말한다.
『자네는 소용없어! 딴 사람은 만들 줄 알아도 자네는 안 되지, 안 돼.』
이 말을 듣고 노오는 노해서 말한다.
『다른 사람들도 이십 년 동안 애를 써서 만들었다네! 그러나 또 고치는 약방문(藥方文)을 몰라서 그것을 못 가져갔네. 나는 이것을 오십 년이나 신고(辛苦)해서 구슬을 만들고서 늙은이들을 찾아 다녔다네.』
노대는 자신을 스스로 위안하면서 말한다.
『알았네. 그 백충주야말로 무슨 값이 나가는 건가? 우리들에겐 귀한 게 못 되어――』
노오가 탄식처럼 말한다.
『말하자면, 이것은 보통 때는 그리 가치가 있는 것이 아니야. 그러나 일단 시술(施術)을 하면 닷새 후라야 효험을 보지. 그리고 효험이 계속되는 시간은 사흘뿐이라네. 이때 시술을 받는 사람은 다시 공력이 좋아진다고 치지만 사람의 한 번 죽음은 면할 수 없는 거야. 또 시술하는 사람도 미리 무약(巫藥)을 먹어 두어야 아무 장애가 없는 거야.』
노대는 알아들었다는 듯이 한 마디 한다.
『이제부터는 우리들 다섯 사람이 멀리 떨어져 살아도 적들을 일망타진 할 수가 있겠군.』
노사도 말한다.
『노오가 있으니 두려울 것 없지. 그 사람은 남이 쓰던 폐주(廢珠)를 갖다가 올바른 구슬을 만들 수도 있으니.』
노오가 정색하고 말한다.
『그랬으면 얼마나 좋겠나? 그렇지 못하니 나는 노대가 되어볼 기회가 없단 말야.』
노대는 염불을 외우면서 말한다.
『나무아미타불――. 노승이 죽은 뒤에는 절대로 화장은 하지 말게. 나는 뜨거운 게 싫단 말야. 제일 좋기는 큰 바다 속에 가라앉아서 영생청량(永生淸凉)을 누리는 일이야.』
노오가 마음이 상해서 말한다.
『나는 죽은 뒤에 만화총중(萬花叢中)이나 명산대찰(名山大刹) 곁에 묻어 주어서 내생(來生)에 아름다운 낭자(娘子)로 태어났다가 오래 살 것도 없이 이십 세만 되어서 죽어갔으면 정말 좋겠네.』
그들 두 늙은이는 하나는 말하고 하나는 대답하여 서로 탄식하면서 한동안 이야기를 주고받는다.
노사는 자기는 가장 장수(長壽)할 것으로 자처하는지 태연히 크게 웃고 말한다.
『모든 운명은 제 몸 위에 매어 있는 것이지!』
그는 강개하고 격한 음성으로
『하! 하!』
하고 웃는다.
노대와 노오는 자기들의 조심을 기쁜 얼굴 표정으로 나타내 보인다. 졸지에 노대가 한 그루 고송(古松)을 가리키면서 큰 소리로 말한다.
『저 놈! 냉큼 내려오지 않구?』
이 말을 듣고 나무 위에서도 날카로운 음성으로 말한다.
『내려가지. 내려가.』
나무 위에서 얼굴이 모난 한 사나이가 조촐한 몸뚱이를 가지고 마치 나는 제비가 땅에 떨어지는 듯이 표표히 큰 돌 위에 우뚝 서더니 노대 풍륜(風倫) 앞에 나가서 국궁(鞠躬)하고 나서 말한다.
『노대님께 뵈옵니다.』
그러나 노대는 얼굴빛도 변하지 않고 날카로운 목소리로 말한다.
『젊은이는 지나치게 겸사하지 말고 저 쪽에 앉아 있게.』
노이(老二)는 빙그레 웃고 빈정대는 목소리가 화창하게 돌린다.
『인제 그만 그대가 제일인 체 하지 말고 노대의 보좌(寶座)는 나한테 양보하는 게 어때?』
노오도 그대로 있지 않고 손을 느려 말한다.
『그야 쉬운 일이지. 허지만 그대는 천년삼(千年蔘)을 캐 와야지?』
노이가 말한다.
