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입암(立巖) 류중영(柳仲郢)/ 賜祭文
萬曆元年歲次癸酉七月己卯朔二十二日庚子 國王遣臣
禮曹佐郞尹睍諭祭于卒某官姓名之靈惟靈天資雄偉文
武全才早登龍榜鵬程是開頃在 先朝蘂城未靜命公往釐
轉化俄頃詰奸秋官出監西兵亞長三寺機務有成籍軍湖
南豪勢震驚栢府振綱薇垣弼違倭警乙卯南服事非從事
巡邊運籌指揮逖彼義方境接華夏西門鎖鑰非公不可及
按豐海奸勢懾服于定于淸繼出字牧存懷惠鮮去思遺德
逮予初服入叅兵政三任喉舌出納予命如公之器世不易
得守己堅確當官盡職處事愼重資以博學節期盡瘁夷險
不移實予干城擬分猷爲未服官政天胡不遺予悼伻奠靈
其享斯 知製 敎 李忠元行
사제문
만력 元년1) 세차 계유 기묘 삭 22일 경자에 國王은 臣禮曹佐
郞尹晛을 시켜 卒某官 姓名의 靈에게 諭祭(유제)2)하노니 생각하건
데 靈은 타고난 자질이 씩씩하고 뛰어나 文武를 겸전한 재능으로
일찍이 文科에 급제하여 벼슬길이 활짝 트였다. 얼마 전 先朝3)에
있어서 忠州가 안정되지 못했기에 公을 命해 다스려서, 단시일에
변화토록 하였도다. 刑曹에서 간신을 힐책하고 西道에 나가서 軍事
를 감찰했다. 3개 관아의 차장을 역임하며, 기밀한 업무를 완수했
고, 호남의 軍籍을 바로잡아 세력 부린 호족들을 떨게 했다. 司憲
府의 기강을 떨쳤으며 司諫阮에선 어긋남을 바루었다. 乙卯年에
왜구의 침범으로 南方의 민정이 불안할 땐 巡察使의 從事官이 되
어 기이한 책략으로 지휘했다. 저 멀리 떨어진 義州 지방은 중국과
접경한 고을이라, 서쪽 관문 요소의 단속을 公이 아니면 할 수 없
었다. 황해도 관찰사로 나가서는 간교한 세력을 굴복시켰다. 定州
와 淸州에 잇달아 목민관이 되어가서 은혜롭게 선정을 베풀어, 떠
난 뒤에 백성들이 추모했다. 내가 처음 즉위함에 이르러서는 들어
와 군사행정에 참여했고, 세 번이나 승지에 임명되어 나의 명령 출
납을 맡았었다. 공과 같이 출중한 재질은 세상에서 얻기가 쉽잖았
다. 몸단속이 굳건하고 정확했다. 벼슬에선 직책을 다했으며, 처사
에는 조심하고 신중했다. 해박한 학문을 바탕삼고 절기행사는 성력
을 다하였다. 夷險(이험)4)으로 변심하지 않았으니, 진실로 나의 干
城(간성)5)이라, 계책을 나누어 함께 도모 하려했더니 官政(관정)6)
을 맡아보지 못하였다. 하늘이 어찌 남겨주지 않았는가, 내 마음이
슬퍼서 예관 시켜 치제하니 혼령은 이것을 흠향하라.
지제 교7) 이충원8) 지음.
祭文 右議政 盧守愼
嗚呼居之同生之年同其爲志也又同愛公者我知我者公
公有我無之才而位不充公無我有之過而壽不崇天乎時
乎奈何于公公克有子吾慟也中嗚呼哀哉
제문 우의정 노수신
아! 사는 곳이 같았고 태어난 해가 같았으며 뜻한바 또한 같았
으니 公을 사랑한 사람이 나였고 나를 알아준 사람이 公이었다. 公
은 나에게 없는 재능이 있었는데도 직위가 흡족하지 못했으며 公은
또 나에게 있는 허물이 없는데도 수명이 높지 못했으니 천명인가,
시운인가, 公이 어찌 하리, 公이 훌륭한 아들을 두었으니 나는 슬
픔을 참으리다. 아! 슬프도다.
又 刑曹判書 鄭惟吉
嗚呼魁然而幹屹然而峙允矣大材邦國攸倚壽不當仁位
不滿器理也難究天乎難恃身縈寵綠意在耕桑一日而逝
魂返故鄕聯倫鳳毛白眉者良國有美寶人曰珪璋公實不
亡余又何傷花山之下洛水載淸室人迎哭江鳥哀鳴死者
不悲生者曷情余老頑然世所嗤罵竊祿自保食蓼如蔗公
旣去矣世無我知誤寵招言久矣藏踪祖送不可誰識愚衷
嗚呼哀哉
또 형조판서 정유길
아! 뛰어난 재간으로 우뚝하게 높았도다. 진실로 큰 인재라 나
라가 의지할 바였거늘 수명이 어진 덕에 맞지 못했으며, 직위가 큰
기국(器局)9)을 채우지 못했으니 이치를 규명하기가 어려웠고 하늘
도 믿기가 어려웠다. 몸은 비록 관직에 매어 있으면서도 마음은 언
제나 초야에 있었도다. 어느날 갑자기 서거하여 영혼이 고향으로
돌아갔도다. 가지런히 뛰어난 착한 아들 백미(白眉)10)로 어질구나.
