자리에서 일어나자 굳어진 허리에서 뚝하고 소리 났다. 시계를 보니 7시였다. 다섯 시간이 흘러 있었다. 푹 눌러쓴 까만 모자 사이로 병원 안을 부산스럽게 움직이는 사람들의 발을 물끄러미 보았다. 누군가를 찾아가고, 무언가를 향해서 가는 수많은 발걸음 중에 하나의 발걸음만 멈춰져 있다.
어디로 가야 하더라. 가야할 곳이라면 인기척이라곤 전혀 느껴지지 않는 그 집이어야 하지만, 그 곳마저 내가 갈 곳이 아닌 것 같다. 앞서 가는 수많은 사람들의 그림자를 뒤따라 병원 문 밖으로 나오자 저녁 바람이 불어왔다. 석양빛이 눈을 찌른다싶더니 머리에 있어야할 모자가 바닥 위를 굴러다니고 있었다.
-증상은 심장병의 일종인 협심증인데 검사해본 결과 협심증은 아닌 것 같습니다. 몇 케이스 되지 않는 희귀한 병이라.
바람에 떠밀려 구석에 박혀있던 검은 모자를 탈탈 털어 푹 눌러썼다. 몇 걸음 못가 병원 앞 벤치에 주저앉았다. 모자가 벗겨질 때 봤던 건지 옆자리에 앉은 사람들이 힐끔거리며 이야기를 나누는 소리가 들렸다. 그 속에 간간히 S.J.H.라는 소리가 들렸다.
-그렇다고 불치병이라는 건 아닙니다. 수술하면 되니까요. 하지만 이런 식으로 진행하게 내버려뒀다가는 수술 성공 확률이 낮아질 뿐만 아니라, 언제 심장마비로 죽을지 모릅니다.
수술을 안 하겠다는 말의 대답이었던가, 아니면 언제 죽을 수 있냐고 물었던 말의 대답이었던가 기억나지 않는다. 조금 무리했다 싶으면 언제나 전력으로 질주한 사람처럼 심장이 빠르게 뛰고 숨이 차올랐다.
뭉쳐진 사람들의 목소리 틈으로 의사의 단호한 목소리가 들렸다.
-수술 하셔야 합니다.
저 말에 한 대답은 또렷이 생각난다. 싫다 였다.
어느새 5년이 지났다. 외로움을 이기기 위한 연주, 추억이 있다는 이유로 끝끝내 버리지 못했던 피아노, 끊임없었던 나의 부름이.
심장병이라는 말에 놀라지 않았다. 그럴 거라 생각했다. 연주회를 할 때마다 기대했다. 그리고 연주회가 끝나면 어김없이 실망감이 날 찾아왔다. 하루에 몇 번이고 쏟아지는 그리움을 심장이 오래 견뎌낼 거라 생각하지 않았다. 의사가 심장병이라며, 희귀한 병이라고 말하는 순간 수술을 할 수 없다고 생각했다.
예의가 아니니까.
널 담고서 귀와 눈을 막고 살아온 5년이라는 긴 시간이면 충분하지 않냐며, 널 담고서 이제 그만 쉬고 싶다 말하는 내 심장에게 그러지 말하기에 염치없음을 알기에.
“저기, 실례하겠습니다. S.J.H.씨 아닌가요?”
얼굴 위로 그림자가 졌다. 파란 눈동자를 가진 백인 여자가 설레는 표정으로 쳐다보고 있었다. 자리에서 일어났다.
“...아뇨. 전 한서준입니다.”
미안한 듯 물러서는 백인 여자를 지나쳤다.
내가 갈 곳은 한 곳 밖에 남지 않았다.
5년 전 버렸던 이름을 주워, 너에게 간다.
**
“내 약혼녀가 되어줘.”
“네, 네?”
“한 달만. 약혼식을 올리게 될 수도 있어. 하지만 너에게 피해 가지 않도록 할게.”
흔들리던 가윤의 눈동자가 안정을 되찾을 때까지 기다렸다. 한국인이 편하다며 한국인을 고집하던 내게 기획사가 찾아 준 매니저였다. 처음부터 편했다. 그리고 이런 부탁을 꺼낼 만큼 믿는 사람이었다. 내게 무슨 병인지 집요하게 묻지 않았고, 재계약을 거부한 이유도 묻지 않았다. 내겐 이유를 묻지 않고 함께 해줄 사람이 필요했다.
“좋아요. 그렇게 할게요. 대신 한국에 가는 이유를 말해줘요. 그건 물어봐도 되죠? 동참하는 일이니까 이유 정도는 알아야 하잖아요.”
“찾고 싶은 게 있어. 잃어버렸던 건데, 다시 찾고 싶어서.”
잃은 후, 한시도 잊지 못했던 그 것을.
“뭔지는 모르겠지만 귀한 건 가 봐요. 찾아서 가지고 다니게요?”
“아니. 찾을 수는 있는데 가질 수는 없는 거야.”
금기의 구역에 피어나 내가 닿을 수 없는 곳에 존재하는 것.
가윤이가 간 후, 창에 기대어 창밖 풍경을 바라보았다. 스산한 바람이 불 것 같은 풍경이 한국의 가을과 같은 모습이었다.
사계절이 스쳐지나가는 일 년을 사랑했다. 그리고 5년을 괴로워했다. 널 알고 나서 지내온 6년의 세월동안, 한 번 웃을 때 열 번을 울어야 했다. 마치 내 인생은 6년만 있는 듯하다. 그 전의 삶이 어땠는지 조금도 기억나지 않는다.
그러나 난 그 6년조차도 마음 놓고 사랑하지 못했다. 단 한 순간도 내 것일 수 없던 사람. 어리다는 이유로, 사랑할 수 없다는 자격의 이유로, 수십 번도 넘게 사랑한다는 말을 삼켰다.
온 몸이 찢기는 고통으로 뱉어낸 우리의 사랑을 거부하던 그 날, 무릎이라도 꿇듯이 간절하게 말하던 내게 등지던 그 날, 널 죽이고 싶었다. 산산이 조각내어 누구도 볼 수 없는 곳으로 숨겨버리고 싶었다.
그러나 난 니가 더 먼 거리로 도망칠까 두려워 제대로 울지도 못 했다. 너에게서 ‘사랑’을 박탈당한 나는 울 수조차 없는 사람이 되었다. 삼킨 눈물이 강이 되고, 눈물을 먹고 피어난 너라는 사람을 뿌리 뽑을 힘이 내게 남아 있지 않았다.
누군가 내게 칼을 쥐어주고 널 죽일 수 있는 기회를 주었다면, 난 아마도 날 찔렀을 거다. 널 찌를 용기보다 날 향한 미움이 더 컸기에. 널 조각내는 것보다 내 눈을 찌르는 게 더 쉬웠다.
미웠다. 결국은 현실을 택한 니가.
괴롭히고 싶었다. 널 잊지 못하는 나를.
허탈했다. 이제 겨우 두 달 남짓 남은 나의 삶이.
그래서 남은 나의 삶을 반 토막 낸 한 달을 너에게 선물하기로 했다. 남은 인생 동안 절대로 지울 수 없을 거다. 한 달이라는 시간을. 너에게 남은 시간이 많을 테니 한 달쯤은 하루만큼 가벼운 시간이 아닐까.
난 니가 상상할 수 없을 만큼 잔인해질 거다. 그리고 넌 내가 남긴 상처에 아플 거고, 남은 흉터에 아플 거다. 살아가는 날 악몽처럼 스며드는 흔적에 괴로워하며 눈을 뜰 지도 모르지. 이런 상처를 준 나를 죽이고 싶을 만큼 미워하게 될 거다. 그리고 우리가 사랑했던 시간마저도 원망으로 먹칠할 지도 모른다.
그래도, 그래도, 싫어하지는 마라.
.........그렇게라도 니 기억에서 살고 싶을 뿐이니.
**
처음 미국으로 갔을 땐 모든 게 막막했다. 한국말 대신 알아들을 수 없는 영어가 세상에 가득했고, 한국인이기에 당연한 예의가 미국에선 낯선 행동이 되었고, 간간히 패스트푸드점이나 가게에서 사먹던 햄버거, 빵이 주식이 되었다.
그보다도 더 막막한 건 그 아이에 관한 게 하나도 없다는 거였다. 무엇을 보고, 무엇을 들어도 그 아이를 찾을 수 없었다. 집 안에 갇혀 지냈다. 나가지 않았고, 누구도 만나지 않았다. 날 내팽겨 친 어린 그 아이가 올 거라 기대하지 않았다.
황무지 같은 타지에 버려진 외로움, 누구에게도 기댈 수 없는 절박함, 그럼에도 던지는 미움만큼 부메랑처럼 돌아와 가슴에 박히는 그리움. 이런 걸 삶이라고 표현해도 되나 할 만큼 밑바닥을 치며 살았다.
그럴수록 피아노를 외면했다. 추억이 담긴 피아노를 부쉈고, 그 모습을 그 아이가 보았다. 다시는 치고 싶지 않았다.
미국에서 지낸 지 3개월쯤 되던 어느 날, 모든 것이 부서진 방 안에 마지막으로 살아남은 피아노를 부수려 했다. 치지도 않는 피아노가 있는 게 보기 싫어서. 피아노 뚜껑을 열고 망치로 깨부수려던 순간, 피아노 소리가 들렸다.
