엔카 '블루 라이트 요코하마'의 추억 윤용희
그녀를 찾지 말았어야 했다. 무료했던 일상에 주책없이 한 여인의 근황이 궁금했던 것은, 어느 방송사에서 '요코하마'라는 일본 항구도시의 언급과 어렸을 적 아스라이 간직하고 있던 추억이 있었기 때문이다. 하지만, 온종일 인터넷에서 섣불리 찾아 나선 내게 밀려오는 것은 후회의 덫뿐이었다.
젊은 시절보다 더욱 가냘퍼져 있었다. 앙상해진 모습은 약간의 바람에도 못 이겨 넘어질 듯, 너무 연약하고 측은한 노년의 여인으로 눈에 비췄다. 한 번의 결혼과 이혼을 겪으며 현재는 독신으로 가수보다 배우의 길로 간간이 활동하는 그녀는 내가 짝사랑했던'이시다 아유미'라는 일본 엔카 여가수이다.
처음 그녀를 접하게 된 것은 몇십 년 전 아주 어렸을 적이다. 나보다 다섯 살이 많은 맏형이 어느 날 뭔가를 구해와 나무책상 서랍에 몰래 숨기는 이상한 행동을 보게 되었다. 책상을 열어보지 말라는 엄포와 자물쇠로 굳게 잠가 놓고 집을 나갔다. 호기심이 많던 나는 그것을 안 볼 순진한 아이는 아니었다. 헌 나무 책상에 어설프게 잠긴 열쇠고리를 쉽게 뜯어봤더니, 그곳에는 군부시절엔 엄격히 규제되었던 국내 금지곡과 일본 노래가 함께 수록된 카세트테이프 하나가 있었다.
그 당시는 금지곡과 일본문화는 무조건 차단되고 배척했어야만 했었던 암울한 시대였다. 다양한 계층들이 갈구하려는 특정국과의 문화교류는 역사적 치욕을 명분 삼아, 소수 정치인과 문화국수주의자들은 무조건 억압하고 배척하려만 했다. 그래서 우리는 음지에서나마, 그들의 문화를 옥석으로 가르며 받아들여 문화의 갈증을 해결하며 지냈다. 사회적으로는 장발, 양담배, 금지곡은 자유로이 하지 못하도록 강압적으로 얽어매거나 제한을 두었다. 학교도 불법신고를 장려하는 교육으로 우리에게 주입시켰다.
그런 교육을 받고 자란 나는 순간 망설이게 되었다. 금지곡을 소유한 형을 경찰에 신고하느냐 아니면 가족이기에 용서해야 하느냐. 순진해서 그랬을까. 쓸데없는 생각은 형을 바라볼 때마다 고심하게 하였다. 주책없는 고뇌에 식음을 전폐하기도 했었다. 그렇지만, 큰 맘 먹고 형을 봐주기로 했다.
신고보단 형을 용서하는 쪽으로 급선회하게 한 된 것은 테이프 마지막 자락에 수록된, 엔카 <블루 라이트 요코하마> 때문이었다. 한 번만 들어도 귓가에 와 닿아, 맴도는 주옥같은 멜로디와 일본인 같지 않은 이국적인 외모로 간드러지게 속삭이듯 부르는 여가수'이시다 아유미'의 낭랑한 목소리에 나는 이미 빠져들고 있었다.
어린 마음은 벌써 그녀를 '상상의 여인'으로 흠모하게 했다. 어떻게 생겼을까, 어디에 살고 있을까, 나이는 몇 살일까. 그녀에 대한 궁금증은 많았으나 해결할 방법을 찾기엔 너무 어린 나이였다. 그 아쉬움 때문일까. 언제나 테이프를 곁에 소지하며 따라 부르게 만들어 버렸다. 그 노래를 부를 때마다, 그녀와 상상 속에서 만남과 헤어짐을 갖는 데이트를 즐겼다.
그러고 보면, 형을 신고하는 것보단 테이프가 경찰에 압수당해 다시는 그녀의 낭랑한 목소리를 못 듣게 된다는 현실이 더욱 두렵게 했었나 보다. 그렇지만, 연일 반복하며 듣던 테이프는 얼마 안 가서 길게 늘어나 결국 노래를 못 듣게 됐었다.
그 후로 다시 그녀를 만난 건 십수 년이 지났을 무렵이다. 아마 1980년대 말경 겨울쯤으로 생각난다. 귀갓길을 재촉하던 내게 어느 음반가게 한편에 있는 레코드 LP 판이 눈에 들어왔다. 그것은 이시다 아유미의 <블루 라이트 요코하마>였다.
반가운 마음에 가게 문을 열고 들어서자, 환한 얼굴로 맞이하는 주인은 그녀의 상세한 약력과 더불어, 레코드판을 사라며 은근히 재촉하지만 살 수가 없었다. 레코드판을 돌릴 수 있는 고가의 전축이 내겐 없었기 때문이었다. 아쉬운 마음을 달래며 가게 문은 나서지만 아직은 그 여인과의 추억이 남아있음을 다행으로 여겼다.
