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죄송합니다. 와플파이님. 이제야 왔네요. 현대물엘뤼엘입니다. 음.. ㅇㅅㅇ;; 너무 결말이 너무 복잡해진 것 같지만.. 받아주시길...ㅠㅠㅠ
내 이름은 엘뤼엔 크리노 루사테. 나이는 26. 직업은 의사. 직함은 원장. 근무지는 바이톤 대학병원. 근무과는 외과지만, 작년 원장 취임 이후엔 실무선에서 근무하지 않음. '원장'으로서의 업무가 바빠 도무지 시간이 안나는 일상이었지만, 딱 하나의 일로 모든 일상이 바뀌었다.
그날, 4월 26일 오전 9시에 카노스로부터 온 인터폰으로 인하여.
*
-엘뤼엔! ER로 좀 내려와 봐!
오랜 친구이자 이곳의 의사인, 카노스의 다급한 목소리에 긴급환자가 여럿 있어 손이 부족하다고 판단한 나는 행정서류를 처리하던 손을 놓고 벗어두었던 가운을 와이셔츠 위에 걸치며 서둘러 원장실을 나섰다. 원장실 앞에 있던 수행원(겸 비서)들이 막으려고 일어나는 듯 했으나 가운을 보고 상황을 알았는지 일단 다가오진 않았다.
서둘러 1층으로 내려가자 ER은 인산인해를 이루고 있었다. 몇중추돌 사고라도 있었나.. 라는 생각을 하며 굳게 닫혀 있던 응급실 문을 열었다.
ER 내부는 예상대로 정신이 없었다. 몇몇 인턴이나, 1,2년차 레지던트들은 거의 패닉 상태였고 일부의 3,4년차 레지던트들과 전문의 셋 그리고 경력있는 간호사들만이 바쁘게 움직이고 있었다. 카노스가 막 한 환자의 처치를 마치고 평상시와는 다른 피곤한 기색으로 나오는 것이 보였다.
"카노스."
내가 그의 이름을 나직히 부르자 카노스는 피곤함을 어디 던져버린 듯 평상시의 장난스런 웃음과 함께 다가왔다.
"냐하하하, 엘뤼엔."
"무슨 일이야, 카노스? 분명 큰 사고가 있었던 모양이지만 대강 정리가 된 모양인데?"
이 녀석의 이름은 카노스. 나이는 나보다 많은 것이 확실해보이지만 정확한 나이는 모르고 (알고 싶지도 않고) 그냥 친구처럼 지내는 녀석이다. 성도 불명. 부모도 불명. 이모저모로 수수께기인 녀석이지만 적어도 나와 만난 이후, 거짓은 없었다. 아니, 거짓이 있다고 해도 상관 없었다. 그에게 내 모든 걸 보인 적도 없고.
내 물음에 카노스 녀석은 뒤를 가리켰다. 가려져 있는 응급침대. 내가 다시 그를 보자, 카노스는 씩 웃으면서 말했다
"이름, 나이, 사는 곳. 모든 게 다 불명이야. 그런데, 상당히 심하게 다쳤어. 당장 수술이 필요하지. 너 역시 보면 알겠지만 말이야."
모든 게 불명이라는 점이 카노스 같다고 생각했다. 그리고 이 녀석에게 되물었다. 내게 뭘 원하는 건지.
"그래서?"
"냐하하하. 일단, 보호 좀 해줘. 수술은 시켜줘야 할 것 같거든."
일단...? 그가 한 말에 의문을 느끼며 왜 그런 지 생각하고 있었다. 하지만 아무리 생각해도 그 의미를 모르겠다.
이 녀석이 언제나 실실 웃고 있어서 엄청 정 많고, 아무 생각 없는 녀석인 걸로 다들 알고 있지만, 이 녀석은 누구보다 차갑고 계산적이다. 저 밝으면서도 괴상한 웃음에 다들 속고 있지만. 난 이 녀석이 대체 왜 내게 이런 걸 부탁하는 지 영문을 모르겠다는 얼굴로 녀석을 보자 그는 내가 왜 그를 보는 지 알면서도 평상시와 같은 미소와 어투로 '부탁해'라고 말하고는 내게 '수술 동의서'를 건네고 환자를 수술방으로 데려갔다.
스쳐지나가듯 보이는 푸른 색 머리. 피가 범벅이 되있었긴 했지만 보는 순간 목이 말라올 정도로 청량한 물색이었다. 내 눈동자와 같은 물색이라.. 재밌군.
*
날 보호자로 해서 동의서를 서류사이에 끼워놓고 잠시 스쳐지나간 푸른 머리의 소년을 생각했다. 밀가루를 뿌려놓은 듯한 하얀 얼굴에 조막만한 코와 입이 균형있게 놓여있었다. 조물주가 심혈을 기울여 만든 듯한 외모. 서류가 잔뜩 남아있었지만 잠시만 그 소년을 생각해도 될 듯 했다. 여전히 귀찮은 것임에는 분명할테지만.
어느 순간 째깍거리는 소리조차 들리지 않을 정도로 집중해서 서류정리를 하던 나는 고개를 들어 시계를 보았다. 수술이 9시 반정도에 들어갔었으니까, 대충 다섯시간 정도는 걸릴 것이라고 생각하면서. 많이 지나야 한 시간쯤 지났을 것이라는 예상과는 달리 시간은 벌써 3시 45분이었다. 점심식사도 잊고 서류에 열중했던 것이다. 마지막으로 책상 위에 올라와 있는 서류, '아크아돈 대학병원의 새로운 원장' 에 대한 서류였다. 우리 병원과 라이벌이자 몇 안되는 대학병원으로 멀지 않은 곳에 있었다. 나의 아버지처럼 젊은 아들에게 곧 원장직을 넘길 것 같다는 내용이었다. 대강 본 뒤 넘겼다.
피식-
언제 이렇게 집중해 본적이 있었던가. 대학원 졸업 논문 때 조차 이렇게 집중해본 적이 없었다. 심지어 수술할 때조차도 생각할 것 다하면서 수술을 마친 적도 있었다. 지금 내가 우습다고 생각하면서 자리에서 일어섰다. 늦었지만 저녁이라도 먹어야겠군. 뭘 먹을까 생각하면서 대충 원장실 문을 열고 나가자 수행원(겸 비서)들 중 하나, -비서실장이었던 것 같다.-가 일어나 다가왔다.
"어딜 가십니까?"
서늘한 눈으로 그를 보자 움찔 하는 것이 느껴졌다. 빌어먹을 아버지가 붙여놓은 거겠지. 내가 설마 허튼 짓이라도 할까 말이다. 이들은 내 일거수일투족을 감시하려들었다. 내가 비서를 따로 들여도 그들은 얼마 못참고 나가야만 했다. 의사가 된 뒤에도, 원장이 된 뒤에도 더욱 옥죄어오는 아버지란 이름의 커다란 권력을 느낄 때마다, 짜증이 솟구쳤다. 지금도 어디 그룹 회장 딸과의 약혼-혹은 결혼-을 준비하고 있겠지. 내 의사와는 상관 없이 말이다. 26년간 단 한번도 바뀌지 않은 그 집착에 염증이 생겼지만, 이 대로라면 어떻게 되든 상관 없었다.
귀찮긴 해도, '내 것'이 아닌 것에 관심을 보이지 않으니 그 역시 날 놓아두고 있는 것이다.
"밥."
짧게 말하자, 시계를 쳐다보는 그를 잠시 흘깃 쳐다본 후에, 병원을 나서려는데 누군가 내 어깨를 잡았다. 이 병원 내에서 이럴 수 있는 자는 단 둘 뿐이었다. 카노스와, 소아외과 여과장 이카나. 그녀는 나와 같은 학교를 나온 후배이자 귀찮은 녀석이었다. 내가 좋다고 따라다니기에 빌어먹을 아버지의 딱 좋은 먹잇감인, 클리프 그룹의 외동딸이었다.
