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2018년 나해 11월3일 [(녹) 연중 제30주간 토요일]
제1독서 필리피서 1,18ㄴ-26
복음 루카 14,1.7-11
◈ [서울] 연중 제30주간 토요일
2018년 나해 11월3일 연중 제30주간 토요일
제주도에는 많은 관광객들이 찾아옵니다. 여행사를 하는 사람들이
어려워하는 손님들이 있다고 합니다. 큰 소리를 치고, 작은 실수에도
불평을 하고, 원하는 요구사항이 많고, 질서를 잘 지키지 않으며,
정해진 프로그램을 수시로 바꾸려하는 손님들입니다. 어떤
사람들일까요? 많이 배우고, 평소에 대접을 많이 받는 사람들 중에
있다고 합니다. 성직자들 중에도 그런 분들이 있다고 합니다.
자동차 사고의 원인을 분석하면 자동차의 결함보다는 운전자의
과실이 많습니다. 운전자의 안전운전에 대한 교육이 더 필요할
것입니다. 자동차는 안전점검을 받은 후에 출고되기 때문입니다.
운전자들이 교통법규를 잘 지키고, 안전 운전을 하고, 욕심을 부리지
않으면 대부분의 교통사고는 예방할 수 있을 것입니다. 우리의 몸도
그렇습니다. 하느님께서는 우리를 하느님의 모상을 닮은 존재로
창조하셨기 때문입니다. 문제가 생기는 대부분의 원인은 우리 몸의
결함보다는 우리들의 마음이 문제가 생기기 때문입니다. 교만, 욕심,
시기심, 질투, 나태, 탐욕이 우리의 몸을 병들게 합니다.
오늘 복음에서 예수님께서는 우리들의 마음을 이야기하십니다.
“누구든지 자신을 높이는 사람은 낮아지고 자신을 낮추는 사람은
높아질 것입니다.” 저는 예수님의 이 말씀을 머리로는 받아들였지만
저의 마음과 삶으로는 받아들이지 못했습니다. 캐나다에서 지낼
때입니다. 저는 빅터라는 분의 집에서 홈스테이를 하였습니다. 친구가
찾아와서 함께 지내다보니 시간이 늦어서 돌아갈 수 없었습니다. 저는
빅터에게 양해를 구하고 친구를 집으로 데려왔어야 했는데 그렇지
못했습니다. 다음 날, 아침에 빅터는 낯선 손님 때문에 당황을 했고,
저에게 분명한 어조로 이야기 했습니다. ‘내가 당신을 존중하니,
당신도 나를 존중하면 좋겠습니다.’ 짧은 말이지만 제게는 깊은 울림을
주는 말이었습니다.
가장 사랑하고, 존중해야 하는 부부도 그렇게 하지 못해서 서로
다투고, 헤어지는 아픔을 겪게 됩니다. 우리사회에도 그와 같은
존중과 배려가 없기 때문에 갈등과 분열이 생기는 것입니다. 상대방을
소유하려하기 때문입니다. 욕망이라는 이름의 전차에서 내려오지
못하기 때문입니다. 자연은 우리에게 겸손을 보여주고 있습니다.
풍요로운 달인 10월도 시간이 되면 어김없이 11월에게 자리를 내
줍니다. 아름다운 색으로 멋을 내던 나뭇잎도 바람이 불면 떨어져
땅으로 내려옵니다. 그리고 우리에게 말하는 것 같습니다. 여러분도
이렇게 살아야 합니다.
바오로 사도는 배움이 많았고, 열정도 있었고, 종교적인 확신도
있었습니다. 예수 그리스도를 믿고 따르는 사람들을 박해하는 것은
정의로운 일이고, 율법을 지키는 일이라고 생각했습니다. 그러나
바오로 사도는 다마스쿠스로 가는 길에 예수님을 만났습니다. 배도
버리고, 그물도 버리고 예수님을 따랐던 제자들처럼 바오로 사도는
배움도, 열정도, 종교적인 확신도 버리고 예수님을 따르는 제자가
되었습니다.
