외동읍 치기놀이 ‘엿 치기’ 에 얽힌 사연들
(작성 중 : 치기 시리즈 제9회)
‘엿치기’도 ‘치기’라는 말이 들어있어 ‘치기시리즈’로 분류했지만, 다른 ‘치기’는 모두 ‘마당’이나 공터, 운동장 등이 있어야 가능한 놀이인데, 같은 ‘치기’라도 유일하게 ‘마당’과 상관없는 게 ‘엿치기’라는 점을 염두에 두시고 읽어 주시기 바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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우리들의 고향 외동읍(外東邑)에는 ‘엿치기’라는 놀이가 있다. ‘엿치기’란 우리들의 고향 사투리이기도 하고, 표준어(標準語)이기도 하다. 원래(原來)는 사투리로 출발했지만, 언젠가부터 표준어로 둔갑한 것이다. ‘엿치기’가 사투리일 때 표준어는 ‘엿 내기 장난’이라고 했었다.
엿치기
(6.25 전쟁 후 고아출신 '넝마주이'들의 손이다)
‘엿치기’는 사전(辭典)에서 ‘엿가래’를 부러뜨려 그 속의 구멍 수효와 크기를 비교하여 승부(勝負)를 겨루는 내기라고 정의하고 있고, 실제에서도 두 사람 이상이 엿가락 하나씩을 골라 들고, 동시에 꺾어서 기포(氣泡 ; 구멍)의 크기를 비교하여 구멍이 작은 사람에게 엿 값을 내게 하는 놀이다.
때로는 ‘엿장사(엿장수)’가 ‘엿’의 매상(賣上)을 올리기 위해 손님과 겨루어 ‘엿치기’를 하기도 한다. 우리들의 고향 외동읍(外東邑)에서는 ‘엿장수’를 ‘엿장사’ 또는 ‘엿재이’라고 한다.
엿장수
그리고 ‘엿재이’라는 말은 남성(男性)의 변말로 “엿재이 지 맘대로다(엿장수 제 마음대로다)”라는 말이 있는데, 이 말은 남존여비(男尊女卑) 시대의 남성의 독선(獨善)을 비유하여 이르는 말이다.
보리밥 한 그릇도 제대로 먹기 어려웠던 배고픈 시절, ‘엿장사(엿장수)’는 시골 어린이들에게 가장 반가운 손님이었다. 동네 입구에서 가위질 소리가 들리면 집집마다 꼬마들은 집안을 발칵 뒤집어 놓는다.
엿 가위
엿장수가 오길 기다리며 모아 놓았던 갖가지 고물(古物)을 챙기느라 부산을 떤다. 혹시 빠뜨린 게 없는지, 장독대 주변, 마루 밑, 담장 밑을 샅샅이 뒤지고 또 뒤진다. 돈을 주고 엿을 사먹는 것이 쉽지 않았던 가난했던 시절 시골마을의 모습이다.
옛적에는 엿장수들이 엿판을 어깨에 메고 다녔지만, 1950년대부터는 지게에 얹어 지고 다니다가 1960년대 후반쯤부터는 리어카(손수레)를 끄는 엿장수로 바뀌었다.
엿판 맨 엿장수
(옛적에는 두 사람이 함께 다니기도 했다)
엿장수가 마을을 찾는 날은 딱히 정해져있지는 않았으나, 이런저런 고물(古物)이 적당히 모였다 싶을 때쯤이면, 반가운 엿 가위질 소리가 들려온다.
엿장수가 오는 날 이곳저곳을 뒤지다가 달콤한 엿 맛의 유혹(誘惑)을 이기지 못한 아이가 멀쩡한 아버지의 흰 고무신을 엿장수에게 몰래 내다주고 엿을 바꿔먹는 경우도 있었다.
그날 밤, 아이는 혼이 나지만 그것도 그때뿐, 이미 아이의 뱃속에 들어간 엿을 꺼낼 수도 없으니 그것으로 끝이 나고 만다.
흰 고무신
손자(孫子)·손녀(孫女)들에게 용돈을 줄 형편이 못되는 할머니들은 머리 빗질을 할 때마다 나오는 머리카락을 꼭꼭 모아두었다가 엿장수가 오는 날 손자·손녀들에게 내주곤 했었다.
엿판 주변에 둘러선 아이들이 “마이 주이소”라고 보채면 엿장수는 “엿장사 맴잉기라”하면서 엿판 위에 ‘끌’을 대고, 가위로 쳐 적지 않을 만큼 판때기 엿을 끊어주거나 가래엿을 건네주었다.
끌
여기에서 말하는 ‘끌’이란 망치로 때리거나 손으로 밀어서 나무에 구멍을 파거나 겉면을 깎고 다듬는 데에 쓰는 연장으로 한쪽 끝에 두툼한 칼날이 있다.
“딱따구리는 ‘끌’이 아닌 자기의 부리로 나무껍질을 판다.” 또는 “그 정도 구멍이면 성한 사람이 ‘끌’로 파도 하루는 넉넉히 걸릴 것이다.”라는 용례(用例)들이 있다.
어쨌든 그 시절에는 고물(古物)을 주고 빨래비누나 성냥을 교환(交換)해가는 어른들도 가위질 소리를 듣고 군침을 삼키는 자녀들을 위해 엿 몇 가락 함께 바꿔가는 것을 잊지 않았다.
지금의 고물
종이, 빈병, 깨진 무쇠 솥이나 ‘소디베이(솥뚜껑)’, 화로(火爐), 쟁기 날(보습), 구리, 비닐부대, 시멘트부대, 고무신, 긴 머리카락, 돼지털, 염소 털 등 재활용(再活用)이 가능한 물건은 모두 엿장수들의 수집대상(蒐集對象)이었다.
그러나 고물(古物)을 수집하는 엿장수는 1980년대를 고비로 하나 둘 사라지기 시작하더니 이젠 완전히 자취를 감추었다. 시골지역의 생활형편이 고물(古物)을 모아 엿과 비누로 바꾸지 않아도 될 만큼 나아진데다 고물 값도 떨어져 수지타산(收支打算)이 맞지 않기 때문이다.
소디베이
엿장수가 사라진 요즘 시골지역에는 빈병, 고철류(古鐵類) 등 갖가지 재활용품(再活用品)이 제대로 수거(收去)되지 않고, 산과 들에 방치되어 환경오염(環境汚染)의 한 원인이 되고 있기도 하다.
엿장수를 기다리는 축은 청장년(靑壯年)들도 마찬가지였다. 늦겨울 시골집 양지바른 담장 밑에는 옹기종기 동네 사람들이 모여 ‘팔짱’을 끼고 한담(閑談)을 나누곤 한다. 그때 멀리서 엿장수의 가위소리가 들려오면 모두들 ‘엿치기’를 서로에게 제의(提議)한다.
옛적의 엿장수
그리고 ‘엿장수’가 도착하면 ‘엿목판’을 둘러싸고 ‘가래엿’ 한가락씩을 골라 반을 뚝 분질러 ‘훅’하고 입김을 분다. 이때 분질러진 엿에 구멍이 큰 사람이 이기게 되고, 구멍이 없거나 적으면 지게 된다.
그래서 엿을 고를 때는 ‘연목판(엿을 담는 나무그릇)’을 볼썽사납게 헝클어 놓기도 한다. 구멍이 크게 뚫렸음직한 엿가락을 고르기 위해서다.
옛목판
‘엿치기’는 두 사람 이상이 하는데, 각각 엿가락 하나씩을 골라 꺾어서 ‘훅’하고 입김을 세게 불면 구멍이 선명(鮮明)하게 나타난다.
이것을 서로 가져다 대고 구멍이 큰지, 작은지를 비교(比較)하여 제일 큰 사람은 엿을 거저먹고, 구멍이 작은 사람끼리 또 엿을 꺾어서 맨 나중에 구멍이 제일 작은 사람이 엿 값을 몽땅 치르도록 한다.
외국인의 엿치기
그러나 ‘엿치기’를 할 때 엿가락을 자르면서 재빨리 잘린 부분을 ‘훅’하고 ‘입 바람’을 불어넣어 ‘엿구멍’을 크게 만든다는 말은 별로 근거가 없는 말이다. ‘엿구멍’이 커지기를 바라는 희망(希望)을 표현하는 동작에 불과하기 때문이다.
그 이유를 알아본다. 회원님들께서도 잘 아시는 바와 같이 ‘엿치기’ 할 때 구멍이 생기는 것은 엿을 만드는 과정(課程)에서 미리 구멍이 만들어져 있기 때문에 입김으로 불든, 불지 아니하든 차이가 없다.
엿
이를 구체적(具體的)으로 알아보기 위해 옛적 우리들의 어머니들이 만들어 주시던 ‘엿만들기’ 과정을 잠시 살펴본다. 엿을 만들 때는 먼저 ‘검은엿’을 만드는데, ‘검은엿’을 만드는 재료(材料)는 쌀 소두 1말, 엿기름 1되 3홉, 더운물 1동이 반이다.
쌀을 잘 씻은 후 물에 충분히 불려서 ‘시루’에 안쳐서 쪄놓고, 더운 아랫목에 항아리를 놓고 항아리 속에 ‘엿기름’ 가루 두 줌을 놓고 뜨거운 ‘지에밥’을 그 위에 퍼 넣는다.
검은 엿(조청)
그리고 거기에다 손 담그기에 알맞은 정도의 더운물을 붓고, ‘엿기름’가루 남은 것은 축축하게 물을 뿌려놓았다가 밥 위에 방망이로 잘 저어서 덮어 둔다.