나라에 좋은 보배 되었으니 사람들이 규장(珪璋)11)이라 일렀도다.
公은 실로 죽지 않은 것이니 내 또 어찌 슬퍼하랴, 花山의 아래에
낙동강 물 맑았는데, 室人은 곡을 하며 맞이하고 물새들도 슬피 울
지라. 죽은 자는 슬퍼하지 않아도 산 자는 심정을 어찌하랴. 나도
늙고 미련하여 세상의 비웃고 꾸짖는 바이라, 자격 없이 녹을 받아
스스로 보존하며 콩잎을 사탕처럼 먹었더니, 公이 이미 가버려서
세상에서 나를 알아주는 이가 없어졌다. 자취를 숨긴지가 오래되어
祖送12)을 못하오니 나의 충정을 그 누가 알아줄고. 아! 슬프도다.
又 全羅道觀察使 朴民獻
聲以律而相應蘭以香而莫分苟意氣之懸合何聚散之足
論自遇知於高明居常歎乎離群君受 命而驅馳我除籍而
邅迍苦音書之莫繼見歲月之載奔曩會面於銀臺自帝都
而回轅經十八之睽違始敍舊而相歡俄添同乎一席幸獲
接乎朝曛共寓直於省中幾談霏之繽紛爲隱語而示我我
眸同乎不聞誰未敢乎承當荷厚意之愈勤奉淸懽之未幾
我又落於江村逮蒙恩而入城已問疾於高門竟馴致於不
救莽誰問於乾坤空抱器而莫施增知友之煩寃悵旅櫬之
遠歸指嶺表之故園難置芻於墓下矯余首而聲呑奠絮酒
而相訣聊寓哀於斯文嗚呼哀哉
또 전라도관찰사 박민헌
소리는 음률로써 서로 호응하고, 난초는 향기로써 분리 될 수
없으니, 진실로 의기의 떨어지고 합하는 것으로써, 어찌 모이고 흩
어짐을 논 하겠는가. 고명한 공의 알아줌을 만나고부터, 항상 서로
헤어진 것을 한탄 하였다. 그대가 왕명을 받아 달릴 적에, 나는 벼
슬에서 제적되어 험한 길을 걸었다. 서신마저 계속할 수 없는 것을
괴로워하면서, 세월의 달려감을 지켜보았다. 지난번 승정원에서 서
로 만났으며, 燕京에서 돌아와 18年의 떨어짐을 거쳐서야, 비로소
옛정을 풀며 서로 즐기었다. 잠깐 동안 한 자리에 앉게 되어, 다행
히 조석으로 상대하게 되었다. 府中에서 함께 숙직하면서, 끊임없
는 담론이 얼마나 많았던가. 은어(隱語)를 하시면서 나를 깨우쳤고,
나의 눈길 듣지 않아도 같았으니, 누가 감히 받아드리지 않을손가,
더욱더 은근하신 후의를 받았도다. 잘 다스려지는 기쁨을 받든지
얼마 안 되어 내가 다시 江村으로 낙향 했네. 은총 다시입고 한성
에 들어와서, 高門으로 문병을 하였는데 끝내 일어나지 못하게 되
었으니 망망한 천지간에 어디에 물어 보랴. 가슴속 큰 재능 품고
펼쳐보지 못했으니, 知友들의 원통함은 회오리치네. 멀리 돌아가는
관구(棺柩)의 슬픈 길은 영남의 고향을 지향 했네. 무덤 앞에 추령(芻
靈)13)을 놓아주기 어려워서 멀리서 바라보며 울음을 머금었네. 서주
(絮酒)14)를 드리고 서로 영결 하면서, 이 글에 슬픈 감회를 붙입니다.
又 開城府留守 李友閔
嗚呼我兄夫何遽棄吾而死耶吾家一門零落太甚從行內
外惟余二人生死百年實相爲依兄今棄背弟將安歸白首
人間孑立無依爲兄痛毒曷有其極況兄與我同庚而月日
先於我初逢京洛布衣雨寒營道同術共惜光陰怡愉相樂
未嘗一日離也忍飢白蓮眠食是同阻水嵯峨酸寒是共同
攻其苦者李上舍成慶柳友太浩也追思往昔宛然如昨而
李上舍捐世已久太浩之逝纔經三歲兄又繼之同遊故人
凋落已盡踽踽風塵苟存視息者惟老病此身而已孤寄人
世知無多日欲哭聲呑五內崩裂拊膺擊節無以爲懷兄登
庚子科弟中丙午第相繼登途赫赫衣冠雖未及敬則之同
財庶幾同薛家之三鳳聯珂紫陌對月黃壚見輒欣然共寫
肝膽兄撫弟背弟執兄手相得之樂遠期平生自兄之出守
龍灣關山千里遠隔寒暄天涯地角心與塞雲而西飛自是
之後宦遊千里久分南北夜夜池塘春草之夢幾許多耶玆
者兄在于內弟還外補病不得身侍湯藥死不得握手相別
永訣終天此恨如何早知如此寧不早解珪組退保簞瓢歲
時伏臘烹羊炮羔與之相樂乎到今思之悔不可及祇增痛
哭而已嗚呼我兄天資嚴毅而處心寬厚守己堅確而應事
愼重見可必行聞善卽揚善於吏治博識事務規畵處置多
人所不及製錦四州民有去思按節豐海詠留甘棠當官盡
職有盡瘁忘身之節才全文武有干城王國之器一時宰輔
亦多稱之惜乎其獨醒斯世與時矛盾沈滯一時久偃經濟
之才弟未嘗不歉歉於心也邇年來叅知兵務出入銀臺方
有大用之漸私自喜幸嘆會遇之有時感雲龍之相從以爲
九萬雲程想得大奮逸翮煥赫黃扉佇見顯有成績如何今
日遽輟秦舂含悲 玉宸失望蒼生乎秋江今日之淚非獨哭
吾私也弟自近來年益老行益躓加之病不去身顧念所爲
無一毫可報 國恩盜名兩朝久竊恩祿席藁私室日夜兢惶
一丘麻桑退終天年非不思之孀母在堂惟弟是憑狼狽前
却遲廻而未能以今日觀之則不復有心於斯世也今來江
上見兄家累悉同船歸老淚澘澘痛懷尤增幽明永隔實自
今日往來南北惟有一夢天長地久此恨寧旣哭奠一觴長
痛欲絶
또 개성유수 이우민
아! 우리 兄이 어찌하여 갑자기 나를 버리고 돌아가셨습니까?