-딩
떨리는 손가락 하나가 제멋대로 피아노 건반을 눌렀다. 피아노 소리에서 그 아이의 목소리가 들렸다. 굳은 손가락으로 어설프게 연주하던 음악에서 그 아이의 환상이 보였다. 햇살이 하얗게 부서지는 건반 위에서 한참을 손 내려놓지 못했다.
-툭
무겁게 눈물이 건반 위로 떨어져 내렸다.
내가 널 미워할 만큼의 힘이 있던가. 외로움과 괴로움에 피멍 지도록 날 때려도, 끝내 이런 외로운 타지에 버려진 게 나라서 다행이라는 생각이 드는 내가 - 널 어떻게 미워할까.
결국 이렇게 찾아 버렸다. 차마 내 입으로 부를 수 없는 네 이름을 부를 수 있는 방법. 너를 마음껏 그리워할 수 있는 방법.
우리가 다시 사랑할 수 없다면, 내가 다시 우리의 추억으로 되돌아가기로 했다.
그리고 어느 순간 내 피아노 소리를 들으면, 올 거라 생각했다. 네가 올 수 있는 나이가 되고, 우리의 마음이 얼마나 절박한 가를 깨달으면 돌아올 거라고. 기다리고 있겠다고 생각했다.
그러나 난 5년을 기다렸고, 넌 끝내 오지 않았다.
“........피아노가 없잖아요.”
“그만 뒀다고 했잖아.”
놀라는 그 아이를 보다 웃음이 나려 했다. 5년을 불러도 듣지 못하면서 자신의 애인 일에 달려와 놓고 피아노 연주라도 들을 생각이었나. 황시유라고 했다. 잘 나갔던 중소기업의 아들이었다. 설마 하는 마음이었다. 그 녀석 일이라면 올까- 했는데 정말 왔다.
가늘게 떨고 있었다. 날 시한폭탄쯤으로 보는 듯 했다. 나와 함께 있는 게 꽤 고역인 모양이었다.
내게 올 수 없어도 다른 누군가를 사랑하는 일은 하지 않을 거라 생각했다. 마지막 믿음이 깨지고 실망과 허탈함 속에 묻어두었던 미움이 생살을 찢으며 움텄다.
미움. 그리고 그 만큼의 슬픔.
“한 달 동안 여기서 지내.”
함께 있는 것만으로도 고역인 너에게 가장 잔인한 방법 일 테니.
“그런 거 가능할 리 없잖아요. 어떤 생각으로 이런 일을 했는지 모르겠지만 내가 할 수 있는 건 고맙다는 말 뿐이에요. 당신이 장난삼아 던지는 그런 말에 쉽게 응할 수 없어요! 불가능하다고요!”
“왜?”
“왜라니요! 엄마, 아빠가 알면 어쩌려고 이래요? 감당할 수 없는 일이잖아요!”
너에겐 언제나 그 사람들이 먼저였다. 적당한 사랑, 적당한 성공, 적당한 삶을 누린 그들에게 넌 우리의 사랑을 늘 양보했다.
“내게 엄마, 아빠가 어디 있어?”
내겐 없다. 난 가진 게 아무 것도 없다.
“미국에 버려지듯이 유학 간 날, 아니 피아노를 부수던 그 날부터 없었어.”
날 경멸하듯, 미친놈 바라보듯 하는 그 사람들의 눈을 봤거든.
“너에게 가족을 준 대신, 난 혼자가 됐어.”
..........걱정 마. 가족만큼은 빼앗지 않을 테니.
**
“되갚아주려고.”
나의 아픔 일부를 되갚아주려 했다. 잊을 수 없게 잔인한 한 달을 만들어주고 싶었다. 그렇게라도 그 아이 남은 삶에 남고 싶었는데, 그마저도 점점 힘들었다. 지독하게 괴롭혀줄 거라는 다짐이 하루 만에 무너지고, 잔인한 모습으로 대할 거라는 생각이 이틀 만에 무너졌다.
난 너에게 내 삶을 휘두를 수 있는 권한을 얼마만큼 허용한 건가.
새벽녘 가윤이에게 누구와 함께 지내냐는 말에 가까스로 여동생이라 말했다. 그 말을 꺼내는 내 모습이 우스웠다. 단 1초라도 그 아이를 여동생이라고 생각해본 적 있던가. 절대 없다. 수술 밖에 남지 않는 약도 없는 병에 걸린 내가 10년 넘게 살 수 없는 것처럼.
“되갚아 주고 싶댔죠?”
여동생이라는 말을 한 그 날, 등 돌리고 선 그 아이의 뒷모습을 보았다. 앙상한 마른 가지처럼 여린 뒷모습을.
“이제 편하게 자요. 소원 이루어졌으니까. 내가 당신만큼 아팠으면 했다면 - 그거 충분히 이루어졌어요. 5년, 아니 그 이상 충분히 아파할 거 에요.”
“............”
“울기 위해 사는 게 아닐까 하는 생각이 들 만큼 아파할 게요. 그러니까 나가 줄래요?”
함께 한 공간에 있는 것만으로도 이 아이에겐 감당할 수 없는 잔인함이었다. 아무 것도 하지 않은 채 목적을 달성한 허망함에 막막했다. 주저앉아 우는 아이에게 손 뻗을 수 없었다. 나 때문에 아파하는 아이를 위로하는 건 잔인한 짓이다.
달칵- 하고 방문이 닫혔다. 문 너머에선 끊임없는 울음소리가 들렸다.
조용히 방문을 쓸어내리는 데 투둑하고 바닥 위로 눈물이 떨어져 내렸다. 나무문을 쓸어내리는 손끝이 따갑다.
.....하지 말걸 그랬다.
기억에서 남겨지는 일, 그런 거 그냥 하지 말 걸 그랬다.
**
-.......난 역시 절대로 너의 가족이 될 수 없을 거 같다.
나 아닌 다른 사람을 부르는 간절한 목소리가 신경을 잘게 잘라 놓았다. ‘시유’라는 이름을 부르며 떠는 목소리를 듣는 순간, 모든 게 끝이 났다고 생각 했다. 그 아이는 나의 키스를 우리를 파멸로 이끄는 길이라 생각했다. 남매라고 말했다. 절대로 잊을 수 없을 만큼 되갚아놓았으니 이제 그만하라고 말했다. 그리고 어쩔 수 없는 일이라고 말했다.
나도 무서웠다. 엄마를 닮았다는 이유로 일에 매달리며 날 등한시한 아빠였지만 그래도 가족이었다. 그런 사람 등에 칼을 꽂는다는 게 나도 쉽지 않은 일이었다. 나도 두려웠다. 세상 사람들의 손가락질을 받는 게. 우리 사랑했다 해도 그들의 눈에는 그렇게 보이지 않을 거라는 걸 알기에. 순수함과 진실함을 담은 우리가 그들의 혀 놀림에 더럽혀지는 게 겁이 났다.
그래도, 그래도 어쩔 수 없었다.
다들 남매라고 말해도, 부모님이 괴로워할 거라고 말해도, 그대로 어쩔 수 없었다.
마음을 죽이기엔 죽음 이외의 길이 없다는 걸 알기에.
“내일 집으로 돌아가.”
이 정도면 넌 날 잊을 수 없을 거다. 이걸로 충분하다.
너에게 사랑이 아닌 잔인함으로 흔적이 남는다고 해도 -
그래, 그 걸로 난 충분히 만족한다.
**
그 날 밤 천둥번개가 쳤다. 날카로운 빛이 스치고 나면 이윽고 세상을 쪼개는 천둥소리가 들렸다. 가을밤 같지 않았다. 내일이면 그 아이가 떠날 거라는 생각에 밤을 놓아주고 싶지 않았다. 그러다 문득 그 아이가 무척 무서워하고 있을 거라는 생각이 들었다. 내게 미움 밖에 남지 않은 아이지만, 이 순간만이라도 날 필요로 하지 않을까 싶었다. 한 순간이라도 좋은 추억으로 남고 싶었다. 문을 열 때 천둥번개가 내리쳤다. 방문 앞에 둘둘 말린 이불이 보였다. 이불은 한 눈에 보일 만큼 벌벌 떨고 있었다.
-사랑해
언젠가 천둥소리에 묻어 그 아이에게 고백했었다. 세상사람 아무도 듣지 못하게, 그래서 내 고백이 죄가 될 수 없게.
“괜찮아. 은리야.”
떨림이 멎었다.
“........은리야.”
불러보고 싶었다.
맘 놓고 편하게 불러보지 못한 그 이름을.
두 번은 아까워 부르지 못할 그 서글픈 이름을.
“이제 들어가서 자도 될 거야.”
빗줄기가 가늘어지는 소리가 들렸다. 하늘이 가엾게 여겨 내려준 시간이 끝났다. 그 아이가 나의 품을 박차고 나가기를 기다렸다. 내가 먼저 일어설 수는 없으니.
“........사실은 보고 싶었어요. 왜 왔냐고 원망했지만, 사실 와줘서..... 너무, 너무 고마웠어요. 날 잊지 않고 찾아와줘서.”
떨리는 목소리가 들렸다.
“그러니까 남은 시간 다 채우고 갈게요. 곧 약혼 하겠지만....... 그 전까지 괜찮으면 옆에 있으면 안 돼요? 세상에 우리 두 사람만 있는 것처럼, 그 사람도, 부모님도, 전부 다 잊고 그렇게 남은 시간 웃으면서 예전처럼 즐겁게 보내면...... 그러면..... 안 돼요?”