여기에서 말하는 ‘지에밥’이란 찹쌀이나 멥쌀 등을 물에 불려 시루에 찐 밥으로 약밥이나 인절미를 만들거나 ‘술밑’으로 쓴다. 술을 만들 때 지은 ‘지에밥’은 ‘술밥’이라고도 한다.
지에밥(술밥)
“월례는 김이 모락모락 나는 ‘지에밥’에 누룩을 섞어 술밑을 만들었다.” 또는 “약과랑 강정이 될 ‘지에밥’은 잘 말려졌다.”라는 용례(用例)들이 있다.
‘엿’을 담근 지 7~8시간 후에 보면 맑은 물이 떠오르는데, 이때 삼베 주머니 등에 퍼 담아 주물러 짜서 식기 전에 솥에 붓고 끓이면, ‘검은 엿’이 된다.
그리고 이렇게 만든 ‘검은 엿’을 식힌 후 뭉치를 만들어 계속 잡아 늘였다 겹쳤다 하면, 그 사이사이에 공기(空氣)가 들어가서 흰색으로 변하면서 ‘흰엿’이 되고, 이 과정에서 엿가락 속에 기포(氣泡), 즉 구멍이 생기는데, 많이 잡아 당기고 겹칠수록 큰 구멍이 생긴다.
'늘이기'를 제대로 하지 않은 엿 구멍(구녕)
어쨌든 이때의 엿은 어쩌면 그렇게 맛이 있었던지 지금으로서는 표현이 제대로 되지 않는다. 그만큼 그때는 과자류(菓子類)가 없기도 했지만, 밥도 제대로 먹지 못하고 살던 배고픈 시절이라 어떤 음식이든 맛이 없는 것이 없었기 때문일 것이다.
엿장수
건너 마을에서 엿목판을 지게에 얹어 짊어지고 논둑길을 걸어 넘어오는 엿장수의 가위소리가 들리면, 그동안 모아 두었던 찢어진 헌 고무신이나 못쓰게 된 양은(洋銀) 냄비, ‘소래이’나 ‘호메이’ 부러진 것 등을 들고나가 엿을 바꾸어 온 가족이 조금씩 나누어 먹는데, ‘간에 기별이 가지도 않았지만’, 그 맛은 일품(逸品)이었다.
여기에서 잠시 그 시절 꿀맛 같았던 ‘엿’ 맛과 ‘엿치기’ 추억을 상기(想起)하면서 서정원의 ‘엿치기’를 음미하고 넘어간다.
엿 치기
서정원
꼬마들끼리 엿치기를 한다.
엿치기 같이 할 적수 없어
배짱 좋은 나
엿장수와 내기를 한다.
엿장수 허허 웃으며
가소롭단다.
나는 골이 깊은 엿을 골랐다.
골빈 사람처럼 골이 깊으면
속이 텅 비었다는 것을
귀동냥해서 익히 알았던 터라
얏 소리와 함께 후 불으니
엿장수 구멍보다 훨씬 크다
아이들은 박수를 쳤다.
엿치기추억은
기억으로 자신을 묻지 말고
글로 추억 무덤 만들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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요즘 일부지방에서는 ‘엿치기데이’라는 날을 만들어 해마다 ‘엿치기’ 행사를 치르기도 한다. 매년 11월 11일을 ‘엿치기데이’로 정하고, 이를 기념(記念)하는 ‘엿치기’ 내기를 하는 것이다.
‘열린사회희망연대’와 ‘청소년인터넷방송국’ 기자단 경남지부(慶南支部)에서는 지난 2000년부터 매년 11월 11일 날, 마산(馬山) 창동에서 ‘엿치기데이’ 행사를 가지고 있다.
마산 창동 ‘엿치기데이’
올해 12주년을 맞는 마산(馬山) ‘엿치기데이’는 11.11이 엿과 비슷하고, 수능시험(修能試驗)을 얼마 남겨두지 않은 시점에 엿이 지닌 합격기원(合格祈願)의 의미를 착안한 것이다.
언제부턴가 11월 11일이면 청소년들 사이에서 ‘빼빼로데이’라 하여 ‘빼빼로’를 주고받는데, 상술(商術)에 의해 발생한 이런 날보다는 기왕에 우리의 전통(傳統) 먹거리인 ‘엿치기데이’가 오히려 좋지 않을까 하는 생각이 들기도 한다. 여기에서 다시 오성환의 ‘엿치기’를 음미하고 넘어간다.
엿 치기
오성환
가자, 엿치기 하러가자.
찰랑 찰랑
엿장사 가위질 소리 나면
몽당 숟가락, 찌그러진 냄비 들고
엿 사 먹이려 간다.
엿치기 하러간다.
지게위에 엿판 올려놓고
찰랑 찰랑
신나는 엿장사 가위질 소리,
꼬맹이들 졸졸졸
엿장사 뒤를 따르고
엿가락 딱 분질러 입으로 후~ 불어
엿치기 한다.
한입 넣고 쫙쫙 신나게 씹던
‘덤바우’는 이빨 빠지고
놋촛대 훔쳐 엿 사먹던
‘삭불이’는 엄마한테 들켜
삼십육계 들판으로 도망가고,
골목골목 돌며
찰랑찰랑 엿장사 가위질 소리
가자, 엿치기 하러 가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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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야, 내 구멍이 크다!” “아냐 내 구멍이 더 커!” “뭐야 내 것이 더 크다니까” 엿장수 엿판 앞에서 동무들끼리 자기 엿에 난 구멍이 더 크다고 싸운다.
그러면 엿장수 아저씨가 심판(審判)이 되어 준다. “오늘도 내가 졌네! 재수 없어.” 투덜거리는 아이, 그러나 소박(素朴)한 ‘엿치기’에 동무들의 우정(友情)은 깊어진다.
엿장수
지난 1970년대만 해도 곳곳에서 벌어졌던 엿치기, 엿을 동강 낸 다음 엿 속에 난 구멍이 더 커야 이기는 놀이인데, 진 사람은 엿 값을 내야한다. 지금은 서울 종로의 인사동(仁寺洞)이나, 민속행사장(民俗行事場)이나 가야만 볼 수 있다.
지금처럼 컴퓨터가 없던 시절에는 ‘엿치기’도 아주 중요(重要)한 놀이의 하나였다. 그런데 ‘엿치기’를 하려면 엿 값이 있어야 한다. 용돈이 없던 아이들은 엿장수의 가위질 소리만 들리면 잽싸게 집 뒤꼍에 숨겨뒀던 떨어진 고무신짝이나 구멍 난 양은(洋銀) 그릇을 들고 뛴다.
엿치기
그리고 그 시절 아이들에겐 ‘엿치기’ 말고도 자치기, 못치기, 구슬치기 같은 치기놀이가 많았다. ‘자치기’는 긴 막대기로 짧은 막대기를 쳐내는 것이고, ‘구슬치기’는 구슬 하나를 손가락으로 튕겨서 다른 구슬을 맞추는 놀이다. 지금 돌아보면 참으로 순박(淳朴)한 놀이들이었다.
그러나 이러한 놀이를 되살리고 싶어도 지금의 시멘트 환경(環境)에서는 여의치가 않다. 그리고 예전에 ‘치기’가 붙은 놀이는 ‘마당’이 있어야 했고, 그 ‘마당’에는 흙이 깔려 있어야 하는데, 지금은 그런 마당조차 사라지고 없어졌다.
엿 늘이기
그리고 앞서 얘기한 대로 같은 ‘치기’ 가운데 유일(唯一)하게 ‘마당’과 상관없는 게 ‘엿치기’지만, 지금은 그 ‘엿’도 모두 한두 개 단위로 포장(包裝)되어 파는 것이 많고, ‘토막 엿’으로 잘라 플라스틱 케이스에 담아 판매(販賣)하고 있다.
그리고 설사 이것으로 ‘엿치기’를 한다 해도 구멍 크기가 견주기 어려울 경우 그 시절 엿장수 아저씨들처럼 심판(審判)을 서주는 사람도 없다. 여기에서 다시 서정원의 ‘꼬마 엿치기선수’를 잠시 음미한다.
꼬마 엿치기선수
서정원
신들린 듯 가위질 잘하는
엿장수아저씨
가위질 몇 번 칠 것인가 알아맞추는 사람
공짜로 먹고 싶은 만큼 준단다.
치는 것은 엿장수 마음이니까
게임이 아니지요 .
초등학교 5학년 선수
엿장수하고 엿치기를 하자고 내기를 건다.
엿가락을 뚝 잘라 훅 불면서
속에 구멍이 크면 이기는 게임이다.
엿장수 나를 보더니
껄껄 웃으면서
번데기 앞에서 주름을 잡는 격이라고
흔쾌히 내기에 응한다.
친구들은 어리둥절 나를 바라본다.
나는 골이 아주 깊은 것을 골랐다.
주름살과 같은 골이 깊으면 엿이 만들어질 때
고생을 많이 했기 때문에
속이 비었다는 것을 귀동냥으로 알았기 때문
고르고 골라 얏 기압소리와 함께
군침 도는 엿가락 두 동강을 냈다.
커다란 동굴이다.
이겼다 번데기의 주름을 폈던 그 맛
꼬맹이 친구들은 박수를 쳤다.
그 때의 엿가락
43년을 빨아 먹어도 녹지도, 싫다고도 않고
단 맛으로 빙그레 웃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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여기에서 아직도 ‘엿치기’를 할 수 있는 인사동(仁寺洞) 거리로 잠시 나가본다. 인사동에 어둠이 내리기 시작하면 ‘인사동을 아끼는 사람’들이 하나 둘 모여든다.