우리집 온 가문이 매우 쇠락하여 안팎으로 종반 간에 오직 우리 두
사람뿐이라 생사의 百年동안 실로 서로 의지하려고 하였는데 兄이
지금 이 아우를 저버렸으니 제가 장차 어디에 귀의 하겠습니까, 백
발 인간이 외로이 서서 의지할 곳이 없으니 兄을 위한 슬픔이 어찌
다함이 있겠습니까, 더구나 兄과 나는 동갑으로 나보다 몇 달 먼저
나셨습니다.
처음 서울에서 만났을 적에 포의(布衣)15)로 비와 추위 속에서
도 道를 실행하는 원리와 방법을 같이하였기에 시간을 아끼며 기쁜
마음으로 서로 정답게 만나면서 하루도 떨어지지 않았지요, 백련
(白蓮)16)으로 주림을 참으며 침식을 함께 하였고, 험한 산 거센 물
을 넘듯 가난과 쓰림을 함께 견디며 고생했던 사람은 李進士 成慶
과 柳友 太浩17)였습니다. 지나간 옛일을 생각하니 완연히 어제 같
았는데도 벌써 李進士는 별세한 지 오래 되었고 太浩도 별세한 지
갓 3年을 지났는데 兄이 또 이어 세상을 떠났으니 같이 놀던 친구
들이 모두 없어졌습니다. 이 풍진 속에 홀로 남아 구차하게 살고
있는 사람은 오직 늙고 병든 이 몸일 뿐이라, 외로이 인간 세상에
붙어 사는 것도 그리 오래지 않다는 것을 알겠습니다. 울고파도 소
리가 나오지 않고 오장 육부가 찢어지고 무너지듯 하여 가슴을 어
루만지고 무릎을 치면서 슬픈 회포를 어이할 수 없습니다.
兄은 庚子年 과거에 급제하셨고 이 아우는 丙午年 과거에 급제
하여 서로 이어 벼슬길에 올라 관록이 빛났습니다. 비록 경직(敬
則)18)의 통달한 재능에는 미치지 못하였으나, 거의 설가(薛家)의
삼봉(三鳳)19)는 같았습니다. 자백(紫陌)20)에서 주옥같은 詩文을 읊
조리고 황로(黃壚)21)에서 달을 보며 만나면 기쁜 마음으로 서로 진
심을 토로하면서 兄은 아우 등을 쓰다듬고 아우는 兄의 손을 잡아
의가 상합한 즐거움을 영원히 평생토록 기약 하였더니 兄이 의주목
사로 나가자 關山 千里에 안부마저도 멀리 막혀 마치 하늘 끝과
땅의 끝처럼 아득하여 마음이 변방의 구름과 함께 서쪽으로 날아갔
습니다. 그로부터 벼슬길이 천리나 떨어져서 오래도록 남북으로 나
뉘어져 밤마다 연못가 춘초(春草)의 꿈이 얼마나 많았습니까, 이에
또 다시 兄은 내직으로 들어오고 저는 도리어 외직으로 나가 兄의
병환에 몸소 약을 다려드리지 못하였고 돌아가실 때 손을 잡고 서
로 이별하지는 못하고 이 세상에서 영결하게 되었으니 이 한(恨)을
어이 하겠습니까, 일찍이 이럴 줄 알았더라면 어찌 일찌감치 벼슬
을 버리고 물러나 가난하게 살면서 시절 따라 삼복과 납일에 염소
를 잡아 구워주면서 즐기지 않았겠습니까, 지금 와서 생각하니 후
회가 막급이오며 아픔만이 더욱 커질 따름입니다.
