사의재 아욱국 주막 할머니
지난 주 제주도, 서울, 공주, 광주 등에서 오신 일행과 강진 답사를 다녔다. 강진의 다산박물관을 거쳐 귤동의 다산초당을 답사하고, 이후 정약용이 좋아하던 아욱국을 먹으러 가기로 했다.
스님과 함께 강독 모임에서 헤겔의 『정신분석학』이나 수운 최재우의 『동경대전』을 읽어온 시간을 떠올려 본다. 특히 『동경대전』 한문을 강독할 때, 스님은 자기 나름의 독특한 논리로 가끔 나를 놀라게 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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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불교에도 문제가 많아요. 대웅전(大雄殿)이란 단어에 수컷 웅(雄)이 들어가 있어요. 석가모니의 목표는 인도의 카스트 제도를 없애는 것인데, 지금 불교는 여자 위에 남자를 교육시키고 있는 거죠. "
1801년 신유박해가 일어나 체포된 정약용은 1월에 장기(포항)로 유배되었다가, 11월에 강진으로 끌려 간다. 오갈 데 없는 유배자 정약용의 딱한 사정을 알고 주막집 할머니가 골방 하나는 비어준다. 정약용은 1801년 11월 23일 이 초가집에서 강진 생활을 시작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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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냥 죄수로 알고 물정 모르는 아이들은 정약용에게 돌팔매질도 했겠다. 정약용은 슬퍼하지 않고, 그 초가집을 정약용은 사의재(四宜齋)라고 이름 짓고, 유배생활을 새롭게 시작한다.
(http://asq.kr/x5GNbO9rg)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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네 가지[四], 마땅히 하여야 할[宜], 집[齋]이라 하여 사의제라고 한다. 그 네 가지는 맑은 생각, 단정한 용모, 과묵한 말씨, 신중한 행동을 올바로 하는 것이었고, 그 네 가지를 정진하며 수양했던 집이라는 의미로 사의재라고 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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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 작은 집에서 4년을 수양하며 지내고, 이후 고성사의 보은산방과 목리의 이학래 집을 전전하다가, 1808년 귤동의 강진 다산 초당에 자리 잡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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정약용이 둘째 형 정약전에게 보낸 「밥 파는 노파에게서도 배웁니다.」(『유배지에서 보낸 편지』)에 실린 편지는 바로 이 집 사의재에서 만난 할머니와 나눈 대화 이야기다. 아버지와 어머니의 차이에 대한 이야기인데 창비본과 달리 좀 쉽게 풀어 써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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어느 날 저녁에 사의재 주모인 할머니가 한담을 나누다가 갑자기 정약용에게 묻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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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선생은 책을 읽은 사람이니 이런 뜻을 아시겠죠? 아버지와 어머니의 은혜는 똑같고 더구나 어머니가 오히려 더 애쓰시는데도, 성인들이 교훈을 세우기를 아버지를 중히 여기고 어머니는 가벼이 하며 성씨도 아버지를 따르게 하였고 , 부모가 세상을 떠나면 상복(喪服)을 입을 때도 어머니는 아버지보다 한 등급 낮게 하여 입습니다. 아버지의 혈통으로 집안을 이루게 해놓고 어머니 집안은 도외시하였으니 이건 너무도 편파적이 아닌가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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정약용은 할머니의 말에 주춤하다가 답한다.
"아버지께서 나를 낳으셨다,라고 했기 때문에 옛날 책에는 아버지가 자기를 처음 태어나게 하신 분으로 나와 있소. 어머니의 은혜도 무척 깊기는 하지만, 하늘의 으뜸, 탄생되게 하는 근본의 은혜가 더 중요한 탓일 겁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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정약용의 말은 "부생아신(父生我身)하시고, 모국아신(母鞠我身)이로다."라고 하는 요즘 유치원생도 알만한 『사자소학』 내용을 걸면서, 아버지가 어머니보다 위에 있다고 강조한 것이다. 이에 할머니는 대놓고 말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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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선생의 말은 옳지 않습니다. 제 생각은 다릅니다. 풀이나 나무를 예로 들지요. 아버지는 나무나 풀의 씨앗이겠죠. 어머니는 나무나 풀로 보면 흙입니다. 씨앗이 땅에 떨어지는 은혜는 사실 별것 아니죠, 부드러운 흙이 자양분으로 씨앗을 길러내는 공이 대단하지 않은지요.