간혹, 일본 엔카를 부르는 가수를 보거나 들을 때면 그녀의 간드러지던 목소리를 연상했었다. 아마 가깝고도 먼 나라의 노래가 거부감을 못 느끼는 것은 그녀와 그 노래 때문인가 싶다. 그러나 쳇바퀴 돌아가듯 살아가는 지친 사회생활은 점점 음악과 멀어지는 삶을 살게 했다. 어쩌다 그녀를 생각했을 뿐, 한때의 추억으로 간주하며 잊고 살았다.
나이가 먹을수록 사람은 귀찮아지나 보다. 밖으로는 나가기 싫어, 무료한 휴일을 달래려 TV시청에 몰입하는 일이 잦아지고 있다. 오늘은 일본의 항구도시인 요코하마 풍경을 비취는 프로그램을 우연히 보게 되었다. 순간 그곳과 연관되어 그동안 잊고 살았던 여인이 떠올랐다.
어렸을 적, 어린아이 마음속에 짝사랑이란 걸 심어주었던 그녀의 근황이 너무 궁금해 인터넷을 검색하였다. 이번 만남은 많은 생각과 기대를 하게 했다. 지내온 세월 동안 무엇을 하면서 보냈을까, 어떻게 변했을까, 나이가 들어도 아름다울 거야 하며 별의별 생각을 다 가졌다. 그렇다. 솔직히 흘러간 세월은 그녀만큼은 비켜가는 바람이 있었다.
그렇지만, 기대가 크면 실망이 크다고 했던가. 내가 짝사랑하고 연모하던 상상 속의 여인은 온데간데없이 살아지고 없었다. 젊은 시절보다 더욱 앙상해진 가냘픈 모습과 중년을 넘어 노년을 바라보는 얼굴에는 흘러간 세월에 거부할 수 없는 움푹 팬 주름들뿐이었다. 후회의 습이 밀려왔다.
오늘의 만남은 인터넷이라는 가상의 공간이었지만 갖지 말았어야 했다. 마음속으로나마, 아름다웠던 시절과 고운 자태만을 고이 간직했어야 했다. 아니! 남들보단, 조금은 더 고운 노년의 모습을 바랐던 아쉬운 '마음의 푸념'이라고 본다.
악보조차 구하기 어려운 그 시절, 뜻도 모르면서 남들이 들을까 혼자서 흥얼거리며 그녀와 함께, 몰래 불렀던 일본 엔카가<블루 라이트 요코하마>이다. 이제는 금지곡의 사슬에서 벗어났고 우리 사회도 유연성을 보이며 개방적으로 변해가고 있다. 즐겁고 편한 마음으로 추억을 간직하며 언제든 그녀의 노래를 감상하련다.
첫댓글 젊은 한 시절만 아름다운 게 아니라 잘 늙어가는 노년도 아름다운 것이겠지요. ^^*
남들보단, 조금은 더 고운 노년의 모습을 바랬던 아쉬운 마음의 푸념입니다.^^....읽어주셔서 감사합니다.
저도 오래전에 이 노래에 반해있던 적이 있어요. 일단 곡 제목이 낭만적이었어요. 가수가 '이시다 아유미'라는 건 오늘 처음 알았습니다. 글 읽기 전에 살짝 노래를 검색했더니, 역시 좋아진 세상이네요. 이시다 아유미의 공연 동영상을 볼 수 있었습니다. 윤용희님 말씀대로 이국적인 용모더군요. 누굴 닮았다 라는 생각을 하다가, 그것이 미스코리아 이은희 라는 걸 알았습니다. 배우 이병헌의 여동생이죠. 아무튼 여가수의 미스제팬급 용모와 오랜만에 들은 멜로디 그리고 "요꼬하마"라는 낭만적인 지명이 오늘 이 무더위 속에서 잠시 저에게 '쉼'을 주네요. 저는 노년이 된 "이시다 아유미"는 안 봤으니 다행인가요?좋은 글입니당
일본에서도 요코하마 항구는 상징성이 내포된 미항이자 관광도시라고 하더군요....그리고 유명한 시를 노래가사로 사용해서 미인인 그녀가 간드러지게 불렀기에 더욱 유명해진거죠.^^........그녀를 처음 봤을 땐 얼마나 예뻣던지...홀라당 반했지 뭡니까....근데...무심한 세월에 변해버린 그녀의 모습에 실망이 너무 컸지요.--....^^.......혜영님도 저와 같이 이 노래에 반한 적이 있었군요......님이 말씀하셨듯이....미스코리아와 많이 닮았네요....약간 볼 살만 빠지면 영락없겠는데요~~~^^......읽어주셔서 감사합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