오호라, 우리 형은 타고난 자질이 엄정하고 굳세었으며 마음가
짐이 관대하고 온후하였으며 자신을 지킴에는 확고하고 사물에 임
하여는 신중하였습니다. 따라서 옳은 일을 보면 반드시 실행하고
착한 것을 들으면 곧 칭찬하였으며 벼슬아치로서 정사엔 남달리 뛰
어나서 사무를 널리 알아 계획에 따라 처리함에 남이 따르지 못하
는 일이 많았습니다. 넷 고을을 잘 다스려 떠난 뒤에 고을 백성들
이 착한 덕을 추모하였으며, 황해도 관찰사가 되어서는 감당(甘
棠)22)의 노래를 남겼으니 관직에 임하여 전력을 기울여 정성껏 힘
써 몸을 돌보지 아니하는 의지가 있었습니다. 그리고 文武를 겸전
하여 나라의 간성(干城)의 재능도 있어서 한 때 모시던 여러 재상
들이 많이 칭송하였으나 애석하게도 이 세상에서 홀로 각성하였기
에 시대와 맞지 않아 한 동안 침체하여 경세제민(經世濟民)23)의 재
능을 오래도록 펼쳐보지 못하였으니 나의 마음에 유감이 없지 않았
습니다. 근래에 병조참지를 거쳐 승정원에 출입하여 바야흐로 크게
쓰여 질 조짐이 있기에 나 혼자 기뻐하고 다행스럽게 여기면서 만
남의 때가 있었음을 찬탄하며 어진 임금과 착한 신하가 서로 만나
게 된 것을 감탄하면서 九萬里의 앞길에 크게 날아올라 황비(黃
扉)24)가 빛나 현저한 공적을 볼 수 있을 줄 기대하였더니 어이하여
오늘 갑자기 진용(秦舂)25)을 그치게 하여 임금이 슬퍼하고 백성들
이 실망하게 하였습니까? 가을 강물은 오늘 눈물이 된 것은 다만
나의 사사로움을 곡하는 눈물이 아닙니다.
저도 이즈막 더욱 늙고 행동 또한 비틀거리게 되는 한편 질병
도 늘어 몸에서 떠나지 않습니다. 돌아보며 생각하니 했던 일이 한
낱 털끝만큼도 나라의 은혜에 보답하지 못하고 양대 조정에서 분수
에 넘치는 명예로 오래도록 국록을 훔쳐 먹듯 하였으니 집에서 거
적을 깔고 엎드렸듯 밤낮으로 전전긍긍 두려움 속에 보내고 있습니
다. 조그마한 한 둔덕의 전원으로 물러나 여생을 마칠 것을 생각하
지 아니 한 것은 아니나 편모가 계셔서 오직 저를 의지하시니 진퇴
양난이라 머뭇거리면서 결단을 못하고 있습니다. 오늘날로 비추어
보니 다시 이 세상에 마음이 없습니다. 지금 강가에 와서 兄의 가
족을 보고 다같이 배를 타고 돌아가니 늙은 눈물이 흘러내려 슬픈
감회가 더욱 더해집니다. 저승과 이승이 영원히 막혔으니 실로 오
늘부터 남북의 왕래가 오직 꿈만이 있을 뿐이라 끝없이 넓은 천지
간에 이 恨을 어찌 다하겠습니까. 울면서 영전에 잔 드리니 깊은
슬픔에 숨이 끊어지려 합니다.
又 左承旨 崔顒
惟靈斯文先進淸朝令望芻豢信義佩服禮讓事必師古夙
確厥向議每守正旣毅而暢昔共先子作僚一局意氣相親
肺肝無隔余時垂髫累許隅坐勉余問學戒以懈惰景慕風
儀念莫之捨睽違枇載會逢無緣歲在丁卯 鳳節下天余迎
都司于彼江濱路出新安公作主人乍擡靑眸笑語達晨論
今討昔擺脫塵滯留連數日同餞殘歲解手背面星霜累易
何幸今夏共司出納同寅夙夜分若弟兄當事盡心感公之
誠臨疑善斷服公之明志常衛道且喜談兵年齡未衰英亮
莫京方期大施爲相爲將如何不淑遽罹疾恙鵬騫九霄風
翮忽折驥騁千里霜蹄誰縶云亡歎極殄娠邦國天道雖遠
責報不貿位不滿德裕在于後留厥幹蠱作周之禎綿慶益
遠聿駿厥聲江漢浮浮征旐翩翩儀刑永隔有淚懸泉嗚呼
哀哉
또 좌승지 최옹
생각하옵건대, 영령은 士林의 선배요, 청명한 조정의 훌륭한 명
망이라, 信義를 입이 육식을 즐기듯이 좋아했으며 예양(禮讓)을 맘
에 새겨 실천했다. 매사를 반드시 옛 道를 본받아서, 일찍이 그 방
향이 정확했다. 公論에는 언제나 바른 것을 지켜서 의지가 굳세나
부드러웠다. 옛날 나의 先君과 함께 같은 부서에 동료가 되어서,
서로 의기가 친밀하여 진심의 가림이 없었다. 내가 그 때 어린나이
로 여러 번 한쪽 가에 앉음을 허락하고, 나에게 학문을 권장하며
게으르지 말도록 경계해 주었으니, 그 때의 풍의(風儀)를 지금까지
경모하여, 마음에 잊혀지지 않았도다. 그 뒤로 헤어진 지 20年간,
만날 인연 없었다가, 丁卯年에 이르러서 천자의 詔書가 내려올세,
내가 사신을 맞이하러 압록강까지 갔을 적에, 行路가 마침 新安(定
州의 역촌)으로 되었으며, 공이 그때 목사로 계시었다. 잠깐 반가운