"엘뤼엔 선배, 어디가요?"
역시나 물어오는 말에 단순하게 대답했다.
"밥먹으러."
짧게 말을 마치자 마자 눈이 빛나더니 빠르게 말한다.
"같이가요!"
"3시 이후엔, 소아환자들이 많아진다고 알고 있는데?"
이카나 녀석은, '쳇, 선배는 너무 깐깐하다니까.' 라고 중얼거리며 잡았던 어깨를 놓았다. 나는 '가서 일해라.'라고 짧게 말해준 뒤, 로비로 향했다. 몇 걸음 걷지 않아 또다시 날 잡는 누군가에 의해 멈춰지고 말았지만.
"냐하하하! 이 병원 내에서 최고로 바쁘신 엘뤼엔 원장님이 어딜가실까?"
"카노스. 수술은 끝났나?"
고작 1년 반정도 밖에 안 본 녀석이 왜이렇게 친한 건지 나도 이해가 가지 않았다. 뭐, 계기가 있었겠지.
"냐하하하~ 물론이지. 완벽하게 끝냈어. 별문제가 없다면 오늘 중에 깨어날 거야. 밥 먹으러 가던 중이었어?"
신기한 녀석이다. 언제나 내가 말하려던 걸 쉽게 알아 챈다. 내가 어디다 써붙이고 다니는 것도 아닌데. 아니, 내가 가는 곳이 뻔한가? 아버지와 최대한 마주치지 않는 것은 그의 예상 안에 있는 것이다. 그러니 병원에서 서류처리만 죽도록 하는 것이다. 아니면 그가 말하는 여자들과 만나고 돌아다니거나. 왜냐고? 만나봐야 좋은 것이 없기 때문이다. 재물에 대한 욕심이며, 신분에 대한 욕심 등 욕심이 많은 노인이니까. 그리고 당장이라도 하나뿐인 아들의 목을 칠정도로 차가운 사람이기도 하고. 어차피 친자식도 아니니까.
"그래. 넌?"
"지금까지 수술방에 있었어. 같이 먹으러 가자."
난 고개를 끄덕이며 근처 식당으로 가려고 했다. 그냥 간단하게 먹고 들어가고 싶었기 때문이다. 일을 빨리 처리하고 퇴근하는 것. 퇴근해서 집에 있는 시간이 그나마 가장 자유로운 시간이다. 그렇지만 좁은 집이라도 별로 혼자 오래 있고 싶지는 않지만.
그러나 카노스 녀석은 자신이 당직이라느니 뭐라느니 하면서 날 레스토랑으로 끌고 왔다. 대낮부터 칼질하는 신세가 되어버렸군. 민폐덩어리 같으니라고.
대충 그렇게 먹고 나오는데 떼지 않은 카노스의 무전으로 소식이 들려왔다.
-카노스 선생님. 1710호 엘 환자. 깨어났습니다. 고통을 호소하는데 어떻게 할까요? 아직 상황판단은 불가능해보입니다만.
"일단 수면제 투하해. 조금만. 아직은 좀 자둬야 돼. 아, 진통제도 조금 투하하고."
카노스 녀석이 대강 일러주자 알았다는 말과 함께 무전은 끊겼다.
"엘?"
무전이 끝나기를 기다렸다 묻자 카노스 녀석이 피식 하고 웃으며 말했다.
"아까 그 소년 말야. 네가 보호한. 이름이 공란이길래, 적당히 채워넣었지."
엘. 엘이라.. 왠지 익숙한 느낌에 피식-하고 웃었다. 이유 모를 따뜻함이 느껴져서. 이런 적은 처음이었기에 스스로에게 당황했다.
병원으로 돌아온 나와 카노스는 엘이 입원한 1710호로 갔다. 문을 열자, 먼저 보이는 것은 햇빛에 반짝이는 물빛 머리카락이었다. 물을 길다랗게 펴바르고 빗으로 빗어내린 듯한 느낌. 그리고 보인 것은 온몸의 붕대. 익숙한 것이었지만 어떤 면에서는 낯설어 보이는 것들이었다. 그와는 어울리지 않아서 그런 것이리라.
"카노스. 이 아이의 상태는?"
카노스가 차트를 뒤적이다가 뜬금 없는 내 물음에 피식 웃더니 다시 앞으로 넘어가 그의 '상태'를 읊기 시작했다.
"좌측 두부 외상 및 골절, 좌수 어깨골절, 왼발목 골절, 등 윗부분의 상해로 인한 과다출혈, 과다출혈로 인한 쇼크증상, 정면 이마 외상. 전부 다해서 13주 정도. 그리고 통원치료 15주 정도 예상한다. 아직 CT 결과는 안나왔어. 아마, 내상이 좀 있을 것 같아. 내과에 협력 부탁해놨어."
아까는 머리밖에 보지 못했지만 상당히 어린 듯한 얼굴이다. 대략 17,18세 정도 되어보이는 모습 때문이었을 것이다. 내가 이렇게 안타까운 것은. 그리고, 어디엔가 익숙한 그 모습이 더 안타까워진다. 나도 모르게 그의 얼굴에 손을 대었다. 따뜻했다.
지켜주고 싶다-.
나도 모르게 든 생각에 화들짝 놀라 손을 떼었다.
"으음..."
소년이 얼굴을 찡그리며 신음을 내뱉다, 눈을 떴다. 사파이어를 둥글게 깎아내 박아넣은 듯한 맑은 눈동자가 나를 가득 담았다. 이내, 그 눈은 두려움으로 물들었다. 그 눈과 마주친 순간 아무 생각도 떠오르지 않았다. 그저, 무슨 말이라도 해야겠다는 생각 뿐.
"몸은.. 괜찮나?"
소년은 잠시 의문이 가득한 눈으로 나를 보다가 붉은 입술을 열어 말했다.
"...저를, 아세요?.... 제가.. 누구죠?.. 그리고... 당신은 누구죠?"
소년의 말에 난 아무 말도 하지 못하고 고개를 돌려 카노스를 보았다. 카노스는 찡그린 얼굴이었다. 그 답지 않았다. 그는 머리칼을 벅벅 긁더니 한 마디를 뱉어냈다. 나도 알고 있고, 스치듯 생각한 것.
"두부 충격으로 인한 기억상실증."
소년의 눈동자엔 두려움이 가득했다. 무지(無知)로 인한 두려움. 그 눈동자를 모는 순간 내가 말했다. 이성적으로 아무런 계산 없이 순수한 본능으로 뱉어낸 그말.
"기억을 찾을 때까지, 내 집에 있는 건 어떠냐? 도와주마."
소년은 잠시 나를 보았다. 나는 나도 모르게 미소지으며 다시 말했다.
"내 이름은 엘뤼엔이다. 기억을 찾을 때까지, 나와 함께 있겠나?"
내가 누워있는 그와 눈을 마주치기 위해 침대 옆에서 허리를 숙이고 그를 보고 있기에 내 긴 머리는 아무렇게나 흘러내려 있었다. 내 백금발 머리를 붕대를 감지 않은 오른손으로 가볍게 잡은 소년은 잠시 멍한 눈으로 바라보았다.
"...반짝 반짝, 태양 같아요. 엘뤼엔 씨. 내가, 같이 있어도... 될까요?"
"물론이다."
그렇게 바다같이 푸른 머리와 사파이어 같은 맑은 눈동자를 가진 아름다운 소년, 엘은 나와 함께 지내게 되었다.
*
어차피 혼자 살고 있었기에 세달 후, 퇴원한 엘을 집으로 데려오는 건 어렵지 않았다. 엘의 퇴원 날짜와 맞춰서 휴가를 얻었다. 세달 간 틈틈히 준비해두었지만, 아직 모자를 것 같았다. 당장은 부족하지 않겠지만.
