동창회....동창회관....야구부....
경주고등학교 선수들은 동문들의 손자일 수도 있고 아들일 수도 있고 조카와 동생일 수도 있습니다. 그런 후배들을 동문조차 외면할 수는 없는 일입니다. 오늘 이후, 늘 자랑스럽게 부르던 경주고등학교 교가를 마음 편히 부를 수 없을 것 같아 벌써부터 속이 쓰립니다.
공식적인 입장들을 들은 바는 없지만 제가 알기로는 경주고등학교 동문회는 아주 해결하기 어련운 두 가지 문제를 안고 있다고 생각됩니다. 그 두 가지는 동창회관에 관한 건과 중고등학교 야구부의 존속문제입니다. 시각에 따라 경중의 차이가 있을 수는 있어도 동창회의 정체성을 가름하는 중대한 문제라는 차원에서 이 두 문제는 심각하게 고심한 뒤에 거론해야 할 문제라 생각됩니다.
무엇보다 동창회관 존립에 대한 문제는 매우 시급해보입니다. 동창회관이 잔금을 주지 못해 새로 마련한 동창회관이 경매처분 될 위기에 처해 있다고 합니다. 이는 그 경위를 떠나 동창회 자체로서는 매우 불명예스러운 일이 되어 있습니다. 물론 여기에는 총동창회본부와 지역 동창회간의 소통문제까지 거론되어야 하는 복잡한 문제가 있는 만큼 함부로 떠들 수는 없습니다. 그러나 어떠한 이유가 되었건 ‘경주고등학교동창회’의 위상에 심각한 상처가 생기고 있음은 부인할 수 없을 것입니다.
야구부의 문제는 학교와 재단과 동창회가 다 같이 고민해야 할 필요가 있을 것입니다. 무엇보다 야구부가 동창회의 경비로 움직여야 한다는 사실에 대해 의문점을 제시하고 싶습니다. 물론 처음 야구부가 창설될 당시부터 동창회의 후원이 약속되었고 그런 후원 속에 야구부가 존립해온 것이 사실이고 현재 야구부의 운영현실 역시 동창회를 주축으로 하고 있음이 주지의 사실입니다.
공교롭게도 이 두 가지 문제가 최근 들어 한데 묶이면서 둘 다 최악의 상황으로 치닫고 있습니다. 동창회 경주 본부가 동창회관 건립에 따른 재정 부담에 허덕이게 되면서 야구부에 눈길을 줄 여력이 없어졌습니다. 또한 재경동창회는 이 년 넘게 구성조차 되지 못한 채 표류하느라 재경동창회가 분담할 야구후원금 일체가 이 년 이상 지급보류 되었습니다. 이 같은 여파가 다른 지역 동창회에도 미쳐 현재 동창회 차원의 후원금은 전면 동결되고 있는 것으로 알려져 있습니다.
동창회관에 관한 문제는 각 지역 임원들의 입지와도 연관된 문제이므로 제가 함부로 거론해서는 안 된다고 생각합니다. 그저 동창의 한 사람으로서 안타깝게 생각할 뿐입니다. 그러나 야구부에 관한 한 비록 개인의 자격으로라도 꼭 한 마디는 하고 싶습니다. 어쩌면 야구부에 대해 남다른 안타까움이 드는 것은 제가 그 창단 첫 해부터 경주고등학교 야구를 지켜봐온 장본인이기 때문인 지도 모르겠습니다.
야구부 운영에 관한 문제에서 결국 학교와 재단은 여력이 없다고 하고 있고 동창회는 두 손을 뒤로 묶은 채 먼 산을 바라보고 있는 형국이 되었습니다. 이런 상황 속에서 좋은 선수를 발굴하거나 스카웃하는 것은 고사하고 우리가 키운 경주중학교 선수마저 다른 학교로 빼앗길 위기에 처해 있습니다. 더군다나 경주 인근의 중학교에는 이제 야구부를 운영하는 중학교조차 없어져버린 실정입니다.
우리의 후배 선수들은 시합이 있으면 야구부 학부형들의 경비에 의존해 버스를 전세내서 이동하고 있고 온갖 야구물품도 산발적으로 지원되는 동문들의 물품 이외에는 거의 자력으로 조달해서 사용하고 있는 것으로 알려져 있습니다. 풍족한 예산 없이 그때그때 임시방편으로 꾸려지는 야구부가 좋은 성적을 내는 것은 어불성설입니다. 한 회 두 회 겨우겨우 게임을 치르고 있는 우리 후배 선수들은 학교, 재단, 동창회 어느 한 곳으로부터도 전폭적인 지지를 얻지 못한 채 갈수록 고갈되는 재원 속에 허덕이고 있습니다.
이런 실정을 모른 채 대부분의 동문들은 야구부가 제대로 실력을 내지 못한다고 실망스러워만 하고 있습니다. 그나마 야구장에 응원하러 나오는 열혈동문들이나 카페 나들이라도 하시는 분들은 이런 분위기를 귀동냥 삼아 듣고 있습니다. 이 열악한 상황 속에서도 우리 후배들이 생각보다 잘 뛰고 있음도 알고 계시지요. 그러나 대부분의 동문들은 그마마 관심조차 기울이지 못하고 있습니다. 이것이 실정입니다.