눈길로 대하여, 새벽까지 담소하면서, 지금을 논하고 옛것을 더듬
으며, 세속의 번뇌를 벗어났다. 며칠 동안 유숙하며, 제야(除夜)를
함께 보내고 나서, 손을 놓고 헤어진 지 여러 해가 바뀌었다. 다행
히도 금년 여름, 함께 왕명의 출납을 맡아 함께 일하면서(승지가 되
어) 주야로 교대하며 마치 형제간과 같았도다. 일을 당해 마음을 다
받치는 공의 성의에 감격했고, 의문 있는 일에 임하여 잘 판단하는
공의 밝은 견해에 탄복하였도다. 뜻은 언제나 道를 지켰으며, 또한
兵事 담론도 좋아했다. 연세는 아직껏 쇠하지 않았으며, 영민하고
명철함이 더없이 뛰어났다. 바야흐로 장차 크게 쓰여짐을 기대하여,
재상이 되고 장수가 될 터인데, 어인 일로 불행하게, 갑작스레 병
을 얻어, 九萬里 장천에 붕새가 잘못되어 바람 속에 떨친 날개가
갑자기 꺾이고, 천리 길을 달리는 준마의 발굽은 그 누가 묶어 매
었는가, 착한 이가 없어짐에 통탄함이 그지없고 나라가 병들어서
위태롭게 되었네. 天道가 비록 멀어도, 공로에 대한 보답엔 변함이
없을 지라, 공의 직위가 공의 덕에 미치지 못했으니, 후손에게 넉
넉함이 있으리라. 어진 아들 두었으니, 앞날에 많은 상서 이어져서,
경사가 연면하게 더욱 뻗어 마침내 그 명성이 크리로다. 한강 물
끊임없이 흐르는데, 멀리 가는 붉은 명정 펄럭이네. 훌륭하신 공의
모습 영원히 막혔으니, 눈물 끊임없이 쏟아집니다. 아! 슬프도다.
又 安東府使 權文海
一代之英百夫之特早通桂籍歷踐臺閣珮銅三州民蒙惠
澤仗鉞西海化洽棠茇入司喉舌魚水一堂出納惟允契合
明良經邦鎖鑰隆望所歸洪量偉度公輔爲期顧我鯫生獲
登龍門忝宰南來鑴戒慇懃詩以爲贐罄示悃愊感公不遺
銘我心骨如下一疾遽至奄忽壽未及稀位不滿德砥柱忽
折河潰誰防巨厦將傾孰爲棟樑士失師範邦痛殄瘁庭有
雙胤金玉君子白眉先拔邦國之器盛以玉堂允符如渴作
君耳目爲士矜式餘慶不替我公不死臨奠一慟少紓哀思
또 안동부사 권문해
당대의 영걸이요 백사람 중의 특출이라, 일찍이 文科에 급제하
여 臺閣(대각)26)을 거쳤도다. 셋 고을의 守令 되어 백성들이 은혜
를 입었고, 黃海道의 감사되어 덕화로 棠茇(당발)27)에 화합하였다.
承旨가 되어 君臣이 한 자리에 앉을 때, 王命의 출납에 진실 하나
로 임하였으니 明良(명량)28)이 화합하였으며, 나라 다스림에서 풀
고 조이는 근원이 되니 높은 명망이 돌아왔도다. 넓고 큰 도량이라
公輔(공보)29)를 기대하였다. 돌이켜보면 나 같은 못난 것이 龍門30)
에 올라 府使되어 남쪽에 왔더니 鑴戒(휴계)31)가 은근하셨지요. 詩
로써 전별의 정을 성의껏 표해 주셨다. 한결같은 公의 후의에 감사
하며 나의 心骨에 깊이 새겼습니다. 어이하여 한번 얻은 병환으로
급작스레 이 지경에 이르렀습니까? 수명은 희수에 이르지 못했고
벼슬은 쌓은 덕에 걸맞지 못했습니다. 砥柱(지주)32)가 갑자기 부러
졌으니 황하가 무너지면 그 누가 막을 것이며 큰집이 기울면 그 누
가 받침대가 되오리까? 선비들은 스승을 잃었으며 나라는 아픔으로
초췌하여졌습니다. 슬하에 두 아들 두셔서 金玉같은 君子이라 白
眉33)가 먼저 발탁되었으니 나라의 위대한 인재로다. 玉堂의 귀한
직위 진실로 如渴(여갈)34)이 부합되었구려. 임금의 귀와 눈 되고
선비들의 모범이 되었으니 餘慶(여경)35)이 끊어지지 않을 것이니
公은 실로 죽지 않았습니다. 제전(祭奠)에 임하여 한 번 통곡하며
슬픈 감회를 조금이나마 푸나이다.
又 義城縣令 盧從元
惟靈戊辰之出按西原元於此時病廢田園下念殘生親老
家貧推心撫恤特出凡民寇不得借公歸北關 天眷方隆
地府何促初罹二竪爲進候謁溫溫賜語無異平昔豈意一
朝幽明永隔山頹斗折我將奚適臥牛春風南橋秋月追思
陪賞余懷何極洛城前月行過故宅衰柳閉門彷徨掩泣今
適便養來守近邑承顔末由哀痛實切風雪山中齎奠一杯
魂若有感想應歸來
또 의성현령 노종원
생각하옵건대 영령께서 戊辰年에 청주목사로 오셨을 적에 나
종원이 신병으로 전원에 물러나와 있었는데, 늙으신 어버이를 모시
고 가난한 가정에서 겨우 목숨을 부지하며 살고 있는 정상을 가엾
게 여기시고, 물심양면으로 남다른 구휼을 베풀어 주셨습니다. 그
런데 구순(寇恂)을 빌리지36) 못하여 공이 조정으로 돌아갔습니다.
