제 목 : 증권투자를 하게된 동기. -유선웅 친구의 죽음- (7~7)
♥. 친구 유선웅의 죽음
-. 충남대 부속병원 입원
유선웅은 1996. 또는 1997. (?)년 늦가을에
목과 목구멍의 치료를 위해 충남대 부속병원에 약 1개월 이상, 입원하여 수술받고 치료를 한적이 있다.
나의 집과 병원까지의 거리는 약 700m 정도 거리가 된다.
매일 아침 출근하기 전,
병실을 찾아 가 병환의 차도를 보고 쾌유를 위한 희망적인 얘기들을 나누며 문안을 했다.
-. 마지막 목소리
이후,
경산조폐창에서 근무 할때인 1998. 11. 20(목). 퇴근 시간을 30 여분 앞두고,
대전 유선웅 친구로부터 전화가 왔다.
평소에 내가 다섯번 정도 안부 전화를 하면, 한번 정도 전화가 오는데,
수화기를 드니 유선웅의 목소리였다.
"이 동지(李 同志) ! " 하고는 서로가 안부를 간단히 주고 받았다.
그리고 " 이번주 토요일 대전으로 올라 오나 ? , ", "응 갈 계획이네, 왜 그러나 ? "
"올라 오면 연락 주게 소주나 한잔 하자구 ! " , " 그렇게 하지" 하고 전화를 끊었다.
-. 경산조폐창 신은행권실 화재발생
다음날인 1998. 11. 21(금). 퇴근 30분 정도 후,
관리처 산하에 6개부서를 둔, 부처장의 직책에 있던 나는 서무부 서무과 회식 자리에 갔다.
앉자 마자
"조폐창에 불이 났다." 라고 하는 긴급한 전화가 왔다.
그때는 신은행권 기계시설(약 250억원)이 독일로부터 도입되어 시험가동중에 있고,
화재의 원인은
그때 신은행권 기계실에 닥트공사를 하는중인데 공사를 담당하는부서가 서무부 관재과이다.
퇴근후, 공사 작업현장에 공사감독 입회자가 작업이 끝난 후,
환복(換服)을 하기위해 자리를 뜬 사이에
작업을 종료하고 퇴근을 해야 될 용접공이 허락도 없이 용접을 시도하다가
시설을 맡은 업체의 용접공이 외부닥트 용접을 시도하다가
불길이 닥트를 타고 신은행권 시설이 있는 내부로 순식간에 들어오면서 화재가 발생되었다.
용접공은 공사 직원이 아니고 시설을 맡은 용역업체의 직원이었다.
경산은 물론 대구시내에 있는 소방차량이 20 여대가 긴급 동원되어 불길은 잡히었으나
신 시설은 윗부분이 녹아버렸다.
-. 밤 11:30분 경으로 기억,
화재사건으로 인하여 창 당직실은
비상연락망을 통하여 비상사태 발령을 내리니 직원들은 귀가하자 마자 긴급히 창으로 돌아 왔다.
창내는 온통 난리가 난 상태였다.
그러한 가운데 대전에서 긴급 전화가 왔다.
유선웅이 공주에서 대전사범학교 동기회식을 마치고 밤에 본인의 차량을 운전하여 유성으로 돌아오던중
시멘트 축조 다리(교량:橋梁)의 난간에 부딛쳐 사망했다.는 것이다.
나는 인쇄처 공장 신은행권 시설이 화재발생된 부서 부책임자인데
이같은 화재를 당한 입장에 도저히 가장 가까운 친구의 죽음에
대구에서 대전, 그리고 유성까지 상가를 찾아 가볼 수가 없는 처지였다.
-. 참으로 아까운 친구
약 1개월 정도, 화재사건 수습처리를 위해 대전 집을 갈 수 없었다.
친구 유선웅,
그는 증권 투자에서 이익을 본 이후, 아니 처음부터 증권 투자에 손을 대지 않았을 경우,
혼란된 사회에서 분단된 한반도에서
나름대로 옳바른 일을 솔선수범하며 좋은일을 많이 남기지 않았을까 ?
또한 현대사회는 인간의 수명이 연장되었는데
지금까지 살아서 더 훌륭한 일을 하고 있지 않을까 ?
아까운 친구, 아쉬움이 많이 남는 동지가 아니었던가 ?
나는 약 1개월 후, 경산에서 대전으로 올라왔다.
그리고 유성면 복용리(새터) 마을에 계시는 그에 미망인과
두째 아들 유진만(劉鎭滿), 외동딸 유연주(劉姸珠)등 가족을 찾아 위로를 드렸고,
큰 아들 유진욱(劉鎭旭)군과 같이
친구의 유택(幽宅)이 있는 연기군 금남면 공원묘지를 찾아 명복을 빌었다.
삼가 고인의 명복을 비는 마음이 아프다.
2011. 10. 25(화). 寶文山 아래에서 朋村 李明鍾
추이 :
-. 고인이되신 유선웅 친구의 미망인을 2001. 8월 어느날
서대전 삼성 아파트 정문 앞 버스 정류장에서 우연히 잠깐 뵙고 그를 기리는 글을 써서
미망인과 아들에게 이메일로 보내 준적이 있는데, 그도 나도 삭제를 해서 찾지를 못하고 있지요.
-. 큰아들 유진욱(44세)군은 외국어대학교 영문학과 졸업 후, 모(?)회사에 근무하며
내가 한국조폐공사 서울 사업소장으로 재직하던 1999년도에
중국, 일본 등 해외 출장을 다녀와서는 운명하신 아버지 생각이 난다고 하면서
현지에서 구입한 술을 들고 두번 나에게 찾아온적이 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