그리고 그들이 있어 인사동(仁寺洞)의 밤은 즐거워진다. 그들이 인사동을 떠나지 않기에 ‘예술(藝術)의 거리’라는 전통이 오늘도 봄꽃처럼 피어나고 있다.
인사동 거리
그러나 요즘의 인사동(仁寺洞)은 전문가들의 거리가 아닌 대중(大衆)의 거리로 바뀌었다. 그런 탓에 데이트를 즐기는 젊은이들도 많이 찾아든다.
상대의 허리를 껴안고 걸어가는 젊은이들의 모습만 보면 이곳이 명동(明洞)인지, 신촌(新村)인지, 강남(江南)인지 알아차리기 어렵다. 그러나 거리에 즐비한 민속공예품들을 살피면 그래도 이곳은 인사동(仁寺洞)이다.
지금의 인사동 거리
(그 옛날, 대학 후배 여학생과 학습자료 수집을 다니던 길이다)
인사동(仁寺洞)에도 ‘엿장수’가 있다. ‘울릉도(鬱陵島) 호박엿’을 파는 곳인데, 지금은 젊은이들이 많고, 엿 맛 보다는 추억을 사려는 중년들도 제법 섞여 있다.
젊은이들은 작게 포장(包裝)된 엿을 즐겨 찾고, 중년의 남녀는 ‘엿치기용’으로 막대 엿을 산다. 그리고 그들은 옛 추억(追憶)을 되살리기라도 하듯 즉석에서 ‘엿치기’를 한다. “엿치기는 역시 ‘구녕’이 최고여~” 여기에서 다시 신봉균의 ‘엿장수 오던 날’을 게재하여 음미해 본다.
엿장수 오던 날
신봉균
마늘밭 마늘 걷이도 끝난 어느 날
마을 어귀엔 엿장수가 나타났다.
허름한 리어카에 엿 목판 얹어 끌고,
나이는 오십 넘어 보이고,
“쩔겅 쩔겅”. “자~아 고물 받습니다,
고무신 떨어진 것, 냄비 구멍난 것”.
“솥단지 깨진 것, 놋 숫갈도 반습니다.”
“머리카락도 다~아 받아요.”
뛰어놀던 아이들이 몰려들고,
그 무엇인가 가져오려 집으로 뛰어가는 놈,
엄마한테 엿 사달라고 조르려 뛰어가는 놈.
잠시 후 온갖 고물은 다 모여든다.
숫갈총에 찌그러진 양은 냄비,
극쟁이 볕 깨진 쇳조각에
어머니 누이 머리 빚을 때 모아두었던
머리카락 까지
엿을 산 놈은 흡족한 기분으로
입에 넣고 빨기 바쁘고, 엿을 못 산 놈은
어찌 해서라도 그 엿 한 입좀 빨아 보려고
부러운 눈초리로 그놈을 구스른다.
“야! 나도 한입 빨아보자, 잉”
그때 이십 여세쯤 되는 놈들이 나타난다.
전번 엿장수와 엿치기
내기에서 적잖케 돈을 잃었기 때문이다.
“야! 오늘은 우리 돈도 없는데
우리 공짜로 엿좀 먹어보자.“
“내가 저 엿장수 유인 할테니까 네가 엿좀 훔쳐라.”
한 놈이 슬슬 다가가서
“엿장수 X구먹은 끈적 끈적”
엿장수 “예끼 이사람”
그래도 자꾸 따라다니며 성가시게 구니
마침내 붙잡으려 좇아가니,
발 빠른 총각 놈 잡힐 듯 말듯 도망간다.
기회는 이때다.
다른 한 놈이 엿가락 한 움큼 쥐고 도망가니
그 엿장수 조금은 손해 보았을 것이다.
그날 엿 훔쳐 간 놈들
물만 켜도록 엿을 먹었대나 어쨌대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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필자는 어릴 적부터 유독 엿을 좋아했다. 그래서 어린 시절에는 엿 때문에 여러 가지 말썽을 부리기도 했었다. ‘외동이야기’ 어느 파일에서 소개한 ‘그 시절 엿장수와 ’소디베이‘에 얽힌 추억’은 뒤쪽에 옮겨 게재하기로 한다.
지금은 옛 모습을 찾아 볼 수 없지만, 누구에게나 가슴속 깊이 자리 잡고 있는 추억(追憶) 중에는 어릴 적 시골 엿장수와의 아름다웠던 추억의 고리가 한두 개쯤 있을 것이다.
엿공장
“엿사이소, 엿이요! 엿 사요, 엿. 맛있는 엿 사이소”를 신나게 외치던 시골 엿장수, 그들은 모두 어디로 사라졌을까? 요즘 어린애들은 엿을 제과점(製菓店)에서만 파는 줄 안다. 시대의 변화를 피부로 느낄 수 있는 한 대목이 아닐까 한다.
먹거리가 귀했던 1950년대와 60년대의 그 시절, 엿은 어린이와 노인을 불문하고 특별한 별미(別味)가 아닐 수 없었다. 어찌 그리 달고 맛이 있었던지, 꿀맛이 따로 없었다.
호박 엿
그러나 그때 그 엿 맛을 지금은 어느 곳에서도 느낄 수가 없다. 엿의 재료가 다르고, 엿을 먹는 사람이 다르고, 무엇보다 그때와 지금의 정서(情緖)가 다르기 때문이다.
웬만한 시골마을에는 한 달에도 서너 번씩 마을을 찾는 단골엿장수가 있었다. 엿장수의 ‘찰까닥’거리는 가위질 소리가 어렴풋이 마을 입구에서 울려대기 시작하면 집집마다 모아 두었던 빈 병이나 고철(古鐵), 휴지, 헌책 따위를 들고 나와 엿과 바꾸어 먹곤 했었다.
엿 늘이기
특별(特別)한 고물이나 폐품(廢品)이 없는 집에서는 마늘이나 감자, 고구마까지 주고 엿을 사기도 했다. 지금 같아서는 감자나 고구마를 그냥 쪄먹어도 훌륭한 간식(間食)이 되는데도, 그 시절에는 엿이 너무 귀하고 맛이 너무 좋아 이 노릇을 한 것이다.
어찌됐던 보리밥 한공기도 마음 놓고 제대로 먹기 어려워 굶주림에 허덕이던 그 시절, 엿판이 얹힌 손수레를 끌고 ‘찰까닥 찰까닥’ 가위질을 하며 이 마을 저 마을 돌아다니던 엿장수는 시골 어린이들에게 있어 가장 환영(歡迎)받던 존재였다.
엿가위
저 멀리 동네 입구에서 가위질 소리가 들리게 되면 집집마다 꼬마들은 부리나케 뛰어 다닌다. 엿장수가 오기를 기다리기나 한 듯 구석구석에 모아 놓았던 냄비 부서진 것, 비료(肥料) 포대, 구멍 난 고무신짝, 할머니의 부러진 은비녀 등 갖가지 고물을 챙기느라 부산하기 그지없다.
장독대나 마루 밑, 담장 부근을 샅샅이 뒤지면서도 혹시 빠뜨린 것은 없는 지 뒤지고 또 뒤진다. 당시의 시골에서는 엿을 사먹을 돈도 없었고, 몇 푼 갖고 있다 해도 그 귀한 돈을 엿 따위를 사먹는데 쓸 수는 없었기 때문이다.
엿공장
당시에는 어느 마을을 가나 마찬가지였지만, 어른들은 ‘엿치기’를 좋아했다. 네다섯 사람만 엿장수 근처(近處)로 몰려들어도 금방 ‘엿치기’ 판이 벌어지곤 했다.
그리고 이렇게 ‘엿치기’판이 벌어지면, 으레 엿장수를 둘러싸고 있는 아이들에게도 한 가락쯤은 맛볼 수 있는 행운(幸運)이 주어지기도 했고, 어른들이 하는 놀이였지만, 신나는 구경거리가 되기도 했었다.
엿치기용 엿가락
그리고 그 당시에는 엿 중에서도 ‘박하엿’이 한자리 했었다. 그리고 그 당시 ‘엿가락 장단’은 지금 생각해 봐도 정말 멋있었다는 생각이 든다.
우리 전통의 소리와 가락 장단이 어우러져 어깨춤이 절로 나올 것 같았던 그 시절의 ‘엿가락 장단’이 지금도 귀 바퀴에 메아리가 되어 스친다.
가마솥과 뚜껑
엿가위로 엿판때기를 탁탁 치면서 추임새도 적당히 섞어가며, 신명나게 ‘엿가락장단’을 치던 노래 소리가 그렇게 듣기 좋을 수가 없었다. 당시 엿장수 아저씨들이 신나게 불러 재끼던 ‘엿가락장단’ 노래를 소개한다.
“자!~ 박하엿!
둘이 먹다가 하나 죽어도 모르는 박하엿!
자!~ 어서 오이소!~
숟가락 뿔아진 거!~
냄비 쭈그라진 거!~
수굼포(삽) 뽀사진 거!~
아자씨, 아지메 고무신 빵꾸 난 거!~
할매, 할배 쌈하다가 할매 비녀 뿔아진 거도
엿줌니데~이!
지로 말할 것 같으면 서울대학교,
강엿과와 조청과를 사년씩
합이 팔년을 우수한 성적에
특등 장학생으로 졸업했습니데이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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엿치기용 엿가락
그 구수한 말솜씨와 와삭함에 당시의 꼬마들은 엿장수 뒷 꽁무니를 쫄쫄 따라 다니기도 했었다. 서너 살 된 꼬마가 엿장수의 흥겨운 장단에 쫄쫄 따라가다가 집을 잃고, 미아(迷兒)가 된 적도 가끔 있었다.