바오로 사도는 이렇게 이야기 했습니다. ‘이제는 내가 사는 것이
아니고 그리스도께서 내 안에 사시는 것입니다. 그리스도가 내 생의
전부입니다. 나는 살아도 그리스도를 위해서 살고, 죽어도 그리스도를
위해서 죽습니다.’ 바오로 사도에게 삶의 중심은 ‘예수 그리스도’
였습니다. 예수님께서 그러셨던 것처럼 ‘하느님의 보다 큰 영광’을
위한 삶이었습니다. 이러한 삶이 가능한 것은 섬김을 받을 자격이
있지만 섬기려고 오셨던 예수 그리스도를 따랐기 때문입니다.
쉽고 편한 길이 있지만 굳이 좁고 힘든 길을 가려하는 사람들이
있습니다. 우리가 믿고 따르는 예수님께서도 그런 길을 가셨습니다.
사람들이 왕으로 추대하려 할 때 오히려 다른 곳으로 몸을
피하였습니다. 죽음이 기다리는 곳, 십자가와 가시관을 가지고
올가미를 씌우려는 이들이 있는 예루살렘을 향해 고난의 길을
걸어가셨습니다.
예수님께서 왜 그토록 험난한 길, 십자가의 길, 죽음의 길을
가셨을까요?
산악인들이 목숨을 걸고 개척한 길은 등산로가 됩니다. 많은 사람들이
그 길을 따라서 험한 산을 안전하게 오를 수 있습니다. 인생은 어쩌면
아무도 가지 않은, 아무도 오르지 않았던 산을 오르는 것과 같습니다.
두렵고 떨리는 인생의 길에 먼저 가신 이들의 발자국은 위로와 희망이
됩니다.
예수님께서는 꿈을 이룰 수 없어도, 고난이 닥쳐와도, 별을 잡을 수
없어도 오늘 주어진 길을 걸어가라고 하십니다. 그 시작은 겸손입니다.
겸손의 다른 이름은 존중과 배려입니다.
† 성부와 성자와 성령의 이름으로 아멘.
- 서울 대교구 조재형 가브리엘 신부 -
◈ [수원] 요셉 신부님의 매일 복음 묵상 - 교만은 돼지비계처럼
2018년 나해 11월3일 연중 제30주간 토요일
<교만은 돼지비계처럼>
복음:루카 14,1.7-11
새를 파는 가게에 잘생긴 카나리아가 한 마리 있었습니다. 이
카나리아는 아름다운 노랫소리로 많은 사람들의 사랑을 받았습니다.
어느 날 이곳을 지나가던 마을의 부자가 그 카나리아를 샀습니다.
카나리아는 고운 소리로 노래를 불러 집안사람과 손님들, 이웃
사람들을 즐겁게 해주었습니다. 새 주인이 된 부자도 그 카나리아를
자랑하고 칭찬하기에 바빴습니다.
그러자 카나리아는 우쭐해졌습니다. 그래서 밤이 되어도 노래를 그칠
줄 몰랐습니다. 카나리아의 노랫소리를 칭찬하던 사람들도 이제는
시끄럽다고 항의를 할 정도였습니다. 아무도 카나리아의 노랫소리에
귀를 기울이지 않았습니다. 결국 그 부자는 카나리아를 헐값으로
시장에 내다 팔았습니다. 그 카나리아를 사가는 사람은 아무도
없었습니다.
인생을 망칠 수 있는 가장 큰 적은 자신 안에 있습니다. 자아라고 하고
교만이라고도 합니다. 잘 나가다 교만해져 망해버리는 수많은
사람들을 우리는 뉴스에서 어렵지 않게 찾아볼 수 있습니다.
성공할수록 조심해야하는 것이 교만해지는 것입니다.
사제가 되기 전부터 알고 지내던 출신 본당 자매님이 계셨습니다.