알밤 씨앗이 밤나무가 되고 벼의 씨앗이 벼가 되는데 그 몸 전체를 이루는 것은 다 흙의 기운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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할머니는 머뭇거리지 않고 말한다. 당시 정약용은 성균관에서 일한, 지금으로 말하면 서울대 조교수쯤이나 될까, 이어서 차관급 일을 하던 이다. 할머니는 가방끈 길다는 이에게 밀리지 않고 이어 말한다.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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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러나 결국 나무나 풀의 종류는 본래의 씨를 따라서 나뉘는데, 옛날 성인들이 교훈을 세워 예를 제정한 것은 이러한 이유인 것으로 생각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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정약용은 무언가 깨닫고 아차, 한다. 정약용은 할머니 말에서 무엇을 깨달았을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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첫째, 기초 고전부터 최고의 고전에 줄기차게 유학 책에 나오는 남성 우위에 대한 고정관념을 할머니는 당차게 해체시켜 버린 것이다. 감히 경전을 배운 유생들을 상상할 수도 없는 일이다. 아버지가 어머니보다 우위에 있다는 말이 『사자소학』부터 『논어』에 이르기까지 곳곳에 박혀 있어도 할머니는 단칼에 전복시킨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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둘째, 할머니의 논리는 경전이라는 교과서에서 나온 것이 아니다. 요즘 외국 지식인이 뭐라는 말을 인용하는 서구적 페미니즘도 아니다. 그저 할머니의 생각은 흙의 논리였다. 정약용은 상상할 수도 없는 비유를 할머니는 든다. 씨앗은 남자고, 흙은 여자인데, 흙이 없다면 씨앗이 뭘 하겠냐는 지적이다. 스피노자를 인용할 필요도 없이, 할머니의 마음은 부드러운 흙사상에서 나온다. 이 말에 꾸벅하는 정약용도 참 순하고 기특한 인물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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셋째, 할머니는 자기 생각을 고집 부리지 않고, 결국 풀의 종류를 씨앗으로 나누는 것은 성인들의 교훈 때문이라며 한 발 물러선다. 할머니 생각은 고착되어 있지 않고, 흙처럼 부드럽고 유연한 것이다. 할머니 말을 듣고 정약용이 자기 모습을 보니, 아직도 경전 공부에 매몰된 아학(雅學) 학자의 모습에 지나지 않는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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할머니에게 놀라며 정약용은 흑산도에 유배된 형 정약전에게 그 심정을 전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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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형님, 저는 할머니에게 말을 듣고 깜짝 놀라 깨닫고 존경하는 마음이 생겼어요. 하늘과 땅 사이에 너무도 세밀하고 묘한 진리가 밥 파는 할머니에게서 나올 줄이야 누가 알겠어요. 갸륵하고 갸륵한 일입니다.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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정약전의 마음이 어떠했을까. 아잇적부터 평민들과 놀기 좋아했던 정약전은 아학(雅學)에서 벗어나 세상 속에서 이치를 배우는 속학(俗學)을 향한 학자였다. 비린내 나는 어부들, 창대에게 가오리와 홍어를 어떻게 구별하는지 배우면서 『자산어보』를 완성시킨 학자였다. 이미 유학의 뻔한 테두리를 훨씬 넘어선 창조적 저자였다.
"음, 내 동생이 이제 세상을 조금 깨닫는구나."
정약전은 동생을 기특하게 생각하지 않았을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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학계에 있으면서 2백년 전에 정약용이 깨달은 바를 아직도 깨닫지 못하는 도그마에 갇힌 학자를 만난다. 그들은 논문을 쓰거나 대학을 졸업해야만 인간 취급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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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아줌마들이 뭘 알아!"