그리고 당시에는 ‘씨똥가리’와 ‘자장구 동태(쇠붙이와 자전거 굴렁쇠)’가 엿을 제일 많이 주는 고물(古物)에 속했다. 그래서 ‘소디베이(가마솥뚜껑)’ 같은 주물(鑄物)은 당시의 인기절정(人氣絶頂)이었던 ‘박하엿’을 한 아름이나 바꿔주곤 했었다.
박하 엿 만들기
어린 시절 아랫집 계철이를 꼬드겨 그 집 ‘소디베이’로 ‘박하엿’을 사먹던 일이 지금도 가끔씩 후회(後悔)스럽게 추억된다.
필자의 집 바로 아랫집인 계철이네 집에는 필자네의 울타리 쪽 마당 한켠에 가마솥 ‘소디베이’를 거꾸로 뒤집어 놓고 그 밑에 큰 돌을 몇 개 적당히 괴이고, ‘찌짐이’를 부쳐 먹는 임시조리장(臨時調理場)이 있었다.
소디베이
그 시절 시골에서는 여름철마다 대개의 가정에서 마당 한구석에 야외 임시부엌을 차리기도 했었다. 열기(熱氣)가 푹푹 내뿜는 부엌에서 밥 짓기도 힘들고, 아궁이에 불을 지피면 온 방안이 찜통이 되어 잠을 잘 수 없었기 때문이다.
가끔 계철이 엄마는 이 ‘소디베이’에 장작불을 지피고, ‘들기름(들깨 기름)’ 몇 방울 떨어뜨려 ‘찌짐이’를 부치곤 했었는데, 이때마다 장작불에 가열된 ‘찌짐이판’은 ‘치~이’ 소리를 내면서 기름 타는 연기와 장작불 연기가 뒤섞여서 매캐하고 뽀얗게 피어오르곤 했었다.
마당에 차린 임시부엌
그리고 그때마다 구수한 ‘찌짐이’ 냄새가 울타리 사이로 번져오곤 했었다.그리고 그때마다 필자는 “저것을 엿 바꿔 먹으면 한 이틀은 ‘박하엿’을 원 없이 먹을 수 있겠구나” 하는 생각을 하곤 했었다.
매일 같이 그런 생각을 되풀이 하다가 어느 날 이를 실천하기로 작심(作心)을 했다. 방법(方法)은 단 한 가지뿐이었다. 학교 후배(後輩)인 계철이를 꼬드기는 수밖에 없었다.
‘지짐이 판’ 용도로 쓰이던 솥뚜껑
어느 날 생울타리 사이를 살펴보니 계철이가 마당에서 제 혼자 ‘마때치기(자치기)’를 하고 있었다. “계철아! 니 요리 쫌 와바라”하고, ‘계철이’집과 우리 집 사이에 있는 고작(골목)으로 불러내었다.
궁금증이 가득한 ‘계철이’에게 “계철아, 니거 집 ‘소디베이’ 저거 엿 사묵으머 어떻겠노? 엿으로 한 보따리 줄낀데”라고 조심스럽게 제안(提案)을 해봤다.
예상대로 ‘계철이’는 “머라 카노! 울 엄마자테 맞아 죽는 꼬라지 볼라카나!”라며 펄쩍 뛰었다. ‘계철이’ 어머니는 보기에는 순한 얼굴인데, 화가 나시면 엄청 무서운 분이라서 ‘계철이’는 제 어머니를 가장 무서워했었다.
엿치기
사정이 이쯤 되면 요즘 사극용어(史劇用語)로 ‘겁박’을 주지 않을 수 없었다. “그~으래, 그라머 동네 아~덜 전부다 니한테 ‘반대’ 걸어뿐다. 그래도 개안캤나?” 그때는 한 아이를 ‘왕따’시키는 걸 ‘반대 건다’라고 했었다.
여럿이서 새끼손가락 하나씩 걸고, 어느 아이에게 ‘반대를 걸어’버리면, 그 아이는 동네 애들한테 철저히 외면(外面) 당하고, 말 한마디도 걸지 못할 뿐 아니라 같이 놀 수도 없었다.
엿치기
계철이는 그 시간부터 고민(苦悶)에 빠지지 않을 수 없었고, 무슨 결단(決斷)을 내리지 않으면 안되었다. 필자의 말을 안 들으면 ‘왕따’를 당할 것이고, 듣자니 아버지 어머니에게 혼쭐이 날 것이니, 이럴 수도 없고 저럴 수도 없어 여간 고민이 아니었다. 거기에다 그 맛있는 ‘박하엿’까지 눈앞에 아롱삼삼하니 죽을 맛이었다.
하도 고민(苦悶)이 되어 큰누나인 ‘계남이’에게 털어놓기도 한 모양이지만, 당시의 ‘계남이’는 필자의 연상(年上)의 친구인데다, 어느 파일에서 소개한대로 ‘뿌꿈놀이’에서 필자의 ‘꼬치’를 만져보자고 한 사건(事件)이후 필자 앞에서는 꼼작 못하고 기가 죽어 있던 터라 아무런 도움을 받지 못했던 것으로 확인되었다.
뿌꿈놀이
하학 길마다 필자의 은근한 압력(壓力)을 계속 받자 계철이는 어느 날 “애라 모르겠다. 일단 묵고 보자!”라는 심정(心情)으로 그 ‘소디베이’를 당수나무 밑에 바쳐놓은 엿장수 할아버지 ‘바지게’에 까지 낑낑거리며 들고 나왔다.
물론 필자에게 먼저 통기를 해 왔다. 통기를 받은 필자는 필자를 수행(遂行)하던 ‘똘마니’들(그래야 셋 뿐이었지만)을 소집하여 그들과 주욱 늘어서서 ‘소디베이’를 엿장수한테 넘겨줬더니 꿀맛 같던 그 ‘박하엿’을 정말 한 보따리나 건네줬다.
그 시절 똘마이들
개선장군(凱旋將軍)이 된 필자들은 엿장수 할아버지가 비료포대 종이에 둘둘 말아 싸주는 엿 보따리를 둘러메고, 원성왕릉(元聖王陵)을 둘러싸고 있는 ‘능갓’ 숲속으로 자리를 옮겨 엿잔치를 벌였다. 계철이는 필자의 지시(指示)에 따라 누나(계남이)와 누이(계순이)도 함께 대리고 나왔다.
들통이 날 경우 공범자(共犯者)를 가급적 많이 확보(確保)하여 처벌의 강도를 낮추어보려는 작전(作戰)이었다. 꺼름직한 표정으로 필자에게 눈만 흘기던 계남이 누나도 엿을 한 입 가득 넣더니 입이 찢어져라 웃음을 흘렸다. 완벽한 공범(共犯)이 된 것이다.
엿 먹을 때의 똘마이들
옹기종기 모여앉아 입 안에서 살살 녹는 ‘박하엿’을 내리 이틀 동안 아귀가 아프도록 씹어 먹었다. 첫날에 반쯤 먹은 뒤 남은 것은 비료포대종이에 다시 둘둘 말아 원성왕릉 기단 위쪽 십이지신상(十二支神像) 위 움푹 파인 구멍에 숨겨놓았다가 이튿날 오후에 다시 모여 먹어치웠다.
‘똘마이’ 중 하나는 남보다 조금이라도 더 먹으려고 씹지도 않고 그냥 삼키기도 했다. 어쨌든 그 이틀 동안의 기분은 날아갈듯 하게 좋았다.
엿
그러나 그 이틀 후에 운명(運命)의 날은 기어이 다가오고 말았다. 해가 뉘엿뉘엿 넘어가는 저녁나절, 계철이 집에는 난리가 나버렸다. 계철이 엄마의 고함소리가 동네가 떠나갈 듯 우렁차게 들려왔다.
‘똘마이’들을 즉시 소집(召集)하여 필자의 아래채 ‘뒤안’에 모여 생울타리 사이로 계철이집 동정(動靜)을 숨을 죽여 가며 지켜봤다.
“바린 말해라. ‘소디베이’ 우쨋노?”
“이 노무 손아! 바린 말 몬할끼가!”
철썩! 철썩!
“아이고 아야! 나너 모린다!”
“죽어도 모린다!”
“와 자꼬 때리노!”
매 맞는 계철이
계철이가 한 대씩 맞을 때 마다 필자는 온 몸이 찌릿찌릿하고 오금이 저렸다. ‘똘마이’들도 안절부절하기는 마찬가지였다. 계철이가 바른 말을 하는 날에는 계철이 엄마보다 각자의 아버지한테 ‘골로 갈’ 것이 눈앞에 훤히 보였기 때문이다. 필자는 몸서리치면서 속으로 이렇게 소리쳤다.
똘마이들
“계철아! 니는 독립군(獨立軍)이고, 니거 엄마는 악독한 일본순사(日本巡査)다. 입을 굳게 다물고 조국(祖國)을 위해 끝까지 뻐띵게라” 속으로 외치고 또 외쳤다.
간곡한 필자의 기도(祈禱) 덕분이었는지 의리의 ‘싸나이’ 계철이는 발가벗긴 채로 악독(惡毒)한 ‘일본순사’한테 흠씬 얻어터지고, ‘거시기’가 번데기가 되어가지고도 끝까지 버텼다.
