중국 하문시,무이산 여행기 |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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중국 하문시.무이산 여행기 (2002년 12월 11일~12월 15일.4박5일) 2002년12월11일. 중국 여행을 위한 첫날 인천공항으로 출발하기 위하여 출발지인 종합경기장 앞에 한사람씩 모이기 시작했다. 축하라도 하듯이 간밤에 하얀 눈이 내려 예정보다 1시간 늧은 10시경 출발하여 익산에서 일명 꾀꼬리외3명이 합승한 후 모두 21명이 인천공항을 향해 출발하였다. 일본인은 해외여행을 하기위하여 1년을 준비 한다고 하는데 우리는 여행지에 대하여 얼마나 알고 출발 하는 것일까? 많은 여행 중 금번 중국 여행을 위하여 바쁜 연말에 틈틈이 시간을 내어 나름대로 많은 준비를 하긴 했지만 왠지 부족함이 느껴진다. 고속도로에 들어서자 김영두 위원장이 그간 준비한 내용들을 사전 설명을 부탁해왔다. 사실 위원장인 친구가 인솔하는 전국 각 지역별 모니터들의 여행임으로 우리전북지역참가자들이 어느 지역보다 더 많이 알고, 중국여행지에서 우리지역 참가자들만의 특별이벤트도 준비하여 보람 있고 추억에 길이 남을 그 무엇을 준비하는데 온힘을 기울였다. 먼저, 여행지인 복건성과 하문시 그리고 무이산에 대하여 난생처음 뻐스속 에서의 강의를 시작했다. 모두 즐거운 마음으로 미지의 땅으로 여행하는 각종 관련 자료와 설명을 들으시고 전직교장선생님 께서 어느 여행사 가이드냐고 물으신다. 준비한 자료와 설명에 놀라신다. 이어서 그간 애써 준비한 우리의 동요 샤오바이촨(반달)과 중국민요 모리화를 우리말과 중국어로 모두 한구절 한구절 익혀나갔다. 중국어 학원원장을 만나 중국어를 한글로 표기를 부탁하였고 중국어를 곡에 맞추어 기록하고 최종 용담호수가에 가서 집사람과 함께 여러 차례 연습을 해왔던 이벤트였다. 모든 분들이 즐겁게 그리고 흥미롭게 따라 불으며 인천을 향했다. 많은 양국의 민요이면서도 중국 교과서에 실려 애창곡으로 불리는 이 노래를 찾아 준비하는데 무려 열흘정도가 걸렸다. 오후3시경 인천공항에 도착하였고 전국참가자 인원점검과 단체비자를 화인하고 모든 절차를 끝내고 19시30분경 하문항공 특별기편으로 어둠속에 인천공항을 이륙하였다. 3시간 후 비 내리는 하문공항에 도착하였으며 곧바로 무이산시로 향하는 비행기를 타고 45분 만에 무이산공항에 도착하였으며 밤하늘에 긴비행을 마쳤다. 현지시간은 1시간이 늦었으며 12시30분에 도착과 함께 무이산 운안호텔에 도착한시간은 새벽1시였다. 무이산 관광단지내에 있는 호텔은 긴 여행에 피로를 풀어주지 못하는 우리나라 장급여관 수준이었으며 난방시설이 없어 무이산에서의 첫밤은 추위 속에 떨며 깊은 잠을 이루지 못했다. 2002년 12월 12일(둘째날) 아침 일찍 미지의 중국 남부의 무이산근처 관광단지 숙소를 25인승버스 6대에 분승하고 안개가 자욱한 무이산속을 향하였다. 무이산(武夷山)은 복건성(福建省)에 위치하여, 중국 동남쪽에서 경치가 으뜸이라 꼽혀온 명산이다. "동주에서 공자가 나왔고 남송에는 주자가 있으니, 중국의 옛 문화는 태산과 무이로다"(東周出孔丘 南宋有朱熹 中國古文化 泰山與武夷)란 말로 무이산을 찬양한다. 주나라의 공자가 태산에서 유학을 창시하였듯이, 남송때 주자는 무이산에서 신유학인 주자학을 성립하였다는 말이다. 무이산으로 가는 나는 흥분을 감출 수 없었다. 안개속에서도 무이산은 웅장한 자태를 서서히 드러내고 있었다. 처음도착한곳은 9곡을 뗏목을 타고 유람하는 선착장에 도착하였다. 일행 중 전직 교장선생님(신진탁)께서 朱子의 무이산 구곡가의 서시를 친히 반절지에 써 오셔서 설명 하신다. 무이산상유선령(武夷山上有仙靈) 무이산 꼭대기엔 선령함이 있는데 산하한류곡곡청(山下寒流曲曲淸) 산아래 차게 흐른 물 굽이굽이 맑구나. 