『그야 당연한 일――.』
그는 말을 마치자 자기 품에서 한 개 손바닥만한 서피(犀皮) 함(含)을 꺼내더니 양쪽 끝을 쥐고 한 번 힘주니 그 함이 가운데가 쪼개지면서 그 속에서 한 뿌리 통령보삼(通靈寶蔘)이 나온다. 그 보삼은 수염과 눈썹이 의젓하게 생겼고 향내가 사방에 풍겨 졸지에 산속에는 보삼(寶蔘)의 빛으로 가득하다.
이것을 바라다보고 있던 세 사람은 자기들이 이루지 못한 일을 제일 못난 것 같은 노이가 성공한 것을 보고 제각기 불쾌했다. 더욱이 노대는 맘 속으로 분함을 참지 못하여 공연히 복파보에서 싸울 때 일까지 연상하면서 이마를 찌푸리고 있다.
노사는 속으로 중얼중얼 파죽검객을 욕하고 있다.
그러나 노오는 그 중에서 나이도 제일 젊고 영리하기도 제일인 터라, 한 손으로 그 보삼을 만져보면서 말한다.
『참말 노이는 두려운 존재란 말야. 보통 때도 그러했지만 우리보다 두뇌가 발달했단 말야. 그렇기 때문에 이 보삼을 얻은 것이 아니오?』
노사는 시무룩하게 말한다.
『내가 듣기에는 저 천년삼은 달 밝은 밤에 밖에 튀어 나와서 달을 보고 춤을 춘다고 했으니 어디 노이는 춤 한 번 추게 해 보지?』
노이는 오른손으로 연신 수염을 쓰다듬으면서 말한다.
『야! 그래도 자네들은 날 얕잡아보네그려. 나는 바보처럼 아무 데나 땅 속에서 캐가지고 온 게 아니란 말야.』
이때 노대가 손바닥을 치면서 웃고 말한다.
『그건 내 맘과 꼭 맞는 소릴세. 나는 저 사람이 천년삼(千年蔘)을 어디서 가져온지 알지.』
그러나 노이는 양양자득(洋洋自得)해서 말한다.
『그럴게 아니라, 우리 저 돌 위에 앉아서 이걸 좀 보세.』
말을 마치자, 두 사람이 보삼을 넣었던 함뚜껑을 보니 거기엔 ‘무당(武當)’이란 글자 두자가 써 있는 것이 아닌가?
노사가 이것을 보고 깨달았다는 듯이 말한다.
『옳지! 이건 남석노도(藍石老道)의 명근(命根)을 캐온 게 아닌가?』
노오도 웃으면서
『당년에 우리들 다섯 사람이 무당산(武當山)에서 전진파의 어린놈과 파죽검객을 끌어내어 싸웠을 때 만일 그런 생각을 했더라면 우리도 성공했을 텐데.』
노대는 눈을 내려 뜨고 무엇인가 생각하면서 말한다.
『남석노도(藍石老道)가 이 영약(靈藥)이 있는 것을 알고 백세 장수하려 했으면 왜 일찍이 도산(道山)으로 돌아가지 않았을까? 우리들 다섯 늙은이는 죽지 않고 살았지만 우리들의 견식(見識)으로서는 저 영약이 조그만치도 신령스러운 줄을 모르겠다는 걸세. 저것으로 죽을 사람이 산다는 건 도무지 알 수 없는 말이야.』
노오는 조용히 지난날의 일들을 더듬어 본다. 그는 두어 마디 속으로 웃고 나서 다시 길게 탄식의 한숨을 내 뿜더니 말한다.
『그렇지, 우리는 늙었어.』
노사는 그들의 심상해 하는 것을 바라보고 있다가 큰 소리로 바쁘게 말한다.
『여보게, 노이! 남석노도(藍石老道)가 자기 아들 손자에게까지 전해 가면서 먹일 그 보삼을 캐 오면 어떡하자는 건가?』
노이는 답답하다는 듯이 큰 주먹으로 가슴을 친다.
『자네들은 공연히 우리 위풍(威風)을 손상시키려 하네그려. 나는 나대로 묘한 계획이 있었단 말이야. 저 백백노도(白栢老道)가 비록 간사하고 영리하기는 하지만 내가 호리산(虎離山)에 갔을 때 밤중에 그 정전(正殿)에 불을 놓았단 말야. 그 때 대소 잡동사니들이 모두 어쩔 줄을 몰라 할 적에 내가 손쉽게 캐어온 거란 말일세.』
노이는 말을 마치자, 더욱 잘난 체 으시대면서 웃는 소리를 거두지 않는다.