아득해졌다. 아무렇게나 시선을 던져두었다. 나의 눈동자는 무얼 보았기에 이토록 시린 걸까. 툭, 하고 눈물이 떨어졌다. 믿기지 않아 그 아이를 힘주어 껴안았다. 내 품에 안겨오는 그 아이가 몸이 떨리도록 울고 있다는 걸 알았다.
그 아이의 마음이 나와 같은 모양이라 했다. 나와 같은 그리움을 안고 살았다고 했다.
그 아이는 모를 거다.
.........그 순간 내가 얼마나 살고 싶었는지.
<17 - 한서준 번외>
그 아이가 세 번째 소원을 말했던 밤이 지나고 새벽이 되자 전화 한 통이 걸려왔었다.
-안녕하세요. 전에 뵈었던 황시유라고 합니다.
예상 밖의 전화에 내 번호를 어떻게 알았냐고 묻지도 못했다. 자신을 그 아이의 애인이라고 밝힌 그 녀석은 은리를 찾고 있는데 혹시 아는 정보가 있냐고 물었다. 이틀 내로 찾지 못하면 부모님께 말하고 실종신고라도 불사할 예정이라며 지친 목소리가 조근조근 말을 꺼냈다.
목소리를 들으며 처음 봤던 그 날을 떠올렸다. 선한 눈동자에 누가 봐도 사랑 받고 자란 사람의 모습을 하고 있었다. 세상 모든 열정이 시들어도 그 아이를 향한 열정만큼은 시들지 않게 할 거라는 단호한 모습을 하고 있었다.
무겁게 입술을 열었다.
-은리, 여기 있어.
말하고 싶지 않았다. 보내고 싶지 않았다. 하지만 시간은 이제 그만 끝내라 말하고 있었다. 시야가 멀어지고 입술 사이로 낯선 목소리가 흘러 나왔다.
-......데려가.
며칠간 무척 행복했다. 내 인생 더할 나위 없이 빛나는 순간이었다. 다시 이런 날이 돌아 올 수 있을까 하고 감격할 만큼. 그 아이가 해주는 음식, 그 아이의 웃음, 그 아이의 목소리. 눈 감아도 선명하게 그릴 수 있는 모습을 어떻게 잊을까.
이제 그만 자리를 비워야한다. 기대 이상으로 행복했다. 이걸로 만족해야 한다.
이미 늦어버린 삶에 욕심이 생기기 전에.
-병에 걸렸어. 부모님은 몰라. 은리가 알게 돼서 병간호 하고 있었어.
-형님, 무슨 병에 걸리신 겁니까?
-니가 알 필요 있나?
-아, 아뇨.
새벽녘 전화통화를 마치고 이대로 죽어버렸으면 했다. 보고 싶지 않았다. 그 아이가 다른 사람에게 가는 걸. 그리고 또 겪고 싶지 않았다. 그 아이의 부재에 온 몸이 찢어지는 고통을. 하지만 단 한 번도 내게 쉼을 허락한 적 없는 시간은 부지런히 흘러갔다.
결국 그 아이가 마트를 간 사이, 그 녀석이 왔다. 민망한 듯 어색하게 웃는 그 녀석을 가만히 쳐다보았다. 그 녀석은 소파에 앉은 후에도 조급한 표정으로 문 쪽을 힐끔 거렸다.
-은리, 좋아해?
조용히 찻잔을 감싸 쥐며 물었다.
-네.
-얼마나?
-그 아이를 절대 먼저 버릴 수 없을 만큼요.
생각할 필요도 없다는 듯 곧바로 나오는 대답에 피식 웃었다.
안심됐다. 그리고 -
조금 쓰렸다.
마트에 다녀온 그 아이는 악령이라도 본 사람처럼 굳은 표정으로 시유를 보다 날 쳐다보았다. 상황을 설명해달라는 간절함을 담고서. 아무런 표정도 지을 수 없었다. 이제와 행복하라고 웃어줄 수 없는 일이니까. 이별을 손에 쥐고 사랑해온 우리가 이제와 어떤 말을 건네며 서로에게 돌아서야할까.
내가 해줄 수 있는 건 없었다. 말없이 그 아이를 자신의 자리로 돌려놓는 것 뿐.
눈앞에서 그 아이가 다른 남자에게 안겨 있었다. 언젠가 나의 자리라고 믿었던 그 자리에 다른 사람이 서 있었다. 그 아이의 삶에서 멀찍이 멀어진 기분이었다. 아마 내일은 오늘보다 더 멀어진 거리에서 서로를 보게 될 거다. 그리고 어느 순간 서로의 눈에 보이지 않게 될 만큼 멀어지게 될 거다.
-오빠!
그 아이가 돌아서서 방으로 들어가는 나를 불렀다. 돌아보지 않았다. 마지막으로 잡은 이성이 무너지는 걸 겪고 싶지 않았다.
힘주어 잡은 문고리를 돌렸다.
-조심해서 가.
마지막 인사를 고했지만, 그 아이는 가지 않았다. 문을 열었을 때 나의 그리움이 빚어낸 환영인 줄 알았다. 그 아이는 아무 일 없는 사람처럼 부엌에서 핫케이크를 만들고 있었다. 힘겹게 꺼낸 이별의 말을 또 해야 하다니.
세상 참 잔인하지.
-........뭐하는 거야.
현실을 인지하지 못하고 붕 뜬 눈동자가 날 향했다. 한참을 배회하던 눈동자에 마침내 눈물이 맺혔다.
-...안 그랬잖아요. 여기 와서... 나한테 잘 했잖아요.
지금이라도 두 팔로 감싸 안고 싶지만, 내가 해줄 수 있는 게 없었다. 병명조차 없는 몇 케이스 안 되는 병에 걸려 느려지는 심장 박동 수, 움직일수록 차오르는 숨, 조금씩 움직임을 잃다 죽어버릴 이런 몸으로 이 아이 곁에 남는 게 짐일 뿐이다.
-이 정도면 충분하잖아. 어제 마음과 내일 마음이 같을 순 없잖아.
한 달을 욕심낸 걸 죽도록 후회한다.
조금이라도 서로에게 미움이 있을 때 모른 척 살았어야했는데,
니가 날 잊은 채 살고 있다고 믿고 있을 때 남처럼 지냈어야했는데,
사랑하고 싶고, 사랑주고 싶은 욕심이 더욱 질긴 이별만 남겨 놨다.
-내일 아침에 꼭 가. 가윤이 오기로 했으니까.
제발 가.
또 나에게 이별의 말을 하게 만들지 마.
.....할수록 아프니까.
**
1인실 병실은 안쪽에 자리하고 있어 조용했다. 창문을 조금 열어 창밖을 보았다. 노란 유리조각을 깨어 흩뿌린 것처럼 노란 은행잎이 쏟아져 내리고 있었다.
새벽시간 그 아이가 집 밖으로 나가는 소리를 들었다. 조용히 달칵하고 닫히는 문소리에 심장이 바닥을 내리쳤다. 발을 딛고 선 공간과 시간이 아득하게 밀려나는 기분이었다. 그 후로 기억나지 않는다. 남은 시간을 어떻게 보냈는지. 눈을 떠보니 난 병원에 있었고, 그리고 - 그 아이가 서있었다. 내게 남은 추억이 만든 환상이라고 생각했다. 그 아이가 선명하게 보이기 전까지는.
내게 안겨오는 그 아이를 밀어내야 했다. 삶과 죽음의 경계선에 선 내가 감당하기엔 너무 눈부신 아이었다.
-.....후회하지 마.
하지만 단 하루라도 좋으니 그 아이를 허락해달라는 내 이기심이 그 아이를 붙들고 말았다. 후회는 그 아이의 몫이 아니다. 내 몫이다.
‘달칵-’
등 뒤로 다가오는 발소리가 들렸다. 추억을 더듬던 것을 멈추고 노란색 티셔츠를 입은 그 아이를 보았다.
“나 다녀올게요. 집에 가서 몇 개 옷 챙겨 올게요.”
노란 은행잎 같았다.
“내 말 듣고 있어요?”
눈앞을 손으로 휘휘 내저으며 그 아이가 물었다. 가볍게 고개를 끄덕이자 그 아이의 입가에 환한 웃음이 걸렸다.
“조심해서 가.”
“그 말, 하지 마요.”
유리구슬처럼 동글동글한 눈이 불안하게 흔들렸다.
“왜?”
“꼭..... 헤어지는 거 같아요.”
그 아이의 입술이 말을 마치기가 무섭게 꼭 다물어졌다. 사탕이라도 물려줘야할 것처럼 토라진 모습이 귀여워 피식 웃자, 눈을 동그랗게 뜨며 왜 웃냐고 물어왔다.
“아니야. 얼른 가봐.”
“알았어요. 대신 기다려요. 금방 다녀올게요.”
다섯 걸음을 걸으며 다섯 번 돌아보는 그 아이에게 가볍게 손 흔들어 주었다. 사실 보내고 싶지 않았다. 옷 같은 거 사줄 테니까 눈앞에서 사라지지 말라고 붙들고 싶었다. 아쉬운 손길을 거두며 열린 창문 틈 사이로 불어 들어오는 가을바람을 쐬었다.
‘달칵-’
“서준씨.”
커다란 과일바구니를 든 가윤이가 보였다. 내가 입을 열기도 전에 미안하다는 말을 하며 들어서는 가윤이었다.