욕식개중기절처(慾識箇中기절처) 그 중에 빼어난 곳을 알고 싶은데 도가한청양삼성(悼歌閑聽兩三聲) 뱃노래 두어 곡이 한가롭게 들리네. 이러한 시를 외우지 못하면 무이산도 무위(無爲)로 돌아간다고 하셨다. 곡수화류어영유(曲水花流漁影遊) 곡수화류에 고기 그림자 놀고 있고 사방문객초전유(四邦文客草田留 ) 네 나라의 문객은 풀밭에 모여 있네. 장주서예일당전( 州書藝一堂展 ) 장주에서 글씨를 한 방에 펼쳤으니 낙일서산홍염부(落日西山紅染浮 ) 서산에 기우는 해도 불그레 떠있네 라는 시한수도 생각이 난다. 무이구곡 무이구곡 유람은 상류인 구곡에서 시작하여 물길을 따라 내려가서 일곡에 이른다. 뗏목은 굵은 대나무 7-8을 엮은 것을 두개씩 잇대어 만들었는데6인승 뗏목이다. 뗏목의 앞뒤에 뱃사공이 있어 삿대를 저어간다. 휘어 오른 앞쪽엔 차량번호와 같은 번호판을 붙여놓았다. 山無水不秀 水無山不淸 산은 물이 없으면 수려하지 않고, 물은 산이 없으면 맑지 못하다. 曲曲山回轉 峯峯水抱流 골짜기 골짜기마다 산이 돌아가고, 봉우리 봉우리마다 물이 감아 돈다. 구 곡 (九 曲) "구곡에 다다르니 눈앞이 활연히 트이는데 상마(桑麻)에 맺힌 이슬, 평천(平川)을 바라보네. 뱃사공은 다시금 무릉 도원가는 길을 찾지만 이곳이 바로 인간 세계의 별천지라네" (주자, 무이구곡가 중 구곡 ) 구곡에는 백운암이 있다. 남송때 학자인 여조겸(呂祖謙)이 머물며 학문을 닦던 곳이다. 백운암옆에는 극락국(極樂國)이란 바위굴이 있다. 극락은 불교의 이상세계로서, 극락국에서 거주하면 마음을 정화하여 인간의 번뇌에서 해탈할 수 있다고 한다. 극락국은 암벽 중간에 걸려있어 "무릎으로 기고 뱀같이 업드려서"(膝行蛇伏) 가야 한다고 한다. 팔 곡 (八 曲) "팔곡에 바람 불어 구름이 개려 하는데 고루암(鼓樓巖) 아래에는 물이 돌아드네 이곳에 좋은 경치가 없다고 말하지 말게 여기부터 속인은 올라갈 수 없다네" (주자, 무이구곡가 중 팔곡 ) 팔곡은 산이 높아 물살이 빠르고, 각종 동물 모양의 바위가 많다. 고루암 아래에는 사자모양을 한 바위도 있고, 거북 모양을 바위도 있다. 그런 팔곡의 정경을 사람들은 별 것이 아니라고 하지만 어느덧 신선이 사는 곳이 가까왔음을 말하고 있다. 팔곡의 북쪽에는 3개의 커다란 바위가 품(品)자 모양의 봉우리를 이루고 있다. 품자암은 삼교봉(三敎峯)이라고도 하는데, 유교(儒敎) 불교(佛敎) 도교(道敎)의 삼교를 가리킨다. 품자암(品字巖)이란 이름에서 보듯이, 무이산에는 유 불 도의 삼교가 모두 들어있다. 유가로 말하면 주자의 무이정사요, 불가로 말하면 극락국이요, 도가로 말하면 도원동이다. 쌍유봉(雙乳峯)은 팔곡에서 가장 높은 봉우리로 팔곡의 북쪽에 있다. 바위의 풍만한 모습이 어머니의 젖가슴과 같다고 하여 쌍유봉이라 한다. 연꽃 봉우리가 나란히 있는 모습이라고 하여 병연봉(幷蓮峯)이라고도 한다. 팔곡에는 사자, 낙타, 코끼리, 거북이 모양의 바위가 많아 물위의 동물원이라고 부른다. 칠 곡 (七 曲) "칠곡에 배를 몰아 푸른 여울에 올라서 은병봉과 선장암을 다시금 돌아보네 사람들은 이곳에 좋은 경치가 없다지만 텅빈 하늘에는 석당(石堂)이 해맑게 솟아있네"( 주자, 무이구곡가 중 칠곡 ) 칠곡에는 달공탄(獺控灘)이란 여울이 있다. 달공탄에서 아래쪽을 보면 육곡에 은병봉과 선장암(쇄포암)이 보이고 석당이라는 커다란 바위가 솟아있다. 배가 칠곡으로 올라감에 은병병과 선장암이 돌아보는 듯하고 석당이 하늘 높이 솟은 모습을 그린 것이다. 다른 본에는 칠곡가의 뒷귀절을 "지난 밤 봉우리에 비가 내리더니, 나는 듯한 물줄기가 몇 줄기런가"라 되어 있다. 칠곡에 들어서면 멀리 삼앙봉(三仰峯)이 보인다. 무이산에서 가장 높은 봉우리이다. 커다란 세개의 봉우리가 층층이 일어나 하늘을 향해 머리를 내고 있다고 해서 붙은 이름이다. 그렇지만 산이 높고 길이 험해 아직 계단이 없어 여기에 오르는 사람은 별로 없다고 한다. 