쉽게 이런 말을 한다. 아저씨들이 뭘 알아, 라는 말은 잘 하지 않는다. 공격 대상은 아줌마다. 대학 강의 외에 시민강연을 싸구려로만 보는 상아탑에 갇힌 학자가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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60강으로 계획하고 진행하는 니체 『차라투스트라는 이렇게 말했다』 강독반에 정말 실력있는 분들이 오신다. 철학 아카데미에서 라틴어부터 최근 철학까지 꼼꼼히 공부한 아줌마가 있는데, 강의가 끝나면 자기 전공인 영문학과 심리학과 철학의 근거를 원전을 찾아 제시하고 토론하신다. 팔십대 할머니인데 성균관대학교에서 『카뮈 작품에 나타난 불교적 사고』로 불문학 박사를 받고 프랑스에서도 유학 다녀온 박옥희 선생님도 있다. 그 분께 졸라서 영상(https://url.kr/fqvt4m)을 찍어두기도 했다. 아줌마로 보이지만 중요한 저서를 계속 내는 출판사 대표도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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지난 달까지 일산도서관에서 11강 강의를 했는데, 맨앞에 늘 앉아 계시던 70대 할머니는 젊은 시절 노조 활동을 하셨던 분이다. 이후 일본어를 공부하여 통역사도 하셨다. 짧게 대화를 나누었지만 내공이 대단했다. 저녁 강의에 배우려고 중고등학교 국어 선생님, 이들도 아줌마 아저씨들이다. 아줌마들을 함부로 판단하는 학자야말로 삶의 폭이 좁은 자들이다. 이제 지식은 일반화 되어 꼭 대학이 아니더라도 유튜브를 통해서도 충분히 고급 지식을 얻을 수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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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노숙인들이 알긴 뭘 알아?"
노숙인을 우습게 업신 여기는 교수를 만난 적이 있다. 내가 노숙인 문학강의나 인문학강의 하는 것을 알고, 뭣하러 그런 데 가서 시간 낭비하느냐는 투다. 나는 그 교수에게 실은 내가 노숙인들께 가서 배운다고 말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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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번은 내가 맹자왈 공자왈 했더니, 장자왈이라며, 『장자』의 한문 성어를 그대로 외우는 노숙인이 있었다. 물어보니 『장자』만 줄창 외우며 9년 동안 서울역에서 지냈다고 한다. 지난 학기에는 구스타프 칼 융을 강의하다가 독일어 원문이 나왔는데, 노숙인 중에 해석이 없는 독일어 원문을 읽고 해석하는 분이 계셨다. 알고보니 중앙대학교 독문과를 나온 이재명과 동기인 분이었다. 컴퓨터 사업을 하다가 망해서 길에 나왔다고 한다. 또 특이한 노숙인이 있었다. 수업 중에 인터넷 검색하다가 영문이 나왔는데, 노숙인 중 한 분이 완전 본토 발음으로 영어를 읽었다. 이건 또 뭐야? 나중에 알고 보니, 미국 교포로 모든 교육을 미국에서 받고 자랐는데, 한국 여성을 만나 결혼하고 한국에 왔다가 모든 것을 빼앗기고 거리에 앉은 노숙인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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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새터민들이 뭘 알아?"
북한에서 탈출한 사람들을 거지로 아는 사람들이 있다.