“쓸데없는 짓 했어.”
“거짓말. 옆에 은리씨 있으니까 행복해보이네요. 미국에 있을 때보다 얼굴 훨씬 좋아 보여요.”
고맙다는 말 대신 웃었다. 과일 바구니를 침대 옆에 내려놓은 가윤이 내 눈치를 살피며 조심스럽게 말을 건네 왔다.
“수술... 하기로 했다면서요?”
“...어.”
“역시 서준씨 설득할 사람은 은리씨 밖에 없네요. 다행이에요. 수술은 빨리 하는 게 좋다고 했죠? 그럼 미국 갈 시간도 없이 곧바로 수술 들어가겠네요. 수술은 언제에요?”
“내일.”
“내일이요? 빠, 빠르네요.”
“빨리하는 게 좋대.”
수술하지 않으려는 날 붙들고 그 아이는 울었다. 수술해서 살아주면 안되냐고. 자신의 옆에 있어주면 안되냐고 빌었다. 그 아이는 모르고 있다. 수술의 또 다른 의미를.
“꼭....... 성공해요.”
성공확률 15%짜리 수술이 성공하기 위해선 얼마만큼의 기적이 필요할까.
가윤은 내가 걸터앉은 침대에 걸터앉으며 조심스레 내 표정을 살폈다. 말을 꺼낼 듯 말 듯한 표정을 짓던 가윤은 참지 못하겠다는 표정으로 물었다.
“왜 빼앗지 않았어요? 시유씨한테 은리씨 뺏을 수도 있었잖아요. 왜 굳이 이렇게 어려운 방법을 택했어요? 아무도 없는 곳으로 데리고 도망치지 그랬어요?”
조금 시린 가을바람이 불었다. 익숙한 느낌이었다. 외로움을 가득 담은 그런 느낌. 바람은 소리 없이 머리카락을 헝클어뜨렸다. 벌린 입술 틈을 찾아 들어온 바람은 혀 위를 간지럽혔다.
“....있어야지.”
“네..?”
“.......돌아갈 곳은 있어야지. 내가 없어도.”
“.............”
“혹시 내가 잘못되더라도 울 수 있는 그런 곳.”
언젠가 빼앗을 생각도 했었다. 세상 모든 이들과 단절시키고 나만 보게 하고 싶었다. 하지만 결국 그럴 수 없었다. 모두가 떠나고 그 아이가 나만 보게 되었을 때, 내가 훌쩍 떠나게 되면 그 아이에게 남는 게 없다. 결국 혼자 남은 시간을 버텨내야하는데 - 그 시간을 선물할 수 없었다.
울어도 괜찮냐고 묻는 이가 없는 곳, 아프다고 외쳐도 들어주는 이가 없는 곳, 기댈 곳은 시멘트 벽 뿐인 외로운 곳으로 그 아이를 버릴 수 없었다.
“...외로운 거, 그거 아프다는 또 다른 말이거든.”
멍한 눈으로 한참이나 날 응시하던 가윤이 시선을 아래로 떨구며 잠시 말을 멈췄다. 담담한 나와 달리 가윤의 어깨가 가볍게 떨렸다. 심호흡을 한 가윤이 애써 밝은 목소리로 이런 말, 저런 말을 늘어놓았다.
“병원 갑갑하죠? 병원 싫겠어요.”
“아니. 좋아. 좋아졌어.”
“네? 병원이 좋아졌다고요?”
의외라는 듯 가윤이 물어왔다. 가윤은 이불 끝을 펴다말고 날 보며 눈을 동그랗게 떴다. 입술 끝에 웃음이 맺혔다. 문 쪽을 보았다. 문을 열고 서있는 내게 그 아이가 안기는 환상이 보였다.
“그 애가 먼저 날 안아준 곳이거든.”
“.............”
“함께 도망이라도 가겠다면서.”
세상 모든 축복이 내게 내려앉는 그 기쁨을 어떻게 잊을까.
“부탁이 있어. 들어줄래?”
“뭐든지요.”
가윤의 목소리가 가늘게 떨렸다. 결국 홱 고개 돌린 가윤에게서 눈물이 쏟아져 내렸다. 가윤은 제 두 손에 얼굴을 묻고서 참을 수 없다는 듯 소리 내어 울었다. 남이 눈물을 흘릴 만큼 참 아프게 사랑했구나. 하지만 난 울지 않았다. 슬픈 일이 아니니까. 그 아이가 날 사랑한다는 행복한 증거니까.
내일을 확신할 수 없어도, 오늘이 아름답다는 것만으로 내겐 축복이었다.
그 아이가 날 사랑하는 오늘이 있기 위해 5년을 아파해야했던 거라면 - 그 정도 아픔은 괜찮다.
우리가 사랑하는 내일이 있기 위해 또 다시 5년을 아파해야한다면 - 기꺼이 허락할 테다.
아픔을 먹고 자라나야 하는 사랑이라면, 내 삶을 아픔에게 바칠 수 있다.
“나, 나... 하나만 물어도 되요..?”
울음을 멈추지 못한 가윤이 물었다. 가윤에게 휴지를 내밀었다.
“해.”
“흑... 흐흑.. 너무 바보 같은 질문인데, 늘 궁금했어요. 은리씨가 당신에게 어떤 의미이고, 어떤 존재인지. 어떤 의미고, 어떤 존재이기에 그렇게 죽도록 사랑하는 지 너무 궁금했어요.”
“정말 바보 같은 질문이네.”
가벼운 나의 웃음에도 가윤은 웃지 않았다. 휴지로 눈 아래를 꾹 눌러 눈물을 막으며 내 대답을 꼭 듣겠다는 얼굴을 하고 있었다.
“주제 넘는 건 알지만 대답해줘요.”
눈부신 빛이 유리창을 뚫고 들어와 병실 안을 가득 메웠다. 바람이 잦아들고 주변이 고요해졌다. 시트 위에 놓인 손가락이 건반을 두들기듯 가볍게 움직였다. 하얀 벽 위로 그 아이의 웃는 얼굴이 그려졌다. 잠시 보지 못했을 뿐인데 그리움이 돋아났다. 보고 싶어 졌다.
“........내게 연주를 허락할 수 있는 유일한 사람.”
**
“웬 과일이 이렇게 많아요?”
“가윤이가 왔다 갔어. 그건 뭐야?”
“짐 챙겨왔어요.”
피난이라도 가는 사람처럼 그 아이는 제 몸만 한 캐리어 가방을 끌고 왔다. 주황색이라고 하기엔 옅고, 노란색이라고 하기엔 짙은 색의 석양빛이 창 밖에 내려앉았다. 늘 보았던 풍경 같은데 오늘은 왜 이렇게 아름다운지. 손을 뻗어 그러쥐면 따뜻하고 부드러운 무언가가 한 움큼 잡힐 것 같았다.
“배 먹어요.”
“난 됐어. 먹어.”
양 볼이 볼록하도록 과일을 넣고 오물오물 씹는 모습을 지켜보았다. 눈이 마주치자 슬그머니 포크를 내려놓는 모습이 귀여워 웃었다. 과일을 먹은 후 씻고, 함께 텔레비전을 잠시 보다가 옛날이야기를 나누며 시간을 보냈다. 그토록 바라던 평범한 시간이었다. 이런 말 누군가가 들으면 우스울지 모르지만, 처음으로 병 걸리기 잘했다는 생각이 들었다.
어느새 9시가 훌쩍 넘어 있었다. 어른거리던 석양도 지고 까만 어둠이 창가에 발려 있었다.
“내일 힘들지도 모르니까 일찍 자요. 내가 옆에서 지켜보고 있을 게요.”
“위로 올라가서 자. 내가 밑에서 잘 테니까.”
침대 아래로 내려오려 하자 그 아이가 두 팔 벌려 막았다. 그리고는 퍼석한 얼굴로 어울리지도 않는 엄한 표정을 지으며 고개를 가로저었다.
“안돼요. 올라가서 자요. 수술 받는 사람이 보조침대에서 자는 건 말도 안돼요. 난 괜찮아요. 아무 이상 없어요.”
며칠 째 불편한 보조침대에 자느라 많이 피곤해 보이는 모습인데 괜찮다고 우겼다. 서로 침대를 양보하겠다고 우기다가 결국 함께 자기로 결정했다. 환자에겐 안정이 우선이라며 그럴 수 없다고 우기는 그 아이에게 함께 자지 않으면 바닥에서 자겠다고 말했다.
“이러면 정말 불편할 텐데.”
옆으로 비스듬히 누워 들어올 수 있는 공간을 만들어주자 그 아이는 작게 중얼거리며 침대 위에 누웠다. 넓지 않았지만 비좁지도 않았다. 마주보고 눕자 그 아이의 자그마한 얼굴이 눈에 쏙 들어왔다.
“간호사가 보고 놀랄 거 같아요.”
“자리 바꾸자. 불편해.”
간호사가 들어와 놀란 아이가 혹여나 바닥으로 떨어질까 걱정됐다. 내가 불편하다는 한 마디에 그 아이는 자리에서 일어났다. 그 아이를 벽 쪽에 눕혔고, 그 옆에 누웠다. 10시가 되는 소리가 들리며 소등됐다. 까만 어둠이 우릴 덮었다. 주변은 고요했고, 세상에 마지막으로 남겨진 사람들 같았다.
“오빠.”