다리가 가장 빨리 나아 지금은 걸을 수 있었다. 심각한 건 어깨와 머리였다. 무엇에 짓눌렸는 지 어깨뼈가 거의 아작이 나있었고, 머리엔 중간 중간 금이 가있었다. 약간의 뇌출혈 증상도 있었던 것 같았다. 약간 보통 사람보다 자체치유력이 좋은 지, 다리와 몇몇 상해는 금방 나았다. 그리고 2차적 문제도 별로 없었다. -감염이라던지-
엘에게 준비했던 방으로 안내해주었다. 엘 또래의 아이들의 사이즈에 맞추어 옷을 채워놓았고, 간단한 책들로 책장도 채워놓았다. 그리고 책상에 컴퓨터 한대를 두었고. 일단 내가 휴가가 끝나도 집안에서 심심하지 않게. 그 동안의 노력으로 나를 '형'이라고 부르고 반말을 하게 된 엘이 싱긋 웃으며 감사를 표했다.
"고마워, 형."
"아니, 당연한거지."
나 역시 씩 웃으며 엘을 머리를 쓰다듬었다. 딱히 정리할 짐도 없었기에 집의 구조를 대강 일러주던 나는 출출하다는 생각에 거실의 시계를 보았다.
-7:43pm
들어온 시간이 5시 정도니까, 어느 새 두시간이 넘게 지났다. 난 엘을 바라보며 물었다.
"배 안고프냐?"
"고픈 것 같아."
"뭐 먹고 싶은 것 있어?"
내 말에 곰곰히 생각하던 엘은 씩 웃으며 말했다.
"치킨!!"
그 동안 병원에서 멸균식을 먹었으니 그런 게 먹고 싶겠지. 라는 생각에 마주 웃으며 말했다.
"알았다!"
치킨 집에 전화를 해 주문을 했다. 오래 기다리지 않아 배달이 왔고 거실에 펼쳐놓은 채, 막 먹다가 배부르게 먹은 우리는 치울 생각도 못하고 그대로 거실에서 잠이 들고 말았다. 나는 바닥에서, 엘은 소파에서.
눈을 뜨니 시계가 눈에 들어왔다.
-8:57am
9시..인가? 지각이다! 라는 생각에 벌떡 일어나자마자 보이는 엘의 모습에 휴가를 얻은 것을 상기했다. 잠시 엘을 보며 씩 웃는데 진동이 울렸다. 어제 벨로 안돌려놓은 모양이로군.
-아버지
난 자연스럽게 얼굴이 굳어지는 것을 느끼며 베란다로 나갔다. 엘이 깨면 안되니까. 엘에 대해서 들은 건가? 최악의 상황에 얼굴이 더 굳어가는 것을 느껴졌다. 아니, 그냥 약혼에 관한 이야기일지도 모른다는 생각을 했다. 최악을 생각하는 건 직업병인지라 애써 아무일 아닐 거라 생각하며 전화를 받았다.
-엘뤼엔이냐.
여전히 권위적이고 명령조인 목소리에 난 전화를 괜히 받았다고 생각하며 대답했다.
"네."
-클리프 그룹의 여식과 약혼식을 하기로 했다. 오늘 나와서 의논해야 할테니 11시에.."
또 다시 내 의견 따위는 묵살 된다. 울컥하는 마음이 들어 난 아버지의 말을 끊어버렸다.
"안갑니다."
-휴가라고 알고 있다. 그러고보니, 엘인가 뭔가 하는 기억을 잃은 소년을 보호 하고 있다 들었다.
"네, 여전히 빠르고 정확하시군요."
내 말에 담긴 비웃음을 들었을까? 바로 들려오는 노한 음성에 난 피식 웃었다.
-당장 내쫓아라. 그 아이는..
아버지의 말에 채 끝나기도 전에 나 역시 소리를 키우며 말했다.
"싫습니다. 됐습니다. 끊겠습니다."
그리고 전화를 끊었다. 전화기를 보며 더 성을 내실 아버지의 모습이 뻔했다. 그 동안은 다 귀찮았지만 이젠 아니다. 그가, 내 아버지가 엘을 알고 있다. 상당히 위험하다라는 생각에 내 무력함이 생각나 짜증이 솟구쳤다. 들고 있던 휴대폰을 집어 던졌다. 조금 흥분해 있는 나의 허리를 감아오는 손을 느꼈다.
"형, 화내지마. 괜찮아. 화내지마."
엘의 목소리였다. 반복하는 목소리에 어느 새 분이 사그라든 나는 평상시의 마음으로 돌아왔다. 신기해하면서도 아무렇지 않은 듯 그에게 말했다.
"그래, 괜찮다. 화 안낼게."
*
일주일의 짧은 휴가는 끝나고 다시 출근하는 날이 다가왔다. 나는 집 안에 먹을 것을 잔뜩 놔두었지만 그래도 조금 굳어있는 듯한 엘이 걱정되었다.
"대충 4시 정도에는 올거다. 여기 돈 놔둘테니, 심심하면 병원으로 와라."
엘은 말없이 고개를 주억거렸다. 지금 시간은 7시 47분. 넉넉히 가도 시간이 남지만, 일단 오늘은 처리해야 할 일이 많을 것이다.
일단, 아버지의 일도 있었다. 내가 그렇게 전화를 끊어버린 것에 대해서 아버지는 분명 해명을 요구할 것이다. 뭐, 그 바쁘신 양반이 여기까지 오진 않겠지만 만일이란 것도 있으니까.
병원에서 처리해야 할 일들이 너무 많아, 퇴근하기로 됐던 시간 보다 더 늦은 8시 정도에 퇴근을 하게 되었다. 속력을 늦추지 않고 계속 엑셀을 밟아 평상시보다 빠르게 오긴 했지만 어느 새, 8시 반.
어두운 집안, 단 한 곳에서만 빛이 새어나왔다. 엘의 방이었다. 그 때서야 내가 아침에 엘에게 했던 말이 생각이 났다. 4시정도에 온다고 했었지.
엘의 방문을 열고 들어가자 방 한 구석에 쭈그려 앉아있는 엘이 보였다. 내가 들어오는 소리에 고개를 살며시 드는 엘의 얼굴은 눈물범벅이 되어있었다.
"형, 왜.. 흐윽, 왜 이제 왔어.. 나 형이 안오는 줄 알고.."
순간 머릿속이 아찔해졌다. 휴대폰엔 부재 중 전화도 없었는데...? 아, 휴대폰번호를 안적어두고 갔었구나. 엘이, 많이 걱정할 거란 생각을 못한 내 자신이 원망스러웠다. 바보같군. 항상 혼자 있어서 누군가 걱정할 것이란 생각은 단 한번도 해보지 못했다. 어린 시절엔, 바쁜 아버지로 인해 혼자 있었고, 지금은 나 스스로 독립해서 혼자였으니까. 집에서 누가 기다릴 것이라는 생각도 해본 적이 없었다.
"미안.. 미안하다."
엘을 꼭 안아주며 반복해서 말했다. 미안하다고. 내가 이렇게 진지하게 사과를 해본 경험이 몇번이나 있었을까. 머쓱해진 기분이었다. 엘은 어느 새 눈물을 그치고 그 동글동글한 눈을 들어 나를 보았다.
"괜찮아, 형. 근데 나 배고파."
붉어진 눈으로 씨익 웃으며 하는 말에 나도 모르게 웃음이 새어나왔다. 정말.. 어쩔 수 없다니까...
"그래, 밥 먹자."
퇴근 후 누군가과 밥을 먹어보는 것이 상당히 오래간만이라고 생각하며 먹는 밥은 아주, 따뜻했다.
