예천 석송령(石松靈)과 황목근(黃木根) 기행
김경식(시인. 기행작가)
예천은 단술 예(醴)와 샘천(泉)이 담겨진 지명이다. 샘이 맑고 물맛이 단술(감주)과 유사하다고 하여 고을 지명이 되었을 정도로 물이 맑은 곳이다. 지명처럼 예천읍 노하리 예천읍사무소 앞에는 주천(酒泉)이라는 우물이 남아 있다.
예천군은 경북 북서부에 위치해 있다. 동쪽은 안동시, 서쪽은 문경시, 남쪽은 상주시와 의성군, 북쪽은 영주시와 충북 단양군과 인접하고 있다. 백두대간으로 이어진 소백산맥이 충북과 경계를 만들며, 북부는 해발 1,000m 이상의 산지가 연속적으로 이어져 있다.
예천군의 명소로 알려진 <회룡포>는 낙동강 지류 내성천이 휘감아 돌아가며 만든 곳(물도리)이다. 맑은 물과 백사장, 주변을 둘러싼 가파른 산, 강위에 뜬 섬처럼 보이는 평화로운 시골 마을이 어우러져 비경을 자랑한다. 이곳에는 장안사가 자리잡고 있으며, 회룡포와 그 주변 경관을 잘 감상할 수 있는 뛰어난 경관 조망 장소인 회룡대 전망대가 있다.
예천의 명소, 삼강은 내성천과 금천, 낙동강이 합류하는 장소이다. 이곳은 주변경관도 운치있으며 사람들의 왕래가 많았던 곳이다. 옛날부터 한양으로 가는 길목이었기 때문이다.
장사하던 배들이 낙동강을 오르내렸고, 문경새재를 가기 전에는 이곳 삼강 나루터를 꼭 거쳐야 했다.
이곳에는 길손들과 보부상의 애환과 정서를 담고 있는 삼강주막이 있다.
500년이 넘도록 이 터를 지켜온 회화나무 아래서 그들의 삶과 옛날 주막의 정서를 담아 이야기를 나누면 의미 있는 답사가 될 것이다.
예천은 이미 오래전부터 인문학적 정서를 담고 있는 곳이다.
고려 의종 때의 문인 임춘(林椿)인데, 그는 가전체소설 국순전과 공방전의 저자로 본향이 예천이기 때문이다. <국순>은 누룩으로 빚은 술을 의미하는데, 이를 의인화해서 방탕한 생활을 하는 사람들을 비판하며 풍자한 소설이다.
그러나 이런 다양한 명소가 있음에도 불구하고, 예천에는 다른 곳에는 없는 위대한 나무 두 그루가 살고 있다.
석송령(石松靈)과 황목근(黃木根)이다.
예천군 감천면 천향리에 살고 있는 석송령(石松靈)은 성이 석(石)이고, 이름이 송령(松靈)이다. 600살 넘게 살면서 키가 10m, 허리둘레 약4m이다. 그러나 그 가지들은 동서 32m, 남북 22m로 300평의 공간에 반원형 모양을 하고서 솔숲처럼 그늘을 제공한다.
인간의 수명과 마음 넓이가 얼마나 짧고 옹졸한지 알려주는 나무다. 예천에 도착하여 가장 먼저 답사하면서 인사를 하는 이유다. 석송령에게 전설같은 이야기가 전한다.
약 600년 전에 큰 홍수로 떠내려 오던 작은 소나무를 어떤 길손이 건져서 현재의 자리에 심었다고 전한다.
600살로 장수하던 이 소나무에 감동을 받았던 이수목(李秀睦)이라는 분이 1928년에“석평마을에 살고 있는 영적인 소나무”라는 의미를 부여하여 석송령(石松靈)이라는 이름을 지어 주었다. 소나무에 이름 정도를 지어 주었던 것으로 끝났으면, 세상 사람들이 그리 알아주지는 않았을 것이다.
그는 자신의 소중한 토지 6,600㎡(2000평)를 <석송령>의 이름으로 토지대장(번호 3750-00248)에 까지 올렸기에 유명해졌다.
박정희 대통령도 집권기에 500만원을 이 나무에 기증했기 때문이다.
그 기금과 토지에서 나오는 곡식을 판매한 돈으로 석평마을에서는 장학금을 조성하여 학생들에게 수여했다. 결국 세계 최초로 소나무가 학생들에게 장학금을 수여하고, 세금도 내고 있는 이 나무는 천연기념물 294호로 지정하여 보호하고 있다.
소나무는 우리 민족의 나무이다. 우리에게 나무 이름의 대명사는 소나무이기 때문이다.
유명한 소나무는 충북 보은의 법주사 가는 일에 서 있는 <정이품송>이다. 세조가 법주사로 가는 길에 연(輦)이 나뭇가지에 걸려 신하들이 걱정할 때, 가지가 저절로 들렸다는 전설같은 이야기가 전하는 나무다. 감동받은 세조는 이 소나무에게 <정이품>이라는 벼슬을 주었다고 한다.
