프랑코총통... 기억나는 사람도 있을겁니다. 독재자로 유명했죠.
경제규모(GDP)에서 한국보다 1.5배가 높고 정치문화적수준도 선진수준인 유럽, 그 유럽의 스페인도 70년대중반까지는 군사독재체제하에 있었습니다. 2011년 현재는 부동산투기로 저축은행의 반이 파산했고 이탈리아와 더불어 유럽경제위기의 새로운 도화선으로 부상한 나라로 널리 알려져있죠. 스페인과 이탈리아 두나라는 멀지 않아 국가 그리고 주요은행의 신용등급이 또 떨어질건데 두나라보다 먼저 파산위기에 처한 유럽3개국 아일랜드, 그리스, 포르투갈과는 경제규모나 그 파괴력에서 비교가 안되는 나라이죠.
위에서 말한 프랑코총통과 카를로스국왕1세는 스페인의 근대사에서 빼놓을 수 없는 인물입니다.
1970년대 중반 군사독재자이자 학살자로 악명이 높았던 스페인의 프랑코총통이 죽었습니다.
프랑코총통의 유언에 따라 통치자로 즉위한 카를로스국왕은 예상을 뒤업고 군사독재를 종식시킵니다. 온몸으로 부딪쳤죠. But 오랫동안 권력에 맛들인 집단이 손가락만 빨고 있었겠습니까. 군인들이(군부) 당연히 들고 일어났죠, 군사쿠데타(military coup d'tat)가 일어났을때 카를로스국왕은 용감하게 TV방송에 나가 국민들에게 쿠데타반대의사를 분명히 하고 "죽일테면 죽여봐라"고 했습니다. 혼란과 무기력에 빠진 스페인 그리고 국민들에게 명확한 비전을 제시했고 말로만이 아닌 실천으로 그 비전을 또한 실현했습니다.
요즘 말장난으로 사태의 본질을 가리는 넘들이 전 세계에 넘치는거 같아서인지 스페인국왕 후안카를로스1세가 떠올랐나봅니다. 내기억에 프랑코총통 참 싫었거든요 웬지...권총차고 선글라스끼고 우쭐거리며 다니던 게. 프랑코총통은 전쟁은 잘했다고 합니다. 스페인도 경제기적을 이룬 나라인데 경제기적이룬 나라는 세계에 널렸죠, 동아시아의 토끼모양 국토를 가진 어느 나라만 경제기적을 이룬 게 아닌데 가끔 착각합니다. My 나라만 경제기적을이룬나라로...
자 이제 작년에 칠순을 맞이 했던 스페인 국왕 후안 카를로스 1세(부부)에 관한 얘기봅시다. 퍼온 글임.
<퍼온 글>
1931년 스페인에 공화제 정권이 들어서면서 조부 알폰소 13세를 비롯한 스페인 왕가 일족이 로마에 망명해 있었던 때에 바르셀로나 백작 후안과 양시칠리아의 마리아 메르세데스 공주의 장남으로 태어났다.
1948년 당시 스페인 총통이었던 프란시스코 프랑코의 설득으로 아버지와 함께 고국으로 돌아와 1955년 육군에 입대, 1961년, 콤플루텐세 대학교를 졸업하는 등 프랑코 사후, 지도자가 될 수 있도록 후계자 수업을 받았다.
1975년 11월 22일, 프랑코가 사망하자 그의 유언에 따라 즉위한 후안 카를로스 국왕은 기존 프랑크 군사정부의 기조를 계승하여 독재 체제를 취할 것이라는 예상을 뒤엎고, 민주화운동을 주도하였다. 후안 카를로스 국왕은 1976년 후안 곤살레스 수상의 지도하에 양원제를 수립했으며, 1977년 41년 만에 총선거를 실시하여 국민들이 스스로 상·하원위원들을 선출하도록 했다.
1978년에는 신(新)헌법을 승인시켜 입헌군주제를 확립시켰으며, 프랑코 독재정권당시 구속되었던 민주인사를 석방하였다. 물론 프랑코가 금지했던 정당 활동도 허용하였다. 이러한 민주화정책들은 프랑코의 군사독재로 얼룩졌던 에스파냐에 민주주의를 심는 성과를 거두었다.