높은 산이 물가에 솟아 절벽을 이룬 금계동(金鷄洞)을 지나 방생담(放生潭)의 물이 돌아가는 곳에 도교에서 말하는 이상세계인 도원동(桃源洞)으로 들어가는 산문이 있다. 도원동문을 들어서면 뽕나무와 연못이 있고 복사꽃이 만발한 이상세계가 그곳에 있다. 그래서 이곳은 인간세계 바깥의 무릉 도원(世外桃源)이라 한다. 桃花流水杳然去(도화유수묘연거) 복숭아꽃은 아득히 물에 흘러가는데 別有天地非人間(별유천지비인간) 별천지가 있으니 인간 세계가 아니로다. 육 곡 (六 曲) "육곡의 시퍼런 병풍바위는 푸르른 물굽이를 휘감아 돌고 종일토록 이끼는 사립문을 덮고 있네. 나그네가 노에 몸을 기대니 바위에서 꽃이 떨어지는데 원숭이와 새가 놀라지 않고 봄빛은 완연하네." (주자, 무이구곡가 중 육곡 ) 무이구곡은 육곡에 이르러 북쪽에 우뚝 솟은 쇄포암을 바라보며 휘감아 돈다. 쇄포암에는 수천수만의 물줄기 자국으로 쭉쭉 내리뻗은 모습이 장관을 이룬다. 쇄포암 아래는 산을 등지고 계곡을 앞에 둔(面溪背山) 그윽한 곳이어서, 주자는 이곳에서 저절로 바위꽃이 떨어지고 원숭이와 새가 놀라지 않는 자연의 극치를 노래하였다. 육곡에 들어서면 계곡 양쪽에 높은 절벽이 막아, 여기에서 소리를 지르면 양쪽 절벽에 메아리가 부딪치며 멀리 퍼져나간다. 그래서 이름하여 향성암(響聲巖)이다. 향성암의 절벽에는 송(宋) 원(元) 명(明)대의 마애석각(磨崖石刻) 20여개가 있다. 그 중에는 주자가 새긴 "서자여사"(逝者如斯)란 글도 있다. 육곡에서 크게 물굽이를 치는 곳에 무이산 제일의 바위산이 있으니 쇄포암(日+暴布巖)이다. 천유봉 아래로 도끼로 깍은듯한 수십 길의 바위가 절벽을 이루었는데, 수직으로 내리뻗은 절벽에는 수천수만의 폭포가 흐른 자국이 있어 마치 기다란 흰색 천을 걸어 햇볕에 말리는 듯한 모습을 하고 있다. 그 웅장한 모습이 신선의 손바닥 같다고 하여 선장암(仙掌巖)이라고도 하였다. 암벽 아래에는 "벽립천인(壁立萬人+刃)"이란 석각이 있는데 "만길 절벽"이란 말을 실감케 한다. 오 곡 (五 曲) "오곡은 산이 높고 구름이 깊어 언제나 구름비에 평림(平林)은 어둑하네 숲사이의 나그네를 알아보는 이 없고 뱃사공의 노래 소리에 만고의 수심이 깊어지네" (주자, 무이구곡가 중 오곡 ) 오곡은 무이구곡의 중심이다. 계곡 북쪽에는 은병봉(隱屛峰)이 우뚝 솟아있고 그 아래에는 주자가 세운 무이정사가 있다. 이 시의 높은 산은 은병봉을 가리키고, 평림(平林)은 무이정사로 들어가는 초입의 지명이다. 산은 높고 구름이 깊어 연우가 항상 평림의 입구에 가득한데, 나그네 즉 주자가 수풀속을 거닐 때 들려오는 뱃사공의 노래 소리에 만고의 수심이 깊어지는 감정을 노래했다. 이 노래 중에서 "뱃사공의 노래 소리에 만고의 수심이 깊어지네"의 "애(矣+欠)乃聲中萬古心"은 "애내성중만고수(愁)" 등으로 우리 민요에서도 자주 인용된다. 갱의대(更衣臺)는 신선이 잔치에 가려고(또는 계곡에서 목욕을 하고) 옷을 갈아입은 곳이라고 하며, 또는 선인이 신선이 되어 날아간 곳이라고도 한다. 목욕갱의(沐浴更衣) 갱의승천(更衣昇天) - 목욕을 하고 옷을 갈아입었을까? 옷을 갈아입고 하늘로 올라갔는가? 경의대를 지나면 까마득한 절벽위에 작은 집이 있다. 호리동(狐狸洞)이라 하니, 여우굴이란 말이다. 명나라때 저명한 도사의 도량이 있던 곳이다. 그래서 남명정(南溟靖)이라고도 한다. 전설에 주자의 애정 고사가 담긴 곳이다. 사 곡 (四 曲) "사곡의 양쪽에는 두개의 바위산이 있는데 바위틈 꽃에는 이슬이 맺혀 푸르르네 금닭(金鷄)이 울어 아침을 열지만 아무도 본 이가 없고 달은 텅 빈 하늘에 가득하고 물은 웅덩이에 가득 차있네" (주자, 무이구곡가 중 사곡 ) 사곡에는 거대한 암산인 대장봉과 선조대가 마주보고 있다. 대장봉 암벽 중간의 금계동굴(金鷄洞)에는 새벽을 알리는 금닭이 있었다고 하고, 그 아래에는 무이구곡에서 가장 깊은 와룡담(臥龍潭)이 있다. 