*
다음 날부터 난 제시간에 퇴근하기 위해 점심도 굶어가며 미친듯이 서류를 처리했다. 여전히 책상위에 쌓여있는 서류였지만 시간이 지날 수록 조금씩 줄어가더니, 4시 정각. 마지막 서류를 처리하는 쾌거를 달성했다.
-원장님. 회장님 오셨습니다.
울리는 인터폰으로 인해 퇴근시간은 조금 늦어졌지만 말이다. 어제 안온다 싶었더니 오늘 오는 군.
"그래."
대답이 끝나기 무섭게 문을 열고 들어오는 아버지의 모습에 난 습관적으로 경직되고 말았다. 그의 얼굴 가득 떠오른 흉흉한 분위기 때문일 것이다.
"오랜만이구나."
전혀 반가움이 들어있지 않은 차가운 눈동자로 말하는 것에 무슨 말을 하겠는가. 난 얼굴을 더 굳히고 입을 열었다.
"네, 안녕하셨어요."
무감한 표정과 말투로 그를 바라보자 그 역시 비슷한 표정으로 나를 바라본다. 아니, 저건 관찰하는 건가.
아버지는 말 없이 중앙 소파에 앉았다. 꼿꼿하게 앉아있는 그 모습이 그를 나타내는 것 같았다.
"그래. 너도 앉아라."
미소하나 없이 서있던 내게 앉으라고 한 아버지를 잠시 노려보다가 오른쪽에 앉았다.
"무슨 일이십니까?"
"애비가, 아들 찾아오면 안되는 법이라곤 없지."
그런 법은 없지만, 당신이 온 것 자체가 일이 없으면 안오겠지. 울컥 튀어나오는 말을 집어 삼키며 그를 보았다. 곧 무슨 말이던지 꺼낼 것이다. 일주일 쯤 전에 내가 끊어버린 전화며, 엘에 관한 이야기..
"휴가는 즐거웠겠구나. 그래, 약혼에 대한 건 애비가 알아서 처리했다."
"네."
다시 조용한 분위기가 이어졌다. 아버지는 표정 없이 나를 바라봤다. 그리곤 이내 입을 열었다.
"네가 데리고 있는 '엘'이란 아이 말이다."
역시, 라는 생각이 먼저 들면서 아버지가 할만한 말에 대해 빠른 순간 스쳐갔다. 그러나 대부분 아버지가 조사한 엘의 정체나, 아니면 보호시설로 보내라는 정도였다. 아버지는 잠시 말을 끊고 나를 보더니 다시 입을 열었다.
"고향이나 성이 뭔지 알고 있느냐?"
".....모릅니다."
의외였다. 단 한번도 생각해보지 않은 것. 엘의 성.. 그리고 고향. 아버지는 더욱 차가운 얼굴이 되어 입을 열었다.
"아크아돈 그룹의 후계자다."
"......네?"
아크아돈 대학병원. 내가 있는 바이톤 대학병원의 유일한 라이벌. 그리고 최근, 어린 나이의 원장이 취임했다는 말이 있었다. 설마..
"아니, 원장이라는 말이 어울리겠구나. 현 원장, 엘."
다시 말을 끊고 나를 바라본 아버지는 잔인한 말을 다시 내뱉었다.
"그 아이는 기억을 잃은 적이 없다. 네가 출근해 있는 동안, 아크아돈에서 몇몇의 인사들이 다녀갔다고 들었다."
"........"
아무 말도 할 수 없어서 일어나서 창문을 바라봤다. 아버지가 나가는 소리가 들렸지만 고개를 돌리지 않았다. 26년간 단 한번도 울지 못했던 내 눈에서 눈물이 흐르고 있기 때문이었다. 대체 왜...
*
그 날은 집에 들어가지 않았다. ER야근하려던 카노스를 붙들어놓고 술을 진탕지게 마셔댔다. 눈을 뜨니 쓰린 속과 함께 익숙한 카노스의 집 천장이 보였다.
"카노스."
나직히 그를 불렀지만 어디서도 그의 대답이 들리지 않았다. 그제서야 일어나 옆을 보았다. 휘갈겨 쓴 듯한 그의 글씨가 보였다.
-엘뤼엔, 나 응급환자가 들어와서 출근해. 무슨 일인지는 몰라도 오늘 하루 정도는 쉬어라.
후, 쉴 순 없다. 쉬어봤자 갈 데도 사실 없다. 카노스 말고는 찾아갈 친구도 그렇게 많지 않으니까. 살짝 머리가 땡겨온다. 평상시보다 좀 마시긴 한 모양이지.
방 밖으로 나오자 카노스가 꺼내놓은 듯 내 휴대폰이 보였다. 아무 생각 없이 휴대폰 폴더를 열었다.
-집 부재중전하 086통
엘이 있은 후로 저장해놓은 집 번호. 확인을 꾹 누르고 휴대폰을 떨어뜨리듯 주머니 속에 넣었다. 어차피 사이즈도 같으니까 카노스의 와이셔츠를 꺼내입었다. 살이 좀 쪘나? 갑갑하군.
넥타이도 적당히 카노스 거에서 무난한 걸로 걸치고 빠르게 카노스의 집을 나왔다. 차는, 바로 집 앞에 주차되어있었다. 대리를 부른 건가. 아니면 카노스 녀석이 운전한 건가. 지끈 거리는 관자놀이를 꾹꾹 누르며 속력을 내서 병원에 도착했다. 적당히 주차하고 나오는데, 응급실 앞에서 약간의 트러블이 보인다.
"....씨발! 원장 나오라 그래! 원장새끼. 나오라고 하라고!"
"이곳에서 이러시면 곤란합니다. 강 사장님."
앞에서 난리를 치는 사람은 아크아돈 대학병원의 전 원장이자, 엘의 아버지였던 강 사장이었다. 카노스가 여유로운 얼굴로 그를 막고 있다가 걸어오는 날 발견하곤 눈을 부릅 뜬다.
"무슨 일이십니까."
뒤까지 걸어가서 살짝 내리깔아보며 말하자 강 사장은 뒤를 홱 돌아보았다. 시뻘게진 얼굴. 어떻게 이런 아버지 밑에서 그런 자식이 났는지. 도통 이해할 수 없는 일이다.
"너, 네가 바이톤의 원장이냐?"
"그렇습니다. 강 사장. 무슨 일이신지는..."
말을 채 마치기도 전에 비열한 웃음을 입가에 띠고는 내 얼굴에 주먹을 날린다. 사실, 어릴 때부터 왠만한 무술은 다 해둔 나로써는 가볍게 피할 만한 것이어서 슬쩍 피해버렸지만 말이다. 꼴사납게 바닥에 뒹구는 강 사장을 보며 간호사들은 '어머, 어머.' 거리고 있었지만 이미 내가 어떤 상태라는 걸 알고있는 카노스만큼은 날 붙들었다.
"쉬라고 했을텐데."
"쉬면 안된다. 내가 쉬면 어떤 일이 생기는 지 너야말로 알고 있을텐데."
카노스는 할말이 없는 듯 마음에 들지 않는다는 표정을 하고서는 고개를 돌리며 말했다.
"그럼 원장실로 들어가."
"그 전에, 해결 해야하지 않겠어?"
강 사장을 힐끗하면서 바라보자 카노스는 찡그리며 꼴사납게 넘어진 강 사장을 일으켜 세웠다.
"무슨 일이신지 말씀하시지요. 강 사장 같으신 분이 행동하신 일이 어떤 결과를 가져올지는 본인이 아실 터."
"내 아들. 내 아들 엘을 데려오시오. 감히, 남의 아들을..!"
"엘이 강 사장 아들이었군요. 몰랐습니다. 기억상실증을 앓고 있고, 제가 수술시 보호역을 맡아서 보호하고 있었을 뿐. 엘을 데려오도록 하겠습니다."
