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부에 이어~3부로 이어집니다.
2부의 줄거리 정자각을 도라가며 추녀 석가래와 화려하고 고풍스럽운 단청 칠 너무 아름다워 눈길을
뗄수 없군요.
광릉光陵
조선 제7대 세조와 정희왕후의 능
세조世祖(1417~1468. 재위 1455~1468)는 제4대 세종의 둘째 아들로 1453년(단종) 계유정난으로 권력을 잡고 1455년 조카 단종이 상왕으로 물러나자 왕위에 올랐다. 세조는 병약한 문종과 어린 단종을 거치며 떨어졌던 왕권을 강화하기 위해 왕과 육조(이. 호. 예. 병. 형. 공조)를 직접 연결하는 육조직계제를 부활시켰으며 호조 . 호패제를 강화했다. 진관체제를 실시해 전국 방위체제를 수립하고 중앙군을 5위로 개편했다. 1460년. 1467년 두 차례에 걸쳐 북방의 여진족을 소탕하는 등 국방도 튼튼히 했다. 각종 법전을 정비하고 조선의 공식 통치규범인⌜경국대전⌟을 편찬하기 시작했다. 1468년(세조 14) 9월 8일 수강궁(옛 창경궁) 정침에서 승하하였다.
정희왕후貞熹王后(1418~1483)는 판중추부사 파평부원군 윤번의 딸로 1428년(세종 10) 세조와 가례를 올리고 1455년 세조가 즉위하자 왕비에 책봉되었다. 장남 의경세자(덕종)가 20세에 요절한 뒤 차남 예종이 19세에 즉위하였으나 예종마저 재위 14개월 만에 세상을 떠나자 의경세자의 둘째 아들(성종)을 왕위에 올리고 13세 성종을 대신하여 7년 동안 수렴청정하였다.
저 높은 곳에 보이는 능이 조선 제7대 세조대왕 능침
악 樂을 아는 자는 우리나라에서 오로지 진평 대군뿐이다.
세조에 대한 역사적 평가는 여전히 팽팽하다. 과연 세조는 조카 단종의 왕위를 빼앗고 죽여
버린 냉혹한 야심가인가. 아니면 실추된 왕권을 강화하여 조선의 기반을 튼튼하게 했던 부국강병의 군주인가. 모두 다 세조의 모습이다. 다만 자신들이 보고 싶은 세조의 모습에 더 큰 무게를 두는 것일 뿐이다.
세조는 피도 눈물도 없는 냉혈한으로만 몰아세우는 것은 세조를 종합적으로 이해하는데 도움이 되지 않는다. 카리스마 넘치는 세조의 이면에는 음악에 뛰어난 재능을 보이며 아버지 세종에게 극찬을 받았던 모습도 존재한다.
세조가 일찍이 가야금을 타니 세종이 감탄하여 이르기를. 진평대군(세조)의 기상으로 무슨 일인들 이루지 못하겠는가? 하고 (중략)
세조가 또 일찍이 피리를 부니 자리에 있던 모든 종친들이 감탄하지 않는 자가 없어고. 학이 날아와 뜰 가운데에서 춤을 추니 금성대군 이유의 나이가 바야흐로 어렸는데도 이를 보고 홀연히 일어나 학과 마주서서 춤을 추었다. (중략)
세종이 또 문종에게 이르기를. 악樂을 아는 자는 우리나라에서 오로지 진평 대군뿐이니 이는 전후에도 있 아니할 것이다. 세조실록 1권 총서 3번째 기사
세조는 조선시대 그 어느 왕보다 신하들에게 술자리를 많이 베푼 왕이었다. 실록은 곳곳에 세조의 술자리 베풂(설작 設酌)을 기록하고 있다. 신하와 함께 거나하게 취한 세조의 인간적인 모습도 확인할 수 있다. 그러나 세조의 술자리는 공신들을 결속하기 위한 뚜렸한 정치적 목적을 둔 것이었으며 술자리 이상의 무절제를 본인 스스로 용납하지 않았다. 그리고 세자를 향한 절제의 가르침 또한 잊지 않았다.