서품 받을 때도 앞장서 저를 도와주신 분입니다. 사제가 된지 몇 년
후, 그 자매님과 통화를 하게 되었는데 저에게 따끔한 말을 하는
것이었습니다.
“저는 신부님의 겸손하고 온유한 모습이 좋았었는데, 지금은 안
그래요.”
그러고 보니 전화를 받는 투가 퉁명스럽기 그지없었습니다. 그리고
그런 투로 신자들을 대하고 있었습니다. 신자들이 치켜세워주니
자신도 모르게 그렇게 되었던 것입니다. 교만은 교만하고 싶어서
교만해지는 것이 아니라 저절로 교만해지는 것을 방치했기 때문에
교만해지는 것입니다. 교만은 마치 잡초처럼 원하지 않아도 저절로
자라나 나를 망쳐버립니다.
나이 많은 한 수도자가 정원에서 흙을 고르고 있었습니다. 그때 그
수도원에 들어온 지 얼마 안 되는 조금은 교만한 젊은 수도자가
그에게 다가옵니다. 경험 많은 수도자는 후배 수도사에게 이렇게
말합니다.
"이 단단한 흙 위에다 물을 좀 부어주겠나?”
젊은 수도자가 물을 부었습니다. 그러자 물은 옆으로 다 흘러가고
맙니다. 그러자 이 나이 많은 수도사는 옆에 있는 망치를 들어
흙덩어리를 깨기 시작했습니다. 그는 부서진 흙을 모아놓고 젊은
수도자에게 다시 한 번 물을 부어보라고 말합니다. 물은 잘
스며들었고 부서진 흙을 뭉쳐 가기 시작했습니다. 나이든 수도자는
이렇게 말합니다.
“이제야 흙 속에 물이 잘 스며드는구먼. 여기에 씨가 뿌려진다면 꽃을
피우고 열매를 맺을 것이야. 우리 역시 깨어져야 하느님께서 거기에
물을 주시고, 그럴 때 씨가 떨어지고 꽃이 피고 열매가 맺힐 수 있는
거지. 우리 수도자들은 이것을 ‘깨어짐의 영성’이라고 얘기한다네.”
소련의 반체제 인사 알렉산더 솔제니친은 “교만은 돼지의 비계와 같이
인간의 마음에서 자란다.”고 했습니다. 비계는 운동을 하지 않으면
저절로 생기게 돼 있습니다. 끊임없이 낮아지는 연습이 없으면 나도
모르게 나 자신이 교만 때문에 망가집니다. 깨어짐의 영성은
수도자들만의 것이 아닙니다. 모든 사람이 부서지고 낮추인 마음을
가져야합니다. 그리고 그 작업은 자신만 할 수 있습니다.
오늘 복음에서 예수님은 높은 자리에 앉지 말라고 하십니다. 끊임없이
가장 낮은 자리를 찾아야합니다. 의식적으로 그렇게 해야 합니다.
저절로 교만해지기는 하지만 저절로 살이 빠지지 않듯 저절로
겸손해지지 않습니다. 겸손은 마치 흐르는 물의 방향을 거슬러
올라가는 것과 같습니다. 오늘도 겸손하기 위해 맨 마지막 자리를
의식적으로 찾는 노력을 하지 않는다면 내일은 더 교만해져 있을
것입니다.
- 수원 교구 전삼용 요셉 신부 -
◈ [수원] 하느님 앞에 겸손한 자세 / 조욱현 토마스 신부 강론
2018년 나해 11월3일 연중 제30주간 토요일
복음: 루카 14,1.7-11: 스스로 높이는 자는 낮아진다.
오늘 복음에서 예수께서는 바리사이파 사람의 집에 초대를 받아
가셨다가, 사람들이 모두 상석에 먼저 앉으려고 하는 것을 보시고
“누구든지 자신을 높이는 이는 낮아지고 자신을 낮추는 이는 높아질
것이다.”(11절)라고 하셨다. 잔치의 초대를 받았을 경우의 예를
들으신 것은 다른 것이 아니다. 바로 겸손의 덕을 갖추라는 것이다.