간호사에게 '안내하라'고 말한 뒤 다시 차로 이동하려고 하자 카노스가 내 어깨를 잡았다.
"괜찮겠어?"
"뭘. 부모가 보내달라니 보내줘야지. 그럼? 내가 엘을 부둥껴 안고 신파극이라도 찍으라는 말이냐?"
"그 딴건 상관없어. 나한테 중요한 건 너다. 너가 괜찮냐는 거야."
"됐다. 가서 엘이나 데려올테니, 너는 강 사장이나 진정시키고 있어."
"엘뤼엔!"
난 카노스의 부름을 무시하고 차로 향했다. 머리의 지끈거림이 더 심해졌다. 그렇게, 많이 먹지는 않았을텐데... 점점 눈앞에 흐려졌다. 이내, 눈 앞에는 아무것도 보이지 않게 되었다. 대체.. 뭐..지...?
*
-카노스의 장
"에, 엘뤼엔!"
내 눈앞에서 무너지는 엘뤼엔의 신형을 보며 재빨리 뛰어가서 그를 받아 안았다. 어제 얼마 마시지도 않고 잠을 자는 게 위험해보였다. 그래서 오늘은 쉬라고 했던 건데. 확실히 어디가 안좋았던 모양이군.
머릿속으로 떠오르는 최악의 병명들을 억지로 지우며 안아올렸다. 엘을 데려오는 건 조금 늦어도 된다. 아니, 정 바쁘면 전화로 오라고 해도 된다. 엘은, 기억을 잃지 않았으니까. 바보 자식!
"엘뤼엔, 정신차려봐. 엘뤼엔!"
기억을 잃었다는 건 알지만 계속 말을 걸었다. 잠시라도 아주 잠시라도 의식이 돌아온다면, 그건 더욱 위험한 상태기 때문이다. 단순한 과로 때문이라면 상관없지만.. 자꾸 떠오르는 위험한 병명들.
그리고, 나만 유일하게 알고 있는 엘뤼엔의 몸 상태. 이 녀석은, 아주 아주 슬픈 병을 가지고 있다. '코르샤코프 증후군와 과잉 적응 증후군.' 첫번째는, 어느 일이 완성이 되면 잊는 것이다. 뇌에 화학적, 물리적 모두 포함하는 일정 이상의 충격을 받게 되었을 때, 그 이전의 일을 기억하지 못하는 것이다.
그리고 과잉 적응 증후군은 쉽게 말하면 일 중독증이다. '코르샤코프 증후군' 때문에 생긴 것. 자신이 잊어버렸기 때문에 그 상실감을 메우기 위해 일에 매달리기 시작한 것이다.
엘뤼엔 녀석이 가장 행복한 날, 코르샤코프 증후군에 걸렸다. 끔찍한 차사고와 함께. 비오는 그날이 자꾸 떠올랐다. 나는 빠르게 뛰어가 ER 침대에 눕혔다.
"워, 원장님이시잖아요! 카노스 과장님!"
"시끄러워! 얼른 검사 준비를 하라고!"
내 반말에 ER 담당 수간호사가 놀라는 소리가 들려왔지만 나는 동공과 맥박을 확인했다. 큰 문제는 없어보인다. 대체 왜.. 그날의 그 사고는 끝난 것 아니었나?
설마- 엘 때문에?
아닐 것이다. 일단 정밀검사를 해보아야 한다.
"카노스 과장님. CT가 준비되었습니다."
수간호사의 목소리가 들렸다. 난 고개를 끄덕이고 엘뤼엔을 이동침대로 옮겼다. CT실에 들어갔다 나오고 피를 뽑고. 아직 결과가 나오려면 시간이 좀 걸린다.
난 조용히 떠오르는 그 날을 생각했다. 눈을 감으면 그날의 빗소리가 들렸다. 난 그날도 야근을 하고 있었다. 그 때까지만 해도 사람들과의 소통이 제법 괜찮던 엘뤼엔은 대학원생이었다. 학교에 좋아하는 사람이 생겼다며 취한 얼굴로 피식- 웃던 그가 생각나서 환자가 없는 ER 한 구석의 내 자리에 앉아 나 역시 따라 웃고 있었다.
그 때, 내 전화기가 울렸다.
-엘뤼엔.
역시 친구다. 라는 생각이 들어 전화를 받았다.
"응."
"카노스. 나 성공했다."
기쁨을 감추지 않던 목소리가 내 귀에 생생했다. 지금보다는 덜해도 자라온 환경상 누구에게 자신의 감정을 알리지 않았던 그였다. 난 뻔히 무슨 일인지 알 수 있었다. 하지만 그 녀석이 팔불출로 자랑하는 목소리가 듣고 싶었다. 그래서 되물었다.
"뭐가?"
그러자 어김없이 그 녀석의 흥분한 목소리가 들려왔다.
"나 말이다. '엘'과 사귀기로 했어. 오늘부터 1일이야. 귀여운 표정으로 끄덕이는데, 오늘 세상이 무너진다 해도 불행할 것 같지 않더라. 처음으로, 그렇게 행복한 기분이었다. 내가 저번에 '엘' 얘기 했지? 우리대학교에, 있는 신입생."
그렇게 주절주절하는 엘뤼엔의 목소리가 그렇게 듣기 좋았다. 세상의 어떤 음악보다 부드러웠으며 달콤했다. 그의 행복이 내 텅 빈 마음에도 가득 차오는 것 같았다.
"그래. 그래서 지금은 어디냐? 집으로 가는 중이야?"
"응. 엘 데려다 주고-"
그게 끝이었다. 엘뤼엔의 목소리가 중간에 끊기면서 콰앙- 하는 소리와 함께 전화가 끊겼다.
"엘뤼엔!!!!!!!!!"
난 그 날도 그렇게 그의 이름을 불렀다. 근처의 도로를 달리고 있었는 지 엘뤼엔은 우리 병원으로 후송되었다. 나는 유일한 ER에 있던 전문의여서 아는 것이고 뭐고 상관없이 메스를 들었다. 상태는 심각했다. 머리가 깨져서 피가 나오고 두개골에는 심각하게 금이 가있었다. 조금만 더 힘을 받았으면 아마 깨졌을 것이다. 팔, 다리 그 어느 것도 상태가 괜찮은 게 없었다.
늑골이 부러져 폐를 찔러서 폐 안에 물이 차오르고 있었다. 재빠르게 가슴을 열었다. CT결과보다 더 빨리 나오는 X-ray 결과를 우선으로 개복했을 정도로. 그의 백금발 머리카락은 검붉은색 머리가 될 정도였고, 그의 얼굴 어느 것도 그를 떠오르게 하는 것은 없었다.
하지만 분명 보고를 받았을 것임에도 단 한번도 그의 부모는 수술실 앞은 물론이고, 병실에도 찾아오지 않았다.
최고급 VIP 1인실에 넣어준 것으로 자신이 할 일을 마쳤다고 생각하듯이.
그 녀석은 꼬박 1주일 반을 눈을 못떴다. 수술은 세명의 전문의가 교체되면서까지 이루어졌다. 메스를 잡았던 모든 전문의들은 혈압이 낮아져서 언제 죽을 지 모르는 상태라는 걸 유념하고 원장에게 가서 수술 동의서를 받았다.
하지만 이 녀석의 생명력은 끈질겼다. 위험한 고비는 몇번 있었지만 결국 수술을 무사히 마칠 수 있었고, 1주일 반이 지나고서야 눈을 떴다.
그 녀석이 눈을 떴을 때는 새벽녘. 새벽 3시가 좀 넘었을 때였다. 그 때, 그의 곁에 있던 건 나 하나 뿐이었다. 우습지 않은가. 고작 2년 동안 본 내가 그 녀석에 눈을 떴을 때, 본 단 한명의 인간이라니.
하지만 그 녀석은 그저 피식 웃을 뿐이었다.