조심스런 목소리가 들렸다. 생각지 못한 공격을 받은 사람처럼 눈앞이 아찔해졌다. 대답도 못한 채 어둠 속에 희미하게 윤곽을 드러낸 그 아이의 얼굴만 보았다. 까만 어둠에 물든 눈동자가 내 눈동자를 보았다. 조금만 앞으로 다가가면 코끝이 스칠 만큼 가까운 거리였다.
“나 어릴 때 꿈이 뭐였는지 알아요?”
“...뭔데?”
“피아니스트 매니저.”
“.............”
“오빠는 피아니스트가 되고, 난 그 곁에 함께 하는 매니저였으면 했어요. 가장 많이 오빠의 연주를 들을 수 있는 사람, 가장 먼저 들을 수 있는 사람. 그런 사람이 되고 싶었어요.”
“.............”
“나 매니저 시켜줘요. 병 나아서 피아노 시작할 수 있게 되면 그 옆에 있을 게요. 오빠가 가는 곳 어디든 함께 갈게요. 만약 피아니스트 대신 작곡가가 된다고 해도 그 옆에 있을게요. 교수가 되던, 작곡가가 되던, 그 무엇이 되던 지요.”
“............”
“.....그러니까 병 꼭 나아야 해요.”
손끝이 젖었다. 건반만큼이나 부드러운 뺨 위로 흘러내린 눈물이 손끝을 저리게 했다. 조용히 그 아이를 끌어당겨 안았다. 등 뒤로 그 아이의 얇은 팔이 놓을 수 없다는 듯 날 감싸 안았다. 대답 대신 마른 등을 쓸어주었다. 품 안에서 뜨거운 비가 내렸다. 꽤 오랜 시간 짊어져야했던 아픔이 섞인 비가.
팔이 저려올 만큼 오랜 시간이 지나자 고른 숨소리가 들렸다. 조용히 눈물 젖은 그 아이의 뺨을 닦아 주었다. 며칠 간 옆에 있느라 많이 피곤했는지 미동조차 없이 깊게 잠들어 있었다.
“은리야.”
대답 없는 그 아이를 작게 불러보았다.
“........내일이 무섭다.”
......혹시나 니가 없는 곳으로 갈까봐.
사실 한국에 돌아오겠다고 다짐했을 때 난 무서웠다.
너에게 잔인한 사람으로 기억되는 것보다 너에게 사랑하는 사람으로 기억되는 게.
니가 날 사랑하게 된다면 내가 겪었던 아픔을 니가 겪어야한다는 게 끔찍했다.
그래서 니가 날 원망했으면 했다.
그 것이 내가 너의 기억에 살아남는 방법이자, 죽음으로 가는 내가 줄 수 있는 마지막 선물이라 생각했다.
조용히 그 아이의 도톰하고 빨간 입술을 쓸었다. 손을 따뜻하게 데우는 입술로 천천히 다가갔다. 코끝이 스치고 입술 끝이 닿으려 했다. 하지만 끝내 닿지 못했다. 대신 그 아이의 입술이 닿았던 손이 내 입술에 닿았다.
지금은 이걸로 만족할게. 나머지는 나중에 해줘.
<18>
꿈을 꾸었다. 우리가 처음 만났던 날. 음표가 건반 위로 통통 튀어 올라 피아노실을 가득 메우던 그 날, 그 곳에 앉아 피아노를 치고 있던 그 사람의 모습을 보았다. 그 모습이 너무나도 아름다워서 숨도 크게 쉬지 못했다. 혹여나 나의 서툰 몸짓에 그 사람의 연주가 멈추고, 등 뒤에서 쏟아지던 햇살마저 숨어 버릴까봐.
새벽바람이 소리 없이 날 깨웠다. 눈을 떴을 때 이미 그 사람은 일어나 있었다. 어쩌면 한 숨도 자지 않았을 지도 모른다. 수술을 하루 앞둔 날 그 사람을 두고서 잠에 들다니. 창밖을 보고 선 뒷모습을 보았다. 푸르스름한 새벽공기에 검은 그 사람의 머리카락은 도드라지게 보였다. 얼굴을 보고 싶었지만 어떤 표정을 짓고 있을 지 상상이 되질 않아 부르지 못했다. 혹여나 날 주저앉게 만드는 그런 슬픈 표정일 까봐.
“일어났어?”
이불 젖히는 소리가 들렸는지 그 사람이 돌아보며 물었다.
“뭐하고 있었어요?”
“생각. 우리가 처음 만났을 때.”
그 사람의 생각이 내게 전해져 꿈이 되었나보다. 머리를 단정하게 정리해 묶고 그 사람의 곁에 다가섰다. 흔들림 없는 까만 눈동자가 날 담고 있었다. 갈증 난 사람처럼 내게서 눈을 떼지 못하는 그 사람을 보는데 불안했다.
“...떨리죠?”
“조금.”
그 사람의 뺨에 손을 뻗어 조용히 쓸었다. 결국 이렇게 사랑하게 될 거면서 왜 나는 이 사람을 아프게 했을까. 왜 시간이 해결해줄 수 있을 거라 믿었던 걸까.
“떨려?”
떨리는 손끝을 감싸 쥐며 그 사람이 물었다.
“조금, 아니 많이요.”
“괜찮아.”
연하게 웃어보였다. 난 이 사람이 심장병이라는 것 외에는 아는 게 없었다. 이 수술이 얼마만큼 확률을 가진 것인지, 얼마나 위험한 것인지 모르고 있다. 난 묻지 않았고, 이 사람 역시 내게 말해주지 않았다.
“열심히 싸울게.”
다만 눈앞의 이 사람의 말을 믿을 뿐이다.
“하고 싶은 걸 상상해요. 함께 외국 가는 꿈, 오빠가 연주하고 내가 옆에서 듣는 꿈, 함께 악보를 읽는 꿈. 아, 그리고 세계일주도 해요. 세상 사람들 모르는 데서 함께 손잡고 다니기도 하고, 음악이랑 자유가 넘치는 나라에서 몇 년 씩 살기도 하면서 그렇게 시간 보내요. 그리고 또 뭐가 있더라?”
셀 수 없을 만큼 많은 약속을 잡기로 했다. 그 약속의 무게에 발목 잡혀 이 사람이 떠날 수 없도록. 이 약속을 모두 지키기 전까지 성급하게 먼저 가지 않도록.
끊임없이 말 잇는 날 보며 그 사람은 편안한 미소를 지어보였다. 비스듬히 기울어진 고개를 따라 기울어진 검은 머리카락 끝이 바람이 살랑살랑 흔들렸다.
내겐 함께 있다는 것만으로도 기적이라고 할 만큼 아름다운 사람.
“다 나으면 받고 싶은 게 있어.”
“어떤...?”
“어제 받으려다가 못 받은 건데, 그게 너무 받고 싶다.”
알 수 없는 말을 한 그 사람은 입을 다물었다. 아무리 물어도 대답해주지 않았다. 자신의 발로 걸어서 병원 밖으로 나오게 된다면 받겠다고 했다.
얼마 후 회진 돌던 의사가 그 사람의 상태를 살폈고 수술 성공할 테니 긴장하지 말라는 말을 남기고 갔다. 수술 준비를 모두 마친 그 사람이 침대에 누워 있었다. 그 곁에 서서 하얗고 긴 손을 감싸 쥐었다. 느리게 눈을 감았다 뜨는 그 사람의 하얀 얼굴은 담담한 표정을 하고 있었다.
“무서워요?”
“참을 만 해.”
누군가 소원을 들어 줄 테니 말하라고 한다면 내게 허락된 수명을 반으로 나눠 이 사람에게 건네주라고 말하고 싶다. 하루라도 좋으니 함께 살다가 함께 죽을 수 있도록. 마음 놓고 사랑해보지 못한 우리에게 그 정도의 시간은 허락할 수 있는 게 아닐까.
“한서준씨. 곧 수술실 들어갑니다.”
“네.”
가슴이 철렁 내려앉아 대답도 제대로 못했다. 얼마 후 간호사가 들어와 그 사람을 침대에 눕히고 수술 준비를 했다.
“은리야.”
그 사람의 얼굴에서 한시도 눈을 뗄 수 없었다. 그리운 이의 얼굴을 눈으로 쓸고 또 한참을 쓸었다.
“은리야.”
“...응?”
“은리야.”
목적 없는 그 사람의 부름이 계속 이어졌다. 마치 내 이름을 까먹지 않으려는 사람처럼 한참을 입 안에서 중얼거렸다. 목에 메어 벌어진 입술 사이로 소리 없는 울음이 새어나갔다. 의사와 간호사가 들어와 그 사람을 이동식 침대에 눕혔다. 그리고 수술실 쪽으로 침대를 끌었다.
그 사람 손을 꽉 잡고, 그 사람의 얼굴만 보며 걸었다.
결국 이렇게 될 거였다면 사랑할 걸 그랬다. 세상에 우리만 있는 사람들처럼 마음 놓고 사랑한다고 외쳐줄 걸. 뒤늦은 후회가 목을 졸라왔다.
“은리야.”
“...응?”
수술실이라는 글자가 보였다.
“기억하고 있지?”
“...뭘?”
이제 겨우 몇 발자국 남았다.
“사랑의 세레나데 뜻.”
목이 메어 답하지 못했다. 간호사가 내 걸음을 저지했다. 더 이상 들어갈 수 없는 곳이라 말했다. 그 사람은 연한 미소를 지으며 말했다.
“........기억해둬. ‘보고 싶다’는 뜻.”