하느님 앞에 겸손한 자세를 가지라는 말씀이다.
“너보다 귀한 이가 초대를 받았을 경우, 너와 그 사람을 초대한 이가
너에게 와서, ‘이분에게 자리를 내드리게’ 할지도 모른다.”(8절) 이런
일을 당하면 얼마나 창피할까! 이것은 도둑질하다 붙잡혀서 훔친
물건을 도로 내 놓는 것과 같을 것이다. 그는 그것을 가질 자격이
없으므로 가지고 있던 것을 내어 놓아야 한다. 그 자리에 앉을 자격이
있는 온유하고 겸손한 사람은 그 자리를 남에게 양보한다.
그러기 때문에 그런 사람은 아무도 그를 헛된 자만에 차 있다고 보지
않는다. 그런 사람은 받아 마땅한 명예를 누리게 될 것이다. 이를 두고
예수님께서는 “너를 초대한 이가 너에게 와서, ‘여보게, 더 앞자리로
올라 앉게’ 할 것이다.”(10절)라고 하신다. 윗자리에 앉으려고 하면
마땅히 빛나는 덕행으로 다른 사람을 앞서야 한다. 덕행의 법칙은
뽐내지 않고 자기를 낮추는 마음이다.
겸손한 신앙인이 있고 교만한 신앙인이 있다. 우리는 모두 하느님
나라를 자신해서는 안 될 것이다. “누구든지 자신을 높이는 이는
낮아지고 자신을 낮추는 이는 높아질 것이다.”(11절) 우리가 만일
참된 겸손으로 오를 수 있는 높은 곳에 닿고자 한다면, 선행으로
올라가야 한다. 이것이 야곱이 보았던 사다리이다. 사다리의 양쪽
장대는 우리의 영과 육이며, 가로대는 겸손과 수양으로 만들어져 있어
그것들을 밟고 하느님께로 올라가는 것이다.
그 겸손의 덕을 어떻게 갖추라는 것인가? 그것은 사실을 사실대로
받아들여 인정하는데 있는 것이다. 즉 자기 자신의 처지를 있는
그대로 인정하는 것이다. 자신의 처지를 올바로 인정할 수 있을 때,
우리는 겸손되이 하느님께 자비를 청했던 세리의 기도의 자세를
이해할 수 있을 것이다. 그러한 겸손하고 가난한 자의 기도를
하느님께서는 기꺼이 들어주신다고 하였다. 그리고 참으로 올바른
사람으로 인정받았던 세리였기 때문이다.
이제 모든 삶의 균형을 이루신 예수님의 마음과 삶 앞에, 복음의 말씀
앞에 자신의 모습을 비교해서 살펴본다면 자신도 모르게 고개 들고
나오는 교만을 이길 수 있을 것이다. 진정 겸손한 자세로 주님 앞에
자신을 있는 그대로 드러내 보이고 자비를 청할 수 있는 우리 되도록
은총을 구하자.
- 수원 교구 조욱현 토마스 신부 -
◈ [수도회] 수도원의 심부름꾼이 되기 위해서!
2018년 나해 11월3일 연중 제30주간 토요일
수도원의 심부름꾼이 되기 위해서!
수도회 안에서 성직 수도자로 살아가면서, 뵐 때 마다 감사함과
미안함의 감정을 동시에 교차하게 만드는 분들이 계십니다. 바로
평수사님들입니다.
평수사님들의 삶은 마치 깊은 산중에 홀로 핀 한 송이 야생화와도
같습니다. 누가 바라보든 바라보지 않든, 서있는 그자리에서 활짝
피어 하느님을 찬미합니다.
수도회 안에서, 언제나 동일하며 동등한 신원의 수도자임에도
불구하고, 언제나 숨은 곳, 낮은 곳에서 묵묵히 봉헌의 삶을
살아갑니다.