악독한 그 시절 일본순사들
(1922년 10월 2일, 경주 대덕산에서 농부를 덮친 호랑이가 일본인
순사 '미야자케'가 주민 수백여 명을 동원해서 사살하고 기념 촬영.
가운데가 당시 왜놈 경주경찰서장이고, 그의 오른쪽이 '미아자케')
그때 필자의 눈에 비친 계철이의 모습은 모진 고문(拷問)에도 늠름하게 견디면서 의젓하게 죽음을 맞이하는 독립군(獨立軍)과 같이 보였다. 정말로 멋진 ‘싸나이’ 중에 ‘싸나이’였다.
어쨌든 그날 그 사건은 계철이의 독립군 투사다운 끈기와 인내(忍耐)로 진짜 범인의 색출은 영원히 미궁(迷宮)에 빠진 채 막을 내렸다.
후일 계철이 엄마는 “아매 엿장시가 돌라 가뿐 거 같응기라”라고만 말씀하시고, 재론(再論)하지 않으셨다.
‘소디베이’ 삼결살 구이
어쨌든 당시의 ‘소디베이’는 새것은 새것대로 유용(有用)하게 쓰였고, 깨지고 녹쓴 것은 그것대로 엿이 쏟아지는 화수분(河水盆 ; 재물이 계속 나오는 보물단지, 전영택의 단편 소설)이나 마찬가지였다.
아득히 먼 옛적부터 오랜 세월(歲月) 동안 우리네 부엌과 부뚜막을 묵묵히 지켜오면서 쌀밥도 짓고 보리밥도 짓던 가마솥, 그리고 언제나 반들반들하게 윤기(潤氣)를 흘리던 그 ‘소디베이’는 자신의 소임(所任)을 다한 후 은퇴(隱退)를 한 뒤에도 ‘찌짐이 판’으로 활용(活用)되었다.
‘소디베이’
그리고 그 시절 시골 ‘찌짐이 판’은 거의가 가마솥 뚜껑이었다. 헌 솥뚜껑을 거북이 뒤집어 놓듯 뒤집어 걸어놓고, ‘찌짐(부침개)’을 부치면 더없이 좋은 ‘찌짐이 판’이 되곤 했었다.
두툼한 두께가 있기 때문에 한 번 열을 받았다 하면 쉬 식지도 않았고, 게다가 평수(坪數)도 넓기 때문에 ‘찌짐이 판’으로는 최고일 수밖에 없었다.
인도인들의 솥뚜껑 요리
이 ‘소디베이’ ‘찌짐이 판’은 명절(名節)이나 제사(祭祀), 그리고 잔치가 있을 때마다 화덕 위에 걸려 고소한 기름 냄새를 사립문 밖까지 풍겼고, 이것이 없는 가정에서는 빌려가기도 했기 때문에 당시의 ‘소디베이’는 가끔 이웃집 나들이까지 했었다.
궁핍하고 철없던 시절, 순박한 이웃 동생을 꼬드겨 그의 어머니가 애지중지(愛之重之)하던 ‘소디베이’를 엿으로 바꿔먹은 치기(稚氣)가 후회스럽기도 하지만, 영원히 잊을 수 없는 추억의 한 장(場)이 되고도 있다.
엿치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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배경음악을 고르는데, 장소팔의 ‘북엿장수’, 크라잉넛의 ‘엿장수 맘대로’, ‘품바’, ‘품바타령’등 ‘엿치기’와 관련되는 노래가 많기는 하나, 곡을 게재하기에는 너무 요란한 것이 많아 그 중에서도 조금 덜 요란한 것 한 곡을 게재하여 음미하기로 한다. 오늘은 엿장수들이 즐겨부르는 김혜연의 ‘품바타령’을 음미해 본다.
품바타령
김혜연
에헤~ 씨구 씨구 씨구 씨구 들어간다.
하~ 저절씨구 씨구 들어간다.
작년에 왔던 각설이가
죽지도 않고 또 왔네.
에헤~ 우리 어머니가 날 낳을 적에
미역국이나 퍼 잡수셨는지
미끈 미끈 미끈 미끈 자리한다.
우리 아버지가 날 이뻐할 때
막걸리 사발이나 퍼 잡수셨는지
걸죽 걸죽 걸죽 걸죽 자리한다.
품바하고도 자리한다.
에헤~ 씨구 씨구 씨구 씨구 들어간다.
하~ 저절씨구 씨구 들어간다.
작년에 왔던 각설이가
죽지도 않고 또 왔네.
에헤~ 우리 할머니가 날 기를 적에
냉수 사발이나 퍼 잡수셨는지
시원 시원 시원 시원 자리한다.
우리 할아버지가 날 가르칠 적에
논어 맹자나 읽으셨는지
대문 대문 대문 대문 자리한다.
품바하고도 자리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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지난 1920년대에도 ‘엿장수’와 관련한 창가(唱歌)가 있었다. 가사만 있고 곡이 없어 대신 가사만 게재하니 음미해 주시기 바란다.
윤심덕
자라 메라(育つガメラ)는 1922년 일본 노래 ‘남경정(南京町)’에 새로운 가사를 붙여 부른 유행 창가로, 윤심덕을 비롯해 이후 이정숙 등 여러 가수들이 취입(吹入)할 정도로 꾸준히 불러진 노래다. 윤심덕이 불렀던 ‘자라메라’를 소개한다.
자라메라(育つガメラ)
윤심덕
종로 네거리에 해가 저물어
엿장사 영감님 지나 가누나
가위 소리 딱딱딱딱 엿목판 메고
설렁설렁 다니는 늙은 엿장사
단쇠 단쇠 엿단쇠 단쇠 단쇠 엿단쇠
엿을 삽시오.
은동아 복동아 자아 자 어서 자고
내일 만나자.
약현(藥峴) 산모롱에 해가 저물어
어정어정 돌아가는 늙은 엿장사
딱딱딱딱 딱따가 딱딱 가위 소리 내면서
어정어정 돌아가는 늙은 엿장사
전깃불이 들어왔네 저녁연기 자욱했네
내일 또 보세.
자아 자 어서 자고 자아 자 어서 자고
내일 또 가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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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 시기의 노래가 대부분 그러하듯 작사자(作詞者)가 누군지는 모른다. 아직 근대적(近代的)인 저작권 개념이 없던 때고, 그저 널리 부르는 노래 가사인지라 이름을 거의 남겨놓지 않은 듯하다.
가사에서 말하는 종로 네거리라면 보신각(普信閣)이 있는 종로2가 네거리인 듯한데, 이 네거리에 엿장사가 지나간단다. 그 느낌도 참으로 한가롭다. 하지만 이 모습이야말로 참으로 도시적(都市的)인 모습이다. 당시의 경우 엿은 모두 집에서 고아먹었는데, 그렇게 하지 않고, 그 귀한 돈을 주고 사먹었으니 말이다.
당시의 종로거리 엿장수
당시의 대중가요에는 ‘수박행상’ 등 장사하는 풍경을 담은 노래들이 꽤 있었는데, 수박을 밭에서 따먹지 않고, 돈을 주고 사먹는다니 이것 역시 도시의 전형적(典型的)인 풍경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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우리나라 최초의 여가수인 윤심덕 얘기가 나온 김에 성악가(聲樂家)이자 가수 겸 배우(俳優)였던 그녀의 짧았던 일생과 그녀가 부른 그 유명한 ‘사(死)의 찬미’ 가사를 게재한다.
윤심덕(尹心悳, 1897년 7월 25일 ~ 1926년 8월 4일)은 일제 강점기의 성악가이자 가수 겸 배우이다. 화가 나혜석과 함께 1920년대의 신(新)여성을 대표하는 인물로 한기주(韓琦柱)와 함께 우리나라 최초의 소프라노였다.
평양에서 4남매 가운데 둘째 딸로 태어났고, 태어난 지 얼마 되지 않아 진남포로 이주하여 자랐다. 아버지 윤호병과 어머니 김씨는 모두 독실한 기독교 신자였다.
경제적으로 어려운 생활을 하면서도 자녀들을 학교에 보내 신교육을 받도록 했다. 윤심덕은 숭의여학교를, 언니와 여동생은 이화학당을, 남동생은 연희전문학교를 졸업했다.
윤심덕의 형제들은 모두 음악에 재능이 있었다. 여동생은 피아니스트이고 남동생 윤기성은 바리톤 성악가였다. 1920년 조선기독교청년회연합회에서 주최한 도쿄 음악학교 동창회의 음악회에서 피아노 듀엣곡의 일종인 네 손을 위한 피아노 작품을 연주했던 윤성덕이 언니였다.
윤심덕도 평양의 숭의여학교를 졸업한 후 처음에는 의사와 교사가 되기 위해 평양여자고등보통학교와 경성여자고등보통학교 사범과에 다녔다가, 음악 공부에 뜻을 두었다.
조선총독부 관비 유학생으로 선발되어 도쿄로 건너간 뒤, 아오야마가쿠인을 거쳐 도쿄 음악학교를 졸업했다. 윤심덕은 도쿄 음악 학교 최초의 조선인 학생이었다.
윤심덕은 활달한 성격이라 도쿄의 남자 유학생들과 잘 어울렸다. 키가 크고 목이 긴 서구형 외모에 자신감이 넘치는 성격이었던 것으로 전해진다.
1921년에는 유학생들이 계획한 순회공연에 참여했다가 극작가이며 와세다 대학 학생인 김우진을 만나게 되었다. 김우진은 부인과 자녀가 있는 유부남이었다.