내가 본래 색色을 좋아하지 아니하여 술을 마시고 싶으면 너(예종)와 여러 장상將相(장군과 재상) 등과 더불어 술을 마시고 절대로 궁첩宮妾과 더불어 술을 마시지 아니하였으니 이는 네가 보는 바이다. 세조 실록 8년(1462) 12월 4일
정희왕후 능.
실제로 세조는 1명의 후궁만을 두었으며 술자리에는 평생의 반려자이자 조강지처였던 정희왕후와 함께 했던 경우가 많았다. 세조는 술자리뿐만 아니라 국가와 왕실의 크고 작은 행사에도 정희왕후를 동반했던 가정적인 군주이기도 했다.
1464년(세조 10) 1월 20일 말년의 세조는 궁을 나서서 왕위에 오르기 전에 살았던 옛집을 찿는다. 그리고 그곳에서 생사를 같이 했던 조강지처 정희왕후와 함께 술자리를 하며 금의환향한 자신을 뿌듯해 한다.
임금이 중궁(정희왕후)과 더불어 하성위 정현조의 집에도 거등하였는데 이곳은 잠룡(潛龍) 때의 구저舊邸이다.
술상을 차리고 음악을 들으면서 영의정 신숙주에게 이르기를.
부귀富貴하여 고향에 돌아가지 아니하면 비단 옷을 입고 밤길을 걷는 것과 같다 하였다.
그 술자리는 아마 정치적 동지이자 반려자였던 정희왕후를 위해 세조가 마련한 최고의
이벤트였을 것이다.
비각碑閣.
조선왕릉 분포
조선 왕족의 무덤은 모두 119기에 이르며 이 가운데 능이 42기이고 원이 13기이며 묘가 64기 이다. 조선 왕족의 무덤은 무덤 주인의 신분에 따라 그 명칭을 달리하는데 능陵은 왕 王과 왕비王妃의 무덤을 말하며 원園은 왕세자와 왕세자빈 또는 왕의 사친私親의 무덤을 말하고 그 외 왕족의 무덤은 일반인의 무덤처럼 묘墓라고 한다.
42기의 능 가운데 북한 개성에 있는 제릉(태조 원비 신의왕후의 능). 후릉(정종과 정안왕후의 능)을 제외한 40기의 능이 남한에 있다. 500년이 넘는 한 왕조의 무덤이 이처럼 온전하게 보존되어 있는 것은 세계에 그 유례를 찿기 힘들며 문화사적 가치가 매우 높다.
비각碑閣 비석이나 신도비를 세워 둔 곳. 신도비神道碑는 능 주인의 업적을 기록한 비석을 가리킨다.
조선왕릉 제향
조선왕릉의 가치는 형태적 보존에만 있지 않다. 조선왕릉을 더욱 더 빛나게 하는 것은 600년 넘게 이어져 내려온 조선왕릉의 제례의식이다. 조선은 건국 이래 산릉제례를 엄격하게 지켜왔으며 1945년 해방 후에는 전주이씨대동종약원 이 능기신제陵忌辰祭(기일에 올리는 제사)의 전통을 이어받아 오늘에 이르고 있다. 매년 왕과 왕비의 제향일에 산릉제례가 엄숙하게 행해진다.
세조대왕 릉으로 들어가는 입구 우측에 작으마한 연못.
첫댓글 기둥에 틈이있는걸보니 목재라는걸알겠는데 정자각의 완전무결한 건축기법에 경탄이저절로 나옵니다. 아시다싶이 세조임금은 계유정난으로 정권과 나라를 획득한 당대의 인군이면서 영웅이아니겠습니까?역사는 승자의몫이라고 관점에따라 다르게 기술하겠지만 본편을봐서 세조임금의 군왕으로써 조선의 부국강병 대업을 도모했는 임금임에는 분명한것같고 수많은 비화들이 성군으로써 긍정적인 면이 많이 부각이되군요?영의정 신숙주에게 이르기를 "부귀하여 고향에돌아가지아니하면 [錦衣還鄕]비단옷을입고 밤길을걷는거와같다[錦衣夜行]의 구절이 인상에남습니다. 영상과 부연설명을 상세히해주시니 이해하기가 쉬웠습니다.감사합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