대장봉과 선조대 절벽에 핀 꽃은 이슬을 머금고 있고, 새벽에는 금닭이 울고 밤에는 달빛이 와룡 담에 그윽이 비치는 사곡의 정경을 읊었다. 사곡으로 돌아들면 엄청난 바위산이 앞을 가로막는다. 이름하여 대장봉이라 했으니, 도가(道家)가 대장경(大藏經)을 숨겨둔 곳이라고 한다. 대장봉의 수십길 절벽에는 두개의 작은 굴이 있다. 위에 있는 굴을 구과암(鷗穴+果巖)이라 하는데, 굴 안에는 벼(稻草)가 자란다. 언제 누가 갖다 놓았는지도 모르고 몇 백 년이 지났는지도 모르지만 지금도 스스로 열매를 맺고 자란다고 한다. 아래에 있는 굴이 금계동(金鷗洞)이다. 이 굴 안에는 선관(船棺)이 있다. 대장봉 아래의 와룡담(臥龍潭)은 구곡중에서 가장 깊은 곳이다. 와룡담에 이르러 뱃사공은 기다란 대나무 삿대를 물속에 집어넣지만 끝에 닿지는 않는다. 대장봉 건너편에 제시암이 있는데, 암벽에 석각의 시를 가득 새겨 놓았다. 무이산에는 400여 곳의 마애석각이 있다는데, 제시암이 가장 대표적인 곳이다. 사곡의 북쪽에 선조대가 있으니, 신선이 낚싯대를 드리우던 곳이라고 한다. 선조대(仙釣臺) 절벽위 바위틈에는 낚싯대 한 개가 비스듬히 나와 있다. 천년을 두고 썩지도 않고 그대로 있어 무슨 물건인지 알 수없는데, 사람들은 강태공이 이곳에 와서 낚시질을 했다고 한다. 삼 곡 (三 曲) "삼곡에서 그대는 가학선을 보았는가 노젖기를 그친 지 몇 해인지 모르겠네 뽕나무 밭이 바다가 된 것이 지금부터 언제런가 물거품같고 바람앞 등불 같은 우리 인생이 가련하다" (주자 무이구곡가 중 삼곡 ) 삼곡에는 험준한 암벽으로 된 소장봉이 있고, 소장봉 바위굴에는 홍교판와 가학선관이 있다. 주자는 가학선관을 고대 중국의 남방 소수민족이 사용하던 관(棺)으로 보았는데, 가학선관에서 인생의 덧없음을 읊고 있다. 와룡담을 돌아가면 또 천길 절벽의 소장봉이 나온다. 소장봉에도 아득한 절벽위 틈사이에 배모양의 목제 관이 있으니 홍판교(虹板橋)와 가학선관(架壑船棺)이다. 전설에 이르기를 가학선관은 신선이 하늘로 날아가면서 남긴 배(舟)로서 배안에는 유골이 있었다고 하는데, 비바람에도 썩지 않고 천년을 그대로 있다. 가학선관(架壑船棺)은 골짜기에 설치한 배라는 뜻으로 배 모양의 관(棺)을 말하고, 홍교판(虹橋板)은 무지개 다리판이니 선관을 고정시키기 위한 목판이다. 천애 절벽위에 있는 가학선과 홍교판은 사람들에게 많은 호기심을 자극하여 신선의 전설을 담고 있다. 주자는 가학선관을 고대 남방 소수민족이 사용하던 관이었다고 보았다. 무이 선관은 은(殷)나라 말기에서 시작하여 주(周)나라 초기까지 있었다고 하니, 3800여년 복건성에 살던 소수 민족의 유물이 된다. 이 곡 (二 曲) "이곡에 우뚝 솟은 옥녀봉이여 꽃을 꽂고 물가에 서 있으니 누구를 위해 꾸몄는가 도인은 황대몽(荒臺夢)을 다시 꾸지 않는데 흥에 겨워 앞산에 들어가니 푸르름이 첩첩이네" (주자, 무이구곡가 중 이곡 ) 이곡에는 옥녀봉이 무이산에서 가장 수려한 자태를 자랑한다. 옥녀봉 아래에는 목향담(沐香潭)이 있고, 옥녀봉 왼쪽에는 면경대(面鏡臺)가 있어 이곡의 산수는 한폭의 그림을 보는 듯이 수려하다. 주자의 이곡가는 이러한 경치를 읊은 것이다. 이곡에 이르러 무이산에서 가장 수려하다는 옥녀봉(玉女峯)을 만난다. 정상에는 나무가 자라고 절벽은 광택이 나서 마치 옥석을 조각한 모습으로, 절색의 소녀가 맑은 물가에서 먼 곳을 바라보는 듯한 형상을 하였다. 전설에 의하면 옥녀는 옥황상제의 딸이었다. 하늘에 살던 옥녀(玉女)는 아버지 몰래 구름을 타고 인간 세상에 내려왔다가 무이구곡의 산수에 매료되어 돌아갈 줄을 몰랐다. 우연히 대왕(大王)과 알게 되어 서로 사랑을 하여 자식을 낳고 인간세계에 살았다. 이를 본 철판도인(鐵板道人)이 옥황상제에게 고하자, 옥황상제가 크게 노하여 철반도인에게 옥녀를 잡아오도록 했다. 옥녀는 대왕과 같이 인간세계에서 살고자 하여 뜻을 꺾을 수 없었다. 