그리고 내게 말했다.
"아버지가 고용한 간병인인가? 수고 했습니다. 그만 가보셔도 됩니다."
당연히 엘도 기억을 못했다. 나와 친했던 3년간의 기억은 사라졌다. 그 이후로 1년 반이 지났다. 엘은 끔찍한 모습으로 왔다. 사실 수술이 마치고 -엘뤼엔에 비하면 그다지 대단한 수술도 아니었다.- 엘은 얼마 안 있어서 깨어났다. 날 보더니 대뜸 하는 말이.
"엘뤼엔 선배 친구죠?"
"그래. 카노스라고 하지."
"엘뤼엔 선배가.. 나를 잊었어요. 난 엘뤼엔 선배가 좋은데. 아직도 이 마음이, 사라지지 않는데. 조사해봤더니 사고로 기억을 잃은 거라면서요? 그럼 다시 되찾을 수도 있을 거예요. 카노스 선생님이 좀 도와주세요. 네?"
엘은 불편한 그 몸으로 가운에 손을 찔러넣고 있는 나에게 무릎이라고 꿇으려는 듯 자세를 취했다. 난 당황해서 그를 잡아 다시 눕혔다.
"알았어. 엘뤼엔이 기억을 다시 찾는다면 나에게도 좋은 일이지. 뭘 어떡할까?"
엘은, 지금까지 아주 많이 조사한 듯 내가 할 일을 읊어주기 시작했다. 내가 그걸 혼자서 다했냐고 하니까, 자신이 한게 아니라고 하며 웃었다. 아주 슬프게.
엘의 신분은 나도 예상치 못한 것이었다. 엘뤼엔이 내게 왜 말하지 않았는 지도 알 것 같았다. 아크아돈 대학병원의 후계자. 아마 엘뤼엔의 아버지는 엘을, 죽이려고 할 것이다. 강 사장은 그를 지킬만큼 강하지 못하다. 아크아돈의 계열사의 사장일 뿐인 강 사장은 그저 하수인일 뿐이다.
그의 위에 있는 자는, 엘뤼엔의 아버지보다 더하면 더했지. 절대로 덜하지는 않은 자다. 유카르테 란느 솔트. 이곳에서 국회의장의 직위를 갖고있는 자다. 하지만 그도, 그 역시도 누군가의 하수인일 뿐이다. 누굴까. 수면위에 드러나지 않은 자. 그가 엘뤼엔과 엘을 노리고 있다.
엘과 엘뤼엔은 처음에 대학에서 만난 게 아니다. 고아원에서 만났다. 엘도 엘뤼엔도 모두 양자. 그리고 그들이 서로 라이벌이라고 불리우는 그룹의 후계자가 된 것이 그냥 우연일 뿐일까?
*
-엘의 장
카노스 선생님의 전화를 받았다. 엘뤼엔 선배가, 쓰러졌단다. 옷을 갈아입고 나올 새도 없이 뛰쳐서 엘뤼엔 선배의 집을 나왔다. 어제, 선배는 집에 들어오지 않았다. 구석에 앉아 울었다. 저번처럼 엘뤼엔 선배가 오지 않을 거라는 것을 알면서도. 계속해서 앉아서 울었다.
아버지가, 나의 신분을 그에게 흘렸다고 했다. 눈앞이 캄캄했다. 아직, 아직인데. 아직 그의 기억을 되돌리지 못했는데. 3년이 지난 지금도 잊혀지지 않았다. 포기할 수 없었다. 그동안 나는 이중인격이 되었다. '다크'라고 불리는 나의 또다른 인격은 내가 이성을 잃었을 때 나타났다. 화가 나던, 그립던.
'다크'는 냉정했고 차가웠다. 하지만 유능했다. 그래서 아버지는 나를 때려 '다크'를 나타나게 했다. 그리고 매일 혼냈다. '다크'가 본주가 되라고. 하지만 '다크'는 그러지 않았다. 오히려 나타날 때마다 아버지를 반쯤 죽여놓았다.
난 그의 도움을 받았다. 계획을 세우는 일도. 사고를 내는 일도. 그렇게 계획을 세우면서 모은 정보 중에는 엘뤼엔의 사고에 대한 자료도 있었다. 그 사고는 '누군가'가 배후에서 일으킨 것이었다. 하지만 그 '누군가'는 아버지의 이름으로도 알아낼 수 없었다.
난 계획을 실행시켰고, 카노스 선생님에게 도움을 요청했다. 난 그 날이 잊혀지지 않았다. 내가 엘뤼엔 선배에게 고백을 받은 그 날과 콩닥거리던 그 마음이.
사실 엘뤼엔 선배를 본 것은 그 전이라고 했다. 엘뤼엔 선배는 나를 그 때부터 좋아했다고 했다. 하지만 대학에서 보고서야 자신의 마음을 알았다고 했다.
내가 대학교 1학년 때, 반짝반짝 빛나는 엘뤼엔 선배가 있었다. 그 선배는 대학원생이었고 월반해서 곧 졸업이라고 했다. 하지만 고백할 용기가 없었다. 우연찮게 4학년이었던 이카나 선배의 심부름으로 엘뤼엔 선배에게 프린트(자료였던 것 같다)를 전해주려고 갔는데, 그만 넘어져서 프린트를 모두 공중에 날려버렸다.
내가 당황해서 그것을 다 줍고 있는데 엘뤼엔 선배는 무표정으로 다가와 그것을 함께 주워주었다. 난 엘뤼엔 선배가 화났다고 생각했다. 자신의 프린트를 날려버려서.
선배는 프린트를 내게 건네면서 말했다.
"다 줍진 못한 것 같구나. 중요한 것 같는데 괜찮냐?"
나는 그만 울고 말았다. 엘뤼엔 선배의 다정함에. 그리고 미안함에. 엘뤼엔 선배는 조금 당황한 눈치였다. 잠시 나를 보던 선배는 나를 자신의 품에 깊숙히 안고 말했다.
"울지마라. 괜찮으니깐 울지마라."
창피한 것도 모르는 지 날 잡고 놓아주지 않던 엘뤼엔 선배는 내가 울음을 그치자 천천히 날 일으켜세웠다.
"네가 엘이구나. 오랜만이다."
난 선배를 알지 못했다. 이곳에 와서야 선배를 보았고 선배를 좋아하게 되었다. 하지만 선배는 당연한 듯이 말했다. 내 표정이 어김없이 드러났는지 -라피스가 항상 그랬다. 얼굴에 다 드러난다고- 선배는 싱긋 웃으며 말했다.
"역시 너무 어릴 때 봐서 기억하지 못하는 구나. 약속을. 그럼 다시 인사하도록 하지. 내 이름은 엘뤼엔. 엘뤼엔 크리노 루사테 라고 한다. 엘."
"네, 아, 안녕하세요. 전 의학부 1학년 엘입니다."
허둥대면서 인사하자 엘뤼엔 선배의 얼굴엔 부드러운 미소가 그려졌다. 그게 첫만남이었다. 엘뤼엔 선배는 어느 날, 평상시와는 다른 흥분한 표정으로 왔다.
아마, 내가 동급생인 라피스에게 고백을 받았다고 소문이 퍼진 날이기도 했다.
"엘. 너, 그 라피스란 동급생을 좋아하냐?"
잔뜩 붉어진 표정으로 묻는 선배는 진지한 표정으로 물었다. 난 고개를 저었다.
"이미 거절했는 걸요. 라피스는 그냥 친구일 뿐이에요."
그러자 선배는 날 진지한 표정 그대로 날 바라봤다. 잠시 나를 보던 엘뤼엔 선배는 약간 잠긴 목소리로 물었다.
"난?"
"서, 선배는.."
난 말문이 막히고 말았다. 내가 선배를 좋아한다고 하면 선배가 혐오스럽다고, 싫다고 생각하진 않으련지.