올해 초 목동구장에서 벌어진 황금사자기가 생각납니다. 그날 정말 우리 경주고가 이기기를 갈망했었습니다. 북채를 잡은 손이 터져서 피가 나올 정도로 응원했습니다. 목이 다 쉬어서 사흘 동안 전화도 받지 못할 정도였습니다. 그날 응원을 오신 동문들은 대부분 저와 비슷한 심정이었을 것입니다. 대부분 재경동창회에서 임원으로 활동하시거나 골수 응원 팬들이셨지요. 그 대회에서 제발 좀 좋은 성적을 내서 동창회가 다시 야구부를 관심 있게 봐주기를 간절히 바랬습니다. 학교와 재단을 떠나 동문들에게서조차 외면당하고 있는 야구부가 제발이지 멋진 성적을 내서 보란 듯이 후원 좀 해주십사고 외치는 장면을 보고 싶었습니다.
그러나 안타깝게도 그날의 결전은 패배로 막을 내렸습니다. 응원하는 선배들의 마음은 그저 잠시 허탈하고 잠시 아쉬우면 그런대로 지나갈 수 있습니다. 그러나 당사자인 선수들에게는 한 게임 한 게임이 취학과 취업을 위한 살얼음판일 것입니다. 승리의 환희와 패배의 절망은 선수와 동문 사이에서는 그만큼 극명하게 엇갈립니다. 그런 게임을 우리의 후배들이 지고 말았습니다. 그런 패배를 안고 떠나는데 우물쭈물하는 사이 후배 선수들에게 음료수 값도 챙겨주지 못한 채 버스를 떠나보내고 말았습니다. 공식적으로 후원해온 동창회가 없어진 마당에 개인적으로 격려금을 주기에도 어색한 모습이었습니다. 즉석에서 선금을 걷자는 안도 나왔지만 버스가 떠나는 마당에 나온 궁여지책이었을 뿐입니다.
그날 버스를 떠나보내던 처연한 심정이 아직도 뇌리에 그대로 남아 있습니다. 적지인 서울에 올라와 대등한 경기를 펼친 끝에 패하고 돌아가는 후배들의 심정이 어땠을까요? 패배한 후배들에게 따뜻한 격려금 한 푼 쥐어주지 못한 채 등을 보인 선배들은 최소한 그 자리에서만큼은 동문으로서 참으로 견디기 힘든 순간이었을 것입니다. 그날 마지막까지 남은 동문들이 근처 호프집에서 경주고등학교 교가를 애써 불러 보았지만 그날처럼 교가 부르기가 힘겨운 날이 없었습니다.
재윤후배가 올린 글을 보고 답답한 걸음에 학교로 전화를 해보았습니다. 다행히 경주고등학교 야구부를 해체해야 한다는 것이 공식적으로 거론된 것은 아니라고 합니다. 그러나 이런 풍문이 돌았다는 것은 그 자체로 이미 그런 의견들이 공론화되고 있음을 반증하는 일입니다. 그렇다면 자칫 우리 경주고등학교 야구부가 정말 없어질 지도 모르는 위기가 도래한 것일 수 있습니다.
경주고등학교 야구부는 제가 고등학교 2학년 때 창설되었습니다. 정상복, 한귀식, 이명식, 최필규 같은 동기들이 한 해 진급을 미루면서까지 만들어낸 야구부입니다. 그런 야구부가 벌써 만 26년을 넘겼습니다. 27세, 이제 한껏 제 기량을 발휘할, 성년의 나이가 된 우리 경주고 야구부가 빛나는 우승 트로피 하나 만들지 못하고 거세되어 버리는 장면은 상상조차 할 수 없습니다. 정말 이런 일이 생긴다면 이 일은 학교와 재단의 후원 여부를 떠나 수봉 동문들의 가슴속에 영원히 수치로 남게 될 지도 모릅니다. 4만 아닌 4천의 동문들만 있다고 해도 마땅히 지켜내야 할 야구부입니다.
학교가 어렵다고 해서, 재단이 외면한다고 해서 동문들이 후배들을 버린다면 이것은 정말 경주고등학교동문다운 일이 아닐 것입니다. 경주고등학교가 창설 70주년이 되었습니다. 경주고등학교 선수들은 동문들의 손자일 수도 있고 아들일 수도 있고 조카와 동생일 수도 있습니다. 그런 후배들을 동문조차 외면할 수는 없는 일입니다.
참고로 우리 나라 고교 야구를 이끌어오는 대부분의 학교들은 그 재정적 의존을 대부분 동문들에게 의존하고 있는 것으로 알고 있습니다. 포철공고가 포스코에서 지원하고 천안북일이 한화그룹에서 지원하는 이외에는 대부분의 학교들이 동창들의 후원으로 야구부가 꾸려지고 있는 것으로 알고 있습니다. 물론 100% 동창의 후원은 아니겠지만 명문일수록 동창회 의존도가 높은 것은 분명해보이고 동창회가 아니더라도 개인적인 독지가들의 후원이 만만치 않은 것으로 알려져 있습니다. 특히 축구나 야구 같은 대규모 구기종목은 그 자체로 학교와 동문의 전통과 자랑으로 자리매김하는 운동입니다.
다시 한 번 경주고등학교 야구부가 동문들의 열렬한 후원 아래 마음 놓고 운동할 수 있는 날이 오기를 갈망해봅니다. 그런 그들이 마침내 각지의 강호들을 깨고 서울과 부산과 대구와 광주와 인천 하늘에 빛나는 삼각펜촉을 띄워 올릴 날은 정녕 요원하기만 할까요? 오늘 이후, 늘 자랑스럽게 부르던 경주고등학교 교가를 마음 편히 부를 수 없을 것 같아 벌써부터 속이 쓰립니다.
첫댓글 근영아! 야구부 문제는 참으로 힘든 문제다. 사학의 명문에 야구부가 사라진다니.우리의 자존심이고 각지에 흩어진 전체 동문들의 에너지원인데 안타깝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