철반도인은 마법을 써서 옥녀와 대왕을 돌로 만들어 계곡의 양쪽에 두어 서로 만나지 못하게 하였다고 한다. 옥녀봉과 대왕봉 사이에는 철판장(鐵板障)이란 병풍 바위(障)가 있는데, 철판도인이 대왕봉과 옥녀봉이 만나는 것을 막고 있는 것이라 한다. 이를 안타깝게 여긴 관세음보살이 대왕과 옥녀를 불쌍히 여겨 옥녀봉 맞은편에 면경대(面鏡臺)를 두어 서로 얼굴을 비춰보게 하였다고 한다. 일 곡 (一 曲) "일곡 시내가에서 낚싯배에 오르니 만정봉이 맑은 물속 푸른 하늘에 잠겨있네 무지개다리는 한번 끊어진 후 소식이 없고 골골마다 암봉에는 비취 빛 안개가 자욱하네" (주자, 무이구곡가 중 일곡 ) 일곡 계곡의 북쪽에는 대왕봉이 솟아있고 대왕봉 왼쪽에 만정봉(巾+曼亭峯)이 있다. 만정봉은 해발 500미터정도의 산으로, 도가(道家)의 무이군(武夷君)이 연회를 베풀던 곳이라고 한다. 전설에 의하면 진시황 2년 가을에 무이군이 허공에 무지개 다리를 놓고 여러 신선들을 초대하여 잔치를 베풀었다고 한다. 이곳에도 가학선관읜 흔적이 있다. 제시암에는 명나라때 척계광(戚繼光)이 지은 시도 있다. 척계광은 왜구를 정벌하여 명성이 높은 장수였는데 황제의 부름을 받아 북벌을 하러 가는 길에 무이산에 들러 이 시를 새겼다고 한다. "대장부가 이미 남쪽에서 왜구를 정벌하고, 이제 북쪽에서 오랑캐를 평정하려 하니, 황금관에 도포를 입고 다시 올 것을 기약하노라"(大丈夫旣南靖島夷 便當北平胡虜 黃冠布袍 再期游此...)" 대왕봉(大王峯)은 무이산에서 가장 웅장한 바위산으로 옥녀봉 맞은편에 있다. 높이는 해발 300여미터이지만, 구름을 뚫고 하늘을 받치고 우뚝 선 모습이 영웅의 형상을 하였다. 전설에서 대왕은 근면, 용감, 지혜의 미덕을 갖춘 이상적인 남성이었다. 바위틈으로 좁은 길이 대왕봉 정상으로 통하는데 몸을 굽히고 무릎으로 기어 산 정상에 오르면 무이산 지역 일대가 한눈에 펼쳐진다. 무이구곡은 일곡에 이르러 숭양계(崇陽溪)로 들어간다. 주자의 무이구곡가는 많은 사람들에 의해 읊어졌다. 무이구곡가로 인해 무이산의 구곡은 더욱 유명해졌고, 많은 시인 묵객들이 이런 류의 노래를 지어 "뱃노래는 주자에서 시작된다"(棹歌首唱自朱子)고 하였다. 무이산을 본 따 만든 구곡의 물굽이는 포석정처럼 굽이굽이 돌고, 배는 천천히 미끄러져 들어가는데 여울물에 돌 부딪치는 돌돌거림이 그렇게 듣기 좋을 수 없었다.그 위에 흐르는 붉은 꽃잎, 떠내려 오는 차를 마시는 기분이야말로 신선놀음이었으며 50여년 살아온 인생에 모든 피로를 잊고 정말 행복한 순간이었다. 무이산 천유봉 오후에는 천유봉등산에 올랐다. 천유봉은 천길의 절벽위에 암봉이 우뚝 솟은 무이산 최고의 절경이다. 그래서 옛부터 천유봉을 무이산 제일의 경치(武夷第一勝景)라 했고, 천유봉에 오르지 않으면 무이산을 구경한 것이 아니라고 했다. 노약자를 위한 가마가 왕복 약40,000원을 받고 정상까지 갈 수 있었다. 옛날에 우리가 물지게 지듯이 두 사람이 출렁출렁하면서 한 발 한 발 춤추듯 내려간다. 전망 좋은 곳은 어김없이 정자가 서 있다. 내려다보니 새파란 물위로 빨간 구명조끼를 입은 뗏목들이 줄지어 내려간다. 앞산은 아예 바위 자체를 깎아서 계단을 만들었다. 얼마 전에 그 계단에서 한 외국인이 떨어졌다고 한다. 그래서 지금은 모두 난간이 있다. 실같이 이어진 좁은 길을 올라 정상에 이르면 수많은 봉우리가 내려다보이고, 구곡의 돌아드는 모습이 완연히 눈에 들어온다. 천유봉은 높이로 말하면 삼앙봉에 미치지 못하고, 우뚝한 모습으로 말하면 대왕봉에 미치지 못하고, 수려함으로 말하면 옥녀봉에 비치지 못하고, 험한 것으로 말하면 접순봉에 미치지 못한다. 그러나 천유봉은 육곡에 위치하여 절경이 제일이다. 그래서 천유봉에 오르면 도교의 이상세계인 봉래선경(蓬萊仙境)에 들어선다고 했다. 천유봉 정상에 있는 천유각(天遊閣)은 도교의 천궁(天宮)을 본따서 만든 것이라 한다. 천유봉에서 내려다 본 무이계곡. 