1924년에 도쿄 유학을 마치고 귀국하였고, 한국 최초의 소프라노로서 전성기를 맞았다. 그러나 교사로 임용되지 않아 경제적인 어려움을 겪고 혼담이 깨지는 등 개인적인 문제가 잘 풀리지 않았다.
부호의 첩이 되었다는 스캔들로 도피까지 한 끝에, 김우진의 권유로 토월회에 들어가 배우로 일하게 되었다. 한국 최초의 대중가요로 꼽히는 ‘사(死)의 찬미’를 녹음하여 좋은 반응을 얻기도 했다.
1926년 레코드 취입을 위하여 오사카에 있는 닛토(日東) 레코드 회사에 입사한 윤심덕은 그해 8월 3일에 김우진과 함께 시모노세키에서 부산으로 가는 연락선 도쿠주마루(德壽丸)에 승선했으며, 4일 새벽 4시 쓰시마섬을 지나던 중 자살하였다.
윤심덕이 자살한 관부 연락선 도쿠주마루(德壽丸)
일제치하 당시의 동아일보는 1926년 8월 5일자 사회면에서 윤심덕과 그녀의 약혼자 김우진의 자살을 다음과 같이 보도하였다.
지난 3일 오후 11시에 하관(시모노세키)을 떠나 부산으로 향한 관부연락선 덕수환(배 이름)이 4일 오전 네 시경에 쓰시마섬 옆을 지날 즈음에 양장을 한 여자 한 명과 중년 신사 한 명이 서로 껴안고 갑판으로 돌연히 바다에 몸을 던져 자살을 하였는데,
즉시 배를 멈추고 수색하였으나 그 종적을 찾지 못하였으며, 그 선객 명부에는 남자는 전남 목포시 북교동 김우진이요, 여자는 윤심덕이었으며,
유류품으로는 윤심덕의 돈지갑에 현금 일백사십 원과 장식품이 있었고 김우진의 것으로는 현금 이십 원과 금시계가 들어 있었는데 연락선에서 조선 사람이 정사(情死-연인끼리의 동반 자살)를 한 것은 이번이 처음이더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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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리고 이 실화를 바탕으로 영화 감독 김호선은 영화 《사(死)의 찬미》를 제작했는데, 임성민과 장미희가 주연을 맡았다. 윤심덕의 ‘사(死)의 찬미’를 게재한다.
사의 찬미
노래 : 윤심덕
반주 : 윤성덕
광막한 광야에 달리는 인생아
너의 가는 곳 그 어데이냐
쓸쓸한 세상 험악한 고해에
너는 무엇을 찾으려 하느냐
눈물로 된 이 세상이
나 죽으면 고만 일까
행복 찾는 인생들아
너 찾는 것 허무
웃는 저 꽃과 우는 저 새들이
그 운명이 모두 다 같구나
삶에 열중한 가련한 인생아
너는 칼 우에 춤추는 자도다
눈물로 된 이 세상이
나 죽으면 고만 일까
행복 찾는 인생들아
너 찾는 것 허무
허영에 빠져 날 뛰는 인생아
너 속였음을 네가 아느냐
세상의 것은 너에게 허무니
너 죽은 후는 모두 다 없도다
눈물로 된 이 세상이
나 죽으면 고만 일까
행복 찾는 인생들아
너 찾는 것 허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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향우님 여러분 ! 글이 너무 길어지기는 했지만, 우리나라 최초의 성악가이자 가수 겸 배우이며, 절세의 미녀였던 윤심덕의 자살과 관련하여 잠시 한두 가지 아는 척하고자 한다.
우리는 절세의 미녀 윤심덕이 현해탄에 몸을 던져 자살한 사건과 관련하여 인간의 운명(運命)은 누구나 그가 말하는 대로 결정된다는 사실을 알 수 있다.
그리고 슬픈 노래를 부른 가수들은 대부분 일찍 타계했다는 사실도 다들 짐작하고 있다. 가수의 수명․부(富)․즐거움과 노래 가사와는 밀접한 상관관계가 있다는 것이다.
신나고 즐거운 노래를 부른 가수들은 장수하고, 고통․이별․죽음․슬픔․한탄의 노래를 부른 가수들은 그만큼 단명할 가능성이 높다는 것이다
사례를 들어본다. 앞서 소개한 대로 우리나라 최초의 가수 윤심덕은 ‘사의 찬미’를 불렀다가 현해탄 귀국선에서 그녀의 약혼자 김우진괴 동반자살(이를 정사(情死라고 한다)로 생을 마감했다. 죽음을 찬미했으니 그대로 이루어진 것이다.
1960년대 말, ‘산장의 여인’을 부른 가수 권혜경도 가사 내용처럼 자궁과 위장에 암에 걸렸고, 요양을 하며 재생의 길을 걷게 되었다. 그녀는 산장에 집을 짓고 수도승처럼 쓸쓸히 살아가고 있다.
‘수덕사의 여승’을 부른 가수 송춘희는 결혼을 하지 않은 채 불교 포교사로 일하고 있다. 이난영은 ‘목포의 눈물’을 부르고 슬픈 인생을 살다가 가슴앓이 병으로 49세에 숨졌다.
가수 양미란은 ‘흑점’이란 노래를 남기고 골수암으로 숨졌다. 가수 박경애는 향년 50세에 폐암으로 사망했다. 그녀가 부른 노래 ‘곡예사의 첫사랑’의 가사에 죽음을 암시하는 내용이 있다.
“울어 봐도 소용없고 후회해도 소용없다” ‘머무는 곳 그 어딜 지 몰라도’를 부른 국제 가요제 전문 가수 박경희도 그 노래가사의 내용처럼 향년 53세에 패혈증과 신장질환으로 별세했다. 그리고 가수 장덕은 ‘예정된 시간을 위하여’를 부르고 사망했다.
남인수는 ‘눈감아 드리리’를 마지막으로 세상을 떠났다. 그는 41세의 한창의 나이에 ‘눈감아 드리리’의 노랫말처럼 일찍 눈을 감고 말았다.
‘0시의 이별’을 부른 가수 배호는 어느 날 0시에 세상을 떠났다. ‘돌아가는 삼각지’를 부른 그는 젊은 날에 영영 돌아오지 못할 길로 가버렸다. ‘마지막 잎새’를 부르면서 세상을 떠난 것이다.
‘낙엽 따라 가버린 사랑’을 불렀던 가수 차중락은 29세의 젊은 나이에 낙엽처럼 떨어져 저 세상에 가버렸다.
“간다간다 나는 간다 너를 두고 나는 간다.” ‘이름 모를 소녀’를 열창하던 선망의 젊은 가수 김정호는 20대 중반에 암으로 요절, 노래 가사처럼 진짜로 가 버렸다.
‘이별의 종착역’ ‘떠나가 버렸네’ ‘내 사랑 내 곁에’를 불렸던 가수 김현식도 역시 우리 주위를 영영 떠나가 버렸다.
‘우울한 편지’를 부른 가수 유재하는 교통사고로 사망했고, 하수영은 ‘아내에게 바치는 노래’를 부르고 세상을 떠났다. 가수 김광석은 ‘서른 즈음에’를 부르고 나서 바로 그 즈음에 세상을 떠났다.
‘이별’을 불렀던 대형 가수 패티김은 작가 길옥윤과 이별했으며, 가수 김상희는 ‘멀리 있어도’를 부르면서 남편이 미국으로 유학을 가게 되어 몇 년간 떨어져 있게 되었다고 한다.
가수 조미미는 35세까지 결혼이 이루어지지 않았는데, ‘바다가 육지라면’이 히트되면서 재일교포가 바다를 건너와 결혼이 성사되었다는 것은 누구나 다 아는 사실이다.
오랫동안 노처녀로 지내다가 ‘만남’을 부른 노사연은 행복한 결혼을 하게 되었다. ‘세상은 요지경’이라는 노래를 불렀던 신신애는 사기를 당해 모든 것을 잃었다. 노랫말 그대로, “여기도 짜가 저기도 짜가, 짜가가 판을 친다.”였던 것이다.
‘쨍하고 해 뜰 날 돌아온단다.’를 불렸던 가수 송대관은 한동안 주춤했다가 어느 날 다시 가수로 복귀하여 인기를 점점 얻더니, 지금은 노랫말대로 진짜 쨍하고 해 뜨는 날이 오게 되었다. 송대관은 또 그의 첫 히트곡이 ‘세월이 약이겠지요’였는데, 노래 제목처럼 진짜로 세월이 약이 된 것이다.
가수가 노래 한 곡을 취입하기 위해 같은 노래를 보통 2,000~ 3,000번이나 부른다고 한다. 이렇게 하다보면 가사의 내용과 똑같은 일이 생겨날 수밖에 없다고 한다.
가수가 처음 노래를 연습할 때 작곡가는 좀 더 감정을 넣으라고 강요한다. 그리고 그렇게 감정을 있는 대로 넣어 부른 노래들은 자기 자신이 그 노래의 주인공이 될 수밖에 없다.
감정을 제대로 넣어 부른 노래가 힛트하는 것은 당연하고, 그 힛트 한 노래는 수백, 수천 번을 불러야 한다. 그러다 보니 자기도 모르게 가사 내용이 잠재의식에 덜컥 연결된다.
그리고 가사의 내용이 진실이라고 믿어버린 잠재의식은 나중에 현실의 세계에다 그 내용을 정확히 투영한다.
회원님들도 잘 아시는 바와 같이 지난 시절에 불렸던 노래 가운데 ‘팔도강산’이라는 노래가 있었다. 노래 가사에 “잘살고 못사는 것 마음먹기에 달렸더라.”는 소절이 있어서 가난했던 시절 사람들에게 큰 용기를 주는 노래였다.