저희 살레시오회 같은 경우, 성직 수도자와 평수도자 두 신원 사이에
그 어떤 차이도 없습니다. 다만 차이가 있다면 제대 위에서 봉사하기
위한 사제직분의 수여 여부, 그것 뿐입니다.
세상사람들의 시선을 뒤로 하고, 교회와 수도회를 위해, 주님의 영광을
위해 묵묵히 자신의 자리를 지키는 수사님들의 모습이 참으로
고마우면서도 존경스럽습니다.
참으로 아름다운 성소며 하느님께서 기뻐하실 성소라고 확신합니다.
숨은 일도 보시는 주님께서, 그분들의 헌신과 희생을 높이 평가하시고,
크게 칭찬하시리라 확신합니다.
이런 면에서 페루 리마 출신의 도미니코회 소속 마르티노 데 포레스
(1579~1639) 수사님을 눈여겨볼 필요가 있습니다. 그는 수도회 입회
후 평생토록 작은 길, 낮은 길만을 추구했습니다. 그래서 당시
사람들은 그에게‘빗자루 수사’라는 별명까지 붙여주었습니다.
스페인 귀족 출신의 아버지와 파나마 노예 출신의 어머니 사이에
출생한 마르티노는 어린 시절부터 서자(庶子)라는 이유로, 피부색이
다르다는 이유로 큰 차별 대우와 서러움을 겪었습니다.
그러나 마르티노는 멸시받고 천대받을 때에도 결코 누군가를
분노하거나 원망하지 않았습니다. 자신 앞에 펼쳐진 참혹한 현실
앞에서도 결코 좌절하거나 포기하지 않았습니다. 호의적인 시각으로
만사를 바라봤고, 초긍정 마인드로 현실을 마주했습니다.
마르티노는 힘겨울 때 마다 더욱 주님의 이름을 불렀습니다. 참으로
아이러니하게도, 마르티노를 힘들게 했던 대죄인들은 떵떵거리며
살았지만, 무죄했던 그는 틈만 나면 그들의 악행을 대신 보속하는
마음으로 열심히 기도했으며 자선을 베풀었습니다.
마르티노는 도미니코 재속 3회 회원이 되었지만, 거기에 만족하지
않고, 정식으로 도미니코 수도회에 정식으로 입회하여 평수사로
서원하였습니다. 수도회 입회 이유도 참으로 특별합니다. ‘수도원의
심부름꾼이 되기 위해서!’
그런 입회 사유에 걸맞게 마르티노 수사님은 평생토록 수도회 안에서
낮은 일, 굳은 일, 아무도 알아주지 않는 일을, 아주 기쁘고 행복한
얼굴로 수행해 나갔습니다. 형제들과 가난한 사람들을 위한 이발
봉사, 외과 치료, 의류 수선을 하느님이 주신 직분으로 여겼습니다.
세상의 모진 사람들로부터 괄시를 받을 때 마다 마르티노 수사님은
이렇게 외쳤습니다. “제가 이 세상에 태어난 것은 얼마나 기뻐해야 할
일인지 모릅니다.”
세상의 악인들로부터 천대를 당할 때 마다 마르티노 수사님은
스스로를 향해 이렇게 되내었습니다. “하느님만은 저를 알아주실
것입니다. 그분만은 저를 사랑해주신다는 것을 굳게 믿습니다.”
마르티노 수사님께서 병들고 냄새나는 한 행려 병자를 자기 침실로
모시자, 한 동료 수사가 불같이 화를 냈습니다. 그러자 그는 이렇게
말했습니다. “자비심이 깨끗함을 훨씬 능가합니다!”
출중한 성덕을 눈여겨본 여러 동료 수도자들이 앞다투어 마르티노
수사님의 영적지도를 받기 위해 몰려오자, 그는 이렇게 말했습니다.
“저는 그저 불쌍한 노예일 따름입니다.”