노대는 싸늘한 목소리로 말한다.
『자네는 잘난 체 말아. 미안하지만 이 노대(老大)의 자리는 자네가 앉을 수 없어.』
세 사람은 이 말을 듣고 놀라고 의아해서 서로 얼굴을 바라다보고 말이 없다.
그러나 노이는 다시 웃으면서
『풍륜노도의 말은 무슨 뜻이신지?』
노대가 대답한다.
『당년에 우리들이 이 요동 땅에 천년삼을 캐올 내기를 했을 때 누가 무당산이 관외(關外)에 있다고 말했는가?』
노이는 이 말을 듣자, 멍하니 서서 아무 대답도 하지 못한다.
네 사람은 서로 서로 저편 사람의 얼굴을 쳐다보면서 아무런 말도 입 밖에 내지 못한다.
이 때 갑자기 노대가 손으로 입을 막고 깊고 긴 탄식을 내뱉는다. 그리고 나더니 다시 명랑한 기분으로 한바탕 웃으면서 말한다.
『나를 괴롭히는군!』
바로 이때 후면 숲속에서 커다란 사나이의 그림자 하나가 뛰어 나온다.
그는 장대한 기골에 백발이 휘날리고 얼굴에 가득한 주름살은 아마 여기 모여 있는 데 늙은이들의 중간쯤 사람일까?
그는 과연 어떤 사람일까?
그는 다른 사람 아닌 이 오웅(五雄) 중의 한 사람인 노삼(老三) 바로 임여(任厲) 그 사람인 것이다.
멀리 헤어진다는 것은 이렇게 서로 만나기도 힘든 일인가 보다.
그들은 비록 생사를 같이하여 백년의 교정(交情)을 맺었으나 서로 잠시나마 헤어지고 보니 노인들의 시간이란 더욱 빠른 것이어서 하루해가 일 년과도 같이 지루하기 마련이다.
이 임여로 말해도 전날에 강호에서 함께 노닐 적에 딴 사람은 아무 말도 없었으나 풍륜노대가 임여를 끌어냈던 터인데 그는 원래 대가다운 바탕이 있어 한 번 웃으면 마치 봄바람이 이는 듯 딴 사람들의 답답한 심중을 융화해 주기도 했었다.
이 때 임여는 웃으면서 말한다.
『무얼 그리 얼떨떨해 하는가? 이 사람은 벌써 잊은 게로군!』
노오는 노삼을 보자 가슴이 벅차서 말을 못하고 있다.
그들은 모두 이 노삼이 이미 세상 경험이 많고 보니 그 동안 서로들 사이에 아무런 이야기도 못해 봤지만 그래도 그의 대가다운 가슴속에는 무엇인가 일점의 희망이 서리어 있는 것으로 짐작하고 있다.
노이가 억지로 웃으면서 말한다.
『야, 이 사람아! 자네는 우릴 외면하고 외지(外地)에 가서 노닐기만 하니 우리들의 마음이 얼마나 괴로웠겠는가?』
임여는 참을 수 없다는 듯이 구슬같은 눈물이 흘러내린다. 이 눈물방울은 허연 수염 위를 굴러 땅으로 떨어진다.
이들은 다시금 전날 표정을 맺던 당시의 우정으로 돌아가고 마는 것이었다.
젊은 사람 같은 호화스러운 기운들이 잠시 그들의 가슴 위에서 왕래한다. 그러나 그들은 이미 늙은 몸, 그들은 다시금 처참한 심경을 어찌하지 못한다. 그들은 오래 헤어졌던 사람들끼리 절처(絶處)에서 서로 만난 듯, 기쁨이 더해서 각자 자기들의 일생 사적을 생각하면서 희비가 엇갈려 움직이는 것이다.
이리하여 갑자기 이 산골짜기는 미친 듯 웃는 소리로 가득 차게 되었다. 그러나 이러한 웃음소리 속에는 다시 쇠뭉치처럼 무거운 감정이 서리어 있는 것이다.
새벽에 잠을 깬 원숭이들! 난데없는 사람들의 웃음소리에 놀래어 얼떨떨하다. 원숭이들은 무엇인가 심상치 않은 사건이 벌어진 줄 알고 제가끔 몸을 털고 일어나 낑낑거리면서 산 밑으로 부지런히 내려가고 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