이 노래 가사 대로 우리 국민은 마음먹고 노력한 결과 오늘의 경제부국을 이루게 된 것이다.
가수 100명을 대상으로 히트곡이 운명에 어떤 영향을 미쳤는가를 조사해보니 놀랍게도 91명의 가수가 자신의 히트곡 가사내용이 운명을 만들었고, 요절한 가수들은 너나없이 죽음과 연관된 노래를 불렀다는 사실을 발견했다.
노래는 말에다 곡조를 실은 것이어서 말보다 더 큰 영향력을 발휘하는 것이다. 그래서 선견인들은 "밝고 힘찬 노래만 불러라. 그 것이 성공행진곡"이라고 말한다.
그리고 그들은 "슬픈 노래를 부르지 말라. 그 노래는 복 나가는 노래다. 밝고 신나는 노래를 불러라. 노래대로 운명이 만들어진다"고 한다. 한국노랫말연구회에서는 ‘슬픈 노래를 부른 가수들은 일찍 죽거나, 슬픈 운명의 길을 걷는다.’라는 사실을 발표했다.
‘엿치기’ 얘기를 하다가 별별 얘기를 다하게 되었다. 필자는 언제나 굵고, 길고, 큰 것을 좋아하기 때문이라는 점을 감안하여 깊으신 이해가 있기를 부탁드린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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아래 박스 안의 얘기는 위에서 소개한 필자의 어린 시절 얘기와 유사한 내용이니 시간이 여의치 않은 회원님들은 여기에서 그냥 접으시기 바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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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 시절 고향마을에서 ‘소디베이로 엿 바꿔먹기’를 한 얘기는 필자의 경우만이 아니었다. 필자의 이웃에는 ‘상락이’라는 엄청 번지럽은 또래가 하나 있었는데, 이 꾸러기는 필자의 경우처럼 남의 ‘소디베이’나, 헌 ‘소디베이’가 아니라 자기 집 새 ‘소디베이’로 ‘엿치기’를 한 기록을 갖고 있다.
필자가 5학년이던 해였다. 물론 꾸러기 친구 ‘상락이’도 5학년 같은 반이었다. 이 꾸러기는 약 50년 전에 헤어졌는데, 지금은 청주시(淸州市) 어디에 살고 있다는 소문만 듣고 있다.
얘기를 시작한다. 모든 것이 귀하던 어린 시절, 먹을 것이라곤 누룽지 조각이나, 옥수수 삶은 것, 감자나 고구마가 전부였던 그때, 혹 어쩌다가 주워다 놓은 공병 하나, 떨어진 흰 고무신 한 켤레, 철조망 가닥들을 모아 뒀다가 ‘쨍가랑’거리는 엿장수 가위소리가 들려오면 부리나케 달려 나가 엿이나 돈으로 바꾸곤 했었다.
먹고 사는 형편이 그런대로 괜찮았던 ‘상락이’네는 위로 누나가 하나, 아래로 누이가 둘이나 되지만, 사내아이는 ‘상락이’ 혼자로 이른바 ‘외동아들’이라 온가족의 귀여움을 독차지하고 있었다.
그래서인지 ‘상락이’는 매사에 게으름을 피웠고, 항상 학업성적이 하위권에 맴돌았다. 그날도 ‘상락이’는 한숨 늘어지게 자다가 엿장수 가위질 소리에 후다닥 일어나 집안 구석구석을 뒤지며 엿과 바꿀만한 걸 찾느라 부산을 떤다.
그러나 아무리 찾아봐도 쇠붙이 조각이나 공병 따위가 있을 리가 없다. 그동안 모아 뒀던 것은 저번 주에 벌써 엿이랑 바꿔 먹었기 때문이다.
마음이 급해진 ‘상락이’는 엿장수가 멀리 가버리지나 않을까 하는 급한 마음에 발을 구르고 있는데, 뒤란 아궁이 위에 얼마동안 사용하지 않던 솥이 눈에 띈다.
‘상락이’는 반짝이는 윤기는 없었지만 멀쩡한 ‘소디베이(솥뚜껑)’를 들었다 놓았다 하면서 망설인다.
어머니의 화난 얼굴이 떠올라 아쉬움을 억누르고 간신히 체념하느라 힘이 든다. ‘아무리 엿이 먹고 싶어도 멀쩡한 솥뚜껑으로 엿을 바꿔 먹을 수야 없지’하면서 방으로 들어와 책을 펴 들었으나 당최 눈에 들어오질 않는다.
그렇다고 멀쩡한 고무신을 엿으로 바꿔 먹다간 어머니한테 혼찌검이 날 것을 생각하니 그럴 수도 없었다. 그런데 그날따라 엿장수 가위질 소리가 너무 크게 들린다.
오랜 시간이 지났건만 엿장수 가위질 소리가 멈추질 않고 더 크게 들려온다. 이제는 더 이상 참을 수가 없다.
방에서 튀어나온 ‘상락이’는 부리나케 뒤란으로 돌아가서 추호의 망설임도 없이 멀쩡한 ‘소디베이’를 집어 들고 뛰어간다.
엿장수 아저씨는 ‘소디베이’와 ‘상락이’를 한참 번갈아 쳐다보더니 기다란 막대 엿을 무려 다섯 개나 안겨 준다. 그런데 입이 째지는 환희와 함께 화난 어머니의 모습이 너무나 크게 떠오른다.
그대로 집으로 돌아갈 수가 없었다. 게으르기는 했지만, 잔꾀가 많았던 ‘상락이’는 여기에서 제 딴엔 기발한 아이디어를 생각해 냈다.
양손에 엿가락을 움켜쥐고 돌아서던 ‘상락이’가 “아제요, 지하고 엿치기 한 분 할랑기요?”라면서 되돌아 선다.
그러자 엿장수 아저씨가 “머라꼬 니가 내캉 엿치기 하자꼬?”라면서 어의없다는 표정을 짓는다. 그러자 당돌한 ‘상락이’는 “야, 한분 하입시더 !”라면서 한 발 더 다가선다.
엿장수 아저씨는 ‘요런 맹랑한 놈을 보았나’하는 표정으로 피식피식 웃다가 담배를 한데 물더니만, 초등학교 5학년이란 놈이 감히 엿장수한테 엿치기를 도전하다니 하는 표정이다.
그러면서 아저씨는 “그라머 니 그 엿 모다 그 자리에 나라”면서 ‘소디베이 거래’를 무효화했다.
‘상락이’는 기다란 막대 엿 다섯 개를 제자리에 가지런히 놓고 손을 쓱쓱 비볐다. 그리곤 손바닥에 엿목판 바닥에 깔린 밀가루를 약간 묻히고, 내기는 삼판양승(승부를 겨룰 때, 세 판 중에서 두 판을 먼저 이기는 쪽이 승리함)으로 하기로 정했다.
‘상락이’가 먼저 한다며 작은 막대 엿 하나를 눈 딱 감고 집어 들었다. 엿치기는 작은 막대 엿을 가운데 부러트려서 엿가락 가운데 난 공기 구멍크기가 큰사람이 이기는 일종의 내기였다.
‘상락이’는 시합 전에 엿장수 아저씨에게 먼저 다짐을 받는다. “아제요, 지가 이기머 이거 엿 다섯 개 하고, 이 ‘소디베이’ 지한테 다부 조야합니데”
“그래 이눔아야 이기기나 해바라 !”
그 사이 동네 친구 놈들이 하나둘씩 몰려들었고, 동네에서 무허가 이발소를 하시는 ‘재철이’ 아부지도 옆에서 가만히 아이들의 대화를 듣고 있다.
손목에 힘을 한껏 주어서 뚝하고 부러트리며 ‘훅’하고 바람을 불었다. 그런데 커다란 구멍을 기대하던 바와는 달리 깨알 크기만 한 구멍 두개랑 쬐끄만 구멍 몇 개뿐이었다.
옆에서 구경하던 친구 놈들이 실망의 탄성으로 “아이고 !”하며 합창을 한다.
다음엔 엿장수 아저씨 차례, 한두 번 작은 막대 엿을 둘둘 돌리더니 선이 굵고 골이 깊은 엿을 하나 집어 들더니만 뚝! 하고 부러트리곤 ‘훅’하고 바람을 불었다.
윽 ! ‘상락이’ 엿구멍의 세 배는 족히 되어 보였다. ‘상락이’가 일패를 당한 것이다. 이번에는 다시 ‘상락이’ 차례다.
‘상락이’도 아저씨처럼 엿을 둘둘 돌리다가 아까 찬찬히 보아온 골이 깊은 엿가락을 찾아 큰 호흡 한번 한 후에 ‘뚝’하고 동강을 내며, 입으로 바람을 침까지 튀겨가며 ‘훅’ 불어넣었다.
우와 ! 엿장수 아저씨 것보다 훨씬 큰 구멍이 두 개나 뻥 뚫려 있다. 당연히 둘째 판은 ‘상락이’의 승리였고, 아연 긴장하시는 아저씨의 얼굴엔 비장함이 엿보이기도 했다.
“이넘아야, 이분에너 내가 먼저 할란다 !”
“그라소 !”
마지막 남은 한판 ! ‘소디베이’를 찾고, 막대 엿 큰놈 다섯 개를 쟁취하느냐, 아니면 엿도 못 먹고, 어머니에게 ‘직싸게’ 터지느냐 ! 이 한판에 달려 있었다.