알 수 없는 말, 알 수 없는 미소.
기억하고 있다는 대답 한마디 못했는데, 그 사람은 더 이상 보이지 않았다.
닫힌 수술실 문만 보고 섰다. 두꺼운 이 문 너머에 그 사람이 있을 텐데 그 사람은 내가 닿을 수 없는 곳으로 갔다.
머리 위에 번쩍하고 빛이 들어왔다.
‘수술 중’이라는 글자가 빛나고 있었다.
<19 - 한서준 번외>
신경을 긁는 기계 소리, 찰그닥하고 부딪히는 메스소리, 조용히 움직이는 다섯 명이 넘는 사람들의 옷 스치는 소리. 느리게 눈을 감았다 떴다.
“긴장 푸세요. 다 잘 될 겁니다.”
가만히 위를 보고 있는 내게 마스크를 쓴 여자가 말을 건네 왔다. 간호사인지 의사인지 구분할 수 없었다. 산소 호흡기 같은 마스크가 코와 입을 막았다.
“숨을 깊게 들이 쉬세요. 하나, 둘, 셋.”
눈이 시릴 정도로 밝은 조명이 켜졌다. 하얀 빛이 감은 눈 위로 쏟아져 내렸다.
눈부신 불빛이 하얗게 흐려지는 그 곳에 니가 서있다. 학원 문을 열고 들어와 빛만큼이나 환한 미소로 누군가를 향해 웃으며 인사를 건네고 있었다. 피아노 건반을 한 옥타브 높게 잡고 있다는 것도 모른 채 그 모습을 넋 놓고 보았다.
천사를 보는 것 같아서.
가녀린 손으로 피아노를 연주하는 모습도 아름다웠다. 오랜 시간 피아노를 쳐왔지만, 피아노 소리가 아름답게 들린 건 그 때가 처음이었다. 넌 구석에서 연습하는 나를 알아보지 못했지만, 난 그때부터 너를 생각하며 연주했다. 나의 연주를 듣고 너의 걸음이 날 찾았을 때, 눈부신 그 만남을 어떻게 잊을까.
피아노 문 뒤에서 조용히 나의 연주를 듣던 너를.
너에게 인사를 건네며 떨렸던 그 느낌을.
나의 피아노 소리가 듣기 좋다고 말했던 너를 위해 연주했다. 나의 손가락은 너의 기쁨을 위해 피아노 위에서 춤을 췄고, 나의 눈은 너에게 들려줄 악보를 읽기 위해 존재했다.
난 너의 기쁨을 위해 존재했다.
선한 얼굴로, 하얀 마음으로, 기적으로 빚어진 것처럼 서있던 너를 감히 어떻게 밀어낼 수 있을까.
“메스. 혈압, 맥박 제대로 체크해.”
네 이름을 부를 때면, 언제고 입술이 떨렸다.
널 쓰다듬는 게 손이 떨렸다.
믿기지 않아서,
도저히 믿기지 않는 행복이라서.
“교, 교수님! 추, 출혈이!!!”
“여기에 출혈이 생길 리 없잖아!”
널 내 사람이라 자랑하고 싶었다.
세상 앞에서 당당하게 네 손을 잡고 싶었다.
네 이름을 크게 불러보고 싶었다.
사랑한다고 소리치고 싶었다.
이해할 수 있겠니.
사랑하는 마음마저 억눌러야하는 절박함을.
그렇게라도 네게 편한 삶을 만들어주고 싶은 나의 마음을.
“교수님, 혈압이 높아집니다!!”
나의 피아노 소리보다 몇 배는 아름다웠던 너의 피아노 소리가 듣고 싶다.
너의 손가락이 빚어내는 선율이 그립다.
“매, 맥박이!!”
노란 은행잎이 쏟아지는 구나. 눈 부시게 아름다웠던 우리의 추억이 담긴 피아노가 보여.
그 곳에 피아노 치는 네 모습이 보인다.
니가 자꾸만 멀어지는 구나.
좀 더 보고 싶은데........ 더는 욕심인가 보구나.
“수, 숨을 멈췄습니다.”
하지만 안심해. 육체의 수명이 다한다고 해서, 내 마음까지 수명이 다하지 않을 테니.
‘삐-’
“.............”
“.............”
“.......수술 중 사망했습니다.”
수십 번의 시간과 수십 번의 공간이 맞물리는 곳에서 새롭게 삶을 시작한다 해도,
.........너 만한 사람 없을 거다.
<20>
말도 안 되는 일이다. 병원 밖으로 걸어 나가면 내게 받을 게 있다고 했던 사람이었다. 아무렇지 않은 얼굴로 수술 직전까지 괜찮다고 말하던 사람이었다. 의사 선생님이 믿기지 않는 말을 하고서 멀어졌다.
“은리씨, 서준씨가... 서준씨가.... 그만.”
“...거짓말 하지 마요...”
“은리씨. 흐, 흐흑.”
나의 손을 잡고서 주저앉은 무릎 꿇고 앉아 우는 가윤씨의 얼굴이 보였다.
“울지 마요. 왜 울어요. 울 일 없잖아요. 대체 왜 울어요. 대체 왜!!”
이렇게 울어버리면 너무 쉽게 그 사람의 죽음을 인정하는 거잖아. 그 사람이 이제 더는 날 볼 수 없다는 거잖아. 그런 일은 있을 수 없다. 그 사람이 죽음으로 날 떠나는 일, 내가 그 사람을 보내야하는 일.
“......아니잖아요. 아니라고 말... 해요. 살려고 들어간 사람이 왜.... 왜.... 죽었대요...?”
우리가 함께 해야 할 일이 얼마나 많은데. 같이 하자고 약속한 일이 셀 수 없을 만큼 많은데.
“이렇게 허무하게... 허무하게 죽을 리 없잖아요...”
“으흑... 흑...”
쉽게 약속을 저버릴 사람이 아닌데. 날 두고 갈 사람이 아닌데.
조용히 수술실 문이 열렸다. 그리고 멍하게 앞을 보고 있던 내 눈에 들어갔을 때와 같은 모습을 한 그 사람이 보였다. 차마 애달파 이름으로 불러보지 못했던 그 사람이 미동도 않은 채 누워 있었다. 깨끗한 모습이었다. 단정하던 머리카락도, 새하얀 피부도, 선명한 이목구비도 모든 게 그대로였다.
“.......오빠.”
“서준씨.....흡.. 흑.. 흐흑.”
그 사람은 나의 부름에도 두 눈을 꼭 감고 있었다.
“....마취가 안 풀린 거죠?”
간호사가 절망이 담긴 눈으로 내 시선을 피했다. 그리고 조그맣게 죄송합니다, 라는 말을 꺼냈다. 네, 아니요 - 라는 대답만 있어야할 질문에 죄송하다니. 병원이 이상하다. 믿을 수 없다. 죽음이라는 게 이렇게 쉽게 찾아올 거라 생각하지 않았다. 허리 숙여 그 사람을 안았다. 따뜻했다. 날 데워주던 온기를 머금고 있는 그 사람을 꼭 붙든 채 작게 속삭였다.
“........우리 외국 가자. 아무도 모르는 곳으로 도망가자. 작은 집에 갇혀서 서로만 보고 살자. 응? 그렇게 하자. 응...? 대답해야지.”
“은리씨, 이러면 안돼요. 이러면.. 흑.. 이러면.. 안돼요.”
누군가가 우릴 떼어놓으려고 해. 이제 막 행복하려 하는데, 왜 우릴 떼어놓으려는 걸까.
그런 일 불가능하잖아. 우리가 헤어지는 일. 5년을 앓고서 만난 우리인데, 우리가 어떻게 헤어져.
“오빠... 대답..해야지.... 제발. 응....? 아니면 내 이름이라도 불러줘.”
은리야, 하고 불러줘.
후두둑 - 여름비를 담은 무거운 눈물 비가 쏟아져 내렸다.
“오빠......... 내가 잘못했어. 너무... 너무.... 잘못했어. 흑.. 흐흑..”
당신을 버린 죄, 우리의 사랑을 저버린 죄, 당신을 찾아가지 못한 죄, 당신을 선택하지 못한 죄.
당신 앞에 다시없을 죄인이라는걸 아니까, 내가 어떻게 용서 받아야하는 지 알려줘.
당신의 눈앞에서 죗값을 치르게 해줘. 제발.
쏟아진 눈물이 그 사람 귓가를 타고 흘러 시트를 적셨다. 그 사람을 꽉 안았다.
내가 이렇게 껴안는데, 당신은 왜 모르는 척 할까. 맞닿은 가슴에 왜 당신 심장은 뛰지 않는 걸까. 언제고 따뜻한 숨결이 느껴지던 귓가가 왜 이렇게 시릴까.
............당신은 어딜 간 걸까.
**
가윤씨의 도움을 받아 내가 집에 들어갔을 땐 엄마는 울고 있었고, 아빠는 어딘가 전화를 하고 있었다. 그리고 시유오빠는 거실에 우뚝 서서 날 보고 있었다. 세 사람은 시간이 멈춘 사람들처럼 그 자리에 서서 한참이고 날 보았다.
가족 모두가 내게 가출해서 그동안 어디 다녀왔냐며 물었다. 그리고 홀연히 사라진 그 사람의 이야기를 꺼내며 함께 있었냐고 물었다. 난 그 사람 장례식을 치르고, 한 주먹 정도의 가루가 된 백골을 강가에 뿌려주었다고 말하지 못했다. 목소리가 나오지 않았다. 입술을 벌려도 아, 하고 소리 낼 수 없었다. 목소리를 잃었다.