우리 시대는 마르티노 수사님 같은 분들의 더많은 현존을 필요로
합니다. 저희 살레시오회도 청소년들의 교육자로서, 도움이 필요한
청소년들을 위해 자신을 희생하고 헌신할 평수사님들을 수시로 찾고
있습니다. 자격은 간단합니다. 35세 미만, 고졸 이상, 미혼 남자로,
청소년 사목에 관심이 있는 분이면 됩니다.
(살레시오회 평수사 성소 문의: kys7943@sdb.kr)
(양승국 스테파노 SDB)
- 살레시오회 양승국 스테파노 신부 -
◈ [수도회] 자신을 높이는 이는 낮아지고 자신을 낮추는 이는 높아질
것이다.(루카 14, 11) 한상우 바오로 신부 강론
2018년 나해 11월3일 연중 제30주간 토요일
자신을 높이는 이는 낮아지고 자신을 낮추는 이는 높아질 것이다.
(루카 14, 11)
어쩌면 이렇게 우리 현실을 잘 표현하실까 감탄하게 됩니다.
모든 행복은 근원은 낮추는 마음가짐에 있음을 깨닫습니다.
아름다운 단풍도 때가 되면 아래로 떨어져 내립니다.
인격성숙이 바탕이 되지 않은 이 많은 것은 물거품이
될 때가 많습니다.
하느님 안에서 높일 것 없는 모자라고 어설픈 우리들의 본모습입니다.
예수님께서는 더 낫고 더 아름다운 삶이
바로 낮추는 삶임을 우리들에게 잘 가르쳐 주십니다.
낮추는 삶이 서로를 살리는 참된 실천입니다.
낮추는 삶이 바람직한 관계정립의 참모습입니다.
자신을 낮추면 더더욱 풍요로운 만남이 펼쳐집니다.
단풍의 길도 사람의 길도 낮추는 길이 활짝 열리는 생명의 길입니다.
그 길을 예수님께서 먼저 실천하시며 걸어가셨음을 기억합시다.
- 구속주회 한상우 바오로 신부 -
◈ [기타] 11월3일 (토) - 감사기도
오늘은 “감사기도”에 대해서 은혜의 시간이 되겠습니다.
빌립보서 4장 6절~7절 말씀에 “아무 것도 염려하지 말고 다만 모든
일에 기도와 간구로, 너희 구할 것을 감사함으로 하나님께 아뢰라 7
그리하면 모든 지각에 뛰어난 하나님의 평강이 그리스도 예수 안에서
너희 마음과 생각을 지키시리라”라고 말씀하십니다.
우리가 살아가는 동안에 얼마나 많은 염려를 하십니까? 얼마나 많은
고민을 하십니까? 때로는 슬픔에 쌓여 있기도 하고 가슴이 철렁철렁
내려앉으며 괴로워 슬퍼하기도 합니다.
하지만 오늘 말씀은 결코 아무것도 염려하지 말라 말씀하십니다.
우리가 해야 할 것은 모든 일에 기도와 간구로 우리의 필요한 것을
하나님께 아뢰라는 것입니다.
즉 감사기도를 하라는 것입니다. 어떤 상황이든지 어떤 어려움이던지
좋은 일에 감사하는 것 뿐 아니라 너무나 힘든 고통스러운 일에도
감사함으로 하나님께 기도하면 하나님이 합력하여 가장 좋은 방법을
주시게 됩니다.
이제부터 이 고민 저 고민 염려 근심 마십시오.
하나님이 원하시는 기도와 간구로 문제를 해결하고 기도와 간구를
하되 감사로 기도하면 모든 지각에 뛰어난 하나님의 평강이 우리의
마음, 생각을 반드시 지켜주신다는 것입니다.
하나님을 기쁘시게만 하면 우리의 삶을 하나님이 책임져 주신다는
것입니다. 할렐루야!