오른쪽에서 흘러온 물이 천유봉 아래 쇄포암에서 육곡을 이루며 왼쪽으로 감돌아 흘러간다. 천유봉 맞은편에는 첨예하게 솟은 바위산이 있다. 커다란 바위산에는 세갈래의 균열이 생겨 세 개의 암석 같은데, 마치 대나무 순이 솟는 모양이다. 다동의 남쪽에서 올라가는 길은 좁은 계단이 까마득한 정상까지 가파르게 이어져 아찔한 느낌을 준다. 전설에 의하면 접순봉 (接筍峯)아래에 석당사(石堂寺)란 절이 있었는데 1명의 부지런하고 착한 승려와 99명의 게으르고 나태한 승려가 있었다고 한다. 깍아지른 절벽 아래에는 육병(肉餠)이라 부르는 세 개의 바위덩어리가 있는데, 게으른 99명의 승려가 떡이 된 것이라고 한다. 운와(雲窩)는 구름이 나온다는 굴이다. 굴속에서 항상 하얀 구름이 피어올라, 모이고 흩어지며 온 산에 퍼져 나가 운무(雲霧)의 환상을 이룬다. 무이산의 구름은 천만가지의 자태를 자랑하여 계절에 따라 구름 모양이 다르고, 아침저녁으로 구름 모양이 다르고, 날씨에 따라 구름 모양이 모두 다르다고 한다. 그래서 무이산의 구름은 운해(雲海), 운룡(雲龍), 불광(佛光), 홍교(虹橋), 탄운(呑雲), 와운(臥雲) 등의 많은 이름을 가지고 있다. 雲深不知處 구름이 깊어 간 곳을 알 수 없고 只在此山中 다만 이 산속에 있을 뿐이네 (이백:李白) 천유봉 가는 길에 무이정사(武夷精舍)가 있다. 1183년에 주자가 만든 정사이다. 주자는 이곳에서 10년동안 있으면서 학문을 논하고 제자를 양성하였다. 무이정사에는 인지당(仁智堂), 은구실(隱求室), 지숙재(止宿寮), 관선재(觀善齋), 한서관(寒棲館), 만대정(晩對亭), 철적정(鐵笛亭) 등의 많은 건물이 있었다. 그러나 현재는 무이정사임을 알리는 팻말과 허물어진 건물만 남아있어 무이정사를 찾는 나그네의 마음을 허전하게 한다. 무이산 대왕봉 아래에는 주자기념관이 있다. 기념관에는 "이학정종(理學正宗)" 등의 현판과 주자상을 두었고 회랑에는 주자의 일생을 전시하고있다. 주자기념관옆에는 도교의 궁관인 무이궁(武夷宮)이 있다. 무이궁은 무이산에서 가장 오래된 궁관이다. 당나라때인 742-755년 사이에 설치되어 송나라 때는 300여칸에 이르렀고 "충우만년궁(沖佑萬年宮)"이란 사액을 받았다. 송나라때는 주자, 육유, 여조겸 등 25명의 유명한 학자가 충우관에 와서 제사를 주관하여, 매년 가을 무이군(武夷君)에게 제사하였다. 현재는 용정(龍井)과 만년궁(萬年宮), 삼청전(三淸殿) 등이 남아있다. 2002년 12월 13일(세째날) 무이산 수렴동(水簾洞) 수렴동은 무이산에서 가장 큰 바위굴이다. 높이는 100여 미터에 이르는데, 정상이 비스듬히 앞으로 나와 있어 보는 사람을 압도한다. 암벽 위에는 물이 흘러 정상에서 아래로 폭포를 이룬다. 물이 떨어져 생긴 웅덩이에는 용이 산다고 해서 목룡담(沐龍潭)이라 한다. 비가 와서 물이 많을 때는 물줄기가 허공에 떠서 무려 100여 미터를 내리친다고 하니, "비류직하삼천척(飛流直下三千尺)"이란 말이 실감나게 다가온다. 수렴동 까마득한 절벽 아래에는 집 한채가 있으니 삼현사(三賢祠)이다. 삼현사는 유자휘(劉子휘)와 주자(朱子), 유보(劉甫)를 모신 사당이다. 유자휘는 무이산 오부리(五夫里)에 있는 병산서원(屛山書院)에 은거하여, 병산선생(屛山先生)이라 불린 남송때의 학자이다. 유자휘는 주자의 스승으로서, 주자를 데리고 수렴동에 와서 학문을 가르쳤다. 그래서 주자가 소년기에 가장 많은 것을 배운 스승이라고 칭송한 바 있다. 유보도 수렴동에 은거하여 주자, 채원정(蔡元定) 등과 교유한 남송때 학자이다. 수렴동 암벽에는, 1181년 7월 23일에 주자와 채원정이 유보의 초청을 받고 수렴동을 유람했다는 내용의 주자가 손수 쓴 글이 남아있다. 1147년 유자휘가 서거한 후 수렴동에 병산선생사당을 세우고 주자가 쓴 "백세여견(百世如見. 영원히 뵙는 듯하다는 뜻)"의 현판을 붙였다. 그후 유보와 주자가 서거한 후 유자휘의 좌우에 모시고 삼현사라 칭했다. 