“은리야, 제발 말 좀 해!! 누구 속 타서 죽는 꼴 보고 싶어??!! 밖에서 무슨 일이 있었던 거야! 무슨 일이라도 당했던 거야? 납치라도 당했어?! 그 녀석이 납치했어? 그랬어?!!”
엄마는 화냈다. 불길에 갇힌 자식 바라보는 심정으로 발을 동동 구르며 그 사람을 말했다.
엄마, 말도 안 되게 그 사람 죽었대.
“여보, 화 내지 마요. 무슨 일이 있었는지 차근차근 생각해보렴. 눈에 초점 찾고. 은리야, 무슨 말이라도 해봐. 아빠- 라고 말해도 좋고, 엄마라고 말해도 좋아.”
나도 말해주고 싶었다. 당신 자식 죽었다고.
그렇게 유명하다는 사람이 장례식에 열 명도 채 안 되는 사람이 왔다 갔다고. 그렇게 외로운 장례식장은 처음이었다고.
당신은 당신 자식 죽을 때 뭐하고 있었냐고 소리치고 싶었다.
외롭게 태어나, 외롭게 죽을 때까지 그 사람에게 무얼 해줬냐고 악이라도 쓰고 싶었다.
“은리야, 오빠 봐. 그 사람 짓이야? 그 사람 너희 친 오빠 아니라며. 그 사람이 이랬어? 그 사람 어디 갔어?”
모두들 그 사람 이름을 꺼내며 나를 괴롭혔다.
날 사랑하기만 한 불쌍한 그 사람을 - 자꾸만 나쁜 사람으로 만들었다.
거실에서 도망쳐 방문을 걸어 잠갔다.
‘쾅! 쾅!’
“은리야! 은리야! 엄마가 잘못했어! 엄마가! 제발 문 좀 열어! 응?”
엄마가 빌었다.
“은리야, 아빠랑 이야기 좀 하자. 아빠가 다 사과하마.”
그 사람의 아빠가 사과했다.
미안하다고 빌어야할 사람은 내가 아니다. 아주 외롭게 홀로 가버린 그 사람에게 빌어야한다. 엄마도, 아빠도, 그리고 나도.
문 밖은 시끄러웠다. 죽으면 안 된다고 소리치기도 했고, 문을 부수는 소리가 들리기도 했다. 결국 내가 문을 세게 쾅하고 치고 나서야 잠잠해졌다. 가만히 침대에 걸터앉아 있는데 소리 없이 눈물이 흘러내렸다.
당신이 우나보다. 내가 이유 없이 우는 걸 보니.
죽은 듯 침대에 누워 하루를 보냈다. 울다 잠들었고, 깨면 다시 울었다.
시간이 지날수록 다시 볼 수 없다는 두려움이 선명해졌고, 그럴수록 슬픔의 깊이는 깊어만 갔다.
죽고 싶었다. 가능하다면 늦지 않게 그 사람 뒤를 쫓고 싶었다. 어떤 제약으로도 우리를 묶을 수 없는 그 곳에서 함께 하고 싶었다. 하지만 여기서 죽을 수 없다. 좀 더 우리의 추억이 많이 있는 곳, 낙원의 곁에서 죽으리라.
‘달칵’
2층 거실에는 나를 기다리다 지쳐 잠든 시유오빠가 보였다. 불쌍한 사람. 그리고 미안한 사람. 햇빛 아래에 잠든 그 사람을 잠시 바라보다 시선을 거뒀다. 조용히 그 곳으로 걸어갔다. 제대로 열어보지 못한 금기의 구역에 손을 댔다.
-서준씨가 부탁했어요.
가윤씨가 익숙한 열쇠를 내밀었다. 한 눈에 알아봤다. 우리의 추억을 묻어놓은 그 곳을 열 수 있는 유일한 열쇠라는 걸. 오랜 시간 사용하지 않아 문고리가 뻑뻑했다. 비튼 문고리를 당겼다.
눈이 멀어버릴 것 같았다. 방 하나를 가득 메운 빛이 나는 노란 조각들 위로 노란 조각들이 쏟아져 내렸다. 창가에서 시원하게 가로질러 들어오는 바람에 떠밀려 노란 은행잎이 깃털처럼 사뿐히 내려앉았다. 그 언젠가 19살의 한서준이 내게 보여줬던 기적과 같은 광경이 눈 앞에 보였다.
눈이 부신 빛, 샛노란 은행잎, 그리고 은행잎을 춤추게 하는 바람.
황홀한 광경에 눈물마저 소리죽여 흘러내렸다.
꽤 오랜 시간 쌓인 노란 은행잎은 눈부셨다. 망가진 피아노 위로 올라간 무언가를 들어 보았다. 익숙하게 보이는 눈물 자국이 남은 편지가 보였다. 이름만 써놓고 결국 눈물로 수놓았던 그 편지 아래에 단정한 글씨가 보였다.
-소원 들어줘서 고마워.
당신은 결국 서랍 안에 숨겨놓았던 이 편지를 보았구나. 어떤 마음이었을까. 어떤 그리움이었을까. 당신도 나처럼 울지 않았을 지.
마른 눈물 자국 위로 눈물이 쏟아져 내렸다.
편지 아래에 카세트가 놓여있었다. 처음 보는 씨디가 담겨 있었다. 재생 버튼을 꾹 누르자 보이지 않는 음표들이 노란 은행잎과 섞여 춤을 추며 내려왔다.
익숙한 선율, 익숙한 만큼 슬픈 그 음악.
-늦가을이 되면 노란 비가 내려.
고개를 든 그 곳에, 낮은 음의 목소리를 가진 19살의 그 사람이 피아노 위에 앉아서 웃고 있다. 현실 위를 아슬아슬하게 딛고 있던 우리에게 어울리지 않았던 눈부신 미소. 신만이 허락할 수 있는 아름다운 모습을 하고 있었다.
그 사람 따라 미소 지었다.
“......아직 가을이 끝나지 않았나 봐요.”
19살의 그 사람은 내가 우는 것도 모른 채 웃으며 망가진 피아노 건반을 눌렀다.
“나 알아요. 이 곡이 뭔지.”
내가 말하는 줄도 모르고 그 사람은 피아노 연주를 했다.
“잊지 말라고 했잖아요.”
그 사람이 누르는 건반에선 아무런 소리도 들리지 않는다.
“.......사랑의 세레나데.”
‘보고 싶다’는 우리의 암호.
곡을 마친 그 사람이 천천히 건반에서 손을 뗐다. 카세트의 음악도 함께 멈췄다. 어느새 그 사람은 24살의 한서준 모습을 하고 있었다. 그 사람은 날 향해 연주를 마칠 수 있어서 만족한다는 듯 웃고 있었다. 아름다운 연주 고맙다고, 이제 떠나지 말라고 말하려는 입을 여는 순간 그 사람의 미소가 흐려졌다.
“아, 안 돼.”
세상에서 가장 행복한 웃음을 짓고 있던 그 사람이 바람에 산산이 부서졌다.
와락 껴안은 그 자리에 은행잎이 떨어져 내리고 있었다.
어느새 바람이 멎었다. 은행잎은 더 이상 날리지 않았다.
“흑... 흐흑...”
결국 그 자리에 주저앉았다. 노란 은행잎 위로 무릎을 꿇고 앉아 울었다.
“으, 은리야!!”
“세상에나! 이 방문이 어떻게 열렸지?! 열쇠로도 안 열리던 방문이!”
닫힌 방문이 벌컥 열리며 부모님과 시유오빠가 은행잎 위에 주저앉아 우는 날 감싸 안았다. 죽으려 시도도 하지 못했는데, 난 죽을 수 없게 됐다.
이게 당신의 마지막 선물인가.
결국........ 죽음 보다 삶을 선택하라는 당신의 마지막 부탁인가.
마치 떠날 걸 안 사람처럼 내게 가족을 남겨놓고 간 건가.
초점 잃은 눈에서 눈물이 흘러내렸다.
이제 정말 이별을 받아들여야하는 시간이 왔음을 깨달았다.
앞으로 누구도 사랑할 수 없겠지.
내게 처음부터 끝까지 '사랑'은 당신이니까.
내 걱정에 먼 길 못가고 있었겠죠.
가는 길마저 힘들게 하지 않을게요.
..............조심히 가요. 오빠.
<에필로그>
남녀 구분 없는 청소년 학생들이 입을 다물었다. 언제나 피아노의 음색으로 넘쳐나던 큰 건물에 적막이 가득 했다. 피아노를 치던 이는 피아노에서 손을 내려놓았고, 누군가는 눈에 초점을 잃었다. 학생을 지도하던 선생님들도 모두 멍한 눈으로 천장을 보았다. 그 사람의 가슴에서 태어나, 그 사람의 마음에서 자라났던 모든 이들이 먹먹해진 가슴을 기대지 못해 비틀거렸다.
누군가 탁한 목소리로 말도 안 된다고 말했다.
손가락이 여덟 개라 음악을 포기했던 그였다. 그에게 음악을 다시 찾아준 이가 이제 이 세상에 없다고 했다.
누군가 이럴 수 없다고 울었다.
또 다른 누군가는 아직 갚지 못했다고 소리쳤다.
커다란 건물이 조금씩 일렁이더니 결국 울음으로 차올랐다.