주위에 모인 친구들도 싱글거리며 한껏 응원을 해주고 있어 ‘상락이’는 어깨에 힘이 팍팍 들어간다.
‘상락이’가 이기면 제 놈들에게 돌아갈 엿가락의 잿밥에 관심이 있는지 시키지도 않은 응원을 연거푸 보내준다.
몇 번을 둘둘 둥근 엿가락을 돌리는데 ‘상락이’가 “아제요, 고만 돌리소, 때 묻심더” 했더니 ‘상락이’를 째려보던 엿장수 아저씨가 엿 하나를 골라 집어 들더니만 ‘뚝’하고 부러트리더니 혼신의 함을 다해 바람을 불어넣는다.
그런데 이럴 수가 ! 깨알만한 구멍 두 개뿐이다. 엿장수 아저씨의 얼굴이 비통하게 일그러진다. 다시 ‘상락이’ 차례다.
‘상락이’는 ‘그 정도쯤이야’라고 자신하며, 아무 엿가락이나 하나 골라 뚝하고 부러트려 놓았는데, 문제가 생겼다. 엿장수 아저씨 구멍이나, ‘상락이’가 고른 엿 구멍이나 그 놈이 그 놈이었다.
엿장수 아저씨 왈 ! “내가 이겠제?”
“무신 소리 하능교, 내 구녕이 이래 큰데 !”
“이노무 자석아 내 구녕이 니꺼 보담 크다 아이가 !”
“무슨 소리 자꼬 하능교, 내끼 더 큰데요 !”
한참을 엿가락 하나씩 부여잡고 옥신각신 하고 있는데, 그때까지 옆에서 가만히 보고 있던 ‘재철이’ 아부지가 “구녕 크기너 비수무리한데, 야 구녕이 한 개 더 있시이 야가 이겠구마는 머 !”
솔로몬의 선택이었다. ‘상락이’ 엿에 깨알만한 구멍 두 개 옆에 보일락 말락한 구멍이 한 개 더 나 있었다. 동내 친구 놈들이 “맞네, 맞구마너”하고 한마디씩 거들고 보니 엿장수 아저씨는 할 말이 없는 모양이다.
한참을 ‘상락이’를 째려보더니 오기가 생겨났는지 무효로 하고 한판 더 하잔다. ‘상락이’는 못하겠다고 버티고, 한참을 옥신각신 하다 보니 그 아저씨는 쪽이 애들 앞에서 쪽 팔려서였는지 슬그머니 입을 닫아버린다.
그리고 옆에서 시끄럽게 응원하는 꼬마들이나, ‘재철이’ 아부지의 인상이 험해서였는지 모르지만, 순순히 지게 엿판 밑에 깔린 ‘소디베이’를 ‘상락이’에게 내어 주면서 아무 말 없이 막대 엿 다섯 개와 ‘엿치기’ 하다가 부러트린 엿까지 다 내주신다.
‘상락이’도 쪼메 미안 했는지 기다란 막대 엿 두 개는 다시 아저씨에게 돌려드렸다. 부러트린 엿은 친구 놈들에게 돌리고, 막대 엿 긴놈 하나는 ‘상락이’ 편이 되어준 ‘재철이’ 아부지께 드렸다.
그리고 보무도 당당하게 엿장수와 ‘엿치기’ 해서 이겼다는 대단한 자부심을 가슴에 안고, 솥뚜껑과 함께 기다란 엿가락을 들고 집으로 향했다.
그런데 승리의 희열도 잠시, 골목 어귀에 돌아서자 마침 시장에서 커다란 수박 한통과 고등어 한 손을 들고 오시던 어머니와 딱 마주 쳤다. 순간, ‘상락이’는 찔끔하면서 솥뚜껑을 놓쳐 버렸다.
솥뚜껑에 엿가락이라, 희한한 ‘상락이’의 꼴을 가만히 보시던 어머니는 아무 말 없이 대청마루에 시장바구니를 내려놓으시더니 ‘상락이’의 엿가락 든 팔을 꽉 잡으시고, 먼저 엿을 빼앗더니만 부지깽이를 한손에 들고 솥뚜껑을 내려놓으라고 하신다.
“니 ‘소디베이’ 들고 나가가 머 했노?”
‘상락이’는 한참을 머뭇거리다가 멍하니 어머니 얼굴만 쳐다보다 상황을 피할 수 없음을 알아차리고, 지금까지 있었던 일을 소상히 이실직고(以實直告)하였다.
“이누무 자석, 니가 커서 머가 될라꼬 시방부텀 이 지경이고 !” 하시면서 부지깽이가 허공을 가르는 순간, ‘상락이’는 잡힌 팔을 비틀어 뿌리치고 냅다 도망을 쳐버렸다.
도망을 치다가 보니 고무신이 미끄러져 맨발이 되었고, 달디 단 엿은커녕 하루 종일 쫄쫄 굶다가 어머니가 주무실 때까지 밖에서 기다렸다가 몰래 살금살금 들어가 발 씻고 사랑방에 기어들어갔다.
사랑방에 잠자리를 펴고 계시던 ‘상락이’ 아부지가 싱글싱글 웃으시며 조용히 나가시더니 공기밥 한 그릇에 물김치, 나박김치에 고등어 한 토막까지 커다란 쟁반에 받쳐 오시더니 “밥은 묵고 도망 댕게야지, 이눔아 !” 하시며, “빨리 묵고 자거라” 하신다.
‘상락이’는 말없이 용서해주시는 아버지가 너무 고마워 뜨거운 눈물을 쏟아내며, 찔끔거리고 울었다. 그리고 밤새도록 ‘엿치기’하는 꿈을 꾸었다.
며칠 후 ‘상락이’는 또다시 엿장수 가위질 소리에 후다닥 뛰어 나갔다. 아저씨가 싱글싱글 웃는 ‘상락이’를 보더니만 보기 싫다고 저리 가라고 손사래질을 하신다.
눈앞에 기다란 막대 엿 맛에 미련을 떨쳐 버리진 못하겠고, 방법은 없고 해서 가만히 엿판만 뚫어져라 바라보고 서있는데, 앞서 온 ‘계철이’ 놈이 ‘상락이’를 향해 곁눈질을 실실 한다.
그러더니‘계철이’는 어디에서 그런 용기가 났는지, 엿가락을 돈으로 사는 척 하더니 자기 앞에 있는 엿가락을 한 움큼 집더니만 냅다 도망을 치기 시작했고, 엿장수 아저씨는 놀라서 계철이 놈을 뒤따라 달려간다.
‘상락이’ 놈도 이때다 싶어 엿판을 통째로 들고 반대 방향으로 뛰었다. 이 모양을 본 아저씨가 이번에는 ‘계철이’ 놈 따라 가는걸 포기하고, 엿판 째 집어 들고 도망가는 ‘상락이’를 따라 달리기 시작한다.
그러자 ‘상락이’는 엿판을 길가에 내려놓고 빈손으로 도망을 쳤다. 아저씨는 ‘상락이’ 붙잡으려는 걸 포기하고, 그나마 온전한 엿판에 안도하고 되돌아가시며 욕을, 욕을 해댄다.
‘상락이’는 미리 도망간 ‘계철이’ 놈을 만나 훔친 엿가락을 나누어 맛있게 먹었다.
그날 저녁에 ‘상락이’는 엿 값 물어준 어머니한테 거의 ‘초주금(초주검)’이 되다시피 부지깽이 타작을 당했다. ‘상락이’는 다시는 그러지 않겠노라 눈물 콧물 범벅이 되서 싹싹 빌고 또 빌었다.
이제는 영원히 다시 보지 못할 그 시절의 엿장수와 ‘소디베이’와 엿치기, 언젠가 고향(故鄕)에 다시 돌아가면, 부엌에 가마솥 걸고 채전(菜田) 밭모퉁이에 ‘소디베이’ 걸어 ‘파전’도 부치고, ‘호박전’도 부쳐 사립문밖 오가는 이 붙잡아 함께 먹어보고자 한다.
그리고 그 시절 그 꾸러기들이 고향마을에 찾아오면, 입실장이나, 불국장에 끌고 가서 엿치기 한번 신명나게 해보고 싶다.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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첫댓글 소디베이 이야기 재미 있습니다.
엿치기 - 그렇지요!
가늘고 옆 줄이 많은 엿이 구멍이 크지요.
많이 잡아 늘린 엿이니까요!!!!
참 재밌네요...한동안 잊어 먹었던 말들이 순식간에 익숙해 지기도 하네요...마때치기, 뿌꿈놀이..ㅎㅎ 당수나무...똘마이....소디베이...끝이 없네요...소디베이 운전수란 말도 했잖아요..ㅎㅎ 엿치기 마이 했지요...우리동네에는 엿집이 있어서 저녁에 화투치기해서 엿 사먹기도 했습니다. 엿장수가 동네 나타나면 뭣을 가지고 가든 엿 한가닥 먹으려고 집안 구석구석을 다 뒤지기고 했지요..ㅎㅎ 그래도 소디베이를 갖다 줄 생각은 못했는데...요오 형님은 굵게 놀으셨네요..역시 큰 인물 되실분은 어릴적에도 크게 놀았네요..ㅎㅎ 정말 너무 너무 재미있고...한줄 한줄을 볼때마다 미소가 저절로 나오네요..
각설이 타령..어지간히 부르네요...ㅎㅎ .뭣이 그리 들어간다고 하는지 몰라도....빈깡통 들고....부잣집 대문을 들어서면서 .ㅎㅎ.뭣을 그리 큰소리 치는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