하지만 선배는 내 대답을 듣고 싶지 않았던지 자신이 먼저 입을 열었다.
"난, 너를 좋아한다. 올해로 꼬박 18년이 되었지. 너와 다시 만날 날을 고대했다. 하지만, 네가 좋다는 사람이 생긴다면 이 마음 접을 수 있을 거라 생각했다. 하지만, 접을 수 없었다. 너에게 내 마음을 알리고 내 품에서 널 행복하게 해주고 싶었다. 넌, 나를 어떻게 생각하지?"
선배는 약간 빠른 어조로 말을 했다. 그리고 질끈 두 눈을 감았다. 난, 그런 선배의 모습을 보자 충동을 참을 수 없었다. 천천히 들고 있던 책을 놓고 그의 입술에 키스했다. 천천히 눈을 감았다.
눈을 뜨면서 입술을 떼자 놀란 눈으로 바라보는 선배의 표정이 보였다.
"사랑합니다. 선배. 나 역시도. 선배만큼은 아니지만, 선배를 이곳에서 본 그 순간부터."
나와 선배의 행복은 잠시 뿐이었다. 그날 저녁, 선배는 그 악몽과도 같은 사고를 당했다.
*
-엘뤼엔의 외전장
눈을 뜨기 싫었다. 이런 건 처음이었다. 단, 한번도. 이런 적이 없었다. 멀리서 코를 간질이는 익숙한 약 냄새가 가득한 병원. 내가 왜 이곳에 있는 지도. 천천히 얼굴이 하나 떠올랐다.
물을 넓고 길게 펴 붙인 듯한 푸른 머리카락, 사파이어를 둥글게 깎아내 박아 넣은 듯한 푸른 눈동자. 엘이었다. 하지만 내가 알고 있는 것보다는, 조금 작은 엘이었다.
기껏해야 3살. 4살. 아니, 5살 정도. 그래, 내가 엘을 처음 만났을 때였다. 지금까지 잊고 있었다.
난 다른 애들과는 달랐다. 난, 유일하게 부모를 기억하고 있는 아이였다. 그래서 보육교사들도 날 함부로 대하지 못했다. 내 나이 8살. 나는, 세상을 움직이는 자의 아들이었다. 하지만 아무것도 가지지 못한 아들. 그래서 더 위험한 자.
아직은 미성년자라서 이곳에서 보호하고 있지만 내가 어딘가로 입양되어 간다면 날 보호해줄 수 있는 곳으로 가야했다. 내 아버지보다 더 커다란 권력을 가진 자에게로.
아마, 그래서 더 반항적이었던 것 같았다.
하지만 보육교사가 안고 있던 푸른 머리의 아이가 비틀비틀 나에게 걸어왔다. 막 걸음마를 시작한 듯 서툴고 위태로웠다. 난 내 앞에서 비틀거리는 그 아이를 나도 몰래 붙들고 있었다.
보육교사가 불안한 얼굴로 날 보았다. 내가 아이에게 불량한 짓이라도 할까봐서 인가?
피식- 차가운 미소가 새어나왔다. 보육교사가 움찔하는 것이 느껴졌다.
"이름이 뭐지?"
"..티..티나."
보육교사는 벌벌 떨면서 대답했다.
"너 말고. 얘."
보육교사는 약간 붉어진 얼굴로도 무서운 듯 더듬대며 대답했다.
"에, 엘."
"엘이라. 엘."
가슴 속에서 뜨겁게 퍼지는 듯한 이 느낌이 아주 불쾌했다. 내가, 내가 아니게 되는 것 같았다.
하지만 그 뒤로 나는 엘을 보지 못했다. 내가 먼저 바이톤 그룹의 회장의 아들도 입양 되었기 때문이다. 그 뒤 보육원을 다시 찾았지만 그는 볼 수 없었다. 어디엔가로 입양을 갔다고 들었을 뿐이다.
대학생이 되서야 다시 만날 수 있었다. 엘은, 아크아돈 대학병원의 원장 아들이었다.
나는, 아크아돈 그룹의 회장인 유카르테 국회의장의 주인의 아들이었다. 그저 '어둠의 주인'이라는 이명(異名)으로 불릴 뿐. 본명은 가족들도 알지 못했다. 어머니 조차도 '너는 어둠의 주인의 자식이야.'라고 했을 뿐.
드디어 생각이 났다. 내가 잊어서는 안될 사람을, 잊고 있었던 사람을.
엘.
난 눈을 떴다.
*
내가 눈을 떴을 때, 가장 먼저 보이는 것은 푸른 머리카락이었다. 푸른 머리카락이 오른쪽에 가득히 있었다. 침대에 엎드려서 자고 있는 엘을 보며 미소가 새어나왔다.
엘.
내가- 사랑하는 사람.
'내 것.'이다. 분명.
눈물이 툭툭 떨어졌다. 내가 그를 잊고 있었다. 내가 그를 슬프게 했다. 내가 그를, 아프게 했다. 수십번 다짐 했었다. 분명히. 수십번, 수백번 다짐했었다. 그를 아프지 않게 하기로.
하지만 결국 그를 아프게했다.
"미안하다. 엘. 미안하다. 사랑한다, 엘."
욱신거리는 오른 손을 들어 그의 머리위에 살짝 얹으며 중얼거렸다. 이 아이는 기억 상실이 아니었다. 그가 했던 행동들 모두 무엇인가 부자연스러웠다. 그래, 드라마 속의 기억상실증을 연기하는 배우들처럼. 카노스가 불렀을 때, 별로 중요하지 않은일로 부른 것에 이상하다고는 생각했다. 그리고 내가, 엘을 보호로 받아들인 것도. 하지만, 그 동안은 잊고 있었다.
내 목소리가 들렸는 지 움찔거리며 눈을 뜬 엘은 동그란 얼굴로 날 바라보다가 이내, 눈에 생기를 잃었다. 내가 기억을 되찾지 못했을 거라고 생각한 건가.
피식-
내가 미소를 짓자 약간은 놀란 얼굴로 날 바라본다. 잠시 놀려줄까 생각했었지만, 됐다. 지금은 우리끼리 툭닥거릴 때가 아니다. 우린, 지금 새로운 위기를 맞았다. 우리끼리 사랑한다고 끝날 상황이 아닌 것이다.
"엘. 미안하다. 널 잊어서. 정말, 미안하다. 사랑한다. 엘."
"...선..배..?"
고작 기억으로 이루어진 사랑은 아니었다. 내 가슴으로 끌리는 게 있었으니까. 있을 수 없는 일을 보는 사람 처럼 눈을 동그랗게 뜨고 날 부르는 엘을 향해 오른손을 뻗었다. 링겔 선이 상당히 거슬렸지만 상관없었다. 그의 머리에 손을 얹고 부비적거려줬다.
"이제, 기억을 찾은 거냐? 냐하하하~"
"카노스. 고맙다고 해야하는 건가?"
카노스는, 나의 아버지였다. 정확히는 카노스 안에 있는 또 다른 인격이었겠지만. 카노스 본인은 나의 친구로써 내 옆에 있었지만 나의 아버지이자, 이 세계를 음지에서 다스리는 자는 그 안에서 날 바라보고 있었다.
"냐하하하~ 아들. 그러지 말라며~ 뭐, 이제 며느리가 되는 건가? 하이루, 엘군."
"저리 꺼져버려. 어디 나사가 하나 빠진 것 같군. '어둠의 주인'이."
내 말을 들은 카노스는 조금 심각한 얼굴을 하면서 말했다.
