舍南舍北皆春水(사남사북개춘수) 집 남쪽과 북쪽은 온통 봄물이라
但見群鷗日日來(단견군구일일래) 보이는 건 날마다 떼 지어 오는 갈매기들뿐이라오.
花徑不曾緣客掃(화경부증연객소) (찾아오는 이 없으니 평소에) 꽃잎 떨어진 길은 쓸지 않고 그냥 두고 보았는데
蓬門今始爲君開(봉문금시위군개) 오늘은 봉문을 열어 (반갑게) 그대를 맞네.
盤飧市遠無兼味(반손시원무겸미) 시장이 멀어 차린 건 변변찮고
樽酒家貧只舊醅(준주가빈지구배) 형편이 이렇다보니 술은 묵은 탁주뿐이네.
肯與鄰翁相對飮(긍여린옹상대음) 이웃집 노인과 같이 마셔도 좋다면
隔籬呼取盡餘杯(격리호취진여배) 울타리 너머로 불러서 남은 술 마저 마십시다.
이 시는 당 숙종 2년(761년)에 지은 시이다. 두보가 안록산의 난을 피하여 떠돌다가 錦官城[쓰촨성(四川省)의 성도인 청두시(成都市)의 옛 지명] 교외에 친구들과 친척들의 도움으로 완화초당(浣花草堂)을 짓고 정착하여 1년이 흐른 무렵이었다. 완화초당으로 이름을 지은 이유는 이 초당을 완화계(浣花溪)를 남으로 내려다 보는 강기슭에 지었기 때문이다. 지금의 완화계(浣花溪)는 강폭이 몇 미터 안 되는 작은 강이지만 당시에는 수량이 제법 많은 편이었는지 두보는 자신이 사는 동네를 두고 강촌(江村)이라는 시를 짓기도 했다. 갈매기가 정겹게 서로 어울리며 나는, 강이 굽이쳐 흐르는 강마을에서 어린 아들은 낚시 바늘을 만드느라 부산을 떤다고 묘사하기도 했다.
두보의 시를 보면 상당히 구체적이고 실제적인 묘사를 하는 경우가 많은데 이 시에서도 그것을 찾아볼 수 있다. '집의 남쪽과 북쪽은 모두 봄물(舍南舍北皆春水)'이라고 적었는데 실제로 완화초당은 남쪽으로는 S자로 굽이쳐 흐르는 완화계(浣花溪)를 내려다 보고 있고 북쪽으로는 집에 인접해서 연못이 여럿 있어서 집의 남쪽과 북쪽이 모두 온통 물인 것이다. 2연에서 '보이는 것은 갈매기들 뿐'이라는 대목과 3연의 꽃비가 내려서 길을 덮어도 찾아오는 이가 없어서 '꽃잎을 쓸지도 않고 두고 보았다'는 대목에서, 객지에 새로 정착한지 일년 남짓한지라 찾아오는 발길이 거의 없어서 적적함을 알 수 있다.
그러던 차에 반가운 손님을 맞는 모습을 '오늘에야 비로서(始) 봉문(쑥대로 대충 엮어서 만든 문)을 열고 그대를 맞는다'고 적고 있다. 초당을 짓고 정착한 후 1년이 되도록 두보를 방문하지 않았던 것을 보면 이 시에서 두보를 찾아온 손님은, 자주 올 수 있는 금관성 인근에 있는 손님은 아니고, 비교적 멀리서 두보를 보기 위해서 찾아온 것으로 생각된다. 원고에 喜崔明府相過[최명부(崔明府)의 방문을 기뻐하며]라고 부제를 적어 놓은 것을 보면 손님은 明府(현령)의 직위를 가지고 관직에 있었던 최(崔)씨 성을 가진 사람인 것으로 보이는데, 두보의 어머니가 최(崔)씨였으므로 어머니쪽 친척의 한 사람으로 추측하기도 한다.
빈한한 처지에 급작스럽게 반가운 손님이 왔으니 대접할 것이 변변치 않지만 술상을 차려서 마시는 도중에, 7, 8 연을 보면 옆집 노인을 불러다 함께 마시자고 두보가 제안하는 장면이 묘사되는데, 여기서 상상을 조금 보태자면 빈한하였던 두보를 방문한 손님은 관직에 있어서 생활이 비교적 안정되어 있어서 두보를 방문할 때 좋은 술과 고기를 푸짐하게 싸가지고 왔을 것이라고 짐작할 수 있다. 곳간에서 인심 난다고, 두보가 차린 조촐한 술상만 놓고 대작하다가 중도에 이웃을 불렀다는 것보다는 아무래도 평소에 빈한한 촌부들은 맛보기 어려운, 손님이 가져온 좋은 술과 푸짐한 고기를 함께 들다가 이웃 생각이 나서 음식 가져온 이에게 동의를 구하는 장면이라고 보는 것이 좀 더 자연스러울 수 있다고 생각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