- 인천 부평 사랑밭 교회 권태일 목사 -
◈ [청주] 겸손한 사람|반신부의 복음 묵상
2018년 나해 11월3알 연중 제30주간 토요일 (루가14,1.7-11)
겸손한 사람
“누구든지 자신을 높이는 이는 낮아지고 자신을 낮추는 이는 높아질
것이다.”(루가14,11). 주님께서는 몸소 자신을 낮추셔서 인간으로 이
세상에 오셨고 마구간에서 그 낮아진 모습을 보여주셨습니다.
(필리2,7-8) “섬김을 받으러 온 것이 아니라 섬기러 왔고, 또 많은
이들의 몸값으로 자기 목숨을 바치러 왔다.”(마르10,45)하신 대로
벌거벗은 채 죽음을 맞이하셨습니다.
바리사이들은 자신의 위엄에 대해 대단히 까다롭게 굴었습니다.
그들은 회당에서 윗자리에 앉기를 좋아하였고 사람들이 보는
앞에서는 특별한 예우를 받고자 했습니다. 그들은 다른 사람들에 대한
우위를 주장하였고 윗자리에 앉을 권리가 있다고 확신하였습니다.
그리하여 하느님의 나라에서도 역시 그런 위치를 당연히
차지하리라고 생각하였습니다. 그러나 예수님께서는 분명하게
말씀하십니다. “누구든지 자기를 높이는 사람은 낮아지고 자기를
낮추는 사람은 높아질 것이다”. 그렇다고 혹 누가 만일 윗자리에 앉을
욕심으로 끝자리에 앉는 척한다면 그는 끝자리에 앉은 것이 아니고
따라서 결코 윗자리에 오르지 못할 것입니다.
“잘나가는 파리들만 모여 사는 높은 동네에 어느 날 밑바닥에서 놀던
파리 한 마리가 냉큼 날아들었습니다. 잘나가는 파리들이 물었습니다.
‘아니, 당신은 저 밑바닥 파린데 어떻게 여기까지 날아왔소?’ 그러자
밑바닥 파리가 말했습니다. ‘예, 줄을 잡았지요. 소꼬리를 꽉 잡고
있다가 소가 휙 꼬리치는 덕에 이곳까지 올라오게 됐죠.’ ”. 우리도
줄을 잡아야 하나요? 줄잡고 올라온 것이 그리 배가 아프던가요?
자신을 낮추는 것이 하느님 나라에 받아들여지는 첫 번째 조건입니다.
자신을 낮추는 겸손은 천국의 문을 열고, 교만은 지옥의 문을 엽니다.
성 아우구스띠노는 “교만은 천사를 악마로 만들었으나 겸손은 인간을
천사로 만들었다”고 말씀하셨습니다. 예수의 성녀 데레사는 “힘써
조심할 일은 마음속에 일어나는 생각, 특히 남보다 ‘내가 낫다’ 는
생각입니다. ‘내가 더 고참이다.’, ‘내가 더 연장이다’, ‘일은 내가 더
했는데 나보다 더 저 사람을 알아주는군.’하는 따위의 말은 물론 그런
생각조차 마음에 두는 일이 절대로 없도록 하십시오.” 하고 겸손을
가르치셨습니다.
오늘 하루라도 겸손함으로 주님을 찬미하시기 바랍니다. “주님 앞에서
자신을 낮추십시오. 그러면 그분께서 여러분을 높여 주실 것입니다.”
(야고 4,10). 시편에는 “주님께서는 높으셔도 비천한 이를 굽어보시고
교만한 자를 멀리서도 알아보신다.”(시편138,6).고 적고 있습니다.
“하느님의 ‘은총의 샘’은 겸손한 자의 '마음의 골짜기’로 흘러듭니다.”
(성 프란치스코 살레시오). 겸손하지 않고서는 하느님의 은총을 받을
수 없을 것입니다. 깊은 믿음으로 우리의 과거와 현재, 미래를 주님께
온전히 맡겨드렸으면 좋겠습니다. 더 큰 사랑으로 사랑합니다.
- 청주교구 반영억 라파엘 신부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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