청나라 때는 승려가 삼현사를 점거하기도 하고, 후에는 공자,노자, 석가를 모시고 삼교당(三敎堂)이라 한 적도 있는데 1944년에 다시 삼현사의 옛 이름을 회복하였다. 우리네 시골집 풍경과 비슷한 곳에서 점심을 먹었다. 시골 전통민속음식을 먹어볼 수 있었다. 곧 일행은 무이산 영원선사를 찾았다. 주변 산세는 웅장하고 아름다운 산이었다. 일행 중 민 회장님은 이 아름답고 좋은 세상을 몇 년 후 떠나야할 것을 생각하면 너무 서운하고 억울하다고 표현하신다. 그래서 이번여행자중 가장 연세가 많으시고 기회 있을 때마다 앞 다투어 참석하시는 분이다. 무이산에서 가장 좋은 차가 나온다고 하는 대홍포로 이동하였다. 사방 주위로는 천길 절벽이 둘러싸서 시원한 피서처가 된다. 무이산은 바위틈에서 자라는 암차(巖茶)가 유명하여 원나라 때에는 황실의 다원이 있었다. 무이산 암차는 중국 10대명차의 하나인데, 그중에서 대홍포(大紅袍)가 가장 진귀하다.대홍포에는 100년이 넘는 차나무3그루가 암벽에서 지금도 서식하고 있으며 그 밑 정자에서 차와 계란을 먹으면 5년은 더 산다고 해서 그냥 지나갈 수 있겠는가? 무이산시 만찬 저녁에는 무이산시 당국에서 특별히 준비한 만찬장으로 이동하여 중국 특유에 요리를 맛볼 수 있었고 공식만찬이 시작된 후 우리 일행은 오랫동안 준비한 샤오바이촨과 모리화를 열창하게 되었고 모든 일행과 중국인들이 모두 같이 부르고 열광적이고 감동적인 순간을 갖게 되었다. 한. 중 양국의 문화를 이해하고 우의를 다지는 분위기로 이끌어간 아름다운 시간이었다. 만찬이 끝난 후 세일여행사 사장님께서 특별히 발맛사지를 시켜주어 말만 듣던 중국 발맛사지를 하며 무이산 등산 및 관광에서 오는 피로를 풀 게 되었다. 무이산에서의 일정을 마치고 밤비행기로 무이산맥을 넘어 하문시로 이동하였다. 2002년 12 월 14일(넷째날) 이곳 하문시는 2001년도 중국 제1의 환경위생도시 답게 깨끗한 도시로 느껴진다. 하문호텔도 수준급으로 우리는 1217호에 여장을 풀었다. 하문은 현지어로 샤먼. 아름다운 남국의 도시이다. 중국 복건성 동남 연해에 위치한 섬 도시로 九龍江이 흘러나오는 가장 안 쪽에 둘레 약24㎞의 섬으로 작은 섬들이 고리를 이루어 경치가 아름답다. 대만과 가깝고 漢人이 많이 살며 열강의 영향으로 음악도 중국의 가야금보다 서구식 가락들이 우선한다. 아침 일찍 호텔주변을 열심히 둘러보고 일행과 함께 천혜의 아름다운 섬 고랑서를 찾았다. 고랑서는 하문 앞바다에 7백m 떨어져 있는 섬으로 면적 2㎢(약60만평) 정도의 작은 섬이지만, 이국적인 건물이 많이 들어서 있는 그림 같은 섬이다. 가까워서 배를 타니 10분 만에 도착이다. 골목골목을 돌아 숙장 화원에 들어섰다. 언덕배기에는 돌들로 미로를 만들어 놓았고 언덕 위에는 피아노 전시관이 있는데, 시대를 달리하는 100여대의 피아노가 진열되어 있었다. 훌륭한 음악가가 이 고장에서 많이 배출되었다고 자랑이 대단하다. 섬 전체가 온통 유럽인들의 별장 등으로 뒤덮여 여기가 중국인지 의아해 할 정도이다. 그 붉은 지붕과 도처에 무성한 수목과 화초가 기막히게 조화를 이루어서 푸른 바다와 함께 한층 돋보이게 한다. 오솔길을 따라 20분 정도 올라가면 용두암(龍頭岩)이라는 거대한 바위 앞에 다다른다. 日光巖의 높지도 낮지도 않은 정상에 오르면 이 섬의 정경이 한눈에 들어온다. 예전의 붉은 지붕의 부호들은 다 어디 가고 현지인들의 초라함만 묻어난다.그 옛날에 명장 정성공(鄭成功)이 이곳에서 수군을 지휘했다는 곳으로 맑은 날이면 대만의 지배 하에 있는 금문도(金門島)가 보인다. 구랑 섬에는 자동차나자전거도 없다. 인구 1만3천명이 사는 이조그만 섬의 유일한 교통수단은 유원지에나 어울릴 듯 싶은 꼬마 전기차뿐이다. 지난 20년 동안 모든 공장이 섬을 떠났다. 친환경적인 관광지구로 특화된 것이다. 기계의 소음 대신에 피아노의 아름다운 선율이 울린다는 것이 이 섬의 자랑이다. 