그런데 임금의 은애가 지극히 융성하였거늘 어찌하여 저승길이 그
렇게도 촉급하셨습니까. 처음 병환을 얻었을 때 나아가 뵈오니 온
화한 말씀이 평소와 다름이 없으셨거늘 어찌 하루아침에 저승과 이
승이 영원히 막혀질 줄 알았겠습니까. 이제 태산이 무너지고 북두
가 꺾였으니 내가 장차 누구를 따르고 의지하겠습니까. 臥牛의 봄
바람과 南橋의 가을 달을 모시고 구경하던 옛일을 회상하니 슬픈
감회 그지없습니다. 먼젓 달, 서울을 지날 적에 옛 집의 쇠잔한 버
들에 문이 닫혀 있어 한참동안 방황하면서 눈물을 삼켰으며, 이제
또 마침 편양(便養)37)으로 근읍에 부임하였으나 존안을 뵈올 길이
없으니 실로 슬픈 감회가 더욱 간절하여 집니다. 눈바람 속의 산중
에서 술 한 잔 드리오니 만약 영혼이 느끼심이 있다면 바라옵건대
돌아와 받아주소서.
又 都承旨 李喜檢 左承旨 崔顒右承旨 鄭惟一
左副承旨 尹復 右副承旨 李增
同副承旨 李海壽 注書 韓伯厚 許 銘 等
惟靈毓慶尙門孕精山嶽望隆席珍才高人傑鏖兵藝苑策
名桂籍雄姿俊茂大度宏廓詰奸秋官分憂蘂城亞長三寺
機務有成栢府振綱薇垣弼違文武攸兼左右俱宜作鎖西
門關塞謐靜杖銊�海西甘棠播詠出牧二州入叅兵政遂步
花甎出納王命德積恩深亦有賢嗣將期大受俾盡施設天
胡不憖楹夢示異誰料一疾風儀永秘九重乃驚具僚咸悲
菲薄之奠非哭吾私文以告哀情則無涯
또 도승지 이희검, 좌승지 최 옹, 우승지 정유일,
좌부승지 윤 복, 우부승지 이 증, 동부승지
이해수, 주서 한백후 허 명 등
생각하옵건대, 영령께서는, 경사를 많이 쌓은 이름난 가문에서,
산악의 정기를 타고났다. 명망은 석진(席珍)38)으로 높았으며 재능
은 인걸(人傑)로 뛰어났다. 학문의 세계에서 힘써 싸워 이름이 계
적(桂籍)39)에 올랐도다. 뛰어나게 씩씩한 모습이요, 크고 넓은 도
량이라. 형조(刑曹)에서 간신들의 잘못을 꾸짖었고, 忠州에선 王의
근심을 짊어졌다. 삼시(三寺)40)의 차장으로 있으면서 중요한 정무
를 완수했다. 사헌부(司憲府)의 기강을 떨쳤으며, 사간원(司諫院)서
어긋남을 바루었다. 文武를 아울러 갖추어서, 左右로 어디에나 잘
어울렸다. 서쪽지방 관문을 굳게 잠궈 국경을 안정되게 하였다. 海
西(황해도)의 관찰사가 되어서, 감당(甘棠)의 노래를 전파했다. 두
고을 목사로 나갔다가, 돌아와서 兵事行政을 관리했다. 마침내 승
정원(承政院)에 들어가서 王命 의 출납을 맡았도다. 덕을 쌓고 은
택이 깊었으며, 또한 어진 아들 두었으니, 앞으로 크게 쓰임 기대
하리라. 文武 겸전 정성을 베풀어 갖추었거늘, 하늘이 어찌 남겨
주지 않아 영몽(楹夢)41)의 괴이함을 보였는가, 그 누가 알았으랴
한낱 병(病)으로, 풍채가 영원히 숨겨질 줄, 마침내 임금님이 놀라
셨고, 백관들이 다같이 슬퍼했다. 비박한 제물을 드리오니, 우리들
의 사정만이 아닙니다. 글로써 슬픈 정곡 고하오니, 쌓인 정을 다
할 수 없습니다.
又 豊嶽書堂有司 李尹仁 等
稟精星宿鍾神山河驥子墜地適丁亨嘉生而秀異勤學好
文氣宇雄偉出類超群早歲鵬搏高步靑雲激昻熙朝幾展
逸足歷典劇邑試刀盤錯海西觀風范轡澄淸恩威兼施人
服公明銀臺司喉龍允出納眷注斯隆時稱忠告屢朝素髮
憂國丹忱期答鴻私退終山林河曲舊棲魚鳥有約膂力未
衍二竪斯迫彼蒼者天胡不憖遺年靳耳順遽爾永辭邦墜
柱石鄕失先生 聖上輟御朝野傷情嗣能赫世後事無憂
國有 恩典資送亦優哀榮兩至櫬返狐丘素帷披披風來
冷冷問業無所永隔儀型聊將菲奠敢竭卑誠
또 풍악서당 유생 이윤인 등
규성(奎星)42)의 정기를 타셨으며 山河43)의 영기를 모으셨다.