성매매체험자, 속칭 창녀를 재활하는 곳에서 강의하는데 왼쪽 둘째줄에서 계속 웃으면서 우는 여성이 있었다. 강의가 끝나고 사람들 나가고 물어보니, 북한에서 중학교 선생님이었다고 한다. 중국으로 탈출 나왔다가 이 마을 저 마을에서 강간 당하고 아기도 낳고, 가까스로 탈출했는데 한국에서 또 정착금 사기를 당해서 몸을 파는 업소에서 일하다가, 전남여성센터의 구조를 받았다고 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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새터민을 교육하는 곳에서 김소월 백석 등을 강의하는데, 한 할아버지가 계속 고개를 끄떡였다. 알고보니 북한에서 선생님을 오래 했다고 한다. 내가 말하는 문학 얘기가 반가웠다고 한다. 그날 저녁에 두 할머니가 나와 얘기하고 싶다고 했다. 모두 잠을 자서 로비에서 대화하는 데 한국어 발음이 이상했다. 알고 보니 1970년대 아잇적 북송선을 탄 한국 남자와 일본인 여자 사이에서 태어난 일본 분들이었다. 평생 북한에서 일본 반동이라고 왕따 당하다가 한국으로 탈출했다며, 나와 일본어가 통하니까 일본어로 살아온 이야기를 해주셨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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세상에 지혜는 널려 있다.
지혜와 학문은 책에만 연구실에만 도서실에만 있지 않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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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의재의 주막 할머니는 정약용이 절망하도록 하지 않았다.
"어찌 그냥 시간을 보내시렵니까. 이 마을에서도 가르쳐 주셔야지요."
할머니의 권유에 정약용은 작은 격려를 받았겠다.
성균관의 멋진 학당이 아닌 초가집 사의재에서 1801년 겨울부터 1805년까 겨울까지 머물면서, 정약용은 시골의 유생 6명을 가르치고, 그 중요한 『경세유표』와 「애절양」 등을 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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정약용은 사의재 아욱국 주막집 할머니에게 배우고, 그의 형 정약전은 흑산도의 창대에게 물고기를 배운다. 두 형제는 거대한 도서관이 아니라, 삶의 현장에서 글을 썼다. 정약용은 닭을 키우고, 아욱을 키으며 500여 권의 저술을 썼다. 그의 형 정약전은 어부들에게 배우며 바다에서 사는 사람들 이야기를 썼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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형과 동생은 서로를 격려한다. 어떻게든 유배지에서 살아 남아야 한다며, 정약용은 형에게 안타깝게 편지에 썼을 것이다.
"형님, 아욱이 지천에 많네요. 아욱국 드시면서 어떻게든 살아남으셔야 해요. 흑산도 섬에 들개가 많다고 하는데, 개도 구워 드세요. 힘내서야 해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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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천주실의』를 읽고 예수의 평등과 자유사상에 탄복한 두 형제에게 예수의 산상수훈은 큰 위로였겠다.
"행복하여라, 의로움 때문에 박해를 받는 사람들아, 하늘 나라가 그들의 것이다. 사람들이 나 때문에 너희를 모욕하고 박해하며, 너희를 거슬러 온갖 사악한 말을 하면, 너희는 행복하다. 기뻐하고 즐거워하여라. 너희가 하늘에서 받은 상이 크다. 사실 너희에 앞서 예언자들도 그렇게 박해를 받았다."(마태 5:6 ; 5:10~1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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정약용의 간곡한 편지를 읽었지만 정약전은 유배지 흑산도에서 15년을 견디다가 1816년 58세의 나이로 이승을 떠난다. 동생 정약용은 2년을 더 버티다가 살아서 고향으로 돌아간다. 슬픔과 설움을 견디며 정약용은 1836년 73세의 나이로 형님이 먼저 간 저승으로 향한다. 먼 하늘나라에서 두 형제는 얼마나 반가웠을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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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날 나는 곡인무영 스님께 장흥에서 있었던 동학군의 마지막 '석대뜰(들)' 전투 이야기를 들었다. 우금치 이야기만 알고 있다가, 석대들 전투 이야기는 처음 들었다. 『동경대전』 읽는 동학들과 석대들 지역에 꼭 가봐야겠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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정약용도 있고, 동학 농민군도 있고, 스님도 목사님도 있고, 무엇보다도 사의재 아욱국 주막 할머니가 계신 곳에서 훈훈한 방담을 나누었다. 올해 못 가본 장흥동학혁명 박물관, 해남 윤두서 고택을 내년에는 꼭 가봐야겠다. 내년에는 사의재 주막에 가서 구수한 아욱국 한 사발 더 먹어야지.
숙명여대 김응교 교수의 글에서