죽을 용기가 없다면, 죽을 만큼 피아노가 하고 싶다면 - 누구든 도와주겠다고 했던 천사 같은 이가, 자신은 굶어도 피아노만큼은 원하는 대로 치게 해주겠다고 말하던 이가, 피아노로 새 생명을 주겠다고 말한 이가 죽었다는 믿기지 않는 소식을 들었다.
몇몇은 이사장실로 달려갔다. 커다란 건물에 어울리지 않게 가장 소박한 터에 자리 잡은 이사장실의 자리에는 곱게 늙은 여인의 영정사진이 올려 있었다. 누군가는 비명을 지르며 주저앉았다.
어젯밤만 해도 자선 음악회에서 가장 흐뭇한 미소로 그 모습을 지켜보고 있던 분이었다. 누구보다도 앞장서서 피아노를 치고 싶어 하는 이들에게 희망을 불어넣어주던 분이었다. 학생 하나하나의 이름을 모두 외우려했고, 모두 자식이라고 말했다. 지나가다 눈이 마주치면 웃어주었고, 힘든 일이 있으면 이야기를 들어주었고, 아픈 이를 먼저 다가가 안아주던 이였다. 결혼도 하지 않고, 아이도 낳지도 않은 싱글 여성으로써 가지기 힘든 모성애를 지녔다며 칭송받고 존경받던 그런 사람이었다.
그런데 그 분이 느닷없이 수면 중 사망했다고 했다.
“웃으면서 돌아가셨어. 아주 행복하게.”
끝없이 이사장실로 몰려드는 학생들을 보며 어느덧 노신사가 된 시유가 말했다. 학생들은 오열해 울었고, 선생님들은 모두들 비틀대며 벽을 짚었다. 모두들 그 사람이 마음으로 낳은 자식이었다.
목 놓아 우는 이들을 마주 보며 시유도 조용히 울었다.
사랑할 수 없더라도 남은 삶의 동반자가 되겠다고 결심해 기꺼이 하고자 하는 대로 따르며 그 곁에 남아 있던 시유였다. 시유는 조용히 액자 속 웃고 있는 여인의 뺨을 쓰다듬으며 조용히 물었다.
“.......이제는 만났으려나. 그토록 사랑한다던 그 사람.”
피아노로 세상을 데우겠다고 말했다. 한 몸 부서져도 피아노를 사랑하는 이들을 만들겠다고 소리쳐 말한 이였다. 20대 초반부터 70대까지 한시도 쉬지 않고 피아노와 피아노를 사랑하는 이들을 위해 일했다. 가난한 이들에겐 음식과 음악을, 마음의 상처를 입은 이에겐 치료와 음악을. 세상의 선물은 음악이라고 말하던 이였다.
울음은 건물 밖으로 새어나갔다. 길거리를 지나던 이들은 눈물 젖은 눈으로 커다란 건물을 올려다보았다. 뉴스로 비보를 전해들은 여인 하나가 건물 앞에서 눈물을 훔쳤다.
“엄마, 왜 울어?”
어린 아이가 고개를 갸웃거리며 물었다.
“아주아주 훌륭한 분이 돌아가셨어.”
“누구?”
“한은리라고. 피아노를 사랑하고, 피아노를 사랑하는 이를 사랑하던 분.”
늘 새로운 글을 쓸 때마다 '꼬릿말 하나만 달려라-'라고 빌었던 첫연재 시절로 돌아간답니다.
새로운 글로 새롭게 시작하는 기분으로 글을 쓰다보면 에너지가 증폭되는 느낌을 받거든요.
그래서 사실 사랑흔적,이라는 글이 이만큼 사랑받게 될 줄 몰랐습니다.
진심으로 감사합니다.
표현력과 깊이가 부족하다는 걸 다시 한 번 배우는 글이 되었습니다.
다음번에 이런 글을 쓸 기회가 된다면 그 때는 지금보다 훨씬 멋진 글을 쓸 수 있도록 노력하겠습니다.
완결 축하드려요. 아직 다 보지 못했는데 벌써 완결이네요. 정말 소설을 빨리 쓰시는 거 같아요. 생각해보니까 작가님을 지금 이순간 때 부터 본게 아니었더라구요. 예전 고등학생들 나왔던 소설 많이 쓰실때 그때 부터 였더라구요. 여튼 오랜만에 봐서 너무 좋았어요. 그냥 그렇다구요ㅋㅋ 다음 소설도 또 바로 나오나요?? 정말 글을 잘 쓰시는 거 같아요. 너무너무 부럽습니다. 음음. 다시한번 완결 축하드리구요. 다음 소설로 또 만나뵙습 좋겠어요. 감사합니다. ^^
ㅜㅜㅜㅜㅜㅜㅜㅜㅜㅜㅜ어떻게너무슬퍼요 너무 아름답게끝났네요ㅠㅠㅠㅠㅠㅠ서준이랑은리는만났겠죠ㅜㅜㅜㅜㅜㅜ
새드 엔딩이지만 아름답게 끝나서 좋네요 양초님 소설 많이 읽어봤지만 새드엔딩은 처음 읽어봐요 원래 새드물은 싫어하지만 잔잔해서 좋은 소설이였어요 은리랑 서준이는 만났겠죠? 해피한 소설로 다시 찾아오시길 기다릴게요
새드로 끝났네요 . 짧게 끝났지만 결코 쉽게 적고 완결 내시지는 않으셨겠죠 . 고생하셨고 전제적으로 정말 좋았어요 . 기회가 된다면 다음소설에서 또 뵈요 . 완결 진심으로 축하드립니다 .
완결 축하드려요. 아직 다 보지 못했는데 벌써 완결이네요. 정말 소설을 빨리 쓰시는 거 같아요. 생각해보니까 작가님을 지금 이순간 때 부터 본게 아니었더라구요. 예전 고등학생들 나왔던 소설 많이 쓰실때 그때 부터 였더라구요. 여튼 오랜만에 봐서 너무 좋았어요. 그냥 그렇다구요ㅋㅋ 다음 소설도 또 바로 나오나요?? 정말 글을 잘 쓰시는 거 같아요. 너무너무 부럽습니다. 음음. 다시한번 완결 축하드리구요. 다음 소설로 또 만나뵙습 좋겠어요. 감사합니다. ^^
진짜 눈물이 뚝뚝ㅜㅜ. 완전 슬퍼요. 진짜 컴퓨터 앞에 두고 통곡 했다는. 완결 축하드리고 글 정말 잘 쓰시는 듯. 이 글 보고 다시금 꺠닳았어요. 아, 너무나 가슴아픈 사랑이네요.
잘 봤어요~ 서준이가 죽어서 슬프지만....사랑흔적다운 결말이었던 것 같아요!! ㅜㅠ
ㅜㅜㅜ서준아 은리야ㅐ 잘가ㅜㅜ
정말 마지막에 눈물이 ~비오듯?!!ㅜㅜ 너무 너무 가슴이 먹먹하고 아름다운 소설이에요 ~ㅜㅜ 다음 소설 기대할께요^^
저 지금 눈물 콧물 쏙쏙 다 뺏어요 ㅠㅠㅠㅠㅠㅠㅠㅠㅠㅠㅠ 아ㅏㅏㅏㅏㅏ 정말 슬프다
가상인물이지만 은리랑 서준이가 다시 만났으면좋겠어요ㅜ물론 그때는 해피엔딩으로요
참고참다가 눈물 흘렷어요..
아이새벽에화장지를얼마나썻는지ㅠㅠㅠㅠ미치겠어요ㅜ가슴이먹먹하다는......ㅠ
ㅠㅠㅠㅠ 양초님 ㅠㅠㅠㅠ 어떡해 ㅠㅠㅠ 넘 슬퍼요 ㅠㅠㅠ.... 서준이..은리..ㅠㅠㅠㅠ 아아. 너무 잘 읽었습니다. 제 가슴이 쿵 가라앉네요. 새드는 역시 감당하기 벅차군요. 완결 너무너무 축하드려요.
새드앤딩 절대 안보려는 사람인데.. 제목보고 피했어야했는데...봐버렸네요.. 중간에 그럴거 같아 읽는거 포기하려고 했었는데..결국 끝까지 읽고서는 눈물까지 흘리고.. 맘이 아파 새드앤딩은 절대 피하는데...흑..흑..흑.. 작가님 존경해요.. 글이 사람마음을 너무 움직이게 하네요.. 이렇게 눈에서 눈물이 똑 똑 떨어지게도 하시고.. 바람둥이와바람둥이도 열심히 보고 있답니다.. 사랑흔적 흑..슬프게 잘보고 물러갑니다.. 바바출간하게 되시는거 축하드립니다..
잘봤어요......!!!
양초님^^저님팬카페회원입니다 우연히완결작을보다가,인소닷에들어와양초님의'사랑흔적'을보게되었습니다 아마제가봤던세드소설중가장기억에남을것같습니다 저도세드소설을써봤지만양초님소설에비하면코끼리발톱의때군요.. 양초님진심으로제가처음으로존경한그리고앞으로도영원히존경할것입니다
아..쩌는데 ㅠ.ㅠ완전 슬프다 엉
이씨 ㅠㅠ 세드였어
이씨 ㅠㅠ 세드였어
설마설마 했는데ㅠㅜㅜㅜ세드로 마무리가 이밤에 눙물이...아침이ㅠ걱정되는군요 ㅠㅠ