많은 피아니스트들을 배출한 이 섬의 별명도 `피아노 섬이다. 이 섬은 `바다 위의 꽃동산(海上花園)이라는 표현 그대로 아름답다. 섬전체를 둘러보고 아쉬운 발길을 재촉하고 배를 타야만 했다. 오후에는 남보타사를 찾았다. 우리가 들린 천년고찰 南普陀寺는 샤먼의 五老峰 기슭에 있으며 淸代에 복원을 한 것으로 香 때문에 불난 적도 있었다고 하듯이 사찰 내에는 온통 향내가 코를 찌른다. 화려한 지붕으로 유명한 대비전에 안치된 천수관음상(千手觀音像), 황금색의 당탑가람(堂塔伽藍), 청나라 때 새겼다는 5미터 규모의 불(佛)자 석각 등이 있었다. 장경각에는 1만여권의 경전이 보관돼 있어 이 절의 역사를 짐작케 한다. 바위에 새겨진 佛자의 크기와 金治粧을 자랑하지만 크기로야 금강산 구룡폭포 바위에 새겨진 佛자만 할까. 胡里山砲臺는 1891년부터 5년에 걸쳐서 만든 것이며 샤먼항의 방어 요새여서 마치 강화도를 연상케 했다. 독일에서 제조되었다는 큰 포대는 나바론 요새 같았다. 포신이 14m란다. 그놈의 열강들 때문에. 同病相憐이라 했던가. 그 옆에는 그 당시에 썼던 많은 총들이 박물관에 전시되어 있었다. 옆에 수석전시실에는 글자.숫자.알파벳등 기묘하게 생긴 수석들 틈에는 한국산도 끼어있었다. 알파벳의 모든 글자, 각종 연산기호 등이 박혀 있거나, 돼지고기를 한 덩어리 베어놓은 듯한 육석(肉石) 등 진기한 수석들을 아시아 각국에서 수집하여 전시해놓고 있어, 저걸 다 어떻게 모았을까 하는 생각이 든다. 이어서 아름답기 유명한 하문시 해변도로를 달리는 차창밖은 정말 환상적인 도로였고 저 멀리 바다건너 금문도가 바로 앞에 펼쳐져 있었다. 주변에는 유명한 골프장이 많기도 하여 골프 여행지이기도 하다. 호텔에 돌아와 저녁에는 하문시의만찬에 참석하여 여흥을 즐기며 이곳의 유명한 해물요리를 맛있게 먹었다. 저녁 늦게 몇몇일행과 하문시내 거리를 돌아다니며 야시장도 들려 과일을 사기도 했다. 그렇게 하문의 첫날은 분주하게 보냈다 2002년 12월 15일(마지막 날) 여행 마지막 날인 오늘은 집미학촌을 찾았다. 문자 그대로 미를 모은 아름다운 원촌으로 전체 면적이 2.83㎢에 4개의 전문학교와 중학교, 초등학교, 도서관 등이 있었다. 거의 모든 건물들이 아름답기 그지없으며 특히 집미중학교는 이 지방 특유의 건축 양식과 서구의 건축 양식이 절충된 것이었으며 1913년에 건립하였고 샤먼섬 과 중국대륙을 연결한 다리 건너 반도 쪽에 있는 학원 타운으로 화교 출신진가경이 조성한 것이다. 전문학교와 초중등학교, 도서관 등이 이 지방 특유의 건축 양식과 서양식을 절충한 아름다운 건물과 호수가 들어서 있었다. 학교촌을 둘러보는 것으로 이번 모든 일정이 아쉬움 속에 끝나간다. 점심 식사 후 서둘러 공항을 향하여 귀국을 독촉했다. 귀국을 위하여 하문공항을 도착하니 그동안 연변 조선족으로 열심히 당당하게 살아가는 가이드 이대범씨의 현지 안내과정에서의 그간의정과 살아가는 모습을 보고 그놈의 정 때문에 공항출구에서 다시 되돌아가 약간의 격려금을 전달하고 열심히 살아가도록 뜨거운 동포애를 심어주었다. 또 하나는 이번여행에서 출발부터 귀국시 까지 논란이 된 참깨를 값싼 중국에서 사오기를 모두 내심으로 기대했지만 일행 중 농촌출신 한분이 우리농산물을 애용해 줄 것을 간곡히 요청해와 모두가 참깨사가는 것을 자제하기로 하고 섭섭한 마음으로 귀국했지만 모두 농촌문제를 생각한 애국심을 발휘하고 귀국하니 뿌듯한 마음으로 귀국하게 되었다. 중국에서는 그어느곳이고 커피가 없었고 대신 차는 많았으므로 귀국 하자마자 제일먼저 커피를 마시니 그맛 또한 어찌나 맛있는지........이제는 도착즉시 구수한 된장맛이 그리워진다. 금번 여행에 동반하신 모든분 들의 가정에 행운과 건강이 늘 함께하시길 두 손 모아 빕니다. 모든 분들 대단히 수고하셨습니다. <끝> /세일여행사 제공 작성자:신영태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