천리마가 땅으로 내려와서, 때마침 좋은 시대 만났도다. 나면서 남
달리 빼어난 재질로, 학문을 좋아하고 근면했다. 기국 또한 웅대하
고 훌륭하여, 무리에서 특별히 뛰어났다. 일찍이 붕새처럼 높이 날
아 청운(靑雲)44)의 넓은 길을 걸었다. 희조(熙朝)45)에 격동하여 분
발하고, 빼난 재능 얼마나 펼쳤는가, 복잡한 고을을 역임하며 반착
(盤錯)46)한 데 큰 재능을 시험했고, 황해도의 풍속을 살필 적에 예
법으로 인도하여 민속이 맑았으니 은혜와 위세를 함께 펼쳐 백성들
은 公明한 데에 감복했다. 承政院에서 승지의 직무 맡아 王命의
出納에 龍47)처럼 진실하였다. 이에 임금의 보살핌과 사랑이 융숭
하여 당대의 忠告라고 칭찬하였다. 백발이 되도록 여러 대의 조정
에서, 나라를 진심으로 근심하였다. 큰 은총을 보답하고 물러나와
山林에서 마칠 것을 기약했다. 옛날 살던 河隈의 물가에는, 魚鳥와
의 약속이 있었거늘, 체력이 줄어들지 않았는데, 병마가 이토록 촉
박했다. 저 푸른 하늘이 어찌하여 어진이를 남겨두지 않았는가, 나
이 아직 육십이 못 되어서, 갑자기 영원으로 가셨도다. 나라는 柱
石이 떨어져 나갔고 고을은 先生을 잃었도다.
임금께서 정사를 멈추시고 朝野가 진심으로 슬퍼했다. 어진 아
들 세상을 빛낼 수 있으리니 뒷일에는 근심이 없으리다. 나라에서
은전이 있어서 자송(資送)48)이 또한 넉넉하니 슬픔과 영화가 둘 다
지극하다. 관구가 고향으로 돌아갈 새, 드리워진 흰 장막이 이리저
리 흔들리고 바람은 쌀쌀하게 불어온다. 학업을 물을 곳이 없어졌
고, 모습은 영원히 막혔도다. 변변치 못한 제물을 받들어 드리고,
비천한 정성을 다하옵니다.
又 有定書院儒生 卞景壽 等
伏以天地降精山川鍾英風儀灑落應期挺生德業純粹才
器卓犖人中之龍鷄群之鶴身負風雲胸含河海望秋霜威
近春蘭氣弧矢初年志不在小優游聖學期入道妙笑冉求
畫勉仲由進不虧一簣無隳九仞吾斯已信優而則仕折桂
一枝鵬程萬里論思夙夜出入丹墀三刀入夢二天來斯顧
惟吾州殘廢已久民無恒産士失俎豆憫見土獘如病在軀
爰推仁恕自下車初若保赤子撫摩吹噓賣劍買犢務玆稼
穡三年化成五袴歌作于以敎導于以提撕誠切右文念篤
尊師慨彼黌舍日益頹弊爰命奚斯架漏補替無侈無廢仍
舊所制別立新院于彼有定藏修有地士知其嚮子游武城
絃誦洋洋文子河南揖讓章章猗歟休澤浹洽無垠今人不
道古亦罕聞瓜期已滿借寇無路桐鄕父老如子離母一邦
菁莪若無所依咸受其賜徒切後思再頒竹符雖未如黃擬
瞻玉節來憩召棠登我塾堂更覩儀容孰謂斯人天反不傭
嗚呼哀哉哲人云亡百身莫贖璠璵已碎蘭蕙又折位隔台
鼎官豈曰崇年未六袠命亦不隆千里聞訃末由奔哭遠具
菲薄敬奠一酌神鑑不昧庶其昭假嗚呼哀哉
또 유정서원 유생 변경수 등
엎드려 생각하옵건대, 天地가 정기를 내려주고, 山川이 영기를
모아주어, 훌륭하고 고결한 풍채로, 때맞추어 태어나셨다. 덕행과
학업이 순수하고, 재능과 기국(器局)이 탁월하셨다. 사람 가운데 용
이요, 뭇닭 속의 학이셨다. 몸에는 풍운을 짊어졌고, 가슴에는 하해
(河海)를 품으셨다. 가을날 서릿발의 위풍이요, 봄을 맞은 난초의
향기로다. 태어나서 어린시절부터, 그 뜻이 작은데 있잖았다. 성인
의 학문에 우유(優游)49)하여 묘리(妙理)에 들어감을 기약하셨다. 염
구(冉求)50)의 그림(畵)을 비웃었고 중유(仲由)51)의 전진(前進)을 본
받아 힘쓰셨다. 일궤(一簣)52)를 무너뜨리지 아니하고, 아홉 길을 완
전히 이루었다. 내가 이미 이럴 줄을 믿었으니, 학문이 뛰어나면
벼슬하는 것이네, 일찍이 과거에 급제하여, 붕정만리의 벼슬길에
오르셔서, 밤낮으로 대궐에 출입하며, 정사를 의논하고 생각했다.
三刀53)가 꿈속에 들어와 二天54)이 여기에 내려왔다.