1981년, 군의 일부 보수우파세력이 의회를 점거, 내각 각료와 의원 350여명을 인질로 하여 프랑코 시대 체제로의 복고(復古)를 요구하였으나 이를 끝까지 거부, 민주주의를 유지시키는 동시에 신속히 반항 세력을 회유하여 투항시켰던 쿠데타 미수 사건으로 국민들의 절대적 신뢰를 얻게 되었으며 신실하고 모범적인 공무 수행으로 국민들의 존경을 받는 20세기 군주 중 한 사람이 되었다.
지난해 나란히 칠순을 맞은 스페인 국왕 후안 카를로스 1세와 왕비 소피아는 유럽에서 가장 사랑받는 군주 부부로 손꼽힌다.
그런 왕비가 지난달에는 고작 13파운드(한화 약 2만6000원 상당)에 불과한 초저가 항공 라이언에어를 타고 런던을 찾은 것. 전 그리스 국왕이었던 남동생을 문병하는 지극히 ‘개인적인 일’인 만큼 가장 저렴한 항공을 선택했다는 왕실의 설명에도 불구하고 지나치리만치 검소한 왕비의 여행은 많은 이들의 귀를 의심케 했다.
두 차례나 우리 나라를 방한 했던 후안 카를로스 스페인 국왕과 소피아 왕비는 많은 사람들을 놀랄 정도의 소함을 보여 주었다. 본국에서 쓰던 비누를 그대로 갖고와 쓰다가 남은 것을 귀국때 가져 갔는가 하면 객실에 비치된 20여장의 수건들 가운데 하루에 한두장말을 사용했고 객실에 비치된 홈바도 전혀 쓰지 않은 채 호텔측이 밤에 무료로 제공한 쵸콜렛만 먹었다.
또한 소피아 왕비가 가 져 온 화장품도 두 세 가지에 지나지 않았다고 한다. 그녀는 인사동 고가구점에 들렀을 때 어느 고가구 한개를 사고 싶어하다가도 값이 비싸다는 사실을 알자 포기하고 값싼 기념품 열점 정도만 사고 말더라는 얘기도 있다.
왕자로 태어났으나 오랜 독재정권 시절 할아버지와 아버지를 따라 유럽 각국을 떠돌며 망명 생활을 했던 카를로스 국왕, 제2차 세계대전 당시 모국 그리스에서 추방당해 이집트와 남아프리카 등지를 떠돌아야 했던 소피아 왕비에게 검약은 타고난 왕족의 혈통만큼이나 당연한 본능이었을 것이다. 전 세계 왕실 중 가장 적은 예산을 집행할 뿐 아니라 유럽 왕 중 가장 적은 보수를 자청한 후안 카를로스 왕에게 전용기란 불필요한 호사에 불과하다.
해외 순방 때는 군용기를 이용하고, 다른 왕실 가족은 스페인 국적기를 이용하는 것으로 충분하다는 것. 이런 남편의 뜻을 받들어, 소피아 왕비는 2800개의 방으로 이뤄진 마드리드의 웅장한 레알 궁전을 마다하고 근교의 소박한 자르주엘라 궁을 사저로 선택했다. 엘리베이터가 오래돼 애견과 함께 갇히는 일도 적지 않다는 소문.
그렇다면 스페인의 반응은 어떠했을까. 국민은 국왕 부부의 소박한 삶에 무한한 애정과 신뢰로 답했다. 한 설문조사에서 가장 존경하는 인물로 카를로스 국왕을 1위로, 소피아 왕비를 4위로 꼽은 것. 반세기를 해로하며, 솔선수범하는 근검절약으로 국민의 사랑을 한 몸에 받는 스페인 국왕 부부, 동화책 속 왕자님과 공주님의 엔딩 멘트에나 어울릴 법한 “They lived happily ever after(그후로 오랫동안 행복하게 살았습니다)”의 50년 후를 상상한다면 딱 이들의 모습이 아닐까.
첫댓글 긴글...차분할 때 봐야겠네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