그러나 석송령은 그 의미에서는 결코 정이품송에 뒤지지 않는 나무다.
1928년에 석평마을 주민이었던 이수목(李秀睦)이란 한 농부가 자신의 토지
2000평을 나무에게 상속을 하였기 때문이다.
소나무를 사람보다 믿었던 분이다. 이 나무가 살아 있는 동안‘이수목’이란 분의 이름도 계속 불러지게 될 것이다.
학가산을 주산으로 삼고 있는 예천과 안동의 대표적인 학자 김성일은 소나무의 위대성을 한시로 노래했다. 물론 <석송령>에 관한 한시는 아닐지라도 소나무를 탑보다 더 높게 평가한 것은 의미가 있지 않은가?
君何先達我何遲 (군하선달아하지) 그대는 어찌 나보다 먼저 출세하였는가
秋菊春蘭各有時 (추국춘란각유시) 가을 국화와 봄의 난초는 저마다 자신의 때가 있다네
世人莫道松低塔 (세인막도송저탑) 사람들은 소나무가 탑보다 작다고 하지만
松長他日塔還低 (송장타일탑환저) 소나무가 크게 자라면 탑은 오히려 낮아 진다네.
- 김성일의 한시 長松他日塔還低 (장송타일탑환저) 김경식 번역
예천군 용궁면 금남리(금원마을) 696번지에는 500살이 넘은 팽나무가 살고 있다. 높이는 15m, 둘레는 5.65m이다. 황목근(黃木根)이란 이름을 가진 나무다. 성이 황씨고, 이름이 목근(木根)이다.
석송령보다 많은 토지(12,232㎡ 약 3,700평)를 소유한 부자나무다. 5월이면 누런 꽃을 피우며, 주변을 화사하게 만든다고 하여 성을 황(黃)씨라고 붙였다. 그 자리를 오래 지키며 살아 왔다고 하여 “근본을 지닌 나무”라는 뜻을 담아 이름을 목근(木根)이라 불렀다. 천연기념물 제400호로 지정되어 국가에서도 보호하고 있다.
팽나무는 수명이 길고 크게 자라서 방풍림에 이용하였지만, 우리 조상들은 풍수지리설에 의한 비보림으로 심어왔던 성스러운 나무다.
황목근이 살고 있는 금원마을에서는 100여 년 전부터 성미(誠米)를 모아 공동으로 재산을 모아왔다.
1903년의 <금원계안회의록>과 1925년의 <저축구조계안임원록>에는 평소에 쌀을 모아서 마을 공동체 구성원 중의 누군가에게 어려운 일이 닥칠 때 도와주었다는 내용이 기록되어 있다. 이런 마을의 공동기금은 결국 1939년에 황목근에게 토지를 구입하여 등기(번호3750-00735) 된다.
천향리의 석송령보다 11년 뒤의 일이지만 마을 사람들이 모두 합심하여 동의하였다는 것이 큰 의미를 지닌다. 석송령이 개인의 토지를 기증받은 나무라면, 황목근은 동네 사람들의 동의로 토지를 얻은 존재이기 때문이다.
황목근이 소유하고 있는 터에 마을회관이 건축되어 있을 뿐 아니라 주변 산과 마을의 문전옥답도 나무의 소유다. 황목근 소유의 논에는 동네 사람이 농사를 짓고 매년 쌀 80㎏들이 여섯 가마의 소작료를 내고 있다. 현재 황목근의 예금통장에는 600만이 저축되어 있고, 이 마을 출신 중학생에게 매년 30만원의 장학금이 지급되고 있다. 매년 재산세도 내고 있다.
이를 보은하기 위해 금원마을 주민들은 해마다 정월대보름날에 황목근 앞에서 당산제를 지낸다. 나무 허리에 금줄을 두르고 최대한 예의를 갖추고 제사를 드린다.
나무가 위대한 것은 그 자리를 지키며 오래 살아간다는 것이다.
사람의 수명에 10배를 살면서도 욕심을 부리지 않는 그 나무에 부끄러워 할 줄
아는 것이 사람의 예의가 아니겠는가. 이 땅의 주인은 오히려 인간을 포함한 모든 자연의 생물들이다. 그중에서도 나무는 주인이 될 수 있는 여러 조건들을 가지고 있다.
예천 석송령과 황목근은 세월이 흐를수록 의미 있게 살려고 하는 사람들의 가슴을 흔들면서 소문을 내기에 충분할 것이다. 이 땅의 주인은 오히려 그런 나무들이기 때문이다.
예천 석송령과 황목근과 같은 나무가 많아지면, 이 땅을 사는 사람들의 삶도 더욱 풍요롭고
의미 있는 삶이 될 것이다.
-계간 산림문학 2016년 가을호