돌아 보건데 우리 고을은 쇠약하고 피폐한지 오래이라. 백성들
은 생업이 없었으며 선비들은 제사그릇을 잃어버렸다. 토착화된 피
곤을 민망하게 보시고서 자신의 병처럼 여기셨다. 이에 인서(仁怒)
함55)을 넓히어서 부임 하시던 처음부터 어린 아이 돌보듯 보호하
며 마음을 다해 다독거리며 권장하니, 칼을 팔아 소를 사서(賣劍買
犢)56) 농사에 힘쓰도록 하셨다. 3年만에 德化가 이루어져 오고(五
袴)57)의 노래가 일어났다. 이에 가르치고 인도하며, 이에 끌어주고
일깨웠다. 우문(右文)58)에 정성이 간절했고 존형(尊衡)59)에 생각이
독실했다. 학당이 날마다 퇴폐하니 드디어 해사(奚斯)60)에게 명령
하여 무너지고 썩은 것을 보수하여, 옛 제도를 그대로 따라서 넘치
거나 부족하지 않았도다. 별도로 또 새 서원을 세웠으니, 바로 저
유정서원이다. 공부하며 수양할 곳이 생기자 선비들은 향할 바를
알았도다. 자유(子游)가 다스렸던 武城61)처럼, 선비들의 글 읽는
소리가 왕성했고, 文子가 다스렸던 河南62)같이 읍양(揖讓)63)의 예
의가 밝게 드러났다. 아름답도다. 그 은택이 온 고을에 두루 젖어
들어 지금은 말할 것도 없고, 옛날에도 들어본 적이 드물다. 임기
가 이미 만료 되었으나, 차구(借寇)64)할 도리가 없었으니, 이 고장
父老들의 애석함이, 자식이 어머니를 떨어진 듯 하였으며, 한 지방
의 수많은 선비들이 의지할 곳 없는 듯 하였도다. 모두다 그 은혜
를 받았으니 다만 뒷날 간절한 생각은, 또다시 이 고을에 임명되신
다면, 비록 황패(黃覇)65) 같진 못할지라도, 짐작컨대 옥절(玉節)66)
을 우러르며, 소당(召棠)67)에 오셔서 휴식하고, 우리 학당에도 오르
셔서 장한 모습을 다시 뵐 줄 여겼거늘, 하늘이 이 사람을 도로 쓰
지 않을 것을 그 누가 알았으랴.
아! 슬프도다. 어진이가 없어짐에, 백 사람 몸으로도 대신할 수
없었도다. 아름다운 玉이 이미 부서졌고 향기로운 난초가 또 꺾여
졌다. 직위가 정승에 미치지 못하고 막혔으니 벼슬을 그 어찌 높았
다고 말할 것이며, 연세가 60에 미달했으니 수명 또한 높지 못하였
도다. 천리에서 부음을 들었으나, 달려가 곡할 길이 없었도다. 멀리
서 적고 변변치 못한 제물이나마 갖추어 경건히 잔을 드리오니, 신
명하신 영령께서 감찰하셔서 밝게 내려주시기 바라옵니다. 아! 슬
프도다.
又 吏曹判書 金貴榮 叅義 沈義謙
正郞 鄭芝衍 佐郞 鄭琢 金孝元 等
惟靈風姿凝峻氣宇方嚴臨事剛毅處身卑謙名通桂籍歷
踐 王官薇垣白簡栢府豸冠碧漢星槎西關鎖鑰刑部審
克海西憩茇猶淹展驥久滯棲棘潛德俄彰命書屢錫命代
王言出納唯允典禮典兵奉職唯謹人望方屬天奪何速一
疾未瘳百身難贖等早從二郞屢挹丰儀悲慟增深寧止我
私卽遠有日敢薦菲薄英靈如在庶紆歆格嗚呼哀哉
또 이조판서 김귀영, 참의 심의겸, 정랑 정지연,
좌랑 정탁, 김효원 등
생각하옵건대, 영령은, 풍채와 자질이 뛰어났고 기개와 도량이
엄정하였다. 일 처리에 있어서는 강직하였고, 몸가짐엔 자기를 낮
추고 겸손하였다. 이름이 대과 급제 명부에 올라서 여러 곳의 요직
을 역임했다. 사간원(司諫院)의 백간(白簡)68)이요, 사헌부(司憲府)
의 태관(豸冠)69)이라. 中國 가는 使臣이 되었으며, 서쪽 국경을 굳
게 방비하는 자리에도 있었다. 刑曹에서 자세히 살폈으며, 황해도
에서는 선정을 펼쳐 백성의 칭송이 있었다. 준마의 발길이 어지러
워져 오랫동안 낮은 자리에 머물러야 했다. 숨은 덕이 잠깐 드러나
서, 교지가 여러 번 내려졌다. 임금 말씀을 대행하라는 명령으로
왕명을 출납함에 진실하였다. 의전과 교육을 맡고 兵務를 맡아서,
직무를 신중하게 수행했다. 명망이 바야흐로 커졌거늘, 하늘이 어
이하여 이리 빨리 빼앗아 갔는가. 한 병환이 끝내 낫지 않았으니,
백 몸으로도 대신할 수 없었다. 우리들이 일찍이 두 자제 따라, 뛰
어난 가풍을 여러 번 보았으니, 비통함이 더욱더 깊도다. 이 어찌
우리들의 사사로운 정에 그치리이까. 영원히 떠나실 기일이 있어서,
감히 적고 변변치 못한 제물이나마 드리오니, 영령이 계시거든, 흠
향하여 주소서. 아! 슬프도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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