"내가 네 친아버지는 맞지만, 내가 '어둠의 주인'은 아니야. 정확히 말하면 '어둠의 주인'이었지. 그건, 이 세계의 음지를 다스리는 자의 총칭. 현재의 어둠의 주인은 엘뤼엔, 너의 양아버지이다. 지금 그는 아크아돈 그룹과 바이톤 그룹. 두개 다를 좌지우지 하려하고 있어. 두 그룹은 이 세계에서 1,2위를 다투지. 그 그룹 두개가 통합된다면 아마 대부분의 시설들은 다 그 그룹으로 향하게 될거야. 정부조차도."
날카로운 카노스의 말에 난 고개를 끄덕였다. 그정도는 예상했다. 하지만 카노스가 현 '어둠의 주인'이 아니라는 말에는 좀 놀랐다.
"지금 네가 '어둠의 주인'이 아니라면... 설마 뺏긴거냐?"
"맞아. 내가 이곳 병원으로 온 시기부터 뺏겼다. 유카르테 녀석과 카류드리온 녀석의 합작이었지."
"카류드리온? 아버지가?"
"그 녀석은 자신의 양아들을 죽이는 것조차 망설이지 않았어. 내가 널 보호하라는 명을 내려놓지 않았더라면 넌 아마 병원에 실려오지도 못했을 거야. 내가 '어둠의 주인'을 뺏기기 전에 내려놓은 명령 덕에 네가 산거지. 냐하하하~"
"뿌득. 시끄러워. 너 같은 것 누가 아버지로 인정 한대냐? 엘. 지금부터 내 옆에서 떨어지지 마. 알았지?"
"하..하지만, 선배는 지금.."
"그냥 이름으로 부르라고 했을텐데? 엘."
내가 씨익 웃으면서 엘을 바라보자 엘은 빨갛게 된 얼굴을 푹 수그리고 중얼거리듯 말했다.
".....엘뤼엔."
"좋아. 카노스, 넌 어떡할래?"
"너야 말로 병원에 꼼짝 말고 있어. 일단 이 병원 주위엔 내가 방호벽을 쳐놨으니까 아마 조금 버틸만 할거야. 그 몸으로 싸우러가겠다는 말은 아니겠지? 뒷백이 아무것도 없는 녀석이."
"...."
할말이 없었다. 지금 움직이겠다는 것은 어떻게 보더라도 자살행위. 게다가 난 어느 것도 무기가 없었다. 원장 직위야 카류드리안- 나의 양아버지가 거둬가면 그만인 직위.
"여기 있어. 단 하나 뿐인 나의 후계자여. 내 자식은 내가 지킨다. 냐하하하~"
"카노스. 죽지마라."
"걱정마. 냐하하하, 내가 싸움에서 진적은 없거든."
카노스는 여유롭게 웃으며 병실을 나갔다. 엘은 뒤에서 살포시 날 안았다.
"..엘뤼엔, 걱정 하지..마..."
"걱정 안한다. 저런 녀석 죽던 말던."
하지만 마음 한 구석에서는 ...빌고 있었다. 신이시여. 도와주소서. 라고. 무신론자인 나에게 가장 우스운 마음이었지만.
*
-카노스의 장
엘뤼엔에게는 걱정하지 말라고 일러뒀다. 하지만 생각보다 상황은 절망적이었다. 나에겐 충성을 맹세한 예전의 부하들 백여명 뿐. 그는 날 잡으려고 혈안이 되있었다. 왜냐하면 내가 살아있음으로, 정식승계를 받지 못한 그가 사용할 수 없는 능력들이 있었기 때문이다.
그 중 하나가 바로 이, '파멸의 능력.' 어둠의 주인에게 배반한 자를 전 어둠의 주인의 목숨을 버려서 죽여버리는 마법이다. 이 세상에 내려오는 단 하나의 마법. 왜냐하면 과거 마법의 시대였던 시대부터 주신께 그 자격을 위임을 받아 내려온 균형의 자리였기 때문이다. 지금 이 능력이 6백년이 지나 이 땅에 다시 강림한다.
지금 오기 전에 엘뤼엔에게 '현재의' 어둠의 주인 자격을 넘겼다. 그 녀석이 혹여 그 마법을 피해 나를 죽인다 손쳐도 엘뤼엔을 건들지 못한다.
엘뤼엔을 만나러 가기 전에 나는 미리 편지를 써뒀다. 이기든 이기지 못하든 아마 그를 보지 못할 것이다. 다시는. 나의 아들을 다시는.
-엘, 엘뤼엔. 행복해야 돼. 엘뤼엔, 내가 아버지로써 주는 처음이자 마지막 선물이다. 네가 기뻐했으면 좋겠구나. 카류드리안은 내가 어떻게든 처치하겠다. 너는 새로운 '어둠의 주인'으로 이 땅이 균형자가 되어라. 냐하하하~
짧은 내용의 글을 대충 접어 병실 바닥의 틈으로 끼워 넣었다. 끝이 보이지 않을 즈음, 난 일어나서 달렸다.
"수행인들이여, 움직인다."
짧은 말에 내게 충성을 맹세했던 백인대 중 오십명이 움직이기 시작했다. 나머지 오십은 엘뤼엔을 위한 것이다. 그 녀석이라면 이걸, 불릴 수 있을 것이다.
그렇게 나는 죽으러 갔다. 바보아들, 행복해라. 어린 아들의 행복을 빌며.
*
바보 녀석. 지가 그렇게 하면 내가 감동의 눈물을 흘리기라도 할 줄 알았나보지. 엘에겐, 말하지 않을 것이다. 결혼 하기도 전에 시아버지(?)가 죽었다면 기뻐하겠는가.
엘 모르게 카노스가 병실 바닥으로 넣은 쪼가리를 품 속에 숨겼다. 엘은 떨고 있었다. 내가 아는 단 하나의 사실. 엘은, 현 어둠의 주인의 노리개였다. 사실 그래서 내 손으로 없애고 싶었다. 카류드리안 녀석을.
하지만 나는 힘이 없었다. 씁쓸한 기분이었다. 내가 사랑하는 사람을 지켜주지 못하는 것. 난 조용히 엘을 품에 안았다. 그리고 나직히 말해주었다.
"엘. 나 강해지겠다. 강해져서, 널 지켜주겠다."
엘은 영문도 모르고 고개를 끄덕이는 것 같았다. 그 날 저녁, 나의 아버지 카노스와 반란자가 모두 죽었다.
카류드리안은, 나의 형이었다. 카노스는 나를 위해 살자(殺子)의 죄를 범한 것이다. 바보 아버지.
내 곁에 남은 단 하나의 가족, 엘만은 내 손으로 지켜 보이겠어. 그러니까 하늘에서 보라고. 난 아버지가 아니라 엘을 위해서 강해질거야. 그리고 다시는 이런 일이 벌어지게 하지 않겠어. 다짐하지. 이 다짐 깨져서 하늘에 올라갔을 땐, 아버지가 날 벌해줘. 신이 아니라, 아버지가.
내 품에 있는 단 하나의 사랑만을 지키겠어. 엘, 정말로 사랑한다.
첫댓글 우왛와아오아ㅜ앙!!!!!!잣니뮤ㅠㅠㅠㅠㅠㅠㅠㅠㅠㅠㅠㅠㅠ이거슨 레알이네여ㅠㅠㅠㅠㅠㅠㅠㅠㅠㅠ제가 생각했던 내용보다 뭐랄까 더 심오해ㅠㅠㅠㅠㅠ으헝헝헝 잣님은 역시 신내림을 받은 손이셨구ㅠㅠㅠㅠㅠㅠㅠㅠㅠ리퀘 받아주신거 감사합니다!!!
개..갠찮으시냐며... 조..좋으시냐며...; (걱정)
허어어어어억..스크롤 바의 위엄인가요...
하하하; 운영자님들이 다들.. 하나로 올리라고 하셔서여;; 좀 길져...?;
검사 완료:)
감사:Q
아..역시! 엘뤼엘...
우와..뭔가 